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백인천의 감독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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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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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90'''



[image] '''1959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s-2 MVP'''


'''1975 NPB 퍼시픽리그 타격왕'''[72]


'''1982 KBO 리그 타격왕'''


'''1982 KBO 리그 출루율왕'''

보유 기록
단일 시즌 최고 타율
0.412[73][74]

'''MBC 청룡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1982~1983)'''

최정기(1984~1986)
<color=#373a3c> '''삼미 슈퍼스타즈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1983~1984)'''

팀 해체
'''LG 트윈스 등번호 2번'''
팀 창단

'''백인천(1990~1991)'''

김동수(1992~199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80번'''
양일환(1992~1995)

'''백인천(1996)'''

오오시오 신이치(2006~2009)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7번'''
이상훈(1990~1995)

'''백인천(1997)'''

장호연(1998~2000)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90번'''
김용희(1994~1998)

'''백인천(2002)'''

이명진(2013)
<color=#373a3c> '''롯데 자이언츠''' '''등번호 71번'''
손민한(1997)

'''백인천(2002~2003)'''

이철성(2007~2009)


[image]
'''이름'''
백인천(白仁天)[1]
'''생년월일'''
1942년 9월 27일[2] (81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중화민국 난징시[3]
'''학력'''
경동고등학교
'''종교'''
불교개신교(예장통합)[4]
'''포지션'''
포수, 외야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62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NPB)
1982년 MBC 청룡 창단 멤버 겸 감독(KBO)
'''소속팀'''
농협 (1961)
도에이 플라이어즈/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5]
(1962~1974)
다이헤이요클럽 라이온즈 (1975~1976)
롯데 오리온스 (1977~1980)
긴테쓰 버팔로즈 (1981)
'''MBC 청룡 (1982)'''
삼미 슈퍼스타즈 (1983~1984)
'''지도자'''
MBC 청룡 감독 (1982~1983)
삼미 슈퍼스타즈 플레잉코치 (1983~1984)
'''LG 트윈스 감독 (1990~1991)'''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6~1997)
연세대학교 타격 인스트럭터 (1998)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1999)
삼성 라이온즈 타격 인스트럭터 (2000)
한화 이글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1)
SK 와이번스 타격 인스트럭터 (2002)
롯데 자이언츠 감독 (2002~2003)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2.2. 일본 선수 시절
2.3. 한국 선수 시절
2.4. 연도별 주요 성적
3. 감독 경력
3.1. LG 트윈스 -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2.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3.3. 역대 감독 성적
4. NPB 해설자 시절
5. 그 이후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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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직 야구 선수이자 야구 감독이자,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선수 겸 감독을 맡은 인물. 오랜 기간 SBS Sports일본프로야구 담당 해설자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포수외야수.
삼청태 팬들의 평가가 없는 건 활동 기간도 길지 않았고 간통죄로 중도 아웃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현대 유니콘스로 인한 팬덤 와해로 인해 그냥 잊혀졌다.
지도자 시절의 평가는 LG와 삼성에겐 '''애증의 대상'''이요[6], 롯데 팬들에게 있어서는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다. 자세한 이유들은 아래에 정확히 후술하겠다. 인천 팬들에게도 삼미 시절에 터진 간통 사건 때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을 듯.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대한민국 야구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프로야구 출범 전에 일본에서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것 때문에 일부 신규 유입 야구팬들은 재일교포로 잘못 알고 있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경동고 시절 야구선수로 뛰는 와중에 스피드 스케이트 선수로도 활동했고, 1961년 500m 고등부 대회를 싹쓸이한 경력이 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보유한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난 아들은 쇼트트랙 스케이트 선수로 키우려 한 적도 있었다. 한편으로 야구선수로서의 능력은 더욱 뛰어나서 학창시절 "원자탄 투수" 이재환과 함께 배터리를 이루며 경동고를 당대 고교야구 최강으로 이끈 주역이었으며, 특히 1960년 한해 경동고의 성적은 무려 '''32승 2무'''로 그야말로 초고교급 야구팀이었고 백인천이야 말로 그 경동고의 핵심 선수였던 것이다.
[image]
1962년의 백인천.
1959년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했고, 1960년 6월에는 서울운동장 야구장이 개장한 이래 고등학생으로는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한 적도 있고, 그해 10월 일본 원정경기 때 메이지 진구 구장에서도 홈런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고교생이 진구 구장에서 기록한 2번째 홈런이었다. 또한 1962년 1월, 타이완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선수권 대회 최종일 필리핀과의 경기에서도 비바람을 뚫고 타이베이 송산구장 개장 이래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홈런을 날리기도 했다(…).
경동고 졸업 후 농협 야구단에서 활약했으며,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뛰어난 활약으로 몇 번이나 일본 프로야구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지만 당시 강하게 남아있는 반일감정 등의 이유로 번번히 무산되었다. 그러던 와중에 타이완 아시아 야구선수권 준우승을 치하하기 위해 대한체육회에서 개최한 환영회에 선수단이 참석했는데 당시 대한체육회장이자 박정희 군사정권의 실세이던 이주일 준장이 연회 도중 백인천에게 야구하면서 애로사항이 없느냐라고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본으로 가고 싶은데 좀 도와주십쇼!!'''"라고 당돌하게 답했다. 사실 백인천은 선수권을 마치고 타이완을 떠나 일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중에, 한 재일교포 야구인의 주선으로 도에이 플라이어즈의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과 구단 관계자를 만나 가계약을 맺은 상태였다. 이에 당시 야구협회장이 펄펄 뛰며 반대하자 이 준장은 오히려 "이런 젊고 훌륭한 선수가 해외로 나가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면서 신문에 여론조사까지 의뢰했고, 결과는 80%의 국민이 백인천의 일본 진출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왔다. 결국 백인천은 일본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고 나중에 돌아와 병역의무를 완수한다는 조건 하에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결론적으로는 제대로 안했다. 당시 병역비리 사건이 크게 터져서 잠시 귀국한 적이 있었지만, 사태가 수습되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출국, '''중앙정보부 소속 첩보원'''으로 일본에서 병역을 필했다(…).[7]

2.2. 일본 선수 시절


개명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일본 무대에 진출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의 유니폼에는 BAEK이 아닌 HAKU라고 적혀있었다. 그 덕에 영문으로 된 일본프로야구 관련 자료에 Jinten Haku라고 나와 있는 경우가 많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시절엔 일본에서 뛴 대한민국 선수의 이름을 다 이런 식으로 읽었었다. 애시당초 Jinten Haku가 백인천(白의 한자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을 서양식으로 성과 이름을 뒤집은 것이다. 사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도 이토 히로부미를 우리식 발음인 이등박문으로, 장제스를 장개석으로 읽는 일이 흔했다. 한자의 일본 발음을 따르지 않은 한국 선수는 선동열이 처음이다. 일본어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 한자문화권 지역 출신의 인명표기를 일본어 음독으로 표기했다. 당장 선동열보다 오래이며 1950년대 후반에 일본으로 데뷔해서 대활약 했던 일본 출생 대만 국적 선수로의 왕전즈(王貞治, 왕정치)를 오 사다하루로 불렸고 유니폼에 OH로 표기하였으며, 선동열보다 조금 더 앞서 1980년대 중반 ~ 후반에 일본으로 데뷔해서 맹활약 했던 대만 출생 대만 국적 선수로의 궈위안즈(郭源治, 곽원치), 궈타이위엔(郭泰源, 곽태원), 좡성슝(荘勝雄, 장승웅), 궈리젠푸(郭李建夫, 곽리건부), 뤼밍츠(呂明賜, 여명사) 등도 일본에서는 각각 카쿠 겐지(이후 일본 국적으로 귀화), 카쿠 타이겐, 소 카츠오(이후 일본 국적으로 귀화), 카쿠리 타테오, 로 메이시 등 일본식 음독으로 불렸으며 유니폼에도 곽(郭), 장(荘), 곽이(郭李)의 중국어 발음인 KUO, CHUANG, KUOLEE가 아니라 일본식 음독인 KAKU, SOH, KAKURI로 표기됐다.[8] 대만 출신으로서 일본에서 중국어 발음으로 선수 등록이 이루어진 것은 선동열보다 조금 뒤에 데뷔한 쉬밍제(許明傑, 허명걸)에 이르러서 였고, 유니폼에도 성인 허(許)의 일본식 한자독음인 KYO보다 중국발음인 HSU로 표기 했다.[9] 이는 한어병음방안이 아닌 웨이드식 표기이다. 즉, 이는 백인천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상훈의 경우는 별명을 반영하여 SAMSON LEE, 김태균의 경우로는 TAEKYUN으로 적혔다. 다시 말하면 동아시아권 선수 이름의 원어발음 존중 표기법의 효시가 선동열이었던 셈.
[image]
장훈과 함께. 왼쪽 롯데 유니폼이 백인천. 오른쪽 도쿄 유니폼이 장훈이다. 사진은 1977~1979년 찍은 것으로 보인다.[10]
일본프로야구에서는 1962~1974년까지 도에이 플라이어즈, 1975~1976년까지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 1977~1980년까지 롯데 오리온즈, 1981년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19년간 현역으로 뛰며 오랫동안 활약했고, 이후 한국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에 MBC 청룡에 감독 겸 선수로 입단했다.
입단 초기엔 말이 안 통하는 외국인에게는 가혹한 포지션인 포수#s-1로 플레이했는데, 항상 일본어 사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투수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63년 시즌 중반 주전 포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1군으로 올라와 미즈하라 시게루 감독 눈에 들며 주전 포수자리를 꿰차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65년 시즌 후반부터는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살리기 위해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당시 2군에서 백인천이 가끔 외야수로 뛰면서 좋은 플레이를 보이자 2군 감독이 미즈하라에게 외야수 전환을 건의했는데 처음에 미즈하라는 '''"발 빠른 포수가 어디 흔한 줄 아느냐"'''라며 일축했으나, 그 해 난카이 호크스와의 경기 도중 장훈이 부상으로 빠지자 백인천이 백업 좌익수로 교체 투입되었고 시기 적절하게 까다로운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하는 파인 플레이를 시전했다. 이는 포수로 뛰면서 분석해 두었던 당시 타석에 있던 상대방 선수의 타격 스타일과 타구 방향 등을 염두에 두고 미리 공이 떨어질 만한 위치에 이동해 있었는데 그 예측이 적중한 것이었다.
결국 미즈하라 감독도 "오늘부터 외야수를 하라."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이후 백인천은 주로 중견수로 뛰면서 타자로서의 재능을 더욱 꽃피우게 되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이유로 포수 출신 외야수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이택근이라든가, 브라이스 하퍼라든가.
백인천이 중견수를 볼 때 좌익수는 주로 절친한 선배인 장훈이 맡았는데, 백인천은 빠른 발과 넓은 수비범위, 포수를 보던 강견을 바탕으로 리그 정상급의 외야수비를 자랑한 반면, 장훈은 백인천 못지않게 발은 빨랐지만 어릴 적 입은 화상으로 불편한 오른손과 고등학교 시절 부상으로 약해진 어깨 때문에 수비는 영 자신이 없었던지라 좌중간을 향해 날아오는 타구는 으레 백인천만 바라보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백인천은 먼 거리를 헐레벌떡 뛰어와 타구를 잡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11] 그래서 어느 날 백인천은 이를 참지 못했는지(?) 웃으면서 장훈에게 "장이형, 형 연봉 중에 수비 몫은 나한테 줘요."라고 농을 걸자 장훈은 백인천을 장난스레 쥐어박으며 "임마, 너 수비연습 시켜준 건 생각 안해?"라면서 서로 껄껄댔다는 에피소드도 있다고. 참고로 백인천은 장훈과 친해서인지 장이형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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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이 츠유자키 심판을 폭행하는 장면.
한국인 선수인지라 투수에게 종종 빈볼성 공을 맞기도 하고 심판 판정에 있어 불리한 점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1970년 5월 23일 킨테츠 버팔로즈와의 시합 때 주심이었던 전직 '''권투선수 출신''' 심판 '''츠유자키 모토야'''가 존에서 한참 벗어난 투구를 스트라이크로 판정하며 백인천에게 삼진을 선고했고, 이에 발끈한 백인천이 츠유자키에게 이게 왜 삼진이냐고 버럭대자 츠유자키는 '''"심판이 삼진이라면 삼진이지 말이 많다"'''라며 조롱하는 투로 들이댔다. 이에 화가 폭발한 백인천은 츠유자키의 죽빵을 날리는 바람에 퇴장 처분을 받았고, 이 사건은 지금도 퍼시픽리그의 명장면으로 꼽힐 정도다. 이후 백인천은 츠유자키에게 폭행죄로 고소당했지만 며칠 후 서로 화해하고 소를 취하하면서 무혐의 처리되었다.
또한 자신에게 빈볼을 던진 투수는 세이프티 번트를 시도하면서 1루에 커버 플레이를 들어오는 그 투수의 발을 스파이크 날로 밟아버릴 정도로 보복은 반드시 하는 파이터 기질도 있었다. 한편으로 팀 선배인 장훈의 후광도 있었고[12] 소속된 파벌 자체가 일본프로야구계의 '''성골'''이라고 할 수 있는 미즈하라 시게루 계열이었기 때문에 한국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인간 관계에서 크게 손해본 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미즈하라가 토에이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는(1962~1967) 트레이드를 거부할 만한 힘까지 있을 정도였다.
1975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즈에 히가시다 마사요시를 상대로 트레이드로 이적하였고, 히가시오 오사무(東尾修), 도이 마사히로(土井正博), 가토 하지메(加藤初, 前 SK 와이번스 투수코치) 등과 함께 팀의 간판으로 활약하며 0.319로 타격왕을 차지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해 라이온즈는 타격왕 백인천, 홈런왕 도이 마사히로[13], 다승왕 히가시오 오사무[14]를 배출했음에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는 것.[15]
이 해의 타격왕 경쟁은 상당히 치열했는데 백인천과 타격왕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던 상대는 공교롭게도 백인천을 트레이드시킨 전 소속팀 닛폰햄 파이터즈의 오다 요시토였다.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한 앙갚음이라고 생각했는지 세이프티 번트까지 동원하면서(...) 타격왕 경쟁에서 물러나지 않았고 시즌 마지막 경기에 '''딱 규정타석을 채워서''' 5모(0.0005) 차이로 극적으로 수위타자 타이틀을 따냈다.[16] 이 타이틀 경쟁이 자신을 버린 전 소속팀에 대한 극적인 복수로 인식되어 당시 상당히 임팩트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백인천이 라이온즈에 재적한 것은 불과 2년밖에 안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팀의 응원가 '''우리들의 우상 라이온즈(僕らの憧れライオンズ)'''의 가사에 나오는 선수들 중에서 백인천이 언급될 정도이고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전신 구단인 다이헤이요 시절 스타들을 초청해 팬미팅을 가질 때 백인천도 참석했다.
1976년 오프시즌에 팀 동료 야스키 쇼지와 같이 하세가와 카즈오, 쿠라모치 아키라[17]를 상대로 트레이드 되며 롯데 오리온즈로 이적하며 1980년 시즌까지 롯데 소속으로 활약했고, 1981년 긴테쓰 버팔로즈로 이적하여 1년간 활동하고 이듬해인 1982년에 한국 프로 야구가 출범하게 되었고,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었던 그는 일본에서의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한국으로 귀국하며 무대를 옮기게 된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에 출장하여 1,831안타, 209홈런, 212도루를 기록했다. 현재 이 기록은 명구회 가입 조건인 2,000안타, 200홈런에 가장 가까운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에서 기록한 135안타를 더한다고 해도 2,000안타가 되지 않는다. 2006년 WBC 이후부터는 일본에서도 대한민국에서 세운 기록을 인정해 주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이승엽의 한일 통산 400호 홈런도 방송에서 직접 언급을 했었다.
만약 귀국하지 않았다면 2,000경기 출장은 확실히 이루었을 것이 분명한 바, 영광 대신 조국을 선택한 '''선수 백인천'''을 무조건 비난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한편, NPB에서 활동한 외국인 선수 중 알렉스 라미레즈에 이어 두 번째로 안타를 많이 친 선수이기도 하다. 참고로 여기서 '외국인' 선수란 일본 기준으로 성장기 및 학창 시절 및 학교 선수생활을 외국에서 보낸 선수를 말한다. 국적만 외국이고 실제 성장 및 학창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장훈이나 오 사다하루(왕정치) 같은 선수는 제외한다.[18]
참고로 일본과 대한민국 양쪽에서 수위타자를 차지한 최초의 선수이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외국 리그로 진출한 선수 중에 최초로 타이틀을 획득한 선수이기도 하다. 2012년 전까지는 유일했었지만, 2012년에 이대호가 퍼시픽리그 타점왕을 차지하면서 유일한 선수라는 타이틀은 사라졌다.
한편 화려한 선수생활에 걸맞지 않게 일본시리즈 우승은커녕 진출도 못한 콩라인이기도 했다. 신인시절이던 1962년에 토에이 플라이어즈가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긴 했으나 그 때는 2군에 있었고, 1군에 정착한 시점부터 한큐 브레이브스의 황금기가 도래하면서 한큐의 통합 3연패를 그저 부러워해야만 했다. 수정 전엔 리그 우승도 경험 못했다고 했으나 사실 퍼시픽리그가 전후기리그제로 운영하던 시절 롯데 오리온즈 소속이던 1977년 후기리그, 1980년 전기리그 우승을 경험해 본 적이 있긴 하다.
근데 문제는 플레이오프에서 팀이 깨져서 일본시리즈를 가진 못했단 거다(...).[19]

2.3. 한국 선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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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가 되어 모국으로 돌아온 백인천은 첫 경기부터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백인천은 프로 원년 개막전인 1982년 3월 27일 동대문 삼성전에 5번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해 6회말 추격의 중월 솔로 홈런을 치면서 팀 승리의 기반을 마련했고 연장 10회말 고의사구로 걸어나간 후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 때 홈을 밟았다. 경기 종료 후 그는 방송 인터뷰 때 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당했던 멸시와 서러움이 생각났는지 연신 눈물을 흘렸다. 이때 극적인 역전승에 감격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해 눈물의 인터뷰를 하는 백인천을 둘러싸고 티비에 출연했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혀 프로야구 역대 레전드 인터뷰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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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원년 시즌에 '''타율 0.412'''('''72경기'''[20] 250타수 103안타[21])를 기록하게 되는데, 이 타율은 당연히 한국프로야구 단일시즌 최고타율이자 KBO 역사상 유일무이의 4할 타자이다. 일본프로야구에서도 4할을 친 선수는 없고 일본프로야구 최고 타율 기록은 1986년 한신 타이거즈랜디 바스가 기록한 0.389이다. 미국에서도 1941년에 테드 윌리엄스가 4할을 친 이후로는 4할타자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장타율 또한 '''0.740'''로서 2015년 에릭 테임즈에 의해 깨지기 전까지 33년 동안 1위를 유지하였다. 원년에는 타자가 본업인 해태 김성한이 투수로 나와서 10승 방어율 2점대를 기록할 정도로 원년은 아직 실업야구의 티를 벗지 못했던 시절이고, OB의 에이스 박철순이 224이닝 을 던질 정도로 선수층이 빈약했기에 나이 들고 한국에 와서도 4할이 가능했던 것. 다만 당시 에이스 투수가 완투는 기본에 선발이 아닌 경기에도 마구잡이로 등판했기 때문에 에이스를 피하는건 어려웠다. 박철순도 그해에 팀 이닝의 30%를 던졌다. 출루율 역시 '''0.502'''로[22] 2001년 펠릭스 호세가 0.503으로 기록을 갈아치우기 전까지 역대 1위는 이 시즌 백인천의 몫이었다.
결과적으로 백인천의 82년 타율/출루율/장타율은 KBO 리그 한 시즌에 나오기 힘든 전설적인 수치다. 더불어 안타와 득점에서 1위, 홈런과 타점은 2위였다. 도루도 11개를 기록하면서 호타준족 이미지까지 있었다. 하지만 MVP는 OB의 박철순이 수상했다.
원년 팀당 경기수가 고작 80경기로 적었던데다 선수 겸 감독으로서 스스로 기록관리를 했기 때문에 4할타율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선 반박이 존재한다. 80경기가 적긴 했어도, 80경기 시즌이라고 딱 잘라서 KBO 리그를 볼 경우 백인천을 제외하고 4할을 치고 있었던 것은 1994년의 이종범(104경기)과 2012년의 김태균(89경기) 단 두명 뿐이다. 기록관리를 했다는 주장에 대한 김은식 기자의 반박을 보자. 그리고 백인천의 기록을 폄하하려는 사람들은 그가 상대팀의 에이스 투수가 나올 경기는 일부러 결장한 듯이 주장하지만, 백인천은 그해 한 팀이 소화하는 80경기 중 8경기에 결장했는데, 그중 5경기는 몰수게임에 따른 출장정지이므로 그가 자발적으로 빠진 경기는 3경기뿐이다. 감독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어려운 투수가 나오면 결장할 수도 있었음에도 거의 전경기 가깝게 출전했다고 봐야한다. 게다가 출장정지 받은 5경기 중엔 투수진이 붕괴된 최약체팀 삼미 슈퍼스타즈의 시리즈도 있었다. 오심이 없었거나, 몰수패 경기까지만 끌고 가지 않았어도 오히려 삼미 등을 통해 타율을 더 올릴수도 있던 상황. 본인은 4할에 대해 신경도 안썼다고 한다. 마지막 경기 때 코치가 타율이 4할이니 오늘 경기는 쉬고 다른 선수를 내보내자고 하자 백인천은 자기는 4할 신경도 안쓴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기록관리설 정리[23]
일본시절에 3할을 넘긴 시즌이 딱 3번, 장타율 5할을 넘긴 시즌도 3번, 출루율 3할5푼을 넘긴 시즌이 2번에 불과한 선수가 한국에 와서 39세에 타율 0.412를 치고 장타율 0.740을 넘겼다는 것은 분명히 KBO 리그 초창기에서나 가능한 이례적인 기록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백인천이 일본에서 그저그런 선수였다고 볼 수는 없다. 통산 타율 0.278, OPS가 0.746 통산 홈런 209개 통산 도루 212개를 기록한 그는 일본에서도 상위급 선수였다.특히 호타준족의 상징인 통산 200홈런 200도루 클럽에 가입해서 이름을 확실히 남겼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현재(2018년 3월)까지 200-200 클럽 가입자는 17명에 불과하다(그 중 이치로와 마쓰이 가즈오는 MLB에서의 기록을 합쳐야만 가입하게 된다.). 다만 일본 시절엔 단 1번도 20홈런을 넘긴 적이 없어서 파워형 선수라고 보기엔 확실히 무리고, 출루율이 통산 0.316으로 0.276의 높은 통산타율 치곤 다소 낮았는데, 이유는 통산 379사사구/471삼진 기록에서 보듯 배드볼 히터에 가까운 플레이를 보였기 때문. 실제로 일본 시절엔 40사사구/40삼진을 단 1번도 넘긴 적이 없다. 즉 선구안이 나빴다고 보긴 힘들지만 사사구를 얻어 출루하는 것보단 공을 치고 나가는 걸 선호한 컨택 위주의 선수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한국에 올 때 만 39세였으니 그의 전성기인 30대 초중반에 한국에 왔다면 아예 초토화시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리그 수준이 낮다고 해서 그의 기록을 폄하하면서 당시 그의 나이는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4할 기록을 폄하하기 위해 '만약에 리그 수준이 높았다면'이라는 전제를 하려면 '만약 그의 전성기 때 KBO 리그가 창설되었다면'이라는 전제도 이야기해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찌되었든 4할 타율의 기록은 대단한 것이어서 그가 나중에 백골퍼라는 조롱을 듣게되자 MBC팬들이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image]
여담으로 MBC 청룡 시절 종합비타민제 'Gevral T' 광고에 출연했다. 다만 우리말로 '게브랄 티'로 소개된 상품명 때문에 모델인 백인천까지 덩달아 조롱받기도 했다. 광고영상[24] 미국에선 '지브럴 티' 로 읽는데 왜 한국에서 '견공 고환(?)'을 연상시키는 요상한 한국이름을 붙였는지 의문. 하지만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되어 상품명은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되었으니 광고효과는 높았을 것이다.

선수로서는 훌륭했지만, 감독으로서는 부족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MBC 청룡 원년 감독(겸 선수)으로 취임 할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9세로 6개 구단 감독 중 가장 젊었다. 그보다 선배 야구인을 코치로 영입하기 껄끄러웠기에 구단이 그의 의중을 받아들여 영입한 코치가 동년배인 이재환유백만이었다. 특히 이재환은 경동고 시절 배터리로 호흡을 맞춘 사이였으나, 감독과 코치라는 수직 관계로 재회한 이 둘은 시즌 내내 충돌을 빚으며 팀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오죽 사이가 안좋았으면 이듬해 백인천이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하자 먼저 코치로 와 있던 이재환[25]을 2군 감독으로 내려 보낼 정도였으니[26]...게다가 일본야구 타격왕 출신 그의 능력을 과신했는지 몰라도, 두 명 밖에 없던 코치 T/O를 전부 투수코치로 채운 것은 야구를 좀 아는 사람들에겐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처사였다. 결국 MBC는 1982년 후기리그부터 타격과 수비 강화를 위해 명 2루수 출신 한동화를 코치로 영입하긴 했다. 그래서 MBC는 원년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세 명의 코치를 보유했다.
또한 당시 워낙 강렬한 성격인지라 1982년대 초창기 심판들에게도 좋지 못한 인상이었다.
1982년 8월 26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펼쳐진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4회말 도중에 선수들에게 갑자기 덕아웃으로 들어오라는 초강수를 두었다.[27] 당시 주심은 김인식만 퇴장시켰다.[28] 이때 백인천 감독은 주심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이해가 가지 않자 주심은 그라운드에 들어올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백인천 감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엔 '''KBO 몰수게임 1호''' 이후엔 5경기 출장정지와 100만원[29] 벌금을 징계를 받았다.
덧붙이자면 백인천은 현역 시절 기자들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 한국으로 일시 귀국 시 김포공항에서 벌어진 일명 '''나니(何, 뭐야)''' 사건이었는데, 당시 컨디션 난조로 1군과 2군을 오가며 심기가 불편하던 백인천에게 한 기자가 "아직도 2군에 있소?"라며 묻자 발끈한 백인천이 무심결에 '''"나니?!"'''라는 일본어로 받아치며 물의를 일으킨 것이었다. 이 건으로 백인천은 한동안 세간의 비난을 사야 했다. 그리고 MBC 감독 취임 후 원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강릉에서 전지훈련 도중, 한 사진기자가 좋은 그림을 잡는다며 위험하게 타자가 타격연습 하는 뒷쪽으로 접근하자 이를 본 백인천은 혼비백산 하며 '''"썩 꺼져버려! 사진 찍으려면 딴데서 찍어 이 자식아!!"'''라고 고함을 쳐서 그 기자를 머쓱하게 만든 적도 있다... 그나마 백인천은 야인으로 지내던 동안 성격이 유해지고 기자들의 생리도 이해하면서 1990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복귀했을 때에는 기자들과의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아무튼 백인천은 개인 사정을 이유로 이듬해인 1983년 시즌 초반에 MBC에 사의를 표명한다. 그리고 삼미 슈퍼스타즈로 이적하여 타격코치 겸 선수로 활동하다가 시즌 도중 간통죄로 인해 쇠고랑을 차면서 그 시즌을 마감하고[30] 1984년 조용히 은퇴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일본에서 결혼한 재일교포이고[31], 두 번째 부인은 간통사건의 상대방이었던 여성이다.
그렇게 백인천의 영광스러운 현역 시절은 끝났다.

2.4.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기록.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기록.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62
도에이
1군 기록 없음
1963
20
19
.158
3
0
1
0
5
0
0
0
.263
.158
1964
92
250
.252
63
12
1
6
23
25
9
8
.380
.284
1965
116
356
.267
95
14
2
14
44
43
9
11
.435
.294
1966
126
363
.262
95
13
1
4
23
42
18
12
.336
.284
1967
128
396
.280
111
17
4
10
51
43
13
15
.419
.313
1968
117
382
.296
113
13
3
15
51
52
9
9
.463
.316
1969
109
454
.291
132
17
9
12
46
68
13
13
.447
.314
1970
127
'''496'''
(2위)
.276
137
'''30'''
(1위)
2
18
64
67
28
36
.454
.325
1971
107
421
.238
100
11
4
11
38
47
17
26
.361
.283
1972
126
'''486'''
(5위)
'''.315'''
(4위)
'''153'''
(2위)
'''33'''
(1위)
3
19
80
67
20
35
.512
.362
1973
닛타쿠홈
96
291
.247
72
13
0
6
20
27
8
16
.354
.290
1974
닛폰햄
114
418
.261
109
20
1
15
42
63
24
22
.421
.310
1975
다이헤이요
102
379
'''.319'''
(1위)
121
18
2
16
53
57
13
17
'''.504'''
(3위)
.349
1976
121
469
.288
'''135'''
(5위)
17
2
17
59
54
15
23
.441
.321
1977
롯데
126
452
.281
127
11
2
16
56
50
6
30
.420
.327
1978
58
171
.257
44
7
0
3
11
19
5
7
.351
.289
1979
124
415
'''.340'''
(4위)
141
25
4
18
71
47
3
21
.549
.378
1980
76
167
.216
36
1
2
5
21
11
0
7
.335
.253
1981
긴테쓰
84
194
.227
44
11
0
4
23
19
2
14
.345
.292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2
MBC
72
250
'''.412'''
(1위)
'''103'''
(1위)
'''23'''
(1위)
1
'''19'''
(2위)
'''64'''
(2위)
'''55'''
(공동 1위)
11
45
'''.740'''
(1위)
'''.497'''
(1위)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장타율
출루율
1983
삼미
35
121
.190
23
6
1
1
17
6
1
12
.281
.261
1984
10
32
.281
9
2
0
3
10
6
1
3
.625
.343
<color=#373a3c> '''NPB 통산'''
(20시즌)
<color=#373a3c> 1969
<color=#373a3c> 6579
<color=#373a3c> .278
<color=#373a3c> 1831
<color=#373a3c> 283
<color=#373a3c> 43
<color=#373a3c>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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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801
<color=#373a3c> 212
<color=#373a3c> 322
<color=#373a3c> .430
<color=#373a3c> .316
<color=#373a3c> '''KBO 통산'''
(3시즌)
<color=#373a3c> 117
<color=#373a3c> 403
<color=#373a3c> .335
<color=#373a3c> 135
<color=#373a3c> 31
<color=#373a3c> 2
<color=#373a3c>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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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67
<color=#373a3c> 13
<color=#373a3c> 60
<color=#373a3c> .418
<color=#373a3c> .593
<color=#373a3c> '''개인 통산'''
(23시즌)
<color=#373a3c> 2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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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282
<color=#373a3c> 1966
<color=#373a3c> 314
<color=#373a3c> 45
<color=#373a3c> 232
<color=#373a3c> 867
<color=#373a3c> 868
<color=#373a3c> 225
<color=#373a3c> 382
<color=#373a3c> .439
<color=#373a3c> .317

3. 감독 경력


감독 경력은 크게 1990년대와 2000년대 두 시기로 나뉘는데 평가가 극과 극이다. 우선 1990년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팀을 우승시키면서 찬사를 받았다. 다음해 팀성적 하락으로 LG를 떠나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5년 말 삼성에 부임한다. 비록 삼성에서는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서 2000년대 삼성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난 뒤에 오히려 평가가 상승했다.
하지만 삼성을 떠나서 2002년 부임한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은 그야말로 최악 of 최악.불과 1년반만에 팀을 완전히 개발살 내면서 KBO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열고 만다.

3.1. LG 트윈스 -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현역에서 물러난 백인천은 '''골프'''용품 관련 사업을 벌이며 야구계와는 잠시 거리를 두고 있다가 1990년, 배성서 감독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야구계로 돌아오게 된다. 이후 청룡이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며 LG 트윈스로 개명해 LG의 창단 감독이 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MBC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동시에 LG의 시대를 연 감독이었던 셈.
1989년 시즌 당시 청룡은 선수진 개개인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팀웍 부재로 그해 내내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인천은 모래알 같던 팀웍을 재건하여 단 1년만에, 만년 꼴찌였던 팀을 페넌트레이스 -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팀으로 만들며 지도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시즌 개막하기 직전 이광은, 신언호, 김기범의 줄부상에 교통사고에서 돌아온 김건우의 난조 등으로 인해 전력을 제대로 꾸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막전 OB에 2연패를 당한 뒤 5연승으로 선두에 올라가기도 했으나 곧바로 6연패와 7연패를 한 차례씩 기록하며 5월 중반~6월 초순까지 OB와 함께 꼴찌 다툼을 하고 있었다. 6월 초에는 14승 22패로 꼴찌까지 떨어지자 잠실구장에서 김동엽 전 감독의 복귀를 바라면서 일부 LG팬들의 퇴진 시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해태 원정에서 더블헤더 포함 3연전에서 싹쓸이 승리를 거두더니 마산 롯데 원정에서 승리, 8연승의 삼성을 상대로 2연승, 태평양 상대로 2연승으로 상위권 팀을 도장깨기 하며 8연승을 거두었다. 투수 쪽에서는 유망주로만 머물러 있던 문병권 김태원의 포텐셜이 드디어 터졌고 뒷문이 강해졌으며, 타격에서는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최훈재, 김영직 등 막강한 좌타라인이 상승세의 원동력이었다.
이 당시의 멤버들을 보자면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등 국가대표급의 내야진이 건재했고, 김태원, 김용수, 정삼흠, 문병권, 이용철, 차동철 등 선발진에 중견신인 김기범까지 포함된 마운드, 노찬엽, 박흥식 등이 버티는 외야진에, 특급 신인 포수 김동수, 노련한 포수리드의 심재원, 당시 신인으로 데뷔한 이병훈까지 가세한, 신구조화가 완벽한 팀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구단에서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한 김재박, 이광은, 박흥식 등 노장들을 과감히 끌어안으면서 이들을 주력 주전으로 앞세워 성적으로 보여주는 리더쉽을 발휘하며 기존 MBC 팬심을 다시 잠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5연패를 노리고 있었으나 1990 시즌의 LG는 1.5 게임 차이로 해태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하는 감격을 누렸고, 해태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삼성에 여유있는 4연승을 거두며 마침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리즈 1차전에서 13대0으로 LG가 거둔 승리는 아직까지도 역대 포스트시즌 단일 경기 최다 점수차의 승리다. 시리즈 전체 내내 백인천의 투수 운용은 삼성 타선을 꽁꽁 묶었는데 12승의 김용수를 1, 4차전에 배치하고 18승의 김태원을 2차전, 중고신인 김기범을 3차전에 넣었는데 삼성 타선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여기에 2차전 김영직, 이병훈 등 투입한 대타들까지 적중시키며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운영을 하였다. 모 팀 팬들은 믿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을 사실이지만, 이 해 백인천 감독의 팀 운영은 개인의 모든 역량과 경험을 쏟아부어 대부분 옳게 적중시킨, 지도자로서 최고의 한 해였다고 하겠다.
[image]
선수 은퇴식에서 헹가레를 받는 백인천.# 그리고 그날 해태가 더블헤더 2차전에서 지면서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image]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헹가래를 받는 백인천.
'''이때까지만 해도 아주 좋았다'''. 허나 '''그로부터 12년 후'''...
하지만 다음해인 1991년에는 구단과의 재계약 문제[32]와 선수들간의 사이가 벌어짐으로 인해 팀은 6위로 내려앉았고, 시즌 종료 뒤 이광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LG를 떠났다.[33] 그러다가 1995년 10월, 우용득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컴백했다.
[image]
그러나 삼성 부임 전부터 백인천 감독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1996년부터 막장급의 전력이던 삼성을 각고의 노력끝에 추스려 1997년부터 슬슬 성적이 나기 시작했는데, 6월에 한번 뇌출혈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렇게 쓰러진 뒤 감독직을 유지를 하느냐 마느냐 설왕설래도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의지가 강한 백인천이었던 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인천이 돌아와 보니 코치들끼리 파벌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고, 백인천은 이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더불어 초반에 좋았던 성적도 3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해 시즌 막바지인 9월 3일 LG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당시 삼성 선발 투수 정성훈초장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구원투수로 전병호가 등판했다. 그런데 당시 포수막장으로 유명(?)한 김영진이었고,[34] 포수 출신이라 볼배합에 많이 관여하던 백인천 감독이 변화구 사인을 냈는데...배터리는 사인을 잘못 읽었는지 4번타자 심재학과 정면 승부를 선택했고 3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전병호를 불러 백인천이 왜 내 사인대로 던지라는데 안 던지냐고 화를 내자 전병호는 던지라는 대로 던진거라고 대꾸했고, 백인천은 격분하여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는 다시 뇌출혈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백인천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더블헤더 2차전은 감독 없이 경기를 치뤄야 했다. 결국 최측근인 수석코치 조창수가 감독대행을 맡으며 잔여시즌과 포스트시즌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종료 후 백인천은 감독직에서 사퇴하였다. 일명 '''전병호가 백인천을 보내버린 사건'''. 다만 이는 전병호가 새가슴 기질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형편 없는 투수리드로 악명 높은 포수 김영진의 잘못이 더 크다 봐도 무방하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백인천 감독이 크게 비난받진 않는다. 또한 김영진은 그 전의 낫아웃 사건만 봐도 공수주 모두 최악임을 인증했으니...
사실 퇴임 전까지 삼성에서도 MBC와 LG 시절 못지않게 여러모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백인천 감독은 삼성 감독 중에서 한국시리즈 최초의 우승을 기록한 김응용 감독과 최초의 통합 4연패, 정규시즌 5연패를 기록한 류중일 감독과 더불어 삼성팬들에게 있어서 이미지가 좋은 편. 무엇보다도 '''이승엽을 발굴한 것'''과 2년이라는 짦은 기간에 야수진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단행해서, 이후 삼성이 타력을 바탕으로 최강 팀으로 군림하게 된 기초를 만들었다. 이 시절에는 대부분 노쇠화한 30대 주전들을 제치고 젊은 신인급들만 데리고 스프링캠프를 일찍 시작하는 등 의도적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지금까지도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리빌딩 사례로 손꼽힌다. 선수 은퇴 후 미국에 건너가 있던 박흥식을 타격코치로 데리고 온 것도 나름의 업적. 자신의 양아들로 보자면 이만수,[35] 양준혁[36][37]을 위주로 한 삼성 멤버들과 '''이승엽''', 정경배, 최익성, 김태균, 김한수, 신동주, 김종훈(...).[38]
하지만 괜찮았던 평가와는 별개로 감독 생활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강기웅[39]과 전병호, 동봉철 등과의 트러블[40] 짧은 커리어긴 했어도 외야수 전향 전에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포수 육성에 실패[41]했다는 것 자체는 오점으로 남는다. 삼성 감독 재임시기 있었던 사건으로는 압축 배트 의혹도 있었다. 1997년 5월 4일, 삼성과 LG의 대구 경기에서 삼성 타자들이 정경배의 연타석 만루홈런 등 '''27:5'''라는 무시무시한 점수를 내면서 LG 투수진을 떡실신시키자 다음 날 경기 도중 LG 트윈스 천보성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배트라고 주장한 사건이다. 이날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KBO는 해당 방망이를 목공소에서 절단해보고 이상이 없다고 했으나 LG 측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고 뜬금없게도 제3자인 쌍방울 감독 김성근이 정식으로 KBO에 공문을 보내어 결국 제조사인 미즈노에 배트를 보내서 의뢰까지 한 결과 배트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밝혀지게 된다. 또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에서도 X-ray와 도료 검사까지 했으나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참고로 그 때 다른 구단들도 논란이 되었던 배트를 암암리에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병호 사건만 부각되지만, 부임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있었고 압축배트 논란 때부터 건강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1996년 시즌 삼성의 전력이 영 좋지 못했는데다가 1997 시즌에서는 뇌출혈로 인해 빠진 경우도 있어서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때문이었는지 역대 삼성 감독들 중에서 두 번째로 승률이 낮다.(승률 0.488) 또한 두 번째 뇌출혈과 전병호의 뺨 사건까지 겹친 관계로 삼성은 1997년도에 4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정작 그 해에 열린 포스트시즌은 조창수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었다. 이것 또한 삼성 시절의 백인천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 또한 백인천 감독에게 민폐를 끼친 선수들만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김영진[42], 최창양[43], 양용모[44]) 그래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단측에서부터 연봉도 후하게 주고 백인천의 양아들인 선수들에게 용돈도 줄 정도로 헌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썼던 것을 보면 삼성 감독 시절의 백인천의 노력을 엿보일 수가 있는 대목이다.
LG 트윈스의 감독으로 복귀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라도 박혀 있었는지 이후에는 2000년 경, 삼성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게 되고[45] 2001년부터는 타팀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는데, 한화 이글스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있었을 때에는 김태균의 스윙폭을 늘리려다가 망한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했었을 때처럼 우연히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여기까지 다루는 백인천은 앞으로 이야기할 롯데 감독 백인천 과 완전히 다른 인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3.2. 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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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감독 시절. 그가 퇴임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골수 롯데 팬들은 아직도 이 면상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오른다고 한다.[46]

'''백인천 감독이 다른팀들도 꼭 한번씩 맡아줬으면 좋겠다. 넘 억울하다.'''

롯데팬이면 생기는 생각들

롯데 자이언츠의 영원한 금지어[47]이자 '''앞으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KBO 역사상 최악의 감독.''' '''고의적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을 하면서 이상한 기행들을 시전하여 롯데의 암흑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평받는다. KBO 리그 역대로 자신이 맡은 소속팀을 나락으로 추락시킨 감독들의 이름이야 각 팀 팬들을 중심으로 많이 거론되지만, '''타팀 팬의 눈으로 보더라도 팀을 최악으로 운영한 사람으로는 이 백인천만이 독보적'''이다. 특히 중립적인 언론까지 나서서 단순히 통솔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것도 아니고, 팀에 대한 관심이 하나도 없다며 직접 비판한 사람은 이 백인천만이 유일하다. 프로야구는 순위제이기 때문에, 지도력 부족이나 불운으로 매년 하위권으로 팀을 추락시킬 감독들은 프로야구 역사가 계속되는 한 계속 등장하겠지만, '''무능력과 무리수의 문제를 넘어서 일관되게 이기려는 의지라고는 하나도 없이 팀을 작정하고 풍비박산을 내어 버린''' 백인천은 어느 누구도 넘어설래야 넘어설 수가 없다. 즉, 백인천 급의 감독은 예나 지금이나 '''절대로 등장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단순히 팀의 성적을 추락시킨 정도도 아니고 저렇게 명명백백하게 '''공개태업'''을 일삼은 감독은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백인천밖에''' 없다.
최소한 다른 감독들은 잘 해보려는 생각은 있었는데 자신의 능력 및 지도력 부족+선수단과의 불화, 여러가지 무리수 등으로 팀을 말아먹었지만, 백인천은 '''아예 팀에 관심을 하나도 갖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맘먹고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대놓고 최악의 행보를 펼쳤다'''고 평가된다. 즉, 태업 혹은 팀을 망치는데 고의적인 의도가 있었다는 얘기. 이 때문에 감독 커리어가 끝장난 것은 물론 롯데팬들에겐 감독 취급도 전혀 못 받는 금지어로 전락했고, 그 임팩트가 워낙 커 타팀팬들에게 있어서도 역대 최악의 감독 하면 백인천의 이름이 가장 먼저 꼽힐만큼 거의 망한 감독의 밈이 되다시피 해버렸다.
2001년, 김명성 감독의 시즌도중 심장마비로 급사하자 우용득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나름 팀을 추슬렀고, 시즌 막바지까지 4강 싸움을 한 성과를 인정받아 이듬해인 2002년 롯데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타 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약했던 전력 탓에 시즌 초반부터 꼴찌에 허덕였고, 급기야 6월 들어 13연패를 기록하자, 롯데구단은 급기야 2002년 6월 21일, 우용득 감독을 전격 해임하고 당시 각 팀을 돌아다니며 타격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던 백인천을 영입했다. 공교롭게도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 부임할 때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계약 기간은 잔여시즌을 포함해 2004년까지 2년 6개월에 계약금과 연봉 포함 총 7억원의 조건이었다.
6월 26일, 취임식과 함께 부임하자마자 사실상의 '''시즌 포기'''를 시사했다. 그때는 어차피 팀이 지속적인 연패로 인해 압도적인 꼴찌로 내달리던 시점이었던지라[48] 일찌감치 포스트시즌은 물 건너간 상황이였다. 때문에 백인천은 부임 직후 "남은 시즌은 젊고 가능성 있는 선수들 위주로 기용하며 내년 시즌을 대비하는 기간으로 삼겠다."고 발언한 것.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다. 남은 시즌 동안 백인천 덕택에 1군 데뷔를 경험한 선수들만 열댓명에 이르렀다. 취임 후 한달도 안 된 7월 21일에는 바로 전 시즌 100타점을 기록한 거포 조경환과 나름 준수했던 외국인 좌완투수 대니얼 매기SK로 보내고, 그제껏 유망주에 불과한 윤재국박준서를 데려오는, 지극히 수지에 맞지 않는 트레이드를 하기도 했다.[49]
그래도 취임 당시에는 이해 못할 정도의 조치는 아니었다. 2002년의 롯데는 백인천이 지휘봉을 잡기 직전까지 15연패를 했고, 펠릭스 호세의 부재, 조경환의 부진 등 여러 면에서 몰락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후 백인천의 행보는 '''그걸 감안해도 도저히 실드를 쳐주는 것이 불가능하다'''[50].
지탄받고 까이는 여러 감독들을 재평가를 해야 하네 마네 하고 아웅다웅할때도 이 롯데 백인천만큼은 '''그냥 무조건 논외'''다. '''정말 어그로를 끌 여지조차 전혀 없을 정도로 팀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참히 박살내 버렸다'''. 감독 시절 막장도에서 대개 백인천 다음이라고 평가받는 이순철도 이것은 마찬가지지만, 백인천이 이전에 감독으로 있었던 LG/삼성 내에서도 롯데 백인천은 실드를 안 쳐준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사실 말이 좋아 부동의 워스트 1, 2위로 같이 언급하는 거지 둘 간의 막장도 차이를 보면 이순철을 백인천이랑 엮는 것도 (이순철에게) 미안하게 보일 정도로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게 중론이다.[51][52]
선술하였지만, 롯데 백인천은 그냥 승부욕 자체라고는 하나도 없이 "'''제발 나 좀 짤라주쇼!'''"라는 식의 태업이 의심될 정도로 대놓고 작정하고 망친 유일한 사례라서 다른 감독들을 백인천과 같은 사례로 엮는 것은 곧 그 감독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도 될 정도다. 이 길이길이 남을 만행의 여파로 전임 우용득은 그냥 잊혀져 버리고 만다.
게다가 리빌딩을 한다면서 여러가지 무리수를 일삼았는데, 그게 오히려 독만 되어서 성적은 고사하고 성과도 전혀 안 나오게 되었다. 당최 리빌딩이라는 것도 성적, 아니면 뭔가 성과라도 나와야 리빌딩이지 '''이 경우는 그냥 시즌을 의미없이 통째로 날려버린 셈'''이니... 그러고 2003년은 '''아예 대놓고 팀을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같은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KBO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반드시 손꼽히는 인물으로 등극했다'''.
롯데 감독이던 시절의 온갖 만행들을 정리하자면,
  • 벤치에선 골프 치고 와서 쳐자질 않나, 기자들과의 회견에서는 자기팀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하고 골퍼인 자기 아들 이야기와 골프 이야기만 계속 했다. 이때 얻은 별명이 자랑스러운 백골퍼 혹은 백골프. 이는 지금도 계속 쓰이는 별명이다. 기자들이 이를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팬심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 선수기용에 있어서 가장 큰 기준은 자기 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였고, 그 결과 시즌 16연패와 팀 통산 최저 승률을 기록했다. 거기에 스윙폼 개조에 실패한 선수들은 가차없이 팀에서 쫓아냈는데, 직전해에 3할, 20+홈런, 100+타점을 기록한 팀의 중심타자를 억지로 스윙폼 개조에 시도하려다가 말을 안 듣자 마음에 안 든다고 SK로 강제 트레이드 시켰으며, 당시 신고선수였던 정보명은 쫓겨나듯이 상무 피닉스 야구단로 입대했다. 조경환의 경우 당시에 하도 어이없고 억울해서 비오는 텅빈 사직구장에서 눈물을 한바탕 쏟고 인천으로 올라갔다고... 게다가 이게 진짜 막장이었던게 조경환은 당시 팀의 주장이었다. 팀의 주장 선수를 그런식으로 내쳤으니 선수단의 사기는 안봐도 뻔했다.
  • 직전 시즌 다승왕인 손민한이 항명을 하자 포수 채상병과 트레이드 하려다가 제지 당하자 "그러면 손민한을 포수 시켜야하나?"라고 농담 삼아 말했다가, 진지하게 에이스를 포수전환 하려고 했다고 오해한 팬들에게 엄청난 욕을 먹었다.[53]
  • 제리 로이스터 감독 이전에도 롯데 감독이 자기가 아는 용병을 영입한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 중 하나가 백인천 감독이었다. 영입한 선수는 투수 모리 가즈마(森一馬)[54]와 외야수 보이 로드리게스. 이 두 선수는 골수 롯빠들에게도 상당히 낯선 이름들인데, 당연한 것이 먼저 전자는 시즌도 시작하기 전에 퇴출, 또 후자는 차마 시즌 전에는 퇴출 못하겠는지 7경기 출장하고 퇴출을 당해 버렸으니...당연히 모두 투타 최고 기록.
이에 대해서 모리 가즈마는 백인천 감독의 친구 아들, 보이 로드리게스는 일본에서 1년 뛰었기 때문에 백인천이 알고 있고 영입할 수 있는 선수라서 영입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사실인지는 불명이지만, 만일 사실이라면 답이 없는 상황. 두 선수가 퇴출된 이후 영입된 페레즈와 마리오 엔카나시온[55]이 모두 그럭저럭 활약해주어서 앞의 두 용병은 더더욱 묻혔다. 말 그대로 흑역사 감독에 흑역사 용병들.
  • 2002년에 감독으로 부임하자 마자 그 해에 2할 8푼 가량 치고 있던 최고 수준의 타자 유망주의 체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살 빼랍시고 쪼그려뛰기 및 오리걸음으로 무릎을 아작내버렸고, 이 시기 무릎 부상으로 인한 운동량 부족으로 이대호의 체중이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한다.[56] 그것도 모자라서 SK 와이번스[57], 현대 유니콘스[58], 두산 베어스[59]와 독단적으로 트레이드를 시도했지만 모두 롯데 구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 규정타석은 비록 미달이었지만 2년 연속 3할대의 컨택 나쁘지 않고 빠른 발을 가진 선수30-30 클럽도 가능한 선수라며 스윙폭을 크게 만들게 하여 한동안 부진에 빠뜨렸다. 부진 정도를 넘어 2003년은 1할 타자로 전락시켜 선수의 장래에 물음표를 달게 만들었을 정도. 다만, 이 점만큼은 무조건 백인천만의 잘못이라고만 볼 수도 없는 게, 김주찬은 2015년에도 부상으로 풀타임을 뛰지도 못했는데 18홈런을, 2016년에는 20홈런+100타점을 기록하는 등 장타툴을 나름 보여주기도 했다. 보는 눈은 있었지만 감독 본인에게는 키워낼 능력이 없었거나, 아니면 선수 본인이 그 당시에는 아직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봐야 할 듯. 다만 김주찬이 저 성적을 기록한 시기는 KBO리그 역사상 최악의 타고투저 시기로, 당시 타자들 대부분의 클래식 스탯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시기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2차 1순위로 갓 입단한 신인투수선수도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1년 만에 방출해버렸다[60]. 이후 고효준은 제구가 나쁘고 폭투가 많기는 해도 좌완이라는 희소성과 구위를 무기로 SK로 가서 10승을 찍는 등 전천후 스윙맨으로 활약을 하다 KIA를 거쳐 2017년 11월 22일, 2차 드래프트를 통해 1라운드 6순위로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로 다시 돌아왔다.
  • 타자로 뛰던 선수를 투수로 전향시키려고 하다가 실패했으며, 결국 이명호는 타자로 재전향하나 얼마 안 가 방출되며 은퇴했다. 좌완 사이드암 투수가 희귀함을 감안하긴 했어도...
  • 경기 전 훈련하는 한 선수를 두고 XX는 내 말대로 안하는 새끼인데 왜 여기서 훈련하고 있어? 2군 내려보내!라고 노발대발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즉, 자기 팀 1군 명단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소리.
  • 투수 혹사로도 꽤나 까였는데, 2003년에 당시 유망주 투수였던 양성제, 변인재 등을 굴리며 어깨를 아작내게 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이 선수들은 빠른 은퇴를 해야만 했으며,[61] 손민한, 이정훈, 김사율 등은 선발 - 중계를 가리지 않고 자주 나왔다.
  • 이 외에도 박정태를 특이한 타격폼 때문에 2군에 박아뒀다는 말이 있는데, 박정태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통념과는 다르게 사실이 아니다. 사실 2002년의 박정태는 부진 때문에 2군에 내려갔던 것이며, 백인천의 조언으로 타격폼을 약간 손본 것이 엄청난 효과를 봐 9월에 월간 MVP를 따낼 정도로 부활했다. 이듬해 박정태가 구단과 FA 갈등을 겪는 시점임에도 인터뷰에서 '끝난 줄 알았던 나를 다시 일으켜준 백인천 감독이 너무 고맙다'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백골프의 망나니짓이 커버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외에 차마 눈 뜨고 못 봐주겠는 수준의 개막장 엔트리 남발과 롯데팬들의 속을 아주 뒤집어 놓는 인터뷰까지 남발했다. 이 때문에 제대로 분노한 열린 롯데팬들은 백인천 퇴진 운동까지 벌였다. 백인천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냐면, 위처럼 '''백인천이 다른 팀 감독도 했으면 좋겠다. 너무 억울하다'''라는 롯데팬들의 절규어린 짤방까지 다 나왔을 정도다. 가히 종신감독 드립의 원조라 할 만하다. 때문에 그 관중 흥행이 좋다는 사직 야구장은 끝내 시즌 막판 '''유료관중 69명'''이라는 신화를 쓴다[62]. 2003 시즌도 처참함은 여전했는데, 먼저 개막전 패배를 시작으로 화끈하게 12연패로 시작하더니, 시즌 중후반 들어 또다시 기나긴 15연패로 내몰렸는데도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2003년 8월 5일, 더 이상 참다 못한 구단에 의해 '''전격 경질'''되었다. 정작 해고 당일은 끝내기 승리로 연패를 끊었다.
이로써 백인천 감독은 당당히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감독 취급도 못받는 '''흑역사+금지어'''로 불명예스럽게 이름을 올렸다. 백인천은 퇴진하면서 '''"롯데는 향후 10년동안 가을야구 못 할 거다."'''라는 악담을 내뱉었는데, 사실 엄밀히 따지면 저주라기보다는 스스로 박살낸 팀에게 한 말이니 '''확인사살'''에 가깝다. 정작 롯데는 2008 시즌부터 2012 시즌까지 5시즌 연속으로 가을야구를 했다. 결과적으로 백인천의 이 말은 사실상 개소리가 되었다.
한 지인은 대실패의 원인을 '''세대 차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서 2시즌 동안 '''총 163전 41승 119패 3무''', '''승률 .256'''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0.188의 뒤를 잇는 찬란한 성적으로 역대 롯데 감독 14명 중 '''압도적인 최하위 승률을 기록'''했다. 전년보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할 2003년에 12/15연패를 하고, 2002/2003년에 롯데가 각각 97패/91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받게 된 결정적 요소가 된 건 덤이다. 이때 나온 2년 연속 90패 이상은 롯데 말고는 어느 팀에도 없는 치욕적인 기록이다. 그 외 단일 시즌 90패 이상 기록은 쌍방울과 kt밖에 없다. 쌍방울은 모기업의 어려움으로 선수를 계속 팔다가 해체 직전까지 내몰리던 1999 시즌 한 번이고, kt는 정규리그가 144경기로 늘어난 시대에 신생팀으로써 2015 시즌에 처음으로 1군에 참가 했을 때와 2017 시즌 두 번에 걸쳐 90패 이상을 기록했다.
만약 저 연패가 조금이라도 더 갔거나 자신이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마지막으로 지낸 팀 마냥 한 시즌 100패를 하거나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면 가뜩이나 많이 힘들던 롯데빠들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씻을 수가 없는 상처가 더해졌을 것이다. 여기에 위에서 말한 대로 선수단 붕괴+흥행 참패까지 더해져 넘보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수준의 완벽한 삼위일체가 만들어졌다.
참고로, 역대 롯데 자이언츠 감독들 중 통산 승률이 5할 이상 되는 감독은 제리 로이스터성기영[63], 양승호, 조원우[64]로 네 명 뿐이다. 백인천 퇴진 이후 한동안 롯데빠들 사이에서는 '''백인천이 사직구장 들어오면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이란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추가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는 2003년에 '''119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상기된 백인천의 롯데 재임 시절의 패수와 일치한다. 여기에 더 깊게 파고들자면, 디트로이트의 2003년 승률인 .265는 2002년 롯데의 승률과 일치한다(...). 백인천이 롯데 감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2002년 ~ 2003년 프로야구의 승률의 인플레는 심각했는데 6할 승률 팀 2개가 '''2년 연속'''으로 나왔다. 2002년에는 삼성과 KIA가, 2003년에는 현대와 KIA가 6할 승률을 달성했다. 이 당시에 6할로 2위 찍은 KIA는 이종범의 복귀와 더불어 김진우, 신용운, 홍세완 등 많은 수의 신진 선수들, 그리고 김성한 감독의 감까지 잘 맞아 떨어져서 그런대로 강한 편이었지만, 한국시리즈에는 진출하지 못한 바람에 딱히 그 시대를 대표할 정도의 강팀이라 보긴 어려웠다. 여기에 롯데가 KIA전 '''18연패'''를 했으니 말 다했다.
단일리그제인 KBO에서 6할 승률 팀이 2개였던 적은 저 시절을 제외하면 1995년, 2009년, 2014년, 2019년[65] 네 번밖에 없었다. 저 네 시즌의 2위 팀은 각각 LG, SK, 넥센, 그리고 SK와 키움 등이었는데, 1995년의 LG는 그 해 한국시리즈가 좌절되었어도 1997, 98년에 다시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일명 '신바람 야구'로 기억되는 당대의 강팀이었고, 2009년의 SK는 그 해 대이변을 일으킨 KIA에 밀렸던 감이 있지만 그 해 시즌 막판 19연승을 올리며 연승 신기록을 세우기도 하는 등 김성근 체제 당시 왕조로 불렸던 팀이었다. 그리고 2014년의 넥센은 역대 최고의 타고투저 시즌에서도 무시무시한 타선을 자랑했다. 2019년의 경우도 SK는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가 막판에 미끄러져 승률은 같았음에도(!) 상대전적에서 1위 두산에게 밀린 거였고 키움 또한 실질적 전력차는 우승팀 두산과 크게 차이나지 않았고 시즌 내내 두산과 2위 싸움을 벌인 강팀이었다. 즉 저 2위를 기록한 팀들은 역사적인 강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2002년 시즌 당시 7위 한화가 '''0.461'''의 승률을 기록했었을 정도.
해임되고 5년 후인 2008년, 롯데가 한창 주가를 올릴 때 '롯데가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수 있겠는가?'란 질문을 모든 방송 해설가들에게 한 적이 있는데, 다른 해설가들은 모두 '한다'라고 대답한 반면 백인천만 오직 '''한국야구를 보지 않아 모르겠다'''(...)란 대답을 했다. 이 해 롯데는 3위를 했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스윕을 당해 플레이오프 진출에는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틀린 말은 하지 않은 셈.
선술했듯이, MBC - LG 시절과 삼성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평가가 절하되진 않았지만, 롯데 시절에는 사실상 1년 약간 넘는 기간이었는데도 이와 같은 최악의 개막장 행보로 인하여 순식간에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단단히 낙인찍혔다.
어느 정도 부진이 예고된 다른 감독들과는 달리 왜 이렇게까지 심하게 망가졌는지 이해가 도통 안 가는 수준이라 여러 이설이 많은데, 대표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 첫 번째 설로는 삼성 말기에 온 뇌출혈 후유증+노령으로 인한 건강문제로 이렇게 되었다는 설이다. 실제로 뇌혈관 질환이 오면 심하게는 식물인간이나 반신 불수가 오지만, 가볍게 온 사람은 성격변화 혹은 지적능력 감퇴 등의 증상이 온다. 여느 스포츠 감독들이야 다 그렇지만, 특히 직업적 능력인 야구 감독은 그 중에서도 스트레스를 매우 받는 직업으로, 재발 위험성도 있는지라 이러한 후유증을 회복할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천 자신이 이런 자리를 냉큼 수락했다는 게 문제다. 물론 급한 불 끈답시고 이런 사람을 급하게 앉혀 놓은 구단 측도 문제지만...
  • 두 번째 설로는 구단이 시즌 중 우용득 전임 감독을 경질시킨 후 백인천에게 제발 와주십쇼 하고 구두로 여러 약속을 했었는데, 막상 백인천이 감독직을 수락하고 나자 이 약속들을 지키지 않았고, 그 후 구단 프런트가 경기 운영 면에서 월권행위를 저지르자 백인천이 이렇게 할 바에 차라리 경질해 달라고 요구했다는 것. 다만 경질하면 구단이 잔여 연봉을 지급해야 하는데, 구단에서는 그 돈도 주기 싫어서 자진사퇴하라고 하는 바람에 대판 싸우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백인천이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자 하고 상기된 개막장 짓들을 고의로 했다는 설이다. 사실 엘지에서도 1990년 당시 우승한 직후임에도 불구, 프런트들에게 한 요청사항들이 모조리 묵살되고 구단에서 이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아 1년만에 구단과 관계가 틀어지면서 중도하차한 전례가 있기에 가뜩이나 강성으로 악명높은 롯데 프런트와의 관계야 오죽했을까 싶기도 하다. 유승안 경찰청 감독의 증언에서도 보여지듯이 자기의 야구 철학이나 생각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체의 타협도 없는 성격이라고 한다.
저 두 가지가 그나마 가장 신빙성있는 추측이긴 하지만 안그래도 고령에 건강 이슈도 있어 2000년대에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부호가 붙어있던 마당에, 구단과의 싸움으로 말 그대로 성적이고 뭐고 다 내던지고 고의로 그렇게 했다는 평가가 다수다. 아무리 명감독이라도 시대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면 막장이 되는 점이야 다른 감독들도 해당되는 사항이지만, 백인천은 거기에 감독으로서의 의무 포기까지 더한 셈이다. 거기에 뇌출혈 후유증까지 덧붙여졌으니 이게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 것.
어쨌든 지금도 올드 롯데 팬덤 사이에서는 백인천을 '''롯데를 망친 죄'''로 범죄자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롯데가 하나의 국가였다면 백인천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라는 말도 간간히 나온다. 그리고 롯빠들은 그 시절이 너무 억울해서 백인천이 한 시즌씩 돌아가면서 다른 팀들도 맡아주길 바라고 있다.

3.3.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팀'''
'''경기'''
'''승'''
'''패'''
'''무'''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2
'''MBC 청룡'''
80
46
34
0
3위
-
1983
16
8
8
0
1위[66]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96
<color=#373a3c> 54
<color=#373a3c> 42
<color=#373a3c> 0
<color=#373a3c>
<color=#373a3c>
'''연도'''
''''''
'''경기'''
''''''
''''''
''''''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0
'''LG 트윈스'''
120
71
49
0
<color=#373a3c> '''1위'''
<color=#373a3c> '''우승'''
1991
126
53
72
1
6위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46
<color=#373a3c> 124
<color=#373a3c> 121
<color=#373a3c> 1
<color=#373a3c>
<color=#373a3c>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6
'''삼성 라이온즈'''
126
47
73
6
6위
-
1997
85
44
36
5
4위
4위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211
<color=#373a3c> 91
<color=#373a3c> 109
<color=#373a3c> 11
<color=#373a3c>
<color=#373a3c>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2
'''롯데 자이언츠'''
71
18[67]
53
0
8위
-
2003
92
23
66
3
8위
-
<color=#373a3c> '''통산'''
<color=#373a3c> 163
<color=#373a3c> 41
<color=#373a3c> 122
<color=#373a3c> 3
<color=#373a3c>
<color=#373a3c>
<color=#373a3c> '''총계'''
<color=#373a3c> '''716'''
<color=#373a3c> '''316'''
<color=#373a3c>'''386'''
<color=#373a3c> '''14'''
<color=#373a3c>
<color=#373a3c>

4. NPB 해설자 시절


'''요시!! 그란도시즌!''' 라지에타가 지금 터졌어 아주 그냥

임용수와의 NPB 경기 중계중 터진 감탄사.

NPB 해설위원 시절 야구판 예송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SBS 스포츠의 야구 해설위원이 되어 NPB(일본 프로야구) 전담 해설위원이 되어 2010년까지 활동했다. 자신의 수제자 이승엽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며, 캐스터와 함께 대놓고 승빠 기질을 보이고 있다.
다만 해설위원으로서의 역량은...NPB에서 20년 가까이 현역으로 뛰었으니만큼 한국에서 가장 NPB에 대한 지식이 많다는 장점은 있는데, '''그게 끝'''. 처참한 한국어 발음(+웅얼웅얼한 말투)과 흥분하면 튀어나오는 일본어. 대표적인 것이 '''"요시!" "그란도 시즌!" "라지에타" "스고이!"''' 특히 '''그란도시즌'''과 반말 때문에 해설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당시 같이 중계를 맡았던 임용수 캐스터조차 '요시 그란도 시즌'에 대한 질문을 받자 '''"백인천 위원님이 오랫동안 일본 생활을 하셔서 일본식 어투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많아요."'''라고 답변하였다. 옆에 캐스터도 못 알아듣는데 하물며 시청자는...게다가 이승엽이 나오지 않았던 시절에는 '''해설임에도 불구하고 말이 거의 없어졌다'''.
그의 명대사(?)인 요시 그란도 시즌야갤을 시작으로 많은 곳에서 사랑받고 있다. 그런데 실제 발언은 '요시! 그란도 시즌!'이 아니라 '역시! 하나둘셋이야!'라는 주장이 나왔고, 모든 야구 사이트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해설자 백인천은 한국어 발음도 부정확했고 바로 옆에 있는 캐스터도 이해하기 힘든 자신만의 일본식 표현을 쓰곤 했는데, 그로인해 나타난 해프닝이다. 무엇이 정답인가는 본인이 직접 진실을 밝히지 않는 이상,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5. 그 이후


2010년 8월 20일, 일간스포츠에 '''이대호는 날 미워할지도 모르겠다'''라는 기사가 떴다. 내용인 즉, '''이대호는 사직구장에서 쪼그려뛰기 같은 걸 함으로써 정신적으로 더 성숙해지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라는 것. 때문에 가뜩이나 폭염주의보가 내려 더워 죽겠는 와중에 벽주 대낮부터 롯데빠들의 혈압을 제대로 올리고 있다. 그래도 당사자 이대호는 "'''전혀 미워하지 않는다'''. 분명 나를 잘 되게 하기 위해서 시킨 훈련이었다."라는 내용의 마음 넓은 인터뷰를 했다.[68]
2010년 6월부터 일구회 산하의 은퇴선수 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2012년에는 한일유소년야구육성기금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뇌출혈 후유증 예방운동을 전개중. 동시에 동아일보에서 회고 인터뷰도 했고 김영덕, 박영길 감독과 삼자 인터뷰로 프로야구 30년을 회고했다.
2013년 7월 29일, 정재승 KAIST 교수와 58명의 공동 저자가 함께 집필한 과학 논문인 <백인천 프로젝트>가 사이언스북스에서 출간되었는데, 백인천 본인이 직접 책 추천사를 썼다.# 논문의 내용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로 모여 한국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분석했으며, 스티븐 제이 굴드의 가설이 한국프로야구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검토했다고 한다. 본인이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4할 타자인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상징성을 갖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69] 당시 공동저자로 참여했던 천관율 시사IN 기자는 '''본인이 롯데 팬이라''' 프로젝트 이름을 처음 듣고 기겁했다고 한다(...).
2014년 12월 5일,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 시상식에 참여한 뒤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과 관련해 '''프런트는 성적을 이유로 감독을 경질하기보다는 믿고 기다려야 한다'''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관련 기사. 이 발언을 접한 팬들은 '맞는 말이지만 백골퍼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닌 듯', '믿고 맡겼더니 8888 찍냐' 등의 실소를 흘렸다.
[image]
2016년도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했다. 자신이 초대 감독을 역임했던 원년 청룡의 모자를 쓴 채, 마운드를 밟고서 투구하였다. 물론 롯데팬들은 매우 못마땅해 하는 반응이었고, 나머지 구단 팬들의 현장 호응도 미미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70] 또한 올스타전 시구 당시에도 병의 후유증 때문인지 시구를 마치고 나갈 때 다리를 몹시 쩔뚝거렸다.
2019 프리미어 12 한국 vs 호주 개막전에서도 시구를 하였다. 여전히 몸이 불편한지 스탭의 부축을 받았다.

6. 기타


  • 팬 서비스는 좋은 편이다. 강원도에서 모 유소년 야구 대회가 열렸는데, 그 곳에서 당시 다리 수술로 몸이 불편함에도 어느 회식자리 가게에서 사인을 요청하자 야구공과 종이에 사인을 해 줬다.
  •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협회'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고교/대학야구 타자상 이름은 백인천의 타율이었던 0.412를 딴 'BIC 0.412상'이다.
  • 이승엽최익성이 가장 존경하는 야구인이다. 실제로 이승엽은 자신의 스승으로 박흥식, 박승호 코치와 함께 또 하나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을 꼽았으며,[71] 최익성은 백인천 감독이 본인의 야구인생에서 인생을 꽃을 피운 은인이라고 언급했다. 사실 최익성이 코치와의 트러블 속에서도 지금까지 버텨왔던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백인천 감독이 최익성 본인의 재능을 극찬받은데다가 늘 항상 버팀목이 되어줬기에 백인천 감독을 자신의 친아버지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지금도 최익성은 은사인 백인천이 있는 한은회에 가입할 정도로 백인천 감독을 잘 따른다고 한다.

[1] 인천광역시와는 전혀 무관하다. 백인천의 이름은 한자로 쓰면 白仁天이고, 인천시는 仁川이다. 비슷한 케이스로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 회장이 있다.[2] 호적상에서는 1943년 11월 27일 생이라고 한다.[3] 현재의 대만이 아니라 중국대륙에 있는 난징이다. 난징은 백인천이 태어났을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이자 직할시였던 난징(남경)시였다. 단 당시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충칭시가 임시 수도였다. 중화민국이 현재 존치시켜 놓고 있는 명목상의 행정구역에서는 난징이 여전히 직할시로 남아 있지만, 현지를 실제 통치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으로는 직할시에서 장쑤성 산하의 시로 격하되어 장쑤성의 성회(省會: 성의 수도)가 되어 있다.[4]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거룩한빛광성교회에 출석한다.[5] 같은 팀인데 팀 매각에 따라서 이름만 바뀌었다. 1972년까지는 도에이 플라이어즈, 도에이가 부동산 회사인 닛타쿠홈에게 매각해 1973년에는 닛타쿠홈 플라이어즈, 닛타쿠 홈이 1년만에 다시 팀을 닛폰햄에게 매각해서 닛폰햄 파이터즈가 됐다. 그리고 1974년 시즌 후 닛폰햄 사장으로 취임한 미하라 오사무가 전임 감독이자 라이벌이었던 미즈하라 시게루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취임 1년만에 대규모 트레이드를 감행하며 소위 '미즈하라 인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에 나섰다. 장훈도 백인천도 이 과정에서 팀을 떠나게 되었다.[6] 양팀 팬들한테는 정말로 애증의 대상인데, LG 트윈스의 전신인 MBC 청룡 시절에는 삼성을 상대로 이종도의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개막전 승리를 이끌었으며, LG 감독 시절에는 삼성을 상대로 구단 역사상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안겨주었으며 삼성 감독 시절에는 주축 선수들의 핵타선으로 LG를 떡실신시켜 버렸기 때문. 이 과정에서 LG 트윈스 천보성 LG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 배트라고 주장한 압축 배트 의혹 사건도 있었고(이 과정에서 정경배의 방망이가 두동강났다.(...)) 그 때문에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 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사제지간인 김용달 타격 코치와 관계사이가 틀어지기도 했다.[7] 당시에는 해외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런식의 편법이 가능했었다. 명목상 주어진 임무는 일본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였다.[8] 로 메이시의 경우로는 중국어/일본어 구별없이 유니폼에 RO로만 붙였으며, 2006년부터 데뷔한 양중서우(陽仲壽, 양중수)를 요 쵼쇼(일본식 음독), 선수 개명 이후 양다이강(陽岱鋼, 양대강)을 요 다이칸(일본식 음독)으로 불리고 유니품을 YANG(중국어식)보다 YOH(일본어식)로 표기, 또한 일본식 선수등록명으로 완전히 다르게 사용하는 (형제 격식) 대만 선수 중으로는 천다이펑(陳大豊, 진대풍) 대신 타이호 야스아키, 그의 동생 천다이순(陳大順 , 진대순) 역시 타이준 마사히로로 표기하였다.[9] 이후로 양다이강과 달리하여 양야오쉰(陽耀勲, 양요훈, 양다이강의 친형)의 유니폼에는 YOH(일본어식)보다 YANG(중국어식)으로 표기하였다.[10] 둘이 각각 롯데와 교진에 소속되어 있던 시절은 1977~1979년, 3년간이다.[11] 참고로 지명타자퍼시픽리그에서 1975년부터 도입되었다.[12] 장훈도 차별을 안 받은 건 아니지만 당시 프로야구의 슈퍼스타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야말로 대단한 성깔에 저 등빨을 보면 알겠지만 그에 걸맞는 싸움실력도 있었기에 감히 건드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포수가 트래쉬토킹 했다고 실수인척 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갈길 정도니...[13]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도이의 선수생활 중 유일한 타이틀 수상이었다.[14] 마찬가지로 히가시오도 이해 다승왕이 첫 타이틀 수상이었다.[15] 수정 전 리그 꼴찌를 기록했다고 되어있었으나 이 해 종합순위는 3위였다.(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4위) 꼴찌는 이듬해인 1976년, '''전후기리그 전부 꼴찌'''를 기록했다(...).[16] 참고로 이듬해엔 같은 팀의 요시오카 사토루가 수위타자를 획득하는데, 이 당시 타율은 퍼시픽리그 역대 최저 수위타자 기록인 .309였다.(센트럴리그 최저기록은 1962년 수위타자 모리나가 카츠하루의 .307) 참고로 요시오카는 이 시즌과 이듬해인 1977년 시즌 이외엔 백업급으로만 뛰던 선수였고, 결국 300안타만 간신히 넘기고 현역생활을 마감했다.[17] AKB48의 전 멤버 쿠라모치 아스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1978년 오프시즌 트레이드로 롯데로 복귀하며 백인천과 같이 한솥밥을 먹게 된다.[18] 다만 현역 시절 당시에는 외국인 쿼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출생 당시에는 일본 국적이었다는 유권해석 때문.[19] 1977년엔 한큐 브레이브스, 1980년엔 긴테츠 버팔로즈한테 플레이오프에서 패배했다.[20] 1982년 시즌은 팀간 16경기, 총 80경기를 40경기 씩 전기/후기 리그로 나누어 치뤘으며, 그가 출장하지 않은 8경기 중 5경기는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선수겸 감독이었던 백인천이 오심에 대해 항의를 하고 경기 속개를 거부해서 몰수패를 당했는데 그로 인해 출장 정지를 받았다.[21] 이후 KBO 타격왕 중 가장 적은 타수를 기록한 경우는 1987년 장효조의 88경기 284타수 110안타 0.387이다. 1987년 팀당 경기수는 108경기였다.[22] 당시 규정으로는 희생플라이를 분모에 포함하지 않았기에 0.502였지만, 현재 기준으로는 0.497이다. KBO에서는 예전 선수는 예전 출루율을 따른다.[23] 실제로 신경을 안 썼을 확률이 높은 것이 백인천이나 다음 시즌 장명부의 케이스를 봐도 당시 오랜역사를 지닌 일본과 이제 갓 프로가 출범한 한국 간의 프로야구 격차는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이미 일본에서 준수한 커리어를 보낸 백인천이 굳이 선수단이나 팀 수도 간신히 채워 출범한 신생리그의 기록을 욕심낼 이유가 없다. 물론 현재 한국프로야구는 당시에 비해 규모도, 수준도 크게 성장해 바로 메이저리그로 건너갈 수도 있는 수준의 리그가 됐지만, 당시로서는 일본에서 전성기가 한참 지난 노장이 건너와도 맹활약을 할 정도로 경기 수준이 높진 않았다.[24]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도 이 드립이 등장한다. '여자가 ○○○이 뭐냐'는 감사용 어머니(김수미 분)의 한마디…시대고증이 그래도 잘 되었다는 의미.[25] 다만, 나중에는 백골퍼 밑에서 롯데 2군 감독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백골퍼 잘리고, 얼마못가 재계약 실패.[26] 당시엔 2군 자체가 없었다는게 함정, 최초로 2군을 만든 삼성과 OB는 1984년부터 2군을 신설했다.[27] 4회말 삼성 라이온즈의 공격, 2루수는 김인식...1루에는 배대웅이었다. 암튼 삼성 라이온즈 다음 타자가 유격수 땅볼로 치자 6-4-3 더블플레이...이때 배대웅은 출루를 더 하기 위해 김인식에게 강하게 테클을 하였고 김인식은 당연히 쓰려졌다. 그때 배대웅은 사과를 하기 위해 김인식에게 다가갔고 욱한 김인식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치고 말았다. 즉 말그대로 벤치 클리어링...[28] 훗날 히스토리 후에서 방영된 김인식 감독은 "배대웅과 같이 퇴장시켜야 되는데 왜 나만 퇴장시키냐"라고 억울했고 상황상은 같이 퇴장시키는게 맞다.[29] 지금도 어느 정도 액수가 크지만 당시 100만원은 상당한 수준.[30] 1983년 삼미가 장명부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말아먹게 되는 주요한 2가지 이유 중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물론 김진영 감독의 이단 날아차기 방송사건.[31] 훗날 백인천은 첫 번째 결혼이 자신이 원해서 했던 결혼이 아니었다고 주장했다.[32]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깽판친다"고 언론플레이를 했다고...[33] 이광환 감독은 MBC 청룡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대대적인 선수단 개혁을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팀을 나간 선수가 김재박, 윤덕규, 김상훈 등이다.[34] 김영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해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홈 경기에서 팀이 1:4로 앞서던 9회초 2아웃에서 장재중의 헛스윙 삼진으로 낫아웃이 됐을 때 자동 아웃으로 착각했다가 6:4로 역전패하는 원인을 제공한 바 았다. 그 당시 장재중이 바운드 볼에 스윙 삼진이 됐을 때 김영진은 팬서비스를 한답시고 관중석 쪽으로 공을 던져버렸고 뒤늦게 백인천 감독이 김영진에게 1루로 송구하라고 외쳤지만, 공은 이미 관중석으로...[35] 당시 리빌딩을 위해 강기웅, 김성래, 이종두 등 노장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전노장이었던 이만수만큼은 대타, 지명타자, 1루수 대수비 등으로 기용하며 기회를 여러 차례 준 바 있다. 이후 이만수는 백인천이 물러난 1997년 시즌 후, 그대로 방출되어 은퇴했다.[36] 다만 양준혁에게는 그의 타격 폼을 보고 형편없다고 까기도 했다. 양준혁 본인도 이렇게 좋은 소리는 못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었다. 물론 자신의 수제자이승엽을 더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겠지만...[37] 일례로 백인천과 이승엽, 양준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백인천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이승엽과 양준혁의 타격폼을 바꾸자고 대답을 했는데 양준혁의 경우 타격폼이 심플하지 않고 어려웠지만 이에 불구하고 타율 3할을 칠 수 있었던 비결은 양준혁이 야구에 대해 센스가 있고 파워가 있었다는 점이다. 백인천 감독은 양준혁을 보고 타격폼을 바꾸면 타율 4할도 노려볼 수 있었고 홈런도 50개를 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승엽은 타격폼 변경을 하기로 했고 양준혁은 망설여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백인천 감독도 양준혁의 타격폼을 건드리면 독이 되지 않을까 망설였다고 결국 고심 끝에 양준혁의 타격폼을 그대로 내버려뒀다. 백인천 감독이 이를 언급하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참 아쉬워했다고 한다. 양준혁이 잠시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그 때 당시 백 감독의 말대로 타격폼을 수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며 말한 적이 있다고.[38] 1997년 시즌 중 롯데 투수 박동희와 함께 트레이드되었던 선수다. 박동희는 망했지만, 그는 프랜차이즈가 되었다.[39] 강기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약골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고강도 훈련을 선호한 백인천과 마찰이 있었다. 결국 1996년 시즌이 끝나고 강기웅은 현대로 트레이드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명언을 남기고 은퇴를 한다. 삼성 타선의 리빌딩 등 다른 쪽에서 좋게 보는 백인천 감독이지만, 강기웅 팬 한정으로 백인천 감독을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론이 있다면 강기웅은 주전 2루수로 잘 뛰다가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기전인 1995년에 이승엽과의 충돌로 발목부상을 당했고 그 발목부상을 못 이겨 다음 시즌인 96시즌에 겨우 1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했음을 감안해야 한다.[40] 다만, 동봉철의 경우 선수 본인의 기량 하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41] 10년이 넘도록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한 진갑용도 OB(현 두산) 출신이다. 고로 이만수 이후 삼성은 포수난에 시달렸다는 것.[42] 낫아웃 사건의 그 포수가 맞다.[43] 실제로 백인천 감독이 최창양의 행동거지를 보고 1년에 6승 이상 못한다고 해서 했는데...최창양은 정말로 1년에 6승 이상도 못 했다고 한다.[44] 새벽 4시까지 을 먹고 오다가 백인천 감독한테 딱 걸렸다고 한다.[45] 이 당시 김용희 감독을 견제하려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당시 2군 감독도 김성근이였고...[46] 백인천이 감독하던 시절 태어난 아기들은 2020년대 기준으로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 즉, 백인천이 롯데 감독을 한지도 매우 오래된 것.[47] 그리고 백인천이 떠난지 10여 년이 지난 후 이종운 감독이 롯데를 8위로 꼴아박는 바람에 제2의 백인천으로 승격하나 했지만, 그냥 이종운과 백인천은 따로 평가받게 됐다. 이종운은 신장개업이지만, 백인천은 이전에는 감독으로서 매우 좋은 성적도 내고 세대교체도 성공했는데, 롯데에서만 작정하고 완벽하게 팀을 추락시켰기 때문에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 게다가 이종운/평가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종운은 선수 보는 눈만큼은 좋은 편이라는 장점이라도 있지만, 백인천은 롯데 감독 시절 어떠한 면에서 봐도 장점을 '''찾을 수가 없다'''.[48] 이 시즌(2002년)에 롯데는 역대 최다패 타이기록인 97패를 기록했다.[49] 정확히는 SK 쪽에서 용병투수 에르난데스까지 받아오는 3:2 트레이드였으나, 이미 에르난데스는 어깨 부상으로 시즌 아웃된 상태였기 때문에 트레이드에 포함된 건 어디까지나 구색 맞추기용이었을 뿐이었다. 실제로 에르난데스는 롯데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방출돼 버렸다.[50] 당시 롯데가 얼마나 심각했었냐면 용병 두 명이 일찌감치 퇴출되고 다른 팀들은 3명이나 보유하고 있는데도(2001년부터 2002년까지는 3용병 2출전이었다.) 2명만 보유했었으며, 팀 전력에서 좋은 선수들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삼미의 18연패를 깰 최악의 상황이 오면서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됐다.[51] 공교롭게도 최악의 감독 중 1, 2위를 다투고 있는 백인천과 이순철 둘 다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 협회(한은회)에서 같은 한솥밥을 먹고 있다.[52] 이걸 거꾸로 말하자면 백인천은 아예 감독의 본분을 망각하고 골프나 치는 등 대놓고 태업했지만, 이순철은 그러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백인천과 비견될 정도이니... 해설위원이나 선수로써는 레전드이지만, 이순철도 감독의 깜냥은 아니올시다였던 듯 하다.[53] 그때의 트레이드 시도는 그 당시 재임 중이었던 이상구 단장에 의해 무산되었고, 관련 기사. 다만 포수 전향을 권유했다는 것에 대해 김용철 전 수석코치는 "처음 듣는 말"이라고 기자에게 답했다.[54] 일본 사회인야구팀 선수. 현재는 미에 현 사회인야구단의 선수 겸 코치를 맡고 있다.[55] 한국 등록명은 이시온. 약물의 후유증으로 2005년 10월 사망했다.[56] 이인구의 증언에 따르면 이대호와 체격이 비슷했던 최준석 역시 똑같은 짓을 당했다.[57] 당시 SK 단장은 김강민, 박재상 카드를 검토했다고 한다.[58] 김재박 감독에게 트레이드를 제안했다고 한다. 김시진의 말에 의하면 송신영이나 신철인과의 맞트레이드를 추진하려고 했다는데, 현대가 조용준 카드도 고려하였다는 설이 있다.[59] 양승호 전 두산 코치에 의하면 2003년에 문희성이 사직 경기에서 홈런을 치자 경기 후 백인천 감독이 이대호를 줄테니 문희성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사됐다면 롯데 역사 최악의 호구딜이 될 뻔 했는데, 문희성은 2006년에 은퇴했기 때문이다.[60] 당시 아예 제구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61] 변인재는 2002시즌에 5경기, 2003년에 26경기 출장해서 미미한 활약 끝에 2004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팀에서 정리되다시피하여 쫓겨났으며, 양성제는 2003시즌 50게임, 2004시즌에 불과 2게임 출장을 끝으로 줄곧 2군에만 있다가 2009년 7월 21일자로 김장현과 함께 웨이버 공시되었다.[62] 이날 롯데 유니폼이나 모자, 스프라이트 티셔츠 등을 입고 오면 무료로 입장하는 이벤트를 했다. 그래도 실제 입장객은 200명 남짓.[63] 이쪽은 단 한 시즌.[64] 정확히 딱 5할.[65] 이 시즌은 3개 팀이 6할 승률을 기록했다. [66] 시즌 초 사퇴. 이 해 청룡은 후기 리그 우승, 통합 승률 1위를 기록.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67] 백인천의 통산승률이 5할에서 내려앉은게 이 시점이다. 참고로 롯데시절을 제외한 통상성적은 총 '''553전 275승 264패 11무'''로 승률은 '''0.507'''이었다.[68] 사실 한국 스포츠계 특성상 웬만큼 원한이 깊고+선수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이상 대선배+전 감독에게 나쁜 말을 하기 힘들다. 특히 현역은...그 대선배가 전리그적인 왕따가 아닌 이상 야구계에 이런 저런 연줄로 엮여있기 때문에 어떻게 꼬일지 모르고(예를 들어 씹은 사람의 후배가 감독으로 온다던지...) 또한 우리나라는 감독을 "지도자, 스승"으로 보는 경향이 커서 그런 비판 자체를 안 좋게 보기 때문이다.[69] 만약 메이저리그에서 같은 주제로 책을 썼다면 '테드 윌리엄스 프로젝트'라고 했을 것이다.[70] 사실 올드팬이 아니면 백인천을 기억하는 팬들이 별로 많지 않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71] 실제로 이승엽의 성공 비결 이유 중 하나를 언급했을 때 백인천 감독은 반드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