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루탄
催淚彈 / Lachrymator, Tear gas
1. 개요
비치사성의 '''화학무기'''. 구토제, 재채기제와 함께 무력화제의 하나로 주로 시위진압에 쓰이는 도구. 일상적으로 최루탄으로 부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최루제로 호칭하는 것이 옳다. 영문으로는 보통 진압제(Riot Control Agent)로 분류한다.
비치사성무기 중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다. 이유는 후술 참조.
여러 종류가 개발되어 사용중이지만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예비역들이라면 '''가스실습'''이라는 단어로 치를 떨 CS가스(2-클로로벤질리덴말로노나이트릴 : 2-chlorobenzylidenemalononitrile/C10H5ClN2)[1] 와 CN가스(클로로아세트페논: chloroacetophenone/C8H13ClO)가 대표적이다.
2. 작용효과
둘 다 인체 작용효과는 비슷하여 호흡곤란, 점막 자극, 피부 발진과 가벼운 화학화상을 일으킨다. 다만 CS제가 좀더 호흡기 자극이 심하고 대량 흡입시 치사성이 높다. 그렇기에 CN제는 경찰 조직에서 주로 사용하고 CS제는 군대에서 주로 사용했'''었'''다. CN제는 수용성이므로 물대포로 방사하는 최루액의 원료로도 쓰인다. 민간판매 가스총이나 호신용 스프레이에 들어가는 것도 보통 CN제나 그 수용액.
어느 쪽이나 천식이나 기타 호흡계 질환이 있는 사람의 경우 심하면 질식사 할 수도 있는 위험물이다. 그래서 유격훈련장 등지에서 가스실습을 할 때는 천식이나 호흡계 질환이 있는 사람은 손들어서 나오라고 한다. 또한 점막 자극성 때문에 눈물이 나더라도 함부로 닦아서는 안 되고 눈물이 흐르도록 놔두거나 깨끗한 물로 세척해야 한다. 마구 닦아내다가는 각막이 손상될 우려도 있다.
3. 국가별 사례
CS제의 최고 애용국은 단연코 영국이다. 1958년, 키프로스 폭동 진압차 출동한 영국군이 사상 최초로 사용한 것을 시작으로 이후 북아일랜드에서 IRA 상대로 마르고 닳도록 사용했다. 반면, 미국과 러시아의 경우 2차대전 이후로 유서깊은 CN 사용국. 베트남전 당시 미군이 베트콩의 땅굴 진지 소탕을 위해 사용한 최루가스가 대외발표와는 달리 CN가스가 아니라 CS가스라는 것이 들통나 한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최근의 애용자는 이스라엘군이고, 팔레스타인 시위대에게 열심히 쏴대고 있다.
프랑스 경찰이나 프랑스 국가 헌병대또한 많은 국내 시위 현장에서 최루탄을 애용하고 있으며, 이에 맞서 시위대중에서는 방독면으로 무장한 부류가 나오는 둥의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헤이그 협약에 의해 군용으로는 제한돼 있기도 하다. 별다른 이유는 없고 단지 제정 당시 독가스의 일종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규군과 정규군간의 전쟁에서만 해당되지, 게릴라나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적용 안된다는 해석을 들어 미군은 CN을 현용으로 잘만 쓰는 중.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70년대까지도 시위 현장에서는 CN가스 사용만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으나 1980년대부터 CS가스 또한 상당량 사용. 특히 삼양화학공업에서 생산하는 국산 최루탄 SY-44는 CN가스에 클로로피크린(Chloropicrin/CCl3NO2)을 칵테일한 오리지널 특제로 필리핀 경찰이 CN제인 줄 알고 도입했다가 반품했던 사례도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서는 고강도 폭력시위 진압용으로 소량의 폭약을 넣어 최루 효과 뿐만 아니라 충격 효과까지 노리는 종류의 최루탄을 쓰기도 한다. 가장 애용하는 프랑스의 GLI-F4 경우 TNT 당량이 25g씩이나 해서 손이 날아가는 등의 사고가 잦아 과잉진압 논란이 심한편.
4. 종류
기본적으로 투척식과 스프레이식, 총류탄(銃榴彈)식이 사용되며 박격포나 곡사포로 쏘는 포탄형도 존재하지만 1차대전 이후 노골적으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다. 굳이 독가스를 쓸거라면 훨씬 본격적인 녀석도 많아서... 특이한 경우로 국내에서'''만''' 사용되던 다연장 발사식과 연무식(가스차)이 있다.
보통 발사체를 유탄발사기, 소총, 산탄총 등을 개조한 발사기(라이엇 건)로 상방 45도 각도로 쏘면 80~120m를 곡사 형식으로 날아가는 총류탄 방식이 상호 거리 유지에도 쉬운고로 가장 널리 쓰이지만, 이 경우 상황이 격화되면 직사로 쏘는[2] 놈들이 나오기에 '''잘못하면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3]
미국의 경우 수류탄 형태의 투척식을 애용하는데, 이를 '블래스트 볼'이라고 하며, '최루공(Tear Ball)', '고무공 수류탄(Rubber Ball Grenade)'이라고도 부른다. 연막탄 형태야 예전부터 쓰이긴 했으나 블래스트 볼의 경우 단순히 최루가스만 뿜는 게 아니라 섬광탄처럼 격발시 큰 폭음과 빛을 뿜어내어 시위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는 기능까지 있다.
가장 골때리는 사례는 프랑스제 GLI-F4라는 최루탄인데 이 물건은 '''터진다.''' 문자 그대로 '''폭발한다!'''[4]
5. 역사
최루탄은 한국 현대사, 특히 민주화에 있어 두 번의 중대한 분수령을 일으켰다. 27년의 사이를 두고 최루탄에 의해 숨진 김주열열사와 이한열열사의 죽음이 각각 4.19 혁명과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기 때문.[5] 최루탄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등 권위주의 정권 때 많이 쓰였지만 의외로 민주화 이후 노태우 정권 때도 최루탄이 많이 쓰였고 문민정부였던 김영삼 정권 때만 해도 최루탄이 많이 쓰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 3.15 부정선거로 분노한 마산에서 3.15 의거가 벌어졌고 그 와중에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김주열이 최루탄을 왼쪽 눈에 맞아 사망한 뒤 시체가 바다에 유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자유당 정권은 모른다고 발뺌했지만, 이 일이 알려짐으로 인해 시위는 더욱 더 격화되어 결국 4.19 혁명으로 번졌다. 당시 주력이 된 최루탄은 M25 기종이었다가 1969년부터 미국에서 M25 및 총류탄인 MPG100 최루탄, 그리고 어깨에 매는 가스분사기 '페퍼포그'까지 수입해 1개 중대당 2대씩 배정했다. 1979년부터는 가스차가 등장했으며 1986년에는 다연발 가스차(지랄탄)까지 나왔다.
또한 5공 시기인 1987년 6월 9일, '6.10 대회를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대회' 도중 연세대생 이한열이 머리에 최루탄을 맞아 같은 대학 학생 이종창에게 부축받는 장면이 사진에 찍히고 뉴욕 타임즈 1면 머릿기사에 실렸다. 그 후 6월 항쟁이 도래했다.[6] 항쟁 중인 6월 18일에 부산에서 회사원 이태춘 씨가 시위 도중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좌천동 고가다리 밑으로 추락하여 6일 뒤 숨을 거두었고, 민주화 이후 노동자 대투쟁이 한창이던 8월 22일에 대우조선 파업 현장에서 당사 노동자인 이석규가 왼쪽 가슴에 최루탄 파편을 맞아 숨을 거두기도 했다.
오죽 많이 쐈으면, 1980년대 개인 소득세 납부 1위가 바로 최루탄 생산업체인 삼양화학의 한영자 사장이었으니 말 다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격화되면서부터 경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쏴댔고, 화공약품 전문 생산업체인 삼양화학은 연간 200만 발 이상의 SY-44 최루탄을 정부에 납품하여 엄청난 호황을 누렸다. 이러면서 한영자 사장이 국내 유수의 재벌 회장들을 모두 제치고 수년간 개인종합소득세 납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한영자 사장은 최루탄 납품을 놓치기 싫었는지 전두환 정권에 비자금 100억을 은밀하게 상납했다는게 훗날 밝혀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삼양화학의 한영자 회장은 이미 전두환 정권 이전에도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부터 이미 최루탄을 납품하고 있었다. 6월 항쟁 즈음부터 최루탄 피해자 가족들의 주도로 최루탄 추방운동이 벌어지면서 국내외의 비난에 직면한 삼양화학은 1988년 10월에 생산을 중단하고 1995년에 부도 이후 세제원료 등을 생산하는 중견 기업으로 변했다. 사실 최루탄은 삼양화학이 생산하는 100여 가지 화공약품 중에 하나일 뿐인데, 워낙 이게 잘 팔리다보니 마치 최루탄만 생산하는 흉악무도한 업체로 비춰진 측면도 있다. 삼양화학은 최루탄 생산을 포기한 이후에도 여러 계열사를 거느린 화학전문 그룹으로 잘 나가고 있다. 삼양화학은 이후에도 계속 군납 사업 위주로 성장했으며, 각종 군납비리 사건 때마다 이름이 오르고 있다.
반면 1990년부터 최루탄의 규격이 국방규격에서 경찰규격으로 바뀌어 투척용 KP3, 5와 발사용 KP1 및 2가 보급되었으며, 1993년 9월에는 비활성 훈련용 최루탄(KP1, KP2탄 각 13,000발, 투척용 KP3, KP5탄 각 13,000발)을 보급해 예산절약 및 훈련효과를 거양하였고, 진압부대에서 쓰던 이스라엘제 근접분사기(7.5kg, 70cm)가 무게가 무거워 휴대사용에 불편하고 고압가스 충전이 불편함에 따라 우리 체형에 맞게 2.3kg에 40cm로 소형화하고 액화가스에서 최루분말로 바꿔 최루농액을 조절한 국산 분사기가 나왔다. 이는 1992년 3월 1일에 시제품이 나온 걸 시작으로 총 5번의 평가를 거쳐 1993년 4월 14일에 경찰 진압장비로 보급되었다. 이후 1997년에는 근접분사기 215(중형 165, 소형 50)대를 보급하였고, 이어 배낭형분사기 개발 완료에 맞추어 경찰장비로 채택하고자 표준 규격을 총 중량 10.5kg, 전장 55cm, 유효사거리 12m, 발사횟수 30~40회로 정한 뒤 이듬해에 기존 규격보다 0.5g 늘어난 신형 근접분사기 503대를 보급하였다.
국내에서 1998년 9월 3일 만도기계 총파업에 사용된 걸 마지막으로 쓰지 않은 뒤 1999년부터 경찰이 '무최루탄 원칙'을 관철시키면서 시위에 공식적으로 사용된 적은 없다. 이 때 시위대도 화염병을 던지지 않겠다고 했었다고. 2003년에 재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하지만 최루탄을 쓰지 않겠다는 이야기일 뿐으로 물대포에 최루액이 섞여 발사되기도 하는데, 사실 한국이 가입국으로 있는 화학무기 금지 기구(OPCA)에서 최루액 등은 규제대상으로 분류하여 농업용 외에는 사용할 수 없게 되어있다.
반면 최루탄 생산업계의 경우 1999년 경찰이 최루탄 구입을 중단함에 따라 야산화공, 대화화공 등 최루탄 제조 업체들이 줄줄이 도산해 버렸다. 현재 최루탄은 대광화공 등 몇몇 중소기업이 수출을 목적으로 생산 중이며 2013년 터키 시위진압 당시에 수출된 바 있었다.
지금도 사용하지 않을 뿐, 각 경찰서나 상설중대마다 잔탄을 소량씩 보유하고 있다.[7] '''예상할 수 없는 긴급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아직 보유하고 있다. 실제로 전의경 기동중대의 경우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경찰버스에 '''최루탄'''을 싣고 다니는 중대가 많았는데, 가끔 가다가 한 두 발씩 터져서 문제였다. 하지만 시위양상이 온건해지면서, 남아있는 최루탄도 점차 폐기하고 있다. 실제로 경기남부청은 전량 폐기를 목표로 점차 그 수를 줄여나가고 있다.
6. 최근의 사례
하지만 미국, 프랑스 같은 국가들은 시위가 '''격해지면''' 개인화기 소지와 관계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써 주신다. 물론 시위대는 그에 맞서 더 과격하게 맞선다. 고무탄도 널리 쓰인다고 알려져 있지만, 정작 고무탄은 1999년 시애틀 반세계화 시위[8] 진압에 사용했다가, 관계자들이 줄줄이 모가지된 이후로 잘 안 쓰인다. 영화 '배틀 인 시애틀'을 볼 것.
사실 97년 화학무기금지조약에서도 환경 독성 우려가 있는 클로로피크린만이 사용 제한[9] 되었을 뿐이라 CN, CS가스 모두 사용하는데 문제가 없다. 게다가 그 동네 경찰들은 요즘엔 전적으로 CS가스를 사용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한국에 각종 시위가 다발하자, 일부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과격해지는 최근의 시위 행태에 따라 이걸 부활시켜야한다"고 인터넷 커뮤니티 게시판이나 뉴스사이트 댓글창 등지에서 입장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극히 소수이고, 위에서 언급했듯 과거에 비해 폭력성이 약해져가고 있는 대한민국 시위 현장에 더이상 불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다수이다. 게다가 최루탄 냄새를 직접 맡아본 중년층 이상들은 정치적 입장에 상관없이 최루탄 냄새라면 신물난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10]
사실 한국의 진압장비가 약한 이유는 그만큼 한국의 시위 양상이 그만큼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폭력시위는 엄연히 지속되고 있고, 사라져야 겠지만, 강도높은 폭력이 오고갈뿐 아니라 공공시설을 향한 반달리즘과 화염병은 일상이고, 심하면 약탈과 총격이 발생하는 서방 국과들과 달리 한국의 시위는 그래도 죽창이나 각목선에서 끝나는 평화적인(?) 면모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진압 수위도 낮은 편이다.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에서도 홍콩 경찰이 사용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홍콩 경찰은 최루탄에 그치지 않고 물대포를 독일로부터 도입해 시범 운영 후 지난 8월 25일 부로 실전배치했으며 최루탄 남발로 곤욕을 치루고 있는지라 조만간 최루탄 사용 대신 물대포를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시위를 완전히 끝낼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11] 물대포가 최루탄에 비해 화학물질 잔류 등의 문제가 없으면서도 손 쉽게 시위대를 대량 검거할 수 있어 왜 진작 쓰지 않았나 의문이 제기될 정도. 그 만큼 거리 시위는 이제 위험해졌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때 미국 경찰들이 평화시위를 하는 시위대를 최루탄으로 진압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직사로 쏘는 모습까지 찍혔다. 5월 30일 루이빌에서는 시위대가 얼굴에 최루가스가 묻었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생수와 우유통을 경찰이 파괴하거나 압수하였고, 이에 시위대가 항의하자 무장한 경찰관들이 이를 막는 사건이 일어났다. #
7. 여담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최루탄 및 최루액에 의해 사망한 사람으로 인해 시위가 격화되면 정권이 뒤집히는 법칙 아닌 법칙이 있다.
시위에서 학생들이 시위 중 최루액을 뒤집어 쓴 뒤 후퇴하다 보면 대학가의 상인들이 대야에 물을 떠다 놓고 학생들이 얼굴을 닦도록 도와줬다는 일화를 쉽게 찾을 수 있다.
1987년 6월 항쟁 후반부에는 최루탄 추방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학생 데모로 인해 경찰이 하도 최루탄을 쏴대는 통에 최루탄으로 인한 일반인들의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자 시민들이 '''"최루탄 좀 그만 쏴라! 시내에서 숨을 쉴 수가 없다!"'''라며 시위에 합세한 것.[12] 참고로 6월 항쟁 기간 동안 얼마나 많이 쏴댔는지, 6.29 선언 직전 시점에선 경찰의 최루탄 재고가 3일 치 밖에 안 남았을 정도였다.
가스가 시위대만 정확하게 덮치는 게 아니다 보니 무고한 피해가 나오기도 하는데, 경남 마산에서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당시는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를 열던 중에 '''경기장에 최루탄 연기가 흘러들어와서''' 대회가 중단되는 사건이 있기도 했다. 야구장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졌다가 그만... 마산아재 참조.
바리에이션으로는 지랄탄과 사과탄이 있다. 지랄탄은 탁구공만한 조그만 최루탄으로 한번 발사되면 이리저리 '''지랄같이''' 굴러다니면서 최루가스를 내뿜기 때문에 지랄탄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는데, 일단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종잡을 수가 없어서, 이놈이 착지하는 곳을 예측해서 곧바로 붙잡는 것을 연습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과탄은 보통의 최루탄보다 훨씬 큰 것으로 사실 사과보다도 더 커서 거의 멜론, 수박만하다.
꽃보다 남자 2009년 2월 9일 방송분에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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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 22일 한미 FTA로 인해 벌어진 국회 공성전 도중, 민주노동당의 김선동 의원이 '''국회 안에서''', 그것도 '''본회의장 안에서''' 최루탄을 투척했다. 그리고 김선동 의원은 블로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선동은 대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으면서 의원 직을 상실하였다. #저는 이토 히로부미를 쏜 안중근 의사의 심정으로, 윤봉길 의사의 심정으로, 우리 대한민국 서민을 짓밟고 서민의 운명을 깔아 뭉게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에게 참을 수 없었고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후 제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책임지겠습니다.
이에 감명을 받았는지 2015년 10월 15일 코소보 의회에서 야당이 최루탄을 투척했다.
최근에는 한국제 최루탄이 세계적 가이드 라인을 따르지 않고 수출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2013년 12월에는 영미의 유명 인권변호사들이 이의신청을 제출하기도 했다. 한국 최루탄 수출, OECD지침 어겼다 특히 바레인에서 민주화시위 진압용으로 150만 발 이상 수출되어 사용되어 큰 악명을 떨치고 있다. 현지 활동가들이 한국에 항의하기도 했다.
80~90년대 전의경으로 복무한 군필자들에게는 나름 추억(?)의 요소이다. 그땐 최루탄 발사기 사수와 부사수 보직이 따로 있었다.[13] 시위가 많을땐 하루종일 탄박스만 까다 복귀했다는 일화도 있으며 수요가 하도 많아서 재고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것을 노려 한두개씩 불출(...) 해갔다가 걸려서 영창 갔다 온 선임들의 이야기나 나이트에서 여자한테 퇴짜맞고 빡쳐 텨트렸다는 일화라던지... 마음의 소리 작가 조석[14]#은 전경 시절 부대에서 탄박스 불출 중 최루탄이 탄박스째로 터져 부대 전체가 피폭된 일이(...) 있다고 한다.
참고로, 폴리아세탈에 열을 가할 경우, 포름알데히드가 방출되면서, 그 비슷한 냄새를 풍겨댄다.
이 최루는 체벌의 수단으로써 사용될 수도 있다. 숙제 안해오는 아이한테 마늘과 양파를 까라고 시켰다는 사례가 있는데 #[A] , 이는 마늘과 양파의 최루효과를 체벌에 활용한 것으로 해석된다.
아기공룡둘리 골뚜기왕자편에 은행건물을 들고 도망가는 장면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1] 'CS가스'라는 명칭 때문에 세슘 가스로도 불리지만 전혀 무관하다. 세슘의 원소기호는 Cs, 이건 CS다. CS는 개발자 2인의 이니셜(Ben Corson/Roger Stoughton)에서 따온 명칭이다. CS1, CS2, CSX로 바리에이션도 풍부하다.[2] 한국 경찰의 최루탄 발사기구는 이탈리아 베넬리사의 산탄총을 사용하는데 총의 격발기구 안쪽에 안전장치를 추가하여 총구가 상향 45도를 이루지 않으면 노리쇠 격발이 이뤄지지 않게 되어있다. 직사에 대해서는 안전장치가 걸리지 않게 총을 옆으로 뉘어서 쏘거나 안전장치에 이쑤시개 등을 꽂아 무력화시킨 후 사용했다고 한다. 급박한 상황에서 45도 이상 올리고 곡사로 적정한 위치를 맞춘다는 것은 매우 번거롭고 답답한 일이었으니. 물론 고의적 직사를 하는 것은 사망사례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절대 해서는 안 될 큰일날 일이다. 추진탄은 일반 산탄총에 쓰이는 12게이지 구경탄과 같게 생긴 공포탄이라고 보면 된다(약협에 추진탄이라고 인쇄되어 있음). 참고로, 이 산탄총은 잉여부속 없이 총만 일정 수량 수입했기 때문에 고장 수리가 필요할 경우 다른 총을 헐어서 부품을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3] 최루를 발사하는 탄이니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실탄보다 덜 위험하다 뿐이지 최루탄 자체가 벽을 관통할 정도로 위력이 크다. 당연히 화살에 맞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4] 위에도 있듯 내용물이 CS가스 가루 10g, TNT 26g인 물건이라 저렇게 폭발해서 충격파와 소음으로 제압하는 물건이다. [5] 여기에 최루탄 외에 최루액까지 포함한다면 사례는 더 늘어난다. 대표적인 예시라면 백남기.[6] SY-44탄은 대형 금속외피를 가진 깡통모양 탄이라 직사가 아니라 곡사로 맞아도 위험했다. 사고 이후 삼양화학은 1988년 10월에 최루탄 생산을 중단했다가 1990년에 SY-44의 추진탄을 만들던 야산화공에서 외피를 연질PVC로 만든 KP시리즈 최루탄이 개발되었는데 탄 자체도 소형 경량이고 말랑한 파편도 크고 넓적하게 쪼개져서 비교적 많이 안전해졌다.[7] 2017년 대구지방경찰청 기준으로 경찰서와 기동부대에 17,000발을 보유하고 있다.[8] 1999년 11월 30일 시애틀에서 개최된 WTO 제3차 각료회의를 약 5만여명의 시위대가 인간사슬로 봉쇄한 사건. 이 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으며, 이후 반세계화 운동, 진보좌파 진영에선 시애틀 대전투(The Battle of Seattle)라고 부른다.[9] 농약으로만 사용 가능. 다만 분해 과정에서 염화수소, 질소산화물 같은 유독성의 환경 오염 물질을 발생시키므로 사실상 농약 목적이라도 쓰지 않기를 권고하고 있다.[10] 굳이 시위를 참가하지 않았더라도, 아침에 등교하면 대학에 최루냄새가 가득했던 시절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의 필수지참품으로 손수건이 있었는데 코 막으라고 한다.[11] 물대포의 경우 수압이 아주 강한 편이라 아무리 방호장구를 갖추어도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넘어져 검거되며, 시위대가 사용하는 안전모는 전혀 효과가 없어 벗겨지거나 깨질 뿐이다. 물대포에 형광물질을 혼입한 형광 물대포의 경우 한국 경찰이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때 적극 사용해 수많은 사람을 검거하기도 하였다. 형광물대포에 맞아 얼굴이나 옷 등이 변색되면 마스크나 복면도 이제 무용지물이 된다. 실제로 지난 8월 25일 췬완 시위 때 시범 출동시킨 물대포차가 길가에 물대포를 뿌렸는데 시위대 대부분은 과격시위를 하다가 물대포를 보고 혼비백산해 흩어졌으며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도주하다 미끄러운 바닥을 밟고 넘어져 경찰에 손 쉽게 체포되었다.[12] 이게 얼마나 심했냐면,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직원이 신입생들에게 과학도서관이 왜 안 쪽에 있는지 설명할 때 '''최루탄 냄새가 건물 안까지 들어와 공부가 안 돼서''' 지금의 위치로 지었다고 했을 정도다. 참고로, 영대 정문이 생긴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13] 현재도 최루액 분사기를 담당 하는 보직이 존재한다.[14] 참고로 조석은 전경 2748기 순천 716전경대출신이다.[A] 현재 글 삭제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