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기
1. 개요
陸機
(260 ~ 303)
삼국시대 오나라와 서진의 인물. 자는 사형(士衡). 육항의 4남으로 육손의 손자가 된다. 형으로는 육안, 육경, 육현, 동생으로는 육운, 육탐이 있다. 육기의 키는 7척이며, 목소리가 종(鐘)과 같았다. 어려서 남다른 재주를 지녀, 유학을 숭상했다. 육기에게 하늘이 내려준 재능은 비단처럼 다듬어져(天才綺練), 문장의 아름다움의 점에서는(文藻之美) 당대 제일이었다.
또한 박학하면서도 예법에 어긋나면 행동하지 않았다고 한다.
2. 생애
274년 아버지 육항이 죽자 위에서 열거한 형제들 가운데 육탐을 제외한 나머지와 함께 아문장으로서 아버지의 군사를 나눠가졌으며, 280년에 육안과 육경이 싸우다가 죽은 뒤 육기와 육운은 서진에 항복한다.
20세에 오가 멸망하자, 옛 거처로 은거해, 문을 닫고 10년간 학문에 힘썼다고 진서 육기전은 기록하나 진서 좌사전에 따르면 육기가 낙양에 들어가 좌사를 비웃다가 그의 걸작 《삼도부(三都賦)》가 새로 나오자 이를 보고 탄식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포로로 잡혀 들어온 것으로 육기 자신이 지은 《형평원중(兄平原贈)》 서문에서 '내 나이 20살에 일찍이 홀로 되어 아우 사룡(士龍, 육운)과 함께 부모를 잃고 가정을 잃었다네. 또 왕명에 쫒겨 포승을 받고 북쪽으로 갔다.'라고 하고 있다. 따라서 좌사가 삼도부를 짓고 있을때인 280년에 육기가 낙양에 들어왔음을 알 수 있으며 삼도부가 나온 시점은 오나라가 멸망하고 삼도부에 서문을 써준 황보밀이 죽은 282년 사이이니 따라서 육기는 10년을 온전히 은거한게 아니라 은거하기 전 몇년간 낙양에서 포로 생활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어쨌든 이후 은거 생활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조부는 장군과 재상이었고 오나라에 큰 공이 있었지만 손호 때문에 나라가 망함에 분개해 손권이 나라를 얻은 일과 손호가 망한 바를 논하고 조부의 공업을 서술하고자 하여 《변망론辯亡論》 2편을 지었다.
태강(太康, 진무제 사마염의 연호, 280~289) 말에 동생 육운과 함께 낙양에 들어갔는데, 태상 장화가 이를 보고 본래 그들의 명성을 중히 여겨, 육기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그리고
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주위 공(公)벼슬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둘을 추천한다. 후에 태부로 있던 양준이 벽소해 육기는 제주가 되었고 마침 양준이 주살되자 여러번 옮겨, 이어서 태자선마, 상서 저작랑까지 오른다.오나라를 격파하고 얻은 최고의 수확은 이 두 사람의 준걸을 얻은 것이다.
이때 범양(範陽)의 노지가 무리 사이에 있는 육기에게 "육손, 육항은 그대와 가까운가?"라고 물으니 육기는 "당신의 노육, 노정(盧廷)[1] 과 같다."고 해서 노지가 꿀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히 잠잠하였다, 이윽고 일어나니 육운이 육기에게 "저 사람은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 집안 관계를 알지 못하는데, 왜 그래?"라고 물었지만 육기는 "우리들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성이 사해(四海)에 퍼졌는데, 쟤가 모를리가 있겠어?"라고 했다. 즉, 노지는 알면서도 일부터 육기, 육운 앞에서 조부, 부친의 이름을 직접 말해 무안을 주려했고 육기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었던 것. 의논하는 사람들은 이를 가지고 두 사람의 우열을 정하였다.
오왕 사마안이 회남으로 출진하는데, 육기를 낭중령으로 하였고, 상서중병랑으로 옮겼으며, 전중랑으로 옮겼다.
291년에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할 때 가밀의 친구인 24우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300년에 장화가 피살되자 뇌문을 지어 영덕부로 이를 애도한다. 조왕 사마륜이 보정을 하자 상국참군을 지냈으며, 또 가밀을 주살한 공으로 관중후(關中侯)의 작위를 하사했다. 301년 사마륜이 황위를 빼앗자 중서랑이 되었다.
황족들이 권력다툼을 할 때 사마륜이 주살되고 난 후 제왕 사마경은 그가 중서의 직위에 있어서 사마륜을 위해 구석을 내리는 문서와 선양하는 조서를 썼다고 의심하여, 마침내 육기 등 9인에게 준 정위를 거두었다. 성도왕 사마영, 오왕 사마안이 함께 옹호해, 죽음만은 면하고 유배를 당하는데, 사면이 되었다. 중단되었다.
육기에게는 좋은개가 있어, 이름이 황이(黃耳)였는데, 심히 아꼈다. 수도에서 타향살이를 하는데 오랫동안 집 소식이 없어, 개를 보며 웃으며 "우리 집에서 서신(書信)이 끊겨서 없는데, 네가 소식을 얻어 가져올수 있겠지?"라고 물었고 개가 꼬리를 흔들며 짖었다. 육기가 이에 편지를 써서 대나무통에 담아 개의 목에 걸었는데, 개가 길을 찾아 남쪽으로 달려, (육기의) 집에 이르어서, 서신을 가지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 후 이로 인한 까닭에 항상 이러하였다.
고영과 대연(대약사) 등이 난리가 나 중원 지역은 많은 어려움이 있으므로 오 지역으로 돌아오라고 권했지만 육기는 그 재주와 명망에 힘입어, 세상의 난을 바로잡을 뜻을 가져, 이러한 연유로 따르지 않았다. 사마경은 이미 스스로가 공로가 있다고 여기며, 작위받는 것에 사양하지 않으며, 육기가 이를 싫어해, 《호사부豪士賦》를 지어 꾸짖었다. 사마경은 깨닫지 못하니, 끝내는 무너지게 되었다. 육기는 또 어진 왕이 국가 경영에 있어, 의가 봉건에 있어, 이로 인해 원대한 지향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음을 《오등론五等論》을 지어 말하였다.
당시 성도왕 사마영은 공을 자신에게 두지 않고 (다른이를) 천거하며, 아랫 선비들에게 겸허하게 힘썼다. 육기는 이미 온전히 구해준 은혜를 감사히 여겼는데, 또한 조정에 여러 변란이 있는 것을 보고, 사마영에게 반드시 진 황실을 편안하게 하고 (위엄을) 높이는 것이 가능하다 아뢰며, 마침내 사마영에게 위탁하였다. 사마영은 육기를 대장군 군사에 참여하게 하며, 평원내사로 삼도록 표문을 올렸다.
태안(太安, 301~302) 초, 사마영은 하간왕 사마옹과 거병하여 낙양을 공격해 장사왕 사마예를 토벌하였는데, 임시로 육기를 후장군, 하북대도독으로 삼고, 북중랑장 왕수, 관군 견수 등 제군 20여만명을 감독하게 하였다. 육기는 삼대가 장수였기에, 도가(道家)에서도 꺼렸던 바고, 또한 육기 자체가 오나라 출신이라 유력한 지지가 없던 인물이었기에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는 군사는 없었다.
육기의 고향사람 손혜 역시 왕수에게 도독을 양보하라 육기에게 권했지만, 육기는 오히려 저들이 내가 쥐새끼처럼 눈치를 본다고 말할것이니 화가 더 빨리 닥칠 것이라고 거절하고 출발했다. 사마영은 육기에게 일이 성공하면 작위는 군공에 지위는 태사가 될 것이라 약속했다. 육기는 제환공이 관이오에게 맡겨 공을 세우고 연혜왕이 악의를 의심해 수성에 실패했다며 지금의 일은 사마영에게 달려 있지 나에게 있는건 아니라 했다. 이에 사마영의 좌장사 노지는 속으로 육기의 총애를 시기하여, 사마영에게 "육기는 자시를 관중, 악의에 비하고 주군을 암군과 비교했는데, 신하가 군주를 무시하고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보낼 수 없다"고 했고 사마영은 조용히 수긍했다.
육기가 전투에 임하는데, 대장기가 끊어지니, 심히 불길하다 여겼다. 군의 행렬이 조가에서 하교까지 수백리에 이르었고 고성(鼓聲)이 울리니, 한나라, 위나라 이래 출병이 성대하기가,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사마예가 황제를 받들며 육기와 녹원에서 싸웠는데, 육기의 군사들이 대패하여, 칠리간으로 도망갔고 죽은 자가 쌓여, 물이 흐르지 않으니, 장군 가릉 등은 모두 죽었다. 이로 인해 매번 싸움에 나갈 때마다 매번 패해 죽거나 도망친 군사가 반이 넘었다고 한다.
그 때 육운에게 원한을 품은 환관 맹구의 동생 맹초[2] 가 육기의 지휘하에 있으면서도 육기의 군령을 따르지 않았는데, 육기가 그를 법에 따라 처벌할려고 하자 맹초는 육기가 장차 반란을 꿈꾸고 있다고 비난하고 곧 견수 등도 사마영을 찾아가 육기를 비난하면서 육기가 적과 아군 사이에 양다리를 걸고 있다고 했다. 거기다가 맹구[3] 까지 영내에서 육기를 비난하고 있었으므로 사마영은 사람을 보내 육기를 체포하게 하고 덩달아 육기의 동생 육운, 그리고 또다른 동생 육탐도 잡아들여 모두 사형에 처했다.
그날 저녁, 육기의 꿈에서 검은 천이 수레를 덮어, 몸소 천을 잘랐는데 열리지 않으니, 하늘이 밝아지고 견수의 병사가 이르었다. 육기는 융복을 풀고, 백갑을 드러내면서, 표정이 매우 차분하게 견수와 마주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를 사마영에게 보냈는데, (그)어조가 심히 슬펐다. 이윽고 탄식하며 말하였다.오나라가 기울고 엎어져, 나의 형제와 종족은 국가의 무거운 은혜를 입어, 들어와서는 군대에 쓰이는 장막을 모시고, 나가서는 부죽(符竹)을 다스렸다. 성도왕이 나에게 중임을 명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날 죽임을 당하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군중에서 살해당하니, 당시 43세였다. 두 아들인 육울, 육하 역시 같이 살해당했다. 이날 밤안개가 낮에 생기고, 큰 바람이 나무를 꺽었으며, 평지엔 눈이 쌓이니, 사람들은 육씨의 원통함으로 인한 일이라 하였다.화정(華亭)[4]
에 학이 우는데, 그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육기 형제들은 이미 강남의 수재들로 역시 제하에서도 이름이 유명했는데, 죄도 없이 몰살 당하게 되자 천하의 사람들이 슬퍼했다. 다만 사람들을 이를 두고 예전에 육항이 보천을 죽일때 어린 아이까지 죽였는데, 이 때 "육항의 후세들은 필히 그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결국에 육기가 죽게 되고 육씨의 세가족이 후세가 없어지며 사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가 맹구 등에게 무고될 때 손증도 함께 붙잡혀 고문당했다가 옥에서 사망했다.
그의 저서로는 변망론, 문부, 육사형집, 모시초목조수충어소 등이 있다.
3. 평가
육기의 문장들은 후세 사람들에게 높게 평가되었으며 이에 대해 손혜(孫惠)가 주탄(朱誕)에게 준 편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진서에도 수록되어 있다.마원이 공직에 나올때는, 좋은 주군을 골라서 했다는 일화는 일반 사람들도 모두 들어서 알고있는데, 지금 육시의 삼형제가 모두 폭악한 조정에 들어가 같이 어울리다가 떼죽음을 당했으니 슬픈 일이다.
문장전의 기록에는 육기가 타고난 재능은 뛰어나, 언변이 뛰어나고 아름다워 문장을 잘 지어 사공 장화가 그의 문장을 보고 편마다 훌륭하다고 칭찬하면서도 그의 문장이 고운 것을 비평해 이르길 남들이 문장을 지을 때는 재능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만 그대가 문장을 지을 때는 재능이 너무 많은 것을 걱정한다고 했다. 동생 육운 역시 형의 글을 보면 늘 붓과 벼루를 태워버리고 싶다고 했다.
세설신어에는 갈홍이 육기의 문장을 곤륜상에 있다고 전해지는 선경인 현포에 쌓여있는 옥처럼 밤에도 빛나지 않음이 없다고 평가했으며, 다섯 하의 물이 흘러감 같지만, 그 근원은 하나와 같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움은, 영민하고 날카로움하며 세상을 벗어난 경지니, 역시 한 시대의 유일무이함이라라고 했다. 세간에서 등애와 함께 평가할 때 육운은 숨어있는 고니라고 평가받았다. 문장을 지은 바가 무릇 300여편인데, 나란히 세간에 유행하였다.
사람들이 탄복한 바가 이와 같았지만 그러나 권세있는 가문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고, 가밀과 친하였으므로, 세간의 비웃음을 당하였다.
4. 일화
육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는데, 자신에게 잘 대해준 장화한테 생선젓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런데 장화가 손님이 엄청 많이 왔을 대 그 뚜껑을 열고는 "이게 바로 용의 고기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주위사람들이 당연히 믿지 않았는데 여기서 장화는 여기다가 독한 술로 이것을 씻으면 뭔가 다른 점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독한 술로 이것을 씻으니 이게 웬일? 다섯색깔의 빛이 나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게 생각한 육기가 돌아가 생선젓의 주인에게 물어보니 과연 말하길
라는 이야기가 있다.정원의 띠풀 쌓인 곳 밑에서 하얀물고기 한 마리를 얻었는데 형상이 남달라 이것으로 젓갈을 만들어보니 과연 맛이 좋아 이로써 헌상하게 된것입니다.
육기는 또한 《변망론辨亡論》을 지어 오나라가 흥하고 망한 까닭을 지었다. 또 진나라의 시인 반악이 《위가밀작증육기(爲賈謐作贈陸機)》 4장에서 '남쪽 오나라는 뭐길래 감히 제왕을 사칭하는가, 위대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고 가짜 손씨 정권이 보배를 물고 항복하니 영토가 모두 귀속되었다'라는 식의 언사를 날렸는데, 육기는 '한 황실이 분열하면서 조, 유, 손이 동등하게 일어났지만, 하늘이 패덕을 미워해 위가 서진에 선양한 것이고 또한 서진은 오와 촉의 옹호를 얻었다'며 위, 촉한, 오를 모두 진에 멸망당한 정권으로 생각하고 이들은 한나라와 진나라 사이를 잇는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는 논조의 《답가장연(答賈長淵)》이라는 답서를 지었다. 이미 진나라에 몸을 담은 이상 삼국의 정통을 논하는건 부질없으며 반악 역시 위와 진을 섬겼으니 오를 섬기다 진을 섬기는 나랑 다를게 무엇이냐는 논리인 것이다.
왕필과 만났던 일화가 있는데, 육기가 낙양에 들어갈 때 하남의 언사 지방을 지나다가 저녁이 가까워지면서 그 곳의 민가에 묵었다. 그런데 그 곳에서 심원한 기품을 가진 젊은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말이 깊고 미묘해 운치가 있었다고 한다.
육기는 마음 속으로 그 재능에 탄복해 고금의 일을 이야기하면서 명칭과 실상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증명했지만 그 젊은이는 그다지 즐거워하거나 이해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하며, 새벽이 되자 서로 작별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육기가 여관에서 말을 풀어놓고 있을 때 여관 할멈이 "이 곳에서 동쪽으로 수십 리에는 마을이 없고 단지 산 남쪽에 왕씨 집안의 묘만 있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육기가 만난 그 젊은이는 왕필이었으며, 이로 인해 현묘한 이치에 깊이 통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참고로 왕필은 249년에 죽었다. 한 마디로 귀신이랑 떠들고 놀았단 소리.
또한 주처에게 개과천선의 유래를 말해준 것도 육기 혹은 육운이다.
[1] 노지의 할아버지 노육의 아들이자 노지에게는 아버지가 된다. 세어에 따르면 자는 자홀(子笏)이다. 노육전에 따르면 함희 연간에 노흠은 상서가 되었고, 노정은 태산태수가 되었다. 진서에 따르면 구경(卿)인 위위(衛尉)에까지 올랐다.[2] 맹초는 육기의 군령에 따르지 않고 함부로 경무장을 하고 나가 건춘문 앞에서 사마예와 싸우다가 전사했다.[3] 육운이 자신의 행적을 비판하면서 원한을 품었는데, 동생인 맹초가 군령을 어기고 멋대로 나갔다 전사한 것을 육기가 죽였다고 여겨 더더욱 원한을 품게 된다.[4] 지금의 장쑤성 화팅(華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