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1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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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더 나아가 '''2,200여 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1][2]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별칭은 '드라가시스(Δραγάσης)'로 어머니가 세르비아의 드라가슈(Dragaš) 가문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팔레올로고스라는 성보다도 어머니의 성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그는 훌륭한 군인과 유능한 행정가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단 한 번도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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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런치만(Sir James Cochran Stevenson Runciman, CH, FBA, 1903.6.7. - 2000.11.1.), <1453 콘스탄티노플 최후의 날>
마누일 2세의 8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그중 둘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으므로 장성한 황자 중 4남에 해당했다. 콘스탄티노스의 성장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상당히 적은데, 가끔 '포르피로예니토스(자줏빛 혈통, born in the purple)'로 묘사되는 걸 보아 블라헤르네 궁전의 자주색 산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부터 사냥과 승마, 무예에 소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몇 가지 기록으로 볼 때 모험심과 활달함, 용기를 갖춘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장남 요안니스 8세는 차기 후계자로 지명된 상황에, 차남 테오도로스와 삼남 안드로니코스는 각각 모레아와 테살로니키의 친왕으로 임명된 상황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영토가 워낙에 적었기 때문에 어린 콘스탄티노스는 할당된 영지 없이 당분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게 되었다.
1422년 6월, 당시 17세의 소년이었던 그는 무라드 2세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경험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누일 2세와 차기 후계자인 요안니스 8세의 공동 황제 통치 시기였다. 결국 오스만군은 해가 가기 전 철군했지만, 이 공성전이 크나큰 스트레스가 되었는지 공성전 기간 중인 9월에는 부황 마누일 2세가 뇌졸증으로 반신 마비를 겪기도 했다. 다음 해 여름에는 튀르크의 공세에 시달리던 안드로니코스 친왕이 베네치아인들에게 영지인 테살로니키를 넘겨주었는데, 7년 후인 1430년 3월 29일 테살로니키는 오스만 술탄국에게 함락된다.
요안니스 8세의 치세기 동안 콘스탄티노스는 황제를 대리할 섭정직을 두 차례 맡았다. 당시 요안니스 8세는 서방 세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몸소 서유럽으로 찾아가 동서교회 통합을 추진했는데, 이 때문에 황제가 부재할 동안 수도를 관리할 섭정이 필요했다. 첫 번째는 1423년 11월부터 이듬해 11월 초, 그가 18세~19세 때의 일로 이것이 그가 맡은 최초의 정치적 직무였다. 두 번째 섭정기는 1437년 11월 말에서 1440년 2월까지였다. 이 두 차례의 섭정기를 통해 콘스탄티노스는 후사가 없던 요안니스 8세를 이을 후계자로 잠정적으로 여겨졌다.[3]
39살이 되는 1443년에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제국의 번국인 모레아 친왕국(Despotate of the Morea)의 군주가 되었다. 모레아 친왕 시절에 라틴계 아시나(아테네) 공국, 아케아(아카이아) 공국 등을 격파하고 흡수함으로써 그리스 남부의 경쟁 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1443년에 이르면 베네치아의 식민지 일부를 제외한 펠로폰네소스 반도 전 지역과 아티키의 상당수를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무라트 2세의 대군에 의해 영토를 모조리 토해내야 했으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입구인 코린쏘스 지협에 친왕국이 세운 제국판 만리장성인 헥사밀리온이 함락되고 모레아까지 황폐화되었다.
44살이 되는 1448년에는 맏형인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동생인 디미트리오스와 제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오스만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거기에 대관식조차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니라 모레아 친왕국의 수도 미스트라에서 치렀는데,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아닌 지방 도시에서 즉위식을 올린 황제는 몇 명 있었으나[4] 콘스탄티노스가 예외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거행했던 반면, 콘스탄티노스에겐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데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 문제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 교황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동서 교회의 통합을 꾀했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도 그에 동조적이었으나, 그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다. 교단 내에서까지 배척받는 총대주교에 의해 대관식을 받을 경우, 콘스탄티노스는 즉위하는 순간부터 정치적 위기에 직면할 확률이 높았다. 한참 뒤에 반발이 줄어들거나 교회 일치는 없던 일로 한다는 어명이라도 떨어졌더라면 성 소피아 성당에서의 대관식도 가능했을 테지만, 그전에 동로마가 멸망해서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2.2. 즉위
1449년 1월 6일, 그는 동로마 황제로서 즉위식을 올린다.[5]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미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모레아 공국)[6] 를 제외하면 그 영토가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그 주변에만 겨우 남아있는 도시국가로 전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주변의 영토는 죄다 이슬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부흥할 가망이라곤 전혀 없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동로마의 황제 자리가 매우 위험하고 이름밖에 남지 않은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위한 이후로는 최선을 다해 통치하였다.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지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존망의 기로에 선 제국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외교를 펼쳤다.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과 통합시키면서까지[7] 서유럽에 지원 요청을 했고[8]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교황령에서 보낸 지원군은 고작 궁수 200명과 식량뿐이었다.
사실 이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도 동로마 제국만큼 약하다 보니 제대로 된 지원을 해 줄 여력이 없었으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각각 백년전쟁과 레콘키스타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들 간의 다툼이 잦은 상태였고,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은 1444년에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교황령 외에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구원군을 보낸 곳은 제노바 공화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뿐이었다. 결국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동로마 제국이 동원한 병력은 동로마인, 서방 구원군, 용병을 모두 합쳐 약 8,000명으로 오스만에 비해 매우 열세였다. 또한 서유럽은 이미 1396년에 한 차례 십자군을 보냈다가 니코폴리스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근 한세기간 오스만에 대해서 수세적 입장에 처하여 구원을 해주기 어려웠다.
2.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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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의 새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자신이 그의 왕위 계승 경쟁자인 오스만 왕족 오르한[9] 을 데리고 있다고 자극하면서 이를 활용해보려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초반의 자세를 번복하고 최후의 공세를 준비한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로마 제국 황제 칭호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외의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오스만의 제후로 들어갈 테니 국체만은 보존시켜 달라고 부탁했지만[10] 메흐메트 2세는 그의 제국을 위한 새로운 수도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찍어두었기에 이러한 요청 역시 묵살되었다.[11]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은 막을 수 없으니 지방정권인 모레아 친왕국이 지배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천도하여 그곳에서 기회를 도모하라는 신하들의 절망적인 간청이 있었으나 황제는 그것이 '자신에게 지극히 이로운 제안'임을 인정하면서도 남을 것을 결정했다.[12]
10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한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온힘을 다해 두 달 간이나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었다. 이때 동로마군은 용병을 포함하여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병력이 고작 8천 명이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은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지원군을 보내기가 어려웠거나 일부는 아예 무시하기도... 이러니 가망이 없었다.[13]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 참조. 당시 메흐메트 측에서는 사절을 보내 항복하면 황제 및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고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총독으로 임명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하지만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부했다.
'''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나뿐 아니라 여기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5월 21일, 오스만 측 사절에게.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신앙과 조국, 가족과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나 또한 도시와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고결한 백성들이며, 저 위대한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나는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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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전날 밤인 5월 28일,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그리스인 지휘관에게 고했던 연설[14]
2.4.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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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는 함락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위의 유언을 남기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을 수의 삼아 밀려오는 튀르크군에게 돌격하여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15] '''그리고 이로써 2,200여 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내 시체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 '''
한편 콘스탄티노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동로마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투르크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16] 것만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17]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첫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18][19]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통치하던 모레아 전제군주국 역시 형제 간의 내분으로 내전을 거듭하다 1460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또 다른 동로마계 국가인 아나톨리아 북부 폰토스의 트라페준타 제국[20] 도 이듬해인 1461년에 멸망당했다.
3. 사후
유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21] 이후 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대리석상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튀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이 패망하자 그리스가 '메갈리 이데아(Μεγάλη Ιδέα)'[22] 를 내세워 1차 대전 승전국으로서 에디르네와 스미르나를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유권을 요구하면서 이 전설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케말 파샤가 이끈 터키에 의해 실패했고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을 통해 그리스와 터키의 정교도와 무슬림이 맞교환되면서 이스탄불은 터키 땅으로 굳어졌다.
자녀가 없었으므로 명목상 로마 황제 자리는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 토마스 팔레올로고스를 거쳐 토마스의 아들인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에게 이어지다가 안드레아스가 프랑스의 샤를 8세와 스페인의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에게 제위를 팔면서 증발했다.[23]
4. 평가
4.1. 그리스에서의 평가
'''민족 영웅이나 다름 없는 대접을 받는다.''' 2009년 스카이TV에서 집계한 위대한 그리스인 100인 중 '''28위'''에 선정될 정도. 이는 역대 로마 황제 중 최고 순위다.[24] ~[25] 역대 군주 중에서도 알렉산드로스 대왕, 레오니다스 1세 다음 가는 3위로, 페리클레스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네임드 속에서도 상당히 선방한 편.
4.2. 서유럽에서의 평가
4차 십자군 이후 동로마 제국의 위신은 떨어질 때로 떨어져서 영어에서 Byzantine이 음흉함을 의미하는 관용어로 남았을 정도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은 끝 없는 전쟁과 음모로 인해 모든 방면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불명예 속에서 사라질 뻔한 동로마 제국을 전설로써 끝낸 사람이 바로 콘스탄티노스 11세였다.
그는 선량하고 성실한 인품을 지녀 서유럽의 많은 인사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으며, 콘스탄티노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났을 정도였다. 로마 제국이 동서 간의 분쟁을 초월한, '''2,200년 역사의 보편 제국 "로마"'''답게, 지중해 기독교 세계가 로마 제국으로 단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은 콘스탄티노스 11세의 뼈저리는 노력 덕분이다. 그는 그동안 쌓여온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불신을 덮고 식어버린 서유럽인들의 마음을 돌려내었고, 이는 그 베네치아인들조차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들의 고향으로써 무덤 삼게 하였다.
4.3. 정교회에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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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에서는 순교자로 기념하고 있으며,[26] 아테네의 미트로폴레오스 대성당 앞 광장에서 칼을 치켜들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다만 서유럽의 도움을 받기 위해 교회를 통째로 교황에게 바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온 정교회에게서 성인으로 공경받는 것은 앞으로도 요원할 것으로 보인다.
4.4. 터키에서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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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정복전을 영화화한 2012년작 터키 영화 '정복자 1453(Fetih 1453)'에서는 영화에서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는 300의 레오니다스처럼 묘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하렘에서 여색과 환락에 빠져든 탐욕스런 폭군으로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 황제가 된 후 결혼도 못 하고 즉위식조차 못 올렸을 정도[27] 로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한 황제인데 말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메흐메트 2세가 성 소피아 성당(아야 소피아)으로 대피한 동로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은 역사왜곡으로 비난받았다.[28] 우습게도 300도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듯이 이 영화도 터키에서 2012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영화가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을 터키 시점으로 극화했기 때문에 터키에서 좋아할 만하다. 어이 없을 정도로 노골적인 역사 왜곡에도 불구하고 상영 당시 에르도안과 터키 정부가 이 영화를 지원을 했고 터키 정치권에서는 영화를 칭찬, 두둔하는 발언을 하면서 대놓고 밀어주면서 흥행 몰이를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민간에서 제작해 방영한 사극 드라마 위대한 세기에 대해서는 에르도안이 이슬람교와 오스만 제국 술탄의 위엄을 깎아 내린다며 노발 대발해대면서 비난하는 이중적 잣대를 들이댔다.
다만 같은 국가에서 제작해서 넷플릭스에서도 방영한 다큐드라마 오스만 제국의 꿈에서는 훨씬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4.5. 아랍권에서의 평가
아랍권의 경우 일단은 오스만과 같은 이슬람이라지만, 동유럽, 발칸 반도 국가들과는 오스만 제국에 정복당해 지배를 받은 역사를 공유하므로[29] , 오스만 제국이 일으킨 정복 전쟁 자체를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 민족도 다르고.[30] 따라서 아랍권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스 11세를 비록 패배자이지만 튀르크족 침략자에게 맞서 싸운 용맹한 이교도 군주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특히 이라크인들과 시리아인들은 이런 쪽에서 그리스와의 동병상련이 강하다 보니 그리스 현지인들만큼은 아니어도 콘스탄티노스 11세에 대한 평가가 좋은 편이다.
5.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풍전등화의 제국을 유지하고 지키던 유능한 인물임과 동시에 극적인 일생과 죽음이라는 소재 때문에 망국의 마지막 군주라는 타이틀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평가가 좋은 인물이다.
위에서 설명되었듯 터키 영화인 정복자 1453에서는 실제 모습과 달리 향락에 빠진 망군으로 왜곡되어 묘사되었으며, 때문에 그리스쪽이나 서방 역사학계에서의 반발이 엄청났다. 아랍권에서도 상술한 이유로 이러한 묘사에 대해 평이 좋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지낸 정치인 김형오의 역사소설 술탄과 황제에서는 메흐메트 2세와 함께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만화화도 되었다.
한국의 인터넷 대체역사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 중세 말을 배경으로 한 미연시 세계에서 어린 시절의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전생한 뒤, 하라는 연애는 '''못''' 하고 마치 전략 게임처럼 이이제이, 정략결혼, 골육상쟁 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여 제국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사실 주인공이 연애를 못 하는 이유는 연애보다 나라가 우선이라는 생각 때문(...)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
내가 바로 세종대왕의 아들이다에서는 오스만이 오이라트와의 전쟁으로 제국에 신경쓰지 못하는 틈을 타 티무르 제국과의 협력을 통해 오스만을 견제하려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미당[31] 을 들여와 유럽에 퍼뜨린다. 오이라트가 조선-티무르 연합에 패한 뒤 광무왕이 연 회의에서 로마 제국이 티무르에 이은 조선의 두 번째 맹방으로 선언되고 미당 교역의 창구가 콘스탄티노플로 결정 되며 경제력 회복을 이루게 되었고 거기다 원 역사에서 제국을 공격하는 데 쓰인 우르반 거포를 역으로 입수하게 되며[32] 그것을 이용해 에디르네(아드리아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메흐메트 2세를 포로로 잡는 원 역사와 정 반대의 상황을 일궈낸다. 그래서 울루그 벡과 더불어 주인공이 만든 대체역사의 최대 수혜자라는 평을 받는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나름의 수혜를 받아 십자군이 오스만을 상대로 승리하면서 원역사보다도 더욱 승승장구하며 펠로폰네소스 통일과 중부 그리스를 모조리 장악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주인공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황족을 파견하는데 하필 그 황족이 디미트리오스(...)[33] 작중에서는 외교 격식상 친왕급 인사를 보내야 하는데 자신은 야전 지휘를 해야 하므로 후보는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뿐, 그런데 후방인 모레아에 신뢰할 수 있는 토마스의 견제 없는 디미트리오스를 놔두면 뭔 짓거리를 할지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악으로 토마스에게 후방 지원을 맡기고 디미트리오스를 내보낸 듯 하다. 정황상 토마스를 통해 디미트리오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는 걸로 어떻게든 때우려 했던 모양.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동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시작 시점의 황제인 형 요안니스 8세보다는 낫지만 객관적으로는 평범 그 자체. 일부 유저들이 실제로 실책을 저질렀던 외교 능력치만 놔두고[34] 나머지 행정이나 무력 능력치를 더 높게 줘도 되지 않냐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대부분의 유저들은 일찍 죽어서 그랬지 실제로는 능력자였던 문종에게 밸런스 맞춰야 된다고 1,2,1이라는 희대의 쓰레기 능력을 주고 패치도 안 해주는 패러독스에게 뭘 바라냐며 한숨을 쉬고 있다.
미국의 대체역사소설 거장으로 유명한 해리 터틀도브의 1990년작 단편 '황제의 귀환(The Emperor's Return)'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순간에 하기아 소피아의 대리석 바닥 속으로 빠져들어 콘스탄티노플 수복의 순간까지 잠들어 있다는 전설이 실제로 일어났고, 2003년[35] 에 그리스 사회주의 정권이 소련과 동맹을 맺고 터키를 침공하여 그리스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하고 하기아 소피아에 그리스군 정찰병들이 진입한 순간 잠들어있던 콘스탄티노스 11세가 깨어난다. 그러나 '이제 내 것인 제위를 되찾겠다'는 황제의 말을 듣고 사회주의자였던 그리스군 분대장은 '그리스엔 더이상 전제군주는 필요없다'며 쿨하게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사살해버린다.#번역
모바일게임 마녀병기에서는 1453년에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성배를 얻은 이후 500년간 세상을 통치했었으나, 결국 성배의 힘에 매혹되어 미쳐버리게 된다. 결국 4명의 성기사가 그를 성배에 봉인함과 동시에 세상을 다시 1453년으로 회귀시키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저주는 여전히 성배에 깃들어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였고 결국 작중 시점에서 성배의 봉인이 풀리기 직전까지 오게 되었다.
질 페이튼 월시의 『황제의 수의(The Emperor's Winding Sheet, 1974)』, 제임스 십맨의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olis, 2013)』, 피터 샌드햄의 『반암과 재(Porphyry and Ash, 2019)』에서도 주인공 또는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6. 참고 자료
- Nicol, Donald M., The Immortal Emperor: the life and legend of Constantine Palaiologos, last Emperor of the Rom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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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 왕국, 로마 공화국 시기를 합산하면 무려 2,200여년이라는 세월이 나온다.[2] 로물루스와 아우구스투스의 마지막 후예.[3] 실제로 요안니스 8세는 자신을 제하고선 출생 서열이 제일 높은 차남 테오도로스보다 사남인 콘스탄티노스를 신임했고, 사이도 서로 좋았다. 이 총애가 꽤 노골적이었는지 자신을 차기 황제로 여기고 있던 테오도로스는 콘스탄티노스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이 후계 갈등은 후일 콘스탄티노스가 수도 인근에 자리한 자기 영지를 테오도로스의 모레아와 맞바꾸면서 어느 정도 봉합되었고, 요안니스 8세의 서거 몇 달 전 테오도로스가 먼저 사망하면서 완전히 종결된다.[4]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즉위식을 올리지 않았기에 일부에선 그를 정통황제로 보지 않는 시각도 존재한다. 하지만 라틴 제국을 없애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한 미카일 8세는 니카이아에서 즉위했고, 1341년부터 1347년까지의 내전 중에 즉위한 요안니스 6세는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즉위하는 등 동로마 제국 역사에는 이와 비슷한 전례가 존재했다.[5] 참고로 이 때, 즉위식에는 그의 부인이나 자녀는 없었다. 그 이유는 첫 번째 부인은 첫째(딸)를 사산하고 사망했으며, 두 번째 부인 역시 후사 없이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 결혼을 하지 못했으니 후손도 없었다.[6] 세르비아 제국이 한참 강성하던 1349년에 요안니스 6세가 본국과 단절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반쯤 독립하는 것을 허가해준 지방 정권으로, 콘스탄티노스가 황제로 즉위한 뒤에는 동생들인 디미트리오스와 안드레아스가 영토를 반씩 분할해 다스렸다.[7] 이 결정에 대해 정교회 신자+동서 교회 통합 반대파 동로마인들은 불만을 가졌는데, 동로마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누폴리에서 추기경의 모자를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동안 황제를 보좌했다가 동로마 패망 직후에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처형되었다.[8] 이건 미하일 8세 때부터 지속적으로 나왔다가 결렬되고 다시 이야기가 나오기를 반복해 온 것이다. 한편 재미있는 사실은, 동로마 제국은 물론 니케아 제국의 공격을 받던 라틴 제국도 교황한테 도와달라고 달려갔었다는 것.[9] 이 오르한은 메흐메트의 사촌이었으나 메흐메트가 다른 형제를 다 죽였으므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오스만 왕족이었다. 후에 콘스탄티노플 방위전에 참전하였고 성이 함락되던 날 저항하다 포로가 되어 자기를 따라온 부하 수백 명과 함께 처형되었다.[10] 막대한 공물을 바쳤는데도 오히려 거절당하며 사신이 추방되었다. 참고로 제후로 들어가겠다는 제안은 이때가 최초가 아니라, 요안니스 5세 치세인 1371년에 처음으로 나왔던 것.[11]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도시라 오스만 제국으로선 포기할 수 없는 도시였다. 게다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화근의 씨를 완벽하게 없애겠다는 목적도 있었다.[12] 당시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버리고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정부를 이전하는 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동서 양면으로 오스만 투르크 세력에 포위되어 있던 상황이었던데다가 황실과 정부가 다른 곳으로 도망치게 오스만 제국이 냅둘 리도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넘기고 펠로폰네소스로 천도했다 해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만족했을지도 의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오스만 제국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로마를 정복하고 서유럽까지 진출하려고 했기 때문이다.[13] 다만 숫자만 보면 싸워보지 않아도 승부가 뻔한 것 같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싸움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외부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는 했지만, 공방전 초기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비군의 사기는 결코 낮지 않았다. 특히 메흐메트 2세와 오스만군도 예상외로 공성이 오래 걸리자 불안해하기 시작했다.[14] 해당 연설은 황제의 서기 스프란체스와 미틸레네 대주교가 기록했으며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엮고 있으나 본뜻을 이해하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다.[15] 전해지는 말로는 마지막으로 적군에게 돌격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고 있던 황제로서의 상징물을 죄다 떼어냈기 때문에, 황제의 시체를 찾을 때 표식으로 추정할 만한 물건이 부츠 뿐이었다고 하며, '내 시체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16] 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동로마를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라는 심보였다.[17] 그리스의 극우 민족주의자들 중 일부는 그리스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후신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리스 왕국의 마지막 왕은 콘스탄티노스 2세다.[18]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툴루스는 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뜻이다.[19] 이것을 어거지로나마 연장한다면 로마의 후계를 자칭한 세력에게도 잘 들어맞는다. 서로마 계승을 주장한 나라부터 살펴보면 카롤루스 대제의 신성 로마 제국을 계승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카롤루스(라틴어 이름)의 독일식 이름을 사용하는 카를 1세였고, 프랑스 제국의 초대 황제와 마지막 황제는 모두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와 마지막 황제는 모두 빌헬름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들 중 프랑스 제국 마지막 황제의 풀네임은 샤를루이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인데, 샤를(Charles)은 신성 로마 제국 초대 황제의 이름 카롤루스의 프랑스식 이름이기도 하며(카롤루스 대제는 프랑스식 명칭인 샤를마뉴로 불리는 경우가 많음), 프랑스 제국 자체가 신성 로마 제국(정확히는 카롤루스 대제 치세의 프랑크 제국)의 후신을 칭한 나라다. 그리고 동로마 계승을 주장한 나라들 중에서는 불가리아 제1제국의 초대 차르 시메온 1세와 불가리아 왕국의 마지막 차르 시메온 2세의 이름이 같았고, 라틴 제국은 초대 황제 보두앵 1세와 이름이 같은 보두앵 2세의 치세에 멸망했고, 세르비아 제국은 초대 차르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의 아들(...) 스테판 우로시 5세의 치세에 멸망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카이세리 룸(로마 황제)을 칭한 첫 번째 군주인 메흐메트 2세와 같은 이름을 가진 메흐메트 6세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 의해 폐위됨으로써 멸망했다. 억지로 연장한 것이긴 해도, 이렇게 로마를 자칭한 모든 국가들은 절대다수가 창건자의 이름을 가진 후손 대에 멸망했으며(제정 러시아 로마노프는 표트르 칭제, 니콜라이 폐위, 류리크까지 가도 이반 칭제라 예외다. 만약 미하일 대공이 계승했다면 로마노프 왕조 역시 징크스에 벗어나지 못할뻔했다.), 가히 징크스로 봐도 무방할 지경이다.[20] 팔레올로고스 가문보다 앞서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콤니노스 왕조가 황가였다.[21] 튀르크인들은 황제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체를 찾아 그 목을 베어 매달았지만, 그 시체가 확실히 황제가 맞는지에 대한 그리스인이나 유럽인들의 기록이 없다.[22] 우리말로 옮기면 '위대한 이상'으로, 옛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자는 민족주의&국가주의 사조.[23] 샤를 8세와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는 로마 황제 자리를 받기만 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그 서방엔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있기도 했고.[24] 그 다음은 의외로(?) 바실리오스 2세(70위), 콘스탄티누스 대제(71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82위).[25] 비슷한 포지션의 군주로 멕시코에는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틀라토아니인 콰우테목이 있고 카자흐스탄에는 카자흐 칸국의 마지막 칸인 케네사리 칸이 있다. 후자의 경우 공교롭게도 콘스탄티노스 11세와는 반대로 정교회 국가에 의해 멸망한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의 마지막 군주였다.[26] 그리스계 정교회 일부에서만 순교자로서 성인으로 공경한다.[27] 아예 결혼을 못 해본 것은 아니다. 1448년에 제위에 오르기 이전, 즉 모레아 공작이었던 시절에 두 번 결혼했다. 하지만 두 번째 아내도 1442년에 죽었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28] 실제로는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했던 동로마 백성들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오스만군에게 포위되어, 몸값을 받아낼 수 있을 만한 부자들과 성직자들은 포로가 되었고 몸값을 낼 수 없는 하층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나갔고, 여성과 아이들은 강간당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메흐메트는 성당이 훼손될까 노심초사했을 뿐,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앞두고 사기 진작을 위하여 함락 성공 후 병사들에게 사흘 동안의 약탈을 보상으로 허락했기에 콘스탄티노폴리스 백성의 안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나마 이 성당이 마음에 든 메흐메트 2세는 성당을 불태우려거나 우상이라며 닥치는 대로 성화를 훼손하는 병사들을 꾸짖으며 막긴 했다. 대신 회반죽으로 덮고 그 위에 이슬람 문양을 그리고 모스크로 개조했다. 그래도 다행인게(?) 덕분에 회칠만 제거하면 오래된 성화가 복원이 가능하지만, 그 문양들도 이젠 수백 년이 지난 문화 유산이 되어서 반대 여론도 많아 회칠 제거는 이뤄지지 않았다.[29] 실제로 아랍국가들은 터키와는 역사적으로 견원지간인데 비해 똑같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겪었던 그리스나 불가리아, 세르비아 같은 발칸반도의 기독교 국가들과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다.[30] 현재도 터키(튀르크족)-아랍(아랍인)-이란(페르시아인)의 관계는 좋지 않다.[31] 주인공이 만들어낸 MSG, 즉 미원을 생각한다면 그것이 맞다.[32] 이쪽 세계관에서는 메흐메트 2세가 오이라트와의 전쟁에 신경쓰느라 우르반의 거포에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우르반이 티무르에 온 것을 주인공이 바로 기용하여 포를 개발한 뒤 로마 제국에 넘긴 것.[33] 물론 주인공은 역사를 알고 있어서 탐탁치 않아하며 차라리 토마스를 보내지라고 생각하지만 원역사에서도 디미트리오스는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 반기를 든 전적이 있고 토마스와도 대립했기에 사실상 국내에 있어봤자 폭탄만 되는 인물을 터지기 전에 멀리 보내는 것으로 처리했다고 생각하면 아예 납득이 안되는 건 아니다. 다만 독자들도 원역사의 외교 트롤링을 떠올리며 여기서도 실수하냐며 한탄하기도 했다.[34] 위에서 봤다시피 오르한 건은 제국의 멸망을 초래한 자충수였으니 말이다. 물론 메흐메트 2세의 야심상 언젠간 콘스탄티노플로 쳐들어 왔겠지만 위 실책 때문에 계획을 앞당기게 된 건 확실하다. 이를 알려 주는게 할릴의 일갈로 할릴은 콘스탄티노플을 치는 걸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그가 사신들에게 일갈을 퍼부었을 정도면 얼마나 큰 외교적 실책인지를 알 수 있다.[35] 출간시점에서는 근미래였다.[36] W.트레드골드의 저서인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도 참고자료로 인용했다.[37] 고전 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고스가 되지만, 이건 당시 기준으로도 거의 1000년전 발음이며, 또 현대 그리스어식으로 읽으면 콘스탄디노스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