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리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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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ques Rivette
1928.03.01 - 2016.01.29
프랑스의 영화 감독, 연극 연출가. 누벨바그 세대 감독으로 꼽히며 카예 뒤 시네마 평론가 감독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누벨바그 세대 감독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영화를 만들었다. 주로 현실과 허구 간의 경계를 흐트러트리거나, 미스터리와 연극, 마술을 통해 영화의 서사를 실험하는데 관심을 가졌으며 때문에 메타픽션적인 성향이 강하다. [1] 연극이라는 소재를 자주 썼으며, 판타지/미스터리 영화 비중도 은근히 있는 편. 때문에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그의 영화를 ‘픽션의 집’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루이 푀이야드, 오슨 웰즈 후기작과 하워드 혹스 같은 서사 구조을 독특하게 뒤틀어놓은 영화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앙토냉 아르토나 루이지 피란델로 같은 현대 연극의 선구자들도 자주 언급된다. 에릭 로메르와 다른 방식으로 문학적 박식함을 자랑하는것도 특징. 드니 디드로 [2] 와 장 라신, 루이스 캐럴, 오노레 드 발자크 등이 언급된다.
여성 주인공을 많이 내세웠으며 [3] , 모호한 시공간 묘사나 즉흥적인 제작 방식 [4] 도 특징으로 꼽힌다.
2009년 제인 버킨을 주연으로 내세운 작은 산 주변에서를 마지막으로 건강이 악화 [5] , 영화계에서 은퇴해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6년 사망했다.
리베트의 영화 특징으로는 '''영화 분량이 엄청나게 길다'''라는 점이 있다.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 데뷔작과 달리 그의 데뷔작인 파리는 우리의 것은 2시간 20분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긴 분량을 자랑했다. 그러더니 세번째 영화인 미치광이 같은 사랑에서는 '''4시간 10분'''으로 되더니, 네번째 영화인 아웃 원에서는 '''12시간 10분'''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다행히 (?) 아웃 원을 배급하는 과정에서 지쳤는지 [6] 상영 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래도 기본 2시간 반에 5시간 정도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러다보니 누벨바그 멤버 중에서는 가장 먼저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가장 힘들게 만들었으며, 흥행이나 인지도도 안습했다. [7] 그나마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도 1974년에 발표한 셀린느과 줄리 배타러 가다부터였고, 본격적으로 거장 대접 받은 것도 1980년대 말부터였다. 상술했듯이 DVD와 DCP 상영이 본격화된 2000년대에서야 접근 사정이 나아진 편. 로메르가 경제적인 제작 방식으로 무수한 영화를 만들고, 샤브롤이나 트뤼포가 대중적 지지를 얻었던거나 고다르가 집단 창작을 통해 왕성하게 영화를 쏟아낸것과는 대조적. 심지어 내용도 난해한 편인지라 일반 관객은 물론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꽤나 난이도 있는 감독으로 꼽힌다.
Jacques Rivette
1928.03.01 - 2016.01.29
1. 개요
프랑스의 영화 감독, 연극 연출가. 누벨바그 세대 감독으로 꼽히며 카예 뒤 시네마 평론가 감독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2. 소개
누벨바그 세대 감독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형태의 영화를 만들었다. 주로 현실과 허구 간의 경계를 흐트러트리거나, 미스터리와 연극, 마술을 통해 영화의 서사를 실험하는데 관심을 가졌으며 때문에 메타픽션적인 성향이 강하다. [1] 연극이라는 소재를 자주 썼으며, 판타지/미스터리 영화 비중도 은근히 있는 편. 때문에 영화평론가 조너선 로젠봄은 그의 영화를 ‘픽션의 집’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루이 푀이야드, 오슨 웰즈 후기작과 하워드 혹스 같은 서사 구조을 독특하게 뒤틀어놓은 영화감독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앙토냉 아르토나 루이지 피란델로 같은 현대 연극의 선구자들도 자주 언급된다. 에릭 로메르와 다른 방식으로 문학적 박식함을 자랑하는것도 특징. 드니 디드로 [2] 와 장 라신, 루이스 캐럴, 오노레 드 발자크 등이 언급된다.
여성 주인공을 많이 내세웠으며 [3] , 모호한 시공간 묘사나 즉흥적인 제작 방식 [4] 도 특징으로 꼽힌다.
2009년 제인 버킨을 주연으로 내세운 작은 산 주변에서를 마지막으로 건강이 악화 [5] , 영화계에서 은퇴해 투병 생활을 하다가 2016년 사망했다.
2.1. 엄청나게 긴 분량과 안습한 영화 역정
리베트의 영화 특징으로는 '''영화 분량이 엄청나게 길다'''라는 점이 있다. 다른 누벨바그 동료들 데뷔작과 달리 그의 데뷔작인 파리는 우리의 것은 2시간 20분 정도 되는 상대적으로 긴 분량을 자랑했다. 그러더니 세번째 영화인 미치광이 같은 사랑에서는 '''4시간 10분'''으로 되더니, 네번째 영화인 아웃 원에서는 '''12시간 10분'''이라는 엄청난 분량으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다행히 (?) 아웃 원을 배급하는 과정에서 지쳤는지 [6] 상영 시간이 많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래도 기본 2시간 반에 5시간 정도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러다보니 누벨바그 멤버 중에서는 가장 먼저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가장 힘들게 만들었으며, 흥행이나 인지도도 안습했다. [7] 그나마 대중적으로 주목받게 된 계기도 1974년에 발표한 셀린느과 줄리 배타러 가다부터였고, 본격적으로 거장 대접 받은 것도 1980년대 말부터였다. 상술했듯이 DVD와 DCP 상영이 본격화된 2000년대에서야 접근 사정이 나아진 편. 로메르가 경제적인 제작 방식으로 무수한 영화를 만들고, 샤브롤이나 트뤼포가 대중적 지지를 얻었던거나 고다르가 집단 창작을 통해 왕성하게 영화를 쏟아낸것과는 대조적. 심지어 내용도 난해한 편인지라 일반 관객은 물론 영화광들 사이에서도 꽤나 난이도 있는 감독으로 꼽힌다.
3. 기타
- 루앙 출신인데, 루앙에서 화형당한 잔 다르크에 대한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 감독 데뷔전, 카예 드 시네마 비평가 멤버 중에 유일하게 조감독 경력이 있다. 자크 베케르와 장 르누아르 조감독으로 일한 바 있다.
- 평상시엔 꽤나 유순하고 웃음이 특이한 정도로 조용한 사람였지만 [8] , 누가 카예 드 시네마 비평가 아닐까봐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할때는 상당히 박식하고 공격적이었다. 심지어 장 뤽 고다르나 프랑수아 트뤼포도 지식량에 한 수 접고 들어갔을 정도. 특히 마음에 안 드는 감독은 대차게 까는 걸로 유명했다. 대중적으로는 90년대 말 제임스 카메론, 스티븐 스필버그, 스탠리 큐브릭 디스 건이 유명하다. 반대로 좋아하는 영화는 평과 상관없이 열렬히 지지했는데, 그가 좋아했던 영화로는 폴 버호벤의 쇼걸이 있었다. 비평가 시절엔 알제리 전투로 유명해지는 질로 폰테코르보를 잘근잘근 깐 (...) '천함에 대하여'라는 글로 유명세를 탄 바 있다. 정작 글을 펴내는건 안 좋아해서 평론집은 사후인 2018년에서야 프랑스에서 나왔다고 한다.
- 누벨바그 연장자였던 에릭 로메르하고는 한때 애증의 관계였다. 로메르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였고, 68혁명을 거치는 동안 급진적인 카예 드 시네마 평론가들과 충돌을 일으켰다. 충돌이 심해지자 리베트가 개입해 로메르를 편집장에서 잘라버리게 되고 때문에 아웃 원 찍을때까지는 절연 상태였다고 한다. 아웃 원 찍고 난 뒤로는 사이가 원만해졌다고.
4. 필모그래피
- <파리는 우리의 것> (1961)
- <수녀> (1966)
- <미치광이 같은 사랑> (1969)
- <아웃 원> (1971)[9]
- <셀린느와 줄리 배 타러 가다> (1974)
- <대결> (1976)
- <북서풍> (1976)
- <북쪽에 있는 다리> (1982)
- <메리 고 라운드> (1983)
- <지상의 사랑> (1984)
- <폭풍의 언덕> (1985)
- <4인조> (1989)
- <누드 모델> (1991)[10]
- <잔 다르크> (1994)[11]
- <파리의 숨바꼭질> (1995)
- <은밀한 방어> (1998)
- <알게 될 거야> (2001)
- <마리와 줄리앙 이야기> (2003)[12]
- <도끼에 손대지 마라> (2007)
- <작은 산 주변에서> (2009)
[1] 영화 만드는 과정과 정치를 연결시키고자 했던 고다르의 메타픽션이랑 달리 리베트의 메타픽션은 정치적이기 보다 미학적인 측면에 치중해 있었다.[2] 디드로는 리베트 영화의 중요한 키워드로 꼽힌다. 디드로 작품인 수녀를 영화화하기도 했을 정도.[3] 특히 셀린느와 줄리 배타러 가다는 페미니스트들에게 각광 받아 수잔을 찾아서 같은 미국 영화에도 영향을 미쳤다.[4] 홍상수의 쪽대본 제작방식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셀린느와 줄리 배타러 가다 이후 배우들이 각본을 써오거나 촬영 환경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는 경우가 많았고 본인도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몰랐다고 한다. 다만 후기로 갈수록 많이 줄어들었다.[5] 알츠하이머를 앓았다고 한다.[6] 한동안 상영용 프린트가 딱 한 벌 밖에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완전판 상영은 DCP 리마스터링 되기 전까지 세계적으로 드문 일이였으며 (한국보다 예술영화 상영 상황이 좋은 일본조차 상영을 위해 펀딩을 했으며, 호주에서는 2014년에서야 겨우 틀 수 있었다고 한다.), 전세계적으로 관람한 관객 수도 1000명 정도 밖에 안된다는 얘기가 있다. 한국은 그나마 운이 좋아서 2007년에 첫 상영 후 두 차례 상영한바 있다. 참조[7] 해외에서도 미지의 누벨바그 감독, 이런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씨네필 뿐만이 아니라 영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단독 연구서가 별로 없는 감독으로 꼽힌다. (...)[8] 얼굴 팔리는 대외 활동을 좋아하지 않아 영화제 참석해 얼굴 드러내는것도 꺼렸다고 한다. 2021년 임재철 평론가가 강연에서 밝히길, 친구가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만난 리베트에게 사인을 요청했더니 당황하더니 '왜 나한테 사인을 받으려고 하는 거냐, 영화 공부 안 하고 뭐 하냐'라고 질책하면서 거절했다고 한다.[9] 12시간짜리 작품. 4시간 정도로 편집한 버전도 있다.[10] 2시간짜리 축약본이 존재한다.[11] 1부 '전투'와 2부 '화형'의 두 파트로 구성되어 있다.[12] <대결>, <북서풍>과 삼부작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