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만

 



위만조선 초대 국왕
衛滿王 | 위만왕
왕호
위만왕(衛滿王)

위(衛)

만(滿)
가족
2대 왕(아들), 위우거(손자)
생몰
? ~ ?
재위
기원전 194년 ~ ?
1. 개요
2. 설명
3. 위만의 정체성
3.1. 중국에서 바라보는 위만
4. 근대 이전의 위만 인식
5. 삼한정통론
6. 대중문화에서의 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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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위만조선의 초대 국왕. 기록상으로 전해지는 한국사 최초의 군사정변 주동자이기도 하다. 연왕 노관한나라를 배신하고 흉노로 망명 했을 때, 위만(衛滿)은 고조선으로 망명하며 서북 땅을 지키다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 시대를 개막했다.[1] 참고로 위만의 성씨가 기록에 따라 다르게 기록되었는데, 잠부론(潛夫論)과 삼국유사에서는 성씨가 衛(지킬 위)가 아닌 魏(나라 이름 위)로 기록되어 있다.

2. 설명


기원전 202년경, 중국을 통일하고 전한(前漢)을 성립한 한고제는 권력에 위협이 되는 통일공신들을 토사구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고제의 어릴 적 친구이자 공신인 연왕(燕王) 노관(盧綰)은 자신 역시 숙청될까 두려워 먼저 모반했다 흉노로 달아나는데, 이렇게 연나라[2]이 혼란스러운 시기에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연 땅에서 동쪽에 인접한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참고로 위만이 노관의 수하였다는 설 역시 있으나, 사마천사기에는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이라고 나와있다. 이는 연왕 노관이 모반해서 흉노로 갈 때, 위만이 망명했다는 내용인데, 이 문구를 가지고 위만이 노관의 수하였다고 무작정 단정짓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 건조하게 받아들이자면, 노관흉노로 들어갈 때, (노관의 수하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위만 역시 망명했다는 얘기일 뿐이기 때문.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서쪽의 번병(藩屛)이 되기를 청하였고 준왕은 이에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이후 위만은 서쪽 변방을 지키면서 의 망명한 무리들을 규합하여 계속 세력을 키웠는데, 기어코 기원전 194년 무렵 반란을 일으켜 자신을 받아준 준왕을 남쪽으로 쫓아내고 스스로 고조선의 이 되어 위만조선을 열었다.
위만은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등 주변의 작은 집단들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위만조선의 영토를 크게 넓혀, 현재의 북한에 해당하는 수준의 영역을 조선의 이름 아래 두는 전성기를 열게 된다. 이후 위만조선은 전한과 남쪽의 진(辰) 사이에서 교통을 막고 직접적인 교역 내지 조공을 방해하였다. 이로 인해 기원전 128년 위만조선 근방에 창해군을 설치한 후 폐지하고 결국 손자 대에 멸망에 이르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위만과 위만조선의 등장은 고대 한국에서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꽤 큰 정치 집단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3. 위만의 정체성


위만의 출신은 지금도 불분명한 측면이 있다. 때문에 여러 설들이 제기되고 있다.
우선 조선 사람이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근거는 사기에 상투를 틀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3] 그래서 한국의 초중고 국사 교과서에서는 위만을 조선인으로 보는 설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다. 학계에서도 위만을 조선인이라고 보는 시선이 상당히 강한 편인데, 다만 중국 유이민 세력 출신이나 이전부터 고조선의 문화에 영향을 받은 형태가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의견도 존재한다. 어쨌든 결론적으로는 위만조선도 고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계승한, 고조선 토착 지배층 세력과의 연합 정권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고 본다.
사마천사기에 의하면 朝鮮王満者故燕人也 라고 나와있다. 엄밀히 말하면 위만의 성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며, 중국 후대의 사서에서 성과 이름을 쓰는 중국인들의 습관 때문에 당시 그 지역에서 많이 쓰이던 衛씨성을 가진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해서 衛滿 이라고 표기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한의 연왕 노관 휘하의 장수였다는 설이 있지만, 이런 경우, 위만의 국적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기에 '燕人' 이라고 썼을 것이다. 따라서, 그를 '故燕人' 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가 노관이 책봉된 燕나라 국적을 갖고 살았던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그가 전국시대의 연나라 영역에 살던 사람이라는 것을 한나라의 관점에서 완곡히 표현한 것으로 봐야 한다.[4]
위만에 대해 기록한 중국 사서는 중국인 관점에서 쓴 것이기 때문에, 고조선과 교류가 있던 연이라는 국가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할 때, 연나라에 사는 조선인이 다시 조선으로 망명한 것을 기자조선과 같이 중국인이라고 기록했을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5] 실제로 위만조선 바로 전이나 전전 시대 쯤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의 영토를 2000리 정도 정복하여 만번한(滿潘汗)까지 영토를 넓힌 바 있었는데, 원래 거기 살았었던 고조선 사람들은 그냥 그대로 연나라에 편입됐다. 그들의 후손이 바로 위만이며, 위만이 자기 무리들을 끌고 고조선으로 찾아와 귀화한 것이라는 식의 주장. 그리고 애초에 연나라 지역은 중국인이 아닌 북방민족의 영토였다. 나중에 가서야 중국영토로 편입된것일 뿐이다.
한편, 위만의 국적 문제가 위만조선 정권의 정체성 문제와 직결되지는 않는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왜냐하면 위만조선도 조선이라는 국호나 그전부터 존재하던 정치 체제, 지배층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 수도도 왕검성에 그대로 뒀다. 여담으로 이게 위만이 조선인이라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만일 위만이 연나라 이민족이었다면 지배층 반발이 있었어야 한다는 주장. 물론 당장 왕이 쫓겨난 마당에 휘하 무리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 숙청이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님 반란이 성공한 이후 바로 외부 세력과 전쟁을 시작해 성과를 내면서 내부 불만을 잠재운 것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면 애초에 이 시기에 근대 들어서 확립된 민족 정체성 운운하는 것 자체가 맞냐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6] 어찌됐든 학계에선 위만조선도 고조선의 국가 정체성을 계승한, 고조선 토착 지배층 세력과의 연합 정권 성격이 강한 집단이었다고 본다.

3.1. 중국에서 바라보는 위만


사서에선 그가 연(燕)나라 태생으로 연왕 노관의 수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며, 중국의 어용 사학계에서는 이를 근거로 삼아 위만이 중국인이었으며 위만조선은 중화권 왕조의 속국, 지방 정권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古代卫氏朝鲜的建立者.

公元前二世纪初,辽东局势动荡,燕人卫满率千余人叛西汉入箕子朝鲜, 箕子朝鲜准王任命其为博士, 将其国西部封地百余里与卫满. 公元前194年卫满联合箕子朝鲜的部分反对国君的势力进攻国都王俭城,准王自海路亡命于半岛南部的马韩地区,卫满即位后,卫满统一了箕子朝鲜,并将势力扩展到了鸭绿江以南地区.设立了裨王、相、大臣、将军等官职,完善了古朝鲜的政治体制。

고대 위씨 조선의 건국자

기원전 2세기 초 요동에 세를 가지고 활동하였던 연나라인 위만은 약 천여 명을 이끌고 기자조선에 입성한다. 기자조선의 준왕이 그를 박사에 임명, 나라의 서부 백여리를 위만에게 봉한다. 기원전 194년 위만은 기자조선과의 연합을 반대하여 왕도 왕검성으로 진공, 준왕은 바다를 통하여 반도 남부의 마한 지역으로 망명한다.

卫满即位后,积极建立国家,并输入中原文化,使国家愈来愈强盛。汉武帝有感卫满朝鲜对汉朝的威胁愈来愈大,决定在公元前109年起兵远征朝鲜半岛。公元前108年,卫满朝鲜被灭,汉武帝把卫满朝鲜的国土分为四郡,分别为:乐浪郡、玄菟郡、真番郡、临屯郡,合称为“汉四郡”。

위만이 즉위 후, 위만은 기자조선을 통일하고, 그 세력은 압록강 이남 지역에 도달하였다. 비왕, 상, 대신, 장군 등 관직을 설립하고, 고조선의 정치 체제를 완성하였다. 위만 즉위 후 적극적으로 국가를 건립하며 중화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국가는 점차 강력하게 되어갔다. 한 무제는 위만조선이 점차 강해지는 것이 한조에 위협된다고 생각하고는(혹은 유감을 가지고), 기원전 109년 병사를 일으켜 조선 반도에 원정을 결정한다. 108년 위만조선을 파멸했고 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국토를 4군으로 분할하였다, 분별은 낙랑군, 현도군, 진번군, 임둔군, 일명 한사군이다.

古朝鲜即箕子朝鲜和卫满朝鲜的合称。箕子朝鲜乃殷商遗裔在朝鲜半岛上所建地方政权,臣于周,后又臣于秦,为周秦海外之属国。箕子朝鲜为卫氏朝鲜所取代,卫氏朝鲜为汉之“外臣”、属国。汉武帝伐朝鲜,裂其地为四郡,为汉的边疆辖区。有了箕子朝鲜,方有卫氏朝鲜,方有汉之四郡,方有高句丽史、渤海史,从而构成了东北古史、东北民族与疆域史的基本系列,而箕子朝鲜是为中国东北史之开端。

고조선, 즉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을 이르는 이름. 기자조선처럼 은나라의 후예(혹은 후손)로 조선 반도에 세워진 지방 정권이다. 주나라의 신하국 또한 진나라의 신하국, 즉 주 - 진나라의 해외 속국이다. 기자조선처럼 위씨 조선 역시 이어받아(신하국), 위씨 조선은 한나라의 외신, 속국이다. 한 무제가 조선을 벌하고, 그 땅을 4군으로 분열시켰으며, 한나라의 해구 변경이 된다. 기자조선, 위씨조선, 한나라의 사군, 고구려 역사, 발해 역사, 모두 동북 고사로부터 구성된다. 동북민족 강역사의 기초 계통이며, 또한 기자조선은 중국 동북사의 시작이다.

출처: 중국 바이두 백과 위만.(2012년 6월 24일자)

이를 보면 위만과 그의 위만조선을 기자조선과 함께 중국의 속국이자 중국 동북고사의 시작점으로 칭하고 있으며, 중국의 역사임을 명시하고 있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이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조선 공정이기 때문에 반박되었다.

4. 근대 이전의 위만 인식


조선시대 때, 조선단군기자에 대한 제사는 지냈으나 위만에 대한 제사는 지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찬탈자였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시작 이성계부터가 찬탈자인데 무슨 내로남불이냐 생각하겠지만, 조선의 경우 일단 형식 자체는 고려의 왕위를 선양받은 이성계가 나라 이름을 바꾼 것이라 찬탈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물론 형식으로 '선양' 어쩌고 하는 그런 걸로 수식하는 거지, 본질은 역사 속 왕위 찬탈과 별 다를 바 없었지만.[7]
실제로 당시 학식있는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여서 당연히 안 속았고 대부분은 찬탈자를 위해 일할 수 없다며 낙향한 데다(두문불출이 이 때 생긴 용어다) 당시 명나라의 황제인 주원장도 이걸로 이성계를 엄청 갈궈댔다. 문제는 이성계도 지지않고 바락바락 대들어서 전쟁 직전까지 갈 뻔 했지만...[8] 이렇듯 조선이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인 만큼 쿠데타에 민감했던 점[9]이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창업군주가 쿠데타로 즉위했다는 이유만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면 제2, 제3의 쿠데타가 계속 일어나 왕실의 정통성 문제가 극도로 심화될 수도 있었을 테니 더더욱 위만을 좋게 평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10]

5. 삼한정통론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

6. 대중문화에서의 위만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되었던 이현세의 천국의 신화 6부 주인공이다. 조선의 부족에서 태어나 한나라로 넘어가 연왕 노관 휘하의 무사가 되었다. 각성하면 목 뒤에 별모양 반점이 생긴다. 결국 여후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치우 창법(...) 13초식 '동귀어진'을 펼치지만 동료들이 여후에게 잡히자 인질 교환 조건으로 자신의 눈 한쪽을 스스로 떼어내고 풀려나 조선으로 향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끝난다.
[1] 원래 고조선이라는 단어는 일연삼국유사에서 위만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고조선이란 말을 쓴 거지만, 일연이 생존했던 고려시대 이전과는 다르게 조선시대 이후에는 이성계가 세운 근세 조선 왕조와 구분하기 위해 고조선의 의미가 위만조선까지 포함하도록 변화하였다.[2]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 랴오닝성에 해당한다.[3] 다만 이런 식으로 외지인이 현지식 복색을 하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남월조타처럼 아주 보기 드문 사례는 아니다. 여담으로 남월도 결국엔 위만조선처럼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하는데, 패하는 과정도 베트남에서는 위만조선처럼 내분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4] 사기에서 표현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국가 앞에 故 를 붙인 것은 전국시대에 있던 나라들과 한나라에 의해 책봉을 받은 나라들을 구분하기 위해 쓰였으며, 故라는 표현은 전국시대의 국가들을 표기하기 위해서 쓰였고, 그냥 나라 이름을 쓰는 경우는 한나라의 통일 후 책봉을 받은 나라를 표기하기 위해 쓰였다.[5] 중국인이 쓴 사서에는 야마토 진나라 동래설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인(왜인)도 선조가 중국인으로 기록되어있기도 하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현 일본 사학계에선 야마토 진나라 동래설에 대한 비판이 거센 편이다. [6] 사실 전근대 사회에서 나라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쪽은 피지배계층이지, 지배층이 아니었다. 당연히 피지배계층의 머릿수가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에 지배층이 아무리 이질적인 이들이라도, 피지배민들의 영향을 안 받을 수도 없고, 그들의 환심을 사고자 지배층 스스로가 정체성을 갈아치운 경우도 많다. 대표적인 경우 중 하나가 청나라다. 당시의 만주족 지배계층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에게 변발호복을 강요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자신들의 언어인 만주어도 잊어버릴 만큼 한족에게 완전히 동화되었고, 현재 청나라는 만주족 국가가 없다는 점도 고려되어 중국의 역사로 취급된다. 위만조선도 위만이 중국계건 조선계건간에 자기 스스로가 조선인들의 복식을 하고 입국해서 조선인들의 왕이 됐으니, 그 정체성이야 어찌되었건 상관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어차피 왕이 중국인이었다고 해도 고조선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계 황제가 있었던 북중국의 선비족국가 역시 한국사가 아닌 중국사(중국인의 주류인 한족이 아니라 선비족이긴 하지만)로 본다. 서로 다른 나라 왕실들끼리 통혼이 잦았고 그에 따라 동군연합도 많았던 유럽의 왕실들은 말할 것도 없고...[7] 송나라처럼 선양받고 이후 전대 왕조 후손들을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우대한 케이스도 있긴 했다. 여기에 해당되는 케이스가 아니라서 그렇지.[8] 실제로 홍무제는 주변인들을 무자비하게 갈궈서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도록 강요하는 수법을 즐겨썼다. 일례로 고려 말기에 철령위 땅을 내놓으라고 고려를 갈군 것이 대표적이다. 그나마 고려/조선 왕은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갈구는 선에서만 끝났지만, 자기 신하는 단어 하나만 잘못 써도 그걸 구실로 가차없이 목을 쳤다. 조선왕을 갈구지 않은 건 조선의 국력에 대한 과대평가 때문이었는데, 당대의 네임드 몽골군과 나하추를 물리친 이성계가 북원과 합심해서 중원을 치는 것을 염려했다. [9] 실제로 무오사화가 일어난 배경도 성종실록 사초에 조의제문, 즉 항우에게 왕위를 강탈당한 의제에게 조의를 바치는 문구가 들어간 게 발각당해서 발생한 건데, 이는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단종을 의제에게, 단종에게서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항우에게 빗대어서 세조를 비난하고자 쓴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 왕조에게 있어서 찬탈이란 단어는 가장 심각한 역린이였던 것. 그리고 조선의 개창으로 무너진 고려 또한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였음을 감안하면, 위만을 좋게 대접하지 않은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왔을 수도 있다.[10] 정반대의 케이스는 대한민국군사정권인데, 이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이유로 쿠데타 정당화를 위해 고려무신정권 지도자들이나 조선의 세조 같은 역사 속의 찬탈자들을 마구잡이로 미화하는 경향이 강했다. 인조의 경우는 삼전도의 굴욕 때문에 군사정권 시절에도 미화되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