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령

 



'''교황국'''
'''Status Pontificius'''
'''Stato della Chie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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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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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 교황령의 영토[1]. 최서단의 점은 아비뇽이다.
754년 ~ 1798년, 1799년 ~ 1809년,
1814년 ~ 1849년, 1849년 ~ 1870년
국가
''우리는 하느님과 동정 마리아를 원한다''
(~ 1857년)
''위대한 개선행진''
(1857년 ~ 1870년)
위치
이탈리아 일부와 아비뇽
수도
로마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선거군주제, 신정
국가원수
교황
언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국교
가톨릭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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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화
스쿠도(~ 1866년)
리라(1866년 ~ 1870년)
성립 이전
동로마 제국
멸망 이후
바티칸 포로
현재 국가
바티칸, 이탈리아, 산마리노, 프랑스[2]
1. 개요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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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세 초기부터 근대까지 가톨릭교황이 다스리던 영지로 교황국, 교회국, 교회령(敎會領), 베드로 세습령(世襲領)(라틴어: Patrimonium Petri, 영어: Patrimony of (St.) Peter)이라고도 부른다. 동로마 제국에서 독립하여 성립되었고 이탈리아 통일로 멸망하였다.
영토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해 있었으며, 아비뇽 유수부터 프랑스 혁명까지는 아비뇽도 속해있었다.

2. 역사



321년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밀라노 칙령으로 교회에 대한 규제를 철폐한 이후 신앙심이 깊은 부자들의 기부를 통해 교회의 사유 재산은 급속히 증가하였다. 라테라노 궁전도 첫 번째 기증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 스스로가 교황에게 준 선물이었고, 옛 성 베드로 대성당 역시 그가 기증한 것이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533년 동로마 제국이탈리아 반도를 탈환하는 도중에 세운 '로마 공국' 은 교황령의 기반이 되었다. 이탈리아 탈환 후 얼마 안 가 568년 랑고바르드족의 맹공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은 로마 시(市)와 라벤나를 포함한 중부, 그리고 남쪽의 풀리아와 칼라브리아로 크게 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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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주황'''
동로마 제국
'''회색'''
랑고바르드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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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족이 공존했던 이탈리아의 지도와 오른쪽 위 교황령의 지도
'''분홍'''
동로마 제국
'''주황'''
랑고바르드 왕국
독일어 지도로서 HZM은 Herzogtum으로 공국을 뜻한다. 보면 라벤나 일대와 로마 시 일대가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는 게 보이는데 그곳이 페루자다.
동로마 제국은 이러한 이탈리아에 584년 '라벤나 총독부' 를 세우고 라벤나에 총독을 파견하여 로마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 풀리아, 칼라브리아를 통치했다. 그러다가 동로마 제국의 지배권이 약해지자 교황은 점점 로마 공국을 다스리는 한 독립 영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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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라벤나를 점령한 이후 이탈리아 반도의 모습
'''주황'''
동로마 제국
'''회색'''
랑고바르드 왕국
751년 라벤나 총독부가 결국 랑고바르드 왕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로마 공국은 동로마 제국 본국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교황 스테파노 2세는 랑고바르드 왕국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중립을 선언하면서 비밀리에 프랑크 왕국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때 피핀 3세는 754년과 756년에 프랑크군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들어와 이탈리아 북부의 랑고바르드족을 무찌르고 교황에게 옛 라벤나 총독부의 영토를 증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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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7년까지의 교황령의 영토 변화
첫 번째 기증이 754년인데, 두 번째 기증이 756년으로 이 756년에 피핀은 두 번째로 로마에 원정와서 랑고바르드족을 쫓아낸 후 로마의 열쇠들을 모두 가져와 성 베드로의 무덤에 바쳐서 '교황령을 건국하게 해주겠다는 자신의 754년 기존 언약(계약)'을 완전하게 최종적으로 확정시켰다.
이것이 바로 '피핀의 기증' 인데, 이때 공식적으로 교황령이 건국되었다. 교황령의 시작은 당시 교황인 스테파노 2세의 즉위년인 752년으로 볼 수도, 동로마 제국에서 완전히 독립한 754년으로 볼 수도, 최종 확정된 756년으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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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8년까지의 교황령의 영토 변화
774년 피핀 3세의 아들 카롤루스가 랑고바르드 왕국을 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북부를 정복하면서 교황령도 프랑크 왕국의 속령이 되었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교황령은 북이탈리아와 함께 중프랑크 왕국에 배정되었고, 855년 프륌 조약으로 중프랑크 왕국에서 북이탈리아가 이탈리아 왕국으로 분할되었다가 962년 이탈리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하게 되면서 교황령 역시 신성 로마 제국의 속령이 되었다. 1177년 베네치아 조약으로 라치오 지역 부근은 이탈리아 왕국에서 독립하였고, 로마냐 등의 나머지 지역은 교황령과 신성 로마 제국이 공동 통치하다가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1세가 교황에게 통치권을 전부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교황은 라치오 지역만을 직접 통치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우르비노 공국, 페레라 공국 등 교황의 봉신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였다.
우여곡절을 거쳐 10~11세기 시칠리아 왕국과의 충돌로 축소되기도 했으며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때 최대의 면적을 확보하였다. 14세기 교황이 아비뇽 유수를 당하면서 위상이 크게 실추되기도 했으나, 그 후 교황이 복귀함으로써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16세기 카를 5세사코 디 로마 사건으로 완전 초토화 당하고 교황이 도시를 떠나 피난한 굴욕적 사태도 있었다(...). 그렇지만 교황령의 수도였던 로마의 인구는 1600년에 110,000명이고 볼로냐의 인구는 60,000명으로 중요한 도시가 많이 있었던 국가에 속했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교황령은 여러 봉신국들을 통합하여 중앙집권을 이뤘다.
그렇게 18세기 후반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프랑스 혁명에 교황청이 맹렬히 반대한 대가로 1798년에 프랑스군에 의해 최초로 완전히 폐지당했고, 교황령의 자리에는 로마 공화국이 세워졌다. 이후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등이 빈 회의에서 교황령을 부활시켰지만 1849년 주세페 마치니 등 이탈리아 통일론자들의 혁명운동으로 다시 폐지당하고 새로운 로마 공화국이 새워졌다. 이들은 자유롭고 통일된 이탈리아의 건설을 반대하는 구체제의 대표로 교황을 지목했다. 또 교황령이 절묘하게 이탈리아 반도 한가운데를 차지해 북부와 남부를 분단시키는 점도 한몫했다. 하지만 이들의 혁명을 1년도 채 가지 못했고, 교황령은 다시 원상복귀되었다.
1860년 이탈리아 통일 도중 사르데냐 왕국이 중북부 이탈리아 지방을 통일하면서 로마냐와 마르케, 움브리아 지방을 병합했다. 그래도 로마를 중심으로 한 라치오 지방만은 나폴레옹 3세가 보낸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아 건드리지 못하다가, 보불전쟁으로 다급해진 프랑스가 군대를 철수시키자 1870년 잽싸게 이탈리아군이 진주해 점령하며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종결되고, 이탈리아 왕국은 로마를 수도로 선포했다.
이로 인해 교황령은 서기 533년 동로마 제국의 지배 중에 형성되고 1300여 년 만에, 754년 피핀의 기증 이후로는 1100여 년 만에 완전히 소멸하였다.
그 후 로마 교황들은 영토 없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 사실상 갇혀 지내며 바티칸 포로를 자처했다. 바티칸 포로 시기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지속적인 마찰을 벌이다가 1929년 교황 비오 11세와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여 세계 최소의 미니국가인 바티칸 시국, 즉 현대의 교황령이 탄생하였다.
오늘날 교황령은 바티칸 시국과 동의어이며, 교황의 전제주권이 미치는 0.44㎢의 공간이 해당된다. 이 영토는 다른 주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타 국가의 간섭과 영향력이 배제되며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군도 바티칸의 주권을 존중하여 이를 점령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탈리아가 베니토 무솔리니를 실각시키고 연합군에 항복한 직후 독일군이 바티칸을 무력으로 포위하여 바티칸 근위병(스위스 근위대)과 교전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고, 연합군으로 가장한 독일군 폭격기가 바티칸을 폭격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의 유리가 깨진 사건도 있었다. 또 비오 12세 때 특히 홀로코스트에 대한 갈등 국면이 여러 차례 빚어지면서 바티칸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1] 지금과 비교해 보면 정반대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독일의 자잘한 소국들은 현대에 들어 깔끔하게 통일된 상태지만, 동유럽소련, 유고슬라비아의 붕괴와 민족주의 대두로 인해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2] 아비뇽 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