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기업인)
柳明韓
1908년 ~ 1951년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동생이자 유특한 유유제약 창업주의 형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친형 유일한의 행보와는 대조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로 악명을 남겼다.
1936년 6월 20일 유한양행 주식회사 대주주로 참여했으며 1938년 7월 30일 유한양행주식회사 이사, 1940년 7월 31일 유한양행주식회사 부사장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28일 유한무역 주식회사 전무이사 겸 유한상사 주식회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41년 8월 26일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방헌금 10,000원을 일본군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헌납했다.'''
1941년 12월 15일 유한양행 긴급 이사회에서[1]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1년 12월 27일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유한 애국기(柳韓 愛國機)' 1대 제작비 53,000원을 일본군 육군에 헌납했다. 이 가운데 27,000원은 유한양행 명의로, 10,000원은 각각 본인 명의와 만주유한공사 명의로, 5,000원은 유한무역주식회사 명의로, 1,000원은 직원 명의로 모금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에 수록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친일 행보는 독립운동가이던 형 유일한과 동생 유특한의 분노를 샀다. 유일한과 유특한은 그를 창씨개명한 이름인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유원박)' 로 부르며 무시했고, 1951년 유명한이 사망할 때까지 그와 절연하고 지냈다. 이 때 유일한 박사가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놈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놈은 모른다!"'''[2][3]
1943년 9월 27일 유한제약공업주식회사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26일 조선약품공업협회 사무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7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급히 형제들인 유일한과 유특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유명한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그를 무시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흑역사 때문인지 유한양행은 사사 <유한 오십년(1976)>과 홈페이지 등지에서 그의 친일 행적을 철저히 빼고 일제에 의한 세금탄압만을 크게 언급하고 있다.
해방 후에 유한양행과 유한산업을 운영하는 한편, 일본인이 운영하던 인쇄소를 적산으로 양도받아 고려문화사를 창립하여 해방 후 출판산업에 한 획을 그었는데, 해방 후 삼국유사, 삼국지 등을 번역 출간했으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잡지 '민성'과 해방 후 첫 어린이 전문 매체를 발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노모를 모시고 피난을 갔는데,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다대포를 오가는 선박 조난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4]
형 하고 동생이 모두 깨끗한 기업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형은 독립운동에까지 참여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유명한데 반해 유명한은 행보가 이 모양이다보니 형 유일한에게 있어선 형만한 아우 없다로, 동생 유특한에게 있어선 못된 형과 착한 아우, 갈모형제의 한 사례가 되었다.[5]
그의 아들로는 유승호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있다.
1908년 ~ 1951년
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며,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의 동생이자 유특한 유유제약 창업주의 형이다. 하지만 독립운동에도 참여한 친형 유일한의 행보와는 대조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노'''로 악명을 남겼다.
2. 생애
1936년 6월 20일 유한양행 주식회사 대주주로 참여했으며 1938년 7월 30일 유한양행주식회사 이사, 1940년 7월 31일 유한양행주식회사 부사장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1941년 2월 28일 유한무역 주식회사 전무이사 겸 유한상사 주식회사 이사로 선임되었고 1941년 8월 26일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국방헌금 10,000원을 일본군 육군의 무기 구입비로 헌납했다.'''
1941년 12월 15일 유한양행 긴급 이사회에서[1] 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41년 12월 27일 경성부 종로경찰서를 방문한 자리에서 '유한 애국기(柳韓 愛國機)' 1대 제작비 53,000원을 일본군 육군에 헌납했다. 이 가운데 27,000원은 유한양행 명의로, 10,000원은 각각 본인 명의와 만주유한공사 명의로, 5,000원은 유한무역주식회사 명의로, 1,000원은 직원 명의로 모금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력으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경제 부문에 수록되었다.'''
이와 같은 그의 친일 행보는 독립운동가이던 형 유일한과 동생 유특한의 분노를 샀다. 유일한과 유특한은 그를 창씨개명한 이름인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유원박)' 로 부르며 무시했고, 1951년 유명한이 사망할 때까지 그와 절연하고 지냈다. 이 때 유일한 박사가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놈 야나기하라 히로시라는 놈은 모른다!"'''[2][3]
1943년 9월 27일 유한제약공업주식회사 이사장으로 선임되었으며 광복 이후인 1945년 10월 26일 조선약품공업협회 사무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48년 7월부터 1949년 9월까지 제2대 한국제약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그는 급히 형제들인 유일한과 유특한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유명한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그를 무시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흑역사 때문인지 유한양행은 사사 <유한 오십년(1976)>과 홈페이지 등지에서 그의 친일 행적을 철저히 빼고 일제에 의한 세금탄압만을 크게 언급하고 있다.
해방 후에 유한양행과 유한산업을 운영하는 한편, 일본인이 운영하던 인쇄소를 적산으로 양도받아 고려문화사를 창립하여 해방 후 출판산업에 한 획을 그었는데, 해방 후 삼국유사, 삼국지 등을 번역 출간했으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던 잡지 '민성'과 해방 후 첫 어린이 전문 매체를 발행했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노모를 모시고 피난을 갔는데,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다대포를 오가는 선박 조난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4]
3. 여담
형 하고 동생이 모두 깨끗한 기업인으로 이름을 날렸고 특히 형은 독립운동에까지 참여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유명한데 반해 유명한은 행보가 이 모양이다보니 형 유일한에게 있어선 형만한 아우 없다로, 동생 유특한에게 있어선 못된 형과 착한 아우, 갈모형제의 한 사례가 되었다.[5]
그의 아들로는 유승호 전 유한킴벌리 사장이 있다.
4. 관련 자료
[1] 개최 이유는 유일한 전임 사장이 일제에 의해 귀국이 불허됐기 때문이다.[2] 사실 동생 유특한과 측근 예동식 전무도 '야나기하라 히데타카(柳原英隆)'와 '노무라'라는 이름으로 각각 창씨개명을 했지만, 유명한과는 다르게 어쩔 수 없이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와세대대학 법학부로 유학했을 당시에는 그랬었다. 윤동주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만일 하지 않을 시에 일본으로 유학 가는 것이 무산되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서 퇴학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유특한은 자신이 창씨개명한 사실에 대해선 형에게 사과했다.[3] 다만 웅진출판에서 낸 위인전기 <유일한 이야기>에 따르면, 유일한은 1951년에 동생 유명한이 사고로 죽자 땅이 꺼질 정도로 슬픔을 겪었다고 나왔다.[4] 고려문화사에서 함께 일한 조권순 전 유한양행 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유명한은 노모의 건강을 위해 다대포에 거처를 정했다. 이후 다대포에서 연락선을 타고 부산으로 출퇴근 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이경훈, <책은 만인의 것>, 보성사, 1993, 412~417쪽).[5] 정확히는 유일한 남매로선 5남 3녀로, 형제만 보면 5형제다. 다만 유명한 외의 나머지(유중한, 유신한, 유동한 등)는 생애 기록이 적은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