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캥 데 프레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밀라노/로마 시기
2.3. 페라라 시기와 프랑스에서의 말년
3. 조스캥의 음악세계
3.1. 조스캥 음악의 특징
3.2. 조스캥의 작곡 기법
3.2.1. 소게토 카바토
3.2.2. 캐논 기법
3.3. 조스캥의 세속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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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스캥 데 프레[1]
Josquin des prez (1450 또는 1455 – 1521)

1. 개요


'''다른 음악가들은 음표들이 원한 대로 그것들을 만들어야 했지만, 조스캥은 음표들의 지배자이어서, 그것들은 그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져야 했다.'''[2]

(Josquin ist der Noten Meister, die habens müssen machen, wie er wollt; die andern Sangmeister müssens machen, wie es die Noten haben wöllen.)

- 마르틴 루터

프랑스 출생의 르네상스 시대 음악가. 플랑드르 악파의 거장으로 르네상스 시기의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 한명이며 음악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다.[3] 르네상스 다성양식의 완성자로 오늘날까지 작곡의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는 대위법화성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정착시키고 발전시킨 인물이며 16세기에는 유럽 거의 모든 작곡가들이 조스캥이 남긴 음악을 연구하고 모방했을 정도. 20세기 후반부터 고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조스캥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대작곡가라는 명성에 비해 의외로 생애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 일단 탄생년도조차 불확실하며 생애 항목을 보면 상당 부분이 추정에 의존하고 있거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기의 생애는 거의 대부분 추측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인데, 조스캥이 사후에 본격적으로 유명해졌다는 점을 감안해도[4] 조스캥보다 명성이 떨어졌던 동시대의 다른 작곡가보다도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적은 이유는 아직까지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16세기 이후 그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으며 많은 후배 작곡가들이 그의 스타일과 작품을 연구하고 모방하였다. 그런 이유로 현재 조스캥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370여곡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져 있거나 의도적으로 조스캥을 사칭한 위작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5]

2. 생애



2.1. 초기


조스캥의 초기 생애는 당대의 기록이 별로 없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후대에 큰 관심을 받은 관계로 사후에 작성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는데 각각의 내용이 엇갈리기 때문에 결국 이런저런 추론을 통해 그의 초기 생애를 재구성하고 있다. 일단 연구자들간 의견이 대체로 일치하는 부분은 그가 1450~1455년 사이에 태어났으며 부르고뉴 공국(Dukes of Burgundy)의 현재 벨기에 영역 또는 접경지대에 가까운 프랑스 영역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조스캥의 국적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현재에는 프랑스 출신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무엇보다 조스캥 본인이 스스로를 프랑스인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스캥은 10대 초반일 때 부친이 사망하자 숙부의 양자가 되었다. 이 때 조스캥의 성(姓)은 숙부의 성인 Lebloitte dit Desprez를 따르게 되었는데, 현재에는 별명에 해당되는 데 프레(des Prez)가 압도적으로 유명하지만 조스캥이 활동할 당시에는 르블로와트(Lebloitt)를 성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후대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10살경부터 지역 성당의 소년합창단으로 활동했으며 한편으로 요하네스 오케겜(johannes ockeghem)에게 작곡법을 배웠다고 하는데 확실한 근거는 없다. 다만 조스캥이 평생 오케겜을 스승으로 존경했으며 1497년 그가 사망했을 때 조스캥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진혼곡을 쓴 것으로 볼 때, 젊은 시절에 일정 기간 오케겜에게 지도를 받았을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조스캥 당대에 그에 대한 기록은 1477년이 돼서야 나타나는데, 이 때 그는 앙주 공령(Duke of Anjou)에 속한 르네 성당(chapel de René)의 합창단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이듬해 3월까지 그는 이 성당에서 재직했는데, 이후 1483년까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그가 무엇을 했는지는 오리무중인 상황이다.

2.2. 밀라노/로마 시기


그는 1480년을 전후하여 밀라노로 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그가 헝가리 왕국에 잠시 머물렀다는 후대의 기록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으며, 다만 1483년 무렵에는 확실히 밀라노의 스포르차(Sforza) 가문[6]의 전속 가수이자 음악가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재직 중에 로마나 파리로 여행을 갔던 것으로 보이며 1489년에는 아예 밀라노를 떠나 로마로 건너간다.
1489년부터 1495경까지 그는 로마 교황청 소속의 합창단원으로 재직했는데, 당시 네덜란드 출신의 작곡가 가스파르 판 비르베케(Gaspar van Weerbeke)[7]가 밀라노로 가자 일종의 맞교환 차원에서 조스캥이 로마로 온 것이다. 밀라노에서 조스캥이 이탈리아의 세속음악에 눈을 떴다면 로마에서는 직업에 걸맞게 종교음악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으며 이 로마 시기에 본격적으로 원숙한 음악양식을 구축하게 된다.
1498년경 그는 다시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이듬해 이탈리아 전쟁이 발발하고 이 전쟁에 참여한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밀라노를 점령하고 당시 영주였던 루도비코 스포르차(Ludovico Sforza)를 투옥했는데, 이 시기에 조스캥은 루이 12세를 따라 프랑스로 복귀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정으로 따라갔는지는 알 수없으나 당시 조스캥이 꽤 알려진 작곡가였기 때문에 일종의 전리품 차원에서 데려갔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조스캥은 밀라노를 떠나던 시기에 유명한 프로톨라(frottola, 설명은 후술)인 《엘 그릴로(El grillo, 귀뚜라미)》와 《주여, 당신에게 희망을 걸겠습니다(In te Domine speravi)》를 남겼다. [8]

《귀뚜라미El grillo》. 전쟁의 와중에 작곡된 작품이지만 너무나도 흥겹다.
조스캥은 프랑스에서 1503년까지 루이 12세 밑에서 음악가로 재직했는데, 왕이 성과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자 '하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주세요(Memor esto verbi tui servo tuo)'라는 모테트를 작곡하여 결국 성과급을 받아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 분과 관련된 이야기가 항상 그렇듯이 사실 여부는 확실치 않다.

2.3. 페라라 시기와 프랑스에서의 말년


이처럼 조스캥은 프랑스 파리 궁정음악가로 재직하던 중 1503년에 이탈리아페라라(Ferrara) 공 에르콜 1세(Ercole I, Duchy of Ferrara)의 러브콜을 받고 페라라로 가게 된다. 하지만 페라라로 이주하자마자 흑사병이 유행하는 바람에 페라라공과 가족들은 다른 지역으로 피신해 버렸으며, 조스캥도 주인의 부재와 흑사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듬해 다시 프랑스로 복귀한다.[9] 이 1년이 채 안되는 짧은 페라라 시기가 주목을 받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는데, 첫번째는 이 시기에 그의 개인적인 사항을 알려주는 유일한 문서가 작성되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 후대에 조스캥의 명성을 드높여준 중요한 작품들이 다수 작곡되었기 때문이다.
음악가 선정 문제로 페라라공의 집사가 페라라공에게 보낸 편지가 현재 남아 있는데, 집사는 이 편지에서 조스캥보다 하인리히 이삭(Heinrich Isaac)[10]을 적임자로 추천하면서 그 이유로 이삭이 조스캥과 달리 무난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급료도 훨씬 싸다고 적어 놓았다.[11] 달랑 이 편지 한 통으로 조스캥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매우 위험하겠지만 일단 고용주의 관점에서 보면 그리 고분고분한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사보나롤라를 추억하는 분위기의 모테트 미세레르(Miserere)나 고용주의 이름을 빌린 미사곡 '페라라공 헤르쿨레스의 미사(Missa Hercules Dux Ferrariae)[12]와 같은 명작이 탄생했다.
1504년 페라라에서 프랑스로 돌아온 조스캥은 이후 1521년 사망할 때까지 현재 벨기에와 프랑스 접경지역의 콩데 쉬 레스코(Condé-sur-l'Escaut, 프랑스 영역에 있다)에 살았으며 노트르담 대학 부속교회의 감독(provost)으로 재직하면서 역작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말년이 될수록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졌으며 1509년에는 셍 퀭탱 대학(Saint Quentin collegiate) 부속교회의 감독/합창단장직을 겸임하였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것 같으며[13] 사망하기 직전 유언으로 부르고뉴 공령에 속한 콩데 시가 아니라 프랑스 왕국에 재산을 기증했다고 한다. 대신 그는 콩데 시에 모테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Pater noster, qui es in celis, 주기도문의 첫 문장)'를 기증하였다고 하며, 이 주기도문 모테트는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3. 조스캥의 음악세계



3.1. 조스캥 음악의 특징


조스캥은 시기적으로 중세 후기를 거쳐 르네상스에 본격 진입하는 과도기의 음악가였으며 시대에 걸맞게 그의 음악에는 전통적인 작법과 실험적인 작법이 함께 적용되어 있다. 조스캥의 생애 항목을 읽어보면서 느꼈겠지만 대작곡가라는 명성에 비해 정작 개인사와 관련된 자료는 너무나 부족한 반면 그의 음악에 대해 이야기할 거리는 정말 차고 넘친다.
조스캥은 인쇄술의 혜택을 크게 입은 작곡가이기도 하다. 서양 음악사에서 유럽클래스의 작곡가가 된 인물은 조스캥이 거의 최초인데, 조스캥의 인생 후반기부터 인쇄술이 보급되어 그의 작품이 퍼져 나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미 조스캥 생전에 몇 작품이 인쇄되어 출판되기도 했으며 그의 사후에는 본격적으로 유럽 각지에 퍼져나갔다.
조스캥의 초기 작품은 오케겜으로 대표되는 플랑드르 악파 특유의 복잡하고 엄격한 대위법과 멜리스마(Melisma) 창법[14]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조스캥 당시 유럽의 많은 예술가들은 돈과 후원자가 넘쳐나는 이탈리아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너도나도 이탈리아 반도로 향했으며 조스캥도 결코 예외가 아니었다. 그 덕에 조스캥은 오케겜으로 대표되는 북유럽의 대위법(contrapunctual) 경향과 트레센토(trecento)[15]이후 발달한 이탈리아의 화성적(homophonic) 경향을 모두 접할 수 있었고, 각각의 특장점을 절묘하게 조합하였다. 이처럼 조스캥은 화성-대위법 조합의 시너지 효과를 제대로 보여준 최초의 음악가였으며 이런 작곡양식은 조스캥 이후 지금까지도 유럽음악을 지배하고 있다. 그가 괜히 위대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조스캥의 음악에서 또 한가지 매우 중요한 것은 음악 내에 동기(motive) 또는 주제(theme)[16]의 개념을 창안했다는 것이다. 조스캥의 음악에서는 한 성부의 특정한 선율이나 리듬이 성부 내에서 반복 또는 변화되기도 하고 또 다른 성부에서 이를 모방하고 발전시키기도 하는데, 이런 반복/변화의 대상이 되는 선율과 리듬을 동기라고 한다. 이러한 성부간 동기의 모방과 발전을 통해 각 성부가 좀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전체적으로 정교한 앙상블을 구현할 수 있게 되었다.
아래 악보는 조스캥의 모테트 《주여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Domine ne in furore tuo)》의 서두 부분이다. 같은 색으로 되어 있는 음표는 서로 모방을 하고 있는 부분을 나타낸다. 각 성부가 각자 동기를 제시하기도 하고 다른 성부의 동기를 모방하기도 하면서 음악이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모테트 《Domine ne in furore t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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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조스캥이 사용한 동기의 성부간 모방은 후에 캐논이나 리체르카레, 푸가 등 각종 대위법 양식의 기원이 되었으며, 동기를 반복하거나 변화하는 등의 처리 수법은 후대의 소나타 양식이나 변주곡 등 주제를 변화시켜 곡을 구성하는 각종 음악 양식의 먼 기원이 되었다.

3.2. 조스캥의 작곡 기법



'''정선율(cantus firmus) 기법'''
테너 성부에 그레고리안 성가나 기타 전례 음악의 선율을 삽입하는 방법이다. 이 정선율은 일반적으로 길이가 긴 음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선율과 리듬이 다채롭게 전개되는 다른 성부에 묻혀서 선율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으며, 이런 이유로 음악적인 효과보다는 주로 상징적인 종교성을 부여하고 곡 전체의 통일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된다. 그런데, 조스캥 시절에는 종교 전례음악 대신 당시 유행하던 세속음악을 정선율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정선율로 많이 사용된 대표적인 세속음악이 바로 무장한 병사(L'homme armé)이다. 이 정선율과 L'homme arm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항목 참조.
'''패러프레이즈(paraphrase) 기법'''
정선율을 사용하되 기존의 선율을 그대로 이용하는 대신 선율과 리듬 등에 변화를 주어 사용하는 방법이다. 또한 테너 성부 이외의 다른 성부에 이 패러프레이즈를 적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정선율보다 다채로운 선율을 구사할 수 있어서 상대적으로 다른 성부와 좀더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패러디(parody) 기법'''
패러디는 기존의 음악으로부터 단선율만 가져와서 특정 성부(주로 테너)에 적용하는 정선율이나 패러프레이즈와 달리 여러 성부로 이루어진 음악의 전체 성부를 응용하는 방법이다.
'''캐논 기법'''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캐논이 맞다. 다만 조스캥은 캐논 하면 흔히 생각나는 시간차를 두고 선율을 모방하는 수법 말고도 아래 악보처럼 성부간 진행속도를 달리하는 방법도 사용하였다. 즉, 시간차 캐논뿐만 아니라 속도차 캐논도 사용하였던 것. 이런 속도차 캐논을 프롤레이션 캐논(prolation canon, 또는 mensuration canon)이라고 한다.
'''말 그리기 기법'''
가사의 의미에 적절한 음악을 결합시키는 것으로, 예를 들면 라틴어 '내려가다(descendit)'나 '올라가다(ascendit)'에 음악은 그에 맞춰 선율이 상행하거나 하행하는 것이다.
'''소게토 카바토(soggetto cavato)'''[17]
후술되는 항목 참조

3.2.1. 소게토 카바토


귀도 다레쪼(Guido d'Arezzo)가 고안한 계명법인 우트, 레, 미, 파, 솔, 라 6계명을 바탕으로[18] 사람이름이나 싯구로부터 선율을 창작하는 방법이다. 조스캥은 미사 '페라라의 에르콜 공(Hercules Dux Ferrariae)'에서 최초로 이 기법을 사용했는데, 단어를 주로 음절 단위로 분리하여 자음이나 모음이 같은 계명을 붙이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Hercules Dux Ferrariae라는 구절로부터 얻어낸 계명은 다음과 같다.
Her

re
cu

ut
les

re
Dux

ut
Fer

re
ra

f
ri

mi
ae

re
그래서 전체 선율은 레-도-레-도-레-파-미-레가 된다.[19] 이렇게 소게토 카바토로 만들어진 선율은 곡 전체의 주제로 쓰이기 보다는 주로 정선율처럼 응용되었는데, 에르콜 공의 미사 키리에 부분의 악보와 음악을 보자.

악보를 보면 처음에 소프라노 부분에서 긴 음가를 가진 레-도-레-레-도-레-파-미-레가 나타나고 이어 테너 성부에서 같은 선율이 나타난다. 이처럼 소게토 카바토 선율이 주로 정선율처럼 이용된 이유는 아무래도 이 방법으로 미적인 선율을 얻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음악 전면에 드러내는 것 보다는 깊숙히 묻어두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게토 카바토는 음악효과를 높이는 목적보다는 주로 특정 인물이나 장소, 인상적인 싯구 등을 기념할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20] 조스캥 이후 정선율 기법이 쇠퇴하면서 같이 사라지는 신세가 되었다.

3.2.2. 캐논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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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악보는 미사 L'homme arme super voces musicales의 아뉴스데이(Agnus Dei) 2부의 도입부인데 , 첫 네 음표와 이를 연결하는 적색/녹색 선을 유심히 보자. 중간 성부의 진행속도를 1이라고 하면 아래 성부의 속도는 2, 위 성부의 속도는 3이 된다. 즉 윗 성부부터 빠르기가 각각 3배속, 1배속, 2배속이 되는 것이다. 악보를 염두에 두면서 직접 음악을 들어보자.[21]
서양 고음악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캐논 기법을 논하기 이전에 일단 위 음악의 훌륭함에 감탄부터 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조스캥은 정교하고 복잡한 대위법을 추구하면서도 단지 형식에만 매몰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을 구현할 수 있는 작곡가였기 때문에 시대를 뛰어넘는 위대한 음악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3.3. 조스캥의 세속 음악


전술한 작곡 기법들은 주로 미사나 종교 모테트 등의 종교음악에 주로 활용되는데, 그는 성부간 모방이나 패러디와 같은 음악 기법을 세속음악(샹송, chanson)에도 많이 적용하였다. 중세 프랑스 지역의 세속음악 형식으로 3대 정형 작법(forme fixe)으로 불리는 비를레(virelai), 발라드(ballade), 론도(rondeau)가 있는데, 각자 복잡한 가사의 율격과 선율의 반복구조를 갖고 있다. 하지만 조스캥의 샹송들은 이와 같은 형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으며 좀더 자유로운 형식의 가사와 구조를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조스캥의 음악은 중세의 종말을 고함과 동시에 본격적인 르네상스 시대로의 진입을 알리고 있다.
한편 조스캥의 작품 중에는 이탈리아 시기에 작곡된 프로톨라(frottola) 3곡이 현존하고 있으며,[22] 성악곡 외에도 소수의 기악작품이 남아 있다.

[1] 종종 간단히 '조스캥' 또는 '데 프레'로 부르기도 한다.[2] 옛날 독일어라서 철자도 이상하고, 정확히 번역하기가 쉽지 않으나, 대충 무슨 뜻의 발언인지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의역하면 "다른 음악가들은 음표의 의지에 따라야 했으나, 조스캥은 음표들을 자신의 의지로 이끌었다." 정도가 될 것이다.[3] 당시에는 뛰어난 작곡가인 동시에 훌륭한 가수이기도 했다.[4] 물론 생전에도 훌륭한 음악가로 명성을 날렸다. 다만 조스캥이 유럽 전역에 유명해진 것은 그의 사후의 일이다. [5] 조스캥 뿐만 아니라 현재를 기준으로 오래 전에 살았던 작곡가일 수록 현존하는 작품들의 실제 작곡 여부와 위작 논란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다. 과거로 갈수록 저작권 개념이 희박해지고 악보의 전수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첨삭이 가해지거나 작곡자의 이름이 바뀌는 등의 문제가 생길 여지가 많아지기 때문 .게다가 조스캥은 전 유럽에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더 심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예를 들면 출판업자들이 악보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곡을 조스캥의 작품으로 사칭해서 출판한다거나 이런 식.[6] 당시 밀라노의 영주(Duchy of Milan)가문. 마지막 영주인 프란체스코(Francesco II Sforza)가 사망한 1535년까지 밀라노의 영주가문으로 있었다.[7] 현재 기준으로는 벨기에 출신이다. 출생지와 성장한 곳이 모두 현재 벨기에 영역에 있다.[8] In te Domine speravi는 1498년 화형당한 피렌체의 종교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를 추모한 작품이라는 견해가 있다.[9] 실제로 조스캥의 후임으로 페라라에 부임한 야콥 오브레히트(Jacob Obrecht)는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10] 조스캥과 같은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로 나이도 조스캥과 거의 동년배이며 나름 플랑드르 악파의 중요한 작곡가이다. 그의 작품 중 특히 프로톨라인 '인스브루크여, 그대를 떠나려 하네(Innsbruck, ich muss dich lassen)'는 현재까지도 자주 연주되는 명곡으로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의 폐막식 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런 곡은 도통 들어 본 기억이 없는데, 뭐가 유명?'하고 의아해 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에 모두 나오는 코랄 'Wer hat dich so geschlagen'의 원선율이 바로 이 곡이다.[11] 당시 조스캥은 월급으로 200 두카트, 이삭은 120 두카트를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페라라공은 주변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조스캥을 선택했다.[12] Hercules는 에르콜의 라틴어식 표현이다. 이 작품은 소게토 카바토(soggetto cavato)라는 재미있는 선율 창작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 소게토 카바토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한다.[13] 최소한 기록상으로는 그가 결혼했거나 자식이 있었다는 자료가 전혀 없다. 다만 애초에 이 분의 사생활에 대한 자료 자체가 거의 없다.[14] 성악곡에서 가사의 한 음절에 많은 음표를 붙여서 음절을 길게 끌고 나가는 가창 기법. 바로크 이전의 성악곡에 자주 나타나는 아~~~를 길게 끌고 가는 노래를 생각하면 된다. 이 멜리스마 창법은 유럽뿐만 아니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음악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지역별로 용어만 다를 뿐 본질은 거의 비슷하다.[15] 14세기 이후 이탈리아의 신음악 경향. 프랑스에서 비롯된 신음악 운동 '아르스 노바'의 이탈리아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6] 엄밀히 따지면 주제는 동기보다 좀더 포괄적인 개념인데 특별히 혼동을 일으키지 않으므로 혼용해서 쓴다.[17] 마땅한 번역어가 없어서 그대로 적는다. 계명창법(solmization)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현재의미의 계명창법과 소게토 카바토는 많이 다르다.[18] 우트(ut)는 후에 우리가 잘 아는 도(do)로 바뀐다. 한편 현재 시(si)에 해당되는 계명에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는데, 중세시대에는 으뜸음으로부터 7도 높은 음은 악마의 음이라고 해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 음절로부터 계명을 정하는 규칙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고 다소 임의적이다. 그래서 같은 구절에서도 작곡가마다 다른 음계가 나올 수 있다.[20] 실제로 에르콜공은 이 미사 덕분에 오늘날까지 이름이 회자되는 영광(?)을 얻었다. 이 작품이 아니었으면 극소수의 전문 역사가 외에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21] 이 미사의 아뉴스데이는 모두 3부로 되어 있으며 3부 모두 속도차 캐논 수법을 활용하고 있다.[22] 프로톨라에 대해서는 발라타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