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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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축구행정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고, 2017년부터 2020년까지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를 맡았으며, 2021년부터 울산 현대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아시아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으로 뽑히며 14년간 대표팀 주전으로 활약하며 황선홍과 함께 '''H-H라인'''이라 불릴 정도로 19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었다. 특히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는 '''황선홍과 함께 팀의 득점'''의 핵심이 되었을 정도였으며,[4] 국가대표팀에서 A매치 역대 최다기록인 136경기 출전 기록을 가졌으며 1996년에는 FIFA 올해의 선수 21위(76인 후보)에 선정되었고, 2002 한일 월드컵에서 활약하여 한국팀을 4강(준결승전)까지 올려놓았다. 월드컵에서의 활약 덕분에 아시아 선수 최초이자 유일한 '''월드컵 브론즈볼'''과 월드컵 올스타 팀, FIFA 올해의 선수 17위(37인 후보), FIFA 100 등 엄청난 커리어를 쌓았다.[5]
선수/지도자로서 합법적 병역 브로커를 모두 달성한 케이스. 다만 홍명보는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상무에서 병역 생활을 했었고 그나마 4대 독자여서 6개월만 복무했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황선홍[6] 과 마찬가지로 극과 극을 경험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 U-23 국가대표팀을 이끌고 동메달(3위)를 차지하여 많은 국민들에게서 극찬을 들었으나, 성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으면서 스스로 세운 원칙마저 깨뜨리고 선수를 선발하는 등 속칭 '으리 축구(엔트으리)'를 하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1무 2패라는 성적과 더불어 최악의 경기력까지 보이면서 국민들에게서 엄청난 비난에 받았다. 최고의 순간(2012 런던 올림픽)과 최악의 흑역사(2014 브라질 월드컵)을 모두 지녔기에 극과 극을 경험한 상황. 그런데 2017년이 되어서 항저우 감독에서 쫓겨난 후에도 여전해서...결국 2012년에 세운 공로마저 이대로 묻힐 위기. 위의 내용에 대한 것은 2012 런던 올림픽/축구 문서와 홍명보호/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문서를 참조 바람.
다만 또 거꾸로 '''행정가로서는 (감독으로서의 커리어와 정반대로) 극과 극을 경험한 것이 특징.''' 초창기 축구협회에서 전무이사로 활동할 때는 본인이 A대표팀 감독 시절 졸전, 낙하산 인사 문제와 당시 축구협회의 무능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었는데, 부회장 겸 기술위원장에 김판곤 전 홍콩 감독을 초빙하여 축구협회의 미숙한 행정 처리를 상당히 개선시키긴 했다. 아직 장담은 불가능하지만 2019년 말 현재의 시점에선 분명히 감독 시절보단 행정가로서 더 유능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실제 재능도 이쪽이 더 높아 보인다. 원래 본인의 꿈은 지도자가 아닌 행정가였는데, 처음부터 축협에서 앉혀준 국대 코치 말고 축협 행정가로서의 말단부터 차근차근 올라갔다면 지금보단 평가가 백배 나았을 것이다. 다만 감독 시절의 실패가 너무 커서 행정가로서의 긍정적인 면도 저평가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보니...
별명으로 '흥부, 홍명바[7] , 영원한 리베로, 영원한 캡틴, 홍명보험, 돌명보, 홍땅보, 땅명보, 홍명박[8] , 똥명보, 홍MB, 홍띵보, 홍띵넌, 홍덍보[9] ' 등이 있다.
2. 축구인 생활
2.1. 선수 경력
2.2. 지도자 경력
2.3. 행정가 경력
2017년 축협파동에 맞아 조직개편에 의해 전무이사로 선임되었다.[10] 참고로 박지성은 유스본부장이고 기술발전위원장은 놀랍게도 이임생.[11] 90년대 한국 축구를 이끌었던 카리스마 캡틴이었던 스타 플레이어 출신이란 점을 높게 산 듯하다. 분명 감독 시절의 실책이 크기는 하지만 선수 시절의 훌륭한 경력과 올림픽 대표팀에서의 성과 등 실적이 없는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거기다 홍명보/지도자 경력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홍명보 본인은 이전부터 지도자보다 행정가 쪽으로 꿈꾸고 있었다.
본인의 자서전에도 행정가가 되는 것을 더 희망하기도 했으니 어떻게 보면 궁극적으론 본인이 원하던 대로 행정가가 된 셈. 다시 감독직을 절대로 수행하지 않으리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일단 감독 생활의 끝이 썩 유쾌하지도 않았고 본인이 희망하는 진로로 다시 가닥을 잡았으니 감독은 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본인 스스로도 지도자는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행정가의 길을 갈 작정이라고 한다.
단, 홍명보의 행적에서 드러나듯 축협 파동의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되는 정치라인을 탄 인사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축구팬들은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박지성, 홍명보를 발탁한 축협의 깜짝인사가 애초에 근본적으로 스타 마케팅이자 2002년 추억보정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구조개편으로 이미지 쇄신을 꾀했던 축협의 이미지는 좋아지긴커녕 바닥을 모르고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12] 애초에 전무이사라고 하면 고위 임원급 보직인데 홍명보는 행정가 준비를 하기는 하였으나 제대로 행정 실무를 수행한 적은 없으니 못 해도 전무급의 고위직은 아닌 위치에서 시작해야 정상이다. 사실상 또 낙하산이다.
애초에 행정가라는 어감 때문에 착각하기 쉬울 뿐 우리가 생각하는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공무원이 아니라 처음부터 은퇴 이후 한국 축구의 주요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고위직을 지망했다고 봐야 한다. 현장에서 뛰기 보다는 바로 고위직에 오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인데 뒤에 나오는 해설가들 비판 발언들을 보면 아이러니할 뿐이다.
이후에 알려졌지만, 김판곤을 축협 부회장 겸 국가대표감독 선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김판곤 말로는 서로간의 연이 전혀 없는데 도대체 왜 본인을 추천했는지 놀랐다고. 많이 아는대로 현재까지의 김판곤 영입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2018년 3월 22일 서울 중구 두타몰 특설무대에서 열린 2018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컬렉션 런칭 이벤트 '이빨을 드러내라' 토크쇼에 참석했다.[13]
바이에른 뮌헨과 MOU계약을 맺기도 하고, 도쿄 올림픽을 위해 김판곤과 같이 선수차출을 위한 협상을 뛰는 등 행정가로서는 큰 실책이라 할 것 없이 좋은 모습을 보였다.[14][15]
3. 아시아의 베켄바워?
결론부터 말하자면 홍명보가 프란츠 베켄바워를 (롤모델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이는 홍명보의 자서전을 보면 명확히 드러나는데, 자신의 수많은 별명 중 아시아의 베켄바워라는 별명을 제일 먼저 올려놓았다.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홍명보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별명이라는 얘기이다.
마치 한국의 수비수들이 홍명보를 존경해서 '''제2의 홍명보'''라는 별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듯, 홍명보도 베켄바워를 존경해서 아시아의 베켄바워라는 별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것.
일단 당시의 한국과 일본의 축구팬들은 홍명보를 진짜로 아시아의 베켄바워라고 인식하고는 있었다. 그러나 사실 선수로서의 홍명보와 베켄바워는 선수로써의 클래스는 둘째치더라도 플레이스타일이 많이 다르며 홍명보는 사실 리베로라고 부르기도 힘들다. 이는 이 문단에 잘 설명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물론, 홍명보의 실질적인 포지션이 바이에른 뮌헨식 앵커맨이었고 베켄바워도 이 포지션에서 자주 뛰었던 걸 생각하면, 아시아의 베켄바워나 리베로라는 호칭도 완전 엉터리는 아니라 볼 수 있다.
또한 홍명보는 자기 자서전에 본인은 은퇴한다면 감독이 아닌 행정가 쪽으로 가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책이 나온 시점인 2002년 월드컵 직전은 바로 베켄바워가 DFB 수뇌부이자 FIFA 핵심 인사 중 한 명으로서 화려하게 활약하고 있던 시점이다.
특히 베켄바워는 자신의 충실한 오른팔인 페도르 라트만을 대동해 역사상 가장 깔끔한 월드컵 유치전 승리를 거머쥐는 등, 그야말로 축구행정가로서는 전성기를 찍던 시점이다.
그리고 베켄바워는 스타플레이어 출신 행정가 중에선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그나마 미셸 플라티니가 베켄바워랑 비슷한 위상까지 올랐던 스타플레이어 출신 축구행정가이나, 막후거래 관련해서 말은 많아도 적어도 일은 잘한다는 평을 받는 베켄바워와는 달리 플라티니는 부패한데다가 일도 못한다는 평을 듣는 것을 보면 사실상 베켄바워 말고는 세계구급 축구행정가로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스타플레이어는 없다 봐도 좋다.
홍명보도 그런 베켄바워를 보며 내심 그를 배우고 싶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베켄바워는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감독이란 것. 홍명보는 베켄바워랑 비교하면 감독 경력은 정말 초라하다.
물론 2012 올림픽 동메달과 같은 영광의 순간도 있었지만 2014 월드컵이나 항저우 뤼청 감독 시절처럼 안 좋은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어쨌거나 홍명보는 베켄바워가 거쳤던 길인 스타플레이어 → 명장감독(?) → 행정가 수뇌부의 길을 착실하게 밟고 있다.[16]
적어도 행정가로 뽑히는 선임과정 관해선 굉장히 논란이 많은 홍명보이나 현재까지는 (행정가로서는) 유능하단 평을 듣고 있기에, 그가 과연 베켄바워의 길을 걸어서 진짜 FIFA에서 한국을 대변하는 축구행정가가 될지 플라티니의 뒤를 이어 행정가로서도 처참하게 몰락할지는 지켜보도록 하자.
하지만 2020년 12월, 울산 현대 호랑이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한축구협회 전무이사직을 내려놓고 현장으로 복귀함에 따라 당분간 행정가로서의 길과는 떨어지게 되었다.
4. 기록
4.1. 대회 기록
- 포항 스틸러스 (1992~1997)
- K리그1: 1992
- FA컵: 1996
- K리그 리그컵: 1993
-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 1996-97
4.2. 개인 수상
- FIFA 올해의 선수 후보: 2002 (17위), 1996 (21위)[17]
- FIFA 월드컵 브론즈볼: 2002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2002
- AFC 아시안컵 베스트 XI: 2000
- K리그 MVP: 1992
- K리그 베스트 XI: 1992, 1994, 1995, 1996, 2002
- K리그 30주년 베스트 XI: 2013
- K리그 공로상: 2012
- J리그 베스트 XI: 2000
- J리그 올스타: 1999, 2000, 2001
- FIFA 100: 2004
- FIFA XI: 1997
- AFC 아시안 올스타[18] : 1997, 2000
- AFC 명예의 전당: 2014
- AFC 아시아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2020[19]
- KFA 대상: 2009[20]
- 백상체육대상 대상: 1994
4.3. 수훈
- 체육훈장 맹호장: 2002
4.4. 통산 기록
4.4.1. 클럽
4.4.2. 국가대표
2002년 11월 20일 기준이다.
5. 플레이 스타일
한마디로 말해서 유스 시스템이 개판인 1990년대 이전의 한국이기에 가능했고, 반대로 그런 한국에선 나올 수가 없었던 유형. 여러모로 이탈리아 해설자 말마따나 당시로 따지면 어떻게 한국에 나왔나 싶을 정도로 기묘한 선수였다.'''"홍명보는 한국의 기형적인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저런 선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해설자
고려대학교 재학시절엔 평범한 선수에 불과했지만 남대식 감독이 스위퍼의 재능을 간파하면서 재능이 꽃피게 된다. 수비수로서 피지컬과 스피드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탁월한 예측력과 전술 이해력을 바탕으로 공이 가는 길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며 수비진을 조율했다. 4백보다는 3백에 특화되었고 일반적인 센터백보다는 스위퍼의 위치에 적합했다. 미드필더 출신이라 롱 패스가 상당히 정확했고, 그로 인해 수비수로 포지션을 바꾼 후에도 꽤나 공격적인 성향을 보여줬으며 같은 포지션에 같은 리베로 성향을 지닌 프란츠 베켄바워와 비견되기도 했다. 카리스마와 리더쉽으로 팀 동료 사이에서도 항상 신망이 두터웠다.
홍명보가 리베로라고 불리게 된 정확한 계기는 독일의 앵커맨을 일본 신문지상에서 리베로로 번역했기에 일본에선 홍명보를 리베로라 불렀고 이 호칭이 베켄바워와 비견할 정도로 간지도 나는 김에 어영부영 한국에도 정착하게 되었다.
전성기의 홍명보는 스위퍼의 기준을 넘어 리베로에 가까운 경기조율, 패싱을 보여주었고 이를 가장 잘 보여준 대회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22] 이 대회에서 홍명보는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며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절정의 시기를 달렸다. 2002년에 들어서 점차 노쇠해진 홍명보는 리베로 보다는 기존의 스위퍼 플레이를 하며 대부분의 팬이 기억하는 스위퍼-리베로 사이의 애매한 플레이를 구사했다. 그럼에도 영원한 리베로라는 명성에 걸맞는 번뜩이는 빌드업과 수비로 2002년 월드컵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홍명보는 정확한 롱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을 갖고 있었고 중거리 슈팅도 제법이었지만, 정작 프로에서 미드필더로 포지션 체인지 했을때는 피지컬과 볼 키핑 능력, 빠르게 패스를 주고받는 원투터치 플레이 등 미드필더에게 요구되는 기술들에 익숙치 않다는 점들이 여실히 드러나며[23] 미드필더로는 실패했다. 게다가 수비수로도 단점들이 명확했는데, 1:1 대인수비에는 오히려 수비형 미드필더들보다도 약한 모습을 보여줘서 다른 수비수가 와줄 때까지 시간을 끄는 수준이었으며, 제공권도 약해서 센터백이 둘뿐인 4백에서는 써먹기 힘들었다. 물론 홍명보가 4백에서는 못했단 얘기가 아니지만, 4백으로 가면 홍명보의 단점이 더욱 부각되고 장점이 부각되지 못하기 때문에 스리백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홍명보가 몸싸움이 아주 절망적인 수준까진 아니었다고 봐도 부족했던 점은 사실인데, 신장으로만 봐도 유럽은 물론 아시아권에서도 뛰어난 수준은 아니었다.[24] 미국 월드컵 독일전을 보면 홍명보는 시종일관 독일 선수들의 피지컬에 고전했다. 로타어 마테우스와 몸싸움을 하면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 때도 팔을 써서 마테우스를 잡아끄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홍명보가 만약 수비수로서 아예 쓸모없는 수준의 피지컬과 몸싸움을 가졌다면 빌드업 능력만으로 A매치에서 136경기를 뛸만큼 중용되긴 힘들다. 즉, 홍명보는 객관적으로 몸싸움이나 피지컬이 절대 좋다고 하긴 힘들지만 아시아 무대 뿐만 아니라 월드컵 등 세계적인 강호와의 경기에서도 준수한 수비력을 보여주었기에 생각만큼 수준 이하는 아니었다. 그러나 홍명보는 상대와 거리를 두고 재는 것과 커버링에 능한 선수였지 피지컬을 써서 경합을 통해 볼을 탈환하거나 공격활로를 차단하는 능력까지 잘 갖춘 것은 아니었다.[25] 2002 때의 홍명보를 보면 1대 1 상황에서 과감한 태클로 공을 뺏어오는 경우가 의외로 꽤 자주 있었다고는 하지만 홍명보도 수비수는 수비수다. 아무리 태클과 피지컬이 약해도 최소한의 것들은 하니, 이것을 보고 홍명보의 태클링과 스토퍼적 면모가 좋았다고 보긴 어렵다. 2002년 월드컵의 히딩크도 대인마크 능력이 부족한 홍명보를 쓰기 위해 선호하는 4백을 포기하고 3백을 선택해야 했다.[26] 게다가 경합이 약한 홍명보를 보좌하기 위해 유상철, 김남일 등 몸싸움이 능한 미드필더를 필수적으로 써야 했고, 창의성이 있는 윤정환은 자리가 없어 기용하지 못했다.
상술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던 탁월한 예측력으로 패스 커트와 슛각도 좁히기 or 블록 등에 능했으며 다른 스토퍼가 먼저 상대를 막다가(이하 이 행동을 챌린지로 통칭) 뚫리면 귀신같이 나타나 공격을 끊는 커버능력 때문에 수비진의 전설로 남은 것이다. 그의 결정적인 선방 장면들은 수비적 기본기보다는 예측을 통한 위치선정 능력이 뛰어나서 그런 경우가 많다.[27] 즉 1:1보다는 다대일이나 막 1:1을 뚫은 상대를 저지하는 능력이 좋았다. 다시 말해서 1:1은 약하지만 자신이 부릴 수 있는 동료가 있으면 능력을 발휘하는 커맨더형 수비수였다.
또한 홍명보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장점으로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선수였다는 것. 양발잡이 공격수보다 훨씬 드문 양발잡이 수비수로서 왼발, 오른발을 가리지 않고 태클이 가능해서 순간적인 커버링에 특화된 수비 능력을 보여주었다. 물론 태클 뿐만 아니라 패스와 슛 역시 양발로 가능했기에 수비 이후 빠른 공격 전환에도 도움이 되었다.
따라서 홍명보는 스리백에 특화되어있던 선수였다. 포백은 필연적으로 중앙수비가 직접적으로 상대 공격수와 맞대결하게 되기 때문에 홍명보를 포백의 센터백으로 1명의 파트너만 붙였다간 수비가 박살난다. 근데 그의 탁월한 커버 능력은 그의 부족한 챌린지 능력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로 괜찮았는데, 이는 당시 '''한국 축구의 특성''' 때문이다. K리그로 대표되는 한국 수비수들은 전통적으로 강인한 피지컬과 집요한 투지를 바탕으로 전투적인 챌린지를 하는 파이터형 수비에 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두 명만 모아서 쓰리백의 양쪽에 넣어 놓으면 그들의 챌린지 능력은 최소 2인분 이상~심지어 3인분에 달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대다수의 K리그 팀 센터백은 쓰리백을 추구하였다. 특히 2002년의 김태영 - 최진철은 이 분야에서 역대급으로 평가받는다.[28] 따라서 그들의 중앙엔 이들의 챌린지가 뚫렸을 경우 뒤에서 커버를 쳐 줄 수 있는, 챌린지 능력은 별로지만 커버 몰빵형인 스토퍼가 있어도 그리 압박에 밀릴 걱정이 없었는데다가, 상술했듯 한국 축구계에서 챌린지 능력이 뛰어난 수비수는 많았지만 홍명보급의 커버 능력을 가진 선수는 드물었고, 심지어 당시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도 많은 편은 아니었다.
1998년 월드컵때도 거스 히딩크도 2002년을 준비하며 몇 차례나 홍명보를 포백 시스템에 끼워넣으려 했지만 실패했다.[29] 그래서 홍명보가 장기부상을 당한 김에 홍명보를 아예 버리고 포백으로 맞추려고 했다.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포백의 센터백 자리에는 맞지 않는 선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끝내 히딩크가 홍명보를 버릴 수 없었던 건, 이미 수년간 익숙해진 탈아시아급이라 할만한 홍명보의 딥라잉 플레이메이킹 능력을 버릴 수 없었고 자신에게 알맞은 진형 위에 세워 놓으면 태양과 같은 리더쉽으로 태극전사들을 이끌어왔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홍명보가 국대의 중앙을 지휘하던 시기 홍명보 못지 않은 플레이메이킹 능력이 있는 윤정환, 신태용, 노정윤등 수많은 K리그 스타들은 국제무대에서 뛰기 부적합한 피지컬 때문에 일찍 배제되었었다. 게다가 홍명보는 90년대 수비수였다. 센터백으로 커맨드와 빌드업까지 갖춘 선수는 전세계에도 얼마 없고 한국에서는 홍명보 외엔 발기술이 좋은 센터백 자체가 없었다.[30] 여기에 국제경기에서 2002년 월드컵때 대표팀 중원을 지킨 유상철과 김남일은 빼어난 경합능력과 수비력, 활동량으로 유럽선수들과 대등하게 맞설순 있었으나 홍명보처럼 날카로운 전진 패스를 활용한 빌드업 능력은 없었다.[31][32] 따라서 홍명보를 버릴 경우 대표팀의 공격 루트는 투박한데다 성공률도 높지 않은 측면밖에 남지 않으므로 홍명보가 없으면 팀 운영이 불가능했다. 다행히, 홍명보에게 어울리는 스리백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2002년 국가대표팀은 여러가지 조건이 좋고 경기력과 홈 버프를 받아서 역대 최고의 성과를 내는데 성공했다.[33]
그래서 홍명보는 커리어 내내 클럽에서는 피지컬 압박이 덜한 J리그에서 황제로 군림했고, 국가대표에서는 확실한 자신의 보디가드들을 두고 있어야 능력을 100% 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현대축구의 가장 큰 명제인 압박의 문제로 인해 피지컬과 탈압박이 약했던 홍명보식 한국형 플레이메이커 즉, 몸싸움과 드리블보다는 패스로 빌드업과 게임 지휘를 맡던 자리는 바로 뒷 세대인 윤정환, 이관우에서 한동안 끊어졌다가, 기성용이 이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홍명보와 플레이스타일이 완벽하게 같지는 않다. 기성용 문서에도 설명이 나와있지만, 롱패스를 활용한 빌드업과 넓은 시야 등으로 홍명보와 비교되기도 하고 피지컬과 볼 다루는 테크닉은 되려 우위에 서 있다. 특히나 국가대표에서 보여주는 결이 다른 롱패스들은 팬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경험이 쌓여서 강팀들 상대로도 안정적인 탈압박을 자주 보여주기도 했다. 다만 예측력과 위치선정 같은 센스는 아예 비교불가 수준으로 홍명보가 훨씬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기성용이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수비적으로 비판받는 이유는 활동량만 많지 그 활동량을 적시에 써먹을 수 없는 위치선정의 약점 때문인데, 이 위치선정에서 홍명보는 정말 탁월함을 보였다. 홍명보는 국가대표 경기에서 그 순간적인 타이밍과 센스로 몇 번씩이나, 속된 말로 한 골 막은 것과 같은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래서인지 홍명보는 스페인을 상대로 비교적 강한 모습을 보여 줄 때가 많은데[34] 이는 스페인이 우리가 아는 티키타카 전술처럼 드리블과 패스 플레이 위주의 전술을 펴는 팀이기 때문. 이런 전술을 쓰는 일본이 홍명보의 수비망 앞에서 번번히 무릎을 꿇은 것처럼 스페인의 전술도 패스 차단에 도가 튼 홍명보 앞에선 상성 최악이기 때문. 이는 홍명보가 비에리의 폭력 축구(...) 앞에선 이상하게 상당히 부진한 점을 봐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홍명보는 스피드, 피지컬이 부족해서 최소한의 필요한, 그 상황의 적재적소의 움직임만을 해야만 했던 80년대 축구에 최적화된 앵커맨이나, 그 부족한 피지컬을 명민한 오감과 천재적인 전술적 지략으로 커버해 90년대 이후에도 상대방들의 움직임을 묶어놓았으며 '''고작 이것만으로도 한국을 지휘하고, 경쟁력을 보여주었던 불가사의한 선수'''라고 할 수 있다 [35] . 상대방 입장에서는 정말 짜증나는 스타일이고, 실제로 써먹기도 어렵지만 안 쓰자니 정말 아쉽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게 만드는 유형의 선수였다.
5.1. 유럽 진출시 성공 가능성
위에서 서술한 플레이 스타일 때문에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했다면 성공했을까?'는 축구팬들 사이에서 오래전부터 논쟁거리였다.
우선 이야기에 앞서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과는 다르게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유럽에 진출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 배경에는 세계 축구 사정에 어두웠던 국내 축구계의 현실이 있었다.
첫째로 유럽에서 통할만한 에이전트가 없었다. 당시 국내 에이전트들은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면서 유럽의 안정적인 팀을 보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1999년 한국은 총 4명의 에이전트가 있었는데 이중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이영중 이반스포츠 대표 였다. 이영중은 국내외 축구팬으로부터 'J리그 빠'라는 비판까지 얻었을 정도로 국가대표 선수들을 고액의 이적료와 연봉을 보장받으면서 J리그로 보내는데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이반스포츠 소속 황선홍, 홍명보, 노정윤, 유상철, 하석주, 김도훈, 윤정환 등 많은 국가대표팀 선수들이 J리그로 진출하게 된다. 하지만 유럽 진출에선 현지 사정을 잘 몰랐던 건지, 협상력이 부족한 건지 하여튼 별 성과가 없었다. 프랑스 르 샹피오나 RC 스트라스부르의 서정원, 네덜란드 에레디비시 NAC 브레다의 노정윤,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라스크 린츠의 강철, 최성용,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의 이동국[36] 등이 이영중의 작품이긴 한데 이동국이 뛰었던 베르더 브레멘을 제외하면 하나같이 얼마 지나지 않아 2부리그로 강등되었던 중소리그의 하위팀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90년대 국내에서 가장 실력있다는 에이전트의 능력이 이 정도였다.
둘째, 국내프로팀들이 해외리그 진출에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이 당시 한국의 프로축구팀들은 선수들의 해외진출에 굉장히 폐쇄적이었다. 생각해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1990년대 후반은 K리그 최고의 전성기로서 경기장이 팬들로 가득차던 시기였다. 팀 입장에서는 스타급 선수들이 하나 빠지는 것이 리그 성적 뿐만 아니라 관중 수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그 때문에 외국으로 나가겠다는 선수를 좋지 않게 볼 수 밖에 없었다.[37] 홍명보의 자서전 표현을 빌리면 해외팀에 이적제의가 들어와도 소속 팀에 몇년간 '봉사'를 해야 겨우 허락받아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셋째, 입단 테스트 거부도 한 몫했다. 당시에 한국 국가대표 선수들은 최고의 선수라는 자존심 등을 앞세워 선수 본인 또는 소속팀이 입단테스트를 거부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 당시 선수들의 해외진출을 좋지 않게 보던 한국프로팀들은 100만 달러 이상의 적지 않은 수준의 이적료를 제시했는데 실력은 검증 받지 않겠다고 하니 유럽팀들이 호구도 아니고, 남미와 아프리카의 이적료와 연봉이 낮고 실력이 훨씬 더 뛰어난 선수들 쪽으로 눈을 돌리는게 당연한 일이었다. 해외 진출이 어려웠던 시기에도 입단테스트에 적극적이었던 서정원[38] , 노정윤 같은 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했던 사례를 볼때 국내 축구계가 해외 사정에 조금 더 밝았더라면 차범근, 박지성,손흥민까지는 못되더라도 유럽 프로팀에서 주전급으로 활약하는 선수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왔을 것이다.
정리하면 우물안 개구리와 다름 없었던 국내축구계의 현실이 유럽으로 진출하고 싶은 선수들의 발목을 계속 잡아왔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2000년 무렵, 축구협회가 설기현 같은 유망주를 유럽으로 보내는 유망주 해외진출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2002년 히딩크 감독이 박지성, 이영표를 PSV 아인트호벤으로 데려가면서 점차 변화해 가게 된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면 홍명보가 만약에 유럽에 진출한다면 분데스리가 팀에 입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분데스리가는 독일의 프란츠 베켄바워, 로타어 마테우스, 마티아스 잠머, 옌스 노보트니, 스위스의 치리아코 스포르차, 노르웨이의 키에틸 렉달 등 ‘리베로’ 유형의 선수들이 많이 뛰던 리그이기 때문이다. 또, 분데스리가는 한 때 심재원과 홍정호가 진출했던 적이 있을 만큼 유럽의 다른 리그에 비해 동양인 출신 중앙수비수를 영입하는데 거부감이 없다.
실제로 홍명보에 관심이 많았던 유럽 프로 팀들 중 분데스리가 팀이 꽤 있었다. 설에 따르면 카를스루에 SC, 헤르타 베를린, 함부르크 SV가 영입할 의사가 있었다고 한다. 카를스루에 SC는 1996년 여름 스위퍼 옌스 노보트니가 이적한 자리를 보강하기 위해 홍명보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타진했다.[39]
하지만 바이에른 뮌헨,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와 같은 독일의 명문구단에 입단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로타어 마테우스가,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은 옌스 노보트니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마티아스 잠머가 주전 스위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홍명보가 분데스리가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하면 중위권 팀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이나 영입제의를 한 것으로 알려진 FC 바르셀로나에 입단했으면 성공했을까? 가능성은 반반이다.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루이 반 할 감독의 존재다. 반 할이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있던 97-98 시즌 당시, 팀의 주장 펩 과르디올라는 부상 때문에 한 시즌 가까이 뛰지를 못했다. 과르디올라는 바르셀로나 전술의 핵심이었다. 포백 수비 바로 앞에서 수비라인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공격 전개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과르디올라가 빠진다는 것은 기존의 전술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과르디올라가 부상 때문에 경기에 못 나왔던 시즌이 바르셀로나가 홍명보를 영입하려고 했던 바로 그 시즌이다. 반 할은 과르디올라의 부재로 인한 기존 전술의 공백을 아약스의 3-4-3 전술로 보완하려 하였으며 그 스리백의 중앙에 뛸 선수로 홍명보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40] 둘째, 홍명보는 앞에 기술된 것처럼 스페인을 상대할 때 유독 강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1994년 미국 월드컵 조별 예선 스페인 전과 2002년 한일 월드컵 8강전을 기억해보자. 1994 월드컵 스페인 전의 경우 직접 프리킥 골을 넣었고, 공격진 바로 뒤까지 올라가 서정원의 골을 어시스트했다. 2002 월드컵 8강전에서는 독일, 터키, 이탈리아 등 다른 강팀과의 경기와는 달리 단 한골도 허용하지 않는 수비력과 정확한 롱패스를 바탕으로 한 빌드업 능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실패 요인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루이 반 할은 알베르토 자케로니처럼 스리백을 고집하는 감독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홍명보가 부진한 모습을 보일 경우 바로 포백으로 전환했을 것이다. 둘째, 동양인 선수가 프리메라리가 팀의 주전으로 자리잡았던 적이 거의 없다. 한국의 이천수, 박주영, 일본의 나카무라 슌스케 등 적지 않은 동양인 선수들이 프리메라리가에 진출했으나 처절한 실패를 경험 했다. 또 박지성 ,유상철처럼 멀티플레이가 가능하면 로테이션 멤버로 쓸 수 있지만 홍명보는 오직 스리백에서만 자기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선수라서 감독의 성향과 맞지 않으면 벤치멤버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튼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한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까?'에 대한 질문의 답은 열린 결말이므로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6. 사건, 사고 및 논란
6.1. K리그 드래프트 파동
홍명보는 이미 고려대 시절 1990 월드컵에 출전하면서 대표팀의 차후 10년을 책임질 핵심 선수로 떠올랐다. 이에 드래프트 판에 나올 경우 모든 팀의 관심이 집중될 대어였으나 홍명보는 황선홍과 더불어 선수 본인이 가고 싶은 팀에 입단할 수 없다는 점과 계약금과 연봉이 타 종목에 비해 낮게 책정되었다며 드래프트 거부 선언을 했다. 그리고 포항제철이 꼼수를 부려 산하 아마추어팀에 황선홍과 홍명보를 입단시킨 후 포항제철 소속 선수로 맞아들였다. 이는 격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며, 동시에 아마추어팀 입단에서 3년이 지날 때까지 경기에 나올 수 없다는 규정에 따라 황선홍과 홍명보를 포항이 해외 유학을 보내기로 발표하며 일반 팬들에게까지 파문이 확산되었다. 이후 황선홍은 해외 유학을 떠났고 홍명보는 상무에 입대한다.
그러나 여론과 타 구단의 반발을 이기지 못한 포항은 홍명보의 상무 전역 후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게 되었고 홍명보는 유공의 손에 들어갔다. 그러나 홍명보는 이미 포항에게서 1억을 상회하는 돈을 받았기에 유공으로 가는 건 포항제철의 책임자들에게 있어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결국 포항은 기존 포항 선수와 더불어 그해 드래프트 1, 2순위자들과 유공의 홍명보를 1:3 트레이드하며 홍명보를 데려오게 된다. [41]
6.2. LA 갤럭시 이적 관련 태업 논란
포항은 2002 월드컵 대표팀 4강 주역인 홍명보로 포항의 가치를 상승시키고 싶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적은 생각치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외진출을 꾸준히 시도해온 홍명보는 MLS로 이적하고 싶었고, MLS로의 이적의지를 천명했다. 포항은 금시초문이었는데 홍명보와 LA 갤럭시 간의 개인협상은 끝난 것처럼 보이는 정황이었다.[42] 포항은 뭔 소리냐는 반응으로 홍명보의 이적 의사를 일축했으나 홍명보는 이에 백태클 퇴장으로 대표되는 태업으로 응수했으며[43] , 장외에서는 언플 및 개인 팬클럽 등의 활발한 활동으로 '''대승적 차원'''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구단이 졸렬한 것처럼 보이게 압박했다. 결국 포항은 이적료로 100만 달러를 요구했는데 LA 갤럭시에서는 36만 달러밖에 주지 못한다는 의견을 고수했다. 결국 홍명보 본인이 파기 위약금을 물고 자유계약으로 이적했다. 나이를 감안해도 '''바로 6개월 전 월드컵에서 브론즈 볼'''을 수상한 선수에게 36만 달러가 적당한 이적료는 아니었다.
이때 묘한 언플로 마치 포항은 홍명보를 공짜로 J리그에서 데려왔는데 돈장사한다고 욕먹었으나, 기실 홍명보의 이적에 공식 이적료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당시 가시와와 홍명보의 남은 계약기간 동안 홍명보가 받을 수 있는 연봉이 100만달러였고 포항이 이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이적이 발생했던 것이다. 즉 단 반시즌만 뛴 홍명보를 포항이 36만달러에 보내주면 포항은 자기 맘대로 이적 안 시켜준다고 태업질을 일삼으며 여론을 조종해 팀을 뒤흔든 선수를 6개월 동안 쓰기 위해 64만달러 + 6개월어치의 연봉(필시 포항 출신임과 더불어 4강 영웅이자 주장임을 내세워 최고급 대우를 해줬을 테니 연봉 10억 이상도 생각할 수 있는 만만찮은 액수)이라는 거대한 비용을 지불했어야 하는 꼴이 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는 위약금만 물면 언제든지 자유계약 신분이 되어 이적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점이다.
여튼 이 사건으로 포항에서 홍명보에 대한 평가가 급락하게 되고 지금도 이 사건을 아는 포항 올드팬들에게는 욕을 먹는다. 황선홍도 도피성으로 J리그 가면서 이미지가 안 좋아졌던 시절도 있긴 했지만[44] 적어도 이런 식으로 깽판을 치면서 가지는 않았다. 은퇴 이후에도 포항에 애정을 보여주며 감독까지 된 황선홍과는 달리 되려 포항이 울산 다음으로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서울 구단에 관심을 더 많이 보여주면서 스스로 이미지 악화에 일조했다. 자서전에서도 자신은 포항의 레전드는 아니고, 가시와 레이솔의 레전드는 될 수 있겠다고 쓴 바 있다.[45]
다만 포항 구단이 일방적 피해자인 것은 아닌데, 분데스리가, FC 바르셀로나와 같은 명문리그, 구단으로의 해외 진출을 완강하게 막아, 홍명보가 J리그로 갈 수 밖에 없어 선수 커리어에 막심한 손해를 본 것을 생각한다면 일종의 자업자득이다. 그러나 포항이 얼마나 공들여 홍명보를 데려왔는지, 데려와서 군대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드래프트 시장에 내놓은 뒤 1:3 트레이드로 다시 데려왔는가는 이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46]
이 때 뭔가 저주라도 받은 건지 포항은 홍명보에 이어 또 다시 통수를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이나 더 맞게 된다. -박주영-오범석에 이어 2014년에 황희찬까지.
6.3. 잦은 항명 및 태업 의혹
과거 전 29만원의 그것를 본딴 사조직 '열하나회'의 멤버로서 대표팀내 영향력을 행사하며 가입하지 않는 선수에겐 불이익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있다. 다만 '열하나회'에 대해선 다른 설도 존재한다. 열하나회는 애당초 유소년축구를 지원하고 축구선수들의 친목을 도모하는 평범한 모임이며[47] 하나회를 모델로 만든 것이 아니라 베스트 일레븐의 모임이라는 의미에서 열하나+회라고 했다는 것이고, 하나회와 연결 지은 건 1996년 아시안컵에서 대표팀의 부진에 뿔이 난 몇몇 언론의 왜곡이라는 것이다.[48]
아무튼 열하나회가 크게 문제가 된 건 1995년 코리아컵 국제축구대회에서 준결승 잠비아전을 앞두고 술집에서 술을 먹은 음주파동과 1996년 아시안컵에서의 부진 특히 8강 이란전에서 전반까지 2:1로 멀쩡히 앞서가다가 후반에 탈탈 털리면서 2:6으로 참패한 식스투 참사 때문이었다. 당시 이 두 사건에 대해 홍명보가 열하나회를 주축으로 하여 박종환 당시 대표팀 감독을 무시하고 고의로 태업을 벌였단 의혹을 받았다. 다만 박종환 감독의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지휘방식에 불만을 품고 벌인 일이라는 설과 식스투 참사에 한정해 그저 체력이 떨어져서 털렸다는 설도 있다. 특히 식스투 참사가 일어난 1996년 아시안컵의 경우 당시 홍명보와 스리백을 구성한 두 수비수 중 허기태는 비록 열하나회 회원 가입은 늦었지만 홍명보의 고대 1년 선배이고 이영진은 대구대 졸업반까지 듣보잡 취급 당하다가 일화 입단 이 후 주전 수비수에서 국가대표로 초고속 승진해 '''박종환의 양아들'''로 통하던 선수였기 때문에 홍명보가 태업을 선동했다는 주장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애당초 히딩크 이전 한국 대표팀은 토너먼트에 맞는 체계적인 체력 트레이닝 없이 우리는 체력이 강하다는 막연한 인식속에 구 일본군식 정신론만 내세웠고 당시 한국대표팀은 시즌 직후 체력이 고갈된 상태였기에[49] 그냥 후반전에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졌을 가능성이 사실 가장 높다.
하지만 어떤 이유로든 대표팀에서 사조직에 관한 구설이 흘러나온 것과 특히 음주파동을 일으킨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크게 비판받아 마땅한 부분이다.
열하나회가 홍명보와 연결되어 아직도 이야기되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1996년 이전에도 이후에도 홍명보는 감독과 유독 불화설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6년 이전에는 비쇼베츠 감독과의 불화가 대표적으로 꼽히는데, 올림픽 대표팀에 와일드카드로서 합류가 유력시됐으나 불발되고 만 것이 감독의 출장명령을 대놓고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비쇼베츠 감독이 한국 문화에 매우 잘 적응하지는 못했던 점, 그리고 당시 윤정환을 중심으로 팀을 만드려고 했던 것이 그 불화의 원인이 아니었나 추측되곤 한다.
이후에는 1998 프랑스 월드컵 감독 차범근[50][51] , 2002 월드컵 감독인 히딩크와도 당시 크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딕 아드보카트는 아드보카트 감독님이라고 부르는데 히딩크는 히딩크 감독이라고 부르며, 자신의 롤모델은 아드보카트라고 자주 얘기해왔다. 다만 아드보카트를 만난 건 선수를 은퇴하고 코치가 된 이후였다.
그런데 후술할 내용에 의하면, 히딩크와는 크게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함에도 불구하고 히딩크가 감독을 맡던 안지 마하치칼라 팀에 가서 코치 연수를 받았었다. [52]
6.4. 브라질 월드컵 관련 논란
홍명보호/논란과 평가 참고
6.5. K리그 비하 발언
"우리나라에 A급 선수들이 있는데, 이 선수들은 유럽에 나가면 거의 B급대 선수들이 있고요. 우리 K리그에 있는 선수들은 그 밑에 있는데, 과연 잘하는 선수가 유럽에 나가서 경기를 하지 못하고, 지금 그 선수들보다 조금 수준이 떨어지는 선수가 경기를 하고 있을 때 과연 이거를 어떻게 선수 구성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고…."
브라질 월드컵에서 졸전을 기록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 홍명보 본인이 내세운 원칙을[53] 어기고 소속팀에서의 활동이 사실상 없는 유럽파를 기용한 이유를 묻자, A급(유럽 리그)에 속해있지만 뛰지 못하는 선수를 B급이라고 지칭하더니 K리거들은 그보다 못한 급이라고 발언하며 파문이 일었다.
선수들의 객관적 실력 면에 있어서 유럽의 메이저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더 나음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유럽의 중소리그라면 국가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대체적으로는 K리그가 있는 아시아보다 유럽에 더 뛰어난 리그의 수 자체는 많으니까. 다만 문제는 브라질 월드컵에서 '''그 유럽파들은 손흥민을 제외하고는 전원 죽을 쒔으며, 제 몫을 했던 선수는 홍명보가 애초에 뽑을 생각이 없다가 여론에 밀려 뽑았다는 손흥민과 소수의 K리거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유럽파들을 뽑은 사람은 다름아닌 홍명보 본인이다.''' 저 발언은 사실상 본인의 책임을 피하려는 유체이탈 화법이다.[54]
이후 항저우의 감독으로 취임한 후 가진 인터뷰에서도 저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은 듯 하며, 이도 얼마못가 경질되면서 "K리그보다 못한 곳에서도 해고당한 감독"이라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그리고 2021년부터는 본인이 B급 미만이라고 깎아내렸던 '''K리그 팀인 울산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물론 취임 시점까지 이 발언에 대한 해명은 단 한차례도 없었다. 때문에 울산의 팬들은 속이 뒤집어지고 있으며, 타 K리그 팀의 팬들도 "B급 미만 선수들로 뭘 하려나"하며 비아냥 중. 홍명보 감독님, 'B급 발언' 해명하셨나요?
2021년 1월 7일에 울산 감독 취임식을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해당 발언이) 사임하는 자리에서 나온 것 같은데, K리그를 비하할만한 여유와 이유가 없었다. 나의 발언이 K리그 팬들에게 상처를 줬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다. 나는 K리그를 통해 프로에 데뷔했다. 지금까지 아시아를 선도하는 리그를 비하하거나 깎아내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축구인으로서 K리그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갖고 있다. 당시 발언으로 실망하셨을 팬들에게 다시 한 번 사과드린다. 울산 감독으로 어떤 진심을 갖고 있는지 보여드리겠다"'''라며 속죄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일단은 지켜본다는 분위기이다.#
6.6. 러시아 월드컵 방송 3사 해설위원 비판 논란
2018년 7월 5일 열린 대한축구협회 기자 간담회에서 한 발언이 논란이 되었는데, 주 요지는 "해설위원들이 첫 월드컵부터 계속 월드컵에서 성공만 해본 사람들이라 선수들이 못하는 것에 대해 공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감독이 되어) 현장 경험을 하고 오면 더 좋은 해설이 될 것 같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이 들리기에 따라서는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 당시 한국 공중파 방송사 해설위원인 안정환, 이영표, 박지성에게 "'''감독 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2002년의 성공은 그동안 실패했던 선배들이 힘을 모여서 된 것이고, 세 해설위원은 그것을 토대로 첫 월드컵부터 성공을 경험하고 그걸 바탕으로 이후에도 계속 월드컵에서 성공만 했다" 라며 월드컵 기간 중 해설위원들의 지적 및 개선 요구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뉘앙스의 말을 남겨 각 언론 및 네티즌들로부터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홍명보의 말대로 세 선수들이 2002 한일 월드컵 성공 이후 국가대표에서 계속 성공적인 결과를 낸 것은 아니다.[55] 오히려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과로 높아진 국민들의 눈높이 때문에 대표팀 경기력이 그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을 때 욕을 먹었고 그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는 부담을 갖기도 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첫 승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결국 1승 1무 1패로 예선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고 당시에도 16강 진출 실패라며 성공이 아닌 실패라 언급되었다. 또 원정 사상 첫 승을 거두는 성과에 대해서도 그 1승의 상대가 3패를 당한 토고라며 폄하되었다. 또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원정 사상 최초로 16강 진출을 달성했지만 높아질대로 높아진 기대치에 16강 진출이 당연하게 생각되어 큰 환호를 받지도 못했다. 오히려 8강 진출 실패라며 염기훈이나 이동국, 허정무 감독 등이 큰 비판을 받았다. 즉,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월드컵에서 항상 성공만 한 것이 결코 아니다. 지금에서야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 16강 진출이 원래 어려운 것이다란 인식 하에 평가받지만 2006 독일 월드컵, 2010 남아공 월드컵 때의 16강 진출은 전 대회 4강팀으로서 당연히 달성해야 할 목표였다.
또한 박지성은 당시 '''대한축구협회 유스전략본부장'''이었다. '''한마디로 이미 현장에 있었음에도''' 대한축구협회 소속인 홍명보가 같은 축구협회 소속으로 일하고 있는 박지성을 비판하는 것 역시 모양새가 이상한데 이영표와 안정환 둘만 떼어 비판하는 게 더 이상하기에 한꺼번에 말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2002 한일 월드컵의 선수들이 혜택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이기에 거스 히딩크라는 전 대회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끈 명장을 데려오고 월드컵의 성공을 위해 K리그를 중단하는 등의 축구협회와 국가적 차원의 지원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거스 히딩크라는 명장을 만나 체계적인 훈련을 통해 선수들의 실력이 업그레이드되고 월드컵의 성공으로 병역 면제와 함께 여러 선수들의 유럽 진출의 길이 열리는 등 국가적인 혜택을 받은 것은 분명이다.[56] 이전의 한국 축구는 제대로 된 지원 없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오직 투혼으로 결과를 바라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혜택에 대해 이미 안정환, 박지성, 이영표는 2000년대 한국 축구를 10년 가까이 이끌어갔다. 오히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높아진 기대치로 많은 부담감 속에서도 어느 정도 국민 기대치에 부응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반드시 지도자나 행정가가 되어 계속해서 한국 축구를 위해 뭔가를 하라는 것은 억지에 가깝다. 위의 항목에서 서술했듯이 특히 축구협회로부터 온갖 혜택을 받은 홍명보가 할 말은 더욱 아니다. 대한민국 축구판에 홍명보만큼 협회 덕 많이 본 선수가 어디있단 말인가?
또한 홍명보는 과거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을 앞두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당시 월드컵 감독의 자격으로 MBC를 찾아 안정환과 송종국에게 "해설은 너희 생각대로 하면 된다. 좋은 얘기만 하면 안되고 쓴소리도 해라. 쓴소리를 듣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 그건 바로 너희 역할"이라고 조언한 바가 있어, 4년 만에 자신의 말을 뒤집는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받게 되었다.[57]
다만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때의 해설진이 실망스러운 해설을 보여준 건 사실이기는 하다. 이영표는 2014년 때의 일침갑, 초롱도사는 온데간데없고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 같은 이상한 염불이나 외우고 있었고, 안정환은 2014년에도 해설 면에서 좋은 평을 못 들었는데 2018년에도 해설가로서 성장한 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박지성은 아예 해설이 너무 재미가 없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58] 문제는 이런 세간의 해설진 평가에도 홍명보의 해당 발언 이후 여론이 바뀌어 홍명보가 욕먹었던 것. 홍명보 본인의 실언과 업보 때문인 데다가 2014년 시절의 발언과 앞뒤가 안 맞고 열심히 일하는 후배들에게 일침만 놓는 꼴이었던 것이 문제이다. 본인 딴에는 신태용호가 해설진한테 팩트, 노팩트 거르고 맹목적으로 여러 매체에서 두들겨 맞는 걸 보고 4년 전의 자신이 생각나 안타까워 제대로 알고 비판하라고 나름의 쉴드를 쳐준 것 같지만, 국가대표팀을 향한 제대로 된 변호를 해주기는 커녕 너희들이 뭘 아냐는 식으로 비칠 수 있는 발언을 해버리니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되었다.
여담으로 홍명보의 이 발언 이후 안정환은 간접적으로나마 선배한테 한 소리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해설하는 내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이었다. 물론 해설의 질이 좋지 않아서 비판을 받은 것도 한몫을 한다.
7. 홍명보에 대한 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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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는 한국의 기형적인 시스템이 낳은 기형아이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저런 선수가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59]
1994 미국 월드컵 당시 이탈리아 해설자
'''"홍명보가 만일 지금 다시 축구를 시작한다면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유럽에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러나 지금 늦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인터내셔널해럴드트리뷴(IHT)의 칼럼리스트 랍 휴스
'''"마치 두 명의 말디니가 서 있는 것 같군요."'''
이탈리아 해설자,세계 올스타 경기에서 파올로 말디니와 함께 수비를 조율하는 홍명보를 보고
'''"나폴리를 떠나 유벤투스로 가게 된 치로 페라라의 자리를 홍명보로 메우고 싶었는데 안타깝다."'''
SSC 나폴리 구단주,1994년 홍명보의 영입에 실패한 후
'''"한국이 예선탈락한 것은 결코 한국 축구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차범근 감독은 홍명보같은 유능한 선수를 몰라봐 그를 공격수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60]
'''"골대를 지키고 있다 보면 앞에 선 등번호 20이 얼마나 크게 보이는지 모른다."'''
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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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국가대표팀 주장으로서 8강에서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짓고 난 후. 그리고 그와 관련된 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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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에서의 등번호는 20번. 처음 국가대표로 출전했을때부터 달았던 번호로 황선홍의 18번과 함께 홍명보를 상징하는 번호로 자리잡았다. 올레 군나르 솔샤르와 함께 가장 유명한 20번 선수로서 한국 축구 한정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등번호가 되었다. 홍명보가 은퇴하자 그를 존경했던 포항 후배 이동국이 이어받았고, 이동국의 국가대표 차출이 불안해지자 제 2의 홍명보라 평가를 받는 홍정호가 이어받았다. 지금도 전통적인 의미에서는 공격수가 주로 다는 20번을 수많은 한국 수비수들이 너도나도 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2001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게 5-0으로 진 경기에서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니콜라 아넬카에게 "와 봐! 새X야!"라고 소리쳤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도는데, 사실 이는 거짓이다. 애초에 말 자체가 별로 없는 홍명보가 처음 보는 사람한테 욕설을 하는 모습이랑 매치가 되는가?[61]
- 홍명보가 홍명바로 둔갑한 사건이 있었으니. 8강 스페인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 상황에서 호아킨의 슛이 이운재에게 막혀 대한민국의 4강 진출 가능성이 높아지자 KBS의 서기철 캐스터가 흥분한 나머지 홍명보를 홍명바로 발음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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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지식인에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네이버 지식인 홍보 차원에서 각계 유명 인사들이 네티즌에게 묻고 싶은 것을 지식인에 올린 적이 있다. 그 일환인 듯.
-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오재석, 김승규와 함께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3~4위전 이란과 경기 후 기자회견에 나선 홍명보 감독은 "선수들 중 병역혜택을 우선으로 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연평도에서 전사한 장병에게 염치없는 짓을 하지 않았다. 남들이 피자, 햄버거 등을 섭취할 때 우리는 스스로 컨트롤했다"고 말하며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운 야구국가대표팀을 비하 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사실 야구선수들은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패스트푸드로 때운 반면 축구대표팀은 국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아 매끼 한국음식을 비롯한 호화로운 식사를 했다.#
- 게다가 차범근이 김어준의 블랙하우스에 출연한 하석주와 감동의 재회를 했었는데[65] 칼럼에서 차범근은 98 월드컵 이후 자신에게 연락을 안 한 선수는 하석주와 홍명보뿐이라고 언급하면서 논란이 또 커졌다. 하석주야 각주에도 적혀 있듯이 죄책감이 너무 커서 연락을 못 했고 차범근도 이를 이해했지만, 홍명보에게는 그럴 이유도 없었고 게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여론에게 비호감으로 찍힌 터라....
- 1993년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이었던 김호에게 락커룸에서 폭행을 당했었다고 한다.
- 김판곤 국가대표 선임위원장이 벤투감독을 선임하기 직전에 여론이 험악해지자 마음고생이 심해져서 댓글에 대한 경험이 많은 홍명보한테 전화를 걸었고, "'결과가 나오면 여론은 바뀐다'''며 김판곤을 위로해줬다.
- 2003년부터 2018년까지 16년간 본인이 만든 장학재단인 홍명보장학재단을 통해 홍명보 자선축구대회를 개최했었다. 16년간 총 22억 8천만원이 모였고 주로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2018년 마지막 자선 경기 하이라이트
- 현역시절 1994년 미국월드컵, 유럽 올스타 vs 세계 올스타전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유수의 스페인팀과 대표적인 명문팀 FC 바르셀로나에서 영입제의를 받은적이 있다고 한다. 2002년 당시 기사 원문은 삭제된 상태고 퍼온 기사 내용만이 남아있는 상태다. #
- 잘 알려진 사실로 빠른 1969년생이라 황선홍과도 상당히 친하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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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은 16강전에서 맞붙은 이탈리아 대표팀도 잘 알고 있었고, 트라파토니는 아주리 10번이지만 터프하고 활동량 엄청난 선수인 프란체스코 토티를 홍명보에 붙여놓고 집중 견제하여 패스를 하지 못하게 방해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전반전은 한국 대표팀이 공격 전개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선제골을 얻어맞는 등 부진하였다.[32] 다만 김남일은 2002년 월드컵 이후 패스에 맛을 들인건지 수준급의 패스를 익혀서 소속팀과 국대에서 빌드업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애초에 히딩크가 김남일을 중용한 이유가 다른 한국선수들과 달리 모험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점이었다. 실수를 두려워않는 창의적인 플레이가 그의 장점이었다. 물론 반대급부도 엄청나서, 김남일의 패스 미스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실점 내지는 대형 위기를 자초하기도 했다. 이 시기 축구팬들은 제발 김남일은 공 잡고 있지 말고 빨리 빨리 딴 선수에게 넘기라고 덜덜 떨면서 관전했을 정도.[33] K리그에선 90년대에 발레리 니폼니시의 부천이나 김호의 수원이 이미 한국선수들만으로 지역방어와 포백을 구축해냈다. 단순히 한국선수들이 포백에서 전술 소화능력이 떨어져서 스리백을 쓴 것만은 아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후방 빌드업부터 유려하게 연결하는 건 어려웠고,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가 플레이메이킹을 통해 해소했다.[34] 1994년 미국 월드컵 스페인전 당시의 하드캐리 골과 딥라잉 플레이로 무승부로 끝냈다거나 2002년 한일 월드컵 스페인전 당시의 우주방어로 승부차기까지 간 점 등.[35] 그런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필리포 인자기가 당대의 다른 정상급 공격수들에 비해 기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저평가를 받고 있긴 해도 그렇다고 프로 레벨에서 경쟁력을 보장하지 못할 만큼 기본기가 부실한 선수는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터치가 좋지 못한 선수는 제 아무리 위치선정이 좋아도 효율적인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인자기의 기본기를 무시하긴 어렵다. 이점에서 홍명보 역시 여러모로 단점이 눈에 띄는 선수지만, 그럼에도 그가 중용되었던 건 자신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기본기는 분명히 지닌 선수였기 때문이다.[36] 이적이 아닌 임대.[37] 이는 80년대 한국프로야구도 비슷했다. 최동원을 흥행을 위해 반강제로 붙잡았던걸 보면...[38]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였다'는 표현까지 썼을 정도로 입단테스트에 열심히 임했으며 몇몇 팀과 이적 협상이 진행되는 성과가 있었다.[39] 카를스루에 SC가 '리베로' 헤슬러의 부상으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홍명보를 영입하려고 했다는 인터넷 상의 글이 있는데 이는 해당글 작성자가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헤슬러는 '리베로'가 아니라 테크닉이 뛰어난 공격형 미드필더이다.[40] 루이 판 할 감독은 아약스, 네덜란드 대표팀, 맨체스터유나이티드 등에서 재직할 당시 스리백을 종종 사용해 왔다.[41] 여담이지만 결국 이 드래프트 파동은 번지고 번져서 결국 신태용을 위시해서 어정쩡하게 국대에 소집되고 해외진출도 안 하는 A급 유망주들을 잔뜩 수집한 일화가 꿀을 빠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42] 지금이야 사문화된 규정이지만 축구계에서 구단과 선수(+대리인)간의 사전 접촉은 절대 불가능이며 이는 피파 선수 이적규정에 명시되어있다. 2002년이면 이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던 때였다.[43] 홍명보는 이미 월드컵 이후 K리그에서 출전하는 경기마다 허술한 수비와 거친 플레이로 포항 팬들의 빈축을 사고 있었다. 송종국이 네덜란드 리그 진출을 확정짓고 떠나기 전 부산 팬들 앞에서 가진 마지막 고별전에서 송종국에게 불필요한 거친 태클을 넣어서 9시 뉴스에까지 보도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 월드컵 4강 동료이자 후배인 송종국에게 대체 왜 그랬는지는 미스테리다.[44] 다만 황선홍은 중국전 상대 골키퍼의 살인태클에 의한 부상으로 1998 월드컵 출전 자체가 불발된 직후, 불운한 부상마저도 또 실수할까봐 걱정돼서 부상당한 척 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 여론에 94년부터 쭉 이어진 비난까지 포함하여 더 이상 한국에서의 선수생활이 힘들 것 같아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났다고 스스로 언급한 적이 있다. 애당초 일본진출도 입단테스트를 겸해 6개월에 불과한 굴욕적인 형태의 계약이었고.[45] 다만 자서전에서 포항 구단을 비중있게 언급하고 자신은 '''"영원한 포항맨"'''이라 한 부분도 있다(...).[46] 다만 위에 다른 각주에서 기재한 것처럼 구단에 정식 오퍼가 왔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불분명하다. 더불어 입단테스트의 경우는 정말로 검증이 되지 않은 신예선수들 위주로 이루어진다는 반문이 있고, 이적료와 임대료가 비싼 것처럼 기재되어 있지만 홍명보가 벨마레 히라츠카 입단 당시 포항이 받은 이적료가 한화 11억으로, 당시 150만 달러와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봤을 때는 포항의 완고함보다는 유럽 클럽들이 알려진 것 처럼 가치를 높게 쳐주지 않았을 확률도 있다. 다만 최순호의 예를 보았을때 진짜로 정식 오퍼가 왔더라도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의미는 없다.[47] 홍명보는 창립멤버 11명 중 막내에 가까웠고 창립멤버도 김봉길, 박창현, 이영익 등 대표팀과 거리가 먼 선수가 많았다.[48] 그야 당연히 베스트 일레븐의 모임이라는 뜻으로 열하나회라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지만, 전두환 시절을 명확히 기억하고 있는 인간들이 하나회에 열자 하나 딱 붙여서 모임을 조직했다는 건 오해와 비판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전 서술에 00년대 축구선수들이 열한나라당 같은 걸 회로 만들었으면 단순히 베스트 일레븐만 생각했겠느냐는 말이 있는데 열한나라당과 베스트 일레븐을 연결시킨건 억지에 가깝다.[49] 실제 예선전부터 후반만 가면 체력이 급격히 저하해서 경기력이 눈에 띄게 떨어졌었다.[50] 자서전인 영원한 리베로에는 유럽에 진출할 수 있는 테스트 건이 있었는데 차범근 감독이 그런 형식으로 가서는 성공할 수 없다며 만류해서 기분이 언짢고 서운했다는 이야기와 네덜란드전 참패 후 차범근 감독이 경질되자 월드컵 출전 후 가장 슬픈 일이었으며 대량 실점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동시에 나온다. 이후에도 죄책감을 버리지 못했지만 3년 뒤 한 모임에서 용기를 내어 당시 떠오르던 차두리 이야기를 꺼내며 인사를 건냈더니 차범근이 웃으며 응대해주었다는 에피소드도 함께. 일단 판단은 각자의 몫.[51] 그런데 정작 차범근 감독은 98년 월드컵 이후 하석주와 홍명보만 여태까지 연락이 없었다고 한다. 하석주는 항목에도 나오지만 자신의 퇴장으로 인해 인생이 고달파지셨다며 죄스런 마음에 그랬다고 눈물로 증언했지만 홍명보는 이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두 입장이 사실이란 가정하에 종합해보면 98년 월드컵에서의 경질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지만 이후 인사 정도는 했다라고 볼 수 있다. 일단 차범근 감독이 칼럼에서 직접 섭섭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이후 딱히 관계가 좋진 않았는 듯 하다.[52] 서로 실력은 인정하지만 인간적인 호감은 별로 없는 관계일 가능성이 높다. 사실 은근히 꼰대끼가 있고 권위적인 홍명보 입장에서는 자기가 대선배인 상황에 선수단 내에서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를 없애고 수평적인 관계를 만들려고 했고, 초반엔 자신을 아예 라인업에서 배제하려고 했던 히딩크가 좋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물론 둘다 성격이 아주 나쁜 건 아니니 이게 다툼으로 이어지진 않았겠지만, 좋은 관계로 이어지진 않았을 확률이 높다.[53] 활동 리그와는 관계없이, 소속팀에서 꾸준히 뛰는 선수를 기용하겠다.[54] 심지어 홍명보 본인은 유럽에서 뛰어본 적도 없는, 선수 경력 대부분을 K리그에서 보낸 사람이다. 결국 책임회피도 모자라 본인 스스로를 B급 미만 선수였다고 자아비판한 셈.[55] 특히 안정환은 국가대표로 활약하기 시작한 게 히딩크 부임 후인 20대 중후반부터로 자신의 월드컵을 시작하자마자 성공을 한 것은 아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때는 국가대표로 선발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회가 아예 없던 것이다. 안정환의 국가대표 데뷔는 1997년.[56] 다만 안정환은 오히려 2002년 월드컵 이후 커리어가 완전히 꼬이기 시작했다. 자세한 내용은 안정환 문서 참조.[57] 게다가 소속팀에서 뛰지 못하는 선수는 대표팀에 뽑지 않겠다고 해놓고서는 박주영을 발탁한 게 바로 홍명보였다.[58] 그래도 해설의 질 자체는 박지성이 제일 나았다. 안정환 같은 경우는 역으로 재미만 있었다.[59] 참고로 이 발언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홍명보의 플레이스타일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항목 참고.[60] 이 발언은 여러모로 이상한게, 홍명보는 미드필더로 놓기에도 기본기가 부족한 편이었지만 탁월한 축구 지능으로 리베로 역할을 맡은 선수인데 이런 선수를 공격수로 놓지 않았기에 탈락했다는 얘기는 상당히 기괴하다. 오하려 차범근호에서 홍명보는 핵심 수비수로 활약하며 그나마 좋은 평을 받았었다.[61] 홍명보는 기분이 수틀리면 욕 대신 그 특유의 돌부처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살짝 깔고 노려보는 버릇이 있다. 대표적으로 후술할 문재인 대통령의 손흥민 어딨어? 영상이랑 술집에서 홍명보를 만난 알바가 술을 잘못 내왔던 썰 등이 있다.[62] MBC 기분좋은날과 홍성민군의 미술전시회 등에서 이름이 나왔다.[63] 두 아들의 이름이 각각 홍경민과 홍성민인데 공교롭게도 가수 홍경민의 본명이 홍성민이다.[64] 몇몇 자막에서는 제이온스라고 되어있다. 뜻은 같고 발음의 차이.[65] 하석주는 월드컵 때 자신이 한 실책이 너무 죄송스러워서 그 이후로 차범근과 연락을 못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