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image]
'''Pierre Auguste Renoir
오귀스트 르누아르
'''
'''본명'''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출생'''
1841년 2월 25일 프랑스 왕국 리모주 오트비엔
'''사망'''
1919년 12월 3일 프랑스 제3공화국 카뉴쉬르메르 도멘 데 콜레트
'''국적'''
프랑스 [image]
'''직업'''
화가, 조각가
'''분야'''
인상주의
[image]
매사추세츠 포그 미술관에 소장중인 <35세의 자화상>(1876)
[image]
르누아느의 대표작 중 하나인 '''이렌 캉 당베르 양의 초상화'''
1. 소개
2. 상세
3. 외부 링크
4. 관련 미디어


1. 소개


Un sein, c'est rond, c'est chaud. Si Dieu n'avait créé la gorge de la femme, je ne sais si j'aurais été peintre.

(유방, 둥글다, 따뜻하다. 하느님이 여자의 젖가슴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여성 육체를 묘사하는 데 특수한 표현을 사용했으며 풍경화에도 뛰어났다. 인상파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나게 화려한 멋을 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다.
난색을 찍은 솜뭉치로 문지른 듯 부드럽고 따뜻한 화풍을 가졌다. 그림 전체가 화사하고 부드럽다.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면 언제든 햇빛을 쬘 수 있다. 이 화풍이 워낙 개성적이라 르누아르는 따뜻한 화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르누아르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화사하지만 두 가지의 타입이 있다. 그림의 선이 없이 보들보들하게 그린 것, 화사함은 유지하되 고흐의 작품처럼 물감을 덧칠하고 자글자글하게 그린 것.
여성을 따뜻하고 사근사근하게 묘사하는 데에 도가 튼 화가이다. 르누아르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우아하며 부드럽고 다채롭다. 한 폭의 그림 그 자체. 누드도 정말 많다.
말년에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온몸에 마비가 오는 고통을 참으며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의 친구가 왜 그리 고통스러워 하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냐는 물음에,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 때문이네." 라는 명언으로 답한 적이 있다.
자화상은 유독 칙칙한 색깔을 썼다. 본연 화풍은 그대로라 나름 부드럽지만.

2. 상세


리모주에서 재봉사 집안에 태어났는데, 얼마 되지 않아 양친을 따라서 4살 때 파리에 나왔을 때 가정이 가난해서, 12~3세 때부터 도기 공방에 첨화직공으로 들어가 일했다. 그 동안에도 데생을 배우고 미술관에 다녔는데, 도기에 그림을 붙이는 기계가 발명되자 직공 일을 그만두고 회화에 전념했다. 그 때에 그는 글레르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동문으로 모네, 시슬레, 피사로가 있어 굳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처음에는 살롱에도 출품했는데, <리즈>(1867)의 상(像)을 중심으로 그의 작풍은 분명하여지고, 보불전쟁 후에는 파리 교외에서 모네, 시슬레와 함께 제작을 했다. 이어 인상파 제1회 전시회(1874)에 유명한 관람석을 출품했을 때 그 당시는 비난을 샀지만 1876년에는 대작 〈물랭 드 라 갈레트〉를 발표하여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광선과 춤추는 군중으로 완성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초기의 르누아르의 화풍은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지만 섬세하고 고전주의적인 느낌도 어느 정도 자아내며 테크닉적으로는 거의 회화의 극치라고 불릴만큼 정교했다. 1864년의 <로맹 라코 양의 초상>이나 친구였던 모네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리는 모네>, <라 그르누에르> 등 커리어 초기의 작품들은 로코코 시대의 느낌과 모네 류의 인상주의를 오가는 형태를 보인다. 186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의 르누아르의 그림들을 보면 서로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 1870년대부터는 인상주의의 영향에 점점 더 경도되는 모습을 보인다.
르누아르는 조심스럽게 생활했으며 지우를 얻어 사교계의 사람을 그린 〈샤르팡티에 부인과 그 딸들〉(1878)과 그 밖의 것도 아름답다. 세잔은 자연을 추구했지만, 르누아르는 인간에게 그 흥미를 기울이고 있다. 그는 1881년에는 이탈리아에 여행하여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특히 폼페이의 벽화에 감명을 받았는데, 그 후는 데생의 부족을 생각하여 형상을 나타내는 작품으로 제작 경향을 바꾸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영향을 받았던 그는 1880년대 즈음부터는 인상파 화풍을 따르다가 그림의 형상이 망가지는 것을 보고 슬럼프를 느껴 붓을 꺾을 뻔한 적이 있다. 이 시기의 르누아르는 대작들을 많이 그려냈지만 스스로는 어떤 한계에 부딪혀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 이후 슬럼프에서 회복된 그는 그러다가 그것도 나중에는 이전보다도 형태는 한층 빛에 용해되고 색채는 보다 리드미컬한 제작으로 화풍을 바꾸었으며, 주제도 다양하던 전기에 비해 후기는 오로지 나부(裸婦)를 추구하여 여인의 육체에 한없는 아름다움을 찾고서는 그 빨간 색조로써 순화된 작품을 남기고 있다.
빨강, 노랑, 파랑, 초록 등의 색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라 불렸고, 특히 적색의 표현에 뛰어나 근대 최대의 색채 화가로 알려져 있다. 르누아르의 생애는 평온했으나 늘그막을 심한 신경통으로 고생하고, 1899년부터는 남프랑스 해안으로 옮겨 살았다. 이어 카뉴에서 삶을 마감하면서 마지막까지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가 일흔이 넘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인해 손이 마비되었지만 붓을 입으로 물면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 〈해수욕장의 풍경〉, 〈대수욕〉, 〈목욕하는 여인들〉, 〈큰길〉 등이 있다.[2] 르누아르 초/중기와 후기의 차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은 그가 남긴 여러 점의 목욕하는 나신의 여인들을 그린 그림이다. 초기의 <목욕하는 여인들>은 회화적으로 균형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비현실적인 모델들의 포즈, 깔끔하고 조화로운 아카데믹 스타일의 여인들의 몸매 등의 특징을 보면 마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같은 신고전주의 같은 느낌마저 자아내지만#, 후기의 <목욕하는 여인들>에서는 여성의 나신은 본인 취향에 맞게 훨씬 더 풍만하고 육덕지게 그려져있으며 형태보다는 붉은 색감이 강조되고 붓터치는 정교함을 잃은 대신 더욱 역동적으로 변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류머티스 관절염으로 인한 물리적 한계로 인한 것임과 동시에 그가 아카데믹 스타일의 화풍보다 개인의 개성을 한껏 더 추구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들장 르누아르(1894~1979)는 영화배우로 활동했으며 주로 영화감독으로 더 유명하다. 아버지가 그림으로 미를 그려냈다면 아들은 영화로 미를 그려냈다는 평을 받는데 그가 감독한 <게임의 규칙>(1939)은 불멸의 영화 100, 세계 걸작 100에도 자주 선정되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3. 외부 링크



4. 관련 미디어



4.1.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image]
4기 1화에 폴 세잔의 라이벌 로 출연한다. 실제 인물과 마찬가지로 누드화를 좋아하는 인물이지만 의외로 부끄럼을 많이 탄다. 자신의 부끄러운 혼잣말을 [3] 사람들에게 떠벌이려는 세잔의 협박에 분노하여...
[image]
사진과 같이 자신의 필살기인 '르누아르 로켓'으로 세잔을 응징한 다음 잠시 병림픽[4]벌인 뒤 그림시합으로 승부를 보자고 제안한다.
카미유 피사로,알프레드 시슬레,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가 심사위원으로 초청된 그림시합 중에도 세잔과 다투며[5] 토끼 두마리가 세잔을 구타하는 그림[6]을 그렸다.
곧장 세잔의 뒤돌려차기에 응징당했고, 흰색 물감을 빌려달라는 세잔에게 손바닥에 물감을 부어 또다시 뒤돌려차기(...). 이후 파란색 물감을 '튜브째로' 빌려달라는 세잔에게 '튜브째로' 집어던져 세잔의 왼쪽 동공에 명중시켰다. 폴 세잔 항목에 나와있는 두번째 사진이 바로 그 장면이다.
세잔이 마지막 물감 한 방울까지 알뜰하게 쓰고 튜브만 돌려주자 자기 물감을 다 써버린 세잔에게 분노하여 에드가 드가를 집어던져 세잔의 그림을 망쳐버렸다. 이에 분노한 세잔이 자신의 캔버스를 부수자 "남의 예술작품을 망쳐놓다니 네가 그러고도 예술가야!"라는 명대사(...)를 시전하면서 르누아르 로켓을 발사. 이번엔 빗나갔다.
하지만 머리카락에 맹독을 바른지라 스친 상처로도 세잔은 넉아웃되었고 르누아르 역시 독 때문에 머리가 홀라당 빠져버렸다. 결국 이 병림픽을 보다못한 카미유 피사로에 의해 시합은 종료. 결과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1] 르누아르의 예술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가 실제로 했다고 전해지는 말이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에서 열렸던 '르누아르의 여인' 전시회에서는 아이들도 보는 전시회에 쓰기에는 표현이 낯뜨겁다고 생각했는지 "... 여성의 몸을 ..."이라고 완곡하게 적어 놓은 바 있다.[2] 만년의 르누아르의 모습은 영화 르누아르#s-3에 잘 묘사되어 있다.[3] 아~ 여자 알몸을 그리고 싶구먼.[4] 이름으로 놀리는 짓을 했다. 르누아르는 세잔의 이름이 '''사무라이한테 칼로 베이는 소리'''같다고 욕하고 , 세잔은 르누아르의 이름이 '''아저씨가 왁스 칠한 바닥에 알몸으로 미끄러지는 소리'''같다고 욕한다. [5] 둘 다 수염난 주제에 서로 수염쟁이라고 욕했다(...).[6] 그 전에 르누아르가 세잔더러 자기 그림에 들어온다고 비키라고 했으나 세잔이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