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
1. 개요
프랑스의 화가. 19세기 낭만주의 예술의 최고 대표자로 손꼽히는 화가이다. 그의 라이벌로 불리는 앵그르가 신고전주의의 완벽함을 추구했다면 들라크루아는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다는 그들의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들라크루아의 팔레트는 프랑스의 위대한 팔레트다. 그만큼 풍부한 색채를 사용한 화가는 없다. 우리는 모두 들라크루아를 통하여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폴 세잔-
2. 생애
1798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샤랑통 생 모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름 있는 외교관이었지만 들라크루아가 7살일 때 사망했다. 어머니는 유명한 궁정 가구업자의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 따라 음악과 연극, 고전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8살 때 리세 앵페리알에 입학했다. 1814년 어머니가 죽어 누나 집에서 살다 1815년에는 숙부의 소개로 유명한 화가인 게랭 남작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에 관립 미술 학교에 들어갔고, 이 시기에 루브르 미술관에 드나들면서 루벤스와 제리코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1819년 제리코의 작품 <메두사호의 뗏목>을 보고 결정적으로 낭만주의를 신봉하게 되었다.[2] 이어 1822년에는 처음으로 낭만주의 그림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것으로 미켈란젤로와 루벤스를 떠올리게 하는 비애감이 살아 있는 작품이다.
들라크루아는 1824년 그리스 독립 전쟁에 공감하여 <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키오스 섬에서 그리스 인들이 투르크 인들에게 대량 학살당한 사건을 그린 것으로 1824년에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1827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를 발표했고, 이어 1830년 파리에서 일어난 혁명에 동참했으며,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렸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프랑스 정부 사절단에 끼어 모로코에 방문했는데 , 그 방문후 그의 그림에서는 색채를 효과적으로 쓰는 법과 붉은 색과 녹색, 푸른색, 오랜지색을 적절히 배합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귀국 후 1834년에 완성한 《알제의 연인들》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같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프레데리크 쇼팽과 조르주 상드와도 친분이 있어 그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상드의 아들인 모리스 디드방을 가르치기도 했다. 1835년부터 1861년까지 들라크루아는 많은 수의 대형 벽화를 제작했으며, 작품에 몰두하다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1863년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키가 유난히 작은 편인데, 웬만한 단신도 150은 넘는 것에 비해 142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그때 당시 프랑스 여성 평균키보다도 10cm 이상 작은 키이다. 하지만 옛날 사람이라 키가 작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