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창단'''
1982년 2월 3일 (42주년)
'''법인 설립'''
1982년 3월 5일 (42주년)
'''법인명'''
㈜삼성라이온즈[1]
'''상장유무'''
비상장기업
'''기업규모'''
대기업
'''구단 사무실'''
대구광역시 수성구 야구전설로 1 (연호동)[2][3]
서울특별시 강남구 테헤란로 114 (역삼동)[4][5]
'''구단명'''
'''삼성 라이온즈''' (1982~)
'''모기업'''
''' '''[6]
'''연고지'''
대구직할시 / 대구광역시 (1982~)
경상북도 (1982~1999)[7]
'''구단주'''
원기찬[8]
'''대표이사'''
'''단장'''
홍준학
'''감독'''
허삼영
'''주장'''
박해민
'''영구결번'''
'''10 양준혁'''
'''22 이만수'''
'''36 이승엽'''
'''홈구장'''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1982~2015)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2016~ / 29,000석)[9]
포항 야구장[10](2012~ / 12,000석)
'''2군 구장'''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
'''마스코트'''
[image]
블레오
'''킷 스폰서'''

'''워드 마크'''
[image]
'''프로모션 엠블럼'''
[image]
'''홈페이지'''
| | | | |
'''공식 APP'''
|
★★★★★★★★
'''최종 우승''' (8회)
[image]
[image]
[image]
[image]
1985년
2002년
2005년
2006년
[image]
[image]
[image]
[image]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페넌트레이스 우승''' (9회)[11]
'''단일 리그'''
2001년, 2002년, 2005년, 2006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전·후기'''
'''리그'''
1982년 후기, 1984년 전기, 1985년 통합[12],
1986년 후기, 1987년 통합[13]
'''양대 리그 '''
1999년 매직
'''아시아 시리즈'''
2011년
'''포스트시즌 진출''' (28회)[14]
'''한국시리즈'''
1982년, 1984년, 1986년, 1987년, 1990년, 1993년, 2001년,
'''2002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플레이오프'''
'''1986년''', 1988년, '''1990년''', 1991년, '''1993년''',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4년''', 2008년, '''2010년'''

'''준플레이오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7년''', '''2000년''', 2003년,
2007년, '''2008년'''

'''프랜차이즈 팀 기록'''
[ 펼치기 · 접기 ]
'''최고 승률'''
'''.706'''
1985년 110경기 77승 32패 1무
'''최저 승률'''
'''.396'''
2017년 144경기 55승 84패 5무
'''최다 승'''
'''88승'''
2015년 144경기 88승 56패
'''최다 패'''
'''84패'''
2017년 144경기 55승 84패 5무
'''최다 관중'''
'''851,417명'''
2016년[175]
'''최소 관중'''
'''177,774명'''
1988년[176][코로나19]
'''최고 FA 계약'''
'''4년 80억'''
2015년 윤성환 / 2018년 강민호

1. 개요
2. 상세
2.1. 역대 BI
2.2. 팀 컬러
2.3. 운영 방식
2.3.1. 2000년대 초까지, 돈성
2.3.2. 2000년대 중반부터, 변화의 갈림길
2.4. 선수 대우
2.4.1. 삼성 출신 FA 이적 선수 징크스?
2.5. 은퇴식
2.6. 우수한 선수 육성 및 재활 체계
2.7. 좌타 왕국
2.8. 아마야구 지원과 리틀야구단
2.9. 외국인 투수 잔혹사
2.10. 홈구장
2.11. 83 라인
3. 역사
3.1. 성적
3.1.1. 암흑기
3.2. 연표
3.2.1. 1980년대
3.2.2. 1990년대
3.2.3. 김응용 체제 (2001~2004)
3.2.4. 선동열 체제 (2005~2010)
3.2.5. 류중일 체제 (2011~2016)
3.2.6. 김한수 체제 (2017~2019)
3.2.7. 허삼영 체제 (2020~ )
4. 라이벌
5. 관련 기록들
5.1. 역대 구단주
5.2. 역대 사장(대표이사)
5.3. 역대 단장
5.4. 역대 감독
5.5. 역대 팀 성적
5.6. 역대 개인 성적
5.6.1. 통산
5.6.2. 단일 시즌
5.7.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5.8. 역대 주장
5.9. 유니폼
5.10. 역대 선수 명단
5.11. 역대 개막전 선발투수
5.12. 레전드
6. 팬
6.1. 숫자
6.2. 팬덤 성향
6.3. 네임드 팬
7. 선수단/등번호
8. 응원단
8.1. 응원가
9. 사건사고
10. 지역 연고 학교
10.1. 과거 지역 연고 학교
11. 특이 사항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NEW BLUE! NEW LIONS!'''''
2021년 구단 캐치프레이즈
KBO 리그 소속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대구광역시다. 홈 구장은 수성구 연호동에 위치한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다.
KBO 리그 원년부터 연고지·팀명·모기업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현재까지 이어져온 두 팀[15] 중 하나이며, 한국시리즈 최다 진출(17회), 정규시즌 최다 우승(9회)[16],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2010~2015),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1997~2008) 등의 기록들을 보유한 명문 구단이다.
하지만 2016시즌부터 9위로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이후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등 암흑기를 경험하고 있다.

2. 상세


모기업이 삼성인 팀답게(?) KBO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2000년부터 KBO에서 메인 스폰서를 도입했는데,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삼성증권,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삼성전자에서 메인 스폰서를 맡아왔다. 팀의 상징색은 파란색 & 빨강색-하늘색 (연파란색, 1984년부터 1994년까지)[17]-파란색 (1995년부터 2015년까지)[18]-파란색 & 빨강색 (2016년부터). 팀의 마스코트는 블레오, 핑크레오, 레니, 레온이다. 합쳐서 블레오패밀리라고 부른다.
한때 삼성스포츠단 중 유일한 독립 법인으로서[19], 현재 축구단을 제외한 다른 스포츠팀들은 그룹 계열사의 부서 형태지만 제일기획에 운영권이 넘어가기전의 삼성 라이온즈는 삼성 계열사의 위치를 가지고 있었으며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유언대로 특정한 회사가 독점하지 않고 지분을 각각 나눠 가지고 있었다.[20] CJ그룹, 신세계그룹까지 포함한 범 삼성가가 모두 지분을 가지고 있는 셈.[21][22]
2015년 삼성의 스포츠단 운영 전략 변화의 일환으로 삼성스포츠단은 국내 광고 업계 1위이자 삼성 계열사인 제일기획으로 일괄 이전되었다. 다만 제일기획은 구단의 운영비를 전액 지출하는 모기업이 아니며, 단지 운영을 전담으로 하는 것이고 구단의 운영비는 삼성 내의 전자나 물산 등 다른 계열사에서 지원하는 형식이다. 제일기획이 삼성 라이온즈 지분 67.5%(12만 9,000주)[23]를 6억 7천만원[24]에 사들여, 2016년 1월 1일부로 제일기획 산하로 편입되었다. ##
제일기획 산하로 이관 이후 삼성 라이온즈에 대한 자금 지원이 줄었다는 말들이 있는데 돈성 시절처럼 리그 내 넘사벽급으로 펑펑 써대진 못하니 과거보다 줄은건 맞지만 최근 3년간 FA계약 총액만 200억원 넘게 투자하고 있으며[25], 구단 운영비도 10구단 중 다섯번째로 많이 지출하고 있다.## 상술했지만 제일기획에서 운영비 전액을 대는 것이 아니라 삼성의 경영 방침이 바뀐 것이다.

2.1. 역대 BI


삼성 라이온즈의 역대 엠블럼 변천
[image]
[image]
[image]
[image]
'''1982~1989'''
'''1990~1994'''
'''1995~2007'''
'''2008~'''

2.2. 팀 컬러


4대 구기 종목 감독들이 뽑은 최고의 팀
전통적인 팀 컬러는 백수의 왕 사자라는 팀 네임답게 공격적이고 힘이 넘치는, 화려한 야수진을 앞세운 공격 야구로[26] 강건한 수비력 그리고 강속구를 던지는 에이스 투수, 이것이 삼성 라이온즈의 이미지였다.
한창 삼성이 잘 나갈 때의 클린업트리오 사기타선은 두 형태였다. 1980년대 중반의 삼성 타선은 리드오프가 어떻게든 공격의 활로를 뚫고 어떤 교타자가 안타를 치든 볼넷을 골라나가든 어떻게든 누상에만 나가면 4번 타자가 나와서 홈런을 뻥 쳐버리고 그 뒤에 나오는 세 명의 타자 중 한 명은 연이어 반드시 장타를 쳐서 빅이닝을 아주 쉽게 만들어버리는 그런 형태였다.[27] 그리고 2000년대 초반은 '''이마양'''이라는 이 단어 하나로 모든 것이 정리된다. 2000년대 중후반에는 강력한 투고타저와 이승엽의 해외진출, 선동열 감독의 투수중심 운용으로 인해 지키는 야구라는 게 팀컬러가 되기도.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주루를 많이 신경쓰지 않았던 팀이기도 하다. 굳이 도루를 하면서 그라운드를 흔들지 않아도 엄청난 타선의 파괴력으로 대량 득점이 쉽게 가능했던 팀이기 때문이다.[28] 클린업 양준혁이 193도루로 팀 통산 도루 1위를 하고, 이전까지의 리드오프였던 류중일이나 박한이는 뭔가 하나씩은 부족한[29] 리드오프였다. 어쨌든 확실히 삼성은 달리는 소총부대와는 이미지가 멀었고 어마무시한 대포부대의 이미지가 강했다. 오죽하면 첫 도루왕이 창단 32년 만인 2014년에 나왔을까. 단 80년대 초중반까지는 이해창 등의 나름 빠른 리드오프는 갖추고 있었다. 그나마 류중일 감독 시기 들어 타선에 체질개선이 이루어지면서 뛴다는 이미지가 생기고 있다.
2000년대 중후반, 선동열 감독 시절에는 강력한 불펜과 마무리 투수를 통해 승리하는 팀이 되었다. 대신 타선은 전체적인 리빌딩이 가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타선으로 이기는 경우도 종종 있긴 했지만. 몇몇 삼성 올드 팬들은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예전부터 고수해 왔던 뻥 야구 스타일에서 벗어나 뻥 야구도 철벽 투수진도 아닌 어정쩡한 팀이 되었다며 불평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투수진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KBO 최고 수준이고, 야수들 수비력도 수준급이다. 다만 윤성환이나 장원삼 등 준수한 1선발급 선수들도 있긴 했지만, 류현진같이 리그를 씹어먹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둘 모두 큰 기복 없이 꾸준히 성적을 올리는 스타일. 뭐 게다가 당시 타선도 나쁜 편은 아니었는데 양준혁심정수 등이 포진했던 타선은 투고타저가 극심했던 데다 대부분의 팀들이 투수진에만 집중하느라 타선이 뭔가 모자랐던 당시 리그에선 정상급이었다.
어쨌든, 이후 2011년 유격수 출신 류중일 감독이 취임하면서 배영섭, 박해민, 구자욱 같은 유망주가 발굴되고 최형우, 박석민 등 새로운 주포들의 각성으로 공격 야구가 다시 살아나며 2011년 정규 시즌, 한국 시리즈, 아시아 시리즈를 모두 우승, 국내 최초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였다. 2012년에는 이승엽까지 일본에서 복귀하며 타선이 더욱 강화되었고, 2014년에는 비록 역대급의 타고투저의 흐름을 타긴 했으나 1987년에 삼성이 세운 팀타율 .300을 뛰어넘는 '''.301'''의 팀타율 신기록을 세웠다. 2015년에는 '''.302'''로 더 높였다. 팀 타율이 3할을 넘어간 것은 한국프로야구 개막 이래로 2016년까지는 삼성 라이온즈가 유일했다. 여담으로 2015년 넥센(현재 키움)이 팀타율 3할에 도전했는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만난 삼성이 9이닝 1안타로 넥센 타선을 잠재우며 몸소 2할대로 떨어트려줬다.
그런데 2017 시즌 KIA 타이거즈가 시즌 전 FA로 영입한 최형우와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한 안치홍, 김선빈 등 주축 타자들의 복귀 등 호재가 겹쳐 삼성 라이온즈에 이어서 두 번째 시즌 팀타율 3할 달성 구단이 되었는데 삼성의 2015년 팀 타율 .302와 동률을 이뤘다. 물론 팀타율 3할을 세 번이나 기록한 삼성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2018 시즌 역대급 타고투저 흐름에 따라 두산 베어스가 '''.310'''으로 기록을 경신했다.
또, 왕조 시절엔 선발투수진만큼은 막강했던 팀이다. 2013 시즌 윤성환, 배영수, 장원삼, 차우찬이라는 토종 10승 투수 4명을 배출하였고, 외국인 투수들이 부상에 시달리지 않고 좀 더 분발했다면 5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하는 흔치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외국인 선발까지 포함해 2014 시즌은 준수한 선발자원인 차우찬이 본의 아니게 롱 릴리프로 전업을 하게 되었을 정도, 또한 2011~2013년까지의 불펜진은 가히 KBO 최강이라 칭할 수 있을 정도. 홀드왕 한현희와 구원왕 손승락이 있었던 넥센(현재 키움)도 볼 만하지만(넥센은 선발진이 안 좋다.) 2012년 5월 24일 대구 롯데전부터 7회까지 리드한 경기서 단 1패도 없이 무려 130연승을 내달렸다. 2012년 58경기, 2013년 62경기, 그리고 2014년 10경기를 더해 ‘130연승’을 채웠다. JOKKA 라인이라 불리는 전통의 불펜진에, 정현욱과 오승환이 떠나고 2014년 팀 투수진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 와중에도 '''9개 구단 중 유일하게 5선발 전원이 100이닝을 소화했으며, 그 부진하다던 투수들의 호투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제패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삼성 라이온즈는 원조 투수왕국을 넘어선 新 투수왕국이라 할 수 있을 정도.
하지만 2015년 형체없는 도박 루머가 퍼지며 윤성환, 안지만, 임창용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제외되며서 급격히 하락세가 나타났다. 결론적으로 윤성환과 안지만은 무혐의, 임창용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안지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은 도박이 아니라 토토 사이트 개설에 돈을 빌려준 부분이다. 이 사건 이후 2016년, 2017년 용병과 투수진의 부진으로 2년 연속 9위라는 성적을 거두며 그 전의 화려한 왕조에 비해서 약해진 모습을 많이 보였다. 2018 시즌은 윤성환에게 부담이 쏠릴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삼성에 정말 오랜만에 혜성처럼 나타난 고졸 신인 투수 양창섭의 활약에 따라 투수왕국의 재건이냐 또는 재건의 실패냐가 갈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리고 2018년 오치아이 에이지 코치가 투수진을 재건하고 백정현의 2년 연속 선발활약 + 최채흥의 등장 + 최충연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 + 불펜 WAR 1위, 100K라는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시즌 팀 성적 6위를 거두면서 5위 KIA 타이거즈와의 승차 없는 가을야구 경쟁에서 비록 밀려났으나 재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2019년에는 기대했던 최충연의 선발 전향뿐만 아니라 구자욱, 박해민, 이원석, 김동엽의 부진으로 8등으로 시즌을 마쳤으며 4년 연속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하는 고배를 마셨다. 결국 2017년부터 팀을 이끌어 오던 김한수 감독은 2019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020년 감독으로 다양한 적임자가 거론되는 가운데, 삼성이 파격적인 인사를 기용했다. 바로 데이터분석팀의 허삼영. 허삼영의 등장으로 삼성의 야구는 많이 변화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실망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세이버메트릭스와 데이터를 바탕으로 팀을 구성하고 있다. 많은 기대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모습들을 보여주었던 주장 박해민을 과감하게 2군으로 내리고 박찬도, 박승규를 기용하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6월 이후에는 안정화된 투수진과 점차 살아나고 있는 타자들을 바탕으로 상위권에 위치해있는 NC와 LG를 상대로 위닝을 거두면서 팬들의 관심도 살아나게 되었다.

2.3. 운영 방식


전체적으로 부유한 이미지의 팀이다. 또한 전력 자체는 좋지만 구단 운영은 삼성그룹 고위층의 생각에 의해 좌우되는 팀이다. 현재는 팬들의 힘이 세진 데다 프런트 내부의 지속적인 반성을 통해 선수들에게 연봉 높고 대우 잘해 주는 대인배 이미지의 좋은 팀이 됐지만 옛날엔 비싸게 사와서 쓰다 버리는 전형적인 삼성식 운영으로 그야 말로 악명높았다.[30] 대표적인 예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 등 한국 야구의 전설이자 팀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매몰차게 내친 것은 유명하며[31] 원년부터 활동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공식 은퇴식을 치뤄준 선수가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이승엽, 권오준 여덟명밖에 없다는 것[32] 자체가 선수들을 어떻게 생각해 왔었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2002년 V2 이후로부터는 팬덤과 팀 내에서 만연했던 우승제일주의가 충족되면서 저런 행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 우승 이후 프런트는 기존 프랜차이즈 스타들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힘을 기울여서, 2003년에는 뒤늦게나마 이만수를 영구결번 시켜주기도 하고,[33] 최근에는 레전드들을 코치로 기용하는 등의 행보도 보이고 있다. 은퇴식도 신경써서 치뤄주는 건 덤. 그러다 2015년을 기점으로 다시 그 악명 높던 삼성식 운영이 스물스물 돌아오기 시작하고 있다. 이런기사이런 글이 올라올 정도로 도박사건에 대한 부실한 대응, 팀프랜차이즈 박해, 용병 계약과 관련해 악의적인 언플등 모든 팬들이 80-90년 악명높던 프런트가 돌아왔다며 분노하는중. 그리고 2016년 류중일 감독의 재계약건 등을 보면 아직까지는 팬들의 목소리보단 삼성그룹 고위층의 입김이 구단 운용에 더 강하게 작용한다고 보여지고 있다.
김응용 감독 시절까지는 자금력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인 선수 영입으로 한국 야구계의 뉴욕 양키스 같은 올스타 팀 이미지였는데,[34]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선수 영입을 자제하여 그 이미지가 희석되었다. 가장 큰 계기는 2004년 우승팀 현대에서 FA로 풀린 심정수와 박진만을 각각 4년 최대 60억, 4년 최대 39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35]으로 영입하여 2005년 우승을 이룬 이후, '그렇게 돈 써서 우승 못하는 팀이 어디 있냐'는 말에 기분 상한 선동열 감독이 FA 영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 이후 류중일 감독이 취임을 하고 6년을 팀을 이끌동안 FA 영입은 한 명도 없었다. FA 영입은 커녕 프런트는 '합리'를 외치며 집토끼 마저 잡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해외 진출을 한 오승환을 비롯하여 타 팀으로 이적한 차우찬, 박석민, 권혁, 최형우, 배영수 등 선수 유출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취임 후 2011~2014년 4연속 통합 우승, 2011~2015년 5연속 정규시즌 우승을 거뒀지만 2016년 구단 최악의 성적인 9위로 추락하고 만다.
구단 프런트는 성적 부진의 이유인지 합리의 기조인지 몰라도 6년동안 5번의 정규시즌 우승, 4번의 통합 우승을 달성한 류중일 감독과 재계약을 하지 않고 초짜 김한수 감독을 선임한다. 그리고 저비용 고효율 정책 폐기를 선언하더니 폭풍같은 FA 영입을 시작했다. 2017년 시즌을 앞두고 우규민과 이원석을 데리고 왔으며, 2018시즌을 앞두고 강민호를 영입한다. 롯데와 한화에 가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삼성도 근래 FA에 돈을 안 쓴 건 아니다.
하지만 팬덤 사이에서는 삼성 라이온즈 단장 홍준학을 비판하는 여론이 강세다. 4년 연속 외인 용병의 실패, FA의 비효율적인 성적 등이 '홍준학 사퇴', '홍방안(홍준학 방출 안하면 삼성팬 안해)'와 같은 신조어를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라 볼 수 있다.

2.3.1. 2000년대 초까지, 돈성


2002년 전까지 계속된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36]로 인해, 외환 위기 이후에는 타 구단들의 경영난을 틈타 무지막지한 자금력으로 선수들을 영입하면서 현대 유니콘스와 함께 야구계를 돈으로 양분하기도 했었다.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온 임창용조계현(해태), 김기태김현욱(쌍방울)을 비롯해 2000년 FA 제도가 도입되면서 이강철(해태)과 김동수(LG)를 영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2년에는 양준혁(LG)를 재영입 2004년에는 박종호(현대)를, 2005년에는 가장 임팩트가 큰 박진만심정수(현대)를 FA로 영입했다. 이외에 해태에서 방출된 이순철을 영입하거나 선수협 파동으로 소속 팀과 갈등을 빚은 마해영을 트레이드해 데려오는 등, 한동안은 우승만을 위해서 외부 자원들을 마구 영입하기도 했다.
이렇듯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팀임에도 불구하고 2002년 전까지는 임팩트가 있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37][38] 분명 삼성의 공식 첫 우승은 1985년임에도, 삼성이 콩라인을 탈출한 건 김응용 감독이 온 후 2002년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알고 있는 야구 팬들이 적지 않다. 심지어 삼성 구단과 선수, 팬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한국시리즈 우승 뒤에야 85년 우승 기록도 자신있게 우승 기록으로 얘기하게 된다. 또한 다른 팀이 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투자를 많이 하는 탓에 돈성, 돈성 타이콘츠[39]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나마 삼성이 돈성의 오명을 벗은 것은 김재박 당시 현대 유니콘스 감독이 '돈으로 누가 우승 못 해'라며 삼성을 향해 디스를 걸었고[40] 이 말을 듣고 빡친 선동열 감독이 FA 영입을 자제한 이후부터이다. 사실 박진만과 심정수 영입 후, 2009 시즌 개막 전 장원삼(히어로즈) 30억 현금 트레이드설 전이나 그 이후 타 팀에서 큰 돈을 들여가며 데려온 선수는 없다. 트레이드로 데려온 KIA의 손지환, 한화의 심광호 정도. 김재박 감독의 발언 후 2009년에도 처음으로 데려온 선수가 트레이드로 영입한 두산 베어스채상병. 이 경우는 좌완 투수 지승민과의 1:1 트레이드였으니 돈과는 상관없다. 그리고 심광호채상병의 트레이드 역시 진갑용현재윤의 부상만 아니었으면 당연히 하지 않았을 트레이드였다.[41]
김재박 감독의 발언 후 자체적으로 짜임새 있는 투타 라인을 리빌딩하면서 돈성 오명에서 벗어난 상태였으나 2008년 11월 14일, 히어로즈장원삼을 30억에 지르며 '''돈성'''의 건재함을 과시했다. 이후 다른 6개 구단의 반발로 인해 트레이드 승인 불가를 받아 장원삼을 돌려보냈지만, 1년 후에 결국 영입했다.
선동열 감독도 FA 영입을 완전히 포기한 건 아니었다. 2010년 거포 FA 김태균도 영입하려 했으나 엔화에 밀려 실패했다.
하여간 이런 인터뷰가 개그 소재가 될 정도로 삼성의 머니 파워는 대단했다.
[image]
2005년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의 전화 인터뷰 장면 캡쳐. 여담이지만 이 당시 프로그램에서는 케이블 스포츠 채널 3사에서 삼성 경기의 중복 중계가 심각함을 제시했고, 스포츠 방송사들은 삼성 구단과의 계약(= 몇 경기 이상 중계하는 조건으로 돈 얼마를 받는 조건) 때문이라 주장했다. 이 장면은 그에 대한 반박[42]. 이 당시 삼성 라이온즈의 중복 중계는 심각한 수준이어서, 지금처럼 한 경기당 하나의 채널이 확보되지도 않은 환경이었고 당시 신생 채널이었던 엑스포츠는 MLB만 중계하던 상황에서 삼성 경기 중계율은 100%를 초과했고 다른 팀들이 피해를 입었다. 특히 상대적 비인기 구단인 현대, SK(당시 중계율 7, 8위)가 많이 중계되지 못했다.

2.3.2. 2000년대 중반부터, 변화의 갈림길


그러나 선동열, 류중일 감독 시절에는 정말로 외부 FA 영입에 돈을 거의 쓰지 않아서 팬들이 이제 돈성 소리 들어도 좋으니 제발 돈 좀 쓰라고 하는 지경에 다달았다. 2016년 기준으로 외부 FA를 12년째 잡지 않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13년 우승 이후엔 단장 송삼봉이 '50억이면 2군에 투자할 수 있는데 외부 FA를 왜 영입함?', '그 돈이면 특급 외국인 하나 데려오고 FA 하나 나가면 젊은 애들 1군에서 육성할 수 있음'이라는 개드립을 친 덕에[43] 팬들마저 '우리는 더 이상 돈성이 아니라 거지성이다'라고 자조할 지경.
뭐 사실 이렇게 엄살을 부려도 내부 FA는 잘 잡았었다. 장원삼을 4년 60억 원에 잡았고 박한이를 4년 28억 원에 잡았으니... 정현욱이 떠나긴 했지만, 이 경우에는 떠나기 전후의 성적으로 미뤄봤을 때 삼성이 놓쳤다기보다 오버페이하기 싫어 놔준 것에 가깝다. 반드시 잡아야 하는 집토끼는 모두 단속해냈다는 이야기. 또한 2014년 핵심 전력이였던 윤성환안지만을 각각 4년 80억, 4년 60억으로 잡고 내야 유틸리티인 조동찬을 4년 28억에 붙잡았다. 그러나 배영수권혁을 내보냈는데 권혁은 본인이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스스로 떠났으며 배영수는 정현욱 때와 같이 굳이 오버페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놔준 것이다.
사실, 프로야구단은 만년 적자 사업이기 때문에 윗선의 눈치를 봐야 하고, 편성된 예산을 넘겨서 쓰기가 어려운데 FA에다 돈을 쓰면 기존 선수들에게 돌아갈 자금이 줄어들어 연봉이 깎이거나 하기 십상이기에 삼성의 선택은 충분히 합리적이다. 내부 FA를 놓치면서 육성 드립을 쳤다면 문제가 되었겠지만 잡을 FA는 다 잡았고, 외부 영입 없이도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기에 겆성이라는 얘기는 좀 더 전력 보강을 원하는 팬들의 아쉬움이 섞인 한탄이다.[44] 류현진의 포스팅비로 지갑이 두둑했던 한화 이글스나 신생팀인 NC 다이노스는 그렇다 치고, 2013년 FA 대란 때 외부 FA를 영입한 구단은 연봉 협상이 계속해서 미뤄지고 있다는 얘기가 돌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굳이 외부 FA에 휘말리지 않고 내부 FA를 알뜰하게 잘 잡는 삼성이 진정한 승리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2015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박석민[45]을 놓치고, 2014~2015년 최고의 활약을 펼쳐준 효자 용병 야마이코 나바로도 놓치고, 단장이 '외부 FA는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더욱이 2016년 리그 최고 타자이자 팀의 간판 타자인 최형우를 KIA에게, 거기다 좌완 에이스 차우찬까지 LG에게 뺏기자 팬들 사이에서도 '거지성'이라는 용어는 이미 일반화되버린지 오래이다. 게다가 삼성 라이온즈가 삼성 계열사의 지위가 아닌 제일기획 산하로 이동한다. 사실은, 예전부터 이미 줄어들고 있었다고 한다. 2018년에는 선수단 운영비로 다시 한 번 확인됐다. 2015년 423억원이었던 선수단 운영비가 2018년 267억원까지 줄었다.기사
아버지와 달리 이재용 부회장은 프로구단이 흑자를 내지 못해 수백 억씩 지원받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인 만큼 삼성이 이전만큼의 자금 동원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 부회장이 자주 야구장을 찾는 야구광이기에 아버지에 준하는 자금 지금을 통해 삼성 라이온즈가 거대 명문 구단의 지위를 이어갈 것이라 기대했던 많은 팬들은 이윤 추구로의 급격한 전환, 익숙하지 않은 긴축 운영에 격렬한 배신감을 느끼며 프런트와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불만을 표하고 있다.
결국, 공식적으로 2016년 1월 1일부로 삼성 라이온즈제일기획 산하 계열사로 편입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후 제일기획 매각설이 돌면서 산하 스포츠단들도 같이 매각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있었지만, 제일기획의 프랑스 매각이 무산되면서 삼성 라이온즈 또한 삼성 소속 구단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최근 뉴스 기사들로 미루어 보건대 삼성 프런트에서도 SK나 넥센과 같은 광고 및 마케팅을 통한 수익 창출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2016 시즌이 끝나고는 각각 27억, 65억에 이원석과 우규민을 FA로 데려왔고[46] 2017 시즌 후 FA 대어 강민호를 80억에 사오는 등 다시 돈성의 위엄을 보여주는 듯한 행보를 걷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구단주로 있었던 이수빈 회장이 물러나고 신임 구단주 및 대표이사로 임대기 사장이 취임했다. 고무적인 점은 김동환 사장은 삼성내에서 부사장급 직급이였는데, 임대기 사장이 취임하면서 다시 삼성 라이온즈 사장의 직급이 사장급으로 올라갔다.
이후 삼성카드 대표를 지낸 원기찬 사장이[47] 2020년 구단주 겸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2021년 FA 시장의 A급 자원 중 한 명인 오재일을 50억에 사오면서 기대를 높였다. 그런데...
2021년 2월 28일 신세계 야구단의 새 구단주 예정자이자 범 삼성가의 일원인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클럽하우스 인터뷰를 통해 '''"삼성그룹 일가는 더 이상 야구에 관심이 없다"'''고 발언한 이후 삼성 팬덤에서는 분노와 허탈함을 나타내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특히 야구단 매각 의사가 있다는 남부지방 연고 명문 팀이 결국 삼성이었냐는 얘기도[48] 적지 않다. 분노한 팬덤의 의견은 대부분 "그럴 줄 알았다", "병상에서도 야구 중계 틀던 회장님[49] 죽었다고 이렇게 엿을 먹이냐" 등의 반응이 주류. 다만 평소 정용진의 SNS상 발언 중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종종 있는데다 "외가 식구들 일을 그렇게 함부로 말하겠느냐"는 의견도 있으며 "그룹에서 정말 관심이 없었다면 거물급 임원에게 구단을 직접 맡기고 FA 영입까지도 척척 해주겠느냐[50]"는 의견도 있다.

2.4. 선수 대우


원년부터 성적이 좋았기 때문에, 그만큼 레전드 급의 선수들도 많이 나왔다. 이 부분은 아래 삼성 라이온즈/역대 선수와 같이 보면 좋다.
삼성답게 선수들을 대하는 방식이 직원들과 유사하다.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높고[51] 신인 선수들에 대한 계약금과 연봉에도 후한 편이다. 매년 팀 성적이 상위권이다 보니 뛰어난 선수를 뽑기 어려워 상위 라운드 지명자의 계약금은 타 팀과 비슷하거나 적을 때도 있지만, 4라운드부터는 타 팀 지명자보다 계약금을 좀 더 주는 편이다. 2010년 선수들 최저 연봉이 2천만 원에서 2천 4백만 원으로 오르자, 신고선수들 연봉도 똑같이 2천 4백만 원으로 올렸다. 타 팀의 경우엔 신고 선수라고 그들의 연봉을 최저 연봉보다 더 적게 주는 경우가 제법 된다.
국내 구단 중 대우가 가장 좋은 곳이지만, 그 대신 필요가 없어지면 칼같이 정리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만수, 김시진, 장효조.[52] 팬들의 목소리와 참여도가 커진 2000년 이후엔 많이 좋아졌지만 옛날 삼성은 그 어떤 프랜차이즈 스타라도 필요없다고 생각되면 가차없이 내치기로 유명했다. 또한 선수협 창단 때는 김기태를 앞세워 선수단 전원을 불참시켰고, 2009년 선수 노조 창단 때에도 삼성 그룹의 무노조 원칙 때문인지 선수들을 전원 불참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LG 트윈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또한 일정 규격 이상의 FA 계약이나 연봉은 지급하지 않는다. FA 몸값이 폭증하던 시기에도 삼성은 초대형 FA 계약을 맺느니 FA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고, 그보다 조금 전 돈성 시기에도 리그에서 최고 부자 구단 중 하나였건만 연봉은 7억 이하로 억제되었다. 현재도 이대호의 25억이나 손아섭의 20억같은 연봉을 삼성에서 기대하긴 어렵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점은 한때 숙적이라 할 수 있던 해태에서 온 김응용 감독이 선수 대우를 개선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것이다.[53][54] 또한 일부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제외하고는 타 팀과 마찬가지로 은퇴한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위주로 코치로 전향시키면서도 높게 대우해 주는 경향이 강하다. 실제로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은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이면서 은퇴식까지 치른 후 현재 삼성의 감독이나 코치직을 지냈다. 류중일이 감독으로 취임한 뒤 이승엽, 임창용 등 해외로 진출했던 레전드 스타들이 돌아오기 시작하면서 삼성의 레전드 잔혹사는 일단 끝이 났다.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의 마지막 경기에서 그동안 삼성 구단과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던 이만수가 시포를 맡은 것은 삼성의 레전드 대우 개선을 상징하는 사례로 꼽힌다.
하지만 2020 시즌 종료 후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 윤성환을 논란이 터지자마자 사실확인도 하지않고 방출해 욕을 먹고있다. 심지어 이 도박 채무로 잠적했다는 기사는 '''엄연한 가짜뉴스'''였고, 윤성환이 이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삼성이 윤성환을 박대했음이 드러나자 또다시 삼성 프런트는 욕을 먹고 있다.

2.4.1. 삼성 출신 FA 이적 선수 징크스?


유난히 삼성 출신에 타팀으로 이적한 FA 선수가 먹튀로 변질되는 경우가 잦다. FA 특성 상 노쇠화의 위험이 있다지만, 첫 번째 FA인데 먹튀로 변질 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선수들의 공통점은 '''FA 협상이 가능한 시즌부터 뭔가 조짐이 있었다'''.

- 2003년에 개인 최다 홈런-타점 기록을 세우며 겉으로 보기에는 좋은 성적을 냈으나 이마양 트리오에 가려져 있을 뿐, 그해 6월에는 안타도 거의 치지 못하고 시즌 막판에는 하위타선으로 떨어지는 등 조금씩 힘이 떨어지고 있었다.
- 2004년에 잠시 숨고르고, 2005년에는 난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서정환 감독과의 갈등 때문에 벤치 신세를 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2005시즌 끝나고 LG로 가더니...
- 2012년 구위 하락으로 필승조에서 밀려났다.
- 2013 시즌 전반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활동했으나, 후반기부터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계속되는 성적 하락에 스트레스가 심했는지 위암까지 얻어 전성기 때에 단련된 근육을 모두 잃고 몸이 야위어졌다. 이후 2016년 돌아왔으나 재기에 실패하고 은퇴후 코치로 삼성에 복귀.
- 2014 시즌 후 선발 기회를 찾아서 한화로 들어갔다. 그리고 계속되는 퀵후크에 시달렸고, 그렇다고 성적도 좋은 건 아니라서 한화팬들에게서 환불 요청이 계속해서 들어왔다. 2016 시즌에는 팔꿈치 뼛조각 제거 수술을 받았고, 5월 20일 재활 등판의 최고구속은 겨우 131km/h. 그래도 다음 시즌 128이닝을 소화하며 그나마 선발진에서 제 역할을 해주었다. 타팀이었다면 5선발 수준이었겠지만, 선발진이 망가진 한화라서 팀내 최다이닝 소화 선수가 되었다. 18시즌 종료후 방출되어 두산에 들어갔고 정규시즌엔 0구 보크로 배영구등 안좋은 별명을 얻었으나 2019년 한국시리즈 4차전 행가래 투수가 되어 은퇴하며 명예롭게 은퇴했다.
하지만 이건 2015년까지의 이야기로, 2016년부터는 박석민, 차우찬, 최형우 등 삼성 출신 FA 선수들은 이적한 팀의 중핵으로 활약하고 있다. 심지어 삼성 구단은 보상선수 집어오는 안목도 시원찮아[55] FA 영입 구단이 여러모로 이득. 이는 그전까지 잡지 않은 FA들이 안 잡은 선수들인 것에 비해, 이후 떠나보낸 FA들은 정말로 못 잡은 선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세 선수조차 2018년 부진하고 만다.
-2016년 3-30-100을 달성하며 커리어하이를 찍었으나 2017년부터 부진하고 있고 고질적인 부상문제까지 겹쳐 먹튀 소리를 듣고 있다. 삼성시절에도 잔부상은 자주 안고 있었지만 STC가 있기에 빠른 회복과 재기가 가능했었다. 하지만 NC로 이적한 후에는 2016년 커리어하이를 뒤로하고 계속해서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는 부상때문에 수비도 자주 못나가고 지명타자로 출장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2020년 다시 한번 부활하는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2017년에는 매우 잘 던졌으나 2018년 홈을 제외하면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2018~2020년은 차우찬 생에 최악의 성적이다.
-2017년 전반기는 이맛현, 9월부터는 국밥. 2018년 전반기에는 100억이 아깝다는 소릴 들었으나 후반기에 성적을 끌어올려 다시 이맛현으로 돌아왔다. 2019년에는 20홈런과 100타점에 실패하는 등, 성적은 다소 떨어졌지만 중심타선의 핵으로 활약했다.하지만 2020년 좋은모습을 보여주었다.

2.5. 은퇴식


원년부터 출발하여 샛별 같은 대 스타들을 보유했지만 은퇴식을 치뤄 준 선수는 류중일, 김현욱, 김한수, 전병호, 김재걸, 양준혁, 이승엽, 권오준 등 8명뿐이다.[56] 은퇴 경기는 2010년 9월 19일 양준혁이 최초로 은퇴 경기를 가졌다. 2017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끝내는 이승엽양준혁 이후 7년 만에 삼성 소속으로 은퇴식을 치렀다. 양준혁도 걸출한 슈퍼스타였지만 이승엽야구를 모르는 사람도 누구나 아는 국민스타인 만큼 역대 은퇴식 중 가장 화려하게 치러졌다.
'''삼성 라이온즈 역대 은퇴식'''
이름
활약 기간[57]
날짜
비고
류중일
1987년 ~ 1999년
2000년 4월 5일[58]
최초의 은퇴식
김현욱
1993년 ~ 1995년, 1999년 ~ 2005년
2005년 6월 2일

김한수
1994년 ~ 2007년
2008년 3월 30일

전병호
1996년 ~ 2008년
2009년 4월 5일

김재걸
1995년 ~ 2009년
2010년 4월 10일

'''양준혁'''
1993년 ~ 1998년, 2002년 ~ 2010년
2010년 9월 19일
'''영구결번'''
'''이승엽'''
1995년 ~ 2003년, 2012년 ~ 2017년
2017년 10월 3일
'''영구결번'''
권오준
1999년 ~ 2020년
2020년 10월 30일


2.6. 우수한 선수 육성 및 재활 체계


삼성 라이온즈는 오래 전부터 타 팀에서 가장 부러워할 만한 선수 육성 체계와 재활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KBO 리그 최초의 단일구단 전용 훈련장인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와 용인에 있는 삼성 트레이닝 센터가 그것.[59] 현재는 타 구단들도 이런 체계들을 속속 도입하면서 삼성 라이온즈가 독보적이던 시절은 지났지만 말이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는 신인 육성 및 원활한 선수 수급을 위해, OB 베어스에 이어 두 번째로 2군을 창설했다. 고졸 연습생들을 영입해 2군을 만든 OB와 달리, 삼성은 코칭 스태프까지 따로 영입하며 2군 체제를 확립시켰다. 1987년에는 현재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경산 볼파크)의 모태인 경산 훈련장이 완공되었고, 1990년대에는 2군 선수들을 일본 추계 훈련이나 미국 교육 리그에 보내는 등 선수 육성에 힘써 왔다. 특히 1995년 시즌 후에는 2군 선수단 전원이 미국 교육 리그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투자로 2군 리그에서 남부 리그 5년 연속(1994~1998)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90년대 말 외환 위기2군 투자가 줄었고 결정적으로 매년 한국 시리즈 우승에 실패하면서, 성공 여부가 미지수인 신인 육성보다는 성적이 보장된 외부 선수 영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돈성'이라는 별명이 붙여질 정도로 외부 선수 영입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면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삼성이 오랜 기간 2군에 투자해 왔다는 사실은 묻혔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한국 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고, 선수 발굴과 육성 필요성을 느끼면서 다시 2군에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이후 배영섭이나 최형우 등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 우수한 활약을 펼쳐 주면서[60] 화수분 야구라 불리는 두산 베어스와 함께 우수한 선수 육성 사례로 꼽히고 있다. 이후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김해에 상동 야구장을 짓는 등 2군 육성의 필요성을 일깨워 준 사례로 꼽힌다.
201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3군을 신설하여 무한 경쟁 체제를 갖추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2012년 8월 포항 야구장의 완공 이후 향후 2군 선수단 이름 자체를 포항 삼성 라이온즈로 변경하며 모든 2군 경기를 포항에서 가질 계획을 세웠다. 이리하여 1군(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2군(포항 야구장) - 3군 및 잔류·재활군(경산 야구장)으로 이어지는 육성 체계를 구축하려고 했으나 무산되었고 그 뒤 노후화된 경산 야구장 대신 청도군에 500억 원을 들여 2군 훈련장 및 클럽하우스를 신축하고 이후에 2군을 경산시에서 청도군으로 변경할 계획이였으나 잠정 중단 되었고 청도의 2군 신축구장 부지도 처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9개 구단이 2군에 투자를 점차 늘리고 새 2군 신구장을 건설하고 있으나 유독 삼성만 1군과 함께 2군의 투자를 대폭 줄이면서 한때 가장 좋은 2군구장을 보유하던 팀에서 가장 질 낮은 구장을 보유한 팀으로 바뀌었다. 많은 팬들은 자생을 하려면 좋은 2군 구장과 2군에 많은 투자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것도 전혀 없어 답답해 하는 상황이다.

2.7. 좌타 왕국


LG 트윈스보다 훨씬 뛰어난 왼손잡이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다. 특히 '''왼손잡이 타자의 경우 독보적이다.''' 이에 삼성 팬들은 이를 좌타대두라인이라고 부르고 있다.
당장 1983년에 입단하여 삼성 초창기 최고의 교타자로 활약했던 '''장효조'''를 시작으로 1993년에 입단하여 은퇴까지 삼성팬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던 '''양준혁''', 그리고 좌완 투수로 입단했다가 타자로 전향한 뒤 현역 최고의 슬러거가 된 '''이승엽'''이 있다. 또한 입단 후부터 19년간 지금까지 꾸준히 활약하여 양준혁에 이어 동률인 KBO 역대 두번째 16년 연속 100안타를 기록하며 외야 한 자리를 지켰던 '''박한이''', 삼성 왕조시절 4번을 항상 책임졌던 '''최형우''', 한 때는 채럼버스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으나 2013, 2014, 2015 정규시즌 3연패와 한국시리즈 2연패에 혁혁한 공을 세운 채태인 등이 주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5년에 등장하여 지금도 항상 라인업에서 빠지지 않는 '''구자욱'''도 있다. 반대로 초창기에는 이만수, 김성래, 강기웅으로 이어졌던 뛰어난 오른손잡이 타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박석민아랫동네로 이적한 이후 삼성의 뛰어난 오른손 타자는 사실상 전멸한 상황이다.[61]
반대로 왼손잡이 투수의 경우는 좀 다르다. 오히려 창단 초창기에 '''이선희'''와 프로 최초 100세이브를 달성한 '''권영호''' 등 뛰어난 좌완들이 많았던 편이지만 성준 이래로 삼성은 왼손투수 갈증에 늘 시달렸다. 성준이 삼성 역대 좌완투수 중 가장 많은 승수(97승)를 올렸지만 구위보다는 제구 위주의 기교파 투수였고, 그나마 성준 이후 장원삼이 삼성으로 트레이드로 오기 전까지는 김태한, 전병호 정도가 활약한 것이 유일했다. 그나마 1990년대 삼성 투수 트리오 중에 김태한이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으며, 그나마도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마구 굴린 탓에 조로한 경향이 있으며, 롱런한 전병호도 흑마구로 대표되는 기교파 투수였다. 지금은 넥센에서 트레이드된 장원삼이 삼성의 전통인 좌완 기교파 선발투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고보면 삼성의 경우 유독 좌완 스터프형 투수보다는 좌완 기교파 투수들로 계보가 이어져 왔는데, 2017년 시점에서 좌완 스터프형 투수로는 백정현 정도다. 2010년부터 2016년까지는 차우찬도 스터프형 투수로 있었는데,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최채흥이 2020년 11승을 거두고 당초 문승원이 기록할거라 많은 사람들이 예측을 했던 토종 선발 평균자책점 1위를 기록하면서 좌투 계보를 잇게 되었다.

2.8. 아마야구 지원과 리틀야구단


대체적으로 암울했던 2000년대 대구·경북 팜[62] 에 대해 삼성 구단이 아마야구 지원에 인색했던 것이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그도 그럴 것이 김응용이 삼성 사장으로 있는 동안 모교 개성고 야구부 발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침체에 빠진 모교 지원에는 전폭적인 지원을 하는 사이 연고지의 경주고 야구부와 구미전자공고 야구부가 해체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연고지 야구부의 해체를 온전히 삼성 측의 잘못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구단의 지원 못지 않게 학교 차원에서의 야구부에 대한 지원도 중요하지만 경주고는 타 학교에 비해 학교 차원의 지원이 부족했었고[63], 구미전자공고의 경우에는 마이스터고로 전환되면서 불가피하게 야구부를 해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연고지 고교야구부 해체에 후술할 삼성기 대회 폐지나 리틀야구단 해체 등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아마야구 지원에 대해 소홀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2010년대 중반에 글로벌선진학교, 도개고, 영문고가 새로 야구부를 창단했지만 글로벌선진학교는 학교 특성상 소수 인원으로만 운영 중이며 도개고와 영문고는 새로 창단한 학교의 다수가 그렇듯 학생 수가 적은 소규모 학교라는 한계에 스카웃의 열세로 상당수의 선수를 전학생으로 채우는 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이 그 이전에도 아마야구 지원에 손을 놓고 있었던 아니고 실제로 1990년대에는 아마야구 지원을 했었다. 1992년부터 유소년 및 고교야구 활성화를 목적으로 대구·경북 지역 초중교를 대상으로 한 삼성기 대회를 열었다. 삼성기는 1993년에는 고교까지 참가하는 대회로 확장했다가 IMF 사태로 축소됐다. 그 여파로 2000년에는 대회를 열지 않았고, 2005년을 끝으로 폐지됐다가 2011년부터 초중교를 대상으로 다시 부활했다. 2014년부터는 삼성의 1차 지명 대상지로 확장된 강원 영동 지역 초중교도 참가한다. 2011년 별세한 장효조 2군 감독을 기리기 위해 2012년 대회부터 타격 1,2위 선수들에게 주는 상을 '장효조 타격상'으로 명명했다.
1990년에는 프로구단으로는 최초로 구단에서 운영하는 리틀야구단을 만들었다.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이전부터 진행해 온 어린이 여름야구교실이 큰 인기를 끌어 아예 리틀야구단을 만들어 야구에 소질이 있으나 소속 학교에 야구부가 없어 선수가 될 기회가 없는 유소년 유망주들을 조기에 발굴·육성해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보내든지, 중학교로 진학시켜 야구선수로 육성하기 위해서였다. 삼성이 리틀야구단을 만들기 전에는 대구 지역에는 리틀야구단이 없었지만 이를 계기로 대구 지역에도 하나둘 리틀야구단이 생겨났다. 당시 스카우트를 맡으며 현장에서 멀어졌던 장효조가 명예 감독으로 있었고, 이밖에도 선수 출신 구단 직원들이 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선수들의 정신적인 성장을 목표로 두고 성적에 연연하지 않아 전국 규모의 큰 대회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둔 적은 없지만 현재 나무위키에 등록된 전현직 프로선수 중 강영식, 김인태, 손형준, 용덕한, 우동균, 유선정, 이상민, 이상호, 이정호, 임현준, 정병곤, 최민구 등 12명이 삼성 리틀야구단 출신이다. 이밖에 과거 고양 원더스 소속으로 청각장애인 프로야구선수를 꿈꿨던 박병우도 삼성 리틀 출신.
이렇듯 리틀야구단을 통해 프로선수가 된 사례도 여럿 있었으나, 리틀야구단이 활성화되면서 다른 리틀야구단과의 지원에 대한 형평성을 두고 학부모들간 갈등이 조장되자 2008년을 끝으로 구단이 리틀야구단 운영을 포기했고, 2009년부터는 라이온즈 이름을 계승한 리틀야구단이 단독으로 운영하고 있다.

2.9. 외국인 투수 잔혹사


2010년대 이후 KBO 리그 10개 구단 중 가장 형편없을 정도로 외국인 투수들의 성적이 암울하다. 특히 2016~2017 시즌간 뛴 선수들은 웹스터 4승, 벨레스터 '''0승''', '''레온 0승''', 플란데 2승, 그리고 페트릭 3승, 레나도 2승으로 두 시즌동안의 모든 용병 투수들이 쌓은 승수가 겨우 11승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설명하는 선수들 외에도 톰 션, 카리대 등의 선수나, 온갖 말썽을 일으켰던 베이커갈베스[64] 있었다.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쌓은 외국인 투수도 제이미 브라운이 유일하다.
그래도 왕조시절의 밴덴헐크, 피가로는 에이스의 몫을 다해줬고, 탈보트, 고든, J.D. 마틴, 클로이드 정도도 무난한 수준이었다. 고든은 SK에서 1년 뛴 선수 재활용이어서 삼성 외국인 스카우트 능력이라고 보기는 좀 그렇다. 마틴은 넥센한테 호구 잡히긴 했지만 무난했고, 탈보트는 1시즌 뿐이었지만 잘해줬으며 한화에서도 그 실력을 입증했다. 클로이드는 나름 이닝 먹어주긴 했는데 외국인 용병이 4~5선발급 수준이었다는게 함정.
무엇보다 팀 역사적으로도 벤 라이블리 이전까지 22년 동안이나 '''3년 이상 활약해준 용병 투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1999년 외국인 용병제가 실시된 이후 약 20년 동안 특급 에이스급이 아니어도 선발 로테이션 자리를 꾸준히 지켜오며 여러 해 활약해준 외국인 투수가 삼성을 제외한 각 팀마다 한 명씩은 있어왔다. 한화 바티스타나 kt 피어밴드같이 시즌 도중에 영입되어 꾸준히 활약해준 경우도 삼성에는 단 한번도 없었다.
다음은 각 팀별 역대 한 팀에서 3년 이상 활약한 투수들이다.
[목록 보기]
  • NC
  • 두산
    • 맷 랜들(2005~2008, 총 4시즌)
    • 다니엘 리오스(2005[177]~2007, 총 3시즌)
    • 더스틴 니퍼트(2011~2017, 총 7시즌)
  • kt
    • 라이언 피어밴드(2016[178]~2018, 총 3시즌)
    • 윌리엄 쿠에바스(2019~, 최소 3시즌)
  • LG
  • 키움
    • 브랜든 나이트(2011~2014, 총 4시즌)
    • 앤디 밴 헤켄(2012~2015, 2016[179]~2017, 총 6시즌)
    • 제이크 브리검(2017[180]~2020, 총 4시즌)
  • KIA
    • 다니엘 리오스(2002~2005[181], 총 4시즌)
    • 아킬리노 로페즈(2009~2011, 총 3시즌)
    • 헥터 노에시(2016~2018, 총 3시즌)
  • 롯데
    • 라이언 사도스키(2010~2012, 총 3시즌)
    • 쉐인 유먼(2012~2014, 총 3시즌)
    • 브룩스 레일리(2015~2019, 총 5시즌)
    • 조쉬 린드블럼(2015~2016, 2017[182], 총 3시즌)
  • 삼성
  • SK
    • 크리스 세든(2013, 2015[183]~2016 총 3시즌)
    • 메릴 켈리(2015~2018, 총 4시즌)
  • 한화
    • 데니 바티스타(2011[184]~2013, 총 3시즌)

외국인 타자들의 경우엔 투수의 경우와는 달리, 찰스 스미스, 훌리오 프랑코, 매니 마르티네스, 틸슨 브리또, 야마이코 나바로, 다린 러프 등 준수하게 뽑아오는 편이다. 하지만 외국인 타자에서도 역시 다년간 활약한 선수가 다린 러프를 빼면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삼성 구단 자체가 외국인 프렌차이즈와는 거리가 멀었던 팀이었음을 증명해주는 셈.
정확하게 외국인 투수들을 잘 뽑지 못했던 것은 외국인 스카우트를 맡았던 이문한이 2008년 즈음에 그만 둔 이후 롯데 자이언츠로 가면서 외국인 선수 통역을 맡았던 이충무가 대신 외국인 스카우트를 맡게 된 후부터다. 이충무는 미국의 한 에이전트 사에서 한국과 일본 프로구단의 외국인 선수 계약 및 스카우트 업무를 맡아왔고, 추신수의 에이전트로도 일하기도 했다. 그러한 이충무의 경력 탓에 삼성이 그에게 외국인 스카우트를 맡였으나 이충무는 원래 스포츠 마케팅이 전공이라 현장과는 거리가 있어 스카우트로서 적합한 인물은 아니었다. 결국 삼성에 외국인 잔혹사만 선사한 이충무는 2013년 중반 kt 위즈로 옮겨가면서 외국인 잔혹사는 막을 내리나 싶었으나, '''전병호카리대를 데려오면서 제대로 폭망했지만''' 이후 한동안 잠잠했다.
2016년을 기점으로 왕조시대가 저물고 팀이 암흑기로 접어들면서 외국인 잔혹사는 다시 그 명맥을 이어가고야 만다. 그리고 2018년에는 드디어 조금이나마 사람 구실을 하는 용병 투수를 데려왔다. 아니, 이전 두 시즌에 비하면 완전히 환골탈태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2018년 삼성의 외국인 투수 조합인 아델만 - 보니야 조합은 역대 삼성 단일 시즌 용병 투수 이닝 소화 1위를 기록했으며, 아델만 보니야 각각 한 명의 승수가 2016년 2017년 각 해의 외국인 투수 총 승수보다 더 많다. 한마디로 '''저 조합이 삼성 최근 외국인 투수의 2년치 승수를 뽑아준 셈.''' 그만큼 삼성의 외국인 투수 성적이 처참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만큼 활약해준 외인 듀오를 포기하고 삼성은 또다시 모험을 선택하였고, 결과는 어김없이 처참했다.
삼성이 외인투수 영입을 실패하는 패턴은 매번 일정하다. 시즌이 끝나고 "외인 투수는 신중히 고른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오곤 해를 넘기도록 소식 하나 없다 결국 외인구성은 해를 넘기고 만다. 그러고 1~2월이 되어서야 겨우 저가형 용병을 데리고 오면서 "라팍에 최적화된 땅볼형 투수. 다양한 구종으로 땅볼을 유도해내는 데 능숙하다."며 언플을 한다. 하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 뚜껑을 열어보면 땅볼 유도형 투수라고 데리고 온 투수는 땅볼 유도는커녕 그냥 배팅볼형 투수나 다름없는 경우가 허다하고, 그렇게 시즌이 끝나고 그 투수를 방출하고 또다시 형편없는 투수를 데리고 오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드물게 속전속결로 데려오는 외인도 부상 등으로 제대로 뛰지 못하고 흑역사가 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타 구단에서 뛰다가 트레이드 대상에 올라 있다거나 결별 수순을 밟고 있는 검증된 선수들의 기사나 KBO 리그 진출을 희망한다는 외국리그 소속 투수들의 기사가 올라오면 여지없이 '''"삼런트 뭐하냐. 빨리 모셔와라", "니들이 그동안 데려온 걔네보다는 잘할거다"''' 등의 댓글이 올라오곤 한다.
2019년 한화한테만 극강이던 맥과이어를 방출한뒤, 대체선수로 들어온 라이블리가 준수한 활약을 펼쳐서 오랫만에 재계약에 성공한 외국인 투수가 되었다. 그리고, 위 패턴과 비슷하게 1월 초순에서야 뷰캐넌를 2선발로 영입하면서 불안감을 드러냈지만, '''뷰캐넌이 174이닝을 소화하면서 15승을 기록해 삼성 외국인 투수의 역사를 다시 썼다'''. 라이블리도 7월까지 부상으로 결장하고 복귀해서 한달간 흔들렸지만, 리그 후반기 완벽한 피칭을 보여주면서 외인 총합 21승을 기록, 드디어 외국인 투수 잔혹사 탈출의 희망을 보였다. 이에 힘입어 이 둘은 2009 시즌 프란시스코 크루세타 & 브랜든 나이트 이후 11년만에 동반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맥 윌리엄슨을 시작으로, 살라디노는 6월 한달 반짝하고 허리부상으로 시즌아웃, 팔카를 영입했지만 선풍기급 활약을 펼치며 외국인 타자 잔혹사가 시작될 위기에 놓였다.

2.10. 홈구장


  •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 (메인 홈구장, 2016 ~ )
  • 포항 야구장 (제 2구장, 2012 ~ )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65] (이전 홈구장, 1982 ~ 2015)
유일하게 제1홈구장 제2홈구장 모두 2010년대에 지은 구장을 쓰는 구단이다. 자세한 구장의 내용은 각 문서 참조.

2.11. 83 라인


[image]
2013 시즌 스프링캠프 중[66]
왼쪽부터 이우선 - 안지만 - 신용운 - 최형우[67] - 장원삼 - 권혁[68] - 조동찬 - 이동걸[69]
83 라인은 1983년 태생의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을 뜻하는 말로, 삼성 왕조의 주축이었던 세대를 뜻한다. 삼성 왕조 시절 언론에서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삼성 라이온즈의 최대 동기라인이었다. 멤버로는 대표적으로 삼성 왕조의 4번타자였던 최형우가 있다.[70] 또한 내야 유틸리티맨으로 활약했던 조동찬도 있다. 투수진에서는 삼성 왕조의 좌완 에이스이자 큰경기에서 더더욱 강했던 장원삼과 필승조의 주축이었던 안지만이 있고 좌완 불펜투수였던 권혁이 있다.
그 외에도 이우선, 신용운과 같이 불펜에서 쏠쏠하게 활약해주던 선수들이 있었다.
이들의 등장과 성장으로 인해 삼성의 왕조 다지기는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이후 최형우는 2016 시즌이 끝난뒤 FA로 기아 타이거즈로 이적하게 되고, 조동찬은 2018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하고 난 이후 코치가 되었고, 장원삼 또한 조동찬과 마찬가지로 2018 시즌이 끝난 뒤 은퇴 기로에 서있다가 부활을 위해서 자진 방출을 요청해서 방출 당한 뒤 LG에 입단하게 된다. 권혁은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고자 2014 시즌이 끝난뒤 FA를 통해 한화로 이적하였다. 이우선은 은퇴 후 야구아카데미 감독으로 활동중이다. 안지만은 알다시피...
이렇게 되면서 83 라인은 결국 2018년을 끝으로 완전 해체된다.

3. 역사



3.1. 성적


통산 승리 1위[71], 통산 승률 1위, 통산 팀 홈런 1위, 특정 팀 상대 최다 승리,[72] 통산 팀 타율 1위, 단일 시즌 팀 승률 1위(1985년 '''0.706'''), 단일 시즌 팀 타율 3, 4, 5위(2015년 '''0.302''', 2014년 '''0.301''', 1987년 '''0.300''') 등 '삼성의 기록은 삼성만이 경신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수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73]
한국시리즈에 가장 많이 가 본 팀이며[74] KIA 타이거즈와 함께 KBO의 전통적인 강호로 손꼽히는 팀이다. 다만 두 팀의 강력함은 느낌이 조금 다른데, 타이거즈는 전성기 때의 무지막지한 강함으로 프로야구를 지배하였고, 1997년 외환 위기로 잠시 주춤했다가 2009년 우승 이후 내리막길을 걷는 등 강약의 차이가 극명한 기복이 심한 이미지라면, 라이온즈는 소수의 예외 시즌을 제외하면 언제나 변함없이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는, 꾸준히 강력한 실력을 보여주는 이미지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1990년대 두 팀의 프랜차이즈 선수였던 타이거즈의 이종범과 라이온즈의 양준혁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라팍으로 홈을 옮기기 이전의 삼성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단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우승했을 때 '음, 이번 시즌 좀 잘했구나'라는 분위기[75]였고, 5위 턱걸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면 '''굴욕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만약 6위 이하로 시즌을 마치게 된다면 해당 시즌은 바로 삼성의 흑역사로 기록되기도 했다. 실제로 삼성이 5위 이하로 내려간 시즌은 본격적인 암흑기가 시작된 2016년 이전까지 34시즌 동안 팬들에게 그나마 암흑기로 불렸던 1994년, 1995년, 1996년과, 5위를 기록한 2009년으로 총 4번이 전부다. 전·후기 리그로 치러졌던 때에도 한국 시리즈 탈락은 1983년 단 한 번뿐이니 프로야구 35년 역사상 삼성의 포스트시즌 탈락은 단 6회뿐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러한 역대 팀 평균 성적을 감안한다면 2015 시즌부터 5위 팀 또한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해졌다고 해도 와일드카드전 진출 또한 삼성에 있어서는 굴욕이라고 할 만 했다.
1970년대 대구, 경북 야구가 전성기를 맞이했을 때 그 전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1980년대에는 한국시리즈 우승만 못했을 뿐 명실상부한 최강팀으로 군림했고, 1990년대 중반기에 잠시 침체기가 있었으나, 후반기부터 부활하여 다시 리그를 주름잡는 강호로 군림하고 있다. 통산 최다 준우승팀으로 2002년 첫 한국시리즈 우승 전에는 라이벌 해태 타이거즈에 비해 큰 경기에 약한 팀으로 인식된 적도 있었다. 현재도 한국시리즈 준우승 10회로 최다 준우승 팀이다.[76]
통산 우승 횟수는 1985년 전·후기 리그 시절의 통합 우승 1회 + 한국시리즈 우승 7회로 총 8회.[77] 일부[78]에서는 1985년 우승을 계산에서 빼기도 하지만, 1985년 삼성이 전·후기 모두 가장 잘해서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게 된 것이며, 사실 KBO의 인증으로 봐도 무엇으로 봐도 엄연한 우승이다.[79]
2002년 한국시리즈는 한국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회자되는데,[80] 상대는 김성근 감독이 이끄는 LG 트윈스였다. 1, 3, 4차전을 이기고 2, 5차전을 내준 상태에서 홈구장인 대구에 돌아와서 6차전을 치렀는데, 9회말까지 9-6으로 뒤지고 있었고 그대로 7차전까지 갈 가능성이 컸었다. 그러나 시리즈 내내 헛스윙만 하던 이승엽이 동점 3점 홈런을 쳐내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됐고, 다음 타자 마해영이 끝내기 홈런을 쳐서 결국 삼성은 지긋지긋한 준우승의 한을 풀고 한국시리즈를 우승하였다.
다만 이런 영광스러운 날이 있기까지에는 일부 팬들이 '콩성'이라고 부르듯 많은 곡절이 있었다. 준우승만 10회로 이 부문 1위인 비운의 팀. 2002년까지는 삼성도 콩라인에 있긴 있었다.[81] 그리고 준플레이오프에도 자주 진출했으나,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는 악몽도 여러 차례 겪었다(특히 역전패. 1999년 롯데 자이언츠에게 당한 대역전패는 아직도 명승부로 회자된다. 두산 베어스에 당한 2001년 한국시리즈도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때는 양준혁이 삼성에 없고 LG 트윈스에 있었다.). 또한 원년에 '''한국 야구를 먹여 살린 두 개의 만루 홈런'''의 주인공이 된 허무한 팀.[82]
1997년부터 2008년까지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을 세운 팀으로,[83] 삼성이 플레이 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때는 1994~1996년, 2009년과 2016~18년 단 일곱 번. 이는 1990년 플레이 오프가 도입된 이래 최소 기록이다. 사실 2000년에 드림 리그 3위로 떨어지며 연속 플레이 오프 진출 행진이 3연속에서 멈출 뻔 하다가 '드림 리그는 1부, 매직 리그는 2부' 라고 해도 믿을 만큼 성적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통에 매직 리그 2위였던 롯데 자이언츠보다도 승률이 더 높은 괴이한 현상이 발생하자 억지로 진출했다. 이 때문에 2000년 포스트 시즌에 5팀이나 진출하는 사태가 발생했다.[84]
참고로 1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은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장 기록. 2위 기록 역시 삼성의 1984~1993년의 10년(1985년 통합 우승 포함). 3위까지 와서야 KIA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의 1986~1994년의 9년의 기록이 나온다. 게다가 최근에는 삼성 라이온즈 스스로 6년 연속 진출에 성공하면서( 2010년~2015년) 다시 기록을 세우는 중이니 이제 기록 경신까지 7년 남았으나 2016년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6년으로 멈췄다.[85]
2015년 정규시즌 1위를 하여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면서 포스트시즌 관련 또 다른 기록을 세우고 있는데 바로 한국시리즈 연속진출 기록이다. 이전까지의 최다 한국시리즈 연속진출 기록은 SK 와이번스의 6연속(2007년~2012년)으로, 2015년 현재 삼성 라이온즈가 역시 6연속(2010년~2015년)으로 타이를 이루고 있다. 이전까지는 5연속 진출로 2위를 기록하고 있었으나 2015년 한국시리즈 직행으로 공동 1위에 올라섰다. 3위는 해태 타이거즈의 1986년~1989년 4연속.
2011~2015년 정규시즌 우승을 거두게 되면서 사상 처음 정규시즌 5연속 우승을 달성하였다. 정규시즌 연속 우승은 1996~1997년 해태 타이거즈, 2001~2002년 삼성 라이온즈, 2003~2004년 현대 유니콘스, 2005~2006년 삼성 라이온즈, 2007~2008년 SK 와이번스 등의 2회 연속 우승 기록이 있는데 삼성이 처음으로 5연패를 달성한 것이다. 여기에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도 넥센 히어로즈를 4승 2패로 꺾고 통산 8번째 우승을 달성하면서 해태 타이거즈가 1986년~1989년에 기록한 4연패 기록과 타이 기록을 이루게 되었다. 무엇보다 해태 타이거즈는 그 기간 정규 시즌 우승을 1회(1988년)만 달성하였으므로 정규시즌+한국시리즈 통합 우승 기록은 2013년에 삼성이 기록한 3연패가 유일했으며, 201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기록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도박 사건으로 팀 분위기가 엉망이 되면서 통합 5연패에 실패했고 FA자격을 얻었던 프랜차이즈 박석민NC 다이노스로 이적했으며 제일기획으로의 야구단이 이관, 2016년 시즌 들어와 주축선수들의 줄부상과 외국인 선수들이 모두 실패하며 구단 역사상 최악의 순위를 받으며 단 1년만에 팀이 몰락해버렸다. 또한 모그룹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리면서 이전의 짧았던 침체기와는 달리 꽤나 장기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암흑기가 도래하고 말았다.

3.1.1. 암흑기


2010년대 초중반까지 전통의 강팀 이미지가 강했던 삼성에게도 구단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현 암흑기 이외에도 부진하던 시기는 있었다. 순위로 따졌을 때 삼성의 첫 암흑기라 하면 우용득 감독의 임기 중반인 1994년부터 백인천 감독이 부임한 첫 해인 1996년까지의 순위를 가리킨다. 각각 '''1994년 5위, 1995년 5위, 1996년 6위'''를 기록하며 삼성은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였고, 이는 삼성 라이온즈의 '''최다 연속 포스트시즌 실패 기록'''이며 특히 '''1996년의 6위'''는 삼성 라이온즈 역사상 두번째로 낮은 순위다. 그러나 이승엽이 홈런왕 대열에 들어서고 공격력이 강해지면서 이후 2002년 한국시리즈, 2005년 한국시리즈,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쾌거를 이루고, 이후 2011년 한국시리즈부터 2014년 한국시리즈 까지 우승하면서 '''삼성 왕조'''를 이룩했다.
1994년부터 삼성이 3년간 556의 순위를 찍게 된 주된 원인으로는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삼성을 이끈 주전 멤버들의 노쇠화였다. 1993년 준우승 당시에도 김성래, 류중일, 이만수, 이종두 등 베터랑들 대다수가 30대를 훌쩍 넘긴 노장 축에 속했다. 삼성 입장에서는 분명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였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대구와 경북지역 아마야구의 침체로 인해 삼성에는 쓸만한 신예가 드물었다. 실제로 1991년 이후 삼성의 1차 지명선수 명단을 보면 이영재(1991년), 감병훈(1994년), 안윤호(1995년), 황성관(1997년), 정성열(1999년)등 1군에서 별다른 보탬이 되지 못한 선수가 대부분이다. 1996년부터 도입된 고졸 우선지명에도 김헌수, 김성훈, 권영철(1996년) 설재호, 황영구(1997년), 이준민(1998년), 이성훈(1999년) 등 계속되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특히 마운드에는 쓸만한 선수가 아예 없을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다. 이에 삼성은 미국으로 눈을 돌려 최용희, 최창양 등을 영입했지만 그마저도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일설에는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삼성 감독이었던 김성근 책임론이 거론된다. 김성근 감독이 첫 해 3위, 2년차 4위로, 생각만큼 대단한 성적을 내지 못하면서 경질된 이후 556을 찍게 되었기 때문에, 이를 김 감독의 투수 혹사 경향과 엮어서 언급하는 것이다. 이는 다른 사람도 아닌 김성근 본인이 스스로의 자서전에서 인정한 바 있는데, 프런트에서는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본인이 엘리트 의식에 빠진 선수들을 휘어잡지 못한 실책의 결과라고 시인했다. 다시 말해 본인의 선수단 장악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 거기에 급격하게 추진한 리빌딩과 조범현을 비롯한 자신의 제자 중용 등으로 선수들과 마찰이 심했다고 한다. 웬만해선 김성근식 감독야구를 옹호하는 김은식 작가조차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김성근의 방식이 삼성에는 맞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직전 감독이었던 정동진 감독을 1990년 한국시리즈에서 재계 라이벌인 LG를 상대로 패하면서 우승에 실패한 것을 구실로 경질해버린 프런트의 조급함이 이후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그 전년도에는 최동원-김시진 트레이드라는 병크도 있었고.
그리고 당시 창단 이래 최하위였던 6위를 찍은 1996년에는 전년도에 포스트시즌에 탈락하던 다섯 팀[86] 중 네 팀이 올랐는데 유일하게 못 오른게 바로 이 암흑기에 있던 삼성이다. 대구, 경북 팜에서 이승엽 이전까지 괜찮은 선수들이 나오지 않았던 것도 이 암흑기의 원인이다.
여담으로 이 비밀번호를 끊은 감독이 바로 롯데 팬 한정으로 금지어모 골프 전문 감독이다. 또한 베이징 올림픽의 퍼펙트 골드 감독인 김경문미국에서 지도자 연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 삼성 라이온즈의 배터리코치로 영입되어 이 때 코치 실전 수업을 받았다. 그것도 정확하게 1차 암흑기 동안.
일부는 부임 첫해에 6을 찍었다는 건 함정이라느니 비하하기도 하지만, 백인천의 잘못이라고만은 보긴 어렵다. 김성근 감독이 추진했던 리빌딩과 자신의 제자들의 주전화 등으로 팀 케미스트리가 망가지자 우용득 감독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장들을 방출하면서 세대교체가 너무 급격하게 진행되었고, 부임 첫해인 1993년에는 이 세대교체 효과가 있었으나 많은 선수들이 소포모어 징크스에 걸린 후 극복을 해내지 못하는 등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고, 하필 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만수 등 경험 있는 고참은 급격한 리빌딩 과정에서 전멸하다시피하는 바람에 삼성 팀의 분위기가 상당히 망가져있던 상황. 오히려 고작 1년만에 팀을 추스리고 유망주를 발굴한 걸 높게 평가하는 것이 맞다.
사실 성적만 놓고 보면 556 시기를 암흑기라 여길 수 있긴 하지만, 타팀 팬 입장에서는 겨우 3년 정도 가을야구를 못 가고, 그것도 꼴찌도 하지 않고 리빌딩이 차근차근 진행되며 기대를 모으던 시기를 어떻게 암흑기라 할 수 있냐고 반문할 수 있다. 물론 우승 아니면 의미가 없던 당시 삼성으로서는 충분히 암흑기였다고 말할 근거가 있겠지만. 그리고 꼴찌를 한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관중 수 신기록을 쓰는 등 흥행은 했기 때문에 당시 야구를 봤던 삼성 팬[87]들 또한 이 시기를 암흑기라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통 90년대부터 야구를 봐온 삼성팬들이 손꼽는 진짜 1차 암흑기는 556 시기가 아니라 김성근 강점기인 1991~1992년이다.
그 외 일각에서는 선동열 감독 시기인 2009년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고 2차 암흑기라고 부르는 시각도 있다. 사실 선감독 재임 시절엔 일단 우승도 두 번 했고, 마지막 해인 2010년에도 준우승을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타팀 팬들 입장에서는 '저게 암흑기라고?'라고 기막혀하는 경우가 대부분. 물론 삼성 시절 선감독의 논란 많은 행적과 연속 포스트시즌 기록 좌절, 양준혁의 급작스러운 은퇴 등 삼성 팬 입장에선 암흑의 시기라 일컬을 일이 많긴 했기 때문에, 성적과는 별개로 선감독 재임 시기가 2차 암흑기라는 의견이 삼성 팬들 사이에서는 공감을 많이 얻는 편이다. 실제로 선감독 재임기의 삼성은 우승은 두 번 했지만 관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던 추세였다.
이후 2011년 류중일 감독 선임 이후에는 '''삼성 왕조''' 시기를 거치며 승승장구했지만, 2015년 도박 사건을 기점으로 생각보다 매우 빠른 속도로 침체기에 접어드는 위기를 맞이했다. 2015년 이후 고작 1년 후인 2016년2017년에 '''2년 연속으로 9위'''를 기록하였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유례없는 가장 낮은 최종 순위였다. 특히 다른 때와는 달리 모기업 삼성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연루로 인해 구단 시스템 자체가 불안해진 상황이라 리빌딩과 인기 둘 다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낳고 있었다. 게다가 KBO 리그 심판 최규순 금전요구 사건에도 엮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당시 팬들의 신뢰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위에서 말했듯이 2016년부터 갑작스레 시작된 부진을 털어내지 못하면서, '''말 그대로 성적도 못 내고, 재미도 없는 제대로된 암흑기가 시작되어 버렸다.''' 2016년 9위, 2017년 9위를 기록하고, 2018년 시즌 막판에는 혹시나 하는 3년만의 가을야구가 이루어져 순식간에 암흑기 탈출에 성공하나 했으나, 시즌 막판부터 지난해 우승팀인 KIA 타이거즈가 치고 올라오며 5위 자리를 빼앗겼고, 결국 삼성은 2018년조차 기아에 밀려 6위라는 순위에 만족해야 했으며, 2019년, 2020년에도 8위에 그치면서 5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암흑기를 겪고 있다.


3.2. 연표


'''굵은글씨'''는 우승년도

3.2.1. 1980년대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에도 경북지역은 고교야구와 실업야구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었고, 튼튼한 경북팜을 노리던 삼성그룹이 대구에 정착해 야구단을 창단한다. 그리고 삼성은 프로야구가 생기자마자 강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큼 우승에는 복이 없었고, 야구팬들은 이걸 1984년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벌인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과 결부시켜 "져주기 게임의 저주"라고 불렀다. 게다가 1985년에는 전후기 리그를 모두 우승하면서 한국시리즈를 소멸시키는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당시 구단 프런트는 "한국시리즈 우승"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우승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흑역사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성은 이만수, 장효조, 김시진 등 수많은 스타플레이어들의 활약에 힘입어 강팀의 이미지를 정착시킬 수 있었다.

3.2.2. 1990년대


강팀으로 군림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승 복이 없는 건 90년대에도 여전했다. 패넌트레이스 우승을 달성하고도 한국시리즈에서 패퇴하는 패턴이 매년 반복되자 팬들도 인내심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김성근 감독 시기에 선수단과 감독의 불화가 최고조에 달하고, 이만수가 반강제적으로 팀을 떠나면서 팬들의 분노는 절정에 이른다. 하지만 우용득에 이어 부임한 백인천이 팀을 수습하여 리빌딩에 성공하고, 이승엽이라는 프로야구 최고의 스타가 등장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 단골팀으로 복귀하게 된다.

3.2.3. 김응용 체제 (2001~2004)


해태에서 감독을 맡았던 김응용을 감독으로 정한 뒤, 삼성은 본격적으로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김응용은 LG에 있었던 양준혁을 다시 삼성으로 데려오고, 마침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사상 첫 우승을 가져다주며 18년에 걸친 '져주기 게임의 저주'를 풀어낸다. 그리고 2004년 시즌을 끝으로 감독직을 일단 은퇴하고, 구단 사장으로 영전한다.

3.2.4. 선동열 체제 (2005~2010)


김응용의 후임으로는 선동열이 정해진다. 선동열은 두 번의 우승을 이루었지만 배영수권혁의 혹사로 인한 삼성 팬들의 반감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2009년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당시 팀 사상 최악의 성적을 남기며 2000년대를 마치게 된다. 그리고 2010년 선동열에 대한 삼성 팬들의 반감이 양준혁의 반강제적인 은퇴로 폭발하고, 2010년 시즌이 끝난 후 계약기간을 4년이나 남겨두고 경질된다.

3.2.5. 류중일 체제 (2011~2016)


'''삼성 라이온즈 최고의 전성기.'''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겨준 선동열의 후임으로 주루코치 출신의 류중일이 취임한다. 그리고 삼성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가 열린다. 리그 역사상 최강의 불펜진 JOKKA 라인과 탄탄한 타선을 바탕으로 삼성은 왕조의 칭호를 획득한다.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정규시즌 5연패, 한국시리즈 4연패의 금자탑을 쌓았다. 게다가 신축구장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가 완공됨으로써 삼성은 탄탄대로를 달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15년 삼성 라이온즈 원정 도박 사건을 기점으로 모기업의 지원이 줄었다는 사실이 표면화되기 시작하고, FA 선수들이 잇달아 팀을 빠져나가게 되면서 우승에만 집중하고 신인선수 육성에는 소홀했던 그간의 문제점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결국 2016년, '''전년도 정규시즌 우승팀이 9위로 추락'''하는 사태를 경험하게 되고, 2017년부터 감독은 김한수로 교체된다. 그래도 류중일은 여전히 KBO 구단 역사상 팬들에게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감독으로 남아있다.

3.2.6. 김한수 체제 (2017~2019)


'''삼성 라이온즈 최악의 암흑기.''' 재계약이 유력하던 류중일 감독을 제쳐두고, 급작스럽게 타격 코치 김한수를 감독으로 선임했다. 원래도 차기 감독 후보군에는 있던 인사였지만, 이렇게 빨리 감독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감독으로서의 첫 시즌인 2017 시즌을 맞게 되었는데, 최악의 4월을 보낸 후 결국에 kt wiz 다음으로 낮은 순위인 9위를 기록하며 명가의 자존심이 제대로 꺾였다. 그래도 다소의 전력 보강을 거친 후 2018 시즌에는 여름에 반등하며 5강 경쟁에 합류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KIA에 밀려 최종전을 남겨둔 시점에서 6위가 확정되면서 한 끗 차이로 포스트시즌은 실패. 999를 찍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나름대로의 성과를 남기면서 차기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2019 시즌, 러프와 재계약을 하고, 거포자원 김동엽까지 마련했으나 안타기근에 시달리며 순위싸움권에 들어가지 못하고, 계약 마지막 해까지도 팀을 재건하지 못하였다. 결국 2019 시즌에서도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삼성을 거쳐간 14명의 감독 중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유일한 감독이 되어버렸다. 최초는 이충남 감독이나 시즌 도중에 감독에 올랐었고 1983년 한시즌만 부임해서 최초로 평가하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사실상 김한수가 최초나 다름없다. 팀의 부진을 모두 감독탓으로 돌릴순 없으나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란 평가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3.2.7. 허삼영 체제 (2020~ )


시즌이 끝나기 무섭게 김한수와 재계약을 하지 않고 2019년 9월 30일, 전력분석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허삼영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다. 삼성 라이온즈 유튜브 공식채널인 라이온즈 tv # 에서는 선수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한수 감독과는 다른 휴식을 추구하는 관리형 야구, 여러 실험을 거친 이후의 적절한 라인업으로 팀의 성적과 리빌딩을 모두 책임지고 있다. 올해는 암흑기 끝이라는 평이 많다.

...라고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고 한때 4위까지 치고 올라가기도 했지만, 7월 말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8연패를 달리던 꼴찌팀 한화 이글스에게 대역전패를 당하고, 8위 롯데와 동승률이 되는 경험도 하는 등 암흑기의 끝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 10월 10일 롯데 자이언츠에게 패하며 트래직넘버가 소멸되어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를 하고야 말았다.


4. 라이벌


원년부터 존속한 팀이다 보니 웬만한 팀들과는 다 라이벌리가 어떻게든 엮여 있다. 전자업계 라이벌인 LG 트윈스부터 해서 경상도권이면서 원년부터 함께한 롯데 자이언츠와의 클래식 시리즈, 영호남 지역감정을 상징하던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와의 88고속도로 씨리즈, 포스트시즌 명승부 메이커 두산 베어스, 별도의 문서가 생겼을 정도로 치열했던 한화 이글스, 현대 유니콘스가 있던 당시 재계 1, 2위의 간의 라이벌리 등등.
하지만 16, 17시즌 암흑기동안 2년 연속 9위를 찍으면서 kt wiz라는 라이벌이 생겼다. 그것도 두시즌 10위한 kt에게 우위를 보였으면 모를까 두시즌 내내 8승 8패를 주고받으며 이제는 서글프게도 둘이 라이벌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18년에는 블루윙즈 더비가[88] 6위와 9위로 멀어졌으나 상대전적은 7승 2무 7패로 동률이다. 최근 4년간 두팀 모두 가을야구를 못갔으며, 특히 kt는 창단 이후 즉, 그전부터 가을야구를 못갔다. 여러모로 웃픈 더비. 2020년에는 kt가 가을야구가 유력해지고 삼성이 kt에 완전히 호구잡히며 통산 전적에서 승패수가 비슷해졌다.

4.1. 88고속도로 씨리즈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
'''KIA 타이거즈'''
'''''KIA TIGERS''' ''


4.2. 싸대기 매치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
'''두산 베어스'''
'''''Doosan Bears''' ''


4.3. 클래식 시리즈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롯데 자이언츠'''
''Lotte Giants''


4.4. 재계 라이벌 시리즈


[image]
[image]
'''삼성 라이온즈'''
''Samsung Lions''
'''현대 유니콘스'''
''Hyundai Unicorns''


5. 관련 기록들



5.1. 역대 구단주



이름
재임 기간
기타
1
이건희
1982~2001
삼성그룹 회장
대행
김정순
1995
당시 제일제당 사장
대행
안덕기
1996~1997
당시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삼성 라이온즈 4대 사장
대행
이종기
1998~1999
당시 삼성화재 부회장
대행
이대원
2000
당시 삼성항공 부회장
대행
현명관
2001
당시 삼성물산 회장
2
2002
3
이수빈
2003~2017
삼성생명 회장, 삼성 라이온즈 초대 사장
4
임대기
2017~2020
제일기획 사장, 삼성 라이온즈 사장 겸직
5
원기찬
2020~현재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 삼성라이온즈 대표이사(사장) 겸직

5.2. 역대 사장(대표이사)


1985년까지는 단장이었다.

이름
재임 기간
기타
1
이수빈
1982~1983년 4월 26일
당시 제일제당 사장
2
이종기
1983년 4월 27일~1988
당시 중앙일보 사장
3
편송언
1989~1990
제일기획 대표이사 전무
4
안덕기
1991
前 삼성의료기기 사장
5
김흥민
1992~1994
삼성물산 전무
6
이광진
1995~1996
삼성중공업 총괄전무
7
전수신[89]
1997~1999
前 삼성물산 건설부문 부사장
8
한행수
2000~2000년 7월 9일
前 삼성중공업 대표이사 부사장, 일신상 이유로 사임
9
신필렬
2000년 7월 10일~2004
삼성서울병원 행정부원장[90]
10
김응용
2005~2010
감독에서 승진, 최초 야구인 출신 야구단 사장
11
김인
2011~2015
삼성SDS 사장
12
김동환
2016~2017
삼성웰스토리 대표이사 부사장
13
임대기
2018~2020
제일기획 대표이사[91]
14
원기찬
2020~현재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

5.3. 역대 단장


1983년까지는 이사와 부단장이 혼용됐고, 1985년까지는 부단장이었다.

이름
재임 기간
기타
1
김동영
1982
동방생명 관리이사
2
김삼용[92]
1983~1983년 4월 27일
실업야구 선수 출신[93]
3
노진호
1983년 4월 27일~1983년 11월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겸 체육부장[94]
4
이달종
1984~1985
前 중앙일보 사업국장
5
윤경헌
1986~1989
前 중앙일보 문화센터국장
6
조복래
1990~1992
사무국장에서 승진
7
지용하
1993~1994
중앙개발 이사
8
김대훤[95]
1995~1996
삼성물산 해외업무실 팀장
9
김종만[96]
1997~1999
스카우트팀장에서 승진
10
김재하
2000~2010
제일모직 이사
11
송삼봉
2011~2014년 8월 16일
부단장[97]에서 승진, 건강상 이유로 사임
12
안현호
2014년 8월 16일~2016
삼성스포츠 부장, 최초 사원 출신 단장[98]
13
홍준학
2017~현재
구단지원팀장에서 승진

5.4. 역대 감독



이름
재임 기간
성적(승률)
1
서영무
1982~1983
69승 40패 1무 (63.3)
2
이충남[99]
1983
31승 36패 3무(46.2)
3
김영덕
1984~1986
202승 114패 2무(64.3)
4
박영길
1987~1988
120승 94패 2무(56.0)
5
정동진
1989~1990
123승 110패 7무(52.7)
6
김성근
1991~1992
137승 112패 3무(55.0)
7
우용득
1993~1995
193승 172패 13무(52.8)
8
백인천
1996~1997
120승 120패 10무[100](50)
9
서정환
1998~1999
139승 115패 4무(54.7)
10
김용희
2000
69승 59패 5무[101](52.4)
11
김응용
2001~2004
312승 204패 16무(60.4)
12
선동열
2005~2010
454승 380패 13무(54.4)
13
류중일
2011~2016
465승 333패 12무(58.3)
14
김한수
2017~2019
183승 239패 10무(43.4)
15
허삼영
2020~

유명한 백인천 감독이 개념 있게 감독직에 충실했던 팀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백골퍼 소리는 들었고, 강기웅, 김성래, 이종두 등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타 팀으로 보낸 문제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승엽을 발견한 것'''[102]김태균, 김한수, 신동주, 정경배, 최익성으로 타선의 세대 교체를 한 것만으로도 그가 삼성에서 한 일은 대단하다.[103] 또한 백인천 감독 체제에서 주축 선수는 아니었지만 도중에 트레이드되어 꾸준히 백업 멤버의 선두로 활약했던 김종훈도 있었다.
이 멤버를 데리고 1997년 5월 초, 대구에서 정경배의 역사적인 연타석 만루 홈런을 포함해서 3일 동안 LG 트윈스를 상대로 17홈런을 때리며 49점을 내며 발라버리자 뜬금없이 제 3자인 김성근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이 KBO에 공식적으로 조사의뢰를 넣는 바람에 이른바 '''부정 배트 의심 사건'''을 겪기도 했다. 이때부터 2003년까지 삼성 타선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엽도 이 시즌부터 홈런왕의 기질을 보인다.
다만 백인천 본인이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괜찮은 포수 육성에는 실패했다는 것이 옥의 티.[104] 뇌출혈로 쓰러진 적도 있고 전병호의 뺨을 때린 사건도 있어 재계약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타자들을 키운 공 때문에 나중에 삼성의 타격 인스트럭터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롯데에 가서는...
선동열 감독 체제에서, 숙원이던 한국시리즈 우승을 2회(2005, 2006)나 해내 '공공의 적'으로 불렸다. 단 공공의 적임에도 불구하고 욕 먹은 것은 주로 야구 외적인 일이었고[105] 더티 플레이나 빈 볼 시비와 같은 야구 내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깨끗했다는 평이다.
하지만 선동열 감독 특유의 무리한 계투진 운용과 타선의 리빌딩 지연, 선수들의 줄 부상으로 2008 시즌에서는 어려움을 겪었다. 더군다나 원년부터 이어져 온 골수 삼성 팬들은 전통적인 강타자 중심의 팀 컬러에 대한 향수와 함께 삼성 프랜차이즈 강타자이자 당시 SK 와이번스 수석 코치로 있던 이만수에 대한 애정이 강했다.[106]
선동열의 임기 6년 동안 삼성 팬덤의 단결력은 올드 팬 vs 2천년대부터 유입된 신규 팬, 연고지 팬 vs 타 지역 팬, 프랜차이즈 팬 vs 감독 팬 등의 대립으로 박살나다시피 했다. MLB 파크, 디씨 삼갤, 구단 공홈은 특정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다시피 하고 다른 의견은 키배 끝에 잠수타고 있는 것이 현실. 그리고 서로 다른 커뮤니티를 까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선동열을 옹호하는 팬들은 기아 팬으로 의심 받는 현상 있었다. 특히 팀이 아무리 잘해도 안나타 나다가, 선동열 감독만 비난받으면 갑자기 삼성 팬임을 주장하면서 글을 적는 사람들이 많았으니, 이유없는 의심도 아니였다. 선동열 감독이 물러난 이후 실제로 기아를 응원하는 팬들도 다수 있어서 완전히 틀린 추측도 아니었다고.
2009년 5위로 마감하면서 12년간 이어오던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행진이 중단되면서 못해도 가을야구는 가던 삼성팬들에게 충격을 안겨줬고 2010 시즌 더 경기를 소화할 수 있는 양준혁을 사실상 강제 은퇴시키면서 일부 팬들의 반감을 샀다. 추가적으로 일본에서 부진하던 이승엽이 삼성 복귀를 얘기했을 때 "이승엽 와도 자리 없다"며 이를 거부함으로써[107] 삼성의 레전드들을 부정한 선 감독에 대한 인식은 매우 악화되었고, 그해 한국시리즈에서 SK를 상대로 4전 전패로 참담하게 패배하면서 선동열에 우호적이었던 많은 삼성 팬들은 급격하게 선 감독의 안티 팬으로 돌아섰다. 게다가 2011년 류중일 신임 감독이 선동열과 전혀 다른 투수 운용으로 놀라운 성적을 내는 바람에[108] 선수를 다루는 방식에서 더욱 대비되었고, 부임 후 정규시즌 5연패, 한국시리즈 4연패라는 성적을 내며 삼성 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또한 류중일 감독의 도움으로 이승엽은 8년만에 고향 팀 삼성에 복귀하여 팀의 기둥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기에 선동열 감독의 "와도 자리 없다" 라는 말을 무색하게 했다. 거기다 2014년에 선동열과 마찰을 일으켰던 임창용이 삼성에 다시 복귀하여 마무리를 맡아 불펜의 중심 축 역할을 하고 팀 통합 4연패의 주역이 되었다. 이에 따라 현재 많은 삼성 팬들에게 선동열은 금지어가 되어 버렸다.
한때 기아 팬들은 선동열이 삼성을 두 번이나 우승시켜 줬는데도 싫어한다고 삼성 팬을 깠다. 그러나 기아 팬들 역시 처음에는 해태 프랜차이즈 선수출신 선동열 감독 부임을 열렬히 환영했지만[109] 우승은 커녕 몇년간 성적이 바닥을 보이자 이제는 기아 팬들도 대부분 선동열을 깐다. 그리고 하위권을 맴돌던 기아 타이거즈 성적으로 인해 선동열이 삼성을 우승시킨 게 아니라 삼성이 선동열에게 우승을 안겨 주었다는 것이 이제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5.5. 역대 팀 성적



우승

준우승

포스트시즌 진출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삼성 라이온즈 역대 성적'''
'''연도 '''
'''정규시즌 순위 '''
'''포스트시즌 '''
'''최종 순위 '''
'''경기 '''
''''''
''''''
''''''
'''승률 '''
'''삼성 라이온즈'''
1982
전기 2위 / 6팀
후기 1위 / 6팀
KS 1-4(1무) 준우승(OB)
준우승
80
54
0
26
0.675
1983
전기 5위 / 6팀
후기 2위 / 6팀
진출 실패
4위
100
46
4
50
0.479
1984
전기 1위 / 6팀
후기 5위 / 6팀
KS 3-4 준우승(롯데)
준우승
100
55
0
45
0.550
1985
전기 '''1위''' / 6팀
후기 '''1위''' / 6팀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110]
'''우승'''
110
77
1
32
'''0.706'''
1986
전기 1위 / 7팀
후기 4위 / 7팀
KS 1-4 준우승(해태)
준우승
108
70
1
37
0.654
1987
전기 '''1위''' / 7팀
후기 '''1위''' / 7팀[111]
KS 0-4 준우승(해태)
준우승
108
64
0
44
0.593
1988
전기 5위 / 7팀
후기 2위 / 7팀
PO 0-3 탈락(빙그레)
3위
108
56
2
50
0.528
1989
4위 / 7팀
준PO 1-2 탈락(태평양)
4위
120
57
5
58
0.496
1990
4위 / 7팀
KS 0-4 준우승(LG)
준우승
120
66
2
52
0.558
1991
3위 / 8팀
PO 1-3 탈락(빙그레)
3위
126
70
1
55
0.560
1992
4위 / 8팀
준PO 2-3 탈락(롯데)
4위
126
67
2
57
0.540
1993
2위 / 8팀
KS 2-4(1무) 준우승(해태)
준우승
126
73
5
48
0.599
1994
5위 / 8팀
진출 실패
5위
126
60
2
64
0.484
'''삼성 라이온즈'''
1995
5위 / 8팀
진출 실패
5위
126
60
6
60
0.500
1996
6위 / 8팀
진출 실패
6위
126
54
5
67
0.448
1997
4위 / 8팀
PO 2-3 탈락(LG)
4위
126
66
7
53
0.552
1998
2위 / 8팀
PO 2-3 탈락(LG)
3위
126
66
2
58
0.532
1999
매직 1위 / 4팀
PO 3-4 탈락(롯데)
4위
132
73
2
57
0.562
2000
드림 3위 / 4팀
PO 0-4 탈락(현대)
3위
133
69
5
59
0.539
2001
'''1위''' / 8팀
KS 2-4 준우승(두산)
준우승
133
81
0
52
0.609
2002
'''1위''' / 8팀
'''KS 4-2 우승(LG)'''
'''우승'''
133
82
4
47
0.636
2003
3위 / 8팀
준PO 0-2 탈락(SK)
4위
133
76
4
53
0.589
2004
2위 / 8팀
KS 2-4(3무) 준우승(현대)
준우승
133
73
8
52
0.584
2005
'''1위''' / 8팀
'''KS 4-0 우승(두산)'''
'''우승'''
126
74
4
48
0.607
2006
'''1위''' / 8팀
'''KS 4-1(1무) 우승(한화)'''
'''우승'''
126
73
3
50
0.593
2007
4위 / 8팀
준PO 1-2 탈락(한화)
4위
126
62
4
60
0.508
2008
4위 / 8팀
PO 2-4 탈락(두산)
4위
126
65
0
61
0.516
2009
5위 / 8팀
진출 실패
5위
133
64
0
69
0.481
2010
2위 / 8팀
KS 0-4 준우승(SK)
준우승
133
79
2
52
0.594
2011
'''1위''' / 8팀
'''KS 4-1 우승(SK)'''
'''우승'''
133
79
4
50
0.612
2012
'''1위''' / 8팀
'''KS 4-2 우승(SK)'''
'''우승'''
133
80
2
51
0.611
2013
'''1위''' / 9팀
'''KS 4-3 우승(두산)'''
'''우승'''
128
75
2
51
0.595
2014
'''1위''' / 9팀
'''KS 4-2 우승(넥센)'''
'''우승'''
128
78
3
47
0.624
2015
'''1위''' / 10팀
KS 1-4 준우승(두산)
준우승
144
88
0
56
0.611
2016
9위 / 10팀
진출 실패
9위
144
65
1
78
0.455
2017
9위 / 10팀
진출 실패
9위
144
55
5
84
0.396
2018
6위 / 10팀
진출 실패
6위
144
68
4
72
0.486
2019
8위 / 10팀
진출 실패
8위
144
60
1
83
0.420
2020
8위 / 10팀
진출 실패
8위
144
64
5
75
0.460
''' KBO 통산 39시즌'''
'''V8'''
'''4915'''
'''2644'''
'''108'''
'''2163'''
'''0.550'''
  • 원년 구단임에도 불구하고 KBO리그 10개 구단 중 유일하게 정규시즌 최하위 기록이 없다. 본격적으로 망조를 띄기 시작한 2016년 이후마저도 최하위 기록은 하나도 없다.[112] 삼성이 정규시즌에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 유일하게 4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통합우승을 이룬 구단이다. KIA 타이거즈가 해태 시절 4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적은 있지만, 이 중에 2번은 업셋 우승이였던 걸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


5.6. 역대 개인 성적


개인 커리어 전체가 아닌, 삼성 소속이었을 때만의 성적.

5.6.1. 통산


볼드체로 표시된 건 KBO 통산 1위.
'''삼성 라이온즈 역대 투수'''
'''부문'''
'''이름'''
'''기록'''
'''삼성 소속 시즌'''
등판경기
안지만
593경기
2002~2016
권오준
1999~2020
선발 등판
윤성환
305경기
2004~2020
완투
김시진
61경기
1983~1988
완봉
김시진
14경기
1983~1988
평균자책점
김시진
2.73
1983~1988
승리
윤성환
135승
2004~2020
패전
윤성환
106패
2004~2020
세이브
오승환
'''295세이브'''
2005~2013
2019~현재
홀드
안지만
'''177홀드'''
2002~2016
이닝
윤성환
1915이닝
2004~2020
피안타
윤성환
2042개
2004~2020
피홈런
윤성환
212개
2004~2020
탈삼진
윤성환
1357개
2004~2020
사사구
배영수
730개
2000~2014
볼넷
배영수
630개
2000~2014
몸에 맞는 공
임창용
108개
1999~2007
2014~2015
'''삼성 라이온즈 역대 타자'''
'''부문'''
'''이름'''
'''기록'''
'''소속 시즌'''
출장경기
박한이
2127경기
2001~2019
타율
구자욱
.317
2012~현재
출루율
양준혁
.419
1993~1998
2002~2010
장타율
이승엽
.572
1995~2003
2012~2017
타석
박한이
8712타석
2001~2019
타수
박한이
7392타수
2001~2019
안타
박한이
2174개
2001~2019
2루타
이승엽
'''464개'''
1995~2003
2012~2017
3루타
박해민
53개
2012~현재
홈런
이승엽
'''467개'''
1995~2003
2012~2017
타점
이승엽
'''1498타점'''
1995~2003
2012~2017
득점
이승엽
'''1355득점'''
1995~2003
2012~2017
도루
박해민
282개
2012~현재
사사구
양준혁
1134개
1993~1998
2002~2010
볼넷
양준혁
1043개
1993~1998
2002~2010
몸에 맞는 공
김한수
148개
1994~2007
삼진
이승엽
1344개
1995~2003
2012~2017
병살타
박한이
156개
2001~2019

5.6.2. 단일 시즌


볼드체로 표시된 건 KBO 단일시즌 1위 기록.
'''삼성 라이온즈 투수'''
'''부문'''
'''이름'''
'''기록'''
'''시즌'''
등판경기
임창용
71경기
1999
임현준
2019
선발 등판
김진웅
31경기
1999
팀 아델만
2018
완투
김시진
17경기
1983
완봉
김시진
5경기
1983
평균자책점
김시진
2.00
1985
승리
김시진
25승
1985
김일융
패전
이선희
13패
1983
김진웅
1999
세이브
오승환
'''47세이브'''
2006
2011
홀드
안지만
37홀드
2015
이닝
김시진
269⅔이닝
1985
피안타
김성길
219개
1989
피홈런
장원삼
29개
2015
탈삼진
김시진
201개
1985
사사구
김시진
136개
1985
볼넷
김시진
121개
1985
몸에 맞는 공
임창용
24개
2002
'''삼성 라이온즈 타자'''
'''부문'''
'''이름'''
'''기록'''
'''시즌'''
타율
장효조
0.387
1987
타석
박해민
649타석
2018
타수
박해민
576타수
2018
안타
최형우
195개
2016
2루타
최형우
46개
2016
3루타
구자욱
13개
2016
홈런
이승엽
'''56개'''
2003
타점
이승엽
144타점
2003
최형우
2016
득점
이승엽
128득점
1999
도루
박해민
60개
2015
사사구
이승엽
124개
1999
볼넷
이승엽
112개
1999
몸에 맞는 공
박석민
27개
2012
삼진
구자욱
138개
2017
병살타
김한수
23개
2004
출루율
장효조
0.475
1983
장타율
이승엽
0.733
1999

5.7. 포스트시즌 상대 전적


두산 베어스
1982 KS: 1승 1무 4패
1986 PO: 3승 2패
2001 KS: 2승 4패
2004 PO: 3승 1패
2005 KS: 4승
2008 PO: 2승 4패
2010 PO: 3승 2패
2013 KS: 4승 3패
2015 KS: 1승 4패
'''PO 3승 1패, KS 2승 3패'''
개별 경기 총 전적: 23승 1무 24패
롯데 자이언츠
1984 KS: 3승 4패
1991 준PO: 2승 1무 1패
1992 준PO: 2패
1999 PO: 3승 4패
2000 준PO: 2승 1패
2008 준PO: 3승
'''준PO 3승 1패, PO 1패, KS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13승 1무 12패
KIA 타이거즈
1986 KS: 1승 4패
1987 KS: 4패
1990 PO: 3승
1993 KS: 2승 1무 4패
'''PO 1승, KS 3패'''
개별 경기 총 전적: 6승 1무 12패
한화 이글스
1988 PO: 3패
1990 준PO: 2승
1991 PO: 1승 3패
2006 KS: 4승 1무 1패
2007 준PO: 1승 2패
'''준PO 1승 1패, PO 2패,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8승 1무 9패
현대 유니콘스
1989 준PO: 1승 2패
2000 PO: 4패
2004 KS: 2승 3무 4패
'''준PO 1패, PO 1패, KS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3승 3무 10패
LG 트윈스
1990 KS: 4패
1993 PO: 3승 2패
1997 PO: 2승 3패
1998 PO: 1승 3패
2002 KS: 4승 2패
'''PO 1승 2패, KS 1승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10승 14패
쌍방울 레이더스
1997 준PO: 2승 1패
'''준PO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2승 1패
SK 와이번스
2003 준PO: 2패
2010 KS: 4패
2011 KS: 4승 1패
2012 KS: 4승 2패
'''준PO 1패, KS 2승 1패'''
개별 경기 총 전적: 8승 9패
키움 히어로즈
2014 KS: 4승 2패
'''KS 1승'''
개별 경기 총 전적: 4승 2패
  • 정규시즌에 강했던 삼성 라이온즈인 만큼 통산 포스트시즌 진출 횟수 또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 삼성 라이온즈는 그 동안 KBO 리그에 존재했었고, 또 현재까지 존속 중인 모든 구단과의 포스트시즌 대결 기록 작성이 가능한 유일한 구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타 구단은 지금은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포스트시즌 대결 전적이 없기 때문이다.[113][114]

5.8. 역대 주장




5.9. 유니폼




5.10. 역대 선수 명단




5.11. 역대 개막전 선발투수





1991
김성길
對롯데
2001
임창용
對한화
2011
차우찬
對KIA
1982
황규봉
對MBC
1992
김상엽
對롯데
2002
임창용
對LG
2012
차우찬
對LG
1983
이선희
對해태
1993
김상엽
對쌍방울
2003
엘비라
對두산
2013
배영수
對두산
1984
김시진
對삼미
1994
김태한
對롯데
2004
호지스
對롯데
2014
윤성환
對KIA
1985
김일융
對해태
1995
김태한
對LG
2005
배영수
對롯데
2015
피가로
對SK
1986
김시진
對청보
1996
김태한
對OB
2006
배영수
對롯데
2016
차우찬
對두산
1987
김훈기
對해태
1997
전병호
對현대
2007
브라운
對두산
2017
페트릭
對KIA
1988
전용권
對해태
1998
조계현
對롯데
2008
배영수
對KIA
2018
윤성환
對두산
1989
진동한
對롯데
1999
김상진
對한화
2009
윤성환
對LG
2019
맥과이어
對NC
1990
김상엽
對태평양
2000
노장진
對SK
2010
윤성환
對LG
2020
백정현
對NC

5.12. 레전드


※ 구분선 위쪽은 공식홈페이지 헌액, 아래쪽은 이외에 레전드로 불리는 선수



5.13. 영구결번


한화 이글스와 함께 KBO 리그 소속구단 중 가장 많은 3개의 번호가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image]
10번은 장효조양준혁이 달았지만, 양준혁의 번호로 처리되었다. 장효조가 선수협 파동에 연루되어 롯데로 이적해 삼성 소속으로서의 성적이 다소 모자라며, 통산 기록에서도 타율출루율을 제외하면 양준혁장효조를 월등히 앞서기 때문. 타율장효조가 1푼 5리 앞서고 출루율도 1푼 앞선다. 하지만 양준혁 본인은 10번은 장효조 선배의 번호라고 생각한다고 밝혔고, 그에 따라 팬들 또한 비록 공식적으로는 양준혁의 번호라도 심리적으로는 공동 영구결번이라고 인정하는 편이다. 구단 역시 10번이 영원한 양준혁 번호가 된 뒤라도 등번호 10번 장효조 포토볼을 내놓는 등 10번과 장효조를 끊지 않았다.
22번은 삼성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선수였던 포수 이만수의 번호이며 2003년에 지정되었다. 다만 은퇴식은 치르지 않았다. 구단과 모양새가 좋지 않게 헤어졌기 때문.
이승엽의 36번은 2004년 일본 진출이 확정됨과 동시에 임시결번이 발표되었으며, 2012년부터 이승엽이 국내로 복귀하면서 다시 사용하였고 2017년 10월 3일 은퇴경기를 끝으로 은퇴식과 함께 영구결번이 되었다.

6. 팬



6.1. 숫자


원년 멤버가 전원 국가대표 출신인 전통적인 강팀이며, 주로 타격 중점적인 이미지의 팀이었기에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에는 해태와 더불어 전국구 인기 구단이었다.#[115][116] 당시 삼성의 홈구장이 그 열악한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임에도 불구하고 총 관중수가 60만 명을 넘어선 적이 있을 정도.[117] 프로야구 인기가 절정이었던 2012년에도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을 정도인데, 이는 90년대 13,000석이었던 시민야구장 관중석이 고급화로 인해 10,000석으로 줄어들었기 때문.[118]관련기사. 하지만 IMF가 터지고 축구의 인기가 급등하면서 프로야구의 인기가 전반적으로 떨어진 데다 2003년에는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국민 타자인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나가면서 침체기를 겪게 된다. 이승엽이 떠나자 관중 수가 거의 반토막이 날 정도였다. 그 후에 프로야구의 인기가 다시 부흥했지만 선동열식 불펜 야구에 대한 재미의 반감과,[119] 대구의 청년층 대거 유출 등으로 인해 두산 베어스롯데 자이언츠 등 타 구단들에 비해 팬 숫자 증가가 상당히 더디었다. 그러나 2011년 프랜차이즈 스타인 류중일 감독이 취임하고 불펜 야구뿐 아니라 과거의 공격력 회복을 선언했으며 또 좋은 성적을 냄에 따라 과거 라이온즈 팬들을 되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2012년에는 국민 타자 이승엽이 복귀함에 따라 과거 인기를 점차 회복하였다. 2016년 현재는 각종 설문조사나 시청률 등을 종합할 때 KBO 리그 인기 팀 중 하나이다. 3년 연속 갤럽 조사 최고 인기팀
팬층은 대구광역시와 제2연고지인 포항시를 기준으로 경상북도로 보면 인근의 경산시와 김천시 및 구미시가 있다. 이로인해 사실 대구와 경산, 그리고 포항은 기존 삼성 라이온즈 팬덤의 중심이다. 모기업의 본사로 인해 경기도 수원시도 팬층이 있지만, kt wiz 창단 이후에는 비율이 반반 정도로 감소했으며 형제 농구단인 서울 삼성 썬더스를 보면 전 연고가 삼성전자 본사로 인해 수원이었지만 서울로 연고이전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KBL 대표명가지만 비인기로 비판받고 있다. 반대로, 삼성전자 본사가 있는 수원의 축구수도 클럽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는 창단 시절부터 챔피언 등극과 함께 AFC 인기클럽까지 도약했으나 최근 성적부진으로 인해 같이 몰락한 KBL의 농구명가라는 서울 삼성 썬더스와 동급이다. 추가로 삼성화재 블루팡스 배구와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 여배구도 있지만 많은 편은 아니다. 이걸 보면 삼성 라이온즈 팬들은 경북의 대구와 포항 그리고 수도의 수원과 서울은 확실하지만 예전같지 않은게 현실이다.
삼성의 팬 숫자를 어림할 때 참고하는 자료로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팬 선호도 조사가 많이 거론된다. 조사 결과. 물론 통계를 맹신해서는 안 되지만 KBO 리그 인기 팀이라는 자료로 많이 쓰인다.80년대 한국프로야구 인기도 조사90년대 한국프로야구 인기도 조사
2001년까지는 한국 시리즈 우승 경험이 없어서 팬이나 구단이나 우승 강박증에 시달리고 선수들은 새가슴 성향을 보였으나, 2000년대에 우승을 여러 번 하면서 이런 점은 고쳤다. 하지만 2000년대는 김응용, 선동열로 대표되는 해태 출신 감독들의 영향으로 골수팬들이 떨어져 나가 인기가 떨어졌던 시기이기도 하다.[120] 1990년대에는 1995년에 홈 경기 총 관중수 '''62만3970명'''으로 최고점을 찍는 등 내내 50만명 선을 유지했으나 2000년부터 줄기 시작하더니 김응용 감독 취임 이후 2002년에 24만7698명을 기록했고 2004년에는 '''19만5872명'''으로 최저점을 찍었다. 2002년 월드컵 여파와 이를 잇는 한국 최초의 시민 프로구단인 대구 FC에 관심이 더 집중된 것도 이 상황에 한 몫 했다. 이후 내내 30만명 선을 유지하다 선동열 감독 마지막 해인 2010년에 45만5246명으로 40만명 선을 회복했고 류중일 감독 취임 이후에는 45만1483명의 2013년을 제외하고 50만명 선을 유지하는 등 인기를 회복했다. 출처
과거에는 나이 많은 팬들이 많아, 인터넷 상에서는 다른 팬덤에 밀리는 편이였으나, 2011년 부터 삼성 왕조가 시작되면서, 젊은 팬들의 유입도 많아져[121], 2012년 이후 가장 높은 좌석 점유율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대구 시민 운동장이다. 하지만, 구장 자체가 너무 작아서 많은 누적 홈 관중 수를 기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대구 구장의 상태는 최악이다 보니 그 때문에 관람을 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설문에서 40%를 넘었을 정도다. # 또한 신규 구장이 건설될 경우 관람을 가겠다는 의견 또한 예측 수요는 거의 현재의 2배 수준. # 결정적으로 삼성의 관중동원 미진이 구장 때문이라는 것을 증명하듯히 2016년 라이온즈 파크가 새로 지어지면서 관중동원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모습이다.[122] 2016년 시즌 초반, 삼성은 잠실을 홈으로 사용하는 두 구장 바로 다음가는 관중동원을 기록했다. 2016년 5월 19일 기준으로 추월하였다. 그리고 시즌 중후반 팀의 부진으로 관중 동원력이 크게 떨어졌으나 처음으로 80만명을 넘기며 총 85만 1천여명의 관중을 불러모으며 구단에서 예측했던 목표치를 달성했다.

6.2. 팬덤 성향


삼성 팬층은 2016년 라팍 이전을 기점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두 팬층간 성향이 전혀 다르다는 게 특징이다.
왕조시절 혹은 훨씬 이전부터 삼성을 응원했던 팬들은 '명문 구단 팬'이라는 자부심이 은근히 강했다. 이게 절정을 찍은 게 전성기때 나왔던 "삼팬이지만 인정한다". 심지어 팬들이 직접 '''"우리는 가을야구 같은 건 직관 안 간다"'''라는 패기를 시전하는 등 매번 가을야구 가는 게 목표인 타 구단 팬들의 염장을 지르는 경우도 있었다. 좋은 성적을 가져다준 구단 프런트와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심지어는 선수협 문제라든가 9, 10구단 문제 등에서도 구단을 옹호하는 팬들이 많았다.
또한 같은 영남 구단 아니랄까봐 이따금 롯데 팬 이상의 성깔과 대범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대구아재 문서 참조. 물론 그 시절 전반적인 관중문화가 저런 성향이었던 것도 있지만 저런 단어가 나올 정도면 그 중에서도 만만치 않았던 걸 알 수 있다. 그나마 2000년대엔 한국시리즈 우승도 경험해서 그런지 많이 누그러진 편인데 예전, 특히 전통적으로 콩을 많이 찍은 구단의 특성상 유독 포스트 시즌만 되면 경기마다 팬들이 민감해지고 평소엔 조용하고 사람좋은 이웃이 가을이 되니까 전투민족으로 변해 버리는 경우가 타 지역에 비해 자주 일어나는 편이었다.
이런 올드 팬들은 대부분 아저씨팬들과 남성팬들이다.[123] 그래서인지 선수들의 팬서비스가 다른곳 같았으면 논란이 일어나고도 남았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사인을 해주기보다는 경기를 이겨라"라는 성향이 짙기에 별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라팍이전하고 성적이 하락하자 성적이 곧 팬서비스라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그러나 라팍 이전 및 선수층의 대격변으로 팬덤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왕조를 지탱했던 선수들이 팀을 떠나고, 구단이 젊은 팬 및 여성 팬들을 겨냥한 마케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팬층도 서서히 젊어졌다. 지금 삼성을 지탱하는 선수들, 특히 투수진의 나이는 상당히 젊다. 심지어 팀 연령대가 젊다고 말하는 두산보다도![124] 게다가 강민호, 우규민, 이원석 등 외부수혈이 늘어나면서 덕아웃 분위기도 예전 삼성과는 달라졌다. 반면 올드 팬들은 왕조시절 이후 지속된 주요 선수들의 이적과 구단의 지원 축소,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적이 급격히 하락하면서 야구에서 멀어졌다.[125] 또한 라팍으로 이전하면서 잔디석, 외야 패밀리석 같이 가족 단위로 야구를 관람할 수 있는 좌석이 생기고, 구단이 가족을 겨냥한 이벤트를 많이 개최하면서[126] 가족 단위 팬들이 많이 찾아와 어린이팬들(일명 '삼린이')의 유입이 늘었다. 이와 동시에 젊은 세대 마케팅에 상당히 공을 들이면서 10~20대의 팬층[127] 유입이 늘어났다. 하지만 그 반대급부로 올드 팬들이 빠져나갔다. 이전 서술에서 올드팬이 빠져 나갔기 때문에 관중 수익이 악화됐다고 적혀있었지만, 시민구장에서 라팍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엄청난 부진과 삽질이 계속 이어지지 않는 이상, 관중수입이 악화되기는 힘들다지만 '''역대 최악의 단장인 홍준학이''' 관중수익을 바닥찍게 하고 있는 중이다. 시민구장때에 비해 라팍의 시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좋아졌으며 좌석 가격도 더 비싸기 때문. 게다가 시민구장의 좌석수는 1만석도 안됐으나, 라팍의 경우 2만 4천명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조멤버들이 하나둘씩 퇴단하면서 '''팀 케미가 무너짐'''과 동시에 성적이 바닥을 찍고 있어서 라팍을 절반도 못채울 정도로 매진이 매우 드물다. 그러니 '''성적이 장땡'''이라는걸 제대로 입증하고 있는거다.
이렇게 새롭게 유입된 팬들이나 여성팬, 비(非)TK 지역의 삼성팬들은 팬서비스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128]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구단에서도 이런 흐름을 아는지 혹은 제일기획 이전의 영향인지 구단에서도 마케팅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덕질용 SNS라고 불리는 인스타그램이 개설되면서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인스타그램에는 '삼스타'라고 불리는 관리자의 드립력 넘치는 글들도 올라온다!
삼성 야구를 오랫동안 봤으면 알겠지만 삼성에서 팬서비스나 응원가는 부차적인 요소였다. 팬덤 자체가 팀 컬러가 변화하면서 팬덤의 성향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즉 지금 삼성은 야구 내적으로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격변기를 거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홍준학 단장이 인터뷰마다 "새로운 삼성"을 강조하는 것도[129]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적이 하락하면서 새로운 삼성은 커녕 '''김성근 시절, 아니 556 시절보다 못한 시절이 되어가고 있다.'''[130] 아니나 다를까 성적이 개판치는 바람에 팬이탈이 2019년 들어서서 가속화되었고 남은 팬들도 오승환때문에 버티는 실정이다.
이제는 윤성환 은퇴식 여부 등의 사건까지 겹쳐 버티는 것도 한계에 부딪혔는지 골수올드팬덤인 대구아재들의 주도로 '''윤성환에게 여태까지의 수고에 대한 고마움의 포스터'''와 함께 '''홍준학 퇴출 현수막'''이 대구시내 곳곳에 걸리는 중이다.

6.3. 네임드 팬


※ 이름에 ★표시가 된 사람은 삼성 라이온즈의 연고지인 대구광역시와 인근 경상북도 출신. 여담으로 다른 구단들하곤 다르게 유독 정치계인사들이 많다.[131] 다 못적어서 그렇지.
  • 고명환★ : 상주시 출신
  • 구본찬★ : 경주시 출신. 넥센 히어로즈 의 시구 행사 겸 고척 스카이돔에서 있었던 소음 적응 훈련 겸 시연 행사에 참석했을 때 삼성 라이온즈를 거쳤던 채태인에게 싸인까지 받아가기도 했다.
  • 김강우: 어린 시절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에 가입한 것이 인연이 되어 현재까지도 삼성을 응원하고 있다.
  • 김경애★ : 의성군 출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이자 김영미 선수의 동생. 이승엽의 팬이라고 한다.
  • 김구라: 인천광역시 출신임에도 자신은 SK 와이번스의 팬이 아니라 삼성 라이온즈 팬이라고 강조한 적이 있다. 아들인 MC그리는 야구를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지 딱히 언급이 없는 듯.
  • 김대성★: 대구 출신이며 삼성의 골수팬이라고 한다. 안지만과 경운중 동창.
  • 김도영★: 성우계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삼성팬이다. 선수는 구자욱을 좋아한다.
  • 김부겸★: 자타가 공인하는 정치권의 대표적인 삼성빠.[132]
  • 김선영★ : 의성군 출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133]
  • 김신영★ : 대구 출신. 구자욱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있는 듯.
  • 김영미★ : 의성군 출신. 위의 김은정과 함께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
  • 김원준: 진갑용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그를 스타로 발굴한 곳은 삼성그룹 계열사인 삼성물산제일기획이었다.
  • 김은정★ : 의성군 출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에이스. 김상수의 열렬한 팬이다.[134]
  • 김제동★: 영천시 출신.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 라이온즈 장내 아나운서으로 활동하며 이름값을 축적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 장내 아나운서 시절 가장 친해진 삼성 선수가 무려 이승엽[135]
  • 김초희 :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선수. 팀 내 유일한 비 의성군 출신이기도 하다. 구자욱의 팬.
  • 김현철: 앞서 언급한 김원준과 마찬가지로 삼성의 오랜 열혈 팬. 이 사람도 진갑용과 친분이 두텁다.
  • 민효린★: 대구 출신. 야구를 별로 안좋아했으나 시구를 경험한 이후 고향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 박지훈★: 의성군 출신.KBS N SPORTS의 야구 토크쇼 《합의판정》에 출연하고 있다. 야구비전문가이지만 삼성팬이라는 것도 밝히며 공개적으로 삼성을 응원하는 발언을 하고 있다.
  • 박재정★: 전 삼성 선수였던 배영수와 경북고등학교 1년 선후배로 알려져 있다.
  • 박철우★: 구미시 출신. 경북사대부중고교 출신이며 본리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이기도 했다고.[136]
  • 보나★ : 대구광역시 출신. 걸그룹 우주소녀 멤버이며, 정작 시구는 두산에서 했다.
  • 서인국: 울산광역시 출신. 야구장에서 종종 포착된다.
  • 성시경: 유희열의 스케치북의 코너 "The 만지다"에서 인증했다. 아버지가 삼성그룹 직원 출신이라 그런 듯.
  • 박소진★ : 과거 맥심 인터뷰에서 "본인에게 삼성 라이온즈는 어떤 존재인가?"라고 묻는 질문에 "향수(鄕愁)"라고 답했다.
  • 손예진★: 종종 야구를 보러 다닌다고 하며, 2013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시구를 했다.
  • 손태영★: 대구 출신.
  • 슈가★: 트위터 등에 올라오는 작업실 사진에 삼성 라이온즈의 유니폼이 걸려 있었다. 또한 화양연화 pt.2의 수록곡 중 'ma city'라는 노래에서 '수혈 받기엔 좀 힘들어 몸 속의 파란 피' 라는 가사를 썼다.
  • 앤덥★ : 수험생 시절 삼성 라이온즈를 응원하며 버텼다고 한다. 쇼미더머니에서 양준혁 저지를 입고 나온 적이 있다.
  • 오언종 : 청주총국 지역근무 시절 한화 이글스의 팬이 된 정지원처럼 대구총국에서 지역근무할 때 삼성 라이온즈를 좋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는 아내가 더 좋아하는데, 오언종 본인의 인스타그램이 아닌 아내의 인스타그램에는 딸이 이학주의 응원가를 부르는 동영상이 게재되어 있다.
  • 유승민★ : 미래통합당 前 국회의원. 대구광역시 출신이며 자서전 및 여러 미디어에서 인증. 딸 유담과 함께 야구관람을 하기도.[137] 가끔 사직구장에 기서 롯데 자이언츠도 응원하기도 한다. 사실상 삼성, 롯데의 복수 팬.
  • 이상훈★: 영주시 출신. 이수지와 더불어 개그 콘서트청년가장.
  • 이상미★ : 영천시 출신. 경북대학교 졸업. 2019년 5월 25일 라팍에서 애국가 제창을 했다. 영상
  • 이성재 : 아버지가 삼성종합건설 사장이었던 이강태 씨다. 그 영향으로 삼성을 응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예측이 있다.
  • 이수진 : 삼성 홈 유니폼을 입고 고척돔으로 직관간 사진이 인스타그램에 있다.
  • 이재용 : 그 사건이 터지기 전인 2015년까지도 야구장에서 삼성 라이온즈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이 자주 포착되었다. 자세한건 항목참조.
  • 이준석: 미래통합당 노원구 병 당협위원장. 야구 광팬이며 SNS에 삼성과 관련된 글을 종종 올린다.
  • 이찬원: 내일은 미스터트롯 미. 울산 출신이지만 3살때부터 대구에서 살았다. 데뷔 전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일을 한적이 있으며 구자욱의 팬이다. 2020년에 양준혁과 특별해설을 하기도 했다.
  • 임효준★: 대구광역시 출신.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남자 쇼트트랙 1500m 금메달리스트, 500m 동메달리스트 이승엽을 존경한다고 인터뷰했다. 그러나 팀후배 성추행사건으로 금지어행.
  • 장동건: 연예인 팀에서 투수를 맡고있는 상당한 야덕으로 삼성 어린이 회원이였다. 열혈팬이며 김성근 감독의 야구에 빠져 SK 와이번스를 응원하기도.
  • 장동우: 아이돌 그룹 인피니트 멤버이며 경기도 구리시 출신이지만 삼성 라이온즈 팬이며 2016년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시구도 했다.
  • 장문복★: 가장 삼성다운 한국 시리즈 경기로 꼽히는 2002년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인 6차전을 보고 감명 깊어 팬이 되었다고 한다. 야구를 하는 것도 좋아하며, 주 포지션은 포수.
  • 정웅인: 본인은 충청도 출신이지만 처가가 대구이다. OB와 삼성에 어린이회원을 신청했는데 삼성만 붙어서 그 때부터 35년간 삼성을 응원해왔다고 한다.
  • 정현재: KBS 라디오 PD. 앞서 나온 김원준의 라디오 스타 담당 PD이자 팟캐스트 '야구잡썰'을 진행 중이다.
  • 조정식★: 대구광역시 출신. 메가스터디 영어 영역 강사.
  • 주호영★: 現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원내대표. 그의 지역구에 삼성 라이온즈 파크가 있다.[138]

7. 선수단/등번호



8. 응원단



2020 시즌 삼성 라이온즈 응원단
응원단장
김상헌
치어리더
고정현, 권소영, 김가영, 김하연, 남민정, 박세아, 이소영, 이수진, 이예림, 장혜원, 최홍라

8.1. 응원가


문서 참고.

9. 사건사고




10. 지역 연고 학교



10.1. 과거 지역 연고 학교


이하는 과거에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 연고 대상 학교였으나 폐부된 학교들이다.
  • 경주상업고등학교 : 1983년 창설, 1985년에 해체되었으며, 지명 대상이긴 했지만 해당 야구부에서 프로 야구단에 입단한 사례는 없다.
  •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 2003년 창설, 2009년 해체되었다. 홍효의, 추승민 정도가 있지만 프로야구에서 눈에 띄게 활동한 사례는 없다.
  • 대건고등학교 : 1970년 창설, 1977년 해체되었다. 대건고 출신 선수로는 권영호, 박승호, 허규옥, 장태수가 있으며, 해체 당시 선수들은 모두 충암고등학교로 전학가 충암고의 우승멤버가 되었다. 이 때 충암고의 우승 멤버가 된 대건고의 마지막 멤버가 조범현이다.
  • 성광고등학교 : 1981년 창설, 1989년 해체되었다. 유명 선수로는 이상목이 있다.
  • 영남고등학교 : 1968년 창설, 1974년 해체되었다. 실업 야구에서 활동하던 선수들은 있었으나, 삼성 창단 시에는 아무도 창단 멤버로 지목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프로 야구단에 입단한 사례는 없다.
  •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 2013년 마이스터고로 전환되면서 같은 재단의 자사고인 포항제철고등학교로 야구부가 이관됨. 포철공고의 역사는 포철고에 이관되어 있으므로, 위의 해당 문서 참조.

11. 특이 사항


  • 유이하게 로고에 모기업 혹은 메인 스폰서 CI를 사용하지 않는 구단이다.[140] 다른 하나는 키움 히어로즈.
  • 타자와 포수가 쓰는 헬멧에는 양 옆에 삼성전자가 출시한 플래그십 피처폰/스마트폰 이름이 새겨져있다. 피처폰 브랜드였던 애니콜은 2010년까지 사용했고 2020년시즌은 SAMSUNG Galaxy S20 ULTRA가 새겨져있다.
  •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인해 한국시리즈를 무산 시킨 바 있다.
  • 최초의 한국시리즈, 최초의 플레이오프, 최초의 준플레이오프를 모두 경험한 팀이다. 최초의 한국시리즈와 플레이오프 상대 팀은 모두 OB 베어스였으며, 최초의 준플레이오프 상대 팀은 태평양 돌핀스이다.
  • 포스트 시즌 한정 전승준포스트 시즌 한정 전패준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포스트 시즌 한정 전승준은 1990년, 포스트 시즌 한정 전패준은 1987년).[141]
  • 삼성에서는 개념이었던 감독이 타 팀에 가서는 역대급 막장이 되거나, 그 반대로 딴 팀에서는 명장인데 삼성에서는 도무지 적응 못하고 말아먹는 사례가 종종 보인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백인천. 김응룡도 한화에 가서는 막장 운영을 보여주며 커리어의 마지막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류중일 감독도 LG 감독이 되고 나서부터는 이 대열에 합류 중... 이었다가 2019 시즌에 살아났다. 또 21세기 들어 SK 감독 시절에 한해 김성근은 삼성에서는 흑역사급 추태만 보여준 희한한 경우이긴 한데, 삼성 감독 시절 이전에도 투수 혹사로 악명 높은 감독이었으니 예외가 있다면 정동진 감독인데, 1994년 태평양 돌핀스를 한국시리즈까지 올렸다. 정작 한국시리즈에서는 삼성 시절 때와 마찬가지로 LG한테 4대0으로 깨지기는 했지만...
  • 소속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 남을 대기록을 세우면 팀이 지는 이상한 징크스가 있다. 단, 예외적으로 양준혁이 2000안타를 기록 했을 때에는 팀이 이겼다.(6대1로 승리 상대는 두산 베어스) 물론, 기록의 성립 조건 중 하나가 팀의 승리일 때도 예외이다. 권영호의 프로 통산 첫 100세이브, 김시진이상목의 개인 통산 100승 등, 공교롭게도 100승을 올린 두 명의 등 번호가 모두 29번이다.
  • 팀에서 없어서는 안 될 쌍두 마차 라인도 있다. 대표적으로 가을야구의 최강자 김종훈-김재걸이라거나. 여기서 쌍두 마차 라인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 장효조-김시진(1983~1988) : 역대 최강의 투타 쌍두 마차. 그러나 큰 경기에서는… 이후 1989년 롯데로 함께 트레이드되면서 해체.
    • 이만수-김시진(1983~1988) : 대구상고-한양대 동기인 배터리 조합으로 정규시즌에는 이만수는 팀의 4번 타자, 김시진은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위의 장효조와 마찬가지로 큰 경기에는 상당히 약했다.
    • 류중일-강기웅(1989~1996) : 말이 필요 없는 KBO 사상 역대 최고의 키스톤 콤비.
    • 김재걸-전병호(1996~1998, 2001~2008)[142] : 김시진-장효조의 완벽한 리버스 버젼. 얼핏 보기엔 각각 우투우타-좌투좌타로 투타도 정반대고, 김시진-장효조에 비하기도 민망한 초라한 정규시즌 성적을 가졌지만 이 두선수는 전형적인 가을에 미치는 선수였다. 이 두선수는 특히나 2002년 한국시리즈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에 있어 시리즈의 분위기를 삼성 쪽으로 가져오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었다. 과장 약간 덧붙히자면 이 두 선수가 없었다면 각각 마해영과 오승환에게 활약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김한수-김태균(1994-2001) : 1971년 생 동갑내기에, 중앙대 동기에, 거기에 삼성의 연고지인 대구 출신이 아닌 것에,[143] 여러 공통점이 많았던 쌍두마차 라인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입단, 방위 복무를 마치고 1997년 백인천 감독의 눈에 들어 3루수와 유격수로 자리잡으며 2001년까지 삼성의 내야진을 지켰다. 심지어 등번호마저 김한수가 5번을, 김태균이 6번을 달며 서로 이웃해 있었다. 다만 김태균이 2002년 초 롯데로 이적하며 해체, 그 후 삼성이 계속 우승을 하게 되며 우승 이후 유입된 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쌍두마차.
    • 양준혁-이승엽(1997~1998, 2002~2003) : 말이 필요없는 프랜차이즈 좌타거포 쌍두 마차.
    • 강봉규-김창희(2006~2008) : 두산 시절부터 이어진 외야수의 쌍두 마차.
    • 강동우-박한이(2001~2005) : 삼성의 외야를 책임진 "수비되는 외야수" 라인. 농담이 아니라 당시 삼성은 전임 감독들과 프런트의 뻘짓(;;) 때문에 1루수, 지명타자가 주 포지션이었던 김기태-마해영-찰스 스미스 등이 외야수비를 보는 등 그야말로 외야 코너에 헬게이트가 열린 상태였다.[144] 이 후 2002년 시즌 전 포지션이 겹치는 김기태를 트레이드 카드로 쓰며 외야 자리가 교통정리 될때까지 두 선수가 고생해야 했으며, 이승엽과 마해영이 이적한 2004년 이 후에는 박한이는 상위 타순에서, 강동우는 하위 타순에서 활약하며 팀의 물타선을 간신히 지지했으며 양준혁이 1루수로 전업하면서[145] 다시 구멍이 생길뻔한 외야라인을 잘 메꾸는 역할을 했다.
    • 박진만-박종호(2005~2006) : 현대 시절부터 이어온 키스톤 콤비, 그러나 신명철의 합류와 박종호의 부상, 뒤이은 박진만의 노쇠화 등으로 인해 활약 기간이 길지는 않았던 콤비.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삼성 팬들 간에도 심정수와 함께 최악의 듀오로 뽑는 사람과 삼성의 2회 우승을 시켜준 수훈갑으로 손꼽는 사람, 그저 현대의 전력 약화 외에는 큰 의의가 없다는 사람 등등 팬들의 의견과 평가가 많이 엇갈리는 콤비이다.
    • 권혁-권오준(2005~2012) : 권오준이 계투가 되면서 탄생한 그 유명한 쌍권총 조합. 둘 중 한명이 부상당하면 권오원이 대신 들어가기도 했다. 2013년엔 권오준은 수술, 권혁은 부진으로 임시해체 되었으며 권오준의 복귀가 미루어 지는 바람에 사실상 2015년 이후를 기약해야 했으나 FA로 권혁이 팀을 떠나게 되면서 재결성은 불가능해졌다.
    • 권오준-오승환(2005~2012) : 2005년과 2006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어 냈다. 2013년에는 권오준이 수술을 받아 1년을 날린 탓에 다음 해를 기약해야 할 듯 싶었으나 오승환이 한신으로 떠나버리며 해체. 오랜 시간이 지나 2020년에 재결성하였지만, 권오준의 은퇴로 영영 해체되고 말았다.
    • 박진만-신명철(2007~2010 초) : 수비 한정으로 생각보다 궁합이 잘 어울렸던 키스톤 콤비. 원래 박진만의 짝은 박종호였으나 부상과 노쇠화로 수비능력을 상실하면서 그 공백을 채운 게 투수 강영식을 내주고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신명철이였다. 하지만 박진만마저 2008년 이후로 잔부상으로 인해 노쇠화가 찾아오며 돌글러브화되었고[146] 1차 지명 출신 김상수가 치고 올라오면서 해체되었다. 두 선수 모두 타율은 이 시기에 어마무시하게 낮았지만 수비 능력 만큼은 리그 탑을 다퉜으며 특히 2008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타격이나 투수의 구위가 아닌 야수의 수비만으로도 야구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 강봉규-신명철(2009 한정) : 단기 임팩트는 최고였던 라인. 이 해 두 선수의 활약은 다른 연도와 비교해 볼 때 신기할 정도였다.[147]
    • 김상수-신명철(2009~2011) : 상당히 미묘한 콤비. 09년에 당시엔 1차 지명으로 입단한 내야수 유망주였던 김상수가 주전을 위협하자 신명철이 무려 20-20을 달성해 버렸다. 이때 김상수에게 붙은 별명이 신명철 부스터. 이 후 신명철이 10년에 준수한 활약을 했을 땐 김상수가 부상 후유증으로 부진했고, 김상수가 활약한 11년엔 신명철이 본인 커리어 평균인 2할 초반 타율을 기록하며 부진하기 시작해 12년 부턴 1군은 고사하고 3군으로 분류되는 지경에 이르다 KT로 이적하며 해체되었다. 김상수는 각성의 계기를, 신명철은 수비 노하우를 서로에게 주었으나 정작 동시엔 안 터진 엇박자 콤비.
    • 박석민-최형우(2008~2015) : 박석민은 우타, 최형우는 좌타라 삼성의 좌우 쌍포라는 이미지가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채태인도 성적이 좋으면 여기 끼기도 한다. 2014 시즌에는 아예 이 두 명이 특정 선수 최다 백투백 홈런 크보 신기록을 아예 갈아치워 버렸다. 2016시즌에 박석민이 NC 다이노스로, 이듬해 최형우가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며 영원히 볼 수 없는 듀오가 되었다.
    • 차우찬-장원삼(2010~2016) : 삼성의 2010년대를 책임진 좌완 듀오이자 원투 펀치. 차우찬이 FA로 팀을 떠나고 장원삼도 역시 노쇠화로 인해 선발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해체되었다.
    • 윤성환-장원삼(2010~2016) : 마찬가지로 2010년대의 삼성을 책임진 좌우 선발 듀오. 둘 다 구속보다는 제구 위주의 피칭을 하는 선발들이다. 그리고 둘 다 격년제 징크스가 있는 것도 똑같다(...)[148]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둘이서 4승을 올리며 하드캐리했다. 2018년 현재 윤성환은 꾸준히 이닝을 먹어주며 선발 로테이션을 돌아주는데 장원삼은 급격히 노쇠화가 찾아옴에 따라 연투 능력이 떨어져 사실상 해체. 참고로 윤성환이 장원삼보다 2살 더 많다.
    • 안지만-오승환(2011~2013) : 역대 최고 수준의 우완 계투 듀오. 13년엔 살짝 흔들리기도 했지만 여전히 계투진의 쌍두 마차였다. 지금은 오승환이 해외에서 뛰고 있고 안지만이 불법스포츠도박 혐의로 계약해지를 당하며 영구해산.
    • 오승환-진갑용(2005~2013) : 2005년 이후 우승 5회를 이 배터리가 매듭지었다. 경기 후 특유의 세레모니가 트레이드 마크인 최고의 콤비. 역시 오승환이 해외로 진출하고 진갑용은 2015년 은퇴하며 사실상 해체.
    • 이승엽-박한이(2001-2003, 2012-2017) : 박한이가 입단한 2001년부터 이승엽이 일본으로 떠난 2003년까지 삼성의 좌타 라인을 책임졌고, 2012년 이승엽이 일본에서 복귀하며 다시 결성된 베테랑 타선 듀오. KBO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2002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유이한 현역 선수들이.. 었으나 이승엽의 은퇴 후에는 박한이가 삼성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현역이다.[149]
    • 야마이코 나바로-이승엽(2014) : 얼핏 보기엔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댓글 창에서는 항상 묶여서 언급된다. 그 이유인 즉슨 클린업 트리오도 아닌데 팀내 홈런 1, 2위를 다투고 있기 때문. 그래서인지 삼성의 타선을 칭찬하는 댓글에는 높은 확률로 1번과 6번이 30홈런 치는 무서운 팀이라는 소리가 언급되곤 한다.
  • 1995년부터 2015년까지 사용된 그림판 마스코트는 예나 지금이나 상당히 잘 나온 디자인이다. 물론 여러 스포츠에서 우려먹긴 했지만(농구, 배드민턴, 럭비단, 배구단)... 2008년부터 팀 로고와 색상이 바뀌었어도 디자인은 그대로인 듯. 가히 본좌급 마스코트이기도 하다. 캐릭터 디자인은 비슷하나 구 버전(1995년~2007년)은 원정 유니폼 색과 같은 파란색, 신 버전(2008년~)은 짙은 하늘색이다. 구 버전 마스코트는 2002년, 2005년~2006년, 신 버전 마스코트는 2011년부터 2014년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 1995년 시즌 롯데 자이언츠를 상대로 5회와 6회의 대량 득점으로 역전했다가 재역전패를 거둔 바 있다. 그 당시 7회에 11점이나 실점했는데, 이닝 점수를 두 자리로 찍을 수 없다는 한계 때문에 11 대신 B라는 글자가 찍혔었다. 2008 시즌에도 SK 와이번스한테 0-18로 처참하게 패배했는데, 8회에 11점을 실점하는 바람에 전광판에 B가 찍히는 진풍경을 13년만에 다시 볼 수 있었다. 이 사건 이후로 삼성 라이온즈는 B성 라이온즈라는 별명을 얻었다. [150] 2013년 6월 6일에는 이닝별 점수는 아니고 총 사사구 수 11개를 기록하며[151] 또 전광판에 B를 띄웠다. 최신식 전광판이 있는 라팍으로 홈구장을 옮긴 2016 시즌부터는 이 광경을 볼 수...있다! 3루측 띠전광판이 예전 시민구장 방식을 따르는지라 유일하게 점수판에 알파벳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선수단 소개는 공홈이 KBO 홈페이지에 비해 더 깔끔하다. 2011년 6월에 새로 홈페이지를 단장했다. 팬들과의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서라고. 눈여겨볼 만한 부분은 자기 소개 영상으로, 코칭 스태프부터 신고 선수까지 자기 소개 영상이 있다. 단점이라면 피드백이 거의 없다시피 하고 업데이트도 상당히 늦다.
  • 왕조시절의 선수들이 전부 개그 본능이 충만하다. 대표적인 개그맨 박석민을 시작으로 채태인, 정인욱, 안지만, 진갑용 등 거의 모든 선수들이 입담이 좋고 성격이 밝다. 외모에서도 날카롭거나 잘생긴 선수들은 딱히 없고 개구장이 같이 정감가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는 외국인 투수들과 외부 영입 선수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덕분에(?) 당시 8개 구단 팀들 중 가장 팀 분위기와 팀워크가 좋았던 팀들 중 하나로 뽑힌다. 이 때문에 생긴 별명이 개그 라이온즈.
  •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선수들의 외모가 역변하는 것을 삼적화라고 한다. 해당 문서 참조.
  • 한때 마스코트인 사돌이와 사순이(블레오)의 엽기 행각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최근 몇 년 동안에는 거의 없었지만, 옛날에는 빈볼 시비가 여러 차례 있긴 있었다.(배영수-펠릭스 호세, 이승엽-서승화)
  • 2008년 7월 19일 토요일, 삼성은 1985년 통합 우승 기념 올드 유니폼을 입었는데 초반에는 한화가 2-1로 승기를 잡을 듯했으나 실책과 투수의 폭투로 인해 2-2 동점, 박한이의 역전타로 4-3으로 승리했다. 올드 유니폼은 의외로 예쁘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런데 이후로 올드 유니폼 데이를 거의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미스터리.[152] 그러나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하지 않아야 할 명분이 있는데, 올드 유니폼 데이를 한 2008년, 2015년, 2016년, 2017년 다 끝이 좋지 않았으며 올드 유니폼을 입지 않게 된 2018년에 다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 야구계의 저주들에서 올드 유니폼의 저주 참고.
  • 전 응원단장인 김용일이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하다. 자세한 사항은 김용일 문서 참조.
  • 오래된 특징으로 유독 외국인 투수와 신인 투수에게 약하다. 외국인 투수에게 약했던 역사는 꽤 오래되어서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된 이후 부터 내내 약했으며[153] 소위 말하는 먹튀급 선수를 제외하고는 삼성 상대로 성적이 안 좋았던 투수를 찾기가 더 어려울 정도. 거기에 어느 순간부터 신인이나 1군 등판 경력이 거의 없어 처음 만나는 투수들에게도 약점을 잡히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이승우, 강철민, 송창식, 유희관 등. 특히 강철민은 사이버 투수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며 송창식도 버거씨병 이후 복귀해서 첫 승리를 삼성에게 따냈다는 걸 생각하면 이건 좀 심각한 수준. 하지만 두 번째로 만나면 얄짤없다. 그래서 감독들이 삼성 상대 첫경기를 치룬 투수들을 다시 올리면서 "저번에 잘 던졌으니 삼나쌩이겠지"라며 방심하다가 역관광당하는 사례도 많다.[154] 팬들 중에서는 류현진, 김광현, 윤석민같은 에이스 투수에게도 물론 약하다면서 종특으로 꼽는 사람도 있는데 [155] 그리고 애초에 잘하니까 에이스인 것이고 특정팀에 유독 털리면 에이스 소리 못 듣는다. 류현진이 특정팀에 특별히 약했던가? 다시 말해 에이스니까 강한 거지 삼성이라서 에이스가 이긴 게 아니란 소리.
  • 한때 응원단이 최대 약점이라 불렸던 적이 있다. 배영수와 입단동기인 치어리더 노숙희가 2013년까지 활동했을 정도로[156] 구단에서는 치어리더 교체에 큰 관심이 없었다. 90년대 후반에는 박채경과 김순희라는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치어리더도 있었으나 몇 년 후, 한 명은 결혼을, 한 명은 유학을 떠나며 치어리더에서 은퇴하게 된다. 롯데 자이언츠의 박기량, LG 트윈스 → SK와이번스의 강윤이, NC 다이노스의 김연정, 심지어 넥센 배트걸 민수진과 롯데 배트걸 신소정도 전국적으로 인기몰이를 했지만 삼성 치어리더는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한 때 삼성 치어리더는 SSAT 성적순[157]으로 뽑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2014년 이수진을 비롯한 새로운 치어리더들의 등장으로 삼성팬들은 드디어 잔혹사가 끝났다며 기뻐하고 있다. 또한 응원가는 김용일이 응원단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스포츠쟈키라는 직함을 스스로 만들어 여전히 현 응원단장 옆에서 활동하며 희망이 보이질 않고 있다...가 2016년 시즌 종료 후 그만두었다.[158] 1990년대까지는 김한수 등의 괜찮은 응원가도 있었으나, 응원단장 김용일의 장기집권으로 흑역사가 되었다. 팀 응원가에 대해서는 다른 구단에 비해서도 괜찮다는 평이 있으나, 선수 응원가가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정도로 충격과 공포의 수준이다. 그나마 2013 시즌에 모든 선수 응원가가 재녹음되면서 채태인, 최형우 등 일부 선수 응원가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KBO 전체 수준에 비하면 많이 뒤떨어진다는 평이 다수다.
  • 대구 지역을 연고로 써서 그런지는 몰라도 유독 여름에 승률이 좋다. 다른팀은 퍼질 때 "대구에 비하면 이 정도쯤이야"라는 듯 선수들이 체력 저하 없이 멀쩡하게 플레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 오죽하면 "매미가 울기 시작하면 다 죽었다"는 구단 관계자의 농담까지 나올 정도이며, 이를 빗대서 봄데, 여름성, 가을슼, 겨울쥐라는 말도 생겨났다. 이 법칙은 2013년 들어 깨지나 싶었으나, 개막 한 달동안 단 3승밖에 못 거두며 최하위를 맴돌았던 2017 시즌 여름 6월 월간 승률 5할을 찍고 분위기 전환에 성공하며 뜬금없이 부활했다.
  • 다른 팀 선수들 프로필 사진은 홈 유니폼을 입고 찍으나[159], 라이온즈만 원정 유니폼을 입고 찍는다.
  • 2018년 전반기 기준 유일하게 모기업 외 유니폼 스폰서가 없는 프로야구단, 아니 프로스포츠단이었다. 다른 팀은 유니폼만이라도 비 모기업 제품을 쓰지만 삼성 라이온즈만 광고 패치는 물론이고, 유니폼과 모자 및 의류 제작사까지 삼성 계열사 것이다. 다른 삼성스포츠단의 경우에는 과거에 자사 용품사(라피도)를 쓰기도 했지만 2000년대 들어 사라졌고, 제일기획으로 이관된 이후에는 외부 기업을 스폰서로 유치하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또한 2020 시즌부터 유니폼 제작사가 벡스에서 언더아머로 바뀌면서 이 특이성은 사라지게 되었다.
  • 나무위키 내에서는 삼성팬이 의외로 초강성팬덤 중 하나다. 대구아재 문서 참고.
  • 올드 멤버 중에서 유독 대구 지역 고등학교 - 한양대학교 출신이 많다.[160] 이에 해당하는 선수들로는 류중일(경북고-한양대), 장효조((대구상고-한양대), 이만수((대구상고-한양대), 김성래(대구상고-한양대), 김용국(대구상고-한양대), 김현욱(경북고-한양대), 성준(경북고-한양대), 오대석(대구상고-한양대) 등이 있다. 한편 이승엽도 경북고 졸업이후 한양대 진학을 고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담으로 현재는 대다수가 고교 졸업이후 바로 프로에 입단하는 경우가 많아 지면서 스쿼드에서 대구 지역 고교 - 한양대 출신의 선수는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박해민이 한양대 출신[161] 선수로 선수생활을 하고 있긴 하다.
  • 외국인 선수는 필라델피아 필리스 출신 선수를 많이 영입한다. 타일러 클로이드를 시작으로 하여 다린 러프, 벤 라이블리, 데이비드 뷰캐넌까지. 혹자들은 필리스 산하 마이너리그 한국지부라고(...)[162]
  • 팀의 호성적이 묻히지만 2루수 자리가 저주라도 받았는지 약점이자 공백인 팀이다. 강기웅을 제외하면 그나마 정경배,신명철이 돋보였으나 유리몸 조동찬이나 백업 수준의 김재걸,박정환같은 그저그런 선수들도 2루수였다. 공수겸장인 나바로가 삼성 통합우승 시절 드디어 이 자리를 매웠으나 그마저 떠나고 난 이후는 뭐...... 2019년 스프링캠프에서는 이학주와 김상수가 번갈아 유격수-2루수를 보고 있다.
  • 과거 이 항목에도 몇번 있다가 지워졌지만, 선수 일부의 팬서비스가 좋지 않기로 악명 높다. 차차 개선되어야 할 부분. 실제로 2017 시즌 이러한 부분에 대해 당시 임시 주장[163]이던 박해민이 향후 팬서비스 개선에 힘쓰겠다고 홈구장 경기 종료후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아졌다. 김상수의 경우 팬서비스 및 사회공헌도 찬사를 받는 중.
  • 한 때 개념 운영으로 칭송받던 팀이었으나 라팍으로 옮긴 후 막장운영으로 비판받고 있다. 합리화를 외치며 선수들을 안 잡아 전력이 급락했고[164], 한정판 물품 무한 재판매로 크게 비판을 받기도 했고, 성적 나쁘다는 핑계로 팬 행사를 안 하기도 했으며, 선동 금지라는 핑계로 현수막을 제지하기도 했다. 점차 나아지는가 싶더니 2018년 스페셜 유니폼 데이를 취소하는 등 아직 막장기가 남아 있다.
  • 이 팀을 거쳐간 투수들 중 NPB로 진출한 임창용, 오승환 은 한결같이 악성 안티 요미우리 성향이 높은 팀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투수로 입단했던[165] 이승엽요미우리 자이언츠로 갔다.
  • 창립 멤버 구단들 가운데 한국시리즈 우승이 가장 늦다. OB 베어스가 전신인 두산 베어스가 리그 원년인 1982년도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기록했고[166] 삼성과 더불어 '진골' 창단 멤버인 롯데 자이언츠가 1984년 첫 우승을 이뤄냈으며[167], 해태 타이거즈가 전신인 KIA 타이거즈도 1983년 첫 우승을 달성한 반면, 라이온즈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은 무려 2002년, 그러니까 21세기에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한 셈이다. 구단의 첫 우승이 1985년이지만[168] 이 당시엔 전, 후기리그 통합우승이었던 관계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진짜 우승으로 간주하는 팬들 사이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169]. 넓게 적용해 MBC 청룡이 전신인 LG 트윈스까지 창립 멤버로 쳐준다면 트윈스의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 1990년이므로 제일 늦은 것이다.
  • 우승을 확정지은 지역은 3개로, 오래된 순서대로 부산광역시(1985), 대구광역시(2002, 2013), 서울특별시(2005, 2006, 2011, 2012, 2014)에서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다.
  •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상대는 총 8팀으로, 한국시리즈 나가봤다는 팀들은 웬만하면 삼성과 최종우승을 다투었다고 보면 된다. 유일하게 삼성과 못 만난 한국시리즈 경험구단은 NC 다이노스다.
  • 2006년 한국시리즈를 제외하고 항상 3루 덕아웃에서 뛰어나와 우승 순간을 만끽했다. 1루에서 우승했다고 뛰어나오는 일은 광주에서 KIA 타이거즈를 꺾고 우승하지 않는 이상 볼 일이 없다.[170]
  • 의외로 잘했던 선수들 중에 호남 출신 선수들이 꽤 많다. 박충식, 임창용, 오승환, 최형우, 차우찬 등등... 클래식 라이벌이라는 롯데 자이언츠[171]와는 반대되는 부분이다.
  • 21세기 들어서 對삼성 경기 이후 상대팀 감독의 경질 또는 사퇴 소식이 잦아지면서[예시] 다른 의미로 감독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
  • 팀 자체 징계가 타 팀에 비해 상당히 세다. 2011년 6라운드 4순위로 지명되었던 김준희는 경기도 치르기 전에 음주운전을 저질러 바로 임의탈퇴당했고, 정형식도 사람은 안 쳤다만 음주운전 사실을 선수가 은폐했다 걸려서 바로 임의탈퇴당했다. 도박 사건에 연루된 임창용벌금형 선고 즉시 방출, 안지만은 도박 사건 연루때는 재판을 못 해서 살았긴 했다만, 얼마 뒤 도박사이트 개설 가담이 걸려서 즉시 계약 해지를 당하고 계약금 중 일부인 21억원을 구단에 도로 내놔야 했다. 자체 징계의 강도 면에서 비교되는 팀이 KIA 타이거즈.
  • 팀의 레전드급 선수들 대부분의 말로가 별로 좋지 않다. 그나마 현재까지 처지가 양호한 사람은 양준혁[174]이나 류중일, 권오준 정도밖에 없고, 그 외의 인물들은 팀과 마찰을 빚어 말년 커리어가 꼬였거나, 이전의 언행 등이 문제가 돼 은퇴 전후로 여론이 나빠지는 등 커리어 끝을 좋게 맺은 경우가 별로 없다. 삼성의 원조 에이스 김시진과 타격의 달인 장효조는 선수협 파동으로 구단 눈 밖에 나버려 롯데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한 뒤 그곳에서 쓸쓸하게 유니폼을 벗었으며, 당대 최고의 포수 이만수 역시 말년에 본인의 대우 때문에 구단과 마찰을 빚고 결국 은퇴식 하나 없이 쫒겨나듯 그라운드를 떠났다. 삼성 왕조의 배터리를 책임졌던 진갑용의 도핑 전력과 안지만의 원정 도박 의혹 및 불법 인터넷 도박 사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구단 역대 최고의 3루수로 평가받는 김한수는... 감독 시절의 처참한 팀 성적으로 이제는 오히려 삼성빠들의 금지어가 돼 버렸다. 한때 간첩도 안다는 말까지 있었던 국민타자 이승엽은 KBO 리그 최초로 은퇴 투어를 갖고 본인의 은퇴 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쳐내는 등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선수 커리어를 마무리했지만, 현역 시절 본인의 희소성 발언 때문에 은퇴 이후 호날두 '저리가라' 할 정도로 여론이 나빠졌으며, 또 불혹에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삼성의 선발진을 지탱해준 황태자 윤성환과 차기 영구결번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끝판대장 오승환 역시 원정 도박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여론이 안 좋은 상태다. 결국 윤성환은 또다시 원정 도박 스캔들에 휩싸이자 구단에서 내쫒기듯 방출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중에서도 정말 눈물없인 볼 수 없는 사례는 바로 박한이라고 할 수 있다. 삼성의 8번의 우승 중 무려 7번을 함께하며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리던 그였으나, 딸의 등교를 위해 차를 몰다 접촉사고를 낸 것이 그만 전날 마신 때문에 음주운전으로 걸리고 말면서 영구결번은커녕 은퇴식도 못 치르고 불명에 은퇴하면서 팀의 레전드로서는 최악의 결말을 내고 말았다.
  • 포털에서 이미지가 가장 좋은 구단이다. 엘롯기한화, 두산의 경우 인기만큼 팬덤이 크고 사건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해 이 구단들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며 흥참동 팀들의 경우 팬덤이 크지 않아서 반감은 적으나 이 구단들은 사건사고가 워낙 큰 것들이 많아서 그나마 사건사고가 적고 팬덤도 적당한 삼성에 대한 야구팬들의 인식은 호의적인 편이다. 댓글이 사라지기 전 삼성에 대한 기사에서는 5년째 가을야구조차 못 가는 현실에서도 올해만큼은 다를 것이라는 등 전반적으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러한 미화가 과하기도 해서 홍준학이 합리적인 운영을 하는 명단장 취급받는 등의 부작용도 일어나고 있다.

12. 관련 문서



13. 둘러보기






[1] DART 보고서 [2] 대구 사무실[3] 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4] 서울 사무실[5] 삼성화재 역삼빌딩 20층[6] 2014년부터 삼성내의 을 인수 하였다.[7] 리그 연고지 제도 개편으로 인한 경북 연고 소멸일 뿐, 1차 지명 권한이 날아간 건 아니다. 현재 1차 지명 권한은 대구/경북/강원영동[8] 前 삼성카드 사장.[9] 다만, KBO 리그 기준으로 만원관중은 24,000명이다.[10] 제2구장[11] 단일 리그 기준.[12] 전기, 후기 리그[13] 전기, 후기 리그[14] KBO 포스트시즌 최다 진출팀이다.[15] 다른 한 팀은 롯데 자이언츠.[16] 양대 리그, 전·후기 리그 포함시 17회.[17] 롯데 자이언츠보다 약간 진한 색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주리 블루에 더 가까운 색.[18] 로열 블루나 코발트 블루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19] 야구단이 독립법인화 된후 축구단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도 법인회사로 전환했다. 그 외 다른 스포츠단들은 전부 모기업의 부서로 포함된다.[20] 삼성전자 27.5% + 삼성SDI 15% + '''CJ제일제당''' 15% + '''신세계''' 14.5% + 삼성전기 12.5% + 삼성물산 7.5% + 제일기획 3.0% + 이건희 2.5% + 제일모직(구 삼성에버랜드) 2.0%. 삼성 라이온즈는 나눠갖지말고 다 같이 공동 운영 하게 하려 했다고 한다.[21] 2021년 신세계그룹이마트를 통해 SK 와이번스를 인수하면서 신세계의 삼성 라이온즈 지분 소유 여부도 논란이 됐는데, KBO 규약에 따르면 한 구단이 다른 구단의 주식을 소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KBO는 이마트와 신세계가 별도의 법인으로 분리돼 있기 때문에 이에 문제가 없다고 유권 해석을 내렸고, 신세계도 삼성 라이온즈 지분을 매각치 않고 그대로 유지할 예정이다. 관련기사[22] 사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2001년 기아자동차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하여 KIA 타이거즈를 출범시킨 이후에도 현대자동차현대 유니콘스 지분을 유지한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의 선례가 존재한다.[23] 삼성전자(27.5%) 삼성SDI(15.0%) 삼성전기(12.5%) 삼성물산(9.5%) 등.[24] 아무리 야구단이 적자를 본다고 해도 지분 67.5%를 6억 7천만원에 시장에 내놨다면 아파트를 팔고 빚을 내서라도 살 국민들이 넘쳐날 것이다(...). 그룹 간의 거래였기에 가능했던 일.[25] 17, 18, 19시즌 문서 FA 계약란 참조[26] # 스탯티즈 기준 역대 팀 wRC+ 1위는 1987년 삼성이고, 상위 10팀 중 7팀이 삼성 라이온즈이다.[27] 1980년대 중·후반에 등장한 비운의 천재타자 강기웅도 무시 못할 타력을 과시했다. 다만 그 놈의 체력이 항상 문제였을 뿐...[28] 이 컬러와 대척점에 선 팀이 LG 트윈스롯데 자이언츠다. LG는 MBC 시절부터 김인식, 김재박, 이해창, 유지현, 이대형 등 발이 빠르고 주루 센스가 훌륭한 선수들이 대대로 있었고 1990년대에는 대포보다는 미친듯이 쏴대는 연속 안타로 상대팀을 흔드는 신바람 야구로 명성을 얻었다. 롯데도 김용희, 김용철, 김민호, 마해영, 임수혁, 이대호 등 일발장타를 갖춘 타자들이 대대로 나왔지만 삼성보다 양적인 측면에서 부족했다. 무엇보다 소총부대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팀이 롯데였는데 대표적 사례가 1992년 롯데의 우승을 이끌었던 남두오성 타선이다.[29] 사실 류중일은 타격보다 수비가 더 일품인 선수였다. 더구나 프로 현역 통산 기록에서 시즌 3할 타율(규정타석 이상)과 2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해는 1990년 딱 1시즌 뿐이었다. 다만 팀내 다른 타자들은 주루 툴보다는 장타 툴에 특화된 선수가 많았고 류중일의 출루율과 준수한 주루 센스가 돋보였기에 리드오프로서 기용된 것이다. 박한이는 컨택 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급 타자였지만 준족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발은 결코 느리지 않았지만 주루 센스가 꽤나 나빴다. 이 분께서 농반진반으로 정신병자라는 드립을 했던 것도 주루 플레이 상의 본헤드 플레이 때문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30] 이와 같은 철혈식 운영으로 인해 김태한, 박충식, 김상엽 등의 에이스들이 쉴 새 없이 구르다 내쳐졌다. 타자도 예외는 없어서 강기웅, 양준혁 등의 스타 플레이어를 내쳐버렸다. 다만 양준혁은 김응용 감독 덕분인지 다시 돌아왔다.[31]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만수는 은퇴식도 없이 방출됐고 김시진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이유로 최동원과 트레이드됐으며 장효조 역시 석연찮은 이유로 롯데로 트레이드됐다.[32] 그마저도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전에 은퇴식을 경험한 선수는 '''류중일 딱 한 명에 불과했다.''' 김현욱의 은퇴식부터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갈증을 해결한 이후의 일이다.[33] 그러나 이 시절 화이트삭스 코치로 활동하고 있던 이만수에게 코치직 및 차기 감독 자리를 제시하였다가 갑자기 없던 일로 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자세한 건 이만수 항목 참조.[34] 대표적으로 조계현, 임창용, 김현욱, 김기태 등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하고, 김동수, 이강철을 FA로 데리고 왔다.[35] 심지어 심정수의 4년 60억 FA 기록은 무려 '''9년'''동안이나 최고액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가 2013년에 와서야 깨졌다.[36] 김응용이 삼성 감독 부임 이후 첫해인 2001년에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지만, 두산에게 우승을 내주었다. 해태 시절 9번이나 한국시리즈에 진출시키면서 모두 우승했던 김응용 감독은 이때 처음으로 한국시리즈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하지만 2002년에는......[37] 물론 1985년 통합 우승이 있고, 1987년 통합 1위가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인정하는 우승 팀은 한국시리즈 우승 팀이었다. 1985년 한국시리즈는 열리지 않았고, 1986년부터 바뀐 룰에 의해 전후반기를 휩쓴 팀도 2위 팀과 한국시리즈를 치르게 되었는데 1987년 한국시리즈가 그러했다. 전후반기 1위 팀이라는 위치에 맞지 않게 2위였던 해태 타이거즈한테 0-4 셧아웃을 당하면서 한국시리즈 우승은 무산되었다.[38] 다만 1987년 한국시리즈는 해태에게 휴식일로 8일이나 주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경기감각면에서 삼성이 불이익을 본 시리즈였다.[39] 타이거즈 출신의 감독(김응용, 선동열) & 코치진(김평호, 정회열, 조계현 등) + 유니콘스의 FA 선수(박종호, 박진만, 심정수)[40] 물론 디스 건 그 감독돈으로 우승한 적이 있었다.[41] 당시 부상으로 재활 중이었지만 두산에 부족한 좌완 계투를 내주면서 두산 포수 중 서열이 떨어지는 채상병을 데려온 것에 분노하는 삼성 팬들도 많았지만, 두산 이적 후 지승민의 행보를 생각하면 어딜 봐도 삼성이 남는 장사를 했다.[42] 화면에 나온 '구단이 돈이 없다'는 말은 '프로야구단 법인이 적자를 기록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43] 다들 아는 사실이지만 삼성은 2010년대 들어 외국인 영입은 폭망했다.[44] 사실 냉정하게 보면 2013년 FA에서 삼성에게 필요한 것은 삼성 취약 포지션인 2루수 정근우 정도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충분히 대체 선수가 있는만큼 딱히 필요없다는 얘기가 중론이었다. 당장 정근우의 나이를 봐도 현 삼성 2루를 맡고 있는 조동찬김태완과 별 차이도 없고, 도리어 내줘야 하는 보상선수로 인한 출혈을 더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실제로 정근우가 70억이라는 거금을 받자 정근우에 대한 토론은 모조리 종료되었다. 심지어 이후 2014 시즌이 시작되자 2루수 자리에 일찍이 인터뷰를 했던 대로 특급 외국인을 데려오며 종지부를 찍었다.[45] 이때 상당히 많은 팬들이 분노했다. 대구 연고지 출신 선수였던 점도 있고, 본인이 "삼성 감독까지 하고싶다"라고 말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팀을 떠났다는건 팀 분위기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상당한 지적을 받고 있다.[46] 팬들은 이원석이 65억, 우규민이 27억이라고. 그만큼 이원석이 가격에 비해 말도 안되는 엄청난 활약으로 혜자 FA가 되었고, 반면 우규민은 허리부상으로 삼성이 데려온 목적인 선발투수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사실상 추격조/패전조로 출장해 욕을 먹고있기에 저렇게 말하는 것이다.[47] 삼성그룹에서는 영향력이 꽤 막강한 사장급 임원이라고 한다. 라이온즈 구단 내에서도 신뢰도가 꽤 높다는 이야기가 있다.[48] 이전까지는 기아자동차KIA 타이거즈를 매각하려고 신세계그룹 측에 의견을 타진했으나 수도권 연고팀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 물론 KIA 구단은 이를 부인했다.[49] 이건희 회장은 라이온즈의 초대 구단주였고 경산 볼파크의 건립도 직접 지시할 정도로 라이온즈에 대한 애착이 매우 컸다. 특히 2014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삼성서울병원의 VIP 병실에도 라이온즈 경기 중계를 줄곧 틀어놨고 이승엽의 극적인 홈런 순간에는 잠깐이지만 눈까지 번쩍 떴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지고 있다.[50] 오재일의 영입 이전에도 강민호우규민의 영입 때 상당한 금액의 돈을 썼다.[51] 한 예로 2012년 시즌 후 심창민은 연봉 협상 전 전년도에는 재활 때문에 최저연봉 2400만원을 받았다가 올해는 1군에 올라왔으니 5000만원을 받자고 생각했었는데, 협상 과정에서 프런트가 처음부터 "내년 연봉은 5500만원으로 하자."라 말해 당황한 나머지 "6000만원 주세요."라고 말실수를 했다가 프런트가 '''"그래."'''라고 답해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밖에 롯데 시절 매년 연봉 협상에 프런트와 대립각을 세웠던 신명철은 삼성 이적 후 늘 그랬듯이 연봉 협상 때 연봉 고과와 관련된 자료를 잔뜩 준비해 갔으나, 본인이 예상한 금액보다 구단측 제시 금액이 더 높아 군말 없이 바로 계약을 체결했다는 일화도 있다.[52] 이만수는 은퇴식도 없이 방출당했고, 김시진과 장효조는 선수협 파동으로 롯데로 트레이드 됐다.[53] 김응룡 감독은 구단 측에서 별로 불러오고 싶지 않아 했던 '''양준혁'''을 다시 삼성으로 불러들이는 데 큰 공을 세웠다.[54] 예외야 있겠지만 대부분의 삼성 팬들은 김응룡 감독이 처음 삼성에 부임했을 때는 크게 반발했지만 첫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에는 그러한 여론은 수그러들었고 선동열 감독과는 다르게 싫어하지 않는다. 일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던 2002년 한국시리즈의 이미지가 워낙 좋고 이후에도 부임하고 있는 동안 포스트시즌은 꾸준히 진출한 데다 팀 정체성을 딱히 바꾼 것도 아니라 삼성 팬들의 김응룡 감독에 대한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 또한 그가 공들이거나 그의 임기 중에 데려온 많은 유망주들이 2010년대 우승에 일조했고, 감독 퇴임 후에도 6년 간이나 삼성 라이온즈 사장을 맡는 등 삼성에 대한 애정을 쏟아줬기 때문에 오히려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55] 최근의 모습으로만 보면 차우찬의 보상선수 이승현이 차우찬보다 더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56] 특히 '''타격의 달인 장효조, 헐크 이만수, 특급 에이스 김시진''' 등 삼성 구단 초창기 역사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세 명은 모두 삼성 소속으로 은퇴식을 치르지 못했다. 장효조김시진은 선수 말년에 쫓겨나듯 아랫 동네 팀으로 트레이드됐고 이만수는 구단 내에서 가장 큰 팬덤을 보유한 슈퍼스타였음에도 노쇠했다는 이유로 구단으로부터 방출당해 삼성 구단과 좋지 않게 결별했다. 2002년 이전까지 우승에만 목을 맸던 삼성 구단이 레전드 스타들을 얼마나 홀대했는가를 알 수 있는 부분.[57] 현역으로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연도만 기록.[58] 2000시즌 개막전이자 SK 와이번스의 창단 첫 경기[59] 삼성 트레이닝 센터의 경우에는 삼성스포츠단 뿐 아니라 삼성에서 후원하는 기타 스포츠 종목의 선수들도 이 곳에서 훈련과 재활을 한다. 국내에서는 가장 체계적인 최첨단 훈련 시설을 갖췄다고 평가받는다.[60] 엄밀히 말하면 배영섭은 지명 후 부상으로 한 시즌을 날렸고 최형우는 경찰청 입대 후 방출당하고 제대 후 재영입한 케이스라 삼성 2군에서 성장한 경우라고 보기는 힘들다.[61] 사실 KBO에서도 현재 뛰어난 우타거포는 많이 희귀한 편이다. 리그 정상급 우타거포는 박병호최정정도다.[62] '05 백준영, '06 김효남, '07 김동명 등 1차 지명자들이 모두 성장에 실패했다. 많은 기대를 모았던 '08 우동균은 기대에 못미쳤고 '09 김상수가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로서 제 몫을 해주고 있다. '10~'13 드래프트에는 1차지명이 폐지됐다가 '14년 드래프트부터 부활했다. '14 이수민도 크지 못했고, '15 김영한은 대구-경북팜이 아닌 속초시의 설악고 선수였다.[63] 비단 경주고 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고교야구부에 대한 학교 차원의 지원이 점점 줄어 가면서, 이에 대구·경북 중학야구 유망주들 중 몇몇 선수는 지원이 후한 타 지역 고교로 진학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삼성 리틀야구단 출신임에도 천안북일고로 진학한 김인태가 있다.[64] 이 둘은 성적만 놓고보면 성공작이긴 하다. 특히 베이커는 역대 삼성 외국인 투수 중 최다 승수를 보유하고 있다.[65] 현재는 이승엽 야구장으로 명칭을 바꾸었다.[66] 위 사진에서 김효남이 빠졌다. 83년생인 김효남은 2012년 12월에 LG트윈스에서 손주인과 트레이드 되었으며, 손주인 또한 삼성의 83년생 라인이었이다. [67] 당시 팀 주장, 야수조 조장[68] 당시 투수조 조장[69] 이동걸은 당시에는 1군에서 존재감은 없었지만 1983년생 선수들만 모인 것이라 같이 찍었다. 묘하게도 혼자만 다른 선수들을 보면서 동갑내기를 부러워하는 듯한 구도가 됐다.[70] 양력생일은 1984년 1월이다.[71] 2011년 9월 11일 LG 트윈스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KBO 구단 중 최초로 통산 2000승을 달성했다,그리고 2018년 7월 30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KBO 구단 중 최초로 '''통산 2500승'''을 달성했다. 2020년 6월 21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여 '''통산 2600승'''을 달성하여 기록을 이어나가고 있다.[72] 2003년 롯데 자이언츠 전 18승 1패. 그래서 롯까들은 꼴리건에게 맞아 죽기 딱 좋은 시나리오로 마산 구장에서 롯데가 졌거나 홈런 맞았을 때, 상대가 삼성인 경우를 꼽았는데 꽤 많은 공감을 얻었다. 단, 특정 팀 상대 최고 승률은 1982년OB 베어스삼미 슈퍼스타즈 상대로 전승을 해서 10할의 승률을 찍었으나, 당시엔 팀간 16경기씩 했다.[73] 2017년까지는 단일 시즌 팀 홈런 1위(2003년 홈런 213개.)까지 갖고 있었지만 2017년에 SK 와이번스가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워서 무려 234개의 홈런을 터뜨리고 단일 시즌 팀 홈런 1위 기록을 경신하면서 2위로 밀려나게 됐다.[74] 17회로 리그 최다. 프로야구가 2016년 기준 출범 35년이니까 '''2년에 1번 꼴로 한국시리즈에 오른 셈이다.'''[75] 실제로 대구와 경북 지방의 '야구팬은 아니지만 굳이 응원하라면 고향 팀인 삼성을 응원하는 사람' 중에서는 매년 10월 말에 공중파에서 삼성 경기를 중계하니까 원래 야구는 10월 말까지 하는 스포츠라고 아는 사람이 굉장히 많을 정도였다.[76] 2위는 두산 베어스의 7회.[77] 코시 기준으로만 따져도 7회로 역시 2위다.[78] 당시 삼성 구단에서도 85년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을 제대로된 우승으로 여기지 않아 선수단에 대한 포상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계속된 채찍질이 2002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전까지 지나친 부담감으로 구단을 짓누르게 되었다. 물론 이후 2005년 우승 당시 사용한 V3란 구호에서 알 수 있듯 삼성 구단에서도 85년 통합 우승을 정식 우승의 역사로 여기고 있다.[79]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이 한국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면서 몇몇 분탕꾼들이 V7 대신 V6(+1)이라는 문구로 85년 통합 우승을 평가절하 하지만 KBO에서는 정식 우승으로 인정하므로 V7이 맞다. 몇몇 언론들이 이런 기사들로 오보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80] 보통 최고의 한국시리즈로는 최동원의 1984년, 역전 백투백 2002년, 수중 혈투 2004년을 꼽는다. 참고로 3시리즈 모두 삼성이 출전.[81] 1985년 전·후기 통합 우승이 있긴 했지만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82] 개막전과 한국 시리즈 만루 홈런을 모두, 그것도 이선희라는 투수가 허용하였다.[83] 이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을 깬 감독이 2009년 당시 선동열 감독. 별 의미없는 계산이지만 2009년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지 않았으면 2015시즌까지 총 19시즌 연속이 된다.[84] 물론 와일드 카드 제도가 생기기 전 KBO에서 유일한 사례. 반대로 1995년에는 해태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4위에 올랐지만 3위인 롯데 자이언츠와 4.5게임차로, 4위와 3위의 승차가 3.5게임 이상 벌어지면 준플레이 오프를 하지 않는다는 당시 KBO 규정에 따라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래서 1995년 포스트시즌은 3팀으로 치러졌으며 단일 리그(1989~1998, 2001~) 기준으로는 이 또한 KBO에서 유일한 사례.[85] 포스트 시즌 최장 진출 기록이 얼마나 어려운 지는 2000년대 후반에 강호로 도약한 SK 와이번스가 2007~2012년 6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과 동시에 한국시리즈 최장 연속 진출까지 기록하고 있었으나 2013년에 귀신같이 몰락하면서 포스트시즌 진출이 좌절된 사례와, 암흑기를 벗어나 2008년부터 2012년까지 포스트시즌 단골이 된 롯데 자이언츠도 5년 연속이 전부라는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물론 롯데 자체적으로는 최다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이지만, 대신 1999년 이후로 한국시리즈 진출은 신생팀 kt wiz를 제외하고 가장 오래 진출을 못하고 있다.[86] 1993~1998년 시즌의 경우 3위와 4위 승차가 3.5경기 이상이면 4위는 탈락하고 3위가 2위팀과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 중 1995년은 3위인 롯데와 4위인 해태가 4.5게임의 승차였기 때문에 해태는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면서 1995년의 포스트시즌은 OB, LG, 롯데 이렇게 3개 팀만이 참가하게 되었다.[87] 그러니까 지금 와서 당시 성적 보고 그때가 암흑기였구나 하는 팬들 말고 진짜 그 당시에 삼성 야구를 본 삼성 팬들.[88] 양 팀이 수원 삼성 블루윙즈에서 "수원"과 "삼성"에 대응한다.[89] 2000년 초 새천년민주당의 인재 영입 때 입당해 16대 총선에서 수원 팔달 선거구에 출마, 남경필과 겨뤘으나 낙선한 뒤 곧바로 정계에서 은퇴했다.[90] 구단 사장직에서 물러난 뒤 대한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했다.[91] 성균관대학교 이사 겸임.[92] 중학생이던 1957년에 동인천중을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기록한 바 있다. 한국야구사에 기록된 최초의 퍼펙트 게임.[93] 선수 시절에는 국가대표도 했었지만 은퇴 후 한동안 야구계에서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부단장으로 선임됐다. 게다가 부산 출신이라 대구·경북 연고인 삼성과는 인연이 없었다. 그런 김삼용이 부단장이 된 건 이건희 회장과 친분이 있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추천했기 때문(김삼용과 천신일은 중, 고교 동문이다.). 시즌 초반부터 저조한 팀 성적을 빌미로 서영무 감독의 작전권을 빼앗아 이충남 조감독에게 이양하는 등 잡음만 일으키다 결국 잘렸다.[94] 1984년 중앙일보로 돌아갔다가 1985년 빙그레 이글스의 초대 단장을 맡았다.[95] 한국전력공사 야구단에서 18년간 감독을 했으며 해설가로도 유명했던 김계현의 아들.[96] 삼성 라이온즈의 초창기 프런트 중 한 명으로, 선수단 매니저로 프런트 활동을 시작했다.[97] 2006년 신설됐는데, 송삼봉 부단장이 단장으로 승진한 후 후임 부단장은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98] 삼성 입사 후 처음 발령받은 곳이 삼성 라이온즈였다.[99] 공식적으로는 감독 대행이었지만 삼성 구단 홈페이지의 역대 감독란에서는 정식 감독으로 인정하고 있다.[100] 감독대행 성적 포함[101] 장효조 감독대행 성적 포함[102] 사실 이승엽을 발견한 건 우용득 감독이었고, 그런 이승엽을 최정상급 타자로 발전시킨 것도 박흥식 코치와의 합작품.[103] 이때 이승엽-정경배-김태균-김한수의 내야 라인은 당시 최강급으로 평가 받았다.[104]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백인천의 커리어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백인천의 주 포지션은 외야수(중견수)다. 포수로 뛴 시기는 고등학교 때와 실업 야구 농협 시절, 그리고 도에이 플라이어즈 입단 초창기 때였다.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한 이후에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외야수로 활약했다.[105] 외국인 선수 한 명만 잘 뽑아도 팀 순위가 두세 계단씩 오르내릴 만큼 규모가 작은 한국 야구계에서 막강한 자금력으로 자기 팀의 주축 선수를 빼가는 삼성이 다른 팀 팬들의 입장에서 곱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106] 사실 이만수의 팬들은 대부분 4~50대의 아저씨들이 많고 신세대 삼성 팬들은 이만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은 없다. 오히려 2012년 이후 SK에서의 삽질 때문에 이만수를 꺼리는 삼성 팬들이 늘기도 했다.[107] 2011 시즌 삼성의 1루수는 채태인, 조영훈, 모상기 정도인데 셋의 평균 타율은 2할 2푼 정도, 그들의 홈런 개수를 모두 더한 것이 2011 시즌 일본 퍼시픽 리그의 이승엽의 홈런 개수와 같을 정도로 막장이었다.[108] 소위 '믿음의 야구'라 하는데, 5회 정도면 선발을 내려 버리는 선 감독과 달리 선발을 최대한 믿고 길게 쓰는 투수 운용으로 인해 불펜의 과부하를 최대한 방지하고 선발들의 책임감을 강화시켜 2011 시즌 삼성의 선발, 불펜의 성적을 모두 크게 향상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109] 일부 팬들은 종신감독 시켜야 한다고까지 했다.[110] 당시 규정상 전후기 모두 1위 차지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통합 우승'''이었다. 준우승은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한 팀들 중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롯데 자이언츠.[111] 그러나 1985년과는 달리 통합 우승은 하지 못했고 2위팀간 플레이오프를 해서 이긴 팀과 한국시리즈에서 대결해야 했다.[112] 신생 구단인 NC 다이노스가 창단 첫 시즌인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최하위를 기록하지 않았으나 그 NC마저 2018년 시즌 최하위를 기록하게 되면서 삼성이 유일한 정규시즌 최하위 미기록 구단으로 남게 되었다.[113] 삼성 라이온즈 외에 현대 유니콘스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포스트시즌 대결 전적이 있었지만 현대는 2007년 팀이 해체되었다.[114] 이외에 KIA 타이거즈두산 베어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도 현대 유니콘스와 대결한 역사가 있으나, 쌍방울 레이더스와 맞붙은 적이 없다.[115] 당시 야구 국가대표의 70% 이상이 대구, 경북 출신이었다.[116] 대구, 경북 지역 고등학교 야구부에 진학을 실패해서 타 지역 고교에 간 일이 비일비재했을 정도.[117] 이는 2011년 관중 수보다 무려 10만 명(20%)이나 많은 수치이다.[118] 그리고 그 10,000석조차 2010년대에는 9,200석으로 줄어들었다.[119] 과거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이-마-양으로 대표되는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했는데, 선동열식 야구는 말 그대로 정반대인 만큼 기존 팬들의 반감을 샀고, 재미있는 야구라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에 신규 팬 유입도 적었다. 거기다 이승엽이 요미우리로 가면서 더더욱 심해졌었다.[120] 이들은 1980-90년대에 삼성 골수팬들을 피눈물을 흘리게 했던 장본인들이고, 그들이 삼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당연히 좋아할 래야 좋아할 수 없었다. 거기다 이승엽이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정점을 찍었는데 요미우리 경기 시청률이 훨씬 높았다.[121] 그래도 여전히 아저씨풍이 10개 구단들 중 가장 강력하다.[122] 군인 팬들도 있는데, 공군에서도 제11전투비행단, 공군방공포병학교에서 많이 보러 간다. 부대에서도 야구 이야기 하면 삼성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편.[123] 삼성 라이온즈는 전체적으로 봐도 남성팬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그래서 삼성 관중측을 비추면 비교적 시꺼먼 남정네가 득시글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관중수입의 절대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왕조시절에는 아재팬들로만으로도 충분히 경기장을 쉽게 채웠다.[124] 구자욱이 그나마 나이가 많은 축에 들지만 93년생이다. 마무리 투수 최충연은 97년생이고, 양창섭은 99년생.[125] 심지어 마케팅팀장의 팬 무시 등으로 프런트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그 내용은 해당문서 참조. 사실 이사건도 팀성적이 개판이라서 일어난거다. 왕조시절 성적이었으면 흐지부지 되었을것이다. 기본적으로 아재팬들은 성적이 장땡이기 때문이다.[126] 대표적으로 주말 경기 시작 전 그라운드를 개방하고 어린이와 부모가 캐치볼을 할 수 있는 그라운드 캐치볼 행사.[127] 특히 구매력이 센 여성팬층 이 늘었다. 반면 올드 팬들은 이런 흐름 속에서 자신들이 소외당한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성적하락으로 관중수입은 꼬라박고 있다. '''가장 강력한 꼴찌후보'''로 분류될 2020 시즌에 바닥칠것으로 예상된다.[128] 타지역 출신 팬들의 경우 팬서비스로는 톱을 달리는 SK식 서비스도 싫어한다. KBO 리그 문서의 팀명에 지역명이 없는 이유에서 보듯 워낙에 지역을 강조 일변도이다 보니 심리적 거리감이 드는지라.[129] 당장 2018~2021 시즌 팀 슬로건도 "NEW LIONS!"이다.[130] 김성근 시절엔 적어도 가을야구는 갔다.[131] 한국경제 고도성장기시절때 특히 정치계 실세들 태반이 대구경북출신들이다.[132] 국회의원들 중에 삼성팬이 상당히 많다. 표창원, 조응천, 추미애, 이종명, 권칠승, 밑에 나오는 유승민, 홍의락. 그외에도 더 있다.[133] 선수 개인 인스타그램에 가보면 삼성 유니폼을 입고 대구 시민 야구장대구 삼성 라이온즈 파크에서 찍은 사진들이 있다.[134] 본인의 페이스북에 푸른색 원정 김상수 유니폼을 입은 사진을 올리면서 "김상수 유니폼 개시가 새 컬링 유니폼 개시 순간보다 더 설렌다"고(...) 삼밍아웃을 해버렸다.[135] 이후 이승엽의 은퇴식에서도 사회를 맡았었다.[136] 그런데 2017년 9월 5일 한화 이글스의 홈 경기에 초청되어 신진식 감독이 시구를 맡았고 박철우 선수가 시타를 맡았는데, 신진식 감독은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었던 반면 박철우 선수는 삼성화재 유니폼을 입었다(...) 소속팀 삼성화재가 대전 연고팀인 만큼 대전 연고팀끼리의 유대관계 강화를 위해 이뤄진 시구라서 그랬다. 영상[137] 유담도 삼성팬이다.[138] 사실 원래 지역구는 옆 지역구인 수성구 을인데 21대 총선 때 옆 지역구인 수성구 갑으로 옮겨 당선되었다.[139] 영동 지역(강릉시)만. 영동 지역(강릉시-강릉고등학교,속초시-설악고등학교)은 지역 고교 팀을 대상으로 연고 구단 및 1차 지명을 할 권한을 갖고 있다. 영서지역은 한화 이글스가 담당한다.[140] 삼성전자 제품에 새겨지는 삼성 로고 폰트와 라이온즈 CI에 삽입된 SAMSUNG 폰트를 보면 확실히 다르다.[141] 전승준의 경우 2003년 SK 와이번스도 기록한 바 있다. 반면 전패준은 1987년 삼성이 기록한 게 유일하다.[142] 1999년~2000년에는 김재걸이 중간에 군 복무를 하면서 빠졌다.[143] 김한수는 서울에서 태어나 광영고를 졸업, 김태균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고를 졸업했다.[144] 당시 삼성은 포지션에 상관없이 장타력이 좋은 타자이면 무조건 영입한 뒤 아무 포지션에나 때려박던 케이스가 있었고, 1루수 자리에는 이미 이승엽이 있었기에 저 중 하나는 무조건 좌익수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145] 그도 그럴 것이 양준혁의 데뷔 당시 포지션은 1루수였다. 이승엽이 데뷔한 후에 외야수로 옮겼다가 이승엽이 일본으로 진출하며 다시 1루수도 돌아온 것.[146] 결국 삼성과 계약 기간이 1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잔여 연봉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상호 합의 하에 자유계약선수로 풀렸으며 고향팀인 SK로 이적해 말년을 보내다 은퇴한다.[147] 두 선수 모두 평소에 두 자릿수 홈런도 쳐 보지 못한 선수였으나 2009년 둘 다 20-20 클럽에 가입하며 2008년까지 본인들이 쳤던 홈런 개수를 이 한시즌에 모두 경신해버렸다.[148] 윤성환은 짝수해-장원삼은 홀수해 징크스가 있다.[149] LG에 남은 현역은 이동현박용택이 있다. 사족으로 박한이와 박용택은 등번호가 33번으로 같다.[150] 2001년 한국 시리즈 4차전에서, 삼성은 두산 베어스에게 3회말에 발비노 갈베스, 김진웅, 박동희 가 줄줄이 두들겨 맞으면서 무려 12점을 내줬다.[151] 단, 이건 삼성이 기록한 게 아니고 상대팀인 넥센 히어로즈(현재 키움 히어로즈)의 기록. 즉 삼성 타자가 사사구로 출루한 게 11번이라는 뜻. 이때의 B성을 아는 사람들은 여기서도 B성을 떠올렸다 카더라.[152] 현재 올드 유니폼 데이를 가장 많이 하는 롯데 자이언츠를 비롯하여 두산으로 간판 바꾼 두산 베어스도 올드 유니폼 행사를 자주 하고 있고, 그리고 여태껏 해태의 무게에 짓눌리던 KIA 타이거즈도 최근에 한 차례 열었던 바 있다. 어른의 사정에 의해 올드 유니폼 데이 따위는 꿈도 못 꾸는 한화 이글스조차 2012년 들어 올드 유니폼 데이를 열었다. 그런데 여태껏 한번도 모기업이 바뀐 적도 없고 어른의 사정 따위는 없는 삼성이 왜 올드 유니폼 데이를 열지 않는 것인지는 의문. 올드 팬들을 생각해서라도 한번쯤은 더 해도 되지 않을까?[153] 이 역사의 종결자는 2005~2006 시즌 현대 유니콘스 소속이었던 미키 캘러웨이가 있다. 2005년 대 삼성전 4승 0패 방어율 1.73/06년 대 삼성전 3승 0패 방어율 1.19. 삼성을 상대로 단 한번도 진적이 없으며 이 시절을 기억하는 삼성 팬들은 캘러웨이를 금지어 취급할 정도다. 전 두산 베어스, kt wiz 소속 더스틴 니퍼트도 삼성 상대로 극강의 모습을 보여 팬들이 두려움을 넘어서 경외의 감정을 가질 때도 있었다. 그나마 니퍼트는 한국시리즈에서 이겨 보기라도 했지만 삼성 공식 페이스북에서 박해민 삼행시로 '해로운 미국인 니퍼트'가 선발되는 등 드립소재로도 많이 써먹는 편.[154] 이게 삼성의 전력 분석 시스템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면 일반적인 분석외에도 자신의 팀 선수에 맞춰 상대방 선수의 공략점을 분석을 하는 것의 비중이 큰데 그 때문에 맞춤데이터가 적은 선수의 경우 쉽게 공략하지 못한다는 것. 그동안의 결과를 보면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 모양[155] 물론 에이스들도 날 잡으면 털긴했다. 에이스도 사람이다.[156] 2000년부터 2013년까지 14년 동안 활동하면서 2002, 2005, 2006, 2011, 2012, 2013년까지 총 6번의 우승을 함께했다. 현재는 현역에서 은퇴하여 치어리더 팀장으로 있다.[157] 실제로 각 구단에서 응원단은 외부 이벤트기업과 계약하여 SSAT는 드립으로 봐도 된다.[158] 현재는 V-리그 여자배구단 화성 IBK기업은행 알토스의 장내 아나운서로 활동 중이다.[159] 한화도 2018년에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것으로 바꿨으나 주황색도 엄연한 홈 유니폼이다.[160] 최근에는 타 대학으로 진학하는 사례도 많아졌다. 그 예가 조무근.[161] 서울 토박이로 초, 중, 고, 대학교를 서울에서 마쳤다.[162] 의외로 이 계보는 90년대 해외파 선수로 삼성 역사상 당당히 흑역사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최창양으로부터 시작한다. 최창양은 필라델피아 산하 마이너에서 선수생활을 했었다.[163] 김상수가 지속된 혹사를 견디지 못하고 부상으로 드러누웠다.[164] 그러나 2017년 이원석을 저렴한 가격에 잡고 저비용 고효율 FA라는 성과를 보여주기도 했다.[165] 삼성 오자마자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투수를 접고 타자를 시작했다.[166] 그 제물이 바로 삼성이었다.[167] 이 역시 삼성.[168] 이를 이룬곳이 바로 부산이었다.[169] 사실 구단 자체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가 200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계기로 구단 역사에 포함시킨것.[170] 이건 KIA도 마찬가지라 대구에서 삼성을 꺾고 우승하지 않는 이상 1루에서 뛰어나올 일은 더 이상 없다.[171] 특별히 잘했던 호남 출신 선수들은 없었다. 유망주라 데려왔더니 망한 경우가 더 많았을 정도.[172] 다만 자진사퇴가 공식적으로 수리된 것은 5월 10일이다. 하지만 그 기간동안 조계현 수석코치가 사실상 감독대행 역할을 했으니 삼성이 보낸게 맞다.[173] 유일하게 삼성을 이기고 감독이 교체된 경우[예시] 2002년 KS 패배 이후 LG 김성근 감독 경질, 2011년 8월 19일 문학 삼성전 9:0 패배 이후 SK 김성근 감독 경질, 2013년 KS 패배 이후 두산 김진욱 감독 경질, 2014년 4월 22일 대구 삼성전 1:8 패배 이후 LG 김기태 감독 사퇴[172], 2016년 문학 삼성과의 최종전 이후 SK 김용희 감독 재계약 불발[173], 2017년 5월 21일 대전 삼성전 8:7 패배 이후 한화 김성근 감독 경질, 2018년 6월 3일 마산 삼성전 8:7 패배 이후 NC 김경문 감독 사퇴[174]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람도 선수 시절 해태-LG로 트레이드 당하는 등 온갖 산전수전을 겪었고 은퇴하는 모습도 당시 감독 때문에 사실상 반강제 은퇴를 당한 거나 마찬가지라 그렇게 좋은 결말을 맺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다만 아예 은퇴식조차 안 열어준 이만수와는 달리 은퇴식 정도는 열어줘서 망정이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