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총
1. 후한 말의 황족
? ~ 197년
후한 말의 제후왕. 작위는 진왕(陳王). 진왕가는 명제의 아들 진경왕 유선이 시조인데, 유총은 유선의 증손으로 진효왕 유승의 아들이다.
본래 용맹한 성품으로 궁노를 잘 쏘았으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도 군사를 정비해 굳게 지켰기 때문에 봉국을 보전할 수 있었다. 또한 진국의 국상(國相)으로 회계 사람인 낙준(駱俊)은 명망이 높은 인물이었다 한다.
하지만 진왕의 일족인 왕후(王侯)들은 난세가 오자 조세 수입이 없고 녹봉이 없는 데다가, 노략질을 당해 거지꼴이 되어 굶어죽었다고 한다.
진왕이 진국을 굳게 보전하자 인접한 군의 백성이 많이 귀부해 그 무리가 10여 만에 이르렀다고 하며, 또 각 주군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총은 군사를 이끌고 양하(陽夏)에 주둔해 보한대장군(補漢大將軍)을 자칭했다.
그러나 원술이 진국에 양식을 요구하자 낙준이 이를 거절했는데, 원술이 이에 원한을 품고 197년 9월에 자객을 보내 낙준과 유총을 암살하는 바람에 세력이 와해되었다.
원술이 진을 공격할 때 격파되어 죽었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마 유총의 암살이 전쟁 중에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1.1. 평가
후한의 제후왕 타이틀을 달고 있으면서 난세를 만나 거지꼴로 굶어죽던 다른 고위 황족들과 달리 자신의 능력으로 지역적,군사적 기반을 갖추는 데 성공하였다.
사실상 본래 원술이 예주에서 가지던 입지를 대체하며 세를 급격히 불린 끝에 예주의 지역 군벌 수준을 뛰어넘어 조조,유표,원소,원술,공손찬과 같은 패권전쟁의 메인 플레이어로 도약할 잠재성이 충분했던 초 거물급 황족.
유총의 사망은 결과적으로 자객을 보낸 원술 자신에겐 별다른 이득도 없이 조정을 장악하려는 조조의 아주 강력한 잠재적 경쟁자만 줄여준 셈이 되었다. 매니아 층에게도 유언, 유우 등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유망주 황족이었다.
1.2. 창작물에서
[image]
토탈 워: 삼국에서 2020년 1월 16일에 출시된 천명 DLC 에서 영제, 노식과 함께 한나라 진영의 플레이어블 세력으로 구현되었다. 천명 캠페인(182년 시점) 말고도 190년 그랜드 캠페인에서도 플레이가 가능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다만 194년 캠페인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는 플레이가 불가능하다.
타입은 지휘관. 궁노를 잘쐈다는 기록을 반영해서인지 궁노를 든 장수로 구현되었으며, 진영 보너스나 초기 장수 등 여러 부분에서 사격전에 대단히 특화된 쪽으로 구현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사용하지 않는다면 원술에게 암살당하면서 원술 세력에 흡수된다. 반대로 플레이어가 유총을 진행하는 상황에선 원술이 황제를 자칭할 때, 원술에게 조공을 할지 선택하는 딜레마가 확인되었다. 이외의 정보는 토탈 워: 삼국/유총 문서를 참조.
화봉요원에서는 방통을 통해 반 조조 연합의 우두머리로 추대되어 조조를 궁지에 모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 때까지 반목중이던 여러 약소 제후들을 통합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보여주었다. 방통 또한 유비를 주군으로 정한 제갈량보다 자신의 안목이 뛰어나다고 자화자찬했으며, 낙준을 시켜 방통이 협력받지 않으려 한 사마 가문을 포섭하게 했다.[2]
그러나 사마의가 조조의 신하가 되기로 하면서 잔병의 삼선에게 피살되며, 이후 조조와 동맹을 맺고 원술을 치던 진궁의 계책으로 인해 그 죄는 원술에게 뒤집어 씌워진다. 화봉요원이 원술에게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으면서도 유총의 캐릭터성을 살리고 싶었기 때문에 이런 음모론적 전개를 진행한 것.
소설 삼국지 금수저 하후충전에서는 왕자복의 설득으로 동승의 조조 암살 거사에 참여하기로 하며, 조조의 집에 찾아가 십자궁으로 조앙을 저격해 빈사 상태로 만들었고 조조의 가병들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소설 금강 삼국지에서는 주인공 이운의 군사와 싸우다가 고순에게 붙잡히자 항복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지만 이운은 식솔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고 유총을 풀어주기로 한다.
소설 삼국지 전위전에서는 원술이 공격하려 하자 원군을 요청하는 대상으로 유비를 언급하면서 낙준을 유비에게 보냈지만 실패했다.
2. 후한 말의 황족, 유요·유대의 백부
劉寵
? ~ 169년?
후한 말의 황족. 자는 조영(祖榮).
동래군 모평현 사람으로 유대, 유요 형제의 백부.
유방[3] 의 아들 유비(劉肥)의 후손[4] 이자 유비(劉丕)의 아들.
부친이 유학에 박식한 유학자라 젊어서 아버지의 업을 계승해 경전을 익혀 효렴으로 천거되었다가 제남군 동평현의 현령이 되어 어진 정사를 베풀면서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관직을 버렸다. 백성들이 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길을 차지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으며, 가벼운 차림으로 변장해 도망갔다.
이후 예장태수, 회계태수 등으로 부임해 회계 경 내의 산 속 백성들은 매우 근신하면서 순박해 어떤 사람들은 머리가 희도록 저잣거리를 가지 못했는데, 관리들이 경제 사정에 희박한 백성들을 속이고 재산을 챙기자 유총은 번잡하고 가혹한 법령을 간결하게 하면서 단속해 관리들이 중간에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지 못하게 해 예장과 회계를 교화시키는 것에 성공한다. 유총이 장작대장으로 임명되면서 낙양으로 떠나게 될 때 산음현의 5, 6명의 노인들이 약아산 속에서 찾아와 100전을 선물로 주면서 배웅하자 유총은 노인에게 한 닢씩 받아 간직했다.
종정, 대홍려 등이 되었다가 161년 9월에는 황경을 대신해 사도가 되었는데, 짙은 안개가 나타나는 이변이 일어나 파면되어 장작대장이 되었다가 다시 종정이 되었다. 168년에는 8월에는 사공, 9월에는 사도, 169년 6월에는 태위가 되었지만 11월에 일식으로 면직되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며, 집에서 병사했다.
채옹은 유총에 대해 바른 것을 지키는 것에 충실하면서 문인습과 함께 참모로써 적합하다고 평가했다.
3. 후한 말의 관료
劉寵
생몰년도 미상
자는 세신(世信).
광한군 면죽현 사람으로 춘추공양전에 통달했으며, 성도령을 지내 정치와 교화가 깨끗하고 엄숙했다. 그는 관리 중에서도 세력이 강한 호족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조씨 일족이 조정의 관리를 등에 업고 자주 법을 어기자 전(前) 낙양태수인 조자진 부자를 죄로 다스렸다. 통치가 어려운 많은 현들을 다스려 비령, 안한령 등을 지냈다가 성도령으로 옮겼으며, 이로 인해 비현의 토호인 양백후 형제 등이 비현에서 성도현으로 이주해 대피했다가 다시 성도현으로 오자 이들을 비롯한 대성들이 종적을 감췄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집이 가난하고 재산이 없었지만, 유총은 유일하게 값진 물건인 어머니의 손에 있었던 금팔찌를 팔아 장례를 치렀다. 성도령을 지낼 때부터 청렴결백으로 유명했고 성도령에서 장가태수로 승진하자 단신으로 말을 타고 부임했다. 옷을 직접 짜고 채소와 나물을 먹는 등 검소하게 지내면서 가르쳤으며, 군에 거주한 지 9년이 되자 돌아갔다. 관리들은 그의 행적을 비석에 새겼다.
어느 시기에 다스렸는지 명확히 언급되지 않으나, 화양국지에서 장가군에 대해 설명할 때 태수로 부임한 인물들을 언급할 때 장칙과 마충 사이에 언급되는 것으로 볼 때 영제 또는 헌제 시기에 장가태수에 부임한 것으로 보인다.
4. 서진을 멸망시킨 전조의 3대 황제 유총(劉聰)
- 항목 참조.
[1] 후한서에 따르면 173년 패국의 상 사천(師遷)이 국왕을 모함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석에서 사천을 진국의 상으로 정정한 것으로 보아, 유총은 최소 173년 이전에 진왕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2] 사실 자화자찬 할만 했다. 당시 제갈량이 주시하는 유비는 방랑 군벌 신세였으며, 주유가 섬기는 손책은 비록 욱일승천의 기세를 타고있으나 아직 약소 세력이었으며, 가후가 섬기던 장수 또한 약소 세력인데다 용렬했고, 순욱과 곽가가 섬기는 조조는 비록 황제를 끼고 있으나 세력이 좀처럼 확장하지 못하고 있던 상태인데다 서주대학살로 인해 명망이 땅에 떨어지고 민심이 등을 돌린 상태였다. 그나마 원방이 소속된 원소의 세력이 군소 제후들을 규합한 유총 이상이었다. 게다가 유총은 황숙이기 때문에 여러면에서 조조보다 정치적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도 높았다.[3] 한나라를 건국한 한고제를 말한다.[4] 한고제의 장자로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황제가 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