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코 참사

 



'''웨이코 포위전'''
Waco Siege
[image]
'''기간'''
1993년 2월 28일 ~ 1993년 4월 19일
'''장소'''
미국, 텍사스, 웨이코, 마운트 카멜 센터[1]
'''발생 원인'''
ATF의 수색, 체포영장 집행 시도
FBI의 다윗파 강제 해산 시도
'''교전집단'''
[image]미합중국 연방정부
- [image]ATF
- [image]FBI
- [image]미합중국군
[image]텍사스 레인저
[image]다윗파
'''지휘관'''
자넷 리노
제프 자마르
리처드 로저스
데이비드 코레시
스티븐 슈나이더
웨인 마틴
'''병력'''
ATFFBI 요원 수백명
신도 91명
'''피해 규모'''
ATF 요원 4명 사망, 16명 부상
2월 28일 6명 사망
4월 19일 76명 사망
'''결과'''
다수의 영유아를 포함한 대규모 인명피해
미국 전역에 반정부 정서 확산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의 동기 제공
1. 개요
2. 배경
3. 총격전
4. 강경 진압
5. 이후


1. 개요



Waco siege (또는 Waco massacre)
1993년, 텍사스 주 웨이코에서 미국 연방정부와 종교집단 다윗파[2]가 51일 간 대치한 사건이다.

2. 배경


미국 연방정부는 다윗파가 불법 총기를 매매하고 미성년자 성폭행, 마약 유통도 벌이고 있다고 의심했다. 주로 탈퇴한 신도의 투서에 의해 제기된 의혹들이었고 대부분은 훗날 반박되었다. 그러다 1992년 5월, 미국 연방정부는 이들이 이미 상당량의 화기를 비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본격적인 압박을 가하기 시작, 1993년에는 웨이코 외곽 카멜산에 위치한 이들의 본거지를 포위하고 수색, 체포영장을 집행하려 시도했다. 여기에서 ATF 측의 첫번째 실수가 발생하는데, 다윗파 측에 작전 정보가 누설되었다는 것을 다윗파 내부에 심어놓은 ATF 협조자를 통해 알았는데도 집행을 강행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이 ATF 협조자 또한 다윗파 측에 신원이 발각됐으나, 그냥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가 떠나기 전에 신도들은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3. 총격전


1993년 2월 28일 ATF는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에 대한 체포영장, 다윗파의 건물에 대한 수색영장 집행을 목표로한 작전 showtime에 착수했다.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발생하였다. 총격전은 한시간 가량 이어졌으나 ATF 측의 탄약이 바닥났고, 다윗파 측 또한 대화를 원한다는 입장을 표명해 쌍방은 휴전을 한뒤 시신을 수습하였으며, 일단 ATF는 철수하였다. 신도 6명과 ATF 요원 4명이 숨졌다. 다윗파 교주 데이비드 코레시 역시 총상을 입었다.
이 총격전은 사실상 웨이코 참사의 근본적인 논쟁거리가 되는 부분으로, ATF 측은 영장을 집행하기 위해 총을 겨눈채로 요원들이 접근했는데, 갑자기 문 안 쪽에서부터 총격이 발생해 응사했다는 입장이며, 다윗파 측은 내부로부터 어떤 총격도 없었는데 갑자기 밖에서부터 총격이 시작[3] 되어 신도들에게 상해를 입혔고 ATF로부터 무차별적인 총기난사가 가해지자 응사했다는 입장이다. 영장 집행 현장에는 ATF 측이 준비한 4대의 카메라가 돌고 있었으나 추후 조사 과정에서 4개 필름 모두와 ATF 측 활동일지가 분실되었음이 확인되어 어느 쪽이 사실인지 알 수는 없다.
이후 연방요원 사망으로 FBI가 자동개입하여 지휘권을 확보하고 FBI와 51일에 걸친 대치 상태에 들어간다. 연방정부 측에서는 군사 장비인 장갑차, 헬기들을 현장에 배치하고 시설 내의 신도들을 살인죄, 연방요원에 대한 살인 음모죄로 기소하였다.
뒤이어 연방수사기관과 다윗파 지도자인 데이비드 코레시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 아이들을 포함한 신도 몇이 걸어나오기도 했으나 그 과정에서 한 명의 신도가 연방 요원들로부터 7발의 치명 사격[4]을 받고 숨진채 5일 동안 방치되었고, 나온 신도들은 모두 구금되었다. 코레시는 협상 도중 이것이 성전이라는 확신을 신의 계시로 받게 되었다며 협상에 비협조적으로 나오기도 했으며, FBI 협상팀 측에서도 "이제부터 걸어나오는 모든 이들을 잠재적 위협 요소로 간주하고 반격하겠다"고 전달함으로써 사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미 시설에 대한 전력 공급과 수도 공급은 차단된 상태였다. 연방정부는 밤낮을 가리지않고 서치라이트들을 시설 내로 비췄으며, 특정한 소음이나 음악[5]을 앰프로 재생하는가 하면 탱크를 시설 바로 앞에서 주행시키는 등 심리전을 수행하였다.
연방정부는 이러한 강경대응이 다윗파 신도들의 항복을 이끌어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다윗파 측은 그간의 사건들로 자신들이 연방정부에 언제라도 학살당할 수 있다는 피해의식을 키웠고, 무엇보다 이들은 바로 위에 나온 코레시의 말에서 알 수 있듯 종말론자들이었다. 그들은 연방정부에 맞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는 것을 순교라고 믿었다.
훗날의 FBI내부 분석가들 또한 이러한 비일관적인 협상시도와 심리전을 작전실패의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FBI협상팀, ATF진압팀을 동시배치한 현장지휘체계와 강경진압, 온건협상을 오락가락하는 비일관적인 행보 자체가 이미 성공을 기대하기는 힘든 것이었다는데에는 이견이 있기 힘들다.

4. 강경 진압


그러다가 코레시가 다시 새롭게 신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신도들에게 항복 지시를 내리던 참에, 연방정부 측이 1993년 4월 19일 CS가스 살포용 장갑차 등을 동원하여 시설의 외벽을 부수고 가스를 내부로 주입했다. 최루가스는 군사등급이었고, 테러범을 진압하는데에 쓰는 용도였다.
연방정부 측은 다윗파 신도들이 방독면을 준비한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유아들을 위한 방독면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영아를 포함한 아이들과 그들의 생모들은 3-4시간 이상 CS 가스에 노출되었다. 연방정부 측은 교전 수칙에 따라 자동화기를 발사하며 강제 진압을 시작했다. 추후 밝혀진 증언이나 테이프에 의하면 연방정부 측에서 '''헬기로 조준사격을 가했으며''', 최소한 한 소대가 시설 내로 사격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6]가 시설을 순식간에 집어 삼켰으며, 어린이 21명과 임산부 2명을 포함해 76명이 사망하였다. 해당인원들의 시신은 화학전을 피해서 방공호 삼던 본당 1층 내부의 차폐 컨테이너 안에서 발견됐다. 사망 당시 분사한 이들을 제외한 희생자들 중에 총으로 맞아 숨진 흔적이 많아 추후 조사과정에서 논쟁거리가 되었고, 실제로 연방요원들이 이들을 조준사격하는 영상이 훗날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총상사망자들은 다윗파 신도측이 화재가 발생하자 집단 자살을 하면서 발생했다는게 정설이다.
한편, 교주인 데이비드 코레시 역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FBI는 데이비드 코레시의 심복 스티븐 슈나이더가 코레시를 쏘고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희생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기 때문에 연방정부는 과잉진압을 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다윗파 신도들이 이에 대해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사건 당시 방화를 저지른 건 다윗파 신도들이였고 이들이 무장을 하고 있어서 소방대가 진입을 하기 어려웠던 점, 그리고 이들이 이미 이전에 연방 수사기관이 제시한 영장을 거부한 점과 최루탄 사용 시 화재가 날 가능성에 대비한 구체적 계획을 세우지 않은 것은 정부의 임의적 판단에 해당해 소송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려 정부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건은 대치 상황에서 범인의 성향이나 현장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 실패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특히 미국의 정권 교체기(조지 H.W. 부시 → 빌 클린턴)에 발생했던 터라 연방정부 측이 지나치게 전술적 측면을 강화하다보니 협상적 측면을 경시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무엇보다 연방정부 측에서 군사 장비를 동원하였고, 아이들이 시설 내에 있는데도 거의 전시에 가까운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그런 부분에 민감한 자유지상주의자들이나 반연방주의자들에게 큰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들의 시각으로 볼때, 연방정부가 개인의 종교적 믿음이나 총기소지권, 재산권을 짓밟는 것은 분명 폭정에 해당하고, 시민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헌법적인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윗파 신도들도 그러한 입장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측면이 사건과 연계된 비극의 서막이 되기도 했다.

5. 이후


빌 클린턴미국 대통령도 이 사건을 재임 중 있었던 실패한 일 중 하나로 꼽는다. 실제로 얼마 후 그의 백악관 측근 중 하나인 빈스 포스터가 자살했는데, 이 사건이 어느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다.
반연방주의 진영은 이 사건에 경악했고, 연방정부에 맞설 때를 대비해 무기를 사모으고 군사훈련을 하는 민병대의 증가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영유아들이 너무 많이 죽었기 때문에 ATF, FBI는 '아기 살인마(baby killer)'라고 욕을 들어먹었고, 웨이코의 앙갚음을 하겠다는 이들이 기승을 부렸다. 반연방주의 입장에서는 연방정부의 폭력성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여기며 연방정부의 폭정에 대항하여 헌법적 권리를 지키기 위해 총기 등으로 중무장해야 한다는 동기를 자극하였다. 얼마 후에 벌어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도 이런 연방정부의 무리한 무력행사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다.[7]
반면 ATF, FBI 측은 연방정부 요원들이 영장집행을 하러갔다가 웬 또라이들이 자동화기를 난사하여 여러 명의 요원이 숨졌다는 인식이 초장부터 강했다. 사다리를 통해 1층 지붕으로 올라가 2층 창문으로 진입한 ATF대원들이 총격을 당해 숨졌으며, 창문을 통해 마지막으로 들어가려던 대원은 조준사격을 당해 어깨에 총을 맞고 황급히 사다리를 타고 다시 내려오는 장면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할 정도였다.[8] 위해때문에 내부적으로 시종일관 매우 격앙된 분위기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때문에 FBI의 협상팀도 FBI 측에서 일방적으로 시설에 대한 단수 단전을 감행한다거나 신도들이 나오는 족족 쏴죽이라던가 하는 식의 명령에 무척 애를 먹었고, 협상을 제대로 못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20년 후인 2013년 4월 17일 오후 8시에 웨이코 비료공장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 사고가 웨이코 참사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튼 단편적인 진실이 있다기보다 여러 논란과 의혹, 음모론들이 산재해있는 사건이다. 미국의 개신교 근본주의, 헌법주의, 반연방주의, 자유지상주의 진영에게는 연방정부의 폭정이라는 큰 피해의식을 심어줬지만, 크게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이비 교도들의[9] 인질극[10] 사건쯤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미국인 중에는 인질극 생중계가 벌어지면 이걸 웨이코라고 관용어처럼 부르기도 한다.

2018년 파라마운트 네트워크에서 웨이코 참사를 다룬 6부작 미니시리즈 Waco를 방영했다. 국내에는 OTT 웨이브에서 시청할 수 있다.
레인보우 식스 시즈에 나오는 오리건맵이 이 사건에서 따왔다.
[1] 다윗파 신도들이 지내던 건물. 이곳에 자리잡고 있던 큰 건물은 이미 사건 당시 화재로 없어졌고 지금은 작은 건물 몇 채만 남아있다.[2]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한 교파이다. 물론 정통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에서는 이단으로 간주한다.[3] 정황상 ATF요원들 중 일부가 자신들을 향해 짓는 개를 향해 총격을 가했는데, 다른 ATF요원들은 이 소리를 듣고 자신들이 다윗파로부터 공격당했다고 착각해 사격을 시작한 듯 하다.[4] 이 중 두 발은 머리에 맞았다.[5] 비디오게임의 효과음이나 동물들을 살처분하면서 나는 비명소리 등.[6] 인화물질이 진압군 총격에 발화해서 난 화재란 탐사보도의 주장도 있으나 화재가 방공컨테이너 내부에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받는다. FBI는 다윗파가 집단자살을 꾀해 일으킨 화재라고 주장했지만, 다윗파 측 생존자들 부정하고 있다.[7] 티모시 맥베이부터가 웨이코 진압 현장에 항의시위를 하러 나갔다가 뉴스 카메라에 잡힌 영상이 나중에 발견되었다.[8] 창문을 통해 진입하려던 팀이 창문을 부순 후 암막커튼을 때내고 진입하고자 커튼을 있는 힘껏 잡아내렸으나 커튼은 뜯어지지 않았고 궁여지책으로 이 커튼을 살짝 옆으로 재끼고 ATF요원들이 돌입했는데 이들이 전사했던 것이다. 사소한 커튼하나에도 다윗파가 신경써서 요새화한 부분을 알 수 있는 부분.[9] 일단 다윗파 교단 자체가 소위 말하는 사이비의 행보를 보였다.[10] 다윗파 측 생존자들은 누구든 원한다면 항복을 할 수 있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바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