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하네스 오케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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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오케겜
Johannes Ockeghem[1]
(1410 또는 1425 – 1497)
1. 개요
2. 생애
3. 오케겜의 음악
3.1. 특징


1. 개요


15세기 유럽음악을 주도했던 '''플랑드르 악파'''의 거장이자 15세기 중후반의 가장 중요한 음악가중 한사람이다. 현재에는 작곡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당대에는 훌륭한 가수이자 음악교육자이기도 했다. 음악사적으로는 15세기 초반에 활약한 기욤 뒤파이(Guillaume Dufay, 1397경 - 1474)와 15세기 후반부터 활약한 조스캥 데 프레를 잇는 음악가였다. 물론 단순히 가교역할을 한 음악가로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뒤파이나 데프레 못지 않은 오케겜만의 독창성과 위상을 지니고 있다.

2. 생애


오케겜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출생년도부터 불확실한데, 연구자에 따라 빠르게는 1410년 이전부터 늦게는 1430년까지, 무려 20년 이상의 차이가 날 정도로 온갖 주장이 난무하고 있다. 대략적인 출생년도는 1410~1425년 사이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설도 많다. 출생지 역시 정확하지 않은데, 그간 오케겜의 선조들이 살았던 동플랑드르지역의 오케겜(Okegem)이나 덴더몬드(Dendermonde)를 출생지로 추정하였으나 1993년에 그가 현재 벨기에 영역에 있는 생-기슬랭(Saint-Ghislain)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는 16세기 문헌이 발견되면서 현재는 생-기슬랭이 출생지라는 데에 의견이 모아진 상황이다. 따라서 그의 모국어도 플랑드르에서 사용되는 네덜란드어가 아니라 피카르디어(Picard)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생년도와 출생지가 이처럼 불확실하니 당연히 그가 어디서 자랐고 어디서 교육을 받았는지는 더더욱 알기 힘든 상황. 대략적으로 당시 생-기슬렝에 있던 두 교회 중 하나에서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막연히 추정하고 있다.[2] 오케겜에 대한 당대의 기록은 1443년이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를 최초로 언급한 이 문헌에서는 안트베르펀(Antwerpen)에 있는 옹즈 리브 브루베 성당(Onze-Lieve-Vrouwe Cathedral, 번역하면 우리 성모의 성당)에서 가수로 재직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문헌에서는 특이하게 그를 왼편의 가수(left handed singer)로 표현하고 있는데, 왼편이라고 명명된 가수는 성당에서 직접 작곡된 곡을 노래하고 오른편(right handed)이라고 명명된 가수들은 그레고리오 성가등을 비롯한 전례 음악 부르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이 때의 오케겜은 노래와 더불어 작곡도 담당했던 것이다. 이 성당에 재직할 당시 오케겜은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90~1453)을 필두로 하여 유럽대륙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영국식 음악양식과 기욤 뒤파이, 질 뱅슈아(Gilles Binchois, 1400경~1460) 등의 부르고뉴 악파의 음악을 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어 1446~1448년에는 부르봉공 샤를 1세(Charles I, Duke of Bourbon)의 궁정음악가(가수 및 작곡가)로 재직했으며 1452년 경에는 파리로 옮겨서 프랑스 왕실의 악장(maestro di cappella)이자 투르(Tours)에 있는 성 마르탱 대성당의 재무관과, 파리노트르담 대성당의 참사회 의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프랑스 왕실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프랑스 왕 샤를 7세(Charles VII)와 후임자 루이 11세(Louis XI) 밑에서 계속 궁정음악가로 활동했으며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 Notre Dame de Paris)에서도 직책을 맡았던 것이 확인된다.
오케겜은 궁정음악가뿐만 아니라 행정관리의 직책도 맡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1460년대 후반에 프랑스왕의 사절로 스페인의 카스티야 왕국에 간 적도 있었다. 당시 오케겜은 카스티야 왕국에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영국 및 부르군디 공국과 동맹을 맺지 말 것과 당시 카스티야 왕국의 공주였던 이사벨라 1세(Isabella)와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공 샤를르(Duke of Berry)의 결혼을 주선하기 위해 사절로 간 것인데, 결국 두 가지 미션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3]
오케겜은 1483년 루이 11세가 사망한 후 행적이 많이 들어나있지 않는데, 1488년 샤를 8세가 빈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목요일 세족례에 참석한 것이 공식기록에 나온 그의 마지막 행적이다. 이후의 행적은 잘 알려져 있지 않은데, 학자들은 말년의 오케겜이 대체로 부르게(Brugge)나 투르에 살면서 작곡과 음악교육에 종사하다가 1497년 투르에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사망하자 그를 존경했던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작품을 남겼는데, 특히 조스캥 데 프레의 샹송 '오케겜의 죽음에 대한 애가(Déploration sur la mort de Jean Ockeghem)'[4]는 매우 유명하다.

조스캥의 오케겜의 죽음에 대한 애가

3. 오케겜의 음악


현존하는 오케겜의 음악은 그의 음악사적인 위상에 비해 숫자가 그리 많지 않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위작들이 계속 걸러지는 덕분에 그의 작품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다. 현재 오케겜의 것으로 인정받는 작품은 13곡의 미사와 1곡의 진혼곡[5], 5곡의 모테트, 21곡의 샹송 및 악보 일부만 남아 있는 소수의 단편이 있다.
이처럼 작품수가 적을 뿐만 아니라 각 작품들의 작곡 연대도 대부분 불명확하기 때문에 오케겜을 연구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나마 연대가 알려진 작품으로 1460년경 뱅쇼와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쓴 애가 Mort tu as navré/Miserere 정도가 있는데, 이 작품도 뱅쇼와의 사망년도가 1460년이기 때문에 이 때쯤 작곡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수준이지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각 작품의 작곡수법을 바탕으로 대략 초기/중기/후기 정도로 작곡연대를 분류하고 있다.

3.1. 특징


오케겜의 작품의 독창성은 광범위한 멜로디에 있다. 길고 유연한 선율이 각 성부들을 하나로 묶는다. 그의 미사 중 카푸트 미사(Missa Caput)와 같은 초기 작품에서는 선배인 뒤파이나 뱅쇼아처럼 정선율(cantus firmus)을 사용하였는데, 점차 전례음악을 사용하는 정선율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이 작곡한 샹송이나 당시에 유행했던 세속음악인 무장한 병사 등의 선율을 활용하였으며 패러프레이즈 미사(paraphrase mass)나 패러디 미사(parody mass) 등의 양식을 개척하였다. 그가 개척한 미사 양식과 후배 작곡가들, 특히 야콥 오브레히트(Jacob Obrecht)나 조스캥 데 프레 등 부르고뉴 악파의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이런 양식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조스캥 데 프레#s-3.2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특히 그의 최후반기에 작곡된 것으로 추정되는 미미 미사(Missa Mi-mi), 다중 선법 미사(Missa cuiusvis toni), 프롤라티오눔 미사(Missa prolationum) 에서는 정선율이 사용되지 않고 후에 부르고뉴 악파에 의해 계승된 대위법적인 수법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들이다. 특히 프롤라티오눔 미사는 조스캥 데 프레가 즐겨 썼던 프롤레이션 캐논(prolation canon 또는 mensuration canon) 작법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 프롤레이션 캐논은 통상적인 캐논처럼 한 성부의 선율을 다른 성부가 모방을 하되 음의 길이를 달리 해서 성부간 진행속도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기법이다. 자세한 것은 역시 조스캥 데 프레#s-3.2 항목에 나와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Missa Prolationum 중 Kyrie[6]

Deo Gratias à 36[7]

[1] 오케겜은 문헌에 따라 Okeghem, Ogkegum, Okchem, Hocquegam, Ockegham 등 다양한 철자로 기록되어 있다.[2] 이처럼 오케겜의 초기생애가 불확실한 이유는 오케겜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애에 대해 알 수 있는 당대의 자료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3] 아시다시피 이사벨라 1세는 다른 결혼 제안을 모두 물리치고 1469년 이종사촌이었던 아라곤(Aragon) 왕국의 페르디난트 5세(Ferdinand V)와 결혼하였다. 더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4] 장례를 위한 전례음악(Requiem Aeternam)을 정선율(cantus firmus)로 사용하고 쟝 몰리네(Jean Molinet)라는 시인이 오케겜을 애도하기 위해 쓴 시 Nymphes des bois(숲의 님프)를 가사로 사용한 작품이다.[5]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진혼미사곡이다. 기록상으로는 기욤 뒤파이가 오케겜보다 먼저 진혼곡을 작곡했다고 하는데 현재 이 작품은 실전되었다.[6] 악보를 보면 서두에 1성부의 선율을 2성부가 모방하되 대략 2배의 음 길이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2성부가 1성부를 1/2의 속도로 모방하는 것이다. 다만 이 미사 프롤라티오눔은 작품 전체에 이런 속도차 모방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부분부분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며 모든 성부에 이런 모방 기법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온전한 의미의 프롤레이션 카논으로 보기는 어렵다.[7] 카논 문서에도 링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