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동진)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동진 제5대 황제'''
'''中宗 元皇帝 | 중종 원황제'''
'''묘호'''
'''중종(中宗)'''
'''시호'''
원황제(元皇帝)
'''연호'''
건무(建武, 317년 3월 ~ 318년 3월)
대흥(大興, 318년 3월 ~ 321년)
영창(永昌, 322년 3월 ~ 323년 2월)
'''출생'''
276년
'''사망'''
323년 (47세)
'''재위'''
'''동진의 진왕 '''
317년 ~ 318년 (1년)
'''동진의 황제'''
318년 ~ 323년 (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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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
사마(司馬)
''''''
예(睿)
''''''
경문(景文)
'''부친'''
아버지 사마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낭야 귀환
2.3. 건업 방비령과 진왕 즉위
2.4. 재건 진조의 천자
2.5. 도굴과 치욕
2.6. 능력이 부족했던 천자
3. 기타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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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晉)의 제5대 황제이자, 진나라를 중흥한 황제. 묘호는 중종(中宗)이고, 시호는 원황제(元皇帝). 휘는 예(睿). 자는 경문(景文). 즉위 이전의 작위는 낭야왕(琅邪王)[1]. 당대의 명필이다.
잡혀간 회제를 대신해 고위직이 되어 조정의 권한 대부분을 부여받았고 친척인 민제가 잡혀가 진나라가 본토를 잃자 강남으로 천도하여 왕조를 중흥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인간성에 결함이 있었고 전형(銓衡)을 부당하게 하는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2. 생애



2.1. 초기


함녕 2년(276년), 낙양에서 태어났다.
사마의의 넷째아들인 사마주의 손자이며 낭야공왕 사마근과 하후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사마예의 어머니의 이름은 하후광희(夏侯光姬)이고 는 동환(銅環)이었다. 아버지는 하후장(夏侯莊), 할아버지는 하후위(夏侯威)이며[2], 외증조부가 하후연이었다. 그래서 사마예는 하후연의 외현손자가 되는 셈이다.[3]
서진팔왕의 난으로 막장이었을 때, 사마예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양보를 잘하고 도량이 넓어서 명성이 높았다. 15세에 부친 사마근의 뒤를 이어 낭야왕(琅邪王)이 되었으며, 원강 2년(292년), 원외산기상시가 되어 업성에 있었다.

2.2. 낭야 귀환


건무 원년(304년) 8월, 사마예의 숙부였던 동안왕 사마요가 성도왕 사마영에게 피살되자 사마예는 자기에게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했는데, 사마영은 사마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매의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 남몰래 도망쳐 하양을 거쳐 낙양에 이르러 모친 하후씨를 모시고 임지인 낭야로 돌아왔다.

2.3. 건업 방비령과 진왕 즉위


영흥 2년(305년) 8월, 사공이었던 동해효헌왕 사마월이 그를 평동 장군으로 임명하여 서주를 감독하게 하고 하비를 지키게 했다. 이에 사마예는 자신의 친한 벗이었던 왕도를 사마에 임명하여 병무를 맡겼다.
영가 원년(307년) 7월, 회제 사마치는 사마예를 안동 장군으로 임명하여 양주와 강남을 총관장하게 하고 건업을 지키게 했다.
영가 5년(311년) 5월에는 진동 대장군이 되어 양주, 강주, 상주, 교주, 광주 등 5주의 업무를 맡았다.
건흥 원년(313년), 민제 사마업이 즉위하자 좌승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마업이 사마예에게 북벌을 명령했으나, 사마예는 강남의 안정 때문에 이를 거절했다. 곧 사마예는 서진의 승상이 되었으며 316년 장안이 곧 유총에게 함락될 것을 예견한 사마업은 사마예에게 조정의 모든 권한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이 조서는 길이 늦어서 다음 해인 316년 2월에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3월 사마예는 진왕(晉王)으로 즉위했다.

2.4. 재건 진조의 천자


결국 사마업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마예는 건업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사마예는 건업(建業)의 이름이 서진 민제 사마업(鄴 또는 業)의 이름과 같다 하여 이름을 건강(建康)으로 바꿨다. 사마예는 천하에 대사령을 내렸는데 대신 서진을 멸망시킨 유총석륵은 이 사면에서 제외되었다.
사마예는 진나라를 중흥했으나, 초기에는 명성이 낮고 북쪽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라 강남 호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사마예는 이 지방 풍속에 따르고 청렴한 정치와 은덕으로 보살피라는 왕도의 조언을 따라 호족을 인정하는 정책을 펼치니 차츰 호족들이 귀순해 왔다. 사마예는 왕도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의 사촌형 왕돈을 정남대장군에 봉했는데 장강 북부 일부 지방을 회복하여 강남이 안정되었다.

2.5. 도굴과 치욕


태흥 2년(319년), 북쪽의 전조 황제 유요가 숭양릉을 도굴한다는 소식을 듣자 분개하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서 통곡만 했다. 숭양릉은 사마소왕원희가 죽으면서 합장한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마예의 간곡한 부탁으로 유요가 계획을 뒤를 미루었고, 석륵이 전조를 멸망시켜 없던 일이 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동진은 왈칵 뒤집어졌다.[4] 동진의 2대 황제인 명제 사마소가 자신의 조상이 어떠한 분이냐고 왕도에게 물어봤을 때, 대답을 듣고 난 뒤 그는 이런 말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경이 말한 게 사실이라면 그 진나라가 오래가지 못한 게 당연하고 이 진나라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오."

한편 영가의 난에 휘말려 행방불명된[5] 임해공주가 우연히 건강에 들렀다가, 원제 사마예를 만났다. 임해공주는 전온의 딸이 자신에게 온갖 가혹 행위를 저지른 것을 사마예에게 알리며 자신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이에 머리 끝까지 화가 난 사마예는 임해공주를 구출하는 동시에 아울러 임해 공주에게 가혹 행위로 일관한 전온의 딸과 그 아비 전온을 잡아들여 참수해버렸다. 이후 임해공주와 종정 조통[6]의 중매를 서준 후에 그대로 조통에게 시집보냈다.
사마예가 왕도와 왕돈 등 낭야 지방 호족의 도움과 강남 호족의 연합으로 진나라를 중흥하여 강남만큼은 진나라의 영토에서 건져낸 것은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본토를 수복하여 안정을 시키려는 큰 뜻은 없었고 자질이 평범하여 강남에 안주했다.

2.6. 능력이 부족했던 천자


군자좨주 조적이 북벌을 건의했을 때는 마지 못해서 그를 예주 자사로 봉하고 경구를 지키게 했다. 조적은 뛰어난 용병술로 장강을 건너서 회음과 그 일대를 회복하고, 남하하는 석륵의 군대를 격파했다. 하지만 사마예의 무관심과 동진 조정의 지원 미비로 결국 철수해야 했고, 화병을 앓다가 옹구의 진채에서 숨을 거뒀다. 그리고 봉조정 주숭은 진원제가 황제가 되기 전에 북벌을 먼저 해서 중원을 수복하고, 칭제할 것을 간했다가 분노한 사마예에게 죽을 뻔 했다.
무엇보다 사마예는 인재 선발을 부당하게 했다. 점차 왕도왕돈 형제를 멀리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어 환심을 사는데 뛰어난 유외와 술에 취하면 가 되는 조협을 심복으로 중용했다. 이에 일찍부터 반역의 뜻을 품게 된 왕돈은 불만을 가지고 상소했으나, 사마예는 그냥 무시하였다.

2.7. 붕어


영창 원년(322년) 정월, 왕돈은 유외와 조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무창에서 군사를 일으켜 3월에 건강으로 쳐들어갔다. 사마예는 조협과 유외의 손을 잡고 울면서 그들에게 말을 주어 각기 스스로 살 길을 찾으라고 당부했다. 유외는 간신히 후조의 석륵에게 망명했지만[7] 조협은 연로해서 말을 못 타는 바람에 멀리 가지 못했다.
거기에 그는 인심을 잃어 결국 강승에서 사로잡혀 즉결 처형당하고 머리는 건강의 왕돈에게 보내졌다. 왕돈은 승상이 되었으나, 교만하고 횡포함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공물은 대부분 그에게 들어가고 심충, 전봉, 제갈요 등을 앞잡이로 세웠는데 이들은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남의 땅과 가옥을 멋대로 침입하고 빼앗으며 대낮에도 약탈을 일삼고 옛 무덤을 도굴했다. 이로 인해 사마예는 분통이 터져 윤11월, 재위 6년 만에 47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영창 2년(323년) 2월, 건평릉에 안장되었다.

3. 기타


여담이기도 하다만 어찌보면 요익중[8] 다음으로 그와 더불어 삼국지 최연소 끝판왕 2TOP으로도 바라볼 수 있다. 2명의 태어난 시점이 진세조의 재위기 한창 현역이었던 렵.

4. 둘러보기


'''동진의 역대 황제'''
서진 4대 민황제 사마업

'''5대 중종 원황제 사마예'''

6대 숙조 명황제 사마소




[1] 제갈씨의 본관이다.[2] 점괘 상 하후위는 나중에 황제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게 된다는 점괘가 있었는데 그걸 죽은 후에 이루게 되었다.[3] 사마근의 부장이었던 우금썸씽이 있어서 사마예는 사실 우금의 아들이란 이야기가 있는데 진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이 이야기는 남북조시대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에 나오는 것으로, 북조에서 남조의 정통성을 폄하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4] 도굴당한 진나라계 황릉은 나중에 유유가 북벌을 단행한 뒤 이민족들을 격파하고 황릉의 유물 등을 수습하면서 마무리되었다.[5] 실은 전온에게 팔려가서 노비가 되었다.[6] 조운의 아들과는 동명이인.[7] 그러나 유외는 이로부터 11년 후인 333년, 석호유요의 아들 유희와 전조의 잔당을 토벌하러 장안을 공격할 때 승상 좌장사로 종군하다가 전사한다.[8] 이미 마무리 되던 해에 출생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