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원
1. 신천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희원
오희원은 1890년 1월 15일 황해도 신천군 신천면 사직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졸업반 재학 중 일제에 의해 대성학교가 폐교되자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익문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그는 192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서기로 임명되어 근무하였다.
그는 김홍서(金弘敍), 박은식 등과 함께 일제의 잔악상을 널리 알리는데 주력하였으며, 1922년 3월 8일에는 임시의정원 황해도 의원에 선출되었다. 여기서 입법활동을 계속하는 일방 중국내 각지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22년에는 상하이에서 동지들과 함께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조직하여 한 중간의 공동항쟁을 모색하였다. 여기에서는 교제과(交際科) 간사로서 활동을 하였다. 또한 국민대표회의의 도인권(都寅權) 등이 제출한 "의정원에서 국민대표회 추진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요지의 인민청원안 의안을 신익희, 차이석 등과 함께 동의하기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와 행보를 함께했던 그는 8.15 광복 후 귀국하여 서울 영등포에 거주하다 1950년 7월 3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창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2. 철산군 출신 독립운동가, 오희원
오희원은 1873년 3월 2일 평안북도 철산군 참면 이응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양기탁, 안창호, 전덕기 등이 설립한 신민회 평안북도 지회에서 활동했다. 특히 교육구국운동에 적극 가담한 그는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의 이사직을 맡았고, 평양의 대성학교(大成學校) 설립에 5천원을 기부하는 등으로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1911년 일제가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 800여 명을 일제히 검거했을 때, 오희원은 철산군감(鐵山郡監)으로서 신민회 군책임자로 지목되어 1911년 9월에 체포되고 경성지방재판소에서 1912년 9월 28일 징역 7년의 언도를 받았다. 그는 이에 맞서 법정 투쟁을 전개한 끝에 1913년 3월 20일의 공소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으나, 실질적으로 2년간의 옥고를 겪었고, 그 과정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단학회(檀學會)에서 사승(祀承)을 맡았다고 하며, 1936년 8월 3일 철산군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오희원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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