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유일한
柳一韓[1] | Ilhan New'''

<colbgcolor=#0047a0> '''출생'''
1895년 1월 15일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직할시)
'''사망'''
1971년 3월 11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본관'''
진주 류씨#s-3[2]
'''직업'''
독립운동가, 기업인
'''학력'''
미시간 대학교 (경영학 / 학사)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MBA)
스탠퍼드 대학교 로스쿨 (J.D.)
'''가족'''
호미리 (배우자)[3]
유재라 (딸), 유일선 (아들)
'''종교'''
개신교 (장로회)
'''경력'''
유한양행 설립자
1. 개요
2. 상세
3. 생애
3.1. 유년기
3.2. 대학 시절
3.3. 청년 사업가
3.5.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3.6. 해방 이후의 삶
4. 가계도
4.1. 형제 관계
5. 성씨
6. 유산
7. 그 외
7.1. 공익, 신용, 정직
7.2. 기업 경영
7.3. 사회사업
7.4. 세금
8. 어록
9. 여담
10. 연표
11.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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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고,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한다. 기업의 이익은 첫째, 계속 기업을 키워 일자리를 창출하고, 둘째, 정직하게 납세하며, 셋째,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한다."

유일한 박사의 기업 이념.

대한민국기업인, 독립운동가, 교육자, 사회사업가. 유한양행의 창업주.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상세


한국에서 '모범적인 기업인', '헌신적인 부자'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광복 이전에는 재미한인사회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기업 운영에 있어서는 투명 경영과 성실 납세를 고수하면서 제약업체로서 의약품 보급을 통한 국민 보건 향상에 주력했으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로는 자신의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유한양행의 후임 사장으로 지명하고, 산업 인재 양성을 위해 유한공고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개인 소유 주식을 꾸준히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하는 한편 세상을 떠날 때 전 재산을 사회와 교육 원조에 헌납하는 등 국가 및 사회 공헌에도 힘써 왔다. 이 때문에 일제 및 독재정권과의 결탁, 정경유착, 가족 경영, 노동자 탄압, 탈세, 부정 축재 등의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대다수의 대한민국 기업인들 가운데 가장 무결한 위인 대접을 받는 기업인이다.[4] 박사라는 명칭으로도 자주 불리는데 1965년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다.

3. 생애



3.1. 유년기


[image]
1895년 평양에서 재봉틀 장사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柳基淵)과 김확실(金確實)[5] 사이의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유일형이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자 당시 평양에서 재봉틀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던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감리회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6] 당시 유일한의 아버지는 미국의 수도가 어디인지 몰라, 그냥 그 나라 땅의 중앙이겠거니 하면서 유일한을 미국 대륙의 정중앙으로 보내게 된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달러)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7]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 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 때 일본제국 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이름을 바꾼 계기도 비범한데, 중학교 시절 미국에서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던 도중 보급소 직원이 이름 일형이 어려워 제멋대로 '일한'이라고 불렀다.[8]그는 당황했지만 한국을 기억하자는 의미로 '한(韓)'자를 떠올리고 개명을 결심했다. 이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 승낙을 구하였고, 이 요청을 받은 아버지는 '''일한의 동생들의 돌림자까지 '한' 자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 시기 이후에 태어난 동생들은 처음부터 돌림자가 '한'이 되었다.

3.2. 대학 시절


고교 미식축구부 시절 사진. 가운데의 인물이 유일한.
유일한은 고교시절 미식축구부에 활동을 했을 정도로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보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이후에는 미시간 대학교(University of Michigan)에 입학하게 된다.
위 사진은 한때 미시간 대학교 시절의 사진이고 유일한 박사가 미시간 대학교 미식축구부에서 활동하여 장학금을 받았다고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가 없다. 우선, 저 사진은 1912년 즉 유일한 박사가 고등학교이던 시절에 촬영된 사진이다. 미시간 대학교 공식 미식 축구부 로스터 자료에 선수였다는 증거가 없다.
대학생 시절, 학비가 부족한 유일한 박사는 디트로이트에 위치한 전기 변전소에서 일하며 학비를 벌었다고 한다. #1 #2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에 참여했다.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 때 유일한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다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미국에 의존하는 듯한 태도[9]를 많이 보이자 실망했다는 일화가 있다.

3.3. 청년 사업가


대학교를 졸업한 유일한은 미국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10]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11]를 설립했다.
이후 1925년에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전문의 호미리와 결혼해 1녀 1남을 얻었다. 미국 철도 회사 고위 임원으로서 중국인 사회에서도 이름 높았던 거부의 딸 호미리는 코넬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우수 재원이었다. 한편 독립운동을 하며 자산을 모두 쓴 서재필에게 유일한이 찾아와 함께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조선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장 애비슨의 귀국 권유로 연희전문학교 상과(현 연세대학교 경영대학) 교수 자리에 유일한을, 유일한의 처 호미리에게 세브란스병원 소아과 과장 자리를 제의해 귀국하기로 한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이렇게 청년 사업가로서 바쁜 중에도 1922년에 미시건 대학교 대학원에서 수학하였고, 1929년에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했다.

3.4. 유한양행 설립


1926년에 귀국[12]하여 경성부 종로2정목(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2가)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 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일 때문이었다.[13]
부모는 큰아들 유일한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 대다수의 조선 사람들은 빈곤과 기아로 인한 질병에 허덕이며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인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유일한의 아버지는 민족의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아들을 유학보냈으나 식품회사 경영을 하던 아들에게 실망해 "내가 겨우 숙주나물 장사나 하라고 너를 미국 보낸 줄 아냐? 큰 공부를 했으면 큰 일을 해라"는 식으로 꾸짖었다고 한다.
몸소 민족의 현실을 체험한 그는 고민 끝에 1927년 조국에서의 삶을 위해 돌아왔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중국계 미국인이었던 처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소아들을 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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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경영 철학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를 냈다.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등으로 얼버무렸다. 약장수가 신문에 진출한 격.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링크. 위 광고는 석간 3면에 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법인세를 꼬박꼬박 납부했으며, 훗날 유한양행은 박정희 정부 시절에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되었다. 이렇게 꾸준한 납세를 고집했던 이유는 라초이 사 경영을 하던 시절, 자신과 거래하던 녹두 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한다. '''1939년 유한양행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14]를 실시했다.'''

3.5. 독립운동, 군인으로의 삶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가로서의 면모도 지니고 있었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으며, 1945년 미국 워싱턴 OSS[15]냅코 작전[16]에 참가한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게 되는데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살이었다. 학생 시절 때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했었으니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던듯 하다.

당시 OSS 훈련책임자가 유일한을 평가한 자료가 남아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회사 간부들을 보다 투철한 한인 애국자들로 채웠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그의 사업 조직망을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했다." 즉,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하지만 국내침투 직전에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는 바람에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고, 유일한은 살아 생전 이 작전에 참여한 사실을 일절 함구하여 동생 유특한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냅코 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참고자료).

3.6. 해방 이후의 삶


해방 후 1946년 7월,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여 피난을 가서 비어있던[17] 유한양행은 물론 온 국토가 쑥밭이 되자, 이를 재건할 인력을 키우기 위해 1952년에는 고려공과기술학교를,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철저히 법인세를 냈던 유한양행은 1968년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모범납세 법인'''으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았다. 이 때의 에피소드가 실로 전설적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부정부패 단속을 위한 시범케이스로 어느 기업을 때려잡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권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은 그것을 이용한 기업인들과 정치인끼리 정치자금을 대가로 서로 봐주는 상황이었다.[18] 하지만 유일한은 성격상 당연히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19] 이런 행동은 결국 좋은 먹잇감이 될 수 밖엔 없었고 유한양행은 세무조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차례 받았다. 처음엔 예고하고, 다음엔 불시에 조사하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유한양행을 조사했으나,[20]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 한톨 안 나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 술 더 떠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내는 이 회사를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한편으론 당시 상황이 좋아서 넘어가줬을 거라는 추측도 존재하지만 근거가 없는 낭설로 오히려 유한양행에 대한 모욕적인 발언이다.[21] 하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좋아서 넘어가줬다는 것은 유한양행에 대한 세무조사 이후 박정희 정권의 주장으로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세무조사를 당하던 1968년은 경제개발 정책이나 베트남전 특수로 정부의 수입이 다른 해에 비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유한양행은 다른 정치파벌에 대한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한 것을 넘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자금도 거절한 괘씸죄로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정부의 시범케이스로 걸려 국세청으로부터 수개월 간 세무조사를 받았다. 김만태 당시 유한양행 세무감찰팀장이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20일 정도 조사를 하니까... 무슨 한국에 이런 업체가 있나 싶은 생각이 개인적으로 들 정도였다고 한다고 증언한 바 있는데 20일 정도를 세무조사를 해서 전혀 탈세나 탈루의 흔적이 나오지 않고 내지도 않는 세금까지 꼬박꼬박 내는 것이 확실함에도 수개월간 세무조사를 이어나간 박정희 정권이 명백히 잘못한 것이다.
오히려 한국 정부의 역사에서 유한양행이 받은 수준의 세무조사를 받은 기업이 두 개가 더 있으나 이 두 기업이 있으니 바로 한보그룹[22]과 부실공사로 붕괴한 삼풍백화점을 지은 것으로 유명한 삼풍건설산업[23]이다. 당연하겠지만 한보그룹과 삼풍건설산업에 대한 세무조사도 유햔양행이 받았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세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진행 5%도 안 되는 시점에 당세 세무조사원이 '''"내가 그동안 세무조사를 12년 간 했는데 아무리 털어서 먼지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살짝 건드렸는데 먼지가 우수수 나오는 기업은 처음 봤다."'''고 할 정도로 같이 세무조사가 진행중이던 삼풍건설산업에 비해 한보그룹은 완전히 막장이었다. 삼풍건설산업은 1963년 창업한 이래 1983년 주택건설사업으로 전환해 서울 서초구에 삼풍아파트를 건설하면서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 건설도 추진하여 1986년 분양 당시 최고 10대 1의 경쟁률을 보이고 국내 최대 분양가를 기록해 화제를 모았다. 뒤이어 같은 시기 삼풍백화점을 지으면서 유통사업부문도 신설했다. 이 외에 1985년 자회사 계우개발을 세우고 1989년 제주 여미지식물원도 조성하는 등 그야말로 승승장구 했다. 삼풍백화점을 짓는데 무리한 설계변경을 하지 않고 설계사들의 기초설계대로 진행되었다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는 없었을테니 막대한 배상금을 갚느라 부도도 나지않고 세무조사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한보그룹과 삼풍건설산업이 두 기업 모두 전문성 없는 경영진들의 삽질로 인해 망하긴 했지만 삼풍건설산업이 김현철 스캔들과 1997년 외환 위기를 초래한 한보그룹에 비하면 한국 경제사에 끼친 악영향은 적은 편이며 붕괴사건 이후 계열사들을 매각해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금을 지불했다. 오히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2020년 현재까지도 고액상습체납자 명단에 올라 있을 정도로 막장이다.''' 지만 다른 이들의 시각에서 김현철 스캔들과 1997년 외환 위기를 초래한 한보그룹이나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초래한 삼풍건설산업은 도긴개긴이다.
이러한 정경유착, 부정부패, 관치금융, 부동산 투기, 황제경영, 문어발식 확장 등 압축성장을 꾀하면서 결과적으로 몰락한 그룹들이 받았던 고강도의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유한양행이 박정희 정권에서 요구한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미리 탈세와 탈루 등 조세포탈 혐의를 낙인찍어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벌였음에도 단 하나의 혐의점도 찾지 못하자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을 명분으로 세금을 성실히 납부한 기업을 누명을 씌웠다는 비판이 일어나자 결국 보고를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그렇다면 오히려 훈장을 받아야 마땅하다'며 1968년 유한양행에 동탑 산업 훈장을 수여한 것이지 결코 박정희 정권이 경기 상황이 좋았거나 정권이 기업에 대해 우호적이라서 탈세, 탈루 등 조세포탈로 유한양행에 대한 수개월간의 세무조사를 멈춘 것이 아니라 더이상 조사해봤자 문제삼을 게 하나도 없자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이 더욱 추락할 것이 우려되어 면피성으로 준 것이다.
게다가 제조한 약품들도 관련 당국에 갖고 가서 이상이 있는지 검사를 해 보니, 약들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오히려 '''제조 과정에서 재료의 손실이 생길 것을 대비해 원 재료를 손실분만큼 더 넣어 정량을 딱 맞춰 제조하고 있었다.''' 이에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상을 줘야 마땅하다'''고 해서 받았다고 한다. 계몽사 위인전(어린이 그림 전기) 유일한 편에는 박정희 정부 당시 조사원이 엄격하고 공정한 세무조사를 했다고 하여 해외 여행 포상을 받았다는 얘기가 쓰여 있으며,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도 비슷한 언급(다만 여기서는 1계급 특진)이 된 걸 보면 사실로 추정된다. 유일한의 남동생인 유특한이 따로 차린 유유제약도 형처럼 모범 경영을 실천했다고 한다.
참고로 세무조사는 일제 말기와 이승만 대통령 시절에도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일제 말기 조선총독부는 유한양행을 적산으로 간주해 세금 압박을 가했고, 휴전 후 이승만이 같이 정치를 하자고 한 제안을 유일한이 거절했으니, 이미지 정치에 목숨을 거는 이승만이 당연히 고운 눈으로 볼 리가 없다. 유일한의 후원자가 박용만이었고, 유일한 자신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봤으니 이승만이 음해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24] 당연하지만 이승만도 세무조사 결과를 보고 엄청나게 당황했다. 그러나 유일한의 은행 예금을 강제로 압수해서 써먹는 식으로 끝내 압수하고야 말았다고 한다. 유일한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본 것과는 별개로 유일한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했으며 그의 외교론이 독립투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내 한인들과 독립운동가에게 적지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봤다. 유일한은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고 미국 우선주의 외교정책을 완전히 부정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면서도 지나친 미국 우선주의를 경계한 것인데 이승만이 유일한을 정적으로 간주해서 지나치게 적대적으로 나갔다는 평이다.[25]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하며 전문 경영인(CEO)에게 유한양행의 경영권을 인계했다. 당시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는데, 이 전문경영인 제도가 실시된 건 대한민국에서 유한양행이 '''사실상 최초'''라고 한다. 1971년 3월 11일,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노환으로 사망했고 유한공고에 안장되었다. 죽기 전에도 유한재단을 통해 유한공고와 유한대학교를 설립했으며, 연세대학교 의료원 세브란스병원에도 주식 12,000주를 기부했다. 기부조건으로 주식을 의학과 연구 교육을 위한 활동에만 쓰라고 못박았다. 이는 세브란스병원이 현재의 대형병원으로 발전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세우기 전에 에비슨 박사로부터 "세브란스에서 일해 보겠냐"는 제의를 받았던 인연이 있었다.
이 경영권 인계에도 일화가 있는데, 1969년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던 아들 유일선 이 한국으로 와 유한양행 부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러나 유일한은 처음부터 아들이 회사에 취임하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는데, 임원진들이 유일한에게 록펠러, 포드 등 해외기업의 2세 경영권 인계사례를 그에게 여러차례 보여준 끝에 결국 유일선의 부사장 취임을 승낙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호사 출신의 유일선을 처음부터 좋지 않게 본 유일한은 결국 의견 차이[26]가 벌어졌다. 유일한의 회고에 의하면, 유일선은 부사장 취임 후 오직 기업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췄다고 한다. 기업인으로써 전혀 틀린 자세는 아니지만, 평생 국민건강, 나라를 위해 살아온 유일한의 입장에서 아들 유일선의 이러한 의견은 그의 신념과 충돌이 빈번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때문에 회사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해고했다고 한다.
이후 당시 유한양행에서 근무했던 연만희[27]와 대화에서 유일한은 연만희에게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정리하고 나가야 (유한양행이) 영원히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을 비롯한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서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이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이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그래서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했다. 2020년 기준 현 CEO인 이정희 대표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정관에 의해서도 6년 이상은 있을 수 없는데다 유한양행 사원으로서 만렙을 찍은 거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른 뒤 6년 내에는 퇴사해야한다.

4. 가계도


  • 유기연 / 妻 김기복
    • 1남 유일한 (1895 ~ 1971) 유한양행 창업주 / 妻 유호미리
      • 1녀 유재라 (1929 ~ 1991) 초대 유한재단 이사장
      • 1남 유일선 (1935 ~ )유한양행 부사장 / 妻 쓰킹핑(蒒敬平)
        • 1녀 유일링 (1962 ~ ) 유한재단 및 유한학원 이사
    • 2남 유중한
    • 3남 유신한
    • 4남 유명한 (1908 ~ 1951) 초대 유한산업 사장, 제2대 유한양행 사장
      • 1남 유승호 (1935 ~ 1995) 전 유한킴벌리 사장
    • 1녀 유순한 (1912 ~ 2004) 전 대한보건간호사회 회장
    • 5남 유동한 (1918 ~ 1979) 전 유한자동차회사 전무
      • 1남 유승흠 (1945 ~ ) 전 연세대학교 의학대학 보건대학원장, 학교법인 유한학원 이사장, 한국의학원 이사장
    • 6남 유특한 (1918 ~ 1999) 초대 유유제약 회장 / 妻 고희주
      • 1남 유승필 (1946 ~ ) 제2대 유유제약 회장 / 妻 윤명숙
        • 1남 유원상 (1974 ~ ) 유유제약 대표이사 부사장
      • 2남 유승지 (1949 ~ ) 전 유유후마킬라 부회장, 홈텍스타일코리아 부회장 / 妻 현일선[28]
      • 3남 유승식 (1960 ~ ) 유유칼믹 회장

4.1. 형제 관계


본인이 은퇴하기 전 '''자신의 혈연, 친척들을 전원 회사에서 해고했다.''' 가족들 때문에 회사에 파벌이나 알력 다툼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이유였으며, 본인 선에서 정리해야 유한양행을 전문경영인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는 지금의 대한항공 사태를 볼 때 참으로 빛나는 선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혈연을 내보내면서 퇴직금을 매우 후하게 주었는데, 이 때문에 아들 유일선과 동생 유특한이 유일한을 상대로 '퇴직금 반환 소송'을 걸기도 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회사에 전액을 반환하고자''' 소송을 건 거다.[29]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경악했다고 한다. 이후에 타 재벌들이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보면 판사가 신기해할 만도 하다. 다만 이 내용은 사실이 아닌 후대에 창작된 일화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참고
실제로 유유그룹의 창업주이자 남동생인 유특한에게 "너도 나처럼 전문 경영인을 들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자 꽤나 망설인 유특한이 "형님, 죄송합니다. 저는 그릇이 작아서...''라고 했다. 유일한은 "하긴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지. 적어도 친일파만 안 된다면 말이지.[30]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31]. 계몽사에서 발행한 위인전에는 1954년에 유특한이 "유한양행을 아예 '유한그룹'으로 기업 집단화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해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유일한은 "쓸데없이 확장하는 것도 좋은 게 아니다"며 유특한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다만 유한양행에서 분리된 후에도 유일한과 유특한은 가까운 사이를 유지했다. 유유그룹이 만든 비타엠과 비나폴로도 유일한의 조언을 듣고 지은 약품명이다.
형이 너무 뛰어나서 그렇지, 동생인 유특한도 성공했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가다. 유특한은 독립운동이나 미국 유학 등등 여러 가지 사정들로 형이 잠시 기업을 떠나 있을 때 그 자리를 대신해서 유한양행을 맡아 경영했으며, 본래는 1941년에 설립한 유한무역의 대표였다. 유일한이 친족, 혈연을 전부 퇴사시킬 때 유한양행에서 유한무역의 분리를 선언하고, 1957년에 유한무역을 제약 업체인 유유제약으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유한양행과 달리 유특한의 후손들이 유유제약을 운영하고 있지만, 성실하게 기업을 꾸리고 있다. 기업이 안정화될 때 즈음인 1975년에 기업 공개를 하고 상장했으며, 유특한 본인도 역시 경영에서 은퇴하고 죽기 전에 유유문화재단을 설립해 형처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후 1999년에 세상을 떠났다. 형을 따라서 유한양행만큼은 아니지만 모범 경영을 원칙으로 유유그룹을 발전시켰으며, 그 때문인지 유유제약은 창업 후 단 한 번도 노사분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유일한에게도 가족사의 어두운 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위에 언급된 또 다른 동생 유명한.[32] 유일한이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에 참여할 당시 이 사람은 친일파가 되어 애국심이 투철했던 자기 형제들과는 완전히 딴판인 행보를 보인다. 그래서 형인 유일한과 동생인 유특한이 유명한과 절연해 버렸는데, 이 때 한 말이 "나는 동생 유명한은 둔 적 있어도 일본 놈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 博, 유명한의 창씨개명)라는 놈은 모른다!"였다. 해방 뒤에도 유한산업과 고려문화사 등을 경영하면서 1951년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여객선 사고로 사망했다. 유특한도 창씨개명을 했지만 그는 일본 유학이라는 특수한 경우였다. 안 하면 유학이고 뭐고 없는 상황이니... 후일 많이 후회했을 것이다.

5. 성씨


참고로 실제 성은 ''씨(버들 류)라고 한다. 유한양행의 상징 버드나무도 여기서 비롯된 것. 그래서 원래는 류씨로 하는게 맞지만 우리나라 행정상 공문서에 류씨를 유씨로 기록하던 관례로 학교다닐 때부터 성인된 이후까지 유씨로 계속 등록되어 와서 본인도 그냥 유씨로 살았다고 한다.[33]

6. 유산


유일한의 가족들. 좌측부터 유일한, 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부인 호미리.
중고등학교 일부 교과서에도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로, 유일한이 손녀 유일링의 등록금 1만 달러만 제외하고[34] 자기 재산을 기부해서 나온 액수는 토탈 '''407억 원'''이다. 뭐가 이리 적은 줄 아는데, '''1971년 시점에서 407억 원'''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407억 원이면 돈 걱정이 없는 수준이다. 물가 상승률을 따진다면 6천억이 넘어가는 거금이다. 6천억이면 평생 무직자로 지내도 다 쓰지 못할 정도로 많은 돈인데, 이거를 사회에 헌납한 셈이다.지식채널 e. 참고로 당시 시내버스 요금이 10원, 라면은 20원, 짜장면 60원, 커피 60원, 담배는 60~100원, 쌀 40kg가 2,880원(한 가마에 8,000원)이었다. 라면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보면, 분식집에서 30원, 슈퍼에서 개당 18~20원이었다.참고자료 # 이런 생필품 물가로만 따져 본다면 '''100배''' 정도의 가치 즉 4조가 넘는 금액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잘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더 감동적인 건 유일링의 아버지인 유일선은 '''이 재산마저 거부하려고 했다.''' 유일선이 "아버님께서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거라.'고 유언하셨는데 만약 제가 손녀의 학자금 명목이라는 이유로 1만 달러를 받으면 세상이 저를 욕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렇게 받은 손녀의 등록금도 그나마 반만 쓰고 남은 돈 전부를 사회에 환원했다.
또한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내에 있는 묘지 주변의 땅을 상속하긴 했는데, 이는 땅을 '유한동산', 즉 공원으로 만들어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유재라 본인도 1991년 미국에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 측에 기부했다. 유재라의 묘소도 이곳에 안치되어 있다.

7. 그 외



7.1. 공익, 신용, 정직


유한양행을 경영 중이던 일제강점기 때 당시 영업 담당을 맡고 있던 전항섭이라는 사람이 만주 시장 조사 후 만주에서 헤로인, 모르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의 마약류의 거래가 많은 것을 보고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류를 판매할 것을 제안하자 그는 국민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며 단번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 했다가 자기 발언에 대해 사죄한 뒤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렀다고 한다. 이후 그는 유한양행이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전무로 승진되었다. 이 일화 내용이 진짜가 맞다면, 전항섭은 하워드 고와 헤럴드 고의 외조부이자 전인범의 조부인 사람이다. 헌데, 유일한 평전(조성기 저)에서는 다른 인물이 그러한 발언으로 곤욕을 치른 것으로 나와 있다.
이 일화 말고 하나 더 중요한 일화가 있다. 국민들의 비타민 섭취를 걱정한 그는 당시 비타민 영양제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1961년 동아제약박카스를 출시하면서 공전의 히트를 치자 다른 제약업체도 따라서 드링크제를 만들기 시작했고, 결국 유한양행은 제약업계 1위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이 때문에 주주총회에서 유일한 회장에게 "우리 회사도 드링크제를 만들어서 팔아야 되지 않겠느냐?"라고 그에게 의견을 제시했지만, 유일한은 '''"설탕물 같은 드링크제를 약이라고 속여 팔란 말인가?"'''라는 말로 주주들의 의견을 기각했다고 한다. 당시 박카스에는 카페인, 타우린, 비타민 성분이 첨가되어 금방 피로가 싹 가시게 하는 기분이 들어 인기를 끌었는데, 유일한은 "이 박카스를 포함한 모든 드링크제는 인체의 전반적인 에너지를 향상시키는 게 아닌, 순간적으로 활력이 솟는 느낌만 주는 제품 같다"라고 생각해서[35] 드링크제 개발을 안 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출시된 제품이 지금도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비타민 영양제 '''삐콤씨'''다. 그 이후로도 알약, 주사제 형태로만 약품을 개발해 왔다가 1989년에 '맥생', 1992년에 소화제 '생위천', 2013년에 '내일엔'이란 이름으로 드링크 분야에 진출했다(현재는 '내일엔'만 판매 중이다).
여러 위인전을 보면, 유일한은 약품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의 품질을 살펴보면서 어떤 것을 이용할지를 정했고, 비타민제에 필요한 원료가 모두 떨어지자 해당 생산라인을 원료 수급이 완료되기 전까지 가동 중단했다고 한다. 원래 생산 라인이라는 게 구조상 생산 도중에 정지를 시키면 무조건 회사에 손해가 나기 마련이고, 그 원료가 떨어져도 해당 약에 미미하게 영향을 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데도 바로 중단해 버린 것이다. 그만큼 사용자의 보건과 안전을 생각했고, 그렇기에 세무조사 때 검사 당국에 유한양행의 약들을 샘플로 검사해 보아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던 것이다.
유한양행 설립 후, 자기 회사의 약이 필요할 때마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의 약임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자기 돈을 내고 약을 사먹었으며, 약을 사려고 가격을 물어보는 중에 '사장님이라 그냥 가져가셔도 된다'고 말하는 종업원을 혼낸 일화가 있다.
양화대교의 건설과 얽힌 이야기가 있다. 양화대교를 건설하고 다리와 직결하는 도로를 만들기 위해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가격 문제로 정부와 지주들 간의 실랑이가 있었다. 이 때 유한양행도 도로 건설에 필요한 토지를 일부 소유하고 있었는데, 해당 실무를 보던 직원이 주민들 편에 서서 가격을 높게 올린 것을 안 유일한이 "국민들이 이용해야 할 건설 사업에 훼방을 놔서 되겠냐"며 직원에게 일침을 가했고, 결국 해당 직원은 유일한의 명으로 정부가 제시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 이로 인해 다른 지주들도 비슷한 가격에 토지를 매각했다고 한다. # 실미도 사건 약 2주 전에 발생한 광주대단지사건과 비교해 보면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일화다.

7.2. 기업 경영


유한양행 초창기에 신경 썼던 부분이 약품의 케이스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기차역도 없는 도시와의 왕래가 어려운 지역에서 의약품을 받기를 원하는 곳이 많았고, 이 때문에 선로 옆에서 받을 수 있도록 열차에서 던지더라도 깨지지 않는 병과 케이스를 고안하는 데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라초이 식품 회사를 운영했을 때도 숙주나물을 저장할 수 있는 통조림을 고안한 것과 비슷한 케이스. 여러모로 미국에서의 회사 운영 경험이 아이디어가 된 셈이다.
일부 위인전에서 기술한 바로는, 시골의 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해야 하는데 혈청이 부족하자 유한양행에 문의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골이 워낙 깡촌이라서 철도역은 있지만 비정차 철도역이라 짐을 내려놓는 게 불가능했는데, 유일한 박사가 혈청을 깨지지 않도록 단단히 포장해서 기관사에게 "XXX역에 환자가 있는데 혈청이 꼭 필요하다. XXX역을 지날때 던져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가 실려있다.
근로기준법을 다른 기업인보다 철저히 준수했다고 한다. 직원들에게 주었던 월급의 액수가 상당히 높다. 유일한의 이 의지는 그가 죽고 난 뒤에도 유한양행에 계속 이어져 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대한민국의 제약 기업 중 '''6,330만원으로 평균 연봉 1위'''를 기록했다.

7.3. 사회사업


유한양행 홈페이지에 따르면 1956년부터 1968년까지 유한양행 사우공제회, 보건장학회, 유공관리기금 등을 설립하고 1970년에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을 설립하여 생전에 이 기관에 96,282주를 기증했고, 이 밖에 연세대학교 재단에 41,000주를, 세브란스병원에 12,000주를, 자신이 설립한 유한공업고등학교에 40,000주를,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 27,218주를, 보건장학회에 17,368주를 기증하였다. 1963년에 다시 연세대학교와 보건장학회에 장학기금으로 17,000주를 기증하고 1965년 유한교육신탁기금 관리위원회를 발족하고 56,000주를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 사업을 확대했다. 1971년 사망할 때에는 140,941주를 다시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이 기관은 이후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으로 분리되었다. 타계할 때까지 각종 공익재단에 기증한 개인주식은 유한양행 총 주식의 40%에 이른다고 한다.

7.4. 세금


세금 납부에 대해, "소방관들에게 불을 꺼 달라는 권리는 이들을 운영해야 할 금액을 지불하는 의무에서 시작된다"며, "탈세하지 말 것"이 평전(조성기 저)에 기록되어 있다. 유한양행에서 국세청에 세금 신고를 하는 직원이 날짜를 착각했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여 벌금을 피할 수가 없었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헌데 매번 기한을 지키던 유한양행이 늦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국세청 직원이 기다려 줘서 세금 납부를 잘 마쳤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일한은, 매번 제 날짜에 법인세를 신고해 왔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 해당 직원에게 보너스보다 더 큰 위로금과 상여금을 직접 전달했다.
2015년 1월 10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 969회에서 땅콩 회항 등의 갑질 사태를 다루는 말미에, 유일한의 유언장과 털어도 먼지 안 나던 세무조사 일화를 소개했다. 나중에 제작진이 유일한의 가족을 만나려고 유한양행에 연락해 보았지만, '''"회사와 관계를 맺지 않아서 연락처를 모른다"'''는 말은 이날 방송의 백미였다. [36]
하필 이날 방송에 나온 작자들이란 게 백화점 진상 모녀라든지, 조현아라든지, 김승연과 그 아들이라든지 해서 유일한과 더 비교된 상황. 덕분에 그것이 알고싶다가 방송된 토요일 자정부터 일요일 하루 내내 포털 검색어에 유한양행과 유일한이 실검 순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즉, 최소 1990년부터 이 방송까지 유일한 관련 방송 관계자들은 따로 가족들을 찾기 위한 전화를 했다는 점이다.

8. 어록


유한양행 제공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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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서만 머문다면 수전노와 다를 바가 없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정직(正直) - 이것이 유한(柳韓)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기업의 제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 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 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 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기업과 개인적 정실(情實 - 비록 그것이 가족의 경우라도)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업을 키우는 지름길이요, 또한 기업을 보존하는 길이기도 하다.

양질, 염가의 제품 생산, 이것은 기업 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 이것이 기업에 성장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 활동을 통한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다.

돈을 벌어야만 하는 사람과 돈을 써야만 하는 사람이 만나서 일체가 되어 일을 할 때, 거기에 창조적 작업이 이루어진다.

기업으로 해서 아무리 큰 부를 축적했다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한, 하얀 시트에 누운 자의 손에는 한 푼의 돈도 쥐어져 있지 아니하는 법이다.

죽음을 눈앞에 보는 연령이 되면 누구나 결국은 자기자신이 평범한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도 부족한 점이 많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 자본이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 증진을 위해 존재하는 기구이다.

기술자가 되려면 자기가 하는 일에 흥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열심히, 또 정확히 하여야 한다.

국가, 교육, 기업, 가정. 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명제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위가 된다.

사색하고 관찰하는 습관은 인간의 지적 성장을 위한 촉진제이다.

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실패, 그것으로 해서 스스로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는다면, 실패 그것은 이미 나의 재산인 것이다.

이상적인 인간형성을 위해 근면, 성실, 책임감은 바람직한 3대 요소이다. 그러나 여기에 성급하지 않은 성격까지를 구비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나의 인간은 체구를 가지게 되며 그 몸에는 귀, 눈, 코, 입 등의 여러 기관이 부수되어 있다. 그 중 하나의 기관만 없어도 완전한 인간일 수는 없다. 사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이 각기 사회를 위해서 유익한 기관의 구실을 다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완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9. 여담


  • 디시위키에서 세종, 이순신, 안중근과 함께 한국의 위인 Top 4로 손꼽힌 인물이다.
  • '회사 이름인 유한양행의 양행이 올바른 행동이란 뜻이다'라는 설이 있는데, 바른 행동은 양행(량행, 良行)이고, 유한양행의 양행은 양행(洋行)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중심으로하는 기업'이라는 뜻의 한자어로, 같은 단어가 아니다.
  • 그의 생애와 행보를 보면 의외의 일이긴 하나 작곡가 안익태와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37] 윤치호의 아들과는 대학 동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유일한이 안익태와 윤치호에게서 일정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는 추측이 가능해 연구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유일한의 생애를 본다면,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제한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실제로 이들이 친일파로 돌아서자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 소설 대지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펄 벅과 친분이 있었다. 그녀의 작품에 '김일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데, 유일한의 이름을 빌린 것이다. 또 1964년 한국 고아와 혼혈아들의 입양을 주선하던 한국펄벅재단이 건립되었는데, 경기도 부천시 심곡본동에 위치해 있다. 펄벅여사기념관이라고도 칭한다. 그 터는 이전 유한양행의 소사공장이 있던 자리로 생전 두 사람의 친분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경기도 부천시 중앙공원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있으며, 부천시에서 경인로 유한대학교 일대 구간에 '유일한로'라는 별칭을 부여하기도 했으며, 캠퍼스 내에 그의 이름을 딴 기념관도 있다. 유일한의 사저는 성공회대학교 측에서 매입해 구두인관으로 명명하여 연구소로 사용하고 있다.
  • Sheaffer 만년필을 사용하였다. 사용한 만년필이 고장나, 평생 수리 된다고 하는 미국 본사에 수리를 맡겼더니 미국 본사에서 '이렇게나 오래 썼냐면서' 놀라면서 새 만년필을 보내준적이 있다.

10. 연표


  • 1895년 - 평안남도 평양에서 개신교 집안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남.
  • 1904년 - 신학문을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에 건너감.
  • 1915년 - 미국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 고등학교 졸업. 고교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
  • 1919년 - 필라델피아 한인 자유 대회(미국 내 한인들의 3.1 운동 집회)에 참가함. 미시간 대학 졸업.
  • 1922년 - 라초이(La Choy) 식품 회사를 창설해, 본격적인 상인의 길로 들어섬.
  • 1925년 - 중국인 호미리와 결혼. 사업 관계로 22년 만에 일시 귀국. 일제 치하의 조선 현실을 목격.
  • 1926년 - 12월, 조선에 돌아와 유한양행 설립.
  • 1933년 - 중국, 타이완, 일본, 동남아 일대에 12개의 지점 및 주재소를 설치함(~1941).
  • 1936년 - 회사를 주식회사로 바꾸고,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함.
  • 1938년 - 사업상의 이유로 미국에 건너감. 태평양 전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공부를 계속함(~1941).
  • 1942년 -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전략 정보국(OSS)에서 한국 정보 담당자로 활약. 미주 지역 항일 무장 독립군 '맹호군' 창설에 주된 역할을 함. 일제의 세금 압박으로 유한양행이 어려움을 겪음.
  • 1945년 - 무장 항일 투쟁 계획인 '냅코(NAPKO)' 작전에 참여하였으나, 종전으로 무산됨.
  • 1946년 - 귀국하여 초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취임. 이승만 정권과의 불화와 유한양행의 시장 개척을 이유로 다시 미국에 건너감.
  • 1951년 -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임시 사무소와 공장을 두었다가, 뒤에 서울로 옮김(1953).
  • 1953년 -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1948?), 귀국함.
  • 1963년 - 개인 주식 일부를 연세대학교에 장학기금으로 기증하고, 보건 장학회를 설립. 12월, 국가 공익 포장을 받음.
  • 1964년 - 학교법인 유한학원을 창설하고, 유한공고를 설립.
  • 1965년 - 개인 주식을 희사하여 교육 및 장학 사업을 확대, 발전시킴.
  • 1968년 - 유한양행이 모범 납세 업체로 선정되어, 동탑 산업 훈장을 받음.
  • 1969년 - 기업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전문 경영인 조권순에게 사장직을 일임.
  • 1970년 - 현 유한재단의 전신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을 발족.
  • 1971년 - 3월 11일, 노환으로 별세. 유언에 따라 전 재산을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에 헌납함. 5월 3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됨.
  • 1995년 - 독립운동 활동 이력이 드러나 광복 제50주년 경축식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됨.
※ 출처 :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

11. 관련 자료


  • 도서
    • 유일한 이야기 - 조영권 저. 웅진주니어. 1992(초판) / 2007(재판)

[1] 성 '柳'는 류로 읽는 경우가 상당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류(성씨) 참고.[2] 토류계 27세손 형(馨)자 항렬이다. 원래 이름이 유일형이었다.[3] 중국계 미국인 소아과 의사다.[4] 이병철이나 정주영조차도 자신은 '부유한 노동자'라고 자칭했으면서도 이런 비판을 심심치 않게 받으며 국민 대다수는 존경과 불신을 동시에 보낸다. 가족 경영이야 함태호도 포기하지 못한 일이고.[5] 김기복(金基福)으로 개명[6] 이 당시의 사람들은 아직도 현실 파악이 안 되어 있었고, 결국 5년 후 '''일제강점기'''를 맞이한다. 출국 금지당하기 전에 미국으로 건너간 게 다행.[7]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는 비슷한 시기(1908년)에 있었던 스티븐스 저격사건을 끼워넣어 유일한이 자긍심을 되새기는 장면을 만들었다.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8] '만화로 만나는 20세기의 큰 인물'(웅진씽크빅)에서는 직원이 서류를 써줄 때 타이핑을 잘못해서 스펠링이 '형'자가 '한'자로 나온 것으로 각색되었다.[9] 전반적으로 미국의 협력을 촉구했고, 이승만은 우호 차원에서 당시 미국 국가인 'Hail, Columbia'를 부르자고 말했다. 참고로 현 국가인 The Star-Spangled Banner는 1932년에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 의해 채택되었다.[10]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요즈음은 이러한 류의 마케팅 전략이 꽤 흔해졌고,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이름까지 붙었다. 다만 이 사건의 원인에 대한 묘사는 위인전마다 달라서, 1980년대 계몽사 위인전에서는 "유일한이 아이디어로써 사고를 냈다"고 명확히 서술하고 있지만, 일부 위인전은 "어쩌다 졸아서 사고를 냈다가 운이 좋았다"는 식으로 표현한 경우도 있다. 만약 이게 실제로 계획적인 사고였다면, 유일한 박사는 이러한 마케팅의 시초가 되는 셈.[11] 아직도 미국에서 아시안 식품등을 생산, 유통하는 회사로 존재하고 있다. 다만 1990년에 미국의 거대 식품기업인 콘아그라(ConAgra Brands)에 인수되었다. 영어 위키백과의 문서에도 초기 설립자가 유일한이라고 기록되었다#.[12] 잘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유일한은 유년기와 청년기를 미국에서 보내는 바람에 한국어 듣기와 이해는 가능했으나 말하기가 서툴러졌다고 한다.[13] 이 때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조선인이란 이유로 입국을 거부당할 뻔했으나, 영어 등에 능통한 세관 직원 예동식이 통역을 맡아준 덕분에 무사히 입국했다. 이후 예동식은 유한양행의 경리로 일하게 된다.[14] 이미 이 시점에서 대단한 것. 다시 강조하지만 1939년이다![15] CIA의 전신이다.[16] 재미한인들로 구성된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지하조직화하려던 작전이었다.[17] 공산군에게 미국 회사로 오인받아 몰수당할까봐, 부득이하게 유일한의 재가를 받지 않고 임시로 임원진을 바꾸고 급히 피난을 갔다.[18] 대표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은 철저히 비위를 맞춰주면서 정부의 대규모 토건 정책을 수주받아 대기업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와는 사돈이 되어버린다. 현정은의 언니가 유일한의 조카 며느리인 것. 즉, 유특한의 며느리가 현정은의 언니. 거기에 이들 자매는 김무성의 조카이기도 하다. 이들 자매 모친이 김무성의 누나 김문희.[19] 유일한이 굳이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만 정치자금을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의 청렴한 성격상 모든 정치 파벌에 대해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20] 세무조사나 감사 등을 경험해 본 이라면 알겠지만, 몸담고 있는 조직이 떳떳한가를 떠나서 세무조사는 예나 지금이나 사실상 그 날의 업무가 마비되는 매우 피곤한 일이다. 성향을 막론하고 경기가 안 좋을 시 정부가 정기 세무조사를 유예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역시 세금 떼먹어도 봐준다는 게 아니라 저런 업무 마비를 피하게 해주겠다는 의도. 이 때문에 기업인에 대한 유서깊은 정치보복 수단이기도 했다.[21] 대한민국 제3공화국 문서를 비롯해 여러 한국 근현대사 문서에서 1968년을 보면 알겠지만 경제개발 정책이나 베트남전 특수로 수익은 짭짤했으니, 굳이 유한양행을 쥐어짤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22] 1996년까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8위를 자랑하는 대기업이었으나, 1997년 1월 23일 부도가 나면서 공중분해되었다. 당시 사상 최대 규모였던 한보의 부도는 금융권에 자금경색 현상을 초래했고, 다른 재벌들의 줄 부도 사태가 이어지다가 IMF 사태로 유명한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졌다. 정치 측면으로 보면 '김현철 스캔들'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던 대한민국 경제사에서 최악으로 평가받는 기업이다.[23] 1963~1997년까지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건설업 및 유통업체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주범으로 알려졌다.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답게 개장 초기부터 안전성과 관련된 여러 문제가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경영진이 무리하게 시설을 변경하거나 개조를 하도록 해 건물의 수명을 단축시킨 것이 붕괴의 큰 원인이었다. 붕괴사건으로 인한 막대의 배상금으로 인해 모그룹인 삼풍건설산업도 청산 절차를 거쳐 한보그룹과 마찬가지인 1997년 폐업하게 된다.[24] 유일한은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 의회와 한인자유대회에 참여한 바 있는데 이때 참여한 이가 바로 유일한 외에 이승만서재필이다. 이때 이승만이나 서재필 등이 미국에 너무 의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유일한은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해 유일한은 이승만과 서재필에게 실망했다고 전해진다. 유일한은 자주독립의 주체가 한민족이 되고 그 곁가지로 다른 나라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보았기에 외교론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고 서재필과는 계속 친분을 유지했다. 서재필이 유한양행의 로고를 만들어준 것도 그와 친분이 있고 서로 소통이 되었기에 가능한데다 서재필이 미국의 외교적 지원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서재필도 한민족이 독립를 하는데 지나친 미국의 간섭은 배제하자는 편이었지만 이승만은 골수 친미주의자였기에 미국의 이익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정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유일한이 이승만의 외교론을 좋지 않게 본 것이다.[25] 유일한은 이승만의 외교론을 완전히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6.25 전쟁에 대한 연합군의 파병과 한미동맹으로 미국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함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굽히고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는 중도적 입장이었다. 이승만 자신이 정치적으로 도움을 요청한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완전히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지도 않는 중도 성향인데다 유일한은 서재필, 이승만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동지였다. 예전의 동지를 현재의 자신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적대적으로 몰아세워 세무조사를 한 이승만이 속이 좁은 것이다.[26] 다만 유일선도 상당히 도덕적인 인물인데, 아래에 나온 일화 말고도 전경련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27]유한양행 회장, 現 보건장학회 이사장 최근 헌정 기업인으로 추대 #[28]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언니이다.[29] 물론 그냥 회사에 반납했다면 간단했겠지만 당연히 유일한이 이걸 눈치채고 막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소송까지 간 것으로 추정된다.[30] 흔히 한국에서는 친일파라고 하면 매국노를 뜻하지만 반대로 다른 나라의 사람이 친한파라고 할 경우 다른 나라의 국민이 매국노인가라는 논란이 있기에 지한파 등의 용어가 생겨났다. 문제는 친일파라는 용오가 오랫동안 사용해온 관계로 매국노라는 뜻이 고착되기는 했지만 다른 친한파 등의 용어에서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산다는 문제가 있었다. 원래 친일파는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무리'라는 뜻을 가진 용어로 쓰였는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본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매국노 정도의 의미로 쓰이면서 다른 오해가 없기위해 정한 정식 용어가 바로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유일한 생전에는 '친일 반역자', '부일(附日, 일본에 빌붙음) 협력자'라는 용어도 불렸지만 가장 쉬운 용어가 친일파였기에 친일파라는 단어가 가장 대중화되기에 유일한의 실제 발언에서는 쓰인 용어는 친일파다.[31] 여기서 뜬금없이 친일 얘기가 왜 나오냐면, 후술하겠지만 동생 중 한 명인 유명한일제강점기 때 친일 행위를 했던 것 때문이다. 저런 말을 꺼낸 것으로 보아, 유일한에게 평생 한이 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32] 참고로 유명한 외의 나머지 동생들은 일찍 죽거나 생애 기록이 적다. 그래선지 사실상 유명한이 유일한과 유특한의 중간형제에 해당.[33] 실제로 한국에는 많은 류씨들이 행정상 유씨로 살고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도 과거 데뷔 초 언론에서 '유현진'이라고 표기한 적이 많았다. 2007년 법이 개정되어 대법원이 호적예규 변경을 통해 두음법칙을 적용하는 성(姓)에 예외를 둠에 따라 '류'씨로 정정신청을 할 수 있게 되어서 신청한 사람들이 있지만 실제로 신청할 때 아버지 호적까지 류씨로 바꿔야 하는 규정이 있어 행정상 복잡한 부분도 있고 하기에 대부분의 류씨들이 안 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류현진의 경우에는 이를 신청하여 이후 언론에서 유현진이 아닌 류현진으로 표기되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내에 관계된 내용을 찾아 보면 알 수 있다.[34] 이후에도 나와 있듯, 유일링의 아버지 유일선(유일링이 당시 미성년이었으므로 그 돈의 실질적인 상속자는 유일선이었다.)은 그 등록금조차 받지 않으려고 했다가 결국 받았으나 반만 쓰고 남은 액수는 다시 사회에 환원했다. 퇴직금 많다고 반환 소송 건 동생도 아들도 좋은 것만 본받았다.[35] 실제 카페인의 특성을 감안하면 정확한 지적이다. 피로를 회복시키는게 아니라 피로한 몸을 억지로 각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36] 다만 유일한 박사의 추모 행사나 혹은 유한재단에서 여는 시상식에 아주 가끔 참석하는 정도라고 한다. # [37] 유한공고의 교가는 안익태가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