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검성
1. 개요
王儉城
고조선의 도성. 고조선의 본래 수도는 아사달이라고 전해지는데 기원전 194년 위만이 도읍지로 정하여 기원전 108년 왕검성 전투에서 한(漢)나라의 군대에 포위되어 수개월 동안의 항전 끝에 결국 투항하여 고조선은 멸망했다.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한다.
왕검성이라는 이름은 왕검을 임금이라는 말로 해석해 ‘임금의 성’ 즉, 도읍이라는 뜻의 일반 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검성이 특정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의 명사라면 그 지역이 어디인지는 의문이 된다.
2. 위치
왕검성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데 지금의 요동지역이라는 설, 지금의 평양지역이라는 설 등의 여러 가지 설이 있다.
2.1. 평양설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설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왕검성이 현재의 평양 지방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기원전 281년 무렵부터 단군조선의 수도로서 자리잡기 시작했고 약 170년 정도 고조선의 수도로서 기능하였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평양에서 도성이라고 입증할만한 유물이 발굴되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여담이지만 평양에 북한 당국에서 단군의 무덤이라 주장하는 단군릉이 있는데 본래 평이했던 무덤을 체제선전을 위해 개건하고 날조하였다.
2.2. 요동설
고조선의 왕검성으로 천도 전 중심지가 요동 지역으로 추정되는데 평양으로 천도 없이 멸망할 때까지 쭉 요동이 도읍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서 왕검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를 인용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기의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해 고조선부터 위만조선의 멸망까지 도읍이 계속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고학자 정인성은 왕검성 대동강북안설’에 대해 반박하며 위만조선과 왕검성의 위치를 랴오둥 반도 즉, 요동 지역으로 비정하며 “위만조선 왕검성은 오히려 요동반도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군현이 설치되면서 대동강 유역권으로 옮아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