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1. 개요
日本人 (にほんじん) | Japanese people
'''일본인'''은 좁은 뜻으로는 일본 국적을 가진 사람, 넓은 뜻으로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적·정신적 문화와 정서를 공유하는 일체의 집단을 총칭한다. 대한민국과는 지리적으로 몹시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에 중국인과 더불어 이웃 국가의 사람들이라 볼 수 있다.
2. 기원과 특성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1]
고고학적·인류유전학적으로 도래인은 고대 한국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세키네 히데유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2]"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왜곡하는 일본 학계의 의식이 한일 계통 연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국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한반도와 다른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패전 후 계통 연구에 큰 장애물이 됐다"
"1970년대 이후 학자들이 일본인 기원 모델을 내놓았지만 그들조차 도래인(渡來人)의 위상을 가능하면 과소평가하고 단순히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컸다"
세키네 교수는 "일부 학자는 도래인이 시베리아·만주에서 한반도를 뛰어넘어 일본 열도로 이주했거나 멀리 중국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석한다"고 말했다. 왜곡된 형태로나마 한국인과의 직접적 관계를 회피하려고 고안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 세키네 교수의 분석이다.
"인류유전학적으로도 도래인은 분명 '고대 한국인'이 맞다"며 "일본 학계가 한일 간에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적어도 혈연관계만큼은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여전히 일본 학계 연구자들이 왜곡된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몇몇 뜻있는 학자들은 학계의 냉대에도 꿋꿋하게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며 "과거 짧은 시간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졌듯이 머지않아 한일 계통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찾아오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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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동양어문학과 교수, 2016년
일본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이 주류가 되어 형성된 현대 일본인(야마토 민족) 외에 일본 열도 선주민 조몬인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족[3] 이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본 정부에서는 그들을 일본인으로 인정하는 방침을 발표하였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일본에 흡수되었거나 정착한 류큐인(오키나와 사람들), 재일 조선인(한반도 출신)들도 일본에 살고 있다.
일본 열도를 시대 별로 살펴보면, 선사시대에 조몬인이 일본 열도에 정착하였으나(조몬 문화)[4][5] , 기원전부터 한반도에서 이주한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이 조몬인을 밀어내고 현재의 일본인(야요이 문화와 그 이후)이 되었다는 학설이 정설이다. 일본 내에서도 고고학적인 연구와 인류유전학적인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일본의 전신인 야마토(야요이 계통)가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한반도의 선진문물을 발빠르게 도입해서 일본 내에 존재했던 수많은 연맹-부족국가들을 복속시켰고, 추가적으로 도래인들을 대거 유입시키면서 인구를 증가시켰다는 역사적 기록도 엄연히 존재한다.
본토 일본인들의 유전자 검사 결과,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 밝혀졌다.(2012년 11월 도쿄대 연구발표) 또한 조몬인의 직계 혈통인 아이누족과 본토 일본인 사이의 유전적 유사성보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 유사성이 더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6][7]
2017년의 고인류 게놈 연구에서도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아시아에서도 유전적인 유사성이 가장 높다는 결과가 나왔다. 한국인은 만주족(여진족), 일본인과 가장 유사했으며, 단일민족으로 봐도 될 정도로 유전적 내부 동일성이 매우 높았다.[8]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간혹 일각에서 초기 도래인으로 추정되는 야요이인이 중국에서 일본을 향해 다이렉트로 왔으며 한반도와는 전혀 연관이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주장은 이미 위의 제시된 유전적 유사성 학계 발표만으로도 깔끔히 반박되지만 더 디테일하게 반박하자면 중국계 야요이인의 주요 이동경로 세 가지인 1. 중국 화남지방에서 전파, 2. 화중지방에서 전파, 3. 산둥반도에서 전파. 이 세 가지 모두 현재 학계에선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선 전파가 불가하다는 것이 학계 주류이다. 특히 산둥반도에서 전파된 경우는 지리상으로 한국의 황해와 바로 맞닿아있고 육로로도 한반도 북부와 직접 연결되어 있기에 한반도를 절대적으로 거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야요이 시대가 기원전 5~3세기 경에 시작한 시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항해술과 선박 제조술이 당대 기술력을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고도로 발달하여 한반도를 수백년간 황해~남해~동해안을 쭉 거치며 절묘하게 계속 피해갔다는 지나치게 비약적인 주장을 하지 않는 이상, 한반도를 통해 이주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는 말이다. 참고로 일본이 그런 선박기술을 그 옛날 청동기 시대에 갖고 있었다는 사료는 전무하다. 즉, 한반도 토착민이 도래인으로서 일본 열도에 진출했다는 명확한 경로를 유전적 유사성을 넘어서 역사적, 지리적으로도 확실히 입증해준다.
언어학적인 측면에서 현대 일본어는 류큐어를 포함하는 일본어족(Japonic languages)에 속한다. 현대 일본어족은 다른 어족과 연관성이 없으며, 고립어에 가까운 속성을 띄고 있다. 그래서 그 기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현재는 한반도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사실상 정설 취급받고 있으며, 여러 종류의 '한반도 기원설'이 존재한다. 한반도 기원설 중 대표적인 학설로는 한국어 동계설, 부여계 어족 동계설, 한반도 중남부 기원설 등이 있다.
한국어 동계설은 일본에서도 에도 시대부터 있었던 유서 깊은 주장이며, 주로 한국어와 일본어의 매우 비슷한 문법에 그 근거를 둔다.
부여계 어족 동계설은 재러드 다이아몬드,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Beckwith) 등이 주장하는 학설로 일본어의 일부 수사가 백제어, 고구려어와 비슷한 것을 두고 부여-고구려-백제-일본를 하나로 묶어서 부여어족이라는 하나의 어족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유전적 유사성과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교류에 대한 고고학적 정황이 있다.
한반도 중남부 기원설은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보빈이 주장하는 학설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는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북쪽에서 내려온 고대 한국어족 집단에 밀려 흡수되었거나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도래인이고, 이 도래인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시대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 학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고,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같은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자칫 오해할 수도 있지만,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학설로도 볼 수 있는데, 현대 일본인(야마토 민족)은 고대 한반도에서 이주한 민족이라는 학설을 더욱 탄탄하게 뒷받침해주기 때문이다. 즉,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류 학설처럼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이주한 것이 옳다는 학설이다.
일본인들은 키가 작다는 인상이 있는데 이는 한국인과 비교했을 때는 사실이다. 2019년 국제적인 만 19세 남녀 평균 신장 조사로는 한국 남성 175.5cm, 한국 여성 163.2cm이었고, 일본 남성 172.1cm, 일본 여성 158.5cm이었다.# 또한 일본인은 상대적으로 작은 사람이 더 눈에 보인다. 예를 들어 181cm 이상이 기준일 때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많고, 165cm 이하가 기준일 때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많다. 그리고 한국은 본래 남한 지역보다 큰 평균 키를 가졌던 (지금은 영양상태 때문에 아니지만) 이북 지역과 단절된 걸 감안하면 한국과 북한이 통일하고 북한 주민들의 영양상태가 안정되면 더 차이가 날 가능성이 높다.[9]
일본 서브컬쳐 캐릭터들의 키나 일본 아이돌들의 키도 한국인이 볼 때 꽤나 작은 편이다. 각종 서브컬처에서조차 여성 캐릭터들의 프로필만 봐도 한국과는 달리 170cm 이상의 캐릭터는 거의 드물다. 현실에서는 평균 키 170cm 이상의 여성 아이돌 그룹이 한국에서는 종종 있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업계를 통틀어서도 보기 드물다. 남성도 서브컬처의 남성 캐릭터나 현실에서 남성 아이돌들의 신장을 살펴보면 172cm 내외가 다수로 티가 충분히 날 정도임을 알 수 있다. 다만 이는 다수 소비자인 일본인들의 취향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이는 문화적인 부분의 영향도 있는데 전 세계적으로 봤을때도 일본은 키나 체격이 있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슬림한 체형의 미소년/미소녀 계열의 연예인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실제로 일본 연예계 전역을 둘러봐도 근육질의 인기 남성 연예인이나 육감적이고 늘씬한 글래머 인기 여성 연예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다소 근육질이거나 체격이 있는 연예인을 일본 방송에서 타 출연진들이 신기하게 바라보는 리액션이 종종 있다. 미소년 계열 연예인을 선호하는 한국조차도 일본에 비하면 확실히 체격적으로 더 두터운 편이다.
그리고 골격이 한국인의 뼈보다 일본인의 뼈가 더 얇고 체중도 평균적으로 적게 나가다 보니 체격적으로 더 왜소해보이는 경향이 있고 한국인보다 키가 작은 사람이 더 많기 때문에 체감상으로는 한국인보다 훨씬 작게 느껴질 수 있다.[10]
일본인의 키가 한국인의 키를 일정 기간 초월할 수 있었던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다. 일본이 한창 경제 발전하고 있던 시절에 태어난 일본인들과 6.25 전쟁 이후 배고픈 시절에 태어난 한국인들의 키를 비교해보면 동세대의 일본인들의 평균 신장이 더 크다. 이런 키의 역전 현상은 2010년대 현재 50대부터 90대까지 수십 년 넘게 지속되었다. 예를 들어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2008년 한국 산자부와 일본 문부과학성통계 기준으로 당시 일본인 40대 평균 키는 171.1cm이지만 한국인 40대 평균 키는 168.6cm이다. 50대는 일본은 168.8, 한국은 166.1. 사실 성인 50대 - 90대까지 인구 통틀어서 키 평균을 내보면 해방 이후 2011년까지 계속 꾸준히 일본 남성이 한국 남성보다 키가 컸다.[11] 한국 남성이 일본 남성 평균 키를 다시 역전하기 시작한 50세 이하[12] 를 제외하고는 그 윗세대는 꾸준히 일본 남성 평균 키가 한국 남성보다 컸기 때문. 결국 경제 성장과 그에 따른 후천적 요인이 유전적 요인을 뛰어넘은 셈이다.[13]
그렇지만 그 일제강점기조차도 한국인들의 신장이 더 크다는 자료는 많다.
자료의 1937년이면 일제의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쌀 수탈을 겪을 대로 겪었다는 것인데도 신장이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의 자료 뿐만 아니라 구글링을 조금만 해보면 굶어서 야윈 조선인 징용자와 상대적으로 잘 먹었을게 뻔함에도 조선인 징용 노동자보다 키가 작은 일본군 조종사가 같이 서 있는 사진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를 해석해본다면 안 그래도 영양 상태가 나빴던 터에 6.25 전쟁 후에 한국인들은 경제적 문제로 신장의 상승이 뒤쳐졌던데 비해 일본인의 영양 상태가 발 빠른 경제 성장 덕분에 풍족해져서 한 동안 평균 신장에서 앞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화 국가 중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160cm에서 172cm로) 가장 많이 자랐다고 하니까. 경제 성장이 이뤄지고 영양이 충분하다 못해 과잉이 된 지금에 와서는 한국인의 20대 평균 신장이 일본인의 20대 평균 신장보다 더 크다. 경제력으로 인한 후천적 격차가 사라지자 다시 한국과 일본 양측의 본래 신장이 제자리를 찾아간 셈이다.
일본인들은 치열이 고르지 못하거나 덧니가 난 사람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오히려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다. 최근에 들어서 미국, 한국과 같이 교정을 선호하는 쪽으로 바뀌는 추세이긴 하지만 몇년전만 하더라도 일반인뿐만 아니라 치열이 고르지 못한 연예인들조차 치아교정, 라미네이트와 같은 미용 목적의 치료를 대부분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런 취향이 방송매체, 영화등을 통해 전달되면서 한국에 비춰지는 일본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덧니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했다. 덧니를 좋아하는 이유는 친근함, 귀여움 등이 있다. 덧니로 유명한 연예인은 이타노 토모미가 있다.
2.1. 일본 문명의 근본은 조몬? 야요이?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 문명의 근본은 야요이인(도래인 계열)이 명백하다.''' 유전적 연구 결과를 떠나서 유물과 기록, 문화와 언어가 명백하게 증명하는 사실이다.
일본 열도가 야요이 시대에 이르러 문명의 급격한 발전이 있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조몬 시대엔 관개 농업조차 제대로 못 하고 석기를 사용하다가 야요이 시대에 와서 농업은 물론 순식간에 철기까지 능숙하게 다룰 정도로 동떨어져 있다. 애초에 야요이 시대가 고고학적으로 크게 주목받은 이유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나타난 발전 양상이 비정상적으로 급격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14]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과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여기에 유물과 역사적인 사료로 대변되는 증거는 더욱 더 야요이인이 주류였다는 걸 증명할 뿐이다. 원래 유전자 관련 자료는 인구 진출의 흐름을 보는데 도움을 주는 통계적 데이터로서 보조적인 역할일 뿐, 엄연히 한 나라의 역사나 문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유물과 언어다. 실제로 유전자 조사의 경우 그것 자체만으로 역사를 정의내린다기 보다 '이러한 유전적 데이터가 해당 지역에 있으니 당시 기록된 실제 사건이나 유물, 언어권의 변화와 연관이 있어보인다.' 정도에 그친다.
일본이 헤이안 시대를 거치는 동안 조몬계 집단(에조)은 부족 사회인 채로 존재했으며, 반복되는 일본의 압박에 지쳐 투항하고 복속하는 일이 많았다. 심지어 일본이 재정적인 문제로 에조 정복을 멈춘 시기에도 일본에 복속하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생각한 에조 지역의 부족들(에미시)이 자발적으로 복속하는 일이 상당히 많아졌다.
조몬계(에미시)가 자발적으로 복속한 이후, 이름, 복장, 풍습, 심지어 언어까지 바꾸고 사회속으로 스며들면서 그 권역내에서 후손을 퍼뜨리며 살았다면 당연히 야마토측에선 쓸데없이 국력을 소모해가면서 부계를 절멸할 필요가 없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대우가 맘에 들지 않아 몇 차례의 폭동이 있긴 했으나 야마토측이 강경책과 회유책을 동원하여 최종적으로 진압하였고 완전히 스며들었다. 귀화 이후에도 일본인(야마토)들의 인종차별과 분리정책으로 인해 수 세기동안 극빈층, 내지는 노예격으로 전락한 에미시가 많았다.
또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도래인이 중심이 된 야요이계가 문화적으로 동부의 조몬계를 완전히 흡수한 시점은 엄연히 석기시대나 먼 옛날인 기원 전의 고대가 아니다. 위에 언급된 것처럼 헤이안 시대까지만 해도 조몬인 계통 집단은 에조(에미시)라 불리며 열도 동북부 지역에 부족 사회로 존재했으며 시기적으로 따졌을 때 당시 한반도는 남북국 시대 말에서 고려 초기였다. '과거로 갈수록 부계가 전멸하고' 등의 의견은 아주 오래된 상고시대라면 몰라도 이미 고전후 시대에 들어서 당시 사건들을 기술하는데 익숙하고[15] 본인들의 왕국도 건설한지 오래인 그 시대의 일본과는 거리가 먼 이론이다.[16]
시대적인 착오도 그렇지만 상당수의 조몬계 세력(에미시)들이 자발적으로 귀화한 기록, 심지어 그림들까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많이 간과한다. 애초에 노동력은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명분이 있는 게 아니라면 학살은 필요한 비용과 노동력을 고려했을 때 비효율적이다. 무엇보다 자발적으로 복속했는데도 죽여버린다면 전혀 복속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흔히 쇼군이라 부르는 정이대장군은 동북부 지방의 오랑캐(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 천황으로부터 군권을 이임받은 무가의 수장이었다. 정이대장군은 오랑캐 정벌을 위해 마련된 군사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데다, 서일본의 천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이런 이유로 후에 둘의 권력 관계가 뒤집힌 것이라 보고 있다.
그리고 조몬인의 언어적·혈통적으로 직계 후예인 아이누인은 일본인(야마토 민족)과 문화적으로 '''굉장히 멀었다.''' 1869년 보신전쟁에서 아이누족이 주축이 되는 에조 공화국이 멸망하고 나서야 홋카이도가 완전히 일본 제국 치하에 들어갔으며 당시 일본 제국에서는 아이누를 구 토인(旧土人)이라고 본토인들과 완전히 구분해서 불렀다. 이게 불과 100여년 전인 19세기 중후반의 일. 이렇듯 조몬계의 경우 열도내에서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잃고 최북단으로 밀려나면서 단절이 되어버린 것.[17] 일본어와는 완전히 별개의 언어인 포합어 체계의 아이누어 원형을 유지한 채로 지금껏 사용한다는 것도 가장 큰 예시이다.[18]
참고로 도호쿠벤 등의 문서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아이누어가 과거 조몬계 언어의 직계, 또는 가까운 친족 언어란 것은 역사적으로 명확하다. 도래인의 진출이 비교적 늦어진 도호쿠 지역의 경우, 조몬계 언어가 시기상으로 중세 초까지 사용되었고 이들 언어에서 차용된 일본어의 몇몇 어휘들이 현대 아이누어 어휘와 비슷하다는 것이 확인 가능하다.[19] 더 나아가서 조몬계 언어와 아이누어의 직속 관계를 여러 학자들의 중론을 빌어 유네스코에서 공인한 바 있다.
일본에서 절대 주류를 차지하는 일본어의 경우 조몬계 언어의 적통인 아이누어와는 역사 시대에 조금씩 주고받은 어휘 몇몇을 제외하면 기초 어휘, 수식 체계 그리고 문법에 이르기까지 싹 다 완전히 다른 별개의 언어로 분류된다. 아이누어의 특징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 언어는 계통적으론 고립어이긴 하지만 문법상으론 포합어 체계의 이누이트어나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관계가 더욱 가깝다. 기초 어휘는 다르지만 문법의 유사성의 경우 같은 교착어에 속하며 형제 언어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일본어는 한국어와의 관계가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일본어의 기원은 한반도라는 것이 사실상 학계의 정설이다.(한반도 기원설 안에서도 여러 주장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반도에 기원한다는 것은 일맥상통한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알렉산더 보빈, 재러드 다이아몬드, 크리스토퍼 벡위스(Christopher Beckwith) 등이 있다.
한 마디로 조몬계의 일부가 열도의 패권을 이끌었다면 유럽의 인도유럽어족이나 중국 대륙에서의 중국티베트어족, 아나톨리아 반도의 터키어의 예시처럼 아이누어의 형제뻘 언어가 분명히 주류여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그러지 못했다.[20] 오히려 조몬계가 인종적 주류를 차지하고 있던 열도 최남단인 오키나와 제도 지역마저 확장되어 가던 일본어족의 영향을 받아 구스쿠 시대에 이르러 류큐어라는 일본어의 친척뻘 언어를 끝내 사용할 정도로 조몬 계통의 패권이 일본 열도 내에서 완전히 밀리는 모습은 역사적으로 증거가 정말 많다.[21][22]
고사기나 일본서기로 대표되는 육국사들의 내용을 현대 시각에 맞게 정리해보면 혼슈 서부와 규슈 북부 지방에서 퍼지기 시작한 도래계 야마토 민족이 늦어도 4세기경에는 자체적인 정체성을 정의내렸다는 것이 기록으로도 확인되는 공통적인 중론이다. 오히려 너무 경도되어 임나일본부설이란 터무니 없는 주장을 할 정도로 일본인에게 있어서 야마토의 정체성이란 상당한 편이다. 한국인으로 치면 고조선과 삼국시대에 필적할 정도.[23] 디테일한 접근과 특정적인 사료가 충분치 않다면 '다른 문화권에서도 이랬으니 대략 이런 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라는 추측에만 머물 수 밖에 없다.
혐한 성향이 짙은 인터넷 이용자 중에는 조몬인에 대해 이상한 집착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조몬인을 밀어내고 일본 열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야요이인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 계통이라는 것이 분명하기에 인지부조화가 오기 때문이다. 조몬인은 아이누인의 직계 조상이지 절대로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거나 문명, 문화의 근본이라고 볼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인을 '''미개한 토인'''[24] 이고 '''인간의 덜 진화된 모습'''을 하고 있다며 차별했던 역사를 생각해보면 이제 와서 조몬인을 찬양하는 건 너무 속내가 보이는 모습이다. 심지어 아이누인이 조몬인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3. 인터넷에서 떠도는 일본 관련 루머
4. 국민성과 문화
- 1. 와(和) 문화
외국인이 보기엔 '친절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지나치게 소심한 사람' 등 긍정적으로 비춰지지 않는 성격이다. 하지만 반대로 일본인들 입장에서 생각을 하면, 일본에 관광을 온 외국인들이 길거리에서 자기 나라인 것처럼 큰 소리로 떠든다든가 쓰레기를 버린다든가 술을 벌컥벌컥 마셔서[26] 와(和)를 깨는 행동을 하면 깜짝 놀라고, 나쁘게 본다. 기분이 나쁘다고 외국에 있을 때처럼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면, 공포에 질려서 도망가기도 한다.
심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별 것도 아닌 행동을 무심결에 했다가 경찰차 두 세 대가 오기도 하는데,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래서 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일본에 관광을 왔다가 법적으로 작게라도 연루되면 영구적으로 일본 여행을 올 수 없게 된다. 이것은 강제 추방인데, 일본은 관광객이 문제를 일으키면 강제 추방을 시키고, 영원히 일본에 발을 붙일 수 없게 법적인 조치를 한다. 시간이 흐르면 용서해 준다거나 하는 것이 없이 일본인들은 그 사람들이 이미 기회가 있었는데 깨뜨렸다고 생각한다.
어제까지 죽창을 들고 덤비던 일본 병사가 가이드를 맡아서 자신들을 친절하게 안내하자 한동안 불안해했다는 미군 병사들의 일담에서도 볼 수 있듯, 외국인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에는 꽤나 불가사의한 국민성이다. 일본인들의 이러한 국민성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서양인들은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일본인론 (日本人論)이라고 해서 일본이라는 나라와 사람에 대한 모든 것들 (사회학, 역사, 지리학, 생물학, 언어학 등등)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한국과 중국, 대만, 홍콩, 마카오 등 같은 동양권 사람들이 봐도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국민성이다. 아니, 심지어는 같은 일본 내에서도 상대적으로 감정표현이 솔직하고 밝다는 인식이 강한 오사카나 후쿠오카 지역 주민들도 자기 나라 특유의 폐쇄성과 감정, 생각을 극도로 숨기는 문화가 이해 안 된다고 한다[27] . 홋카이도, 오키나와같이 근대에 일본에 편입된 지역민들도 마찬가지라고.
일본에는 '공기를 읽는다'[28] 는 관용구가 있다. 한국식으로 하면 '눈치'나 '분위기'로 대응되는데,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흔히 하는 '눈치 좀 있어라' 수준이 아니라 이걸 국가의 법률 바로 다음갈 정도로 중히 여기며 사회적으로 암묵하에 강요한다. 개인이 조직을 위해 강제로 와를 맞추는 것이다.[29][30]
이게 안되는 사람은 '공기를 못 읽는 사람'으로 낙인찍히는데, 이 말은 '이 사람 싫은 느낌' 정도의 뉘앙스를 가지며 인간관계에서 치명적이다. 이니셜 만들기 좋아하는 현대 일본인들 답게 줄여서 KY라고도 하는데, '空気読めない'의 약어다. 와에 어긋나는 사람은 강제로 맞추려고 하고 그게 안되면 집단적으로 배제해버리는 일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말이다.
- 2. 메이와쿠 문화
특히 일본인 하면 '''다테마에(建前, 겉마음)'''와 '''혼네(本音, 속마음)'''가 유명하다. 이것은 일본인 특유의 와(和)를 강조하는 사회성 등에서 비롯된 전통 사회 규범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외국에서는 겉과 속이 다르다고 생각하여 이해하기 힘들어하기도 한다. 일본의 전통 사회 규범은 '''개인의 주장은 최대한 억제하면서 집단 내에서 대립이 생기는 것을 피하고 개인의 욕구와 감정을 희생하여 원만한 대인관계와 집단의 단결을 강조하는데''', 이때 사회 규범은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면서 일본인은 어릴 때부터 다테마에를 정면으로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교육을 받는다. '아이소와라이'(愛想笑い, 웃는 척)나 '샤코지레이'(社交辞令, 발림말)같은 표현도 다테마에 문화와 관련 있다.
그 결과 대체로 상대의 진정한 마음과 의도를 파악하기 어려워지지만,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러한 의식 구조는 원만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중요하게 작용한다. 다른 사람과 눈에 띄게 대접이 다르거나 목소리가 낮거나 하는 식으로 눈에 띄는 다테마에를 보이는 사람도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인보다 더 곧이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오히려 이런 것을 생각해 보면 다테마에라는 것은 딱 부러지게 공격적인 말을 하는 것을 꺼리는 것 정도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듯 일본인은 진심을 털어 놓아 상대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보다는 표면적인 원칙만을 강조하는 쪽을 택하는데, 이것은 오랫동안 동안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 규범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상대의 부탁에 대해 사실은 거절할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는 딱 잘라서 아니(NO)라고 분명하게 거절하지 못한다. 때문에 이따금 국제 사회에서 싫어도 싫다고 분명히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는다. 한 예로 외국에서는 일본 기업과 계약을 맺을 때 "아,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습니다"라는 대답(다테마에)을 듣고 계약 성사가 눈앞인 줄 알고 희희낙락했다가 이후 확인 전화 시 "그런 대답은 한 적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배신감과 좌절을 느낀 적이 많다고 한다.[31] 한국에서 쇼핑하다가 마음에 안 들 때 "둘러보고 올게요." 하는 거랑 비슷한 맥락이다. 국제화로 인해 외국인들과의 교섭을 해야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면서 일본 기업들도 이 문제를 고치려고 한다는 듯.
외국인이 볼때 가장 당황스러운 점은 특정한 주제나 영역, 그리고 공적이거나 외부인을 상대하는 등의 상황에서 일본인들이 취하는 태도가 그때 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외부인 입장에서는 단편적인 것만 보고 '내가 가졌던 일본인의 이미지보다 개방적이더라', '일본인은 역시 속내를 읽을 수 없다'는 지극히 상반적인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이건 설명하기 매우 미묘하고 어려운 부분으로, 일본인만의 감각이 작용한다는걸 부정할 수 없다.
와, 그리고 메이와쿠 문화 탓에 정치권이던 회사던 토론이나 회의 등 의사 결정은 형식적인 경우가 많고, 간부나 높으신 분들은 사전교섭으로 사실상 이의제기를 불가능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네마와시(根回し, 뿌리 솎아내기)'''라 부른다. 혼네를 평소에는 꽁꽁 숨겨두다가 특정한 공간에 있을 때에만 한꺼번에 털어버리는 경향이 있기도 하다. 단골 이자카야나 오뎅집, 꼬치구이집 등에서 지인이나 주인과 뒷담화 하는 일은 단순히 만화나 애니상의 상상이 아니며, 현실에서도 꽤 존재하는 풍경이다.
다만 언어를 문화를 포괄하고 있는 개념으로 볼 때, 이러한 표현은 어느 나라에나 존재하며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 오해를 유발하면서 발생한 문제로도 볼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 3. 역사적으로 잔악하고 이중적이었던 행적
근현대에 이르러서도 잔인한 행적은 지속되어 일본제국 수뇌부는 귀축영미로 일본 민간인들을 세뇌시켜 마치 미국과 영국이 침략한듯이 선동시켜 많은 민간인들을 전쟁에 동원해 수뇌부의 이득을 노려왔다. 거기에 강요와 통치로 여러 자살병기나 자살공격을 강요해 생명을 천하게 여겼었다. 한일병합에 이르기까지 남한 대토벌 작전 등을 통해 수많은 조선인들을 죽였고 제암리 학살사건 과 간도 참변,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학살에서도 수많은 조선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고문을 당했다. 일본군 위안부, 조선인 강제 징용 문제 역시 간악함을 볼 수 있는 경우이다. 중화민국 역시 난징 대학살, 충칭 대공습 등 현세의 지옥들을 일본군을 통해 겪은 바 있고, 일본군을 상대한 미군 역시도 마닐라 대학살이나 바탄 죽음의 행진,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 등과 같은 잔혹함을 겪은 바 있다. 동남아시아 역시 일본군의 침략을 받으면서 상당한 수의 일본군 위안부와 침략피해를 당했다.
이는 고대 시절부터 전근대에 이르기까지 구축해온 일본인들만의 독특하고 치밀한 본인 집단중시와 '일본인'이 아닌 이외의 개인 혹은 집단에 대한 강한 경계심과 배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인권 의식과 글로벌 사회가 발달하기 이전에는 일본뿐만 아니라 여타 문명권 역시 타 문명권을 배척하거나 경계하거나 침략하는 행위는 수두룩했다.
다만 유독 본인들 이외의 타 문명권, 국가를 상대로 도가 지나친 잔혹한 행위들을 반복한 것은 위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특정 집단 내에서의 집요할 정도로 '와'를 중시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말 그대로 이 '와'의 정신이 전근대의 일본에서는 일본인들 사회에서만 통용되었다는 말이다. 즉 다른 문화권과 국가의 사람들은 '일본인'이라는 특정 집단에 속하지 않았기에 '와' 정신을 지킬 필요가 없었으며 본인 집단 규격외의 것들은 따돌리고 배척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유독 극심하다보니 자연스레 공격성까지 비치게 된 것이다. 특히나 '일본인' 자신들이 상대에 비해 수적으로나 양질적으로나 우세라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 이 공격성은 지나칠 정도로 가열화되고 조직의 분위기나 암묵적인 룰을 닥치고 따르는 습성이 있어 '일본인'이라는 조직 내부의 어느 한 명도 이를 제지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재에도 잠재적으로 남아있는데 그것이 바로 일반적인 따돌림과는 궤를 달리하는 '이지메'문화이다. 한 명 한 명의 일본인은 집단 내에서의 '와'를 무의식적으로 중시하기에 기본적으로 얌전하고 예를 갖추는듯 하지만 조직 내부 혹은 아예 본인들의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고 튀는 상대적 약자, 소수세력에 대해 '내가 속한 조직에 반대되는 자이고 이런 자들은 우리 조직의 분위기와 룰을 흐트리기에 배척하고 공격해야 마땅하다'라는 무의식적인 인식으로 이지메가 시작되는 셈이다.
물론 모든 일본인들이 위와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며, 전시에 돌입한 군인들의 정신상태는 대다수의 일반 민간인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도 있다.[32] 간혹 731 부대 같은 2차 대전기의 전쟁학살행위에 빠져나오지 못해 일본내에서 연쇄강간살인을 저지른 고다이라 요시오 같은 자도 있다지만 이는 일본인의 잔학성에서 비롯되었다기 보다는 PTSD같은 개인의 정신적 문제로 봐야함이 옳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일 뿐, 기본적으로 나 자신의 마인드와 감정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개인과 타인의 차이를 존중하는 문화가 일찍이 성립된 서구권의 시선에선 제일 심한 편인 일본을 제외하고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와 비슷한 궤로 보인다고 한다. 동아시아 국가들 특유의 집단성과 조직의 룰을 중시하는 획일화된 분위기가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정도는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당장 한국의 집단따돌림 문제와 특유의 눈치와 분위기 문화, 튀거나 상대적으로 다른 행동을 보여주는 대상에 대한 경계심은 일본만큼은 아니더라도 꽤나 퍼져있는 사회분위기다.
오히려 근현대 들어서는 한국인도 일본인에 못지않거나 어떤 부분에선 더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본래의 유교적 질서와 더불어 줄곧 이어져 내려온 징병제 시스템에서 비롯된 서열을 강하게 중시하는 문화가 서로 뒤섞여와서 소수를 향해 비교적 완곡하게 표현하거나 비꼬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일본인과는 다르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심하게는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기도 하는 경우가 상당수 존재한다.[33]
잔악함까지는 아니지만 겉으로 얌전한 모습과는 다르게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일제시대는 물론[34] 현대에도 한국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까지 가하면서 민도 및 청결을 강조하는 모습과 대조되게 일본에서 1970년대까지 시민 의식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을 때에는 포이스테(ポイ捨て)라 하여 길거리에 쓰레기를 함부로 마구 버리는 일이 매우 잦았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현재진행형으로도 시부야 밤거리나 오사카 골목길처럼 대도시권 기준으로 보면 더러운 곳이 많다. 사진 링크 첨부. 심지어 일본의 지저분한 거리를 한국의 거리처럼 조작한 사례도 있다.# 사실 다른 나라에서도 일본의 도시들 이상으로 지저분한 모습을 많이 보이지만,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도까지 내세우면서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미나마타병, 카네미 유증 사건같은 사람들의 무책임한 면모로 인해 발생한 각종 산업재해도 1950년대 - 1960년대에 꽤나 빈번하게 벌어졌던 일이다. 이 부분은 일본이 선진화되고 환경오염이 사회 논쟁거리가 되면서 개선되었지만 이게 해외로 불똥이 튀어서 1960년대 여행자유화 시기부터 1980년대까지는 일본인들이 어글리 재패니즈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세계에서 매너가 안 좋기로 유명했다. 여하튼 어글리 재피니즈라는 이미지는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에 대대적인 개도 캠페인으로 일본인 여행자들이 그런대로 좋은 평을 들을 정도로 개선되었으며 현재 일본 특유의 깨끗한 길거리나 도시 풍경의 이미지를 갖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부터이다. 이것을 1990년대에 한국인이 이어받다가(때마침 한국이 여행자유화 되었던 시점과 맞물린다.) 2000년대 와서는 중국인이 이어받았다. 시민 의식과는 별개로 2000년대 이후 현재, 세계에서 짝퉁이라며 악명이 높은 메이드 인 차이나처럼 1960년대까지는 메이드 인 재팬이 악명이 높았다.
- 4. 애매한 개인주의
그러나 서양권과 비교했을 때 개인주의라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오히려 서양인들은 일본이 아직도 공동체주의 사회라 여긴다. 개인이 뭘 하던 상관은 안 하지만, 공동체가 약속한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던지, 혹은 저항하는 순간 바로 불이익을 받게 된다. 이 때문에 오타쿠나 히키코모리 같은 사회 문제도 일본에서 가장 먼저 생겨났다. 이렇게 '고립될 자유'를 허용하는 예시는 캡슐호텔이나 외톨이 식당의 사례로도 나타난다.
즉, 유럽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라는 개념이 없이 상대방을 개인으로서 서로가 동급으로 보는 시각의 개인주의이지만, 일본인의 개인주의는 공동체사회의 규율(서열 등)에 따르는 이상, 서로를 간섭하거나 건드리지 않는 것으로 보는 시각의 개인주의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유럽식 개인주의는 커다란 집합 틀이 없는 상태에서 수많은 교집합을 만드는 식, 일본식 개인주의는 커다란 집합 안에[35] 온전히 들어가 있으면서 서로간은 교집합 없이 떨어져 있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계율이나 분위기, 유행에 철두철미할 정도로 충실한 것이 특징.
결국 이 역시 와 문화의 영향인 셈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의 개인주의 문화는 서구권의 개인주의와는 같은 것으로 보기에는 매우 어렵다. 설문을 해봐도 정작 한국인들 스스로가 더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한다. #
- 5. 목욕 문화
일본인은 집에 욕조(風呂)가 없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워 할 정도로 좋아한다. 그것도 반신욕 같은 것이 아닌 푹 담그는 것을 선호하기에 욕조의 깊이가 타국의 것보다 1.5~2배는 깊은 엄청난 모습이 일반적. 일본은 쓰시마 난류의 영향으로 연중 강수량이 고르므로 씻을 물이 매우 흔하고, 온천도 아주 많기에 목욕문화가 많이 발달하는 것은 당연했다.
- 6. 종교 문화
특히 범어는 더욱 그렇다. 일본어의 경우를 보면 칙쇼라는 욕도 기원이 불교 용어인 축생이다. 축생, 아수라, 사바, 왕생[36] , 꼬맹이를 속되게 이르는 가키나 코조도 불교 용어인 아귀와 동자승이라는 뜻이고, 여성을 속되게 이르는 아마라는 단어도 비구니를 일본식으로 훈독한 단어이다.
이렇듯 불교 용어가 일본어 곳곳에 있어 유교적 뉘앙스가 베어있는 한국어[37] 나 중국어와는 다르다고 한다.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는 공휴일도 아닌데 불구하고 그냥 노는 날로 인식하는 정도이다. 심지어 할로윈이 무슨 의미로 있는 날[38] 인 건 물론, 크리스마스가 누구의 탄신일인지조차 모르는 건 기본이며 서양과 한국에서는 비종교인들도 아는 부활절의 존재는 아예 모르는 경우가 많다.
기복신앙은 어떻게 보면 한국보다 더 심하다고 볼 수 있다. 신정에 신사나 절에 가서 참배하는 인파만 봐도 경이로운 수준.
허나 세속주의가 유독 강한 동아시아의 특성상 일본도 예외는 아닌지라 정교분리가 철저하고 극단적인 종교 광신도의 비율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랫동안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고 지금도 기독교의 교리가 정치 사회에 적잖게 영향을 주고있는 유럽, 국교로 지정한 역사는 없다지만 오히려 독실한 교인의 비율로 치면 유럽보다도 더 한 경향이 있는 미국과 다르게 종교가 개인의 가치관과 국가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경우는 없는 편.
- 7. 국가를 자신들의 요람으로서 생각한다.
일본이 고대엔 섬이라서 주변국의 침략을 받지 않았고, 타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 먼데다 남북전쟁 시대에 제국주의 테크를 타서 식민지가 되는 것을 피했던 근대 제국주의 시절, 높은 경제력으로 타국의 경제력에 지나치게 좌지우지되는 것을 피한 현대에서까지 철저히 국내를 방어해오며 일본인들을 지켜주었기에, 일본인들의 국가관은 한국인이 민족주의 사상으로 물든 개발독재 시대를 지나기 전까지 유지해왔었고, 별종인 독일인을 제외한 유럽인들의 국가관에 가까운 국가관인 ''''우리 가족이랑 우리 이웃사촌들, 그리고 이들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재산과 땅은 우리가 지켜야지, 내가 안지키면 누가 나 대신 이들을 지켜주겠어?''''와는 사뭇 다른 ''''이 열도가 아니면 우린 결국 침략에 항상 노출되고 말 거야. 우리가 계속 평화와 번영을 누리도록 이 곳을 지켜 내야 해!''''에 가깝다. 일본 땅이 조국 땅이니까 지킨다기 보단, 자기들이 안전히 숨을 수 있는 성과 같은 땅덩어리니 잃기 전에 나서서 지킨다는 것. 일본인의 국가관은 개인과 국가, 그리고 역사를 별개로 생각해 어떤 정치적 사상이나 이념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항이 있다. 군국주의 시절이 유독 튀는 시절이었다.
- 8. 과거사에 대한 시각
물론 일본에서 극히 소수를 차지하는 신우익주의자들은 전후부터 현재까지 준동해오고 있으나 대중의 무관심과 일본 공안의 감시로 큰 사고는 못치고 있다. 미시마 사건이 그나마 한 예외라고 할 것이다.
2010년대 들어 일본의 우경화가 가속화되면서 정세 변화, 한국이나 중국 등 주변국이랑 잦은 외교충돌이 일어나면서 우익세력이 점점 더 커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현대 일본인들 대다수는 20세기때 일본 제국와 달리 개인주의가 심화 되면서 상술한 이유로 국가적인 움직임에 진지한 관심이 적고, 한국 등과 달리 역사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민족정서를 가질 이유가 딱히 없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아무리 골수 우익일지라 해도 2015년 일본 징병제 반대 시위를 보면 20세기 일본 제국과 달리 시각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볼 수 있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크게 보도되는 극우시위 현장을 가보면 시위대들이 경찰들에게 고립되어있고 일반 시민들은 그들에게 눈길도 안주고 지나쳐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히려 차별을 반대하는 시위가 더 동조를 받으면 받지... 하시모토 도루마저도 헤이트 스피치 금지, 반전을 내걸고 있는게 현실이다. 한국에서 크게 보도된 새역모 등의 역사왜곡 교과서 논란만 보면 일본의 과거사 부정이 점점 극으로 치닫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기 십상이나, 새역모 교과서의 채택률은 얼마 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일본은 2차대전과 전쟁범죄에 관한 역사교육을 안해왔는데, 탈구입아를 하는 판에 이러다보면 아시아 주변국들에게 외면받을 수 밖에 없는 추세에 따라 점점 중립적으로라도 교육을 하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어가고 있다. 또한 일본은 단카이 세대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강한 편이다.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 큰 국제적 이슈가 된 데에는 김학순 할머니의 용감한 증언과 우리나라 정부의 노력도 있지만, 일본 아사히 신문 등 일본의 양심있는 진보 지식인들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다.
다만 일반 일본인들과는 다르게 '일본회의' 등 일부 우익계열에서는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회복시키는 것이 '일본을 되찾는 길'이라고 주장하며 역사 수정주의적인 관점을 내비치고 있고 아베 내각도 그런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동시에 이 세력은 자민당 내에서도 우려가 나올 정도로 엄청난 친미 성향이면서도[40] 친이민, 친경단련이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 우익의 이미지인 신우익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 9. 지나친 정치 무관심
이는 단순히 젊은층의 문제뿐만 아니라 꽤 나이가 있는 30대, 심하면 중년까지 아예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 2019년 총선의 투표율이 고작 '''48%'''다. 반대로 (대한민국도 갈수록 투표율이 하락하고는 있다지만) 대한민국의 2017년 대통령 선거가 무려 78%에 육박한 걸 보면 정말로 관심이 없다는 게 절실히 체감된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인터뷰에 따르면 일본 국민들의 절반 가까이가 지지 정당이 없을 정도로 일본인들은 자국 정치를 남의 일로 취급한다.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이 일본의 우경화를 부추긴 한 원인이기도 하다.
5. 대외적 이미지
일반적인 외국에서 일본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적인 인상은 조용하다, 소심하다, 상냥하다, 성실하다, 유행이 빠르다, 바쁘게 살아간다 등의 인상이 강하다.
일본이 2차대전 이후 국제적인 외교발판을 마련하고 해외로 뻗어나간 시절에 생긴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는 부분이다. 전반적인 한국을 포함한 범 동아시아권 사람들에 대한 서구권에서 느끼는 인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은데 이는 비슷한 문화권에 속해서 공통적으로 축적되어온 민족성에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위에 언급된 일본인만의 국민성을 나열한 내용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일본이 중국과 같이 해외에 가장 먼저 알려진 동아시아 국가이다 보니 이런 스테레오 타입적인 인식이 더 강하게 작용되는 듯 하다. 일종의 '조용하고 성실하지만 조금 소심한 아시아인' 이미지의 아이콘격인 셈.
타 국가 사람들보다 비교적 목소리 톤이 높다는 이미지가 있다.[42] 물론 죄다 그런 건 아니지만 대체로 그렇다 보니 애니메이션 더빙에서도 귀엽고 앵앵거리는 목소리가 많은데 한국인이나 서양인을 비롯한 타국사람들 입장에서는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이 때문에 톤의 높음이 좀 심해서 한국어 더빙판뿐 아니라 그 외 외국 더빙판들을 보면 '캐릭터들 목소리가 일본 원판보다 5살 많아보이는 건 기본이다.'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라별로 언어, 발성이 다 다른 탓이지 성우 목소리가 캐릭터 연령대에 아주 심각하게 벗어나지 않은 이상 단지 원판보다 비교적 성숙해 보인다고 해서 무조건 미스캐스팅으로 치부해버리는 건 좋지 않다.
매운맛(정확히는 캡사이신으로 대표되는 바닐린계 매운맛)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강한 향신료가 별로 없는[43] 일본 요리의 특성에서 유래한 점이라 카레도 상당히 부드럽고 달게 만드는 편이다. 향신료 사용을 최대한 꺼리고 소금과 설탕, 식초를 들이 붓는 요리 문화 탓에 일본인의 나트륨 섭취량은 4300mg에 육박한다. 한국도 과거에는 4000mg를 넘어갔으나 식생활이 급격하게 바뀌면서 영미권과 대등한 3500mg대로 떨어진 것과 대조적이다.
부정적인 인식도 있는데 일본의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재일 외국인 72%가 일본인의 입냄새가 신경이 쓰인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한다.[44] 이러한 입냄새의 원인으로 높은 흡연율과 스케일링이 보편화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45] 일본 여행을 다녀온 경험자나 일본인과 대화를 해 본 사람은 일본인의 입냄새를 커뮤니티에 작성하여 이러한 원인을 궁금해 하는 글을 작성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 반응은 냄새가 심한편 쪽이 많은 편이다. 이는, 한국 커뮤니티와 해외 커뮤니티를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의 신문 만평 등에서는 일본인을 대머리나 빡빡머리에 뻐드렁니(+콧수염, 안경)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2차대전 시기 미국에서 도조 히데키를 희화화한 것이 원조다. 구글에서 'tokio kid'라고 검색하면 알 수 있다.
영어로 일본인을 비하하는 명칭은 Japs이며 이 단어는 '''공습하다''', '''몰래 공격하다'''라는 뜻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주만 공습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 때문인지 나라 이름을 로마자 머릿글자로 쓸 때도 KOR, FRA, AUS, BRA처럼 웬만해선 앞의 3글자를 따서 쓰는 것과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은 JAP라고 안 쓰고 JPN이라고 쓰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Tojo[46] 라는 명칭도 쓰였으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덤으로 2차 세계대전 즈음의 여러 미국산 프로파간다에서는 일본인들이 말끝마다 '''Please, please'''를 연발하는 것으로 묘사되곤 했다.[47] 영어에 능숙하지 못한 일본인이 경어를 표현하기 위하여 please를 여기저기 집어넣어 말하던 버릇을 과장해서 비꼰 듯.[48]
고래를 잡아먹는 야만인이라는 인식이 환경보호단체를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49] '''멸종할 수 있으니 먹지마'''라고 그렇게 말해도 듣는 척도 안해서 그런 듯. 일단 고래를 잡아먹는 게 야만이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고, 사회에 따라 먹는 음식과 안 먹는 음식이 다르기에 문화적으론 존중받아야 하는 것은 맞다. 다만 일본에서는 포경할 때 "연구용"이라고 연막을 치고 실상 식용을 위한 포경행위를 반복하며, 무분별한 남획으로 인해 서태평양에 서식하는 많은 수의 고래들이 멸종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자행한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대량 포경 문제에 있어선 일본뿐만이 아닌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또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종종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 특성상 식량 자급자족이 어려워 고래를 사냥하여 주식으로 섭취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현 시대와는 전혀 맞지않는 비약'''이다. 이 지역에 속한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1인당 GDP는 5만 불을 훌쩍 넘기며 '''특히 이 중에서도 고래고기를 유독 즐기는 노르웨이의 경우, 7만 불에 달할 정도'''로 이들은 유럽내에서도 손꼽히는 부국이자 전 국민적으로 경제기반이 상당한 강소국들이다. 1인당 GDP로 따졌을 때, 당장 일본의 2배에 달할 정도고 그 유명한 '북유럽식 복지'를 이뤄낼 정도로 국가가 운용할 수 있는 자산이 썩어 넘치는 국가들이다.
당연히 이들에게 전 국민들을 먹여 살릴 양질의 식량을 수입해오는 정도쯤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이들이 당장의 기초 인프라도 구축되지 않은 후진국이라면 모를까 이런 주장은 시대상과 맞지 않는다. 게다가 식량의 경우 20세기 중엽부터 제네바 라운드를 시작으로 일찍이 국제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제3세계 빈곤국가나 과할 정도로 자급자족에 충실했던 일부 공산국가가 아닌 이상, 절대적인 식량난에는 대부분이 벗어나 있었다. 특히,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의 경우 유럽연합 회원국이며 노르웨이, 아이슬란드는 회원국은 아니지만 EFTA에 속해서 유럽연합 회원국과 동등하게 인적, 물적 교류를 하고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거대 농업국가들의 생산품들을 자국 물품마냥 저렴하게 수입해올 수 있는 최적의 인프라도 조성된지 오래다.
종합하자면 현재 이들의 고래사냥은 식량 문제나 경제적 상황이 아닌, 일본과 마찬가지로 ''''선조들이 즐겼던 당대 주식, 별식이 고래고기이니 우리도 그냥 먹을거다''''라는 지역적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게 옳다. 여러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이들의 고래잡이가 당장 생존의 목적이 아닌, 마치 한국의 김장철이나 독일의 옥토버페스트처럼 이를 기념하며 먹고 마시고 즐기는 듯한 장면이 여러번 연출된 바 있다[50] .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1970~80년대부터 보릿고개가 완전히 사그라들고 현재는 24시간 야식 배달과 편의점이 발달하여 식도락이 발에 치일 정도로 많은 한국에서도 여름철만 되면 보신탕찾는 문화가 잔재하는 것과 별 다를게 없는 것이다. 일본의 포경도 이것의 연장선인데, 여기도 역시 갖가지 다채로운 농수산물이 생산되는 나라인지라 고래를 식용으로 쓰는 건 순전한 과시에 불과하다.
일단은, 한국의 개고기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고래고기의 인기도가 세월이 흐를 수록 빠르게 하락하는 중이라, 나중에 가서는 자연스레 사라질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51] . 자세한 것은 포경 문서 참조.
일본이 144개국 중 세계 최악의 불친절한 나라 142위라는 조사결과가 발표되기도 했다.. 단, 제목과는 달리 실제 설문 문항들을 보면 '''기부와 사회봉사시간 문화에 대한 조사'''라 개개인의 친절도와는 거리가 먼 데다가 내전, 극단주의등으로 위험한 국가로 톱을 달리는 리비아, 이라크등의 국가들과 치안 안좋기로 악명이 높은 남미권 국가들이 상위권에 분포되는 등 신뢰성과 객관성이 의심되는 자료이므로 진지하게 믿지는 않는 편이 좋다. 이 리스트에 나온대로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일본만큼은 아니지만 한국도 하위권인 92위에 랭크되어 있는 불친절한 나라로 분류된다.
6. 한국과의 관계
국제적으로 이웃나라 국민끼리 사이가 좋은 경우가 적기도 하지만[52] 여러 의미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말이 정말 잘 맞는다.
일반적으로 한국인의 일본 내지는 일본인에 대한 악감정은 일제강점기 또는 그 직후의 국가적 혼돈을 느껴본 노년층과 바로 그 아랫 세대인 중장년층일수록 강하며 30대 이하의 젊은층은 대일 문화 개방과 여행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일본이 낯설지 않았던데다가 한국의 국력 성장에 따른 열등감 희석의 영향도 있어 상당히 완화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지나치게 경도되어 나아가버리는 경우도 있는 편. 다만 비즈니스 쪽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일본인들을 사업 파트너로 높게 평가한다.
한국에서의 일본 문화 개방이나 일본에서의 한류 붐으로 인해 문화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한일 커플들이 맺어지기 시작했고 특히 일본 여성과 결혼하는 한국 남성들의 수가 1995년경엔 2842건에 달해 최고치를 기록했다.[53] 다만 일본이나 한국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생각을 갖고 살고 있기 때문에 국제결혼으로 국민감정을 일반화하기는 힘들다.
일본 문화를 즐기면서도 수시로 일본인 또는 일본 연예인에 대한 우익 논란을 제기하기도 한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해서 제기된 경우(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정책 및 일본군의 전범행위에 대한 옹호발언 등)도 있지만, 한국인 입장에서 단지 불쾌해서 제기되는 경우(하시마 섬에서의 영화 제작발표회, 우익 논란이 있는 원작자와 관련 작품에 출연한 배우,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질의 시 묵묵부답 또는 답변 회피 등)도 있다. 또한 전후 맥락이 잘린 채 한국인을 자극할 만한 부분만 강조되어 의혹 제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A에게는 우익이라고 주장하다가 B에게는 침묵하는 이중잣대인 경우도 제법 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유명 연예인 중에는 한국에서 우익 논란이 한 번이라도 제기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 우익 미디어물 논란도 수시로 벌어진다.
(주로 넷우익의 경우) 한국인 또는 한국계에 대해서 일본인에 비해 허풍이 심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거나 툭하면 사죄 보상 타령하며 시비를 붙인다는 편견이 존재한다.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반감을 크게 갖게된 것은,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의 '일왕' 사죄발언이 결정타였다. 이때 친한 성향의 일본인들이 상당수 등을 돌리기도 했다. 또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둘러싼 불협화음도 상당한 타격을 줬다고 한다. 그 이후엔 한일 양국 모두 서로에 대한 배척을 대놓고 드러내는 한국의 문재인 정부, 일본의 아베 정부가 팽팽하게 대립하면서 갈등 양상이 훨씬 심해져 버리게 된다. 그 결과,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낳기도 했다.
일본인들 중에는 한국에 대해 위기의식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예전에는 한국의 대일무역적자가 상당한데다[54] , 소위 '일본 중소기업이 거래 끊으면 삼성은 망한다'라는 말과 같이 자신들보다는 한수 낮은 이류 국가로 보는 시각이 강했으나, 한국이 국제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부터는 애써 그렇게 보고싶어하는 정신승리적인 양상이 강해지는 추세다. 나이 든 사람들은 재일교포에 대한 고정관념도 큰데다 자기들이 잘나가고 한국은 군사정권 하의 빈국일 때의 철 지난 감각이 아직도 있기 때문에 한국을 무시하는 편이나, 젊을 수록 한국에 대해서 보다 대등하면서도 긍정적인 인식이 많은 편이다.
양국 간 문화 교류가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후로 한류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원래는 중년 여성을 중심으로 붐이 시작됐는데 2010년대 들어서 젊은 층으로 급속하게 퍼졌고 이 영향으로 일본 청소년들의 한국, 한국인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아졌다.
일본의 장년, 노년층 중에는 일본과 한국의 근대사를 비슷하게 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이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디테일한 부분에서 살펴보면 상당히 일리있는 관점이다. 일단 일제강점기라고 해서 일본인이 다 잘 살았던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대다수의 일본인들 역시 당시 체제하에서 심하게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55]
당장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은 한국의 군사정권 같은 힘든 시기였다. 카미카제같은 당시 일본 제국의 미친 짓만 봐도 그 시절의 일본 군부는 정상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젓가락이나 부엌칼을 포함해 철이란 철은 죄다 수탈해가고 자국의 식량도 예외가 아니었으며 남자들은 군인, 노동자로 징용당해 끌려가 가정이 무너지곤했다는 묘사가 의외로 자주 등장한다. 그런 군부가 권력을 쥐고 있었으니 서민들 삶이야 좋을 수가 없었다.[56] 또한 각자 전쟁을 겪은 이후 비슷한 시기에 GHQ로 대표되는 외세의 영향권[57] 아래에 있었으며 시기는 비록 달랐지만 중노년층들이 젊은 시절 산업화를 이끌어 황폐화된 인프라를 재구축하고 자국의 고도성장을 지켜봐온 부분에서도 비슷한 동질감을 느끼는 듯 하다.
일본 제국 당시의 비참했던 대다수 일본 서민들의 삶을 덧대어 설명하자면 정치는 명목상 민주주의 체제였지만,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장식일 뿐, 치안유지법 때문에 사실상 귀족 중심의 독재와 지역연고 코드인사로 굴러가며 실질적으로는 전근대적 봉건체제나 다름없었다.[58] 그리고 1930년대 후반부터는 2.26 사건 이후 도조 히데키 등이 장악하는 군부 독재 체제로 바뀌면서 더욱 막장으로 흘러갔다. 이 와중에 전쟁을 일으켜 식민지를 수탈한 돈은 모조리 군부와 재벌 호주머니속으로만 들어가다 보니 서민들은 지속적으로 빈곤한 삶을 살았다.
특히 서민들은 만주, 몽골, 중국, 한국 등지의 개척단에 반강제로[59] 끌려나갔고[60] , 태평양 전쟁에서는 결국 패망하게 된다. 일본 서민들, 특히 여자들은 내선일체를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한국인과 원치않는 강제 정략결혼을 한 경우도 흔하다. 그러다 패망하고 식민지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국적이 반강제로 박탈당하며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 많다. 현재도 생존자가 국내에 남아 있다. 그나마 한국은 국교 정상화가 빨라서 60년대, 중국은 국교 정상화가 된 80년대에야 이산가족 상봉을 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 있는 잔류 일본인들은 생사조차 불분명해졌다. 미군의 폭격으로 본토는 폐허가 되었으며, 1945년 이후에는 GHQ 군정 하에서 1958년 전쟁 전 경제수준 회복선언을 할 때까지 반식민지 상태를 13년 정도 경험한다. 미국이 일본을 농업 국가로 만드려다가 한국전쟁 덕분에 계획을 취소했다.[61]
일제강점기 당시였던 1910년 이후부터는 식민지 및 속령지역이었던 한반도에 일부 일본인들이 이주를 해오며 살았던 적도 있었고 넓게는 중국 대륙까지 이주하여 '왜인촌(倭人村)' 이라는 집단촌까지 형성했다는 일설도 있었다.[62] 그리고 이들은 한반도의 지배계층으로 군경(軍警)까지 주둔했지만 1945년 8월 15일 한반도가 해방이 되면서 거의 대부분이 본국으로 쫓겨났고 보복도 꽤 있었다고 전해진다.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에 남아있을려고 했는데 결국에는 죄다 일본으로 쫓겨났다 그러나 어떤 일본인 가족은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이가 있는 것을 보고 한국인들이 식량을 나눠줘서 고마웠다고 수기에 쓰기도 하였였다. 그러나 일부 일본으로 돌아가던 일본인은 높은 비율로 일본인이라는 신분을 속이고 밤에 움직이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했다고 한다. 당시 돌아가지 못한 일부 일본인은 아예 한국인으로 귀화하였던 적이 있었으며 한국인들의 눈치 때문에 아예 한국어를 배우며 한국인 행세를 했던 경우도 있었다.(망절씨 항목 참고) 이 역시도 케바케로 일본인 처 모임이 각 지역별로 있음. 이 할머니들은 일본국적을 유지한 채로 계속 한국에 살고 있다.
6.1. 재조선 일본인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일본인은 수백명 수준이었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 직전에는 60만이었다. 일본이 패하자 이들은 미군정에 의해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고 이런 이들을 히키아게샤라고 불렀다. '조선을 떠나며'를 읽어보면 일본이 8.15 광복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반응을 묘사한 단원을 읽어보면 상당수가 한시바삐 조선을 떠나야한다는 심정이었지만 그들이 낳은 자녀들, 특히 조선에서 출생해서 터전을 잡고있던 다수 재조선 일본인 2세들은 '''자신들이 왜 떠나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원산지역에는 일본인 촌이 있어서 치안은 물론이거니와 학교등의 편의시설이 들어있어서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모여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광복이 되어 많은 조선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조선인들이 이렇게나 많았나?"라고 할 정도로 분리된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정이 이들이 반출할 수 있는 재산을 제한했기 때문에 대부분 야반도주 하듯이 조선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일본에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아야 했던 것이 전시동안의 궁핍한 생활과 공습에 대한 대피로 피폐해진 본국인들과는 달리 그래도 식민지에서 태어나 삶의 터전을 일구고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던 재조선 일본인들은 눈에 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고 그나마 갖고들어온 재물 상당수를 여러가지 명목으로 떼여야 했으며 특히 그들의 자녀들은 놀림감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녀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자며 보채는 것을 달래야 했었고 설상가상으로 당시 본국의 경제상황이 막장이었는지라 구직도 불가능했고 이러다보니 임시거처였던 수용소가 영구거주지로 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여기에 '인과응보'라고 빈정대는 본국인들의 경멸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도 망절씨 처럼 소수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6.2. 재한 일본인
패망 후 대부분의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으나 일본인 아내와 자식 등이 일부 남았다. 한국전쟁 당시 해상보안청은 GHQ의 지시로 소해정을 파견했고 보안청 직원들이 상륙하기도 했고 노무자들이 항구 등에서 미국의 군사물자를 나르기 위해 들어왔다.
한일 수교 전에 양국은 대표부를 설치했고 일부 일본인들이 한국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1965년에 한일수교가 이뤄지면서 일본인 외교관과 상사 주재원 등이 들어왔고 관광 목적으로 들어오는 일본인도 생겼다. 2000년대 이전부터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통일교 소속으로 영주권을 얻은 경우가 많다.
2013년 8월 31일 대한민국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이민정보과 월보에 따르면 일본인 유학생은 2,781명(유학 1,714명/한국어 연수 1,067명)이며 한국인의 배우자(결혼이민자)[63] 는 12,104명(남성 1,174명/여성 10,930명)이며 취업자격 체류자 1,782명(불법체류자 2명 포함)이며 단기체류자 23,462명[64] (불법체류자 499명 포함)이며 등록외국인[65] 23,194명(불법체류자 363명)이다. 체류 일본인의 숫자는 47,443명(불법체류자 875명)이다.
서울 용산구 이촌동이 대표적인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이촌로를 중심으로 1,000명 이상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말하자면 재팬타운이기는 하지만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가 많다는 점 등을 제외하면 딱히 일본 문화가 특징적인 곳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용산구는 일본인 말고도 온갖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 별로 두드러지지 않는다. 딱히 매스컴 등에서 '재팬 타운' 등으로 주목하는 곳도 아니고, 다른 나라의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 등과 다르게 딱히 이국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한국 내 일본풍 이미지에 대한 시선이 큰 축을 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66] 이는 국내의 다른 차이나타운 등 이국인들을 위한 거리들은 여전히 이국적 풍경을 내려고 한다는 점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6.3. 재북 일본인
패망 후 한국과 상황이 비슷했으나 별 탈 없이 일본으로 돌아간 한국의 일본군과 달리 재북 일본군인은 소련군에 의해 끌려가 포로가 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부 일본인 아내와 자식도 잔류했다. 이들은 잔류 일본인이라 부른다. 이들의 규모는 약 1400명 수준이었다.
그 외에 북한 공안 당국에 의한 납북 일본인[67] 이 있고 재일교포 북송 당시에 한국인 남편이나 아내를 따라간 일본인과 그들 사이에서 태어나 일본 국적을 지닌 사람 등이 북한에 있다. 일본인 배우자의 숫자는 약 1,800명으로 추정한다.
7. 일본인 캐릭터
항목 참고.
8. 관련 문서
[1]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하고 설계했다.)[2] #[3] 정확히는 주류 민족인 야마토 민족(도래인 계통)의 인구비율이 열도 내에서 압도적인 것으로 보아 아이누인들은 이들에게 거의 흡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실제로 현재 순혈 아이누 인구는 20만 명에 불과하며 앞으로 세월이 더 흐를 수록 인구풀에서 흡수될 것이 유력하다.[4] 시기상으로 현재 동아시아인들보다 먼저 아시아에 정착한 집단으로 추정되며, 완전히 동일 어족은 아니지만 언어동조대적인 요소로 봤을 때 동시베리아나 이누이트어, 더 넓게 보면 아메리카 원주민 언어와 비슷한 포합어체계를 지니고 있다. 홋카이도에서 발굴된 조몬인 유골의 DNA를 분석한 결과 한국인, 울치인, 대만 원주민과 유전적 구성이 유사하였다.#[5] 학계에서는 빙하기가 해소되어 인류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현재 동아시아인의 직계 조상들이 조몬계 인종을 밀어낸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6] 두번째 링크 도쿄대학교 학술지 5번째 항목에 本土人は集団としては韓国人と同じクラスター(注2) (번역 : 본토인은 집단으로는 한국인과 동일한 클러스터 (주 2)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확인 참조.[7] 또한 북쪽 홋카이도 위주로 유전자 검사를 한것은 아이누족에게 편중된 결과이기에 일본의 전체의 유전자 풀을 대변하는 데 있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8] # 다만 해당 연구도 남방계 유전자 분류 문제에 있어 비판점이 분명 존재하는 연구이다. 무조건 맹신하는 것은 금물이다.[9] 여담으로 일본을 가르키는 단어인 '왜' 가 왜소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의견도 있으나 신빙성은 낮다. 원래 일본을 가리키는 말인 왜는 '키가 작다'는 뜻과는 상관없이 고대 일본어의 1인칭 대명사인 '와'를 음차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옛날 일본에서는 자국의 천황을 대외적으로 드높여서 호칭할 때 '대왜왕'이라는 칭호를 쓰기도 했고, 전통적으로 일본인들이 자국을 가리키는 말인 야마토의 한자를 이 왜로 쓰기도 했다.[10] 하와이에서는 지나가는 사람 딱 보면 한국인은 구분된다는 말이 있다. 확실히 일본인과 비슷하게 생겨도 뼈대 자체가 더 큰 것이 보이기 때문.[11] 일본은 20대 연령층 청년과 60세가 다 된 중년이 같이 서 있어도 차이가 없는 편이다. 링크에 따르면 일본 20~24세 청년층의 평균 키는 172.0cm. 중년층은 171.1cm.[12] 1970년대생 이후.[13] 하지만 일본인이 한국인보다 작은 편이었다는 것은 맞다. 일제 때 신체 조사를 보면, 영양 상태가 더 안 좋았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한국인 어린이가 가슴둘레는 더 적었지만 키가 5~7cm 더 컸다고 나온다. (출처 역사신문 6권, 사계절출판사.) 또한 구한말 조선과 일본을 여행했던 영국 여행작가 비숍 여사 역시 저서에서 '한국인은 중국, 일본과 비교해서 키가 더 크고 잘 생겼다'라는 언급을 한 적이 있다. 오페르트 도굴사건을 일으켰던 에른스트 오페르트는 한 술 더 떠 "조선인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보다 피부가 희고 키가 큰 걸 보니 백인의 후예인 듯."이라는 주장도 했다. 물론 일본인들이 유전적으로 한국인보다 키가 작으니 그 영향을 받았겠지만.. 다만 6.25 전쟁 이후에 일본 경제가 고성장을 기록했고, 한국은 상당한 기간동안 최빈국 신세로 전락하면서 영양과 의료혜택면에서 차이가 커지자 오히려 한국인들의 키를 앞서게 되었다는 얘기다.[14]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하고 설계했다.)[15] 가나 문자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서기 5세기 경에 야마토측에서 한자를 받아들이고 7세기를 전후로 초기 형태의 가나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야요이와 조몬계의 열도 내 헤게모니 다툼이 완전히 종료되기 시작한 시점(대략 10~11세기)의 수백년 전부터 이미 문자를 쓰고 있었다.[16] 당장 지금도 쓰이는 일본이라는 국명 자체가 야마토를 대신하여 지어진 시점도 덴무 덴노의 치세인 서기 600년대 였다. 일본이라는 국가 정체성이 조몬계(에미시)를 완전 정벌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은 엄연히 사실이다.[17] 오키나와 지방은 일본어족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11세기 이전까지 패총시대로서 수렵 채집 위주의 원시생활을 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혈통적으론 에조의 조몬인 계통과 비슷했으나(정확히는 조몬인 계통과 오스트로네시아 혈통이 뒤섞인 사람들이 선주민이었다.) 오키나와 제도를 참조하면 알 수 있듯이 워낙 고립된 외지여서 문명이 생기기는 힘들었다.[18] 이들 언어권은 러시아 사할린과 일본 홋카이도에 분포되어 있다. 다만 러시아와 일본의 탄압에 의해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화자수가 급격히 줄어들어 현재 일본에서만 10명의 모국어 화자가 확인된다. 다만 제2언어로서의 화자 수까지 포함되면 그 수는 확연히 증가한다.[19] 당시 조몬계 언어와 아이누어의 관계는 중세 한국어와 현대 한국어 관계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차이점이 더 적다고 보면 편하다. 주어-목적어-서술어가 기본인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완전한 포합어 성격을 띄는 고전 시기의 조몬어보다는 분석적 언어의 특성도 띄는 것이 차이점이다.[20] 다른 두 언어가 수렴한 이후 일본어로 변형되어 그러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할 수 있지만 이 역시 언어학적으론 무리가 크다. 기원전 4500년경에 출현한 원시인구어로부터 반 만년이 넘게 갈라져 왔고 각 지역의 타 어족 언어들(페르시아어는 아랍어와 터키어, 힌디어는 그 옛날 산스크리트어 시절부터 남인도의 드리비다계 언어와 접점이 깊었다)과 엄청 긴 세월동안 수렴 과정을 거친 인도유럽계 언어들도 여전히 기초 어휘와 수식면에서 공통적인 흔적들이 짙게 보여지는 것을 보아 단순한 어휘부터 갈리는 일본어와 아이누어는 그 근본부터 거리가 멀고 문법의 괴리감마저 미루어 보았을때 언어동조대의 영향조차도 별로 받지 않았음을 입증해준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어족이 다르기에 기초어휘에서 차이가 크지만 서로 같은 언어동조대에 속하여 전체적인 문법과 한자에서 비롯된 중고급 어휘에서 큰 유사성을 보인다.[21] 류큐어나 오키나와어 항목을 들어가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이 본격적으로 해당 언어를 쓰기 시작한 시점은 아무리 일러도 10~11세기, 늦으면 13~14세기부터다. 본토의 중세 일본어에 영향을 받아 고립된 지역의 방언으로서 시작한게 현재로서 중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한국어-제주어 관계와 유사하다. 또한 11세기부터 발견되는 인골은 중세 일본인과 별 다를게 없는 계통으로 확인되었으며 11세기 이전의 인골과는 전혀 다른 계통임이 확인되었다.[22] 이는 유럽 켈트계와 게르만-라틴계의 역사와 흡사하다. 켈트계가 갈리아 지방(프랑스), 브리타니아 섬(영국과 아일랜드 권역), 히스파니아 반도 북부(스페인, 포르투갈)에 이르기 까지 서남유럽을 먼저 선점하였으나 로마 제국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장한 라틴계가 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정벌하며 그 지역 주민들을 문화적으로 동화시켜 끝내 라틴어의 후예격인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화자들을 만들어냈고 브리타니아 섬의 경우에도 독일 작센 지역에서 기원한 앵글로색슨족이 브리타니아 섬을 정벌하며 게르만어파의 한 갈래인 영어가 전역으로 퍼지면서 드넓었던 켈트어 세력은 끝내 스코틀랜드의 일부와 아일랜드로 축소된다. 류큐 왕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본래 선주민의 언어와 문화가 통용됐을 지역에 신진세력인 일본어계의 무리들이 11세기 전후에 출현했고 결국 주류를 뺏기면서 언어마저 일본어족의 일파로 동화된 것이다.[23] 고조선도 단군왕검을 비롯한 건국 신화나 '기원 전 2333년에 건국되었다'는 부분은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민족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역할로서만 수긍하지 실제 사료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암묵적으론 다 알고 있다. 다만 고조선이란 고대 국가의 실체와 베이스가 되는 문명권(현재 학계에서는 기원전 5~4세기 경, 요동의 정가와자 문화를 고조선을 비롯한 한민족 문명의 근간으로 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이 실재한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24] 토인(土人)은 문명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에 토착하여 사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25] 흔히 말하는 '''메이와쿠'''가 그것을 반영한 것이다.[26] 다만 쓰레기를 버리는 행동은 와 문화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이다.[27] 표현 방식에서 상인과 서민층 위주로 발전한 오사카 사람들과 귀족 문화 및 종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교토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또한 도쿄에서도 전통적으로 '시타마치'라 불려온 동부 지역 사람들은(특히 '에돗코'라 불리는 토박이들) 어지간히 직설적이고 성질 급하단 이미지가 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소설이 나쓰메 소세키의 도련님이다. 여기의 주인공도 에돗코인데 전술한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28] 「空気を読む」 반대 의미로는 「空気を読めない」 '공기를 읽지 못한다' 즉 눈치가 없다 라는 표현이다. 뭐든지 줄여말하는 걸 좋아하는 일본답게 KY('''k'''ūki wo '''y'''omenai)라고 표현하기도 한다.[29] 이 부분이 상당히 잘 드러날때가 바로 사과의 말을 전달할때이다.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사과라는 것은 내 자신이 전적으로 타인에게 큰 실례를 범하거나 확실히 잘못을 끼쳤을때 정중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확실한 잘못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공기를 읽지 못한것'만으로도 타인에게 큰 민폐를 끼쳤다 여기며 수시로 사과한다. 한 마디로 내 자신이 더 피해를 보거나 오히려 명백히 사과를 받아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 피해자가 '내가 더 피해봤지만 나 역시 좋지 않은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으니까' 먼저 사과하는 엉뚱한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30] 눈치나 분위기를 살피는 경우도 한국인과 다소 다른 점을 볼 수 있는데 일본의 경우 전반적으로 대부분의 인간관계, 상황에서의 분위기를 지키는 것을 중시한다. 자기보다 연하이거나 직급이 낮더라도 일반적으로는 거리를 두며 존중을 하는 편. 한마디로 모든 분위기를 읽고 거의 모든 상대에 최대한 맞춰주는 것이 완전히 보편화된 경우. 하지만 한국의 경우 동일한 연령대의 '친구'를 제외하곤 서열에 의해 예를 갖추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스타일이다. 대체로 연상이거나 상급자의 경우 초면일 때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을 마치 자신의 친동생이나 자식, 직속부하처럼 맘편하게 대하지만 아랫사람만큼은 예를 갖춰서 윗사람을 상대해야 하듯이. 일본인 및 일본계 근로자가 한국 기업에 와서 당황하는 부분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일본은 연하, 하급자건 연상, 상급자건 상호 존중을 요하지만 한국은 그놈의 나이 직급 따지기가 너무 심해서 하급자가 하대받는 것이 당연시되니까 처음에 이런 분위기를 낯설어하는 것이다. 눈치가 중요한 문화인 것은 똑같으나 그 양상이 확연히 다르다고 보면 된다.[31] 사실 몇몇 일본인조차도 이런 문화를 답답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때문에 오사카나 후쿠오카 주민들이 그쪽에서 별종 대우를 받는다고 한다.[32] ex)일본군/인물 문서 참고[33] 사실 현대 한국에서 보여지는 권위주의적이고 서열 중심의 문화, 부조리가 많은 징병시스템에 영향을 크게 끼친 원인요소 중 하나가 일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기존의 전근대적인 잔재를 빠르게 청산하고 문민통제를 일찍이 실현하면서 상대적으로 이전에 비해 완화된 것이고 한국의 경우 뒤이은 군사독재와 고도 경제성장을 위해 국가적으로 오랫동안 강조된 집단주의, 그리고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징병제때문에 일제강점기와 일본군에 영향받은 사회 전반적인 경직성이 현재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34] 일제시대 한국의 합병 및 주권 침탈을 옹호하기 위해 일부러 조선의 거리의 지저분하거나 초라한 모습들만을 강조했으나 본인들도 빈민가 부분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35] 상위 집합은 있을 수 있다. 즉, A집합(나)과 B집합(너)이 서로 교집합이 없지만, U라는 집합(우리)으로 묶이고, 그 위에 W라는 집합(너희)과 교집합 없는 상태로 싸그리 Z(사회)라는 집합으로 묶이는 식. 유럽식에는 '우리'라는 개념이 굉장히 희박한 편.[36] 예를 들면 사소한 일에 집착하여 쉽게 체념하지 못하는 경우에 쓰는 말로 '''왕생할 때가 나쁘다(往生際が悪い)'''가 있다. 속세에 미련을 버려야 극락왕생 하는데, 그걸 못하고 미련을 가지니 얼른 포기하라는 뜻이다.[37] 심지어 '요단강 건넌다'는 관용구를 비종교인들까지 쓸 정도로 기독교적인 요소까지 첨가된 언어가 한국어이다.[38] 할로윈 다음날인 만성절(all saint's day)은 한국의 추석, 일본의 오봉처럼 조상의 영혼을 추모하는 날이다.[39] GHQ에서 신문, 방송 등 문화부문까지 검열한 결과다.[40] 원래는 이러지 않았는데 '일본을 되찾으려다 보니' 전후 일본을 안보, 경제, 정치적으로 꽉 쥐고 있는 미국에게 당분간 굽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대단한 친미파가 되어버렸다. 또한 일본의 소위 우경화문제에 있어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중국의 부상이라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일본에게 있어 미국은 동/남중국해에서 중국으로부터 자국 핵심이익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아군이 되어버렸다.[41] 일본은 초등학교까지 알아서 짜주지만, 중고등학교부터는 스스로 선택해서 듣는 수업중점이다보니 안듣는 과목은 잊혀진다.[42] 반대로 일본인들은 한국인의 목소리가 꽤 낮고 굵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일본 구글 검색창에 '한국인 목소리'(韓国人声)라고 치면 '''허스키'''(ハスキー), '''낮다'''(低い)가 자동 연관검색어로 뜬다. 그런데 이게 결코 헛된 게 아닌 것이, 실제로 한국어는 메이저 언어 중에서는 드문 자질인 기음성에 따른 의미 변별을 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즉, 허스키한 소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뜻. 일본어를 포함한, 우리가 자주 들어 본 언어들은 중국어 및 그 하위 그룹 언어들을 제외하면 거의 유성성에 따른 의미 변별을 한다.[43] 사실 고추나 후추의 재배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배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주로 교역품으로 취급했던지라 잘 쓰이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고추냉이의 경우도 마찬가지라서 고급요리에만 쓰였던 상황이고[44] #[45] 실제로 일본은 여전히 식당이나 술집, 카페, 심지어 맥도날드같은 패스트푸드점에서도 실내 흡연이 가능한 국가이다.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에서도 금연 구역을 크게 지정해놓을 정도로 엄격한 한국은 물론이고, 한국에 비해 자유로운 서구권을 기준으로도 흡연에 대해서 상당히 너그러운 분위기다.[46] 당연히 도조 히데키 때문에 생긴 비하어이다. 콜 오브 듀티 : 윌드 앳 워에서도 일본인들을 Japs가 아닌 Tojo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47] 발음을 '플리즈'가 아닌 '프리즈'에 가깝게 하면 더욱 완벽.[48] 정작 please는 한국어나 일본어의 경어법과 100% 대응하는 표현이 아니다. 부탁을 목적으로만, 그것도 잘 안 들어줄 것 같은 내용을 부탁할 때 제한적으로 쓸 수 있는 표현.[49] 사우스 파크에선 미국이 일본에 원폭을 떨군 게 돌고래라고 뻥쳐서 이걸 믿고 돌고래나 고래들을 죄다 학살하는 등신들이라고 묘사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근데 트레이 파커 부인은 일본인이다.[50] 다만, 영국 북부에 위치한 덴마크령 섬인 페로 제도는 정말로 식량 문제로 인해 고래고기의 섭식이 일반화된 곳이다. 여긴 너무나도 자연환경이 척박해서 농업대신 어업과 포경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라서 그렇다. 물론 세계적인 선진국이자 복지천국인 덴마크의 속령이라서 식량을 수입해오면 그만이긴 하나, 본국을 거쳐서 운송되는지라 물가가 비싸서, 여지껏 대부분의 주민들이 고래고기로 연명해온 것이다. 다만, 현재는 고래고기가 중금속 오염이 심각한 식재료라는 사실때문에, 현지의 자치 정부에서 고래의 포획과 섭식을 완전히 중단시켰고, 덴마크 본국에서 수입한 농산물을 배급하고 있다.[51] 한국 사회에서 개를 식육용이 아닌 애완용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게 되면서 개고기를 취급하는 점포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음지에선 남의 애완견을 훔쳐서까지 식용하는 사람이 꽤 있는 것과 같다.[52] 다만 한국인의 절반 가량이 일본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보고 있고 그 역으로도 마찬가지이듯 양국 국민 간의 악감정은 세계적으로도 잘 알려져있다.[53] 위키백과 일본어판에 일본의 한국인과 결혼통계를 참고하자. 일본인 여성과 남성의 한국인과의 연도별 혼인건수 비율이다 일본의 국적별 혼인통계이다.[54] 사실 이것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정부에서 일본 기업에 대해 한국 진출에 대한 편의를 상당히 많이 봐주었던 것이 큰 이유 중 하나다.[55]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중산층이 자리잡은건 1960~70년대 고도성장기에 출현한 것이지, 패전 이전까지 일본 국민 대다수은 최저임금도 안되는 빈곤층이었다. 이는 일본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문화권에도 적용되는데 과거 18세기~19세기 유럽권과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미국만 보더라도 당장 산업화가 시작되던 시기의 대다수의 국민들은 노동자로서 심하게 착취당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56]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제시기 시절 지배민족이었던 일본인이 식민지인보다 우대를 받았던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일본인이 열악한 상황에 처한 군인이나 노동자 정도였다면 한국이나 중화권 식민지 출신들은 그냥 '노예'였다고 보면 편하다.[57] GHQ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를 뜻하며 딱히 미국만이 아니라 중일전쟁으로 지분이 있는 중화민국과 관동군과 싸운 소련 등 여러 국가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원래는 연합국 각국이 독일처럼 일본을 분할 점령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실제로 미국은 중화민국에게 류큐 제도를 넘기려고 했으나, 장제스가 사양했다.# 결국 미국의 지분이 제일 크고 영향력이 강했으니 미국의 이미지가 강한 것일 뿐이다.[58] 주요 요직들은 구 사쓰마, 조슈 번 출신들이 독점했다.[59] 지역마다 인원을 할당해서 할당된 인원을 채우지 못할 경우 세금 감면을 안해주거나 자치단체 보조금을 깎았다.[60] 이 때 떡밥으로 내건 것이 세금 감면, 농토 지원(물론 식민지로 만든 조선이나 대만의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다.), 군 면제였다. 하지만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에는 농토 지원 그런 거 없고, 개척단이고 뭐고 얄짤없이 다 강제 징집해갔다.[61] 사실 냉전 당시 제 1세계 대부분의 공통점이 미국으로 인해서 부활한 것이다. 유럽은 마셜 플랜으로 일본은 6.25 전쟁으로 한국은 베트남 전쟁으로 공교롭게도 이 모두 다 공산주의란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즉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위해 재건되었다는 공통점.[62] 일부는 일본 패망 후 잔류하여 일본계 중국인이 되었다.[63] 당연한 얘기지만 결혼 이민자들은 대부분 등록외국인이다. 일본인 결혼 이민자 가운데 600명 정도가 귀화했으나 이들은 외국인으로 취급되지 않는다.[64] 90일 미만 체류자.[65] 90일 이상 체류하는 외국인으로 지문 날인을 해야 한다.[66] 심지어 한국의 삼국시대 등 고대의 복식을 두고도 왜색 논란이 이는 판국이기 때문에 대놓고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일본의 이미지를 쓰는 것은 국민정서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 일본인들 역시 가급적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기도 하니 더욱 일본풍 이미지는 설 자리를 잃는다.[67] 일본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미귀국 납치피해자는 12명이고 행방불명자는 470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