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은행 야구단
1. 소개
1962년 창단되었다. 1964년 다른 팀들이 해체되자 일시적으로 해체되었다. 첫번째 해체 사유가 좀 황당한데, 한일은행장 김진흥이 고교시절 후배인 김충[1] 이라는 선수를 후원해줬는데, 한일은행에서 촉탁행원으로 있으면서 3년간 월급을 받으며 야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김충이 고교졸업후 선택한 야구단이 한일은행 야구단이 아니라 상업은행 야구단으로 결정되자, 김진흥 행장이 빡돌아서 1964년에 해체해 버린것(...)
첫번째 해체이후 잠잠하다 1966년 서동준[2] 이라는 투수가 김응룡을 한일은행장인 김진흥에게 소개해줬고, 김진흥이 "네가 여기오면 다시 야구단 만들어주마"라고 이야기해서 창단이 확정되었고(...) 1965년, 크라운맥주가 해체되자 그 선수들을 영입해 재창단했다. [3]
1978년, 현대건설에서 제일은행 야구단과 한일은행 야구단을 인수하려고 했고당시기사 실제로 현대건설 야구단의 선수단이 꾸려졌으나 한일은행 야구단에 비해 제일은행 야구단 선수들의 영입이 적자 제일은행 야구단의 반발로 결국 현대건설 창단 2개월 만에 원상 복귀 되었다.
참고로 현대건설 야구단은 실업야구가 아닌 세미프로팀을 준비하고 있었다.1977년 가을에 현대에서 나를 은밀하게 부르더니 우리팀과 제일은행을 합쳐 최강팀을 만들 수 있냐고 제의하길래 할 수 있다고 했지. 프로야구 창설을 목표로 한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찬성했어. 그래서 제일은행측과도 측과도 만나 협의했더니 좋다는 답변을 받아 니카라과 슈퍼월드컵대회에 갔다와서 바로 발표할 계획이었지. 현대에서 내가 니카라과에 간다고 하니까 두둑히 여비도 챙겨주더라고.(중략) 니카라과대회에서 우리가 세계대회 처음으로 정상에 올라 좋은 기분으로 귀국했는데 글쎄 틀어지기 시작하는 거야. 제일은행 선수들 중 김우열 등 괜찮은 선수들만 받아들여야 할 처지였는데 제일은행쪽에서 선수단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반발하고 그쪽 노조에서도 반대해 결국 파탄이 났어. 그 바람에 한일은행팀도 해체했다가 두 달만에 회생되는 난리가 난 적이 있었지. 현대가 야구팀을 만들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한동안 나도 난감해 혼났어." - 김응룡 감독의 인터뷰 中
김응룡이 1971년부터 1981년까지 감독으로 재임했던 팀이기도 하다. 감독직이었지만 실업야구 특성상 오전에는 회사 업무를 했는데 이때 돈세는 업무 담당이라 돈세는데는 도가 텄다고 김응룡 감독이 농담삼아 이야기 하기도 했다.
2. 해체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한일은행의 허리 졸라매기에 의해 한일은행 축구단과 함께 해체가 되었다.
3. 관련 인물
- 강병철 - 3루수
- 김영덕 - 투수, 은퇴하고 감독을 지냈다.
- 김용철
- 김응용 - 1루수, 은퇴하고 감독을 지냈다.
- 우용득 - 포수
- 유승안
- 이광근
- 이성득 - 2루수
- 임신근 - 투수, 은퇴하고 감독을 지냈다.
- 조창수
- 허구연 - 2루수
[1] 전 SK 와이번스 2군 감독. 1945년생으로, 프로야구 초기에 코치를 하기도 했었다. 현장을 떠나기 직전인 2004년에는 프로야구 병풍사건에도 연루된 적이 있으며, 그 뒤 야구계를 떠났다. 한동안, 감감 무소식이었지만, 2008년에 세상을 떠났다.[2] 동산고의 청룡기 2연패 당시 에이스로 활약했던 투수로 졸업후 한일은행 야구단에 입단했다. 해군에서 군복무를 마친후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코치생활을 하다 은퇴하고 한일은행 은행원으로써 일했다. 이후 지점장을 거쳐 꽤 높은 자리까지 올라가 금융업에서도 나름 성공했다.[3] 이 모든 이야기는 김응룡 회고록을 참조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