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성(1946)
1. 소개
롯데 자이언츠의 전 감독. 그를 조명하는 좋은 글. 사진자료가 많은 글.
2. 선수 경력
부산공고 시절 팀의 첫 우승을 이끌었던 선수였다. 당시 청룡기 MVP에 오르면서 맹활약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부산공고의 처음이자 마지막 우승이었다. 이 때 같이 활약했던 선수가 OB 베어스의 전 감독이었던 이재우.
한국실업야구 시절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에 입단해 1970년 다승왕에 오를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다가, 1977년 은퇴하였다.
3. 지도자 경력
한국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코치로 부임해 팀을 이끌면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롯데의 첫 우승때도 팀의 일원으로 공헌했다.
이후 청보[1] , 태평양, 삼성, 빙그레[2] , LG 등 많은 팀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특히 1994년 LG 트윈스의 투수코치로 팀의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당시 김용수, 이상훈, 정삼흠, 김태원, 인현배, 차명석 등을 포함한 투수진을 잘 이끌어 우승의 주역이 되었다. LG 직전에 부임했던 빙그레 이글스에서도 정민철을 지도해서 명성을 얻었다. 그 뒤 롯데 자이언츠에 복귀하여 무너졌던 롯데 마운드를 재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998년 시즌 도중 해임당한 김용희 감독을 대신하여 감독 대행을 맡아 무난하게 잔여 시즌을 이끌면서, 1998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3.1. 롯데 감독 시절
3.1.1. 1999년
정식 감독으로서의 첫 시즌인 1999년, 롯데는 개막과 동시에 6연승을 질주하며 1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3] 이 시즌 롯데는 안정된 마운드와 막강한 타선을 앞세워 시즌 내내 전체 승률 1위를 유지했다. 문동환이 17승으로 제 몫을 다했고 주형광이 변함없이 맹위를 떨친 데다가 박석진이 11승을 거두면서 활약했다. 여기에 팀 주장이자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박정태, 특급 외국인 선수 펠릭스 호세, 기량이 정점에 오른 마해영의 공격력까지 가세하며 이상적인 투타밸런스를 갖췄다. 이 시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1999년 문서를 참조할 것.
시즌 마지막 경기인 두산전을 패하는 바람에 한 끗 차로 두산에 이은 전체 승률 2위 및 드림리그 2위로 정규시즌을 마무리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와 맞붙어 극적인 승부 끝에 4승 3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너무 힘을 많이 뺀 관계로 한화 이글스에게 패배, 준우승으로 만족해야 했다.
3.1.2. 2000년
2000년 시즌 매직리그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긴 했지만 전 시즌보다 약화된 전력 탓에 승률은 5할을 간신히 넘었고, 이 탓에 드림리그 3위였던 삼성과 준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4] 결국 1승 2패로 패하여 일찌감치 가을야구를 마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삼성 감독은 김명성의 전임이었던 김용희였다(...).[5]
3.1.3. 2001년
그리고 비극의 2001년 시즌. 구단 측에서 선수협 문제로 관계가 틀어진 마해영을 김주찬, 이계성[6] 을 상대로 삼성 라이온즈에 보복 트레이드해 버렸고, 임수혁은 이미 2000년 시즌 초에 불의의 사고로 다시는 그라운드로 돌아오지 못했으며, 손민한이 드디어 가동되면서 힘을 보탰지만 나머지 투수진의 부상 이탈이 늘어나며 상황은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하지만 4강과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던 상황. 2001 시즌은 유례없는 4위 싸움으로 치열했던 시즌이었다.[7] 매 게임 치열한 승부로 인해 김명성 감독의 스트레스는 계속 쌓이고 있었다.
2001년 7월 24일 휴식일에 친구를 만나고 오는 도중에 가슴 통증을 호소하며 쓰려져 긴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만 54세로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밝혀졌으며 흡연과 음주를 즐긴 것이 화근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갑자기 팀의 선장을 잃으면서 흔들렸고, 이후 자이언츠의 암흑기를 상징하는 8888577로 이어진다. 우용득 대행체제에서 27승 22패를 해서 4위 싸움을 끌고 갔지만, 4위와 2게임차 꼴찌를 기록했다. 만일 김명성 감독이 갑작스레 타계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암흑기까지는 없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KBO 리그 역사상 시즌도중 감독이 사망한 사상 초유의 사태에 결국 롯데 자이언츠는 KBO에 경기 연기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16년 뒤 같은 연고지를 두고 있는 축구단에서도 모 감독이 그와 같은 운명을 밟고 말아 축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4. 평가
스포츠맨으로는 드물게 다례와 서예를 취미로 즐겼고, 경기는 삼성쪽으로 기울고 사건 당시 철수하는 선수들을 만류하면서 '''"게임은 치러야 한다. 너희들이 이러면 한국프로야구는 끝장이다"'''라고 설득했다는 일화, 심정수가 강민영의 투구에 얼굴을 맞아 입원했을 때 직접 심정수에게 찾아가 위로와 사죄의 말을 건넨 모습 등에서 온화한 덕장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투수코치로 명성을 날렸지만 타자를 보는 눈도 있어 차명주와 최기문의 트레이드를 주도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두 선수 모두 새 팀에서 기량이 만개한 윈-윈 트레이드 사례로 꼽힌다.
이처럼 뛰어난 투수 코치이자 지도자가 너무 갑작스레 타계한 것은 롯데 구단뿐만 아니라, 야구계 전체의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5. 롯데의 기일날 전적 부진
이상하게도 롯데는 김명성 감독 기일만 되면 번번이 패배하고 있다.
팀간 전적은 아래와 같다.
통산 전적이 2승 10패인데 2승 중 그 1승도 내용이 좋지 못하게 얻은 거여서 실질적으로는 1승에 가깝다고 봐야 할 지경이다. 거기에 '''득실마진은 37득점 83실점으로 득실차가 -46일 정도로 부진하다.'''2013년 7월24일 롯데 vs 한화
[1] 수석코치로 활동했는데 이 당시 함께 호흡을 맞췄던 감독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후배 허구연이었다. 허구연은 성적 부진으로 얼마 못가 잘렸지만 김명성은 후신 팀인 태평양까지 살아남았다.[2] 빙그레 시절은 투수코치가 당시나 요즘으로서 보기 힘든 2명이 기용된 시기로 투수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좌완은 이선희 코치, 우완은 김명성 코치에게 맡기면서 맞춤형 지도를 추구했다.[3] 이 덕택에 김명성은 감독 데뷔전부터 최다연승 기록(6연승)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4] 통합5위로 만약 단일리그였다면 비밀번호가 2000년부터 시작되었을것이다.[5] 김용희는 롯데 감독직에서 1998년에 경질되자 서정환 삼성 감독이 그를 수석코치로 불러들였고 1시즌을 수석코치로 보냈다. 그러다가 서정환이 1999년 플레이오프의 졸전 + 김응용 영입시도에 따라 경질되었고 그 김응용은 1시즌을 해태에 더 남기로 계약하면서 땜빵감독으로 1시즌을 보낼 삼성 감독으로 임명된 것.[6] 아무런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은퇴하였다. 그리고 심판으로 KBO 리그에 돌아와서, 오심 퍼레이드로 악명을 얻는 중. 인지도 면에선 김풍기, 강광회, 박근영에 밀리지만 나름 유명하다. 안경을 써서 시력이 안좋아 그럴 수도...[7] 최종 4위 한화와 최종 8위 롯데와의 승차는 겨우 2게임.[8] 이 해에는 기일 전날에 레일리의 완투승으로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