오스트리아 카프룬 터널 화재

 


Brandkatastrophe der Gletscherbahn Kaprun 2
1. 개요
2. 사고열차
3. 사고 전개 과정
4. 사고 원인
5. 희생자
6. 사고 이후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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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1월 11일 오스트리아 카프룬의 스키장에서 운영되는 Funicular형 강삭철도에 화재가 발생해 155명이 숨지고 12명만이 생존한 화재사고다.

2. 사고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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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에 처음 선보인 Gletscherbahn Kaprun 2는 카프룬 꼭대기 역에 설치된 케이블도르래로 움직이는 Funicular 철도였다. Funicular는 강삭철도의 형태 중 하나다. 이는 두 대가 케이블로 연결되어 균형을 이루어, 한 열차가 올라가면 다른 열차가 내려오는 방식이다. 카프룬2는 산 내부의 30도 경사를 시속 25km로 올라가는 속도를 자랑했다. 1974년 최초 개통시에 도입된 차량은 철제에 유리 창문을 단 다소 투박한 차량이었으나, 1993년에 윗 사진과 같이 충격방지 아크릴수지로 된 창문을 달고, 알루미늄 차체의 매끈한 모습을 갖춘 차량을 새로 도입했다. 두 차량을 이은 열차는 8개 객차로 나뉘었고, 맨 앞과 맨 뒤 기관실에는 운행요원이 탑승해 열차 앞뒤를 바꿔 아래 위로 이동했다. 3.8km 남짓한 선로를 따라 움직이기에 열차라고 하기엔 엔진과 연료탱크가 없는 것이 특징이지만, 자잘한 제어를 위해 유압장치가 장착되었다. [1] 당연히 기관사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단지 운행요원이 열차 앞 칸에 탑승하여 문을 조작하거나 기타 운행관리를 했다.
선로는 총 3,800m 중 산 아래 역을 포함한 600m는 지상에 있었고, 나머지 구간은 모두 3.2km의 장대터널 속의 지하구간으로 건설되었다. 산 위의 스키 센터에 있는 역도 건물 지하에 위치하고 있었다.
개당 4명이 최대수용인원인 케이블카와는 달리 최대수용인원이 180명이었고, 속도도 케이블카가 3.8 km를 13분만에 가는데 반해 퍼니큘러는 9분만에 갔다. 덕분에 사고가 일어나기 전만 해도 매일 승객 1천여 명이 이용하는 인기 열차였다. 해당사고로 인해 현재는 폐쇄되었고 역과 열차들만 그대로 남아 관광객들의 관람거리가 되었다.

3. 사고 전개 과정


그 해도 겨울 시즌 개막을 맞아 '킷츠슈타인호른'이라는 만년설이 있어서 4계절 내내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었던 카프룬 마을에 스키어와 스노우보더들이 몰렸다.
사고 당일이었던 2000년 11월 11일, 오전 8시 57분, 167명의 스키어들이 산 정상으로 가기 위해 이 퓨니큘러에 탑승했다. 오전 9시 2분, 통제실 스텝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차는 계곡역을 나갔다. 얼마 후 열차는 지상구간인 600 m 남짓한 계곡을 지나 산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터널 속으로 들어섰고, 9분 뒤 계곡 상부에 도착했다.
그런데 열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가 열차 내부에서 연기가 목격됐다. 후미 기관실에서 피어오른 연기였는데 연기가 조금씩 진해지자 승객들은 당황하였다. 문제는 운행요원 쪽으로든 통제실 쪽으로든 화재를 통보할 연기경보장치가 '''설치되지 않았고,''' 따라서 내부상황을 밖에서는 몰랐다. 더군다나 차량이 밀폐구조라 안에서 아무리 소리쳐도 '''밖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승객들 중에는 핸드폰을 꺼내 외부에 통화로 알리려 한 사람도 있었으나 하필 열차가 곧 터널 내로 들어가는 구간이라 '''전화가 끊겼다.'''
9시 5분, 터널 내부 600 m 지점에서 열차가 갑자기 멈춰섰다. 통제실은 운행요원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지만 운행요원이 세우지 않았으므로 그 역시 원인을 몰랐다. 불길이 번져 뒷칸에 독성연기가 가득 찼으나 '''비상수동개폐장치 같은 건 없어서''' 승객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그대로 독성연기를 들이마셨다. 승객들은 앞칸으로 몰려갔고, 몇몇 사람들은 탈출하겠다고 스키폴로 이중 창문을 깨려고 했다. 하지만 창문이 충격방지용 에폭시 재질이라 '''쉽게 깨지질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어서 창문을 깨려고 노력한다.
9시 8분, 열차 운행요원이 열차 내에 화재가 발생했음을 확인하고 통제실에 알렸다. 통제실에서는 문을 열고 승객들을 내보내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불이 터널을 지나는 전기 케이블을 태워버리면서 정전이 되는 바람에 '''통신은 끊겼고''', 출입문을 열려고 해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행히 열차 후미칸에 탑승했던 '토르스덴 그래틀러'라는 승객[2]이 결국 창문을 깨자, 그곳으로 아직 움직일 수 있는 승객들이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독성 연기에 질식되어 의식을 잃었거나 사망했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패닉에 빠지고 연기를 많이 마셔서 탈출이 쉽지 않았다. 토르스텐은 과거 불이 났을 때 그랬듯이 터널 아래로 나아갔고, 탈출에 성공한 다른 승객 12명에게도 아래로 가야 한다고 알렸다. 토르스텐을 비롯한 승객들은 아래로 향했고 다행히 터널에는 비상계단이 있었다.
운행요원이 마침내 출입문 잠금장치를 풀자 의식을 잃지 않은 승객들은 출입문을 열었다. 승객들은 속속 탈출했으나, 이들은 후미칸에서부터 타올라오는 불길을 피해 터널 위쪽으로 향했다.
9시 20분, 소방관 500여 명, 헬기 22대, 구조차량 100대가 도착하고, 탈출한 생존자 12명을 헬기와 구급차로 이송했다. 하지만 열차가 있는 터널은 산중턱에 있어서 소방관들이 그곳까지 선로를 따라 걸어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칫하면 화재로 열차를 고정하는 케이블이 녹아서 끊어질 경우 열차가 그대로 굴러 내려와 소방관들을 덮칠 수 있다는 예측 때문에 결국 30분이 지난 후 들어가서 구조하는 방법을 포기했다. 한편 2.5 km 밖 산 정상역의 근무자가 연기가 건물에 스며들고 정전까지 발생해 구조요청을 했다. 역무원들은 전기를 복구하려다가 짙은 독성연기가 들어차자 비상문으로 대피했다. 이후 연기가 사람이 꽉 차있었던 쇼핑몰에까지 차오르고 쇼핑몰 직원들과 손님들이 탈출하지만 아직 4명이 남아있었다.
10시 10분, 첫 구조대가 헬기로 산 정상에 도착했다. 소방관들은 장비를 갖추고 연기가 가득찬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된 상태라 소방관들은 최악의 상황까지 각오했다. 10시 16분 건물 내부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근무자 한명을 발견하고 구조했다. 앞이 안보이는 와중에 나머지 3명도 찾으러 나섰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사망한 뒤였다.
한편 연기는 점점 심해지고 열기 또한 갈수록 강해져서 터널 안에 갇힌 승객 149명의 구조는 점점 늦어졌다. 12시, 특수장비를 갖춘 소방관 팀이 둘씩 출동해 터널안의 생존자를 찾으러 나섰다. 내려오던 열차에 닿은 한 팀은 다른 열차에서 운행요원과 승객 한 명의 시신[3]을 발견했고, 이후 열차에 탑승했던 149명이 '''모두 사망'''했다는 보고를 한다.
사망자는 총 155명이었으며, 생존자는 열차 창문을 깨고 탈출해 밑으로 대피한 '''12명이 전부'''였다. 불 때문에 시체훼손이 너무 심각해 신원을 확인하고자 짐에 붙은 머리카락 등으로 DNA 대조를 해야 할 정도였다.

4. 사고 원인


지역 검찰청에서 사고원인을 조사하라고 지시하자, 감식 조사관들은 발화지에서 화재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은 다른 열차[4]를 끌어 올렸다.
조사 초기에는 런던 타임스에서는 몇몇 스노우보더들이 열차 내부에서 폭죽을 터뜨려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의견을 비롯해 그 당시 화재 원인으로 추정되던 모든것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초반에는 방화의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당시 맨 뒤 조종실은 비어 있어, 불을 지르려면 출발 전 계곡역에서 3분간 정차했을 때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만약 그랬다면 불을 낸 사람 역시 안에 갇혀서 사망했을 것이다. 게다가 생존자 진술에 따르면 초반에는 담배 연기 정도로 별것 아니었다고 하므로 방화라고 보기 힘들었다. 이에 따라 방화설과 폭죽으로 인한 화재설은 폐기되었다.
조사관들은 기관실의 구조에 주목하였다. 후미 기관실의 전선이 잘못돼 불이 났는지 실험을 해봤지만 1993년 열차 개량 때 전선을 자기 소화성 물질을 입힌 것으로 전면교체해 불이 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사관들은 1993년 당시 조종실에서 운행요원들이 추운 겨울동안 따뜻하게 있을 수 있도록[5] 전기 팬히터를 설치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팬 히터는 연기가 처음 목격된 밑부분에 있었고, 조사팀들은 열차 히터에서 결함을 찾아냈다. 히터는 차량용이 아닌 가정용이었다. 또한 열선망이 구부러졌는데 이것이 플라스틱 케이스에 끼이면 불이 날 수 있다는 판단하고 실험해보자 5대 중 4대에서 불이 났다. 다만 연료가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불이 알루미늄 차체가 녹아내릴 정도로 강렬하게 타올랐는지 알아내야 했다.
조사를 진행하던 중 조사관 한 명이 '''선로에 떨어진 기름'''을 밟고 넘어졌다. 좀 더 알아보니 기름은 터널 입구까지 이어졌다. 액체를 실험실로 보내 분석한 결과 유압유로 열차 브레이크용 기름이며, '''가연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조사 결과 유압 시스템 또한 1993년 개량 당시 도입되었는데, 기름 130 리터가 열차 내 61 m짜리 관을 따라 흘러 브레이크를 작동하는 구조였다. 기름은 유압밸브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서 밖으로 샜다. 그런데 유압밸브와 히터는 서로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고 어쩌다 이 둘이 만나서 큰 화재를 일으켰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조사팀은 기관실 조종대에 유압계량기가 있고, 계량기의 기름관이 히터의 바로 옆에 있음을 발견했다. 만일 이 기름관에서 기름이 샐 경우 바로 히터에 기름이 닿게 된다. 이후 히터에 유압유가 떨어져 불이 붙고, 불이 기름관을 녹이면서 기름이 왕창 새고, 이에 불이 붙어 작았던 불이 본격적인 화재로 번지게 된 것으로 밝혀졌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기름이 일정량 이상 샐 경우 자동안전장치가 열차에 브레이크를 걸어 열차를 세우도록 만들었는데 하필이면 이게 '''터널 안에서 작동하는 바람에''' 희생자가 더 증가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열차가 경사진 공간에서 멈추면서 유압유가 아랫부분, 즉 화재가 발생한 열차 후미 부분에 고였고, 때문에 더욱 불이 커졌다. 더군다나 조사결과 당시 관광객들이 착용하고 있던 스키부츠, 스키, 방한복, 모자 등은 불이 붙으면 섭씨 800도 이상으로 타면서 유독가스 까지 내뿜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상황에서 운행요원이 수동장치와 내장배터리를 이용해 문을 여는 데 성공하긴 했으나, 원래 화재 때는 연기가 위로 올라가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대피해야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래로 갈 경우 불과 마주할 것이 무서웠고, 위쪽으로 가는 편이 아래로 가는 것보다 터널을 빠져나가는 데 더 빨랐으며, 스키부츠를 신고 있었기에 경사진 대피로를 내려가기가 불편했던 것도 일조했다. 그래서 승객 대부분이 위로 대피했다.
그 상황에서 열차 뒤편에서 나던 불이 문이 열리면서 갇혀 있던 기체와 갇혀 있던 불이 문이 열리면서 생긴 공간을 통해 한꺼번에 나가는 '''굴뚝 효과'''를 일으킨 것이다. 불과 연기는 갑자기 위쪽을 향해 확 치솟았고, 결국 위쪽을 향해 탈출하고 있던 '''모든''' 승객들은 열차로부터 길어야 142 m 이상을 대피하지 못하고 전부 질식, 화염에 휩쓸려 사망했다.
안전불감증이 한 몫 했다는 결과도 나왔다. 엔진과 연료통도 없어서 불이 나지 않으리라 생각해 연기 감지기는 설치하지 않았고, 그나마 있었던 소화기도 잠긴 기관실에 있었는데 기관실에는 사람이 없었으며, 운행요원이 있던 기관실은 불이 난 기관실과는 정 반대편에 있어서 운행요원은 연기가 보이기 전까지는 불을 알아채지도 못했다. 거기다 승객이 요원에게 연락할 수단도 없었고, 비상 브레이크도 설치하지 않았다. 거기다 기존에 있던 안전 수칙은 1974년 최초 개통시에 도입된 차량[6]에 맞춰 만든 것이어서 1993년에 두 번째로 도입된 차량에는 알맞지 않았다.

5. 희생자


사고로 희생자 총 155명이 발생했는데, 그중 오스트리아인이 92명, 독일인이 37명, 일본인이 10명, 미국인이 8명, 슬로베니아인이 4명, 네덜란드인이 2명, 영국인 1명, 크림 공화국인 1명이었다.
독일인 중에는 당시 1998년 나가노 올림픽 • 1999년 하슬리베르크 프리스타일 스키 세계선수권 대회 프리스타일 스키 금메달리스트였던 잔드라 슈미트(Sandra Schmitt), 14살로 주니어 챔피언이었던 세바스찬 가이거와 그의 팀 멤버 3명, 코치 2명이 있었다.
미국인 중에는 육군대령이었던 마이클 구드리지와 아내, 아들 2명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 스키 브랜드 주최로 스키 캠프 참가를 했는데 10명 전원 사망하고 말았다.[7] 그 중에는 후쿠시마 현 이나와시로정립 이나와시로중학교(猪苗代町立猪苗代中学校) 스키부소속 운동선수 사제 토모히사(佐瀬智寿)도 있었는데, 그의 시체가 열차로부터 142 m 떨어진 지점에 있었다.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다.

6. 사고 이후


사고 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틀 간의 애도기간을 선포했다. 그 뒤 업체 관계자 16명이 155명을 죽게 한 과실치사로 기소되어 2002년 6월 19일 재판이 열렸으나 2004년 2월 법원은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를 선고했고 유족들은 비탄에 빠졌다.
이후 알프스 전역에서 Funicular와 유사한 열차에 새로운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승객과 운행요원이 직접 연락이 가능한 인터콤과[8] 비상시 승객들이 수동으로 문을 열 수 있는 장치, CCTV가 설치되었고, 창문 옆에는 비상시에 창문을 깨기 위한 망치가 설치됐다. 또한 터널에서도 핸드폰으로 통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Funicular는 폐쇄되었고, 케이블카의 속도를 더 빠르게 바꾸었다. 산 아래 역과 터널 바깥 선로는 사고 이후 약 10여년간 남아 있다가 2014년에 철거되었다.
사고 4년 후인 2004년 11월 11일,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관이 Funicular 옆에 문을 열었다.

[1] 후술하겠지만 '''이것이 재앙의 불씨였다.'''[2] 20년간 마을 자원'''소방관'''으로 일해 왔다고 한다.[3] 올라오던 연기에 질식했다.[4] 화재로 인해 전소한 열차를 터널에서 잘못 꺼내다가는 자료가 파손될 상황이었다.[5]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내려갔다.[6] 철제에 유리창문이었고 히터도 없어서 화재위험이 적었다.[7] 6명은 사제 토모히사와 포함한 후쿠시마 현 이나와시로정립 이나시로중학교 스키부이고, 2명은 게이오기주쿠대학 스키부, 그리고 일반인 2명이다.[8] 이 사건에서도 운행요원과 불이 난 곳의 승객들이 서로 연락할 수단만 있었으면 정전이 되고 너무 늦기 전에 문을 열어 사람들을 탈출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