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우

 

1. 개요
2. 생애


1. 개요


1964년 1월 10일 ~
장정구와 더불어 80년대 한국 복싱을 양분했던 작은 들소.
강점은 강한 체력과 빈틈없는 디펜스, 그리고 쉴새없이 쏟아지는 소나기 펀치. 프로 데뷔 후 36연승과 17차 방어로 한국 복싱사 최다방어기록을 보유한 그는 이오카 히로키에게 패한 단 1패만을 단 하나의 오점으로 남겼지만, 후에 다시 타이틀을 탈환한 뒤 명예롭게 은퇴했다.

2. 생애


1964년 1월 10일, 서울특별시에서 출생한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급우가 우연히 가져온 글러브를 통해 체육시간에 복싱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복싱을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한강중학교 진학 후 바로 봉천동 대원체육관으로 입문했다. 성실히 훈련에 임해 기본기를 다졌지만, 아마추어 복싱은 그에게 맞지 않았다. 워낙 작은 체구 때문에 신장과 리치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아마추어 종합전적이 겨우 1승 3패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복싱 스킬은 굉장한 수준이라 웬만한 프로선수와도 대등한 스파링을 할 정도였다. 이오카 히로키에게 패했을 때 사람들이 유명우에게 안방 챔피언이라는 조롱을 하게 되자 울분을 참지 못한 유명우는 기량을 더 갈고 닦아서 다시 일본으로 가서 이오카에게 패했던 그 경기장에서 재시합을 했고 거기서는 이겨서 안방 챔피언이라는 불명예를 씻어냈다.
복싱기량에 비해 아마추어 성적이 좋지 않자 고등학교 3학년 때 프로복싱으로 전환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연전연승이 시작된다. 데뷔 후 상대선수들을 모조리 물리치고 무패행진, 84년 12월 에드윈 이노센시오를 누르고 동양 챔피언에 등극. 이제 세계챔피언을 향해 달려가던 유명우에 앞에 막강한 선수가 나타난다. 그 상대는 바로 손오공. 서유기의 주인공과 동명이인이기 때문에 한눈에도 주목을 받기 쉬운 선수지만 복싱선수로서의 능력도 굉장한 선수였다. 사실 협회에서 흥행성을 고려하여 세계도전 직전에 있던 유명우에게 도전자 결정전 성격으로 추진한 경기였기에 유명우 측에선 다소 껄끄러운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손오공은 펀치력을 봤을 때 유명우를 앞선다고 평가되었고 국제경기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박빙의 승부가 예상되었었다. 1985년 9월 8일, 유명우와 손오공은 초반부터 불꽃같은 파이팅을 벌인다. 경량급 선수들의 빈약한 파이팅과는 달리 두선수 모두 강력한 훅을 기반으로 공격적인 전개를 펼쳤다. 그러나 유명우의 진가는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에서 나타났다. 분명 손오공과 근접전에서 파이팅을 벌이면서 수비적에서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손오공은 크게 휘두르며 유명우를 공격하지만 유명우는 펀치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고 손오공에게 자신의 펀치를 적중시키기 시작한다. 데미지가 차차 누적되면서 손오공의 열세가 짙어진다. 유명우는 그틈을 놓치지 않고 7라운드 힘세게 몰아붙인다. 안면 공격으로는 쓰러지지 않자 좌후 바디샷을 연타한다. 결국 손오공은 데미지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않는다. 7회 KO승.
그 뒤 미국의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조이 올리보와 타이틀 매치가 성사된다. 조이 올리브는 유명우보다 긴 리치를 이용해 전형적인 아웃복싱을 구사했다. 경기 중반까지도 승기를 잡지 못하던 유명우에게 당시 복싱 해설가 한보영은 광고 나가는 틈을 이용해 잽을 이용해 만회하라는 힌트를 준다. 결국 유명우는 15라운드 판정승으로 세계챔피언에 등극하면서 그 전설이 시작된다. 유명우에게 약점이라면 작은 체구와 약한 펀치력 뿐이었다. 강한 체력과 디펜스는 경기 중후반으로 갈수록 상대방을 야금야금 갈아먹기 시작하고 상대방의 혼까지 빼놓는 소나기 펀치는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다.
그와 방어전을 치뤘던 강자들을 설명하자면 WBO 챔피언에 오르는 호세 데 헤수스, 4체급 챔피언 레오 가메즈, 강력한 체력으로 혈전을 벌였던 데마르코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들과 모두 2번씩 붙어 혈전을 벌인다. 그리고 모두 승리. 다소 약하긴 했지만 IBF 챔피언 출신 루돌프 블랑코 등 여타 다른 선수들과도 모두 승리하면서 연전연승. 때문에 당시 경량급 최강자 중 한 명인 장정구와 꿈의 맞대결이 기대되기도 하였다. 물론 장정구의 은퇴로 그 경기는 추진되지 않지만, 1990년 11월 10일 레오 가메즈와의 16차방어전을 승리로 장식하면 장정구의 15차기록을 넘어섰다. 17차방어까지 승리한 후 유명우는 18차 방어를 일본 원정에서 치르게 되는데 그 상대는 이오카 히로키였다. 이오카 히로키는 이미 미니멈급에서 챔프 등극에 성공했지만 태국의 나파 선수에게 타이틀을 상실한 뒤 재도전했다가 다시 패해 체급을 올려 챔프를 노리고 있던 선수였다.
이미 17차라는 대업을 이룬 유명우였기에 이오카 히로키와의 경기는 원정경기임에도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철저하게 분석한 이오카에게 유명우는 고전한다. 물론 이오카가 앞서있는 경기였다고 하기에는 적중타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원정경기의 판정텃세를 감안하면 불안한 경기전개를 펼친 것은 사실이다. 아웃복싱을 구사했던 이오카에게 효율적인 공격을 하지 못한 유명우는 결국 판정까지 가게 되는데 이미 이오카는 승리를 예감한 듯 코치와 얼싸안고 기뻐했다. 판정은 번복 끝에 2-1패, 홈어드밴티지가 있었긴 했지만 한국 최고의 복싱영웅이자 17차방어까지 간 선수에게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판정이 내려지자 유명우측은 당연히 항의한다.
유명우는 20차까지 성공한 후 명예롭게 은퇴하려고 했던 계획이 타이틀 상실과 프로데뷔 후 첫 패배라는 오점을 남기게 되자, 타이틀 재탈환하기 위해 죽을 각오로 훈련을 하며 이를 갈았다. 오죽하면 리턴매치가 성사되자 이오카 히로키에게 그동안 벨트를 간수하고 있어줘서 고맙다라고 할 정도. 다시 일본에서 열린 리턴매치에서 1차전과는 달리 유명우는 더욱 더 정교하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이오카를 공략한다. 날카로운 공격력은 1차전과 비교해 이오카가 더욱 어려운 경기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결국 12라운드 판정끝에 2-0승리, 아무리 적지에서 홈이점과 챔피언임을 감안한다 해도 얼굴이 잔뜩 부을 정도로 얻어맞은 이오카의 손을 들기는 힘들었다. 유명우는 빼앗긴 타이틀을 다시 탈환, 그것도 한국 복싱사에서 유일하게 타이틀을 빼았아간 선수에게 다시 재탈환한 선수가 되었다. 그 이후 1차례의 방어전을 끝으로 그는 명예롭게 프로복싱을 은퇴한다.
2013년, 장정구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번째로 국제복싱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강력한 체력과 디펜스를 기반으로 상대방에게 빈틈을 주지 않았고 강한 펀치는 아니지만 상대방에게 날리는 소나기 펀치는 팬들을 열광시켰다. 프로 데뷔 후 36연승과 17차 방어 기록은 한국 복싱사 최고의 기록이다. 장정구와 라이벌 매치가 성사되지 않은 점을 두고 복싱팬들은 아직까지도 가상대결을 통해 승부를 점치기도 한다. 장정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들이 많았다는 방어전을 두고 유명우를 조금 낮게 측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장정구의 상대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기량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유명우가 경기중에서 보여준 기량자체는 장정구와 박빙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특히나 강력한 체력과 디펜스는 어느 누가 상대해도 쉽게 넘볼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항상 겸손한 그이기에 본인은 자신이 질 것 같다고 말을 아낀다. 은퇴 후 음식점 경영에 뛰어든 그는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 잘 발휘되어 사업에서도 큰 성공을 이루었다. 이후 버팔로 프로모션 등 침체된 복싱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도움을 주고 있다.
여담으로 일본의 축구만화 “우리들의 필드” 에서 나오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주장 선수의 이름이 유명우인데[1], 그의 팀메이트의 이름이 장정구인걸 보면 아무래도 작가가 복싱 팬인데다 유명우 vs 이오카를 인상깊게 본 듯 하다.
1991년경 롯데칠성음료에서 출시한 스포츠음료 마하쎄븐의 CF에 출연했는데 유명우의 코치 역은 당시 개그맨으로 활동하던 임하룡이었다.[2]

[1] 선수의 설정 자체는 홍명보 클론이였다.[2] 당시 방영했던 유머 1번지의 '내일은 챔피언' 코너에서 복싱체육관 관장역을 맡아서 CF 내용에 개그요소를 넣기 위해 출연하게 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