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김성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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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유 기록
'''한국시리즈 최초 퇴장 감독'''[89]
2009 한국시리즈 5차전

''' 한국시리즈 우승 코치'''
'''1982'''

'''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2007'''
'''2008'''
'''2010'''


'''김성근의 역임 감독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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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틀 모음'''
'''1군 감독'''
'''OB 베어스'''}}}
{{{-2 2대
1984 ~ 1988
'''태평양 돌핀스'''}}}
{{{-2 2대
1989 ~ 1990
'''삼성 라이온즈'''}}}
{{{-2 6대
1991 ~ 1992
'''쌍방울 레이더스'''}}}
{{{-2 4대
1996 ~ 1999
'''LG 트윈스'''}}}
{{{-2 11대
2002
'''SK 와이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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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 2011
'''한화 이글스'''}}}
{{{-2 10대
2015 ~ 2017

'''2군 감독'''
'''해태 타이거즈 2군'''}}}
{{{-2 3대
1994 ~ 1995
'''고양 원더스'''}}}
{{{-2 1대
2012 ~ 2014


<colbgcolor=#00000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셀러'''
'''김성근'''
'''金星根 | Sung - Keun Kim'''[1]

'''출생'''
1942년 12월 13일 (82세)[2]
일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3]
'''국적'''
[image] 대한민국[4]
'''신체'''
180cm, 82kg
'''종교'''
무종교[5]
'''가족'''
부인 오효순, 아들 김정준, 2명의 딸
'''학력'''
교토 시조중
교토 가쓰라고
동아대학교(중퇴)[6]
'''직업'''
야구선수, 전 감독, 전 코치
'''포지션'''
투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
'''소속'''
'''선수'''
교통부 (1961)
기업은행 (1962~1968)
'''지도자'''
'''감독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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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상업고등학교 감독 (1969~1970)
중소기업은행 투수코치 (1970~1971)
중소기업은행 감독 (1972~1975)
충암고등학교 감독 (1976~1979)
신일고등학교 감독 (1979~1981)
[image] OB 베어스 투수코치 (1982~1983)
[image] OB 베어스 감독 (1984~1988)
[image]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9~1990)
[image]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1~1992)
[image]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4~1995)
[image]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6~1999)
[image]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
[image] LG 트윈스 2군 감독 (2001)
[image]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1)
[image] LG 트윈스 감독대행 (2001)
[image] LG 트윈스 감독 (2002)
[image]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 (2006)
'''[image] SK 와이번스 감독 (2007~2011)'''
[image] 고양 원더스 감독 (2012~2014)
[image] 한화 이글스 감독 (2015~2017)

'''프런트'''
[image]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셀러 (2018~)
1. 개요
2. 상세
3.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
11. 별명들
11.1. 야신(野神)?
11.2. 인천예수
11.4. 킬성근
11.5. 그 외
12. 발음/말투
13. 기타
14. 총평
14.1. 관련 어록
15. 역대 감독 성적
1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인.

2. 상세


현재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코치 카운셀러.[7]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2000년대 후반 SK에서 우승을 하면서 야신으로 불리며 강력한 팬덤을 보유하는 등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장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말년에 한화에서 대실패를 겪는 과정에서 그 동안 가려졌던 부정적인 이면들과 과거에 저지른 행적들이 드러나며 나쁜 의미로 재평가를 받고 명성이 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다.[8]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부터 불펜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구사했고 이는 2000년대 후반 SK 감독시절 이른바 '벌떼야구'로 불리기도 했다. 감독 커리어 전반기에는 태평양, 쌍방울을 맡아 특유의 쥐어짜기식 혹사 운영으로 하위권이었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여 하위권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데 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OB, 삼성 등 강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다. 특히 쌍방울 시절은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하위권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팬들에 의해 '김성근의 쌍방울 신화'로 포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울이 무척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쌍방울은 오히려 선수 연봉 총액 1위 구단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도 했다. 재임 기간 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선수들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그가 퇴임한 후 예외없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2002년 LG가 정규순위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3위, 2위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포스트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을 거치는 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탈락했기[9] 때문에 단기전에 약한 감독,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투수 운영 방식과 단기전 승부사 기질을 가진 명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SK 시절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이면의 모든 부정적인 면들이 가려진 채, '야신'이라고 불리며 야구계 안팎에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업과 대학을 비롯해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초청받아 리더십과 성공론, 인생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매너 플레이, 꼼수, 편법, 심리적 도발을 동원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야구, 팀을 철저하게 쥐어짜서 거덜내는 운영 스타일,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투수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자기합리화식 야구철학으로 인한 선수들의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좋지 않은 언행으로 끊임없이 상대팀을 도발하고 흔들기, 프런트의 권한을 전부 가져가 자기 양껏 운용하면서도 항상 프런트와 마찰을 빚는 독선적이고 모난 성격, 심한 뒤끝으로 팀을 떠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팀을 극렬히 비난하는 행태 등으로 야구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항상 구단 프런트에 전권과 대대적인 지원을 요구하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번번이 프런트와의 갈등을 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한 구단에 못 머물고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감독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런 갈등 중에도 계속된 언플로 그는 항상 프런트라는 기득권에게 쫒겨나는 강직한 야구인으로 포장되었다. 김성근이 경질되고 난 후 팀은 혹사로 망가진 선수들과 은퇴할 시기가 지난 노장들만 남은 황폐한 상황이 된다.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키울만한 자원도 없다. 게다가 밖에서는 김성근이 끊임없이 팀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팀을 더 흔들어 놓는 상황이다. 김성근의 후임 감독들[10]은 이렇게 어려운 암흑기 상황의 팀을 맡아 이끌게 되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 그러면 김성근의 추종자들은 '''"거봐라 역시 김성근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플을 했다. 물론 김성근이 2017년 한화에서 물러난 직후 2018년 후임 감독으로 한용덕이 오자마자 10년 동안 꼴찌와 하위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한화가 11년만에 단숨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했고, 이후 추종자들은 많이 없어졌다. SK 시절 3회 우승 실적을 내세워 각종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신의 과거의 어두운 점들을 모두 미화하고 철저히 야신으로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하여 김성근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를 거쳐 2015년 한화 이글스 감독직을 맡으면서 현장에 복귀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한화 감독에 부임하면서 그 동안 가려져 있던 김성근 야구의 문제점들인 비열하다 못해 추악한 야구, 살려조로 대표되는 혹사, 마구잡이식 기용, 쥐어짜기 운용, 구시대적 훈련 방법 등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추잡하고 역겨운 민낯짝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지금까지도 야빠들의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그간 묻혀있던 김성근의 각종 어두웠던 과거 행적들이 속속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 동시에 그동안 저평가되어있던 후임 지도자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이는 아래 두 인용문으로 잘 설명된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

사실 이것은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을 이긴 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김응용은 패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밝혔지만, 김응용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 말은 김성근 팬들에게 윤색되어 김성근을 추앙하기 위해 오랫 동안 인용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김성근 팬들이 주장하는 야신이라는 단어는 김응용 감독에게 더 어울리는데 말이다.
그리고 이후...

'김성근 야구'는 '''몰인간적'''이고 '''폭압적'''이다. 그리고 '''비민주적'''이다. 자율화와 인간 중심이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부정했다. … 그는 한국 야구를 '''황폐화'''시켰고, 리그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독단적'''이고 '''획일적'''이고 '''강압적'''이다. 한국 야구에 더 이상의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된다.

[김대호의 야구생각] '김성근 야구'의 실패가 주는 교훈

이 두 기사에서 설명하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2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과 2016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바뀐 셈.

3.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


가쓰라고교 시절. 우측이 김성근.[11]
흔히 김성근을 소개하는 언론 기사마다 거의 단골로 등장하는 레퍼토리가 일본에서의 김성근의 학창 시절은 조선인으로서 차별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스스로의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소개되고 있다.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김성근 스스로 이런 언론 내용에 대해 "글쎄"라고 말하며 사실이 아니었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노리타이자 김성근 측근 언론인인 정철우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때 싸움을 잘해서 이후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고, 싸움을 잘해서 중고교 시절 학교의 주류 즉 쌈짱이었다고 말했다. 즉 김성근이 학폭 가해자의 위치에 있으면 있었지, 결코 조선인이라고 차별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한번은 자신이 학생들을 주도해서 단체로 수업을 째고 도망가서 여선생이 울었다는 일화를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이 학교에서 주류였다고 자랑했다. 게다가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걸 아는 학생도 별로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고3 때 재일동포야구단에 포함되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지만 전혀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김성근은 중학교 땐 우익수 포지션이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요즘은 우익수가 중요하지만 그때는 제일 못하는 사람이 우익수였다고 한다. 사람이 모자라니까 자기를 갖다놨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김성근 자기자신이 생각해도 야구를 못했다고 한다. 또 발이 아주 느린 선수였다고 한다. [12]
김성근은 교토 헤이안고를 비롯한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다. 김성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야구 명문고들은 사립이었는데, 자신은 돈이 없어서 공립인 가쓰라고에 입학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성근 자서전의 이같은 내용에 대해서 많은 야구팬들이 의문을 제기했다. 장훈도 형이 가장 노릇을 할 정도로 심하게 가난했지만 '''사립''' 학교인 나니와 상고로 진학했다. 똑같이 가난했던 장훈도 사립학교로 갔는데 이게 과연 경제적 문제 때문이었을까 하는 지극히 합리적인 의구심이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야구팬들과 노리타들 사이에 넷상에서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허무하게도 나중에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그동안 노리타들의 피의 쉴드가 무색하게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다. (실력이 부족해서)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 이전에 나온 자서전에서의 MSG를 빼고 사실을 담백하게 털어놓은 것. 물론 2011년 시점에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야신이 되었기에 이제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보다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신감도 생겼을 터.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야구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안습한 상황이었다. 김성근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살펴보면 가쓰라고의 야구부는 운동부로서의 야구부가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 있는 방과후 특활반 개념의 야구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가쓰라고에서는 야구부라도 주5일 동안의 정규 수업에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해야만 했고 주말에만 경기했다고 한다.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 김성근 “野神을 만든 건 두번의 ‘神내림’… 눈이 확 뜨였죠”

김성근의 자서전을 보면 상황은 더욱 안습하다. 장비는 커녕, 훈련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었다. '''훈련이라고는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13]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했다. 우익수였던 김성근은 고등학교 시절, 3학년들이 졸업하고 던질 투수가 한 명 밖에 안남자 한번 나가서 던져보라고 시켜서 투수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투수가 아니었다고.
자서전을 보면 고교시절 자나깨나 야구만을 생각한 것처럼 묘사되나, 훗날 인터뷰에 따르면 고교 시절 김성근은 야구 외에도 축구, 마라톤, 수영 등 다양한 종목에서 선수로 활약하며 대회에도 나갔다고 한다. 특히 축구부에서 수비수로 뛰었고, 그때 등번호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야신'의 축구 실력은?.
아무튼 이런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여 야구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근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접어야할 운명인 듯 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생겼으니...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부 언론 기사에 따르면 김성근이 고시엔에서의 활약으로 재일동포야구단에 뽑혔다고 나오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은 야구 비명문고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야구 명문고 학생들은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었는데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 재일동포학생야구단 선발에서 제외했다. 또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김성근이 고3이었던 1959년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고 김성근 가족은 곧 북한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북한의 선전에 혹해서 김성근 가족도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던 것.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김성근은 재일동포야구단으로 한국에 갔다왔던 것. 한국에 갔다온 김성근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야구로 충분히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간절히 설득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는 야구가 없다는 점이 그가 절박하게 가족들을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결국 그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다.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성근은 동아대에서 일학년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하고 입학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갔다. 동아대 재학 당시 언어불통 등으로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14]
동아대에서 지낸 반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언어가 잘 통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19세의 청춘 김성근은 나름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만들기도 했다.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김성근 본인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며 웃는다. 하지만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는 것.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다고. #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다. 이때 김성근은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연예계는 실력제일주의 풍토로 재일교포가 거의 차별받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교포들이 많다는 것을 보면 김성근의 해명은 사실상 거짓말이다. 예를 들어 구단 오너가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15]'''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김일융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당시 '''일본인 학생만 드래프트에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시킨 후 그를 입단시킨 것이 논란이 되어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이 변경되었다. 어찌하던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곳은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던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다. 이 상호차량 야구부는 사회인야구 2부리그라고 부를 수 있는 클럽팀인데, 일본 사회인야구는 보통 생각하는 실업야구 개념의 회사등록팀이 있고, 이 밑의 단계인 클럽팀이 있으며, 그 아래 단계로 보통 일반적으로 돈 안받고 하는 동호인 야구인 쿠사야큐팀이 있다. 클럽팀은 일반적으로 오전근무만 하거나 아예 안하기도 하는 회사등록팀과는 달리 오전오후 회사 업무를 다 보고 남는 시간,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훈련을 한다. 야구부 활동으로 월급이 나오며, 정식으로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되어 도시대항전 등 실업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완전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은 한국 사야와 같은 개념의 팀인 쿠사야큐.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노선 개념의 팀으로 클럽팀에서도 프로지명자가 종종 나온다. 이런 클럽팀 출신으로 성공한 선수는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가 대표적. 물론 프로가 아닌 만큼 같은 클럽팀이라도 수준 차이가 상당하고 상호차량은 2004년 교토 사회인대회 이후 기록이 없어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이정도 팀은 기본적으로 비선출은 아예 받아주질 않는다. 마치 김성근이 회사 동아리 활동이나 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는데, 이 정도 팀에서 뛰었으면 어느정도 제대로 야구를 배워 야구로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여튼 프로지명을 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니었음은 분명하고, 김성근은 차별이 아니라 야구를 못해서 좋은 팀에 못간 것이다. 일본 이후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다.
이처럼 김성근이 일본에서 야구를 배웠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동아리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사회인야구팀인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개월간 선수생활을 했던 것이 전부로 상당히 열악했다. 그가 일본에서 했던 훈련은 고교 3년 동안 강가에서 돌멩이를 던진 것이 거의 전부였고[16], 상호차량 사회인 야구팀에서 몇개월간 뛰면서 점심시간에 캐치볼을 한 것이 거의 전부였다.
물론 실제로 프로 입단하는 엘리트 선수들 정도의 강도높은 훈련을 하지는 못했지만 실제로는 그래도 고교생활 때 틈틈이 연습시합도 뛰었고, 제대로 된 훈련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 당장 선수를 꾸어 와야 했지만 주말마다 시합을 했다고 하는데, 이 정도만 해도 보통 아마추어 이상의 시합량이다. 또 캐치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쓰여 있지만, 캐치볼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캐치볼이야말로 야구에서 가장 기본적이지만 중요한 훈련이다. 흔히 여러분들이 하는 동네 캐치볼과 선수들의 캐치볼은 이름만 같은 것인데 이걸 우스운 것처럼 써놓은 건 야구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는 방증. 선수들의 캐치볼 훈련은 점점 거리를 늘려서 롱토스 수준으로 늘려서 송구, 포구 훈련역할을 하거나(야수), 전신을 써서 투구하듯 하는(투수) 각 잡힌 훈련으로, 점심시간마다 이걸 했다는 건 시간은 짧아도 어쨌든 매일 제대로 투구연습을 했다는 이야기이다. 이걸 하고 실전까지 충분히 치렀으며,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된 팀에 소속이 되었으니, 엘리트 체육으로서의 야구를 배웠다고 할 만 하다. 어쨌든 일본 기준으로는 수준은 낮았지만, 소위 말하는 '선출' 이라고 불릴 만한 야구는 배워온 것. 그 정도 훈련만으로도 한국에선 국가대표 수준이었고. 비선출은 클럽팀 정도 팀에 입단할 수도 없을 뿐더러 아무리 당시 한국이 야구 후진국이었다지만 실업리그가 있는 나라에서 국가대표는 못된다.
이는 전문적으로 야구를 배우지 않고서는, 강가에 돌멩이만 던져서는 이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수준은 일본 기준 프로 미만이었을지언정, 정식으로 엘리트체육을 배운 것은 맞다. 실제로 한국 실업리그 입단 당시 이미 변화구를 던질 줄 아는 투수였고 실업야구에서 20승 투수가 되며 한국 실업무대를 제패했다.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야구팀 교통부[17]에 입단하면서 한국 실업야구리그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다.
실업야구가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한 1964년, 김성근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를 기록했다. 다만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렸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다만 1963년 재일교포 신용균김영덕이 전성기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진출하여 리그 적응기를 거친 후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김성근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었다. 또 국내 선수들도 변화구를 배우며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팀도 많지 않았고 경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그 전체에 투수를 통털어도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다. 또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와[18]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19]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송구에 약점을 보여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다만 김성근 본인은 경기 전날까지 폭음을 즐기는 방탕한 생활 때문에 선수생활을 그만두었다고 밝혔다. 뭐 그때 당시 폭음은 기본이요 몸관리 제대로 못하는 선수들이 절대 다수였던 시대인지라.
1961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이것의 그의 유일한 국가대표 경력이다. 1963년 일본대표팀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던 제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다.[20] 원래 본 문서에는 김성근이 청소년 대표도 뛰었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김성근은 청소년 대표로 뛴 적이 없고, 성인 국가대표로 1961년 단 한번 발탁된 것이 전부다.
자기포장의 달인인 김성근은 일본 사회인야구도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는데, 일례로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 최일언이 OB에 영입되었을 때 김성근은 "최일언은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정통파로 피칭을 배운 선수'''"라고 치켜 세웠다.# 물론 일본의 사회인야구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단한 것이 맞다.''' 80년대 당시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KBO리그보다 두세 급 이상 수준이 높은 리그였다. 노모 히데오가 뛰던 리그가 80년대 일본 사회인야구였으며, 당장 그 최일언은 김성근의 말대로 이후 꾸준히 연구 발전 할것없이 그냥 첫해부터 167이닝을 던지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지금도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학졸업 후 프로로 권토중래를 노리는 인원들이 입단하는 리그로, 프로 상비군쯤 되는 리그다. 사회인야구 출신 드래프티들은 입단즉시 NPB 1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한 일본 사회인야구 이야기는 김성근의 말이 백번 맞다.
현역시절 좌완 정통파 투수였다. 김성근 감독팬들에 따르면 완벽한 투구폼을 지닌 투수였다고 하는데,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21]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주장했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22]
김성근은 1964년 12월 일본으로부터 더이상 관광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한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의 자서전이나 인터뷰, 강연에서 여러차례 이를 언급했다.
하지만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 달 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져 가족들을 만나는데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참고로 한일국교정상화는 1961년부터 양국간 협조가 시작되어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어 양국간의 회담이 이어졌다. 1964년 3월부터는 각 대학교에서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데모가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학생 반대 시위는 6월 3일 절정을 이루어 '6·3 한일협정 반대운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반대운동은 한일국교정상화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굴욕 협상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의 침략 행위를 보상받기 위해서는 날림으로 협상하지 말고 충분히 많은 액수를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되었고 그해 11월 새로 총리에 취임한 사토 에이사쿠가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국정 제1의 과제로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리하여 1964년말부터 한일국교정상화는 급진전되어 1965년 2월에 기본조약이 체결되었고, 세부 내용이 조율된 후 동년 6월에 정식 조인되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지 두달여만에 한일국교정상화 기본합의가 이루어졌다. 때문에 1964년 12월말 영구귀국한 김성근이 가족과 영원히 생이별을 결심하고 눈물을 쏟았다는건 김성근 특유의 언플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 김성근 본인도 머쓱했는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것도 억지 트집에 가까운데,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국교 정상화 기본합의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본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김성근 본인의 말처럼,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4. 지도자 시절




5. 야구 스타일




6. 언론플레이로 만들어진 허상과 실상




7. 각종 논란 및 구설수




8. 김성근의 저주




9. 징크스 신봉의 끝판왕




10. 야구계 인맥




11. 별명들



11.1. 야신(野神)?


'''기자''': 2002년 한국시리즈 직후 김성근 감독을 '야신'으로 치켜세웠지요. 지금도 '야신'이라는 칭찬이 유효한가요.

'''김응용 감독''': 솔직히 얘기하자면, 승자는 패자를 보다듬어 줘야하잖아요. 그게 예의지.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겼다, 그러면 죽은 사람 한 번 더 죽이는 거잖아.

- [김응용 감독 인터뷰] "야신 김성근? 패자 배려차원에서 한 말"

"야, 이게 말이야 내(김응용)가 야신이라고 그러면 사람들이 야구 신이다 그럴 것 아니냐. 그러면 그 사람(김성근)을 이긴 나는 뭐가 되냐. 나는 사실 그걸 노리고 한 말인데 성근이만 야신으로 떴어. 나는 뜨지 못하고" 그러고는 막 웃더라고요

- 하일성

'야구의 신' 혹은 줄여서 '야신'이라는 별칭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우승소감 중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라고 한 발언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전해 들은 김성근 감독은 이 발언에 대해 "내가 신이면 나를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 것이냐"라면서 웃어넘겼다.
김응용 감독은 이런 방식의 언론 플레이를 자주 했다. 강하면 비하하고, 약하면 과장하는 등. 김응용의 야신 발언은 우승한 후에 나왔기 때문에 상대를 띄워서 자신을 더 높이는 김응용 특유의 화술로 이해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립서비스.
KBS N sports의 '한국야구 레전드'에서 김응용 감독이 회상하기를 '신도 여러가지 신이 있다'면서 농담을 했다. 같은 다큐에서 김성근도 '내가 야신이면 자기는 우승했으니까 더 위 아니냐?'라고 인터뷰했다. 링크
김성근 감독은 포스트 시즌에서 김응용 감독과 맞붙어 이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도 태클을 거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김성근이 1997년까지 해태 감독이었으면 10번 넘게도 우승했을거다' 내지는 '우승 많이 했다고 뛰어난 감독이면 김재박이 김성근보다 뛰어난 감독이냐', 심지어는 '약팀에 간 적 없는 김재박에 불과한 주제에 건방이 하늘을 찌른다' 등의 비아냥이 다수. 이러한 비아냥은 대개 김응용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1998~2000년의 해태 성적에서 기인한다. 마침 김성근이 쌍방울 레이더스를 이끌고 돌풍을 일으켜서 하위팀에 기적을 가져오는 명장 이미지를 굳힌 시기가 199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시기가 미묘하게 이어져서 대비된 효과도 있다.[23]
단기적으로는 팀 성적을 잠깐 끌어올리는 김성근이 돋보일지는 모르나 그가 맡은 팀마다 혹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또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부상으로 신음하기도 했으며(주로 불펜 투수들, 신윤호, 김현욱, 전병두, 이동현, 그외 SK 왕조가 끝난 후에 여러 투수들 등등) 그로 인해 SK 시절을 제외하곤 오랫동안 왕조 건설을 못한 것을 생각한다면 긴 시간 동안의 리그 운용능력은 김성근보다 해태 왕조를 건설한 김응용 감독이 훨씬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해태가 가난한 구단인것을 감안한다면 (해태 타이거즈 문서 참조)) 적어도 김응용의 전성기에는 김응용이 훨씬 뛰어난 감독이다.
감독에서 은퇴하고 삼성구단 사장에 취임한 김응용은 인터뷰에서 아직 현역으로 2연패를 이룬 김성근과 김응용 본인의 감독 현역 시절을 비교해달라는 질문에 자신이 소속팀을 10번 우승시키는 동안 김성근은 우승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즉 야신 발언은 승자의 관용이자 호적수에 대한 립서비스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한 김응용은 라이벌 의식이 있는 기업인 삼성그룹LG그룹한국시리즈에서 진 감독은 대부분 경질되는 것을 잘 알기에 김성근이 시리즈 후 경질될 것이고 나이가 60이 넘은 그가 다시 프로야구 1군 감독으로 복귀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24] 따라서 젊어서부터 선수로서 감독으로서 경쟁해오며 40년 세월 야구계에서 함께 지냈었던 동년배 경쟁자에게 진심어린 마지막 예우를 했다고 봐도 좋을 듯하다. 그래서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그의 입에서도 적장을 '야구의 신'이라 부르는 최고의 예우가 나왔을 것이다. 보통 김성근을 지지하는 이들은 인천야구팬, 쌍방울, SK, LG 팬들인 경우가 많고 김응용을 지지하는 이들은 해태팬, 삼성팬들이 많기 때문에 이 문서와 김응용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서로의 지지자들은 사이가 매우 나쁘지만, 정작 본인들의 사이는 그런대로 양호한 편이며 프로야구판의 이슈에 대해서도 같은 의견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야신은 다시는 프로야구 감독을 못 맡으리라는 세간의 예상을 깨고 2006년 SK 감독으로 복귀하고 야신의 명성을 굳혀나가게 된다.
야신이라는 명칭 때문에 야신상의 모델이자 전설적인 골키퍼 레프 야신과 헷갈려 하는 사람이 있다. 2회 WBC에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은 김인식을 어떻게든 도와주겠다는 김성근 감독과, 김인식 감독이 같이 인터뷰를 했었는데, 도중에 야신이 김인식을 도와준다면 두려울 게 없다는 프레이즈가 등장했었다. 그러자 왜 축구 선수가 우리 김인식 감독을 도와주냐는 질문이 나와서 인터뷰 장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고, 김성근도 웃으면서 이러니까 야신이라고 좀 부르지 말라고 했다는 것. 그러나 SK를 맡은 뒤 보여준 엄청난 성과와 나이를 초월한 김성근의 언행 덕분에, 야신이라는 별명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김성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만큼 김성근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굳어졌다.
여담으로 야신의 유래를 다르게 해석하는 관점도 있다. 백종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이 2014년 11월 3일 스포탈코리아에 쓴 '(야구는 구라다2) 야신의 평생 열등감 - 김응용'에 나와 있다. 기사 말미 '에필로그 - 야신의 유래'를 보면 김응룡 감독이 김성근 감독을 야신이라고 한 것은 김성근 감독이 하도 작전이 많고, 변화가 심하니까 못마땅해서 비꼬아 한 소리라고 한다. 다만 그 칼럼의 전반적 내용은 김성근 감독을 높게 평가하는 내용이므로 백종인 칼럼니스트가 김성근 감독을 격하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니다. 스포탈코리아
참고로 백종인과 그가 쓰는 '야구는 구라다2' 자체도 2014년 잭 그레인키가 '개막전 호주에서 하기 싫다' 는 발언 이후 부상으로 가지 못하게 되자 잭 그레인키와 함께 커쇼를 묶어서 '야비한 놈들, 얍삽한 놈들' 이라 비하하고 류현진을 '우리 귀염둥이' '야비한 놈들이 꾀 쓰는 사이에 묵묵하게 일만하다 다칠까 걱정' 이라 하는 등 상태가 영 좋지 않은 칼럼이다.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기 전에는 SK 와이번스 시절의 좋은 성적과 함께 언론과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좋은 이미지 매우 자주 불리던 별명이었고 2015시즌 중반까지도 자주 그렇게 불렸으나, 시즌 후반부터 보여진 독선적 운영과 투수 혹사논란이 불거진 이후로는 거의 불리지 않는 별명이 되어버렸다. 그 대신 '''킬성근, 곡성근'''[25] 등으로 불리는 경향이 매우 많아졌다.
2015년 한화 시절 이후에도 야신이라고 쓰이긴 하나, 지금 다시 이 별명을 돌아보면 그저 허상일 뿐이었다. 오히려 비꼬는 말로 변질되었고, '''야'''구는 쥐뿔도 모르는 병'''신''' 혹은 '''야'''바위의 '''신'''처럼 노골적인 멸칭까지 나왔다.

11.2. 인천예수


SK 감독 시절 김성근에게는 인천예수라는 별명이 있었다.
사실 호의적인 뜻에서 시작된 별명은 아니다. SK 감독 시절 김성근은 온갖 비매너 플레이로 타팀팬들의 비난을 수시로 받았는데, SK갤러들이 김성근에 대한 비판에 대해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일방적으로 김성근을 찬양하자, 이를 혐오하는 타팀 팬들이 SK 와이번스 갤러리를 중세갤이라 부르고 김성근을 예수라며 비꼬면서 생긴 별명이었던 것. 애당초 인천예수라는 말을 처음 만든 것도 SK갤러들과 싸우던 두산 팬이다.
그러나 태평양 시절을 기억하는 올드 인천팬들에게는 김성근이라는 인물 자체의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별명 또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컸고, 최근에는 오히려 SK 팬들이 앞장서서 인천예수라는 말을 사용하며 김성근 감독 팬질부흥의 새 역사를 쓰고 있으니 아이러니.
그런데 올드 인천팬들에게 김성근의 이미지가 좋다는 김성근 감독팬들의 주장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반론이 있다. 태평양 감독 시절 김성근은 태평양과 남아있는 계약을 파기하고 삼성으로 가기 위해 임호균 각서 파동까지 일으켜 가며 프런트와 마찰을 빚었고, 경질된지 며칠만에 삼성 감독으로 선임되었기 때문에 인천 올드팬인 도원아재들은 김성근에게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고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김광현의 '''결혼식''' 때 한 말이 많은 칭송을 받았다. 그가 한 말은 '''포기하지 마라. 이 위기를 넘겨야 진짜 강해지는 것이다. 괴로워하지 말라. 나중에 그들이 무릎꿇게 만들면 된다.'''
이러한 발언과 모순되게 김광현에게 147구 벌투를 시켰다(2011년 6월 22일). 이 날 김광현의 성적은 8이닝 147구 13피안타 8실점. 팀 에이스를 자기 입맛에 맞게 만들기 위해서 혹사도 마다하지 않는, 징벌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행위였다. 현대야구의 흐름을 거스르는 이러한 지도방법에 힘입어 이 해 김광현은 74이닝을 소화하는 데 그쳤다. 물론 이 사건 이후에 상술된 주례사가 있었음으로 김광현 선수 개인에게 앙금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이러한 사례들이 야구팬들에게 모순된 모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 인천 예수란 별명은 더 이상 쓰지 않기 때문에 '''사장된 별명이라 봐도 무방하다'''.

11.3. 가네바야시 세이콘



재일교포 시절 김성근 감독의 일본 이름.

11.4. 킬성근


감독 생활 중 하도 굴려 선수 생활이 힘들어지거나 다시는 야구를 할 수 없게 된 선수가 많아 붙여진 별명이다. 다음은 그 동안 김성근 감독이 '''혹사시킨 선수들 목록'''이다.
'''OB 베어스'''
  • 박철순: 김영덕 감독 시절 OB의 투수 운용을 책임졌던 이는 김성근이었다.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과 김성근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는데[26] OB 베어스 창단 당시 일본통이었던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과 김성근을 각각 코칭 스태프로 영입했다. 박용곤 회장이 김성근을 과묵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면서 매우 아꼈기 때문에 김영덕 감독도 김성근 코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김성근은 OB에서 투수 운용을 책임지게 되었다. 한번은 김영덕이 김성근이 올린 투수를 교체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자 김성근이 곧바로 가방을 싸들고 나간 것은 당시 매우 유명한 일화다. 박철순의 혹사에 관해서는 김영덕 감독이 거의 욕을 먹고 있지만 사실 박철순의 혹사의 진정한 책임자는 투수 운용권을 쥐고 있었던 김성근이었다. 김성근은 허리 부상을 달고 다니던 박철순을 거의 2경기에 한번꼴로 등판시켰다. 박철순은 원년에 총 80경기 중 36경기(선발 19경기)에 출장하여 224.2(2위)이닝을 던지게 했다.[27]그해 박철순은 24승 4패 7세이브, 평균자책점 1.84, WHIP 0.97이라는 괴물같은 성적을 올렸지만 시즌이 끝나고 허리디스크가 악화되어 1983년 0승, 1984년 0승, 1985년 1승, 1986년 5승, 1987년 2승, 1988년 0승, 1989년 1승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이어간다.
  • 윤석환: 잘 알려지지 않은 최악의 피해자 중 하나. 1984년도에 1군 데뷔를 했다. 김성근 감독이 OB감독을 맡은 1984년부터 88년까지 5년간 마무리투수의 자리에서 540이닝 이상을 던졌다. 공교롭게도 김성근이 OB 감독을 맡은 첫 해와 마지막 해에 각각 심한 혹사를 당했다. 데뷔 첫 해인 1984년에 57경기에 등판, 146이닝이나 던질 정도로 워낙 혹사당했기에 이후로는 신인 때만큼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1984년의 팀당 경기수는 100경기였다. 1988년 다시 마무리 투수로서 13승(모두 구원승), 14세이브을 올려 구원왕이 되었다. 이후 몸이 망가질대로 망가져 몇 년 못 가, 1991년에 8년간의 짧은 선수생활을 마치고 은퇴하게 된다. 다행히도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경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태평양 돌핀스'''
  • 박정현: 김성근 감독 밑에서 89년도 242.2이닝을 던지고[28] 이듬해 191.1이닝을 던진 후 끝없는 재활을 반복하다가 1999년 다시 한번 김성근 밑에서 선발, 구원 다 나와서 124이닝씩 굴려졌고 결국 2000년 은퇴한다.
  • 최창호: 박정현보다는 조금 못했지만 2년 연속 200이닝을 찍을 뻔했다.
  • 정명원: 역시 신인시절 전천후로 굴려지다가 1990년 부상을 당했다. 이듬해 복귀하지만 다시 부상 재발, 이 역시 김성근의 지분이 상당하다. [29] 이후 1994년 마무리로 전향하면서 재기에 성공, 2000년 시즌 종료 후 은퇴했다.
'''삼성 라이온즈'''
  • 김성길: 1991시즌 삼성에서 마무리로 전향한 후 김성근 감독을 만나 선발포함 52경기 188이닝을 던졌고 준플레이오프에서도 살벌하게 혹사당해 김성길이 죽는거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으며, 밥숟가락 들 힘도 없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1992년에 당연히 부진했고 1993시즌 끝나고 은퇴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주유소 직원, 택시 기사 등을 전전했다고.
'''쌍방울 레이더스'''
  • 김현욱 : 전무후무한 구원 20승. 이후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후에도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2004년 부상으로 시즌아웃 된 후 재활에 실패.[30] 36살이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로 은퇴했다.[31]
  • 최정환: 1996년쌍방울에 입단한 투수로 1997시즌에 50경기에 나와서 108이닝을 던졌다. 결국 쌍방울의 해체와 동시에 소리없이 은퇴했다.
'''LG 트윈스'''
  • 신윤호: 2001시즌 김성근 감독 대행의 지도 아래 70경기 144.1이닝을 던져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활약을 보였으나.[32] 다음해 바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명백한 혹사지만 본인은 어쨌든 자신을 주목받게, 돈 벌게 해준 스승으로 김성근 감독을 존경하고 있으며 기량쇠퇴는 본인의 관리 책임이라 말했다.[33]
  • 이동현: 2001시즌에 고졸로 입단해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가능성을 보였지만 2002시즌 불펜으로 전향, 무려 78경기 124.2이닝을 던지는 등 133이닝을 던진 2009년의 전병두, 2015년 112이닝을 던진 권혁을 뛰어넘는 혹사를 당했고 보너스로 포스트시즌까지 준출근 상태로 뛰었다.[34] 물론 이동현의 경우는 부상 상태에서 당겨쓰려고 했던 이순철의 지분도 큰지라.[35] 순수하게 김성근이 박살냈다는 평은 적지만 당시의 등판기록을 보면 절대로 옹호할수 없는 지독한 혹사로 망가져 길고 긴 재활을 거쳐 2009 시즌에야 복귀할 수 있었다.
  • 장문석: 신윤호와 이동현의 압도적인 혹사포스에 짓눌리는 감은 있지만 장문석도 2002시즌에 101.2이닝을 던지는 범상치 않은 혹사를 당했고, 1점대 방어율에 10승까지 한 것은 덤이다. 그 때문인지 2003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고, 2009년 KIA에서 은퇴한다.
  • 김민기: 김민기름이라는 별명이 있던 방화신기의 일원으로 2001년에 45경기 108이닝 방어율 5.08이라는 성적을 거두었다. 2002년에는 선발로 뛰며 99이닝을 던졌다.[36] 그렇게 거의 2년연속으로 100이닝씩 소화한 결과 2년 동안 잠잠하다가 2005년에는 8점대 방어율을 찍기도 했으며, 2006년에는 그나마 좋은 성과를 올렸다.[37] 2007년에 69경기에 등판해서 88이닝을 소화한 결과 완전히 퍼져서 2010 시즌 중 은퇴하게 된다.
  • 이상훈: 김성근이 폐급 선수를 잘 쓴다는 주장에 대한 완벽한 반례. 이미 데뷔시즌인 1993년 150이닝에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혜성같이 LG 선발진에 등장한뒤 1994년 18승, 1995년 20승으로 2년 연속 다승왕을 먹고 [38]한일 슈퍼게임까지 나간다. 이 혹사의 여파로 발병한 혈행장애때문에 1996년 중반부터 마무리로 투입돼서 41경기 99이닝, 1997년 57경기 85이닝으로 혹사당했다. 이상훈이 LG에서 뛰던 시기는 LG의 최전성기로 포스트시즌에마저 등판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덤으로 일본 진출 2년차인 1999년에도 95이닝을 던지며 마구잡이로 굴렀다. 커리어자체가 혹사로 점철된 투수를 미국에서 복귀한 2002년 5월부터 스프링캠프 없이 다시 마무리로 나서기 시작해서 정규시즌에만 52경기 82이닝 18세이브를 거두었다. 그 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에도 장문석, 이동현과 함께 출첵야구를 했고 한국시리즈도 매일같이 등판한다. 결과는 모두가 알다시피 6차전 9대6의 상황에서이승엽의 동점 쓰리런이 터지고 강판. 이 해를 마지막으로 LG는 10년동안 가을야구를 못 가고 15년[39]째 한국시리즈를 못 가고 있다.
'''SK 와이번스'''
  • 채병용: 2000년대 후반기에서 이승호를 이은 SK의 2대 에이스라고 찬양받을 정도로 리즈 시절을 보냈으나 2009년 팔꿈치 부상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스트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롱릴리프로 무리하게 던진 결과 아직까지도 예전 구위를 보여주지 못한채 현재까지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다.[40]
  • 전병두: 킬성근하면 떠오르는 대표 선수. 2011년 부상 이후 혹사 여파로 5년간 재활만 하다가 32세의 나이에 은퇴하게 되었다. 해당 문서 참조.
  • 이승호: 신인 시절부터 강병철 감독에게 미친듯이 굴려졌고, 재기에 성공한 SK 왕조 시절 역시 김성근 감독에 의해 필승조 및 마무리로 굴려졌다.결국 롯데를 거쳐 NC로 이적 후 1군에 거의 나오지 못하고 있다.그리고 16시즌 후 은퇴했다.
  • 김광현 : 김성근이 벌떼 야구를 실현했던 SK에서 유일하게 고정으로 나오는 선발이었으나 3~4일 로테를 돌기도 하고 시즌을 조금 늦게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최다이닝 1위를 먹기도 했다. 결국 2011년 몸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146구 벌투를 던진 뒤 어깨부상이 심해져 재활에만 매진하다가 2012년 중반 돌아와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는 있으나 부상 이전 최전성기를 달리던 시절에 비해서는 조금 아쉬운 모습을 보이는 중.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
  • 살려조 : 2015년 김성근 감독 휘하의 한화 이글스에서 나온 역대급 혹사 계투진. 흔히 알려진 5명의 투수를 포함[41], 번외까지 약 11명의 투수가 전천후로 굴려졌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 참조.
  • 김민우 : 2015년 한화에 입단한 뒤 마구 굴려지고[42] 그 다음 2016시즌 제 상태의 몸이 아닌 상태로 5게임만 뛰고 2군에 내려간 후 7월까지 소식이 없다가 8월 22일 엠스플 뉴스에 올라온 기사에 의하면 '어깨 관절와순 손상'이 심각하다고 한다. 입단전 토미 존까지 받은 상태여서 잘 관리하며 등판시켰어야 했는데 감독의 그놈의 커리어 욕심으로 인해 망가져서 앞으로 제대로 회복할 기약이 없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김민우 본인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현시점에선 매우 암울해 보인다
  • 권혁 : 김성근의 최대 죄악. 한화의 살림꾼이자 살려조 리더 권혁은 이적 후 거의 노예에 가까운 투구를 이어나갔다. 4연속 등판은 물론 지든 이기든 무조건 권혁이 올라왔다. 권혁은 2015년부터 2년 사이 무려 144경기를 등판해 207⅓이닝 3752구를 던졌다. 웬만한 선발투수가 아닌 최정상급 투수도 기록하기 힘든 이닝과 투구수를 무려 불펜투수로 소화하였고 금강불괴 같았던 권혁은 부상으로 무너졌다. 팔꿈치 통증으로 2016시즌 8월 24일 1군 말소가 되어버렸다. 한화팬 포함 전구단 팬들이 김성근을 맹비난한건 덤.
곽동호 객원필진이 야구리포트(KBReport)에 기고한 글에 전반적인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참고로 여기에서는 정우람을 김성근에게 혹사당한 투수들 중 현재 제 기량을 발휘하며 금전적 성공을 거둔 유일한 케이스라고 하고 있다.(한화 투수들은 2016년이 되어야 기량 저하 여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제외) 한편 이 기사는 SK 시절과 2015년 한화 시절의 김성근 감독의 투수 혹사 내용이 앞 부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실하다. 2015년 12월 20일 네이버-케이비리포트 '(프로야구) 야신의 그림자 혹사논란 연대기'
여담으로 류중일하고 늘 비교되고 있다. 첫번째 베플을 보자.

11.5. 그 외


  • SK 왕조 시절, SK 갤러들은 송도큰형이라는 별명을 많이 썼다.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해서 '인천 할아버지'[43]는 별명이 어떠냐 묻자, '인천 사는 건 맞는데 할아버지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본인은 아직 젊다고 생각하며 손자도 없는데 할아버지, 노인 이런 말 싫다고. 감독으로서의 자기 철학과도 관계가 있다고 밝혔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오냐오냐 하지만 아버지는 자식을 훈육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선수들은 자기 자식들과 다름없는 존재이기에 할아버지가 아닌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44] 이에 이기광이 '인천 큰형'이라고 하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image]
2군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 [45]
  • KBS에서 SK 2군 선수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때 후드티청바지를 입은 모습으로 등장, 예미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실제로 사적인 자리에서의 패션을 보면 일흔을 앞둔 나이라고는 볼 수 없을만큼 젊은 패션감각을 보여주기도 한다.[46]
  • 한화에서 와서 100kg가 넘는 한화 선수들의 살을 엄청나게 뺐고 새로 트레이드한 허도환에 대해서도 곧바로 체중 감량을 지시해 야구계의 숀리, 긴숀근이라는 드립이 터져나왔다. 한때는 김태균이 살빼서 포텐이 다시 터진거라는 해석이 나왔으나 현재는 김태균이 늘 그렇듯이 후반기 체력이 부치는 모습을 보이고 넥센의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 재조명 받으면서 구시대의 잔재임이 드러났다.

12. 발음/말투


김성근의 일본식 발음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이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거의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다.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47]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리다는 것이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도 원인의 일부분 정도는 차지하만, 주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리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

1970년대 후반 KBS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다.[48][49]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한국말을 쓸 때 동남 방언이 약간 섞인 모습도 보인다.
사실 언어발음 습득은 감각의 문제라, 일본이나 미국 등 해외에 나가 보면 김성근만큼 해당 국가에 오래 살았어도 현지 발음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한국식 발음의 영어/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도 부지기수고, 반면 몇년만 살아도 현지인과 비슷해지는 케이스도 있는 등 개개인이 타고난 감각에 기대는 바가 커서 김성근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고, 어찌보면 차별적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당장 대학교수로 활동하며 한국어로 인문학 서적을 몇 권이나 써낼 정도로 한국인보다 한국어를 잘 하는 박노자도 발음은 굉장히 어눌하다. 어휘력/언어구사력과 발음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김영덕이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것은 그냥 김영덕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것이다.
다문화사회인 미국은 그래서 문법만 통하면 발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해주는 편이고, 그런 기준에서 볼 때 김성근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하다. 일본식 발음을 고집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지 않아서 그렇다는 주장은 외국어를 익혀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의 부당한 트집에 가깝다. 애초에 김성근의 발음에 약간 일본식 발음이 들리거나 해서 그렇지 선수단 내외에서 의사소통으로 문제된 적도 없고, 인터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기 할 말을 명확하게 잘 해내기때문에 사실 문제삼기엔 어렵다 볼 수 있다. 즉, 아직 이민자에 익숙치 않은 한국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마, ~~~ 아닌가 시프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일종의 캐릭터성으로 잡아 패러디하곤 한다.

13. 기타


  • 데이터 야구의 선도자, 야구 연구를 위해 해부학까지 공부하신 분이라는 언론과 노리타의 포장질에도 불구하고 실제 김성근은 미신을 아주 잘 믿고 따른다고 한다. 그것을 잘 나타낸 글이 있는데 이는 이종남 야구전문기자[50]가 쓴 기사를 배지헌 블로거가 발굴 해내어 옮겨 놓은 것이다. 김성근과 변도사 내용을 보면 도사에게 혹해 극기훈련을 가서 얼음물 입수를 했는데 그걸 지시한 김성근 본인은 쏙 빠져서 열외하다가 의사가 얼음물 찜질이 간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당연한 말이지만 아무 상관없다.) 해주니 김성근은 그날 이후 얼음물 입수 매니아가 되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들어있다.
  • 선호하는 등번호 38번은 절친한 사이였던 김동엽 해태, MBC 감독의 등번호로 김동엽 전 감독이 작고한 후 그를 기리기 위해 달게 된 등번호이다.[51][52] 김동엽은 지금 김성근의 아내인 오효순을 소개시켜 줬을 정도로 인연이 깊었다. 여담으로 프로야구 출범 초기 코치와 감독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쌍방울 감독 시절 91번을 달았던 것처럼 일반적으로 코칭스태프들이 즐겨 다는 70번대 이상 등번호를 달아왔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줄곧 38번을 달고 있다.
  • 야구에 김성근이 있다면 축구에는 주제 무리뉴가 있을 정도로 둘의 운영 스타일이라든가[53] 말하는 스타일이 닮은 편이다. 다만 무리뉴가 김성근보다는 좀 더 엘리트 코스였고 더 많은 클럽을 돌았으며 무엇보다 무리뉴는 선수들과 친밀하게 지내려 노력하는 감독이다.

  • 전권을 요구하거나 엄청난 훈련량, 정신력을 중시하고 별의별 이상한 규칙을 만드는 건 축구펠릭스 마가트와 공통점으로 꼽힌다.
  • 일본에서 살던 때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다. 아버지가 워낙 을 좋아해서 항상 만취 상태로 집에 오기 일쑤였는데, 집으로 오는 길에 지나쳐야 했던 넓은 기차 선로에서 그만 열차에 치이는 변을 당했고 시신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이 중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고 이걸 직접 보기까지 했는데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 오랫동안 지도자 생활을 한 덕에[54], 후배 지도자들에게 이런저런 지적질을 하고 한국 야구 전반에 대해 견해를 밝히는 인터뷰가 많다. 이 때문에 기자들에게는 꽤 좋은 소스 제공자. 은어로 '앵물'이다.
  • 충암고 감독을 그만둔 후인 1979년에 동양방송에서 야구해설을 맡기도 했는데, 해설 중에 일본어가 튀어나온다는 이유로 바로 해직. 승승장구에 출연해 당시 일화를 말했는데, 투수가 던진 공이 몸쪽으로 꽉차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걸 보고는 이빠이(가득 차서) 들어왔어요!라고 말하고 다음 날 잘렸다고 한다. 결국 그 빈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하일성. [55]
  • 2008년 SBS에서 베이징 올림픽 야구 중계방송의 해설위원을 하기도 했다. 이 당시에 칼같이 정확한 예상으로 또 화제가 되었다. 정확한 해설덕분인지 야구를 좀 좋아하는 사람들은 SBS로 놓고 보기도. 탁월한 야구 식견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특유의 웅얼거리는 말투 때문에 일반 시청자들은 그의 해설을 듣기 난감했다는 말도 있다. 지금도 간혹 여러 야구 커뮤니티에서 볼 수 있는 말투인 '마, ~~~하면 되지 시프요...'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 2013년 5월 17일 SBS ESPN에서 아들인 김정준 해설위원과 함께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KIA:LG 경기에 대한 부자(父子) 해설을 진행하였다. 1년 뒤 6월 7일에도 똑같은 구장에서 동일한 팀의 경기의 객원 해설을 하기도 했다.[56]
  • 2009년 10월 22일 KIA 타이거즈와 한국시리즈 5차전 때 경기 도중 선수단을 철수시킨 것으로 인해 한국시리즈 감독 퇴장 1호라는 흑역사를 기록했다. 이것은 2009시즌부터 신설된 '스피드업 규정'에 의한 것으로, 선수단 일부 혹은 전부 철수 시 감독은 즉시 퇴장당하게 되어 있다.
  • 한국시리즈 역사상 2번 있었던, 시리즈를 끝내는 9회말 홈런의 희생양이다. 2002년 LG 감독 당시 마해영의 백투백 홈런, 2009년 SK 감독 당시 나지완의 결승 솔로포.
잘 나가던 시절에는 그가 직접 지은 책이나 그에 관한 책들도 많이 나왔다. 《야신 김성근, 꼴찌에서 일등으로》, 《9회말 리더십》, 《김성근이다》, 《9회말 리더십》,[57] 《김성근 그리고 SK 와이번스》,[58]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59] 중간중간 자기미화가 적지 않다. 2016년부터 이런 철지난 자기미화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 2010년 10월 30일, 뇌경색으로 쓰러진 김동재 KIA 수비코치를 돕기 위한 일구회 올스타와 천하무적 야구단과의 자선경기에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무려 41년만의 등판. 포수석에서는 김경문 두산 감독이 그의 공을 받아 줬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지라 한 타자만 잡고 안타 3개를 맞은 뒤[60] 2점을 주고 자진해서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 2010년 11월 9일 KBS 승승장구에 출연, 그의 야구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초대손님이 나오는데 그 사람은 하일성... 김성근 감독은 중간중간 '이 사람 왜 불렀어?'라고 농조로 툴툴거렸다. 한편 이날 김성근 감독은 자신이 한국 신문에 최초로 연속사진을 도입하게끔 한 인물이라고 설명했으며, 선수시절로 돌아가면 이대호와 가장 붙어보고 싶다고도 밝혔다. 그 외 탐나는 선수로는 류현진봉중근을 꼽았다. 또한 자기가 이대호와 류현진을 맡게 되면 그들의 살을 뺄 것이라고(...).[61]
  • 2010년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스포츠 부문을 수상하였다. 스포츠 지도자로서는 최초라고 한다.
  • 2008년 9월 3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프로야구 감독 통산 1,000승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9년 5월 10일 김응용에 이어 2번째로 한국 프로야구 감독 통산 2,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뒤이어 2011년 5월 4일, 대전 한화전에서 7대 4로 이기면서 또 김응용에 이어 역대 감독 중 두 번째로 1,200승을 달성하였다.
  • 2011년 8월 들어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충돌을 일으켰고, 결국 2011 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겠다는 기습 인터뷰를 했다. 당시 SK 팬들은 한마디로 패닉에 빠졌다. 배은망덕은 프런트 종특이라느니, 인천예수를 골고다 언덕으로 내몰았다느니, 신생 NC 다이노스 1기 팬 모집이니 뭐니 하며 허탈감과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김성근 열풍이 식은 시점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이건 김성근이 조용히 떠나는 대신 작정하고 언플해서 구단과 이만수 감독을 한꺼번에 엿 먹인 것이었다. 제대로 엿을 먹은 SK 프런트는 인터뷰 발표 바로 다음날인 8월 18일자로 김성근을 경질했다.
  • 야구계 기담으로 김성근의 저주가 있다. 본래는 "김성근을 버리는 팀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김성근 없으면 안된다)"는 의미였지만, 지금은 "김성근의 재임 시절 저지른 민폐질로 인해[62] 구단과 후임 감독들이 그 여파를 치우느라 고생한다"는 뜻으로 바뀌었다.
  • 2011년 11월, 동서식품의 핫초코 미떼 CF에 출연했다. 야구시즌이 끝나 을씨년스러운 야구장[63] 관중석에서 보온병에 가져온 핫초코를 꼬마와 나누어 마시면서 '야구하고 싶다'는 꼬마의 말에 '나도요'라고 답하는 김성근 감독의 대사가 어째 서글프게 들린다는 평도 있었다. 이 때 꼬마가 "할아버지 야구 잘하세요?" 라고 묻자 김성근은 "쪼끔" 이라고 답했는데... 크리에이터가 솩빠여서 김성근 감독이 경질되자마자 가서 매달렸는데 계속 고사하는 것을 3달 동안 삼고초려해서 섭외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64]
  • SK 감독 시절 올스타전에서 몸무게 순으로 라인업을 짜곤 했다. 그 결과 통산 도루 9개인 이대호가 1번 타자 출장... 그리고 이대호는 기대에 부응(?)하여 출루한 후 도루를 시도하다 도루사를 당했다.
  • 2012년 11월 22일, MBC 새 프로그램인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에 첫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시작부터 예미넴 스타일로 등장. 초대 손님으로 장미란, 김재현, 마해영이 나왔으며 야구 시작할때부터 지금까지 전반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 고양 원더스의 구단주 허민이 김 감독의 생일선물로 S클래스선물한 것이 화제가 되었다. 원더스를 이끌어준 전문가의 고마움과 함께 차 안에서 편안히 야구에 대해 전념하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근데 김성근 감독은 운전면허가 없다. 야구 외에 다른 일로는 시간을 좀처럼 쓰질 않아서 그렇다고.. LG 감독 시절에도 성동구 성수동 자택에서 지하철을 타고 잠실야구장을 오가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 어느 야구 감독들이나 다 그렇지만, 서울특별시 이외 지역 연고팀의 감독을 맡을 경우 자신의 거주지를 연고지로 옮긴다. 다만, 김성근 본인 혼자만 살 집을 마련한다. 과거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에도 구단이 마련해 준 전주시 내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았고,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에는 송도국제도시에 홀로 사는 자택이 있었다. 마지막 프로 커리어였던 한화 이글스 감독 재임 때도 대전광역시 내에 따로 집을 마련해서 살았다고 한다. 여러 팀을 전전하며 혼자 살아온 이력이 어마어마하기에 웬만한 살림은 본인이 다 할 정도라고 한다. 물론 부인 오효순 씨가 주기적으로 김성근이 사는 집에 와서 살림을 대신 하고 가며, 시즌이 끝나고 동계훈련 출발 전까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수동 자택으로 돌아가서 생활한다고 한다. 참고로 성수동 자택은 삼성 라이온즈 감독 재임 시기에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 2011 시즌 종료 후 스토브리그 때 한 LG 트윈스 팬이 김성근 감독의 LG 복귀한다고 터트린 거짓 루머 때문에 야구 팬덤 한정 '포도주스'라는 은어가 생겼다. 자세한 것은 포도주스 문서 내의 해당 항목 참조.
  • 연습량이 어마어마한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런 감독의 입에서 "너는 그만 연습해도 된다" 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악바리였던 선수가 최동수였다. 일례로 최동수는 하룻밤에 스윙을 5,000개씩 했고, 스윙이 끝나고 나면 배트를 쥔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남이 손가락들을 펴 줘야 배트를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도 손수 최동수의 손을 펴 주었으며, 이에 최동수는 2001년부터 김성근 감독을 통해 프로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게 된다. 최동수 본인의 말에 의하면 매일 화장실 변기를 붙들고 피를 토하던 시절이었다고. 2010년 최동수가 LG에서 SK에 트레이드되었을 때 오히려 최동수는 김성근 감독과 함께할 수 있게 되어 기뻐하기도 했다. 이진영 역시 신인 시절 너무 힘들어서 울면서 공을 받았다는 사례도 잘 알려져 있다. 류택현은 김성근 감독을 통해 커브를 전수받아 2001년부터 중간계투로 뒤늦게나마 두각을 드러냈다.
  •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하다. 김정준에 대한 평가는 '아버지가 잘생겼다' 였으며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본인의 젊은 시절 외모가 상당했다는 내용이 꽤 자주 언급된다. 물론 젊은시절 사진이 꽤 남자다운 매력이 있는데다 당시에는 180cm가 넘는 장신은 드문 편이었으니 자부심을 가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 자서전에선 자신의 아내와 딸들에 대해서도 상당히 예쁘다고 언급하는데(과거 결혼사진을 보면 김성근 감독의 아내는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가족들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모양. 이것이 김성근 감독의 신혼때 사진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한화 감독 부임전 이야기로 김성근이 쌍팔년도 야구를 시작한 2015년부터는 가장 앞장서서 김성근을 비판하고 있다. 2015년의 '이저씨'라는 만화와 2016년 414 대첩 이후 올라온 프로야구카툰은 이례적일 정도로 특정인을 비판하는 카툰이다.
  •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사실상 최초로 팬들의 강력 요구에 의해서 임명된 감독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한화 이글스 프런트는 김응용 감독과 계약이 끝난 후 차기 감독에 김성근 감독을 임명할 생각이 없었다. 이런 프런트의 의중을 알게 된 팬들은 이에 반발. 아고라에 청원하고, 유튜브 동영상을 제작하고, 팬들이 단체로 한화 이글스 홍보팀에 수백통의 전화를 걸고, 심지어 한화 본사에까지 전화를 걸어 그 전화가 회장 비서실까지 닿았다고 할 정도였다. 본사 1인 시위는 덤. 평소 신문을 보는 김승연 한화 구단주가 이를 모를리 없었고, 결국 구단 프런트에 김 감독 임명을 지시했다고 한다.
  • 2015년 4월 2일, 김성근 감독과 고양 원더스 선수들을 그린 파울볼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개봉되었다. 마지막에 하송 원더스 단장이 눈물의 해체 선언 때 등장하지만, 정작 구단주인 허민은 한 번도 안 나온다. 그리고 고양 원더스가 후에 외국인 선수들만을 엄청나게 기용해 왔다는 게 알려졌는데, 외국인 선수들이 플레이하는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데럴 마데이의 혹사와 같은 어두운 면을 다루지 않는 등 논란이 많은 영화이다. 이로 인해 안티 김성근 성향이 강한 자들은 이 영화를 김성근을 치켜세우려고 만든 프로파간다 영화라고 비꼰다. 설재훈과 안형권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며, 원더스 해체 후 각각 SK와 롯데에 육성선수로 입단했지만 설재훈은 2015시즌 도중, 안형권은 시즌 종료 후 정리되었다.
  • 2015년 5월 4일에는 김성근 감독의 SK 시절 용병술을 주제로 손자병법과 삼국지를 비교한 야구병법 택재의 기술이 SBS 스포츠+에서 방영되었다. 유튜브 링크 * 물론 지금 보면 웃기지도 않은 헛소리.
  • 2015년 디시인사이드에 갤러리가 생겼다.
  • 노장 선수들의 복리후생에 앞장서는(?) 감독이다. 노장 선수들을 영입하는 강박증 덕분이다. 물론 김성근 본인의 돈이 아닌 구단 돈이 나가는 일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넥센에서 혹시 포텐이 터질까하고 박병호 덤으로 데리고 왔던 심모씨. 결국 제 실력 남 못주니 보호선수 제외 시켰고 이후 롯데에서 혹시나 하고 데리고 갔으나 역시........그럼에도 자신만만하게 fa신청했다가 미아가 되었지만 우리 감독님께서 선수의 생계를 위해 13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데리고 왔다. 비슷한 예로 왕조 시절 애제자라고 하는 송모씨를 거금 34억을 주고 데려왔다. 이 선수들 fa가47억인데 한물 간 두 선수를 위해 거금을 한화라는 기업을 압박해 내놓게 하다니 노장 선수 사랑은 정말 대단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2년 동안 김태균 조인성을 제외하고 자기가 원하는 선수를 거금을 주고 데려왔다. 정우람은 90억, 권혁은 32억, 배영수는 21억, 로저스는 22억 그러나 현재 정우람은 개점휴업상태이고 배영수는 삼성을 나오면서 멋지게 입을 털고 마운드에서도 탈탈 털렸다. 권혁은 김감독의 총알받이가 되고 휴식 대신 뺨 툭툭을 통해 힘을 얻고 있다. 로저스는.........
  • 2017년 한화 이글스 감독 해고 직후, 지인이 있는 울산광역시로 내려갔다.[65] 그리고 울산공고 야구부를 매일 오후 찾아와 지도한다는 기사가 뉴스에 떴다.
  • 축구감독 김호와 상당히 흡사한 점이 많은데 둘 다 과거에는 명장으로 추앙받았으나 대전광역시를 연고지로 한 스포츠팀 감독을 맡은뒤 명장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졌던 어두웠던 이면이 드러나면서 추락했다.
  • 한화 감독 해임 이후 박한 평가를 받다가, 2019년 후반기에 롯데 자이언츠 감독이 공석이 되면서 커뮤니티들에서는 차기 롯데 감독으로 추천받는 감독 1순위로 되고 있다. 물론 노리타들의 개입이 있었겠으나, 프로팀이 맞나 싶을 정도의 실책과 수비를 보여주어 한화와 꼴찌를 다퉜는데, 김성근 전 감독이 그 해이한 정신력을 잡아줄 최적의 인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전례로 봤을 때 김성근의 야구관이 롯데 프런트와 상극이라 감독으로 선임되어도 잦은 마찰이 예상된다. 이후 키움 히어로즈 수석코치였던 허문회가 차기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롯데 감독 떡밥은 종결.
  • 말년에 부동산 대박이 났는데, 김성근 감독이 약 30년 정도 거주한 집이 성수동 재개발계획 부지에 포함되어 있어 결국 자택을 건설사에 135억 원에 매각해 부동산 대박이 났다. 이 한 방으로 한평생 야구 감독해서 번 돈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다.(...) 이 와중에 건설사에서 집을 빨리 안 파는 김성근을 압박하기 위해 김성근이 알박기를 한다는 식의 기사를 내서 압박하는 촌극이 있기도 했다. 김성근 측은 성수동에 계속 살고 싶은데 마땅한 매물이 없어서 이사를 못 가고 있으며 일 때문에 일본을 왔다갔다하느라 건설사 사람과 만날 시간이 없어 협상이 늦어진 것이라고 해명. 상식적으로 30년동안 알박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으므로 여론은 김성근의 손을 들어주었다.
  • 여튼 이런 압박이 효과가 있었는지 결국 상술한 대로 135억원에 집을 팔긴 팔았다. 이후 2020년 배우 이시영이 내놓은 건물을 43억원에 구입했다고 알려졌다. 부인 오효순 씨가 주도해서 구입했다고 하는데 2010년대 후반 수익형 부동산의 트렌드인 꼬마빌딩을 구입한 걸 보니 부인은 꽤 재테크 잘 아는 복부인인 듯.
  • 야구감독으로서는 드물게 전용 응원가가 있었다. # 원곡은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 최근 이 응원가는 여러 인터넷 방송에서 도네이션 밈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네받은 영상이 잘 나가다가 갑자기 위 응원가가 나오는 게(통칭 변화구) 주 패턴인데, 원래는 트위치케인TV[66]에서만 쓰이던 밈이었으나 2020년 후반기 들어 케인과 친분이 있는 인터넷 방송을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추세다. 이 응원가가 도네로 재생되는 경우 방송을 불문하고 채팅창이 "ㅖㅖㅖㅖ"로 도배된다.

14. 총평


[image]
승리제일지상주의 야구.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성적에 집착했다. 반대 여론을 없애려고 말이다. 그가 일본 출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반일감정이 심하던 시대에 일본 출신은 차별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실력이 전부인 스포츠에서만큼은 재일출신들에 대한 차별이 없었을 뿐만이 아니라 오히려 대체적으로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회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일본파가 은근히 대접을 받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에서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재일 출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실력을 보여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과거에는 이러한 방식이 꽤 잘 통용되던 시기도 있었다. 일단 인기에 힘입어 실업리그가 출범은 했지만 명색이 돈 받고 야구한다는 선수들이 변화구는 구경도 못 해본 선수가 태반에, 체계적인 몸관리 등도 제대로 모르던 그 시절 김성근이 일본에서 배워온 방식은 비록 지금 와서 보면 무식하게 많은 훈련량으로 밀어붙이는, 지금 와서 보면 주먹구구식이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못 되던 프로 이전 실업야구 수준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덕분에 실업 시절 명선수로서 다승왕,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고, 감독으로서도 초창기 프로야구판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혹사라고는 하지만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그랬다. 장명부가 427이닝 30승을 거둔 게 프로야구 2년차고,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게 저 당시 에이스라면 이나오 카즈히사, 게일로드 페리같은 선수들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300이닝을 척척 먹어줬다. 그땐 스포츠 의학, 관리같은 개념이 없고 애초에 프로스포츠로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번다는 개념이 희박해서, 젊었을 때 잠깐 하고 모기업에 취직하거나, 모아둔 연봉으로 가게를 열거나 하는 그런 시절이었기에, 관리를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필요조차도 없었다. 김성근처럼 선수를 굴렸다간 30대 찍기도 전에 은퇴하게 되지만 그 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당시 기준으로 김성근이 특별히 심하게 혹사를 하는 감독은 아니었다. 샌디 코팩스를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만든 월터 올스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3일 텀으로 6번씩 완투를 시킨 토미 라소다같은 감독이 명감독으로 칭송받던 시절이었다. 그땐 누구나 애초에 선수를 제대로 휴식을 주어가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몰랐으며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다. 야구가 아니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하루도 휴일이 없이 달에 2일 혹은 아예 못 쉬거나 일일 근로시간이 14~15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게 불법도 아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인 석면을 뭔지도 모르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면서 마구 흡입해댔고, 야구도 그런 것이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터무니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그 사람의 행적은 반드시 그 사람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그 당시의 김성근을 평가하는 것은 베이브 루스타이 콥 같은 100년 전의 위대한 선수들을 변화구도 커브 한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활동한 주제에 전설 대접 받는 범부, 세종대왕을 민주정도 모르는 구시대적 왕조체제 하의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꼴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시대에 최고가 된 그들을 세상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 김성근의 방식은 몸관리는 커녕 프로의식이 덜 정착되어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술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는 꼭 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는데, 이는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얘기다. 손민한이 임페리얼에 떡이 되서 토하고 나가서 완봉했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이 아니고, 2020년 지금도 한국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는 커녕 흡연자 수가 상당할 정도이다. 지옥훈련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과 몸관리를 철저히 해 줘야 제 기량을 낼 수 있는데, 여태까지의 한국야구는 훈련을 너무 많이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훈련을 안 해서 문제에 가까운 쪽이었다. 심지어 2000년대 들어선 비교적 최근까지도.
그러나 시대는 진보하면서 90년대의 라루사이즘, 00년대에 화두가 된 스포츠 과학 등 과학이 진보하며 스포츠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스포츠 외적으로도 인권의식이 상승하였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혹사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회복, 관리가 선수의 능력을 더 끌어내준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각종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으나, 김성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다.
권혁이나 각종 살려조의 투구는 김성근이 젊은 시절을 보낸 70~80년대 기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2010년대에는 야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대에 뒤쳐진 터무니없는 행위여서 문제가 되었을 뿐. 김성근 관련항목들을 보면 김성근이 마치 뿌리까지 썩은 무슨 악의 화신인 마냥 서술해놓은 반 김성근 성향 유저들의 비토가 곳곳에 남아 있는데, 팀을 망친 김성근이 싫은 것은 이해하지만 딱히 김성근이 사이코패스거나 뿌리까지 악인이여서 그런 기용을 했다고 보기엔 무리가 많다. 그냥 김성근 본인조차 그런 상식외의 혹사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는데 그냥 내가 술이나 먹고 몸관리를 안해서 그랬지 허허 하면서 넘길 정도로 그게 문제인 줄 모른, 김성근 시절에는 당연한 기용이었던 것.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을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했고 그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구시대 야구인이었을 뿐이다.
여튼 그렇더라도 아직 소위 말하는 아마추어리즘[67]이나 적은 경기수, 미국이나 일본보다 발전이 늦고 최신메타의 도입이 늦은 한국야구 환경 등 김성근에게 유리한 조건이 충분히 남아있던 SK 시절까지는 전임감독이 물려준 풍부한 선수팜, 본인의 강훈련, 원숙한 경험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져 야신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었다. 사실 대략 SK 때부터 혹사 이야기 등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김성근에게 유리했던 외적 조건으로 좋은 성적을 찍어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김성근이 현장을 떠나있던 대략 5년간 프로야구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김성근식 불펜 짜먹기 야구는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특히 신구단 창단이 매우 컸는데, 그전까지는 1년 128경기라는 적은 경기수로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거의 없었다. 1년에 한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68]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하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고, 어찌됐건 팀 성적은 좋으니 주류여론이 되지는 못한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체제로 로스터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 일본보다도 많아진 경기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풀, 돌아온 빅볼메타로 인해 힘들어진 지키는 야구, 장마철에 우천으로 인한 휴식 확보가 예전보다 안 되는 등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이상 필승조 한명 불펜노예로 쓰는 정도로는 시즌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3~4명을 동시에 망가지도록 기용해야 할 정도로 김성근식 야구는 힘들어졌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진다.
선동열 등 비슷한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은 잘리거나 은퇴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거나 새로운 메타에 맞는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상황임에도 김성근은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성적도 명분도 둘 다 잃은 채 잘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69]
결국 현역 시절에는 명선수로, 감독 시절에는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나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비결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잘 바꾸려 하지 않아서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어 사라져 가고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라져 간다. 김성근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번외로, 야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다. 사실 프로야구 감독까지 올라가는 사람치고 야구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만은 그저 야구를 하기 위해 가족도 버리고 영주귀국을 했던 이야기부터 프로야구 감독으로서 부와 사회적 지위까지 다 손에 넣었고 한화에서의 실패로 몰락했음에도 은퇴를 하지 않고 나이 80이 다 되어 일본까지 다시 건너가 코치를 하는 것을 보면, 일종의 광기나 집착까지 느껴질 정도로 야구에 미친 사람. 이는 안티들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14.1. 관련 어록


김성근의 '''예고된 몰락''', '''적폐'''가 되어버린 '야신' 신화

단순히 성적 부진만 아니라 김성근 부임 이후 끊임없이 거론된 '''선수 혹사 논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수많은 구설수를 초래했고 한때 든든한 우군이었던 팬들과 구단조차도 질린 나머지 잇달아 등을 돌리게 했다.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 밖에 없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이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다.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하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


15.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팀'''
'''경기'''
'''승'''
'''패'''
'''무'''
'''정규리그'''
'''최종순위'''
1984
'''OB 베어스'''
100
58
41
1
'''1위'''/6팀[70]
3위/6팀[71]
1985
110
51
57
2
4위/6팀[72]
4위/6팀[73]
1986
108
56
48
4
4위/7팀[74]
4위/7팀[75]
1987
108
55
52
1
4위/7팀[76]
4위/7팀[77]
1988
108
54
52
2
5위/7팀[78]
5위/7팀
'''통산'''
534
274
250
10
­
'''연도'''
'''팀'''
'''경기'''
''''''
''''''
''''''
'''정규리그'''
'''최종순위'''
1989
'''태평양 돌핀스'''
120
62
54
4
3위/7팀
3위/7팀[79]
1990
120
58
59
3
5위/7팀
5위/7팀
'''통산'''
240
120
113
7
­
'''연도'''
'''팀'''
'''경기수'''
'''승'''
'''패'''
'''무'''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1
'''삼성 라이온즈'''
126
70
55
1
3위/8팀
3위/8팀[80]
1992
126
67
57
2
4위/8팀
4위/8팀[81]
'''통산'''
252
137
112
3
­
'''연도'''
''''''
'''경기'''
''''''
''''''
''''''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6
'''쌍방울 레이더스'''
126
70
54
2
'''2위'''/8팀
3위/8팀[82]
1997
126
71
53
2
3위/8팀
3위/8팀[83]
1998
126
58
66
2
6위/8팀
6위/8팀
1999
81
17
59
5
8위/8팀[84]
-
'''통산'''
459
216
232
11
­
'''연도'''
''''''
'''경기'''
''''''
''''''
''''''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1
'''LG 트윈스'''
98
49
42
7
6위/8팀
6위/8팀
2002
133
66
61
6
4위/8팀
'''준우승'''/8팀[85]
'''통산'''
231
115
103
13
­
'''연도'''
'''팀'''
'''경기'''
'''승'''
'''패'''
'''무'''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7
'''SK 와이번스'''
126
73
48
5
'''1위'''/8팀
'''우승'''/8팀
2008
126
83
43
0
'''1위'''/8팀
'''우승'''/8팀
2009
133
80
47
6
'''2위'''/8팀
'''준우승'''/8팀
2010
133
84
47
2
'''1위'''/8팀
'''우승'''/8팀
2011
93
52
41
0
3위/8팀[86]
-
'''통산'''
611
372
232
13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최종순위
2015
'''한화 이글스'''
144
68
76
0
6위/10팀
6위/10팀
2016
132[87]
64
65
3
7위/10팀
7위/10팀
2017
43
18
25
0
9위/10팀[88]
-
'''통산'''
319
150
166
3
­
'''총계'''
'''2646'''
'''1384'''
'''1202'''
'''60'''
­

16. 관련 문서



[1]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かねばやし せいこん, 金林星根, 김림성근). 김성근의 언행이 아니올시다면, 가차없이 나온다.[2] 출생 당시엔 쇼와 17년. 김성근 본인이 진정으로 인정하는 생년이며, 그 당시일본의 또 다른 연호이자, 대한민국단기와 같은 황기도, 일본군부를 중심으로 병행해서 사용했었다. 그 당시황기 2602년.[3] 원적은 경상남도 진주시(구 진양군).[4] 1964년 12월에 영주 귀국했다. 일본 출생이긴 하지만 재일교포이며 일본 국적을 가진 적이 없다.[5] #[6] 1960년 동아대학교에 입학하여, 1학년 2학기 도중에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2011년 동아대로부터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7] 코치 고문. 코치에게 자문하는 역할이며 지도자 경력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8] 김성근이 막 한화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의 문서와 대조해보자. 두 문서는 정말로 '''같은 사람'''을 서술하는 문서다. 해당 문서는 r900판으로 2015년 6월 10일 즉, 시즌 중반에 편집된 문서이다.[9]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하여 최종 4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하여 최종 4위, 19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해태에 패하여 최종 3위,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빙그레에 패하여 최종 3위,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하여 최종 4위,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하여 최종 3위, 199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했으나,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지면서 최종 3위.[10] OB 베어스의 이광환, 삼성 라이온즈의 우용득, SK 와이번스의 이만수, 한화 이글스의 한용덕.[11] 옆에 있는 사람은 동산고 출신의 최관수 감독.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를 당대 최강의 팀으로 만든 그 최관수 감독 맞다. 김성근 감독과는 기업은행 시절 원투펀치였으며 김성근 감독의 부인을 소개시켜 줬다.[12] 아마에서는 현재까지 통용되는 얘기다. 좌타가 지극히 모자라기 때문에 수비를 제일 못 하는 선수를 우익수에 배치한다. 어지간하면 그 쪽으로 타구가 갈 일이 없어서. 부연하자면, 지금은 적어도 프로에서는 좌타의 유리함이 알려져 우투좌타가 양산되는 등 시대가 바뀌었지만 옛날만 해도 그런 일이 적었던 데다, 실력 자체가 지금과 다르다 보니 밀어쳐서 공을 외야에 보내는 파워히터가 적었다.[13] 출처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14] 프로 용병도 아니고 대학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지도 않았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당시는 실업과 대학리그가 사실상 프로리그같은 역할을 했고, 김성근은 지금으로 치면 용병이 맞았다. 프로 초창기에 있던 제도인 재일교포 선수에 해당한다고 해야할까. 2019년 지금도 대학 운동부는 실력을 최우선으로 보는지라 괜찮은 학생은 학력 상관없이 스카우트해서 연고대 같은 명문생이 한글도 제대로 못 쓰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런 상황이니 외국인이던 김성근이 한글을 못 하던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명문대 야구부원들도 한글을 제대로 못 쓴다.[15] 태어날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외국인 선수(장훈이 태어날 당시엔 한국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장훈도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된다)도 일본인 선수로 대우하도록 바꿨다.[16] 김성근 자서전에 따르면 학교에서 돌멩이 던지기 훈련을 한 후에 개인훈련으로 내리막길 달리기, 자전거 서서 타기 등의 훈련을 했다고 한다[17]국토교통부의 전신.[18] 나중에는 전등을 키는 것조차 어깨가 안움직여서 힘들었다고 한다.[19] 당시 투수들은 경기 후 아이싱은커녕 오히려 뜨거운 걸 어깨에 대고 있었다고 한다.[20] 훗날 김응용 감독은 현역시절 자신은 12년 동안 국가대표선수로 뛰었는데, 김성근은 1년밖에 못뛰었기 때문에 국가대표시절 김성근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21] 참고로 들고 온 사진은 대한민국 최초의 연속사진이라고 한다.[22] 박영길재일동포 출신인 신용균이 최초로 싱커를 던졌다고 증언했고, 김영덕은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 본인이 한국에서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진 인물로 기록된 것을 스스로 부인하면서, 신용균이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졌으며, 김영덕 본인은 싱커를 처음으로 던졌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싱커볼을 던진 투수가 김영덕 보다 이전일 가능성이 높다.[23] 다만, 1999~2000년의 해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1998년에는 피타고리안 승률로는 쌍방울(0.471)에게 뒤지던 해태(0.463)가 6위 쌍방울보다 4위 OB에 가까운 5위를 기록했다. 당시 해태는 이종범을 비롯하여 이순철, 조계현이 빠져나갔고 쌍방울은 박경완이 시즌 시작 전, 조규제가 7월에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었다.[24] 실제로 김응용 본인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25] 유래는 해당 영화에 등장하는 일본 출신 외지인에서 왔으며, 김성근 감독이 재일교포 출신이라는 점과 투수 혹사를 비롯한 독불장군식 운영으로 인해 팀이 손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다 해서 붙은 별명이다.[26] 특히 1978년 청소년 국가대표팀 감독과 코치였을 때 서로 사이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27] 이게 어느 정도의 혹사인지 감이 안잡힌다면, 이해 일본프로야구에서조차 박철순보다 더 많은 이닝을 던진 선수는 키타벳푸 마나부(히로시마, 26경기 267.1이닝), 에가와 스구루(요미우리, 31경기 263.1이닝) 니시모토 다카시(요미우리, 37경기 262이닝), 오바나 타카오(야쿠르트, 42경기 246이닝), 엔도 카즈히코(타이요, 38시합 221.1이닝)의 5명뿐이었고, 게다가 이 투수들은 대부분의 경기에서 선발 투수로 뛰었다.(키타벳푸 35시합, 에가와 31시합, 니시모토 33시합, 오바나 32시합, 엔도 34시합) 비록 혹사긴 해도 박철순처럼 확고히 정해진 보직 없이 마구잡이로 굴린 건 아니었고 오히려 어느 정도 이닝 이터로 봐줄 만한 면모가 있었다. [28] 데뷔 2년차이자 풀타임 1년차였고, 또한 아직 신인왕의 자격도 갖고 있었다. 이 시즌 혹사로 인해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했고 신인상을 받았다.[29] 사실 최창호, 정명원은 후임 감독 박영길의 책임도 있긴 하다.[30] 1997년 시즌이 끝나고 무릎 수술을 하였는데 재활이 되기도 전에 다음해부터 다시 굴려져, 이 무릎 부상은 김현욱의 커리어 내내 따라다니게 되었다.[31] 다만 김성근 감독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서정환, 김응용도 무지막지하게 굴렸다. 세감독의 합작품이라고 보면 될듯.[32] 2할7푼 대의 홈런왕인 이승엽을 누르고 정규시즌 MVP도 수상할 뻔했다.[33] 사실 혹사에 둔감한 게 꼭 감독에게만 해당되는 법은 없다. 더군다나 신윤호는 김성근 감독을 만나기 이전엔 상황이 워낙 안 좋았고, 김성근 때 비로소 빛을 본 케이스다.[34] 2002년 이동현은 132경기 체제에서 124.2이닝을, 2009년 전병두는 133경기 체제에서 133이닝을, 2015년 권혁은 144경기 체제에서 112이닝을 던졌다. 전병두의 경우에는 SK가 한국시리즈 준우승을 차지했지만 포스트시즌 엔트리에서는 제외되며 그대로 시즌 마감, 권혁의 경우에는 팀이 아예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이동현은 정규리그에서만 124.2이닝을 던지고 당시 4위로 시즌을 마쳐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갔던 LG에서 준PO-PO-한국시리즈까지 거의 출근도장을 찍을 정도로 나온 탓인지 전병두, 권혁보다도 더많이 굴려진 셈.[35] 이 당시 순페가 남긴 명언이 '재활은 마운드에서 하면 된다'.이며, 결국 이동현은 같은 시기 병역비리와 3번의 수술이 겹쳐서 재활기간도 길어졌다. 그나마 이동현이 제 기량을 찾은 것은 2010년의 일이다.[36] 방어율이 3.18이며 22경기 7승 5패[37] 2006시즌은 김민기, 진필중이 3점대 방어율을 찍고 심수창이 10승을 거두는 등 LG 투수진이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잘 굴러갔다. 당시 LG 성적은 최하위. 하지만 2006년의 경우 프로야구 역사상 유례없는 투고타저 시즌이었다는걸 감안해야 한다.[38] 특히 1995년엔 시즌 후반기에 김태원의 부진을 메꿀 생각을 안 하고 이상훈-정삼흠-김기범-박철홍의 4인 로테로 돌렸다. 당연히 당대 최고의 이닝이터인 이상훈이 그 짐의 대부분을 떠맡았다.[39] 2017시즌 기준[40] 사실 채병용의 경우에는 전임 감독들이었던 강병철-조범현 시절에도 전천후로 굴려졌던 경력도 있고 수술까지 받은 적 있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를 관리도 못해줄망정 다시 굴렸으니...[41] 권혁, 박정진, 윤규진, 송창식, 김민우[42] 굴려진 걸로 끝이 아니라 그 사이에 특투까지 했다고 한다.[43] 상술한 '인천예수'가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던 만큼 방송용으로 순화한 것으로 보인다.[44] 이 점에 있어서 또 정반대인게 김응용인데, 김응용은 기본적으로 훈육하는 아버지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선수들의 사생활은 앞가림만 잘한다면 적당히 못 본 체하면서 뒤에서 지켜보는 할아버지 타입이다. 각각 일장일단이 있는 타입.[45] 2011년 5월 15일 방영된 다큐멘터리 3일 <나는 프로다 - 프로야구 2군 선수단>에서의 한 장면. 이 방송을 실시간으로 보던 야구 커뮤니티들은 저 장면에서 전부 다 빵 터졌다.[46] 실제로는 60이 넘기 전까지는 일반적인 중년 노년 아저씨들처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선수들이 훈련하러 올 때 사복으로 청바지를 입고 들어오는 것도 금지했다고 한다. 환갑이 넘은 뒤에야 일상생활에서 청바지를 입어보고 편하다는 것을 느껴서 청바지를 자주 입게 되었다고 한다. 패션잡지도 틈틈히 보면서 연구도 했다고.[47] 이때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가 한눈을 팔아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고 훈계를 한 뒤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48] 이후 김성근의 후임 해설자가 바로 하일성 [49] 타자가 가라스윙(헛스윙)를 했어요, 바깥쪽 직구가 이빠이(꽉차게) 들어왔어요 등의 표현을 2000년대 이후까지도 썼다고 한다.[50] 1세대 야구 전문 기자. 아래 링크 기사의 본문 역시도 과거 김성근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기사를 그대로 퍼온 것이다.[51] 이북 황해도 출신인 김동엽 감독이 38번을 달게 된 이유는 한국전쟁 시절 38선을 월남해서 남한에 정착했다는 이유로 달게 된 등번호라고 한다. 자세한 건 김동엽 항목 참조.[52] 우연의 일치로 동명이인인 1990년생 삼성 외야수 김동엽도 등번호 38번을 달고 있다.[53] 무리뉴는 첼시 FC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전권을 요구했고 김성근 역시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할 때 전권을 요구했었다. 또한 주전 혹사도 심하다.[54] KBS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피서를 갔냐는 질문에 1978년이라고 대답하면서 이제는 야구장이 피서지라고 대답했을 정도다.[55] 1970년대와 2000년대의 반일감정 차이를 고려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왜색이 진하다는 이유로 모든 일본 매체의 수입이 금지되던 시절이었고, 백인천의 요시는 2000년대 이승엽이 출전하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중계방송에서 나온다.[56] 나지완 타석 때, 자신이 감독으로 있어서 통한의 준우승을 당했던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를 SBS Sports에서 틀어 버렸다. 중계를 보던 야구팬들은 단체로 빵 터졌다.[57] 김인식 전 감독과 같이 저술한 책이다.[58] 아들 김정준 해설위원이 직접 쓴 책이다. [59] 하지만 김성근은 그 많은 사람들의 팔을 잘라버리고 소모품으로 트레이드 처분해버렸다.[60] 선두타자 김창렬에게 기습번트를 맞고 출루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다른 천무단 선수들은 김창렬에게 '왜 그랬냐'고 투정을 부렸다.(……)[61] 하지만 무턱대고 체중을 감량해 버리는것도 좋지 않은 게, 그 선수의 신체 피지컬이나 밸런스 등이 한번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장 김성근이 한화 감독을 맡던 시절 투수 양훈에게 무작정 체중 감량을 지시했다가 밸런스가 무너져 내리며 말그대로 폭망. 결국 넥센으로 트레이드된 후 어찌어찌 벌크업으로 체중을 불려 기사회생했다. [62] 가령 혹사로 인해 부상병동에 오르는 선수들이 많아진다던지, 임기 내 성적을 최대한 내야 하기 때문에 유망주를 즉전감 노장선수와 트레이드한다던지, 본인 임기 내에 최대한 많이 써먹기 위해 어린 선수들의 군 입대를 막은 결과 30살이 다 돼서 공익근무로 군 문제를 해결하는 바람에 제대 후 실전감각이 죽어 있다던지, 또 많은 선수 영입을 요청하는 바람에 구단 연봉총액이 급상승해 버린다던지...[63] 수원야구장 으로 추정된다.[64] 한때 음치가수 컨셉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재수가 이 광고를 패러디하였는데 패러디에서 나온 꼬마 이름에 이만수 감독의 이름을 갖다붙여서 디스하였다.[65] 일부 커뮤니티에서 울산에 김성근이 사퇴 직후 나타났다는 썰이 있었다.[66] 과거 본인이 노리타였음을 밝혔던 바 있으며 이 때문에 도네이션 합성에 김성근이 이용되기 시작했다.[67] 사실 지금도 동양야구는 미국에 비해 아마추어리즘이 많이 남아있다. 위장선발을 쓴다고 김성근을 비난하는 내용이 많은데, 정작 미국에서는 위장선발은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국은 아직도 선발투수 예고제가 없고, 경기 끝나고 감독이 인터뷰에서 다음 경기에 누구 낼 거라고 말하는 식으로 선발을 고지하는데 가끔 입 다무는 감독도 있는데 이것도 전략의 일종으로 평가되지 비겁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정정당당한 승부를 좋아하는 동양야구의 대표적인 아마추어리즘이다. 그 외에도 병살방지를 위한 슬라이딩이나 포수 태클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고,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다. 여튼 다들 아마추어정신, 소위 말하는 매너를 지켜가며 싸우면 안 지키고 꼼수 쓰는 쪽이 유리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고 김성근은 이 점을 십분 활용했다.[68] 실제로, 그 유명한 SK시절 김성근 벌떼불펜 중 막상 혹사로 탈이 난 선수는 다 아시는 전병두와 구위 저하를 일으킨 송은범밖에 없다. 사실 정우람도 보통같으면 망가지도록 기용하긴 했는데 안 고장나서(...) FA까지 무난히 먹었고.[69] 그나마 이런 소위 말하는 옛날식 불펜야구하던 감독들 중 오래 버틴 쪽이 김경문인데, 김경문은 오히려 타격면에서는 김성근이랑 정반대로 당시 메타에 딱 맞는 빅볼야구를 해왔고, 투수진도 거의 김성근 살려조급 혹사를 했음에도 김진성, 원종현, 이민호 등이 상식을 뛰어넘는 내구성을 보여주며 그냥 우연히(...) 오래 버텨준 덕에 김성근보다는 좀 더 성적을 내며 오래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70]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전·후기 리그 통합 승률 1위[71]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3위[72]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73]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74]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1위[75]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76]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77]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78]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79]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80]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배[81]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82]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배. 심지어 2승을 한 뒤 3연패 당하면서 KBO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83]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84] 김성근 경질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승률 0.224로 8위였으며,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85]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이 이 해의 일이다.[86] 경질 당시[87] 허리 디스크 수술로 12경기 김광수 대행 체제[88] 경질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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