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용득
1. 소개
전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 감독.
2. 선수 시절
대구 출신으로, 대구상고(42회)를 졸업하고 실업 야구 제일은행, 한일은행[4] 등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포지션은 포수로, 1970년대 국가대표 선수였다. 그래서인지 이미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음에도 불구, 삼성 측에선 그래도 국가대표 포수니 만약을 대비한다는 개념으로 백업 포수를 목적으로 플레잉 코치로 등록시켰다.
3. 지도자 시절
1981년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한일은행 야구단의 코치로 있다가 1982년 한국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진에 합류했다. 코치라고는 했지만, 워낙 젊었기 때문에 말이 코치였지 플레잉 코치로 선수로서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프로에서는 주로 대타로 출전. 스스로도 내심 선수 생활에 미련이 남았는지 비시즌마다 선수들과 같이 훈련을 받았다. 그러다가 1984년 김일융의 전담 포수를 겸해 영입된 송일수의 모습을 본 후 선수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고 한다.
그 후 계속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재직[5] 하다가, 1992년 시즌 후 김성근의 후임으로 삼성의 감독이 됐다. 감독이 되자 세대교체에 힘써서 노장 선수들을 정리하고 젊은피로 체질을 개선했다. 1993년 정규 시즌을 2위로 마치고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숙명의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와 접전을 벌여 초반에 2승 1무 1패로 앞서 나갔으나, 젊은 선수들의 경험 부족으로 세판을 내리 패해 우승에는 실패했다.[6] 이것과 비교되어[7] 그의 전임자가 삼성에서 기록한 흑역사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러나 1994년과 1995년에 내리 5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삼성의 감독직에서 해임됐다. 이 때 당시 뛰던 일부 선수들은 전임자와의 차별화 때문이었는지 리빌딩의 강도가 너무 강했고, 노장 선수들의 부재가 팀 단합에 영향을 끼쳐 성적이 떨어졌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평균 관중이 가장 좋았던 해였다. 우용득은 전임 김성근 감독 시절에 위축되었던 삼성 특유의 호쾌한 공격야구를 부활시켰고, 이에 힘입어 부임 첫해이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1993년에는 평균 관중수가 지방 구단 최초로 50만 관중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1995년에도 부진한 성적과는 별개로 평균 관중 60만을 기록하는 등 평균 관중 동원쪽에서 평타 이상을 기록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 2군 감독을 지내다 2001년 김명성 감독이 갑자기 급사하자, 감독 대행이 되었다. 2002년 시즌을 맞아 7년 만에 정식 감독으로 복귀하나, 투자에 소극적인 구단과 타선을 이끌었던 펠릭스 호세의 2중 계약 파문 등 어수선한 팀 분위기 때문에 최하위를 전전하고 16연패를 당하기도 하면서 그 해 6월에 해임되었다. 만약 그가 해임되지 않았다면 롯데가 이 해 97패를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8]
고졸 좌완 투수 유망주 '''이승엽'''과 우완 투수 유망주 '''이대호'''를 타자로 전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롯데 시절에는 펠릭스 호세가 배영수를 가격하여 남은 시즌을 뛸 수 없게 되자, 호세를 말소한 후 그 때 이대호를 1군에 불러들였다.
이후 신문의 야구 컬럼을 쓰기도 하고 야구중계 해설자 등을 맡고 있다가, 2009년 삼성 라이온즈의 스카우트 팀에 합류하여 복귀하였으며, 2015년 12월 18일에 대학야구연맹의 전무 이사로 승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