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토 프레밍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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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tto Preminger'''
(1905. 12. 5. - 1986. 4. 23.)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영화감독. 로라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190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비슈니츠[1] 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이로 태어났다. 프레밍거는 9살이 될 때까지 비슈니츠에서 거주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상황이 불안해지자 수도였던 빈으로 이주하게 된다. 프레밍거는 그곳에서 법학을 배웠지만, 동시에 연극에 매료되어 배우를 지망하게 된다. 그는 빈의 유명 배우였던 막스 라인하르트 아래서 연기와 연출을 수련했으며, 국립 극장에서 연출 담당직을 제안받기도 하였다.
연극 연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프레밍거는 영화 프로듀서들에게서 연출 제의를 받게 되었고, 1931년 <위대한 사랑>을 제작함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러나 그는 영화에 그다지 많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이후로는 연극에 다시 집중한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영화 프로듀서 대릴 자눅의 영화 연출 제의를 받자 다시 영화 연출을 시작하였으며, 아예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프레밍거는 미국 영화계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로라> 이전까지는 그다지 명성을 얻지 못한 편이었다. <로라> 이후로 미국 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프레밍거는 점진적으로 명성을 얻어갔으며, 1950년대 들어서는 아카데미 감독상에 몇 차례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65년작 <버니 레이크의 실종>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거의 전부 흥행과 비평 측면에서 모두 참패하였으며, 이후 프레밍거의 명성은 전성기에 비해 사그라들게 된다. 프레밍거는 1986년 뉴욕에서 사망한다.
프레밍거의 작품들은 (당대 기준) 파격적인 주제로 유명하다[2] . <살인의 해부>에선 미국 영화 최초로 '팬티'나 '강간'과 같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워싱턴 정가>에서는 동성애를,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에서는 헤로인 중독을 다루었다. 이런 프레밍거의 도전적인 태도는 미국 영화의 검열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프로듀서도 겸임해 영화의 전권을 휘두르는 행동 방식도 유명했는데, 이런 프레밍거의 행보는 고전 할리우드 스튜디오 체제에서 독립 영화식 제작 방식을 선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레밍거는 미국에서 배우로도 유명했다. 특유의 독일 악센트 때문에 주로 독일인 역 아니면 나치 역이나 악역을 맡은 편이었다. 배우로 출연한 작품 가운데서는 빌리 와일더의 <제17 포로수용소>가 유명하다. 이처럼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실제 성격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촬영장에서는 독재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배우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고. 사생활도 엉망이었던지라 첫 아내가 있음에도 집시 로즈 리[3] 랑 바람을 피우는 등 오픈 릴레이션십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이혼해버리지만. 이외 출연한 배우랑 스캔들 나는 일도 잦았다.
프레밍거는 앨프리드 히치콕과 함께 당대의 스타 감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원래부터 배우로 유명했으며, 대외 활동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영화 감독들이 조명을 별로 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셀러브리티로서 이름을 떨쳤다.
당대 평론가들에게서는 촬영장에서의 태도나 대중적 인기, 자극적인 소재 등으로 인해 많이 비판을 받았지만, 작가주의의 발흥과 함께 프랑스, 영국 등에서 재조명되었다. 여러 평론가 가운데서도 자크 리베트나 장 뤽 고다르가 프레밍거를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다.
의외로 60년대 배트맨 TV시리즈에서 미스터 프리즈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대표작만 기재했다.
'''Otto Preminger'''
(1905. 12. 5. - 1986. 4. 23.)
1. 개요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영화감독. 로라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2. 생애
190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비슈니츠[1] 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이로 태어났다. 프레밍거는 9살이 될 때까지 비슈니츠에서 거주했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상황이 불안해지자 수도였던 빈으로 이주하게 된다. 프레밍거는 그곳에서 법학을 배웠지만, 동시에 연극에 매료되어 배우를 지망하게 된다. 그는 빈의 유명 배우였던 막스 라인하르트 아래서 연기와 연출을 수련했으며, 국립 극장에서 연출 담당직을 제안받기도 하였다.
연극 연출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프레밍거는 영화 프로듀서들에게서 연출 제의를 받게 되었고, 1931년 <위대한 사랑>을 제작함으로써 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그러나 그는 영화에 그다지 많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이후로는 연극에 다시 집중한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영화 프로듀서 대릴 자눅의 영화 연출 제의를 받자 다시 영화 연출을 시작하였으며, 아예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나 프레밍거는 미국 영화계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로라> 이전까지는 그다지 명성을 얻지 못한 편이었다. <로라> 이후로 미국 영화계에서 입지를 다지기 시작한 프레밍거는 점진적으로 명성을 얻어갔으며, 1950년대 들어서는 아카데미 감독상에 몇 차례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
1965년작 <버니 레이크의 실종> 이후 제작한 작품들은 거의 전부 흥행과 비평 측면에서 모두 참패하였으며, 이후 프레밍거의 명성은 전성기에 비해 사그라들게 된다. 프레밍거는 1986년 뉴욕에서 사망한다.
3. 기타
프레밍거의 작품들은 (당대 기준) 파격적인 주제로 유명하다[2] . <살인의 해부>에선 미국 영화 최초로 '팬티'나 '강간'과 같은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했고, <워싱턴 정가>에서는 동성애를,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에서는 헤로인 중독을 다루었다. 이런 프레밍거의 도전적인 태도는 미국 영화의 검열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프로듀서도 겸임해 영화의 전권을 휘두르는 행동 방식도 유명했는데, 이런 프레밍거의 행보는 고전 할리우드 스튜디오 체제에서 독립 영화식 제작 방식을 선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프레밍거는 미국에서 배우로도 유명했다. 특유의 독일 악센트 때문에 주로 독일인 역 아니면 나치 역이나 악역을 맡은 편이었다. 배우로 출연한 작품 가운데서는 빌리 와일더의 <제17 포로수용소>가 유명하다. 이처럼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실제 성격도 좋은 편은 아니었다. 촬영장에서는 독재자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배우들에게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고. 사생활도 엉망이었던지라 첫 아내가 있음에도 집시 로즈 리[3] 랑 바람을 피우는 등 오픈 릴레이션십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이혼해버리지만. 이외 출연한 배우랑 스캔들 나는 일도 잦았다.
프레밍거는 앨프리드 히치콕과 함께 당대의 스타 감독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원래부터 배우로 유명했으며, 대외 활동에 거리낌이 없었기에 영화 감독들이 조명을 별로 받지 못하던 시절에도 셀러브리티로서 이름을 떨쳤다.
당대 평론가들에게서는 촬영장에서의 태도나 대중적 인기, 자극적인 소재 등으로 인해 많이 비판을 받았지만, 작가주의의 발흥과 함께 프랑스, 영국 등에서 재조명되었다. 여러 평론가 가운데서도 자크 리베트나 장 뤽 고다르가 프레밍거를 존경했다고 알려져 있다.
의외로 60년대 배트맨 TV시리즈에서 미스터 프리즈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4. 필모그래피
대표작만 기재했다.
- <로라> (1944)
- <데이지 케니언> (1947)
- <인도가 끝나는 곳> (1950)
- <천사의 얼굴> (1953)
-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 (1956)
- <슬픔이여 안녕> (1958)
- <살인의 해부> (1959)
- <엑소더스> (1960)
- <버니 레이크의 실종> (19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