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곤(서진)

 


1. 庾袞
2. 劉琨


1. 庾袞


생몰년도 미상
서진의 인물. 자는 숙포(叔褒). 명목황후의 백부.
어릴 적부터 근검하면서 공부를 좋아했으며, 효성이 있어 어버이를 섬긴다는 칭찬이 있었다.
함녕 연간에 큰 역병으로 두 형이 죽고 다음 형인 유비도 위독해 방치되어 가족들은 모두 밖으로 나갔는데, 유곤은 홀로 떠나지 않아 가족들이 바깥으로 나가게 하려 했다. 유곤은 타고난 성품이 병이 두렵지 않다면서 끝까지 유비를 돌보고 자지 않았으며, 그러면서도 널을 어루만지면서 슬퍼했다.
백 여일 만에 전염병의 기세가 없어져 가족들이 돌아오자 유비의 병이 나았고 유곤도 병이 없었는데, 부로들이 사람이 하지 않은 일을 해서 한겨울의 뒤에 소나무, 잣이 마르게 되는 것을 아는 것 같이 이처럼 하면 전염병도 물들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했다. 유곤은 아버지처럼 친히 농사를 지어 공양한 것을 나눠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힘썼으며, 제자들이 나무 울타리에서 무릎을 꿇고 앚아 회초리를 받았다.
어떤 이가 속세와 떨어진 곳에 있으면서 공손함이 지나치다고 말하자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 절조를 바꾸는 것은 군자의 뜻이라 할 수 없다고 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하고도 스스로 노동을 하고 직물을 짜거나 광주리를 만들어 팔아서 모친을 부양했다. 어머니가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고 간소하게 먹어도 된다고 하자 유곤은 잘 드시지 못하면 어찌 안심할 수 있겠냐고 말해 어머니는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전처인 순씨, 후처 낙씨는 귀족 출신으로 부귀한 삶을 살았지만 유곤에게 시집와서는 부유한 재산을 포기하고 남편과 함께 고생하면서 서로를 존경했으며, 유곤은 술을 마셔 취했다가 후회해 아버지의 묘소 앞에서 스스로 곤장 30대를 때렸다.
일가친척 중에서 여러 고아들을 길러 형의 아들인 유갱, 유흡, 형의 딸인 유방, 외조카인 곽수 등을 돌보았으며, 외조카인 곽수를 매우 잘 대하면서 옷을 입혀주고 먹여주는 것에 늘 곽수를 우선했다.
유방이 출가할 때가 되자 혼사로 많은 옷가지 등을 준비하면서 특히 싸리나무를 잘라 직접 삼태기 빗자루를 만들어서 주고 훈계했는데, 유곤은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집안을 쓸고 닦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니, 온순하고 겸손한 좋은 며느리가 되기를 희망해 늘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르지 말기를 당부했다. 형의 아들 유갱, 유흡은 이전에 살던 집에서 함께 살았는데, 갑자기 유흡이 성인이 되기 전에 죽고 널을 만지면서 이름을 부르짖고 슬퍼했다.
일찍이 제형과 함께 지나다가 읍 사람인 진준 형제와 함께 우애가 있어서 모두 그 어머니에게 절했는데, 유곤은 절하지 않아 진준의 동생인 진휘가 이유를 물어보자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절할 수 없으며, 친한 사람에게 절을 해야 하고 스스로 그 사람의 아들과 같이 하는 뜻은 무거운 것이기에 감히 가볍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진휘가 유곤을 옛날의 밝고 고운 선비라 했다.
주군의 부름을 받고 효렴, 수재에 천거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으며, 원강 말에 영천태수의 부름으로 공조에 임명되자 걸어가다가 태수가 꾸며놓고 수레로 맞이하자 유곤은 사퇴했는데, 맞이한 사람이 강제로 수레에 오르게 해서 관사로 보냈다가 영천태수는 유곤이 끝내 굽히지 않을 것을 알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낙양에서는 사마경이 술판을 벌이고 1년 동안 황제를 알현하지 않다는 것을 듣고 장차 화란이 일어날 것이라 탄식하면서 처자를 거느려 임려산 속으로 도망갔다.

2. 劉琨


(271 ~ 318)
서진의 인물, 중산 위창 사람. 자는 월석(越石). 한나라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유만은 나라를 다스리는 재주가 있어 상국의 참군, 산기상시를 하였다. 아버지 유번은 청렴하고 고결하여 광록대부에까지 이르렀다. 유곤은 어렸을때 외모가 준수하고 성격이 쾌활하는 안목을 얻었고 범양의 조납과 함께 웅장한 명성을 얻었다. 젊을때부터 조적과 벗했고 나이 26세에 사예종사(司隸從事)가 되었다.
당시 정로장군 석숭은 하남 금곡 간에 별려(別廬)가 있어 당시 뛰어난 사람들을 빈객으로 불러모아 날마다 시를 지었다. 유곤은 그 당시에 참여하여 시를 읊기로 꽤 약속하였다. 비서감이 조정에 참여하여 관리하니, 경사 인사들은 모두 마음을 다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석숭, 구양건, 육기, 육운의 무리는 문재로써 절조를 낮추어 안정시켰고, 유곤 형제는 그 사이에 '24우'라고 불렸다. 태위 고밀왕 사마태의 속관으로 벽소되었고 빈번히 저작랑, 태학박사, 상서랑으로 옮겨갔다. 조왕 사마륜이 집권하여 유곤을 기실독으로 삼아 중랑으로 전업하였다. 사마륜의 아들 사마과는 유곤의 자형이었고 유륜의 부자 형제가 사마륜에게 위임받았다. 사마과는 황태자가 되고, 유곤은 사마과의 첨사가 되었다.
삼왕이 사마륜을 토벌하자 유곤은 관군(冠軍)으로서 가절을 받고 손수의 아들 손회와 숙위병 3만을 거느리고 성도왕 사마영을 만나 황교에서 싸우다가 대패하여 돌아오고, 분하교에서 스스로를 견고하게 하였다. 제왕 사마경이 조정에 나서자, 그의 부형은 모두 당세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소유하고, 형여를 중서랑으로 삼았으며, 상서좌승으로 전사도좌장사(轉司徒左長史)를 전하였다. 패망하여 범양왕 사마효가 허창에 진을 치자 이로 인해 사마가 되었다.
진혜제가 장안에 이르자, 동해왕 사마월이 모의하여 임금이 타는 수레를 맞이하였다. 유곤의 아버지 유번을 회북호군, 예주자사로 삼았다. 유교가 허창에 있던 사마효를 공격하자, 유곤은 또한 여남태수로서 두육등을 통솔하여 구하러 갔으나 미처 도착하지 못해 구원에 실패하였고, 유곤과 사마효가 모두 하북으로 도망가자, 유곤의 부모는 마침내 유교의 손에 떨어졌다. 기주자사 온선을 설득하여 자리를 사마효에게 양도하게 하고 유주에 가서, 왕준에 구걸하여, 팔백 명을 얻고, 사마효와 함께 동평왕 사마무를 무너뜨렸다. 유교는 남쪽으로 도주했고 다시 부모를 찾았다. 또 석초를 베고 여랑을 항복시키니 모든 군대가 장안에 영접하였다. 이 공으로 광무후(廣武侯), 식읍 2천호에 봉해졌다. 진회제 영가(永嘉) 원년(307)에 병주자사가 되고, 진위장군(振威將軍)을 더하고 영흉노중랑장이 되었다 유곤이 길에서 상소하기를 병주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상서에게 병주에 곡식 오백만 두와 오백만 필의 견직물, 오백만 근의 솜을 달라 하였다. 진민제가 즉위하자 대장군, 도독병주제군사에 임명되어 병주의 군사를 통솔했다. 315년 병주, 유주, 기주 3주의 병사를 감독하는 도독병기유삼주제군사와 사공을 제수하였으나 사공은 사양했다.
유민들을 돌보는 한편 홀로 하북을 지키면서 유총석륵에게 저항했다. 316년 사공부의 장사 이홍이 병주를 들어 석륵에게 항복하자 근거지가 없어 어쩔줄을 몰라하다가 그전부터 같이 활동하던 선비족 단필제에게 달아나 맹약을 맺어 진나라 황실을 보위하기로 했고 316년 민제가 한나라에 잡혀가자 317년에 건강에 있던 진원제에 황제에 즉위할 것을 권진하였다. 318년 단필제가 유곤을 의심하고 단필제의 동생 단숙군이 부추기니 유곤을 목을 졸라 죽이고 그 조카 네명도 살해되었다. 온교가 유곤은 황실에 충성을 다가다가 집안은 무너지고 자신은 죽었으니 마땅히 상을 내리라고 상주했고, 그 몇년후에 태위와 시중을 증직하고 시호를 민공(愍公)이라 하였다.
문장이 호방함으로 인정받았으며 영가의 난을 거친 뒤에는 시의 풍조가 비장강개한 음조를 띠었다. 애처로운 글을 잘 지었으며, 우아하고 장중하며 풍격이 다양하다는 평을 들었다. 작품으로 《유월석집(劉越石集)》 등이 있다.
예문류취에 인용된 세설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유곤이 빈성에서 호적(胡賊)들에게 포위를 당해 계책이 없었는데 저녁이 되고 유곤이 달빛이 비추는 누대에서 휘파람을 부니 호적들이 처연하게 탄식하였다. 그리고 한밤중에 호가(胡茄)를 연주하자 호적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허탈해하고 누구나 모두 고향 생각이 절절하였다. 밤이 깊어져 달이 지려고 할때 또 노래를 부르자 호적들은 포위를 풀고 사라져 버렸다. 혹은 이 일화는 유보가 겪은 일이라고도 한다.
자치통감과 세설신어에 따르면 그는 사람을 부르는 재주는 있었으나 그를 통솔하지 못하니 하루에 수천명이 귀부하고 또 그만큼이 빠져나갔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