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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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당나라 제2대 황제. 휘는 이세민(李世民). 그 이름의 뜻은 '''제세안민'''(濟世安民), 즉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世와 民이 모두 일상에서 매우 많이 쓰이는 상용 한자였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피휘가 걸리게 되었다. 왕세충과 이세적의 경우 '세'를 공란으로 만들었으며, 절세가인도 절대(代)가인이 되었다. 관세음보살(→ 관음 보살)도 희생자 중 하나. 6부 중에 민부가 호(戶)부가 되었으니 조선시대 6조의 호조로 이어지는 이름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그 외 수많은 '세'를 쓰는 단어도 '대'(代)로 고쳐졌으니(치세 → 치대. 세종(한무제) → 대종), 당의 멸망 이후 '세'라는 말과 합쳐져 세대가 되었다. 이렇듯 이세민의 경우는 피휘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3]
2. 상세
태종은 수양제 이후 혼란스럽던 당시 정세를 정리하고 중원을 평정했으며, 여러 인사들을 포용한 정치로 혼란스러웠던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동돌궐 등을 공격해 국내외의 싸움에서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른바 '''정관지치'''. 다만, 업적의 이면에 적지 않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형제를 참살하고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빼앗은 현무문의 변이다. 때문에 실제 기록상에서도 형제들이나 아버지 이연의 공을 가능한 작게 하고, 당 태종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업적을 과장했다는 의혹 역시 많이 받고 있다. 또 거병 때부터 시작해서 집권할 때까지 학살을 적지 않게 저질렀으며[4] , 고구려를 무리하게 침공하여 결국 패배함으로써 국력을 쇠퇴시켰다는 비판도 받았다.[5] 또 말년으로 갈수록 초심을 잃고 해이해져 충신들의 간언을 귀담아듣지 않아 후계자 문제 등에서 일을 그르치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이라는 나라를 말하면서 태종을 언급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을 할 수가 없긴 하다.
당 태종의 어록인 정관정요는 사후 송 인종, 요 흥종, 금 세종, 원 세조, 고려의 광종, 예종, 조선의 세종대왕, 영조, 정조, 청나라의 건륭제, 일본의 호조 마사코[6] 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메이지 덴노 등 한자 문화권의 많은 제왕이나 정치가들의 애독서가 되었다.[7] 또한 원나라 몽케 칸 사후 원 내부에서 대칸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때, 당시 태자였던 고려 원종이 쿠빌라이 쪽으로 귀순하자, 쿠빌라이가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에 대해 "고구려는 당 태종조차 굴복시킬 수 없었던 나라인데, 이러한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태자가 제 발로 나에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즉, 수천 년 중국사에서 "중국사 최고의 명군은 누구인가?"를 꼽는다면 청의 강희제,[8] 전한의 문제, 후한의 광무제 등과 더불어 자주 이름이 거론되는 인물이다.[9]
3. 묘호와 시호, 제호
- 묘호: 태종(太宗)
- 시호: 문무대성대광효황제(文武大聖大廣孝皇帝)
시호의 경우 약칭 문황제, '''당문황(唐文皇)'''이라고도 한다.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으로 교차 검증되는 사실이다. 연호는 정관인데, 본 연호에서 유래하여, 태종을 '''정관천자(貞觀天子)'''로 통칭하기도 한다.출처
4. 생애
4.1. 즉위 이전
4.1.1. 출생
이세민의 아버지 당국공(唐國公) 이연(李淵)은 북주 팔주국(八柱國)에 속한 굉장한 명문가 출신이었고, 당국공은 세습되어 내려온 지위였으며, 수나라의 수 양제(隋煬帝) 양광(楊廣)과는 이종사촌 사이였다[10] . 그야말로 금수저에 로열패밀리. 이연의 부인이 되는 두씨도 가문 빨이 좋았는데, 두씨의 아버지 두의(竇毅)는 신무공(神武公)에 봉해졌던 사람이고, 황실과 결혼 관계를 맺어 인척이기도 했다.
두의의 딸 두씨는 북주의 명군 무제(武帝)에게 어린 나이에 조언을 할 정도로 똑똑했고, 궁궐을 드나들며 귀족 사회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대립이나 문제에 있어서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수 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이 북주의 정권을 찬탈했을 때는 울면서 자신이 남자였다면 외삼촌의 나라를 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런 여장부와 이연이 결혼하게 된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가 있는데, 어느 날 두의는 딸이 혼기가 차자 독특한 방법으로 사내를 찾으려고 하였다. 그 영감은 대문 앞에 두 마리의 공작 그림을 걸어놓고는, 백 보 앞에서 화살을 쏘아 보라고 하였는데 개중에 공작의 눈을 맞히는 사람이 있으면 딸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다 물만 먹고 있을 때 이연이 나섰다. 활을 쏜 그는 백발백중하였고, 결국 현명한 미인을 얻을 수 있었다. 둘은 매우 사이가 좋았는데, 여기에서 나온 아이들은 4남 1녀였다. 다만 아들들이 대부분 막장이라는 게 흠(...)
598년 1월 28일. 수 문제의 개황(開皇) 18년에 섬서(陝西)의 무공(武功) 지역에서 이세민이 태어났는데, 용이 그 주변을 맴돌았다, 아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점쟁이가 이세민의 얼굴을 보고 "귀인이다" 라고 했다는 등, 이런 인물이면 거의 당연히 따라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특이한 것은 보통 이런 이야기는 개국 군주의 일대기에서 나오는 법인데, 당 태종의 이야기에 이런 소리들이 덧붙여졌다는 것이다. 즉 그만큼 이세민이 당나라 개국에 많은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4.1.2. 젊은 날
어린 시절 이세민의 행적에 대해선 별다른 기록이 없지만, 훗날 당 태종이 된 이세민은 위징(魏徵)에게 '''"내가 공부를 안 하고 싸우는 기술만 익혀서 황제 노릇하기가 힘들다."'''라는 말을 했다. 도박이나 무리 지어 다니기를 좋아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책보다는 칼을 많이 다루었던 듯하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태도는 도움이 되었는데, 거리를 다니면서 익혀둔 얼굴들은 거병에 도움이 되었고, 칼을 잡으며 익힌 무예와 기술들은 전장을 휩쓰는 데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4.1.3. 진양 거병 : 태원기의
616년 이연은 태원유수로 임명되어 부임했다. 여행과 토목을 즐기는 수 양제는 여기저기 대규모 궁전을 지었는데, 태원에도 진양궁이라는 궁전을 세웠다. 궁전에는 거의 황제가 있었지만 없을 때에 황제의 대리를 맡아보는 것이 "유수"의 임무였다.
진양궁 부감 배적(裴寂)과 진양현령 유문정(劉文靜)은 뛰어난 인물을 발견해 그 인물에게 깃발을 올리게 하고, 자기들은 그 밑에서 공로를 세우려 하던 참에, 새로 부임한 이연과 특히 그 둘째 아들 이세민에게 꽂혀 접근했다. 유문정의 설득에 이세민이 넘어가, 이세민은 아버지 이연에게로 가 거사를 촉구했다. 이연은 "부자지간이지만 너를 잡아 고발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둥 블러핑을 하며 아들을 단념시키려 했지만, 이세민의 뜻은 요지부동으로 "마음대로 하세요.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라는 둥 아버지 속을 썩였다. 이세민이 아버지가 결기가 없다고 배적과 유문정에게 토로하자 배적이 공작을 벌였다. 여색에 약한 이연에게 미녀를 소개시켜주고, 범하게 했는데 알고보니 진양궁의 궁녀였다. 결국 황제의 소유인 궁녀를 범해 사형을 당하느니 차라리 거사를 하자고 이연을 설득해 성공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과는 달리 현재 학자들은 이연이 거사를 스스로 결정해 일으켰다고 보고 있다. 구당서에서는 이세민이 결단을 촉구했다고 하는데 이는 허경종[11] 의 실록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당태종이 황제가 된 이후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이연을 깎아내리고 자신의 전공을 드높이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연의 기실참군(記室參軍)으로서 문서를 담당했던 온대아(温大雅)[12] 라는 인물이 쓴 《대당창업기거주》(大唐創業起居注)라는 문헌은 이연의 태원 거병으로부터 즉위할 때까지 1년간의 일기다. 이연의 기록 담당으로서 중요한 일차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이연이 20세인 아들 세민의 계책에 따라 거병한 이야기는 한 줄도 쓰여져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이연은 태원유수로 임명 되었을때 오히려 아들 이세민을 향해,
고 말했다. 처음부터 이연에게 거병할 의사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더군다나 이 문헌에 태종 이세민을 깎아내리는 표현이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당은 본시 우리나라이고, 태원은 즉 그 땅이다. 지금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하늘이 내린 것이다. 준 것을 받지 않는다면, 장차 화가 이것에 미칠 것이다.
당시 태원유수 소관인 분양성에서는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역시 태원유수 소관인 마읍에는 돌궐(突厥)이 침공해 왔다. 이연은 마침내 이를 핑계로 병사를 모으려 했다. 변경에서 농민반란과 돌궐 침공을 맞아 병사를 모으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이를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으니 부유수인 왕위(王威)와 고군아(高君雅)였다. 부유수의 임무 중 하나는 유수에 대한 감시였으니, 이들이 왜 의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세민 쪽에서 역으로 이들의 의심을 눈치채고 제거하려 대담한 계획을 세우는데, 돌궐을 방어하던 양곡(陽曲)의 수비대를 후퇴시켜 돌궐이 남하토록 하고, 돌궐을 끌어들였다는 누명을 왕위와 고군아에게 씌워 참형에 처해 버렸다.
돌궐을 물러가게 한 후 천하쟁취를 위한 작전을 세우는데, 낙양으로 진공하는가 장안으로 진공하는가를 가지고 갑론을박 하다가 장안으로 진공하자는 이세민의 의견이 채택되었다. 당시 수 양제 및 그를 따라간 장군들과 대신들은 강도(江都)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장안을 함락시키면 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어 강도의 수나라 수뇌부를 동요시킬 수 있다는 논리가 먹힌 것이다. 당면 문제가 장안을 어떻게 함락시키는가로 이어지게 되었고, 유문정의 제안에 따라 돌궐을 장안 공격에 끌어들이기로 했다. 이어 이연은 대장군을 칭하고, 대장군부를 설치하여 대장군부의 장사(長史; 장관)에 배적, 군정 최고 책임자인 사마(司馬)에 유문정 등을 임명했다. 격문을 써 발표하고 617년 7월에 3만의 군사로 장안을 향해 출발했다.
4.2. 천책상장(天策上將)[13]
4.2.1. 장안 함락
이연은 거병 후에 뜻밖의 선택을 했는데, 근거지인 태원을 버리고 관중 지방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판단이 가능했던 것은 수 양제가 수나라의 정예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관중이 텅텅 비어있었던 것이다. 수도 장안이 있는 수 제국의 중심지인데다 마땅한 적수도 없었기에, 이연의 세력은 곧바로 움직이기로 했다.
단 한 가지 문제는 이밀이었다. 당시 최강의 세력을 가진 반란군이며 낙양을 공격하고 있던 이밀의 세력은 이연에게 부담이 되었고, 관중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이연은 이밀에게 "대제" 운운하면서, 자신은 용의 비늘을 잡고 봉황의 날개를 붙잡을 뿐이라는 식으로 공손하게 굴어 이밀에게 호의를 사 무사히 관중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연은 막내 이원길을 태원에 남기고, 장남 이건성과 이세민을 앞세워 장안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수많은 유민, 반란 세력들이 합류하여, 3만이던 군세는 무려 20만으로 증가하게 된다. 617년 11월 장안을 함락한 이연은 13살의 양유(공제)를 수나라의 허수아비 황제로 내세우며 스스로 당왕(唐王)을 자처했다. 또한 그 해 퇴위당한 양제가 목숨을 잃었다. 이렇게 기반을 잡고 있던 무렵, 첫 번째 난관이 닥쳐오게 된다.
4.2.2. 설거의 위협
천수 일대를 장악한 군웅 설거는 수나라의 신하로 돌궐을 막다가, 전국이 난리가 나자 재빨리 자신을 '패왕'으로 일컬었다. 그리고 남들이 감히 황제 칭호를 쓰지도 못할 때 "서진패왕"이라고 자처하며 호기로운 모습을 보였다.
설거는 우선 자신의 아들 설인고(薛仁皐)를 파견했다. 그런데 당나라는 이세민을 보내어 이를 무찔렀다. 그러자 설거는 기병을 이끌고 직접 출정하였다. 그런데 이세민이 학질에 걸리는 바람에 지휘를 은개산(殷開山)이 맡게 되었다.[14] 그런데 설거가 기병전의 전문가라 은개산은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가 간신히 살아났고, 이세민도 줄행랑을 놓는 굴욕을 맛보았다. 안시성에서 퇴각할 때를 빼곤, 이세민이 이렇게까지 몰린 적은 이때가 유일.
설거의 기세는 엄청났고, 아예 장안으로 밀고 들어오려는 시도를 했기에 당나라로서는 엄청난 위기에 빠졌다. 그런데 일이 어떻게 되려는지, 618년 설거는 정말 어이없게 급사해버리고 만다. 후계자는 설인고가 되었지만, 이 정도는 아버지에 비해 그다지 대수로운 상대도 아니었다.
12월 설인고는 다시 공격을 시작했지만 이세민은 우선 버티면서 교전을 벌이지 않았고, 적의 보급선을 괴롭혀 주다가 한방에 밀고 나가서 승리하여 설인고를 항복시켰다.
4.2.3. 유무주를 멸하다.
산서 일대의 군웅은 유무주(劉武周)로, 돌궐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당초에 유무주는 별로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는데, 송금강(宋金剛)이라는 장수가 자기 부하를 이끌고 항복한 이후에는 송금강의 말을 듣고 상당히 귀가 솔깃해져 있던 상태였다. 거기다 송금강에게는 울지경덕(尉遲敬德)(尉遲는 위지가 아니라 울지로 읽는다)이라고 하는 맹장까지 있었던 것이다.
유무주와 송금강은 산서성의 완전 병합을 노리며 남하했고, 최종적인 목표는 진양을 손에 넣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당나라 내부에서 문제가 생겨버리고 만다. 진양 기병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진양령 유문정이었다. 그런데 이연은 친구인 배적을 편애했고, 둘이 다툴 때마다 배적의 손을 들어주었다. 결국 유문정은 술을 먹고 불평하다 반역죄로 잡혀오는 상황에 처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세민은 유문정의 편을 들어주는 말을 했고, 이연은 그 사실에 크게 분노하였던 것이다. 유문정은 결국 죽었고, 이때부터 조정─그리고 이연─과 이세민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불만이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배적이 공이 적다는 것이었기에, 이연은 배적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래서 배적을 사령관으로 삼아 유무주를 상대하게 했지만 당연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배적은 탈탈 털렸고, 심지어 농민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도 패배를 겪었다 결국 이연의 넷째 아들 이원길이 철수를 주장해서 당나라 군대는 '''태원을 버리고 달아나며 유무주와 송금강이 산서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최악의 결과가 나와 버리고 만다.''' 대신 배적은 처형은커녕 오랫동안 잘 먹고 잘 살았다. 산서를 손에 넣은 유무주와 송금강은 미친 듯이 하동으로 몰려들어왔고, 이연은 하동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이때 이세민이 나섰다.
619년 11월, 그야말로 당나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세민은 송금강을 막기 위해 출동하였다. 이때도 이세민은 설인고를 물리쳤을 때의 전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직접적인 교전을 피한 채 송금강의 보급로만 지독하게 공격했는데, 사실 파죽지세로 진격하긴 했지만 그 때문에 길어진 보급로 때문에 송금강의 상황은 좋지가 못했던 것. 그렇게 6개월을 버티자 결국 송금강은 후퇴하고 마는데, 이 기회에 이세민은 곧바로 역공을 취해 파도와 같이 몰고 나아갔고, 결국 송금강과 유무주는 돌궐로 도망쳤다. 하지만 이제 그 둘은 이용가치가 없었고, 돌궐에서는 이 둘을 살해하였다."3만의 군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거기다 이세민에게는 기쁜 일이 있었는데, 울지경덕이라는 창의 명수를 부하로 얻게 된 것이었다. 이세민의 부하들 중에는 울지경덕을 못 믿겠으니 죽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울지경덕을 거두어서 썼다. 서북 지역의 위협은 이로써 완전히 사라졌다. 본래 하동을 지키는 임무에서 역으로 산서를 되찾고 하북의 유무주까지 박살낸 이세민의 엄청난 무공에 당나라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고, 곧바로 이연은 이세민을 익주의 행대상서령(行臺尙書令)으로 임명하였다. 기세를 탄 이세민은 쉴 틈도 없이 620년 7월, 하남으로 남하하였다. 하남에는 왕세충이 있었다.
4.2.4. 왕세충, 두건덕을 동시에 물리치다.
이 무렵 이밀은 왕세충에게 박살이 난 상황이었다. 낙양은 그 당시 가장 중요한 도시였고, 낙양의 주인이 왕세충이었다. 하지만 당장은 이밀과의 싸움에서의 피해가 커서 세력이 좋지는 않았는데, 이세민은 바로 그런 순간을 노린 것이었다. 왕세충과의 전투는 혈전으로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는데, 결국 이세민이 승기를 잡고 왕세충을 낙양성 내에 가두는 데 성공하였다. 승리가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두건덕이 군사를 몰고 왕세충을 도우러 온 것이다.
하북의 두건덕은 농민 봉기군 출신이었다. 이전까지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그는 이세민이 왕세충을 몰아넣는 모습을 보자 위기를 느꼈다. 본래 두건덕과 왕세충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왕세충이 패배한다면 당나라를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 자명했기에, 대군을 이끌고 왕세충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던 것이다.
이에 이세민의 진영은 엄청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왕세충과의 혈전도 쉽지가 않아 군사들이 많이 상했는데, 이 와중에 두건덕을 이기는 것은 어림없는 상황이었다. 퇴각을 할 수도 있었지만 이세민은 단호한 방법을 취했다. 이세민은 동생 이원길에게 낙양의 포위를 맡겨 두고, 가뜩이나 완전치 않은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어 재빨리 무뢰관으로 입성했다. 이런 요충지의 관문을 빼앗겨 정면 대결로 간다면, 이세민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단 무뢰관에 들어간 이세민은 두건덕이 싸움을 걸어도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두건덕의 병력은 한 달 동안 꼼짝도 못했고, 이때 두건덕의 책사 능경(凌敬)이 다른 전략을 제안했다.
이른바 전국시대 손빈이 방연을 물리친 "위나라를 쳐서 조나라를 구한다"는 계책이었는데, 두건덕은 이를 무시하였다. 그러자 두건덕의 부인마저 나섰다."여기서 이럴 것이 아닙니다. 이세민에게는 무뢰관을 계속 지키라고 하지요! 차라리 하북으로 북상해서 당나라의 산서를 바로 칩시다. 그리하면 낙양을 포위하고 있는 군대도 돌아갈 테니, 왕세충은 그러면 자연히 구원되겠지요"
그러나 두건덕은 "아녀자가 끼어들 곳이 아니오!"라면서 그 충언을 무시했다(...). 어떻게 전문가가 부외자보다 더 멍청한 판단력을 내리는 건지 원...[15]"대왕께서 당을 공격하고, 다시 돌궐이 관중을 공격하면 틀림없이 포위가 풀어질 터인데, 어찌 여기서 군비를 소모하고만 있다는 말입니까?"
한편 적진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을 때, 이세민은 다시 폭풍처럼 몰아칠 준비를 끝내놓았다. 정오가 되어 두건덕군의 전의가 많이 떨어졌을 때, 이세민은 기병을 동원해서 적군을 휘몰아쳤다. 두건덕도 기병으로 적의 기병을 막으려고 했지만, 갑작스런 공격이라 재빨리 대처를 못했고, 이때 이세민은 직접 나서서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적의 사방을 헤집어 버렸다고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건덕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두건덕은 생포되었다. 낙양까지 끌려온 두건덕을 본 왕세충은 일이 다 끝장났다고 생각해서 항복하고 만다.
그 후 두건덕은 장안으로 끌려와 처형당했고, 왕세충은 이연에 의해서 목숨만은 구하지만, 결국 자기가 처형했던 사람의 아들에 의해서 암살당한다. 유무주를 쳐서 당나라의 위기를 구하고, 왕세충과 두건덕을 동시에 때려잡은 이세민의 무공은 어마어마했다. 620년 10월, 당나라 조정은 이세민에게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하지만, 이 막대한 공 때문에 갈등이 벌어지고 만다.
4.2.5. 이세민의 지휘 스타일
전술 중 특기할 만한 것은 '''기동력을 중시했다'''는 것. 그의 군대는 무거운 철갑을 입은 중기병보다 최소한의 철갑에 가죽을 덧댄 갑주를 입은 '''경기병'''을 주력으로 하고 있었다. 그와 휘하 장군들의 전술은 대체적으로 '''일단 수비를 굳건히 하고 적의 도발에 응하지 않으며, 꿋꿋이 버티다가 날랜 경기병을 이용해 상대의 보급로를 무력화 시키는 와중 한순간에 승기를 잡아내어서 이기는 형태'''였다. '''적이 후퇴할 시에는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기병의 기동력을 이용하여 끝까지 추격해서 남은 적의 전력을 포위 섬멸'''하였다.[16]
이것은 유목민의 빠른 기동력과 전술을 모방한 것으로, 이연, 이세민 세력이 기본적으로 돌궐과의 투쟁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온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전술로 이세민의 군대는 연전연승하게 되었고, 이런 무공을 바탕으로 이세민은 '''천책상장'''(天策上將)'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이세민은 황제가 된 이후에도 정예 기병 양성에 힘을 기울여 통일 전쟁 때는 물론 이후 돌궐, 서역 그리고 고구려 정벌에서도 효과를 보았다.
4.3. 왕자들의 권력투쟁
4.3.1. 이건성의 공격
당나라가 건국되고 안정되는 데 이세민의 공훈이 그야말로 막대하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만 기본적으로 이는 이건성이 건국 과정에서 당 고조의 본거지인 태원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건성이 손 놓고 앉아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 역시 군사적으로 활동하여 당의 건국에 공적이 적지 않았다. 이세민이 왕세충을 공격하고 있을 때 이건성은 돌궐을 막는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세민의 공적이 크다고 하나, 이건성 역시 공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특별히 따로 심각한 결격 사유도 없었다.[17]
이세민이 태자였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겠지만, 지금 태자가 이건성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이건성은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세민에게 공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세민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세민 역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형을 공격해야만 하는 안 좋은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야말로 막장이 되어버린 셈.
갈등이 아직 표면화되기 전, 뒷날의 대결을 짐작한 이세민의 진왕부와 이건성의 태자 진영은 경쟁적으로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문학관(文學館)을 장악한 이세민은 '''18학사'''(十八學士)들을 자신 편으로 만들고, 일종의 참모 양성소 비슷하게 꾸몄다. 또한 수하인 굴돌통(屈突通)을 낙양에 남기고, 장량(张亮)을 시켜 낙양의 호걸들을 알아보라고 명령을 내렸다.
또한 방현령(房玄龄) 등도 꾸준히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이세민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정복 전쟁을 하면서 그의 세력이 일치감을 가졌다는 것과 이세민이 지나간 사방에 자기 세력을 남길 수가 있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건성도 이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고 자기 편을 끌어모았다. 둘의 인재 풀(pool)은 대략 이러했던 것으로 보인다.
- 태자 이건성의 진영
- 진왕 이세민의 진영
이건성 자신이 나서는 것도 좋지 않았는데, 태자가 진왕을 견제한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원길은 달랐는데, 제 3자 입장에 있는데다 단 셋뿐인 정실 소생 황자 중 하나인 이원길은 언제든지 이연 앞에서 이세민을 공격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이 둘의 연합은 이세민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태자의 책사 위징도 위협적인 인물로, 깐깐한데다 영리한 그는 뛰어난 참모였기에 진왕부의 가장 큰 적이었다. 더 큰 문제는 황제가 된 이연과 이세민이 사사건건 충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연은 여러 번 측근에게 '''"둘째는 사람이 달라졌다." "이제 예전의 그 아이가 아니다."'''라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마음이 많이 떠나버렸던 것.
그러다가 두건덕의 부하인 유흑달(劉黑闥)의 반란이 일어났다. 당초 조정에서는 이세민을 파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의외로 유흑달의 세력이 막강하여, 이를 진압하라고 보낸 이세적이 패배하였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이세민을 파견하여 진압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세민이 철수한 후 유흑달은 다시 돌궐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이건성이 움직였다. 바로 위징과 왕규의 간언 때문이었다.
이에 이건성은 고조에게 말해 출정하였고, 반란을 진압, 산동에 자신의 세력권을 만들어 놓았다. 물론 이세민의 대공에 비하면 부족했지만, 세상에 당나라에 진왕만 있는 것이 아니라 태자도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과시할 순 있었다."진왕의 공이 너무 큽니다! 하지만 태자께서는 동궁에 계시느라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유흑달의 난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어마어마하니, 태자께서는 이를 무찌르겠다고 선언하십시오. 산동 호걸들이 지지해줄 것입니다."
거기다 이세민은 아버지인 황제 이연의 비빈들에게 전혀 평판이 좋지도 않았고, 평판을 키울 생각도 없었던 것에 비해, 이건성은 어느 정도 그쪽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비빈들은 계속해서 이연에게 이세민에 대한 험담을 해댔다. 이건성이 가지고 있는 이 힘이 여실 없이 들어간 것이 '''양문간(楊文幹) 사건'''이다. 양문간 사건으로 이건성은 큰 피해를 입을 뻔했지만, 반대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결과가 나왔다.
길긴 하지만 최대한 간략하게 말하면, 양문간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건성이 배후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이건성의 소행인지, 진왕부 쪽의 책략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런데 태자가 기를 쓰고 반란을 할 필요가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아무튼 이 일로 이건성은 큰 공격을 받았고, 결국 이연은 이세민을 태자로, 이건성을 촉왕으로 하겠다는 말을 하였고, 이세민은 양문간의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다.
한참 이세민이 싸우고 있었을 때, 갑자기 다른 소식이 들려온다. '''그런 일 없음'''이라는 것. 바로 이 일에 큰 공을 세운 것이 이원길, 그리고 황제의 비빈들이었다. 이연의 마음을 돌려놓은 것이다. 이연은 위징, 왕규, 그리고 진왕부의 두엄을 처벌하는 것으로 이 일을 끝내버렸다. 처음에는 이세민의 대공에 기가 눌리던 이건성이었지만, 점점 정치적인 투쟁에서 유리한 쪽을 점해가고 있었다.
태자 일파에서는 끊임없이 이세민에 대한 안 좋은 소리를 이연에게 하였고, 이연은 그럴수록 치를 떨었다, 반대로 진왕부 쪽의 공격은 어느 정도 대처하면서 막아내고 있었다. 또한 진왕부의 인물들을 여기저기 흩어놓으면서 분열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일대 전환점이 다가왔다.
4.3.2. 현무문의 변
626년, 돌궐이 당나라의 변방을 공격했다. 이건성은 이 기회를 이세민 일파의 일망타진 기회로 여기고, 이원길을 통병원사(統兵元師)로 추천하여 돌궐군을 막는 병사들을 지원하라고 권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사실 목적은 이 지위를 이용해서 울지경덕, 진경 등 진왕부의 사람들을 참전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전시의 사령관이면, 아랫사람 목을 베어버리는 거야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인지 계획은 이세민 일파로 흘러들어가고 만다.
이에 진왕부는 격렬하게 들끓으면서 반발했다고 한다. 당시 방현령과 두여회는 조정의 신하라는 신분이었기에 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신 장손무기가 중심이 되어 무력을 써서 단호하게 일어나자고 설득했고, 고심하던 이세민을 향해 울지경덕이 "대왕께서 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저도 대왕 곁에 머물 수가 없습니다. 대왕께선 지켜보기나 하십시오!"라는 충언을 한다. 그때서야 이세민은 움직이며 자신의 칼을 울지경덕에게 주면서 오지 않을 경우, 베어버리라는 말과 함께 방현령과 두여회를 불러들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626년 6월 3일, 이세민은 황제 앞에 나서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이연의 후궁들을 강제로 희롱했다고 고발하였다. 그러면서 ''저는 죽습니다만은, 그보다 죽어서 왕세충과 두건덕을 보는 것이 더 수치스럽습니다!"라는 몹시 격렬한 언사를 취했다. 이세민의 깜짝 발언에 조정에서는 다음날 황당해 하면서도 대질 심문을 해보겠다고 입장을 밝힌다.
하지만 이세민의 목적은 이건성을 불러들이는 데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원길은 이건성에게 차라리 병력을 모으고 핑계를 대어 가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고 충고했지만, 이건성은 이미 준비는 철저하단 이유로 거절하였다. 6월 4일 새벽, 이건성과 이원길은 밖에서 만난 후 현무문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문 안쪽으로 들어가던 중 이건성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때 갑자기 이세민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이건성을 불렀다고 한다.
이세민이 완전무장한 채로 등장하자 깜짝 놀란 이원길은 세 번 화살을 쏘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모두 맞히지를 못했다. 반면에 준비를 하고 있던 이세민은 단 한 발에 이건성을 쏘아 맞혔다. 자신의 친형을 '''직접 죽여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건성이 데려온 수하들과 이세민의 부하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대형(大兄)!"'''
하지만 숫자에서부터 이미 차이가 확연하게 나버렸기에, 싸움은 일방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형을 죽인 일이 이세민 본인도 워낙 놀랍고 떨리는 일이었던 것 때문인지 이세민은 나무에 걸려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고. 이원길은 이때 이세민의 화살을 뺏어서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울지경덕이 이원길에게 달려들어 그를 살해하였다.
상황이 종료된 후 혈전을 벌였던 울지경덕은 몸에 피칠갑을 한 그대로 이연에게 달려갔다. 마침 연못에 배를 띄우고 구경하고 있던 이연은 깜짝 놀라 누가 반란을 일으켰냐고 질문했는데, 울지경덕은 태자와 제왕(이원길)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왕(이세민)이 진압했으며, 이연이 놀라지 않기 위해서 진왕이 자신을 파견했다고 말했다. 겁에 질린 이연은 이세민에게 병권을 넘겨주었다.
후에 이세민은 태자가 되었고, 두 달 후에는 황제가 되었다. 동생 원길의 처도 자신의 후궁으로 들인 것은 덤인 동시에 결과적으로는 사실상 역사의 "명군"이 되지만 스스로 문제를 만든 제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4.4. 정관지치
4.4.1. 세력 흡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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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민은 형과 동생은 물론, 그 가솔들까지 학살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 일파의 죄는 묻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지방에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당 태종의 일파가 기회를 잡아 눈엣가시이던 이건성 쪽 사람을 처리해버리는가 하면, 태종을 따라 왕세충 등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장수 왕군곽(王君廓)은 이연의 사촌이자 이건성 일파인 유주 대도독 이원을 선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했다. 그렇게 반란을 일으키게 하고는, '''왕군곽 스스로가 반란을 진압하고 조정에 보고해서 유주자사가 되었다.'''
거기다가 양위를 거쳐 태종이 즉위한 것은 무덕 9년(626년) 8월 계해일인데, 같은 달 을해일에 돌궐의 돌리가한과 힐리가한이 장안 근처 무공까지 진격해 왔다. 태종이 즉위하고 겨우 12일 뒤였으며, 그 군사는 10여만이나 되었다. 무공은 장안에서 70킬로미터 정도밖에 떨어지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태종이 기마병 6기를 거느리고 와서 협정위반이라고 따졌고, 태종 뒤로 제군들이 따라왔다. 이에 힐리가한은 황송해 했으며 8월 을유일의 백마를 참해 맹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는 당나라에는 굴욕적인 일로 훗날 당군이 이정을 장군으로 한 원정군을 보내 돌궐을 격파했을때 구당서 이정전에서는 태종이 위정의 전공을 치하하며, 위세가 북적에 떨치기는 고금에 없던 일로, 왕년의 위수의 싸움을 갚기에 족하다고 했는데 '위수의 싸움' 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패전이거나 아니면 굴욕적인 강화였거나 둘 중 하나였음을 보여준다. 신당서에서도 우리 위수의 치욕을 씻기에 족하다며 한층 더 분명하게 적혀 있다. 위수에서의 맹약은 당에게, 그리고 즉위한지 얼마 안 된 태종에게 굴욕적인 강화였으며 '치욕' 이었다. 다만 3년 뒤인 정관 3년(629년)에 당은 이미 돌리가한을 항복시켜 그 치욕을 씻었으니 저력은 대단하다고 할 만하다.
이런 혼란 속에 이세민이 해야 하는 것은 물론 민심을 얻는 일이었고,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여론을 호의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이세민은 세 가지 조치를 취한다.
- 맨 처음 취한 조치는 환속 중지였다. 그 당시 당나라는 정부 정책으로 불교와 도교의 절, 사원들 대부분을 밀어버리고 도사와 승려를 환속시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사회에 부정 부패가 심해지면 이런 쪽에서 땡중들이나 사이비 도사가 설치는 등 폐단도 있었기 때문에, 정책 자체는 나쁘다고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승려와 도사가 각각 20만을 훌쩍 넘는 엄청난 인원인데,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신자들에게 새로 즉위한 황제 태종의 이름으로 다시 제 집을 찾아주게 했다. 장기적으로 보면 좋지 않았지만, 일단 당 태종 입장에서는 어느 정도 여론을 호의적으로 돌릴 수 있는 묘수였던 것이다. (이런 일이 삼무일종법난의 세 번째인 당무종때 반복된다.)
- 두번째는 계급이나 서열을 크게 따지지 않고, 의견이 있는 신하들은 모두 상소로 정책을 올리도록 했다. 이건 모든 관료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황제의 눈에 들 기회가 생긴 관료들의 여론을 단기간이지만 좋게 만들 수 있었다.
- 마지막 세번째로 3,000명이나 되는 궁녀들에게 자유를 주고 풀어주었다. 이렇듯 여론을 자기 편으로 만들기 위해 당태종은 노력했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과거 이건성의 일파였던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다. 당 태종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이건성과 이원길 일파에 대해 더 이상의 죄를 묻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내지 않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 그 일파들을 끌어안으려고 했다. 설만철, 그리고 위징 등이 대표적인데, 위징은 이건성의 책사로서, 적극적으로 당 태종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당 태종은 위징을 불러서 말했다.
>위징: "모시는 사람이 주군을 위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제 말을 따랐다면 이전의 태자께선 그런 화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위징의 말을 들은 태종은 그를 벌주지 않고 중용했다. 태종이 이건성 일파에 대해 포용과 화합을 목적으로 내세운다면, 위징만큼 적절한 대상도 없었을 것이다. 이건성 일파를 대표하는 사람이 위징이니 말이다. 위징을 끌어안으면 이건성 일파를 거의 다 자신의 편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얘기다. 태종은 위징을 하북으로 보냈고, 위징은 그곳에서 별 무리 없이 이전 이건성의 사람들을 통제하여 현재 태종의 체제에 복속되도록 도왔다. 물론 아주 완벽한 것은 아니라서, 이건성의 측근이었던 이예의 반란이 있긴 했지만, 어느 정도 틈을 메꾸고 통합하는 데에는 성공을 거두었다.
4.4.2. 천하를 다스리는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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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두 달째, 위징과 봉덕이를 부른 태종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현재의 세상이 아직 어지럽다는 것에 의견을 모았다. 강하게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봉덕이의 주장이었고, 부드럽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위징의 주장이었다. 위징은 여기서 이렇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했는데, 꽤 유명한 말이다.
일단 정책이 이렇게 결정되자 그에 따라서 많은 일들이 처리되었다. 우선 너무 많은 관리들을 정리하고, 조직을 간소화했다. 그리고 많은 현과 주를 간략하게 합쳤는데, 너무 세부적으로 분할되면 백성들이 받는 고통이 많아진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리고 '''의창''' 제도를 실시해 식량을 비축해두고 빈민 구제에 사용했다."세상이 어지러우면 다스리기가 힘들다고 하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굶주린 자가 음식을 먹으면 금방 배 부르는 것과 같이 오히려 더 쉽기도 하지요."
흉년이 들면 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것. 또한 사형을 극단적으로 줄였다. '''오부주'''(五復奏)와 '''삼부주'''(三復奏) 제도를 실시, 사형 판결을 받은 사람은 상소를 5번, 혹은 지역에 따라 3번을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으로 사형 당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는데, 동시에 사형 집행을 할 수 있는 날짜도 극단적으로 줄여버렸다.
보통 2월 4일인 입춘부터 대략 9월 23일인 추분까지 사형을 금지시켰는데, 그 외의 날도 제사가 있다, 초하루다, 상하현이다, 휴일이다, 밤이다, 해서 사형을 금지시키니 사형 집행할 수 있는 날짜는 엄청나게 줄어버리게 되었다. 그렇게 밀리고 밀리다 보면 다시 대사면이다 해서 사형수가 형이 감형되거나 풀려나기도 하였고, 정관 4년, 중국 전역에서 사형당한 사람은 29명이었다.[18]
또한 소소하게 곤장을 때릴 때도 등 대신 허벅지를 때리도록 조치하는가 하면, 사형 대신 오른발을 잘라버리는 제도도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바꾸었다.
4.4.3. 현명한 내조자
당태종은 언제든지 신하들이 자신에게 직언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신하들은 거의 괴롭힘 수준으로 당 태종에게 간언했는데, 물론 그 중 제일 심했던 사람이 위징이었다. 위징을 일컬어 '''"감히 간언했고 능히 간언했으며 훌륭히 간언했다."'''라는 말은 유명하다. 위징은 태종 앞에서 목이 달아날 법한 소리를 하고도 면색 한번 바꾸지도 않았고, 무슨 정책을 내려도 옳지 않다고 생각하면 3번이고 4번이고 통과시키지 않으며 저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종을 쪼아대었고, 당 태종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면, 항상 대신들은 수나라를 예로 들어 말렸다.
참다 못한 당 태종이 "내가 수양제보다 못하다고 하는데, 그래. 하나라 걸왕이나 상나라 주왕하고 비교하면 어떤가?"라든가 "국가에서 단 한 사람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고, 단 한 푼의 세금도 거둬들이지 않아야 만족을 하겠군!"이라며 폭발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물론 사람이 그렇게 욕을 먹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건 당연하지만, 이렇게 되도록 만든 것도 태종 본인인지라...
가끔 참다 참다 못해 꼭지가 완전히 돌아서 맛이 갈 때도 있었는데, 이럴 때마다 당 태종을 제어한 것이 장손황후(長孫皇后, 문덕황후 장손씨(文德皇后 長孫氏))였다. 태종의 부인인 장손황후는 후궁을 완전히 장악했는데, 악랄하고 질투심 넘치는 방법이 아니라 감싸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후궁들이 아프면 약을 주고, 그들이 낳은 아이는 자기 아이처럼 예뻐하면서 길러주었는데, 이에 후궁들이 감격한 것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19] 이렇게 치열한 궁중 암투가 사라지자, 태종은 비교적 정치 업무에 주력할 수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태종을 제어하기도 했다. 어느 날 위징과 대화하다 엄청나게 화가 난[20] 태종은 아예 그 자리를 빠져나와서 돌아가 버렸다고 한다. 돌아와서도 씩씩거리는 태종을 보고 황후가 묻자 태종은 매우 화를 내며 "그 시골뜨기 촌놈 위징 말이오. 내가 하려는 일마다 사사건건 반대를 해대니, 언젠가는 그 늙은이를 죽여 버려야지!" 말한다. 그러자 황후는 축하하는 일이 있을 때 입는 옷을 입고 나와 태종에게 절을 한 후 나눈 대화는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그러자 태종은 껄껄 웃으면서 화를 풀었고, 황후는 위징에게 상을 내렸다고 한다.태종 : "아니, 왜 그러시오?"
문덕황후 장손씨 : "전부터 위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충언하는 사람이 있다면, 폐하와 나라를 위해 정말 기쁜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 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실질적으로 문덕황후 장손씨는 외척 개입을 막아버렸다. 장손무기는 태종의 가장 친한 친구였는데, 황후가 외척이 정치에 개입을 하는 것을 거의 차단해버림으로써 뭔가 수를 쓸 수가 없었다. 문덕황후가 죽고 나서야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평소 문덕황후는 태종이 화를 내면, 덩달아서 "그렇군요. 정말 나쁜 사람이군요." 같은 식으로 태종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다가 조금 화가 가라앉는 것 같으면 천천히 변호하면서 지적하는 것이었다. 이리도 훌륭한 아내인 문덕황후는 40세가 되기 전에 죽어버리고 말았는데, 유언은 이러했다고 한다.
그녀의 사후 태종의 일화에서 위징의 성격과 그녀의 현명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전해져 오는데"방현령은 뛰어난 신하입니다. 중용하시지요. 그리고 외척을 중용하지 마세요. 제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주십시오."
이 와중에도 위징은 ''''황제가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고 죽은 여인만을 그리워한다''''고 비판을 한 것이다. 말을 듣자 태종은 신하들 앞에서 한바탕 대성통곡하고는, 눈물이 멈추자마자 탑을 때려부쉈다고 한다. 이렇게 위징은 간언하고, 장손황후는 태종의 심기를 헤아릴 때, 실무에서는 방현령과 두여회가 많은 관료들을 줄이는 어려운 일을 맡아 완벽하게 해내었고 국고를 풍족하게 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도 어이가 없어 애석해했다. 그런 그에게 궁녀들이 하나의 책을 가져다주었다.
"무엇이냐?"
"평소에 황후께서 아녀자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하지 않는 일에 관한 득과 실을 모아 책을 쓰셨습니다. 글재주에 자신이 없다고 하시어 보여드리지 못했지요."
형제를 죽인 냉혹한 태종도 그 책장을 넘기는 순간에는 울먹이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태종은 궁궐 내에 탑을 하나 짓고는, 틈만 나면 그 자리에 올라가 황후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위징이 말했다.
"어느 쪽을 바라보십니까?"
태종은 황후의 무덤인 소릉을 가리켰다.
"저기외다."
'''"아, 그러십니까? 전 폐하께서 선제의 무덤인 헌릉을 바라보시는 줄 알았지요."'''
4.4.4. 동돌궐과 고창국 정벌
대외 전쟁에서도 순조롭게 일이 풀려나갔다.
태종의 가장 뛰어난 장수였던 이정은 철륵의 설연타 등과 손을 잡고, 동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굴복시키며(630년, 정관 4년), 몽골 고원을 제압했다. 이에 당나라의 위세에 압도된 유목민 집단들은 태종을 유목 세계의 패자라는 뜻을 지닌 '''천가한(天可汗 = 텡그리 카간)'''으로 추대하였고, 돌궐 패망과 함께 그간 돌궐의 세력에 예속되어 있던 철륵, 거란, 해, 습(飁) 등 몽골과 동부 내몽골의 홍안령 기슭 일대에 거주하던 유목 민족들이 당나라에 투항했다. 이로서 태종은 일전에 힐리가한이 장안으로 군대를 몰고 왔을 때 철군을 애걸한 원한을 갚고, 중원(천자)과 초원(가한) 양쪽 모두의 지배자가 되었다.[21] 또한 640년 후군집과 소정방이 서돌궐에 복종했던 고창국(투루판)을 멸망시켰다. 당태종은 위징(魏徵) 등의 반대를 뿌리치고, 주현(안서도호부)으로 편제하여 당 조정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으로 삼았다. 고창국 멸망은 곧 당의 북부와 서부에 있던 세력들이 모두 당에 복속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당나라는 서쪽의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게다가 이정의 당군은 티베트 고원 북편 경사면에 있던 토욕혼을 격파했고, 그 후 635년에 토번(티베트)이 토욕혼을 정복했다. 한편 서남의 티베트 방면에 대해서도, 당은 641년 공주를 하가(下嫁)[22] 하는 등 회유책을 써서 안정을 꾀하였다. 이제 동으로 황해 바다에 이르고, 서로는 언기(焉耆), 북으로는 사막, 남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는 지역이 모두 당제국의 주현으로 편제되었다. 이제 당은 무릇 동서 9천 5백 10리, 남북 1만 9백 19리에 달하는 대제국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이제 당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들 가운데, 당에 대적할 수 있는 정도의 나라는 오직 고구려만 남게 되었다.
4.5. 고구려와의 악연
4.5.1. 전쟁 원인
고구려 정벌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상당히 많았으나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와 신라를 괴롭히는 것을 전쟁의 이유로 삼는다.[23] 사실 집권 과정에서도 똑같이 쿠데타를 한 주제에, 고구려 정벌의 명분은 연개소문의 쿠데타였다고 하니 조금 당혹스럽다. 어찌됐건 실제로 연개소문의 쿠데타는 '''고구려 정벌의 핑계일 뿐이었다.''' 태종 자신도 단순히 핑계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송나라의 주희는 자치통감 강목에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교만한 전쟁, 탐욕스러운 전쟁'''이라 일컫는다.太宗顧謂侍臣曰, "莫離支賊弑其主, 盡殺大臣, 用刑有同坑穽, 百姓轉動輒死, 怨痛在心, 道路以目. 夫出師弔伐, 須有其名, 因其弑君虐下, 敗之甚易也."
이에 태종은 시신(侍臣)들을 돌아보며 "막리지(연개소문)는 그의 군주를 시해하고 대신을 다 죽였으며, 형법을 쓰는 게 함정과 같아서 백성을 움직이는 대로 죽이므로, 원한이 가슴에 사무치어 길가에서도 눈짓을 한다. '''무릇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친다는 것은 모름지기 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임금을 시해하고 아랫사람을 학살한 구실을 내세운다면 무너뜨리기가 매우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구당서》 동이 열전 고려조 정관 17년 기사'''
이러한 빈약한 명분은 당 조정 내부에서도 어느 정도 논란이 있었다. 고구려가 당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 자체는 중론으로 자리잡았지만, 명분이 워낙 빈약하고 수나라의 전례도 있다 보니 굳이 전쟁까지 할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회의론도 등장한 것. 이 때문에 고구려 원정은 곤란하다는 중신들의 간언이 올라왔다. 또한 고구려 정벌은 단순히 연개소문이 괘씸해서라는 이유뿐 아니라, 내부적인 갈등을 외부로 돌리려는 태종의 정치적인 의도도 담겨있었다. 전쟁 직전인 643년에 후계 자리를 놓고, 위왕 이태와 진왕 이치간의 갈등이 터지는데 장손무기를 비롯한 외척들이 개입하면서 당시 정치적인 입지가 곤란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부의 갈등을 외부로 돌릴 수 있는 고구려 정벌이라는 카드는 충분히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4.5.2. 고구려-당 전쟁
태종은 건국 시절의 공헌은 물론이고, 고구려 원정 이전까지 연전연승하며 주위의 이민족들을 평정하였다. 그는 영토 팽창 정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자 자신감이 충만한 상태였다. 특히나 돌궐 정복에 성공한 전무후무한 전쟁 영웅으로 유명하였으나, 신성, 건안성, 특히 안시성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 공략에 실패하면서 원정은 결국 당의 패배로 끝나게 된다. 때문에 고당전쟁에 관한 야사나 설화가 많이 남아있을 정도로 중국인들에게는 큰 인상을 남겼다. 태종이 안시성에서 안시성주의 화살에 한 눈을 잃어 애꾸가 되었다는 야사라든지, 안시성 전투 이후 연개소문이 당을 역으로 침공하여 추격하자. 태종이 우물에 숨었는데, 그 사이 거미가 입구에 거미줄을 쳤고 우물에 쳐진 거미줄을 보고 고구려군이 우물을 살피지 않아 태종이 살았다는 과장된 스토리가 '''중국 경극'''에 있을 정도이며, 한국보다 오히려 중국에서 더 유명하다. 이후 태종이 거미에게 보답하기 위해 우물 위에 탑을 만들었다고 하며, 실제로도 탑이 아직까지 남아있으나 야사 이외의 기록이 없어서 탑과 전설의 진위여부는 불투명.
수나라와는 다르게 초창기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10여 개의 성을 함락시키기도 하는 등 고구려에게 타격을 입혔으나 결국 전쟁의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고 함락한 성도 건사하지 못한 채로 빈손으로 귀환하다시피했다.[25][26]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끌고 온 제 2차 여수전쟁 때, 수나라 군대는 요하와 요동 반도를 가로지르는 천산 산맥을 넘어 오골성과 압록강을 지나 평양 인근까지 침공하기도 하였다. 반면 제 1차 고당전쟁의 경우, 당나라는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고구려 요동 방어선을 넘지 못했다. 당나라는 돌파구를 찾으려 계속 신성, 건안성, 안시성 등을 두들겼지만 공략에 실패하고 만다. 수나라보다 전공이 낫다고 단언하기 힘들정도이다.[27]
특히, 전쟁 초기 요동으로 가는 길목인 요하 남쪽의 늪지대 요택을 도하하면서 고구려 정복 의지를 불태우기 위해 도하 장비를 태워버렸던 것이 큰 악재로 남았다. 안시성에서 이민족을 함께 정벌했던 정예 병사들을 많이 잃었을 뿐만 아니라 퇴군을 하려면 또 다시 요택을 건너야 하는 데, 태워버린 도하 장비를 다시 만드는 과정에서 보급이 끊어져 수많은 병사들이 동사하거나 굶어 죽었고, 이세민 본인도 한겨울에 흙으로 길을 다시 메우고 수레를 손수 밀다가 등창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기록도 있다. 살아 돌아온 이는 극히 소수였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천책상장 태종의 개인적 입장에선 비참하기 그지없는 상황인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 원정을 반대했던 위징의 주장을 회고하면서 "위징이 살아있었다면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겠는가?"(魏征若在,不使我有是行也)며 크게 후회하기도 하였다. 장안으로 돌아와 죽은 병사들을 위한 제사를 올릴 때 곡을 하니 신하들도 슬피 울었고, 백성들은 자신의 죽은 자식을 위해 울어주는 황제에게 원망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요동성을 공격할 때 직접 흙을 퍼나른 것은 그를 미화하는 수사였지만 요택에서 직접 몸소 풀을 베고 흙을 나르는 행위에서는 당군의 위급한 퇴각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당시 연개소문이 당나라 후방의 설연타를 움직여 수도권인 관중을 노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긴급하게 퇴각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당나라는 수나라 시절에 비해서 침착하고 유연하게 고구려 공략을 시도한다는 것을 보여준 원정이었지만 사실 아군의 용맹과 분전을 유리하게 과장하는 성향과 수사를 제외하고 보면 그냥 요동 방어선 표피에서 거점 몇 개를 점령하다가 실패한 수준이었다.[28] 즉, 요동 방어선을 와해시키는 데는 실패했으며 이후로는 대규모로 꾸려진 원정에 전면적인 수정을 가한다.
당태종은 요서와 요동을 일거에 제압하는 것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10,000 단위 군대를 보낸 국지전, 요동 방어선 우회, 대규모 수군 상륙 등의 시도를 하며 고구려 전력을 소모시키는 전술로 바꾸었고, 고구려의 후방에 위치한 신라와의 연계에도 이전보다 공을 들였다.
다만 고구려도 내몽골 일대로 전장을 옮겨 당나라를 견제함으로써 당군의 소모전에 대응하였고, 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야심차게 준비한 결정타는 연개소문이 괴력을 발휘하여 격파한다. 이런 만전의 전략으로도 해내지 못한 고구려의 문을 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세민의 아들 고종, 그리고 그 연개소문의 아들들이었다.
어쨌거나 태종은 황태자 이승건을 폐위한 후 정신적으로 힘든 와중에 먼 원정으로 체력을 많이 소비하고, 거기에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라는 충격으로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면서 건강을 급속도로 해치게 되어 결국 단약에 의존하다가 단약중독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4.5.3. 결과
'''중세 중국사 최고의 수치 중 하나이자 한국사 최고의 순간 중 하나'''
한편 태종이 안시성 전투에서 안시성주[29] 의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사가 있는데,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당 태종 애꾸설은 거의 6백년 뒤인 고려 말기의 목은 이색의 시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지만 워낙 극적인 장면이라 우리나라 사극에서는 줄기차게 애용되어 삼국기, 대조영, 연개소문, 안시성(영화) 등의 드라마에서 태종은 눈을 잃는다. 게다가 대조영, 안시성을 빼면 연의의 하후돈 마냥 그 뽑힌 눈알을 먹는 것까지 표현. 사실 시신경이 직통으로 맞으면 즉사할 가능성이 높지만 대조영에서는 양만춘이 당나라 깃발을 활로 쏴서 부러뜨리자, 거기에 맞아서 눈을 잃은 것으로 그나마 현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여하간 자치통감에 따르면, 당 태종은 '''"다시는 요하를 넘지 말라."''' 또는 '''"요동을 공격하는 것을 그만두어라"'''라고 유언했다고 한다.[30][31]
하지만 구당서, 신당서의 기록에선 '''태종은 죽기 직전까지 고구려 재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한, 당태종의 유지를 받든 당고종은 이러한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정벌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고구려를 공격하지 말라라는 뜻보다는 '''천책상장'''이라 불릴 정도로 군재가 뛰어난 당태종 자신에게 맞춘 원정 계획을 물리고, 당고종의 상황에 맞춘 계획을 다시 짜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뒤를 이은 고종은 즉위 6년부터 고구려 정벌을 다시 시작해서, 중국 역사에서 손꼽히던 명군인 아버지가 실패한 그 고구려 정벌을 달성하고 만다. 대만계 일본 역사 소설가 진순신은 이것을 최대의 아이러니로 꼽았다.[32]
태종의 고구려 정벌로 요동 방어선의 건재를 확인한 것이 역설적으로 다음 침공의 교훈이 되었다. 1차의 대대적인 전쟁의 교훈으로 국지적인 소모전과 요동을 우회한 상륙전 등으로 고구려의 국력 고갈을 시도했으며 신라와의 연계에도 더욱 힘을 썼다.
5. 후계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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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문덕황후 장손씨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대부분 막장인 것도 유명하다. 내용을 읽고 있으면 참 불쌍할 지경(...) 태종 사후의 제위 계승권은 문덕황후에게서 난 세 아들에게 있었는데, 자식들이 지닌 결함 때문에 태종은 매우 깊은 고민에 빠져야 했다. 뭐 수양제처럼 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지만.
장남인 '''이승건'''은 어렸을 적에는 머리가 총명했지만, 어느 날 열병을 앓은 이후로 몸이 불편해지고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한다. 성년이 된 이후부터는 돌궐족의 복장을 즐겨 입고 무엇보다 '''"내가 천하를 가지게 되면 기병들을 이끌고 돌궐 가한에게 몸을 맡겨 한 부락의 우두머리로 살 것이다"'''라는 망발을 하여 태종의 눈 밖에 났다고 전해진다. 건국 초에 태종이 돌궐과 얼마나 처절하게 싸워 나라를 지켰는가 생각하면 그야말로 기가 막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름다운 외모의 미소년 악사인 칭심(稱心)을 곁에 두고 남색을 즐기는 등 워낙 당 태종의 성질을 건드리는 짓을 많이 해서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후계자 자리 근처에도 못 갔다.[33]
둘째 아들인 '''이태'''는 체격이 건장했을 뿐 아니라 학문에도 뛰어나서, 태종이 가장 아끼던 자식이었다. 그러나 이태는 점차 몸이 비대해지고 게을러져서, 나중에는 황궁 내에서도 가마를 타고 이동했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아졌을 뿐 아니라,(고도비만이었던 모양) 지나치게 태자의 위를 탐내는 모습이 아버지인 태종의 눈에 밉보이고 말았다. 태종은 나이를 먹으면서 형제들을 주살함으로써 황제의 자리에 앉았던 일에 대한 트라우마가 깊어져만 갔는데, 욕심 많은 성격의 이태가 황제가 된다면 틀림없이 다른 형제들을 해치고 말 것이라 걱정했던 것이다.[34]
때문에 태종은 이승건과 이태를 모두 제치고 비교적 온화한 성격이었던 '''이치'''에게 제위를 물려주는 것으로 후계자를 결정지었다. 그 외에도 이승건과 이태는 아버지인 태종에게 대드는 일이 잦아져서 차츰 관계가 악화되었고, 특히 이승건은 모반을 꾀했다는 죄명으로 영영 폐태자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로 얼마 가지 않아 죽은 것을 보면, 아무래도 암살당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본래 병약했던 몸이라 요절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겠다만.
결국 태종과 문덕황후의 아들 중에서 3남으로 전체 아들로 치면 9남에 부드럽고 온화한 성격인 이치가 제위를 물려받아, 훗날의 고종이 되었다.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데다가 마이페이스 기질이 강한 이승건이나, 총명하면서도 욕심이 많은 이태보다는 비교적 유약한 성격인 이치가 '''다루기 쉬워서''' 대신들이 태종에게 치를 후계자로 삼도록 권했다고 보기도 한다.
고종의 군주로서의 평가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아버지인 태종이 워낙 먼치킨이다 보니 비교 당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아내인 측천무후가 그의 사후 정권을 장악하여,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마누라 단속 못했다고 후세 사람들에게 제대로 까였다. 덕분에 이 후계자 문제는 고구려 원정과 더불어 태종의 실책들 중 하나로 꼽힌다.[35][36]
확인되는 그의 유언을 보면,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 '과연 얘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를 품고 있다는 것이 나타난다. 자식들이 하나같이 변변찮은 데다 2대만에 나라를 말아드신 수양제라는 예시(...)까지 있으니, 걱정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짐은 공들에게 대사를 맡기노라. 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러운 것은 공들도 아는 바이니 그를 잘 보좌해 달라."
- 장손무기와 저수량에게, 신당서 장손무기전, 자치통감
"장손무기와 저수량이 있으면 '''너는 천하에 관하여 걱정하지 말라.'''"
- 고종에게, 신당서 장손무기전, 자치통감
사실 3남이었던 오왕 '''이각'''이 문무에 출중하여 태종은 그를 총애하였고, 이승건과 이태가 문제를 일으킨 후에는 이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었다고도 한다. (후궁에게서 본 아들들까지 포함하면 이승건은 장남, 이태는 4남, 이치는 7남(혹은 9남)이었다.) 이 얘기는 이각의 어머니가 수 양제의 딸, 즉 수나라 공주이기 때문에 어불성설이 아닌가도 싶지만, '''어차피 수 황실이나 당 황실이나 다 같이 관롱 귀족 중에서도 무천진 집단의 일원이라''' 큰 문제는 아니었다. 애초에 무천진 집단은 오랫동안 서로 통혼하던 사이라, 태종도 따지고 보면 수 황실과 인척 관계로 오히려 전왕조의 혈통으로 정통성을 강화시킬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문제는 장손무기가 이에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것[37] . 장손무기의 위상이 갈수록 강화되어 가던 것이 당 태종 말년이니만큼, 장손무기의 반대는 상당한 무게감이 있었다. 결국 장손무기의 의향에 따라, 그가 찬성한 진왕 이치가 후계자가 되고, 그가 반대한 오왕 이각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으며, 얼마 안가 역모죄로 젊은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38][39] 그의 친동생이었던 촉왕 '''이음'''은 연좌되어서 유배 되었다.[40] 그리고 태종 사후 진왕 이치는 고종으로 즉위하였고, 장손무기는 권력의 핵심으로 한동안 잘 나갔으나 결국 측천무후와 갈등 끝에 실각하여 모함을 받고 자살한다.[41]"장손무기는 나에게 충성을 다하였으니, 내가 천하를 갖게 된 것은 대부분 그의 힘이었다. 내가 죽으면 참소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이간시키게 하지 마라."
- 저수량에게, 구당서 저수량전, 자치통감
여담으로 오왕 이각은 무려 300년 뒤에 후손인 '''이변'''이 남당을 세우면서[42] 정종 효정황제가 되었으나 남당이 곧 북송에게 망해서 의미가 없어졌다.
한편 5남 제왕 이우는 아예 아버지에 맞서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금방 진압되고 폐서인되었다.
6. 기타
- 동맹국이었던 신라는 당시 선덕여왕의 치세였는데, "신라는 여자가 왕위에 있기 때문에 남들이 우습게 본다."라고 디스하였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후궁 중 하나였던 재인(才人) 무씨, 즉 무조(무미랑)는 중국사에서 유일한 여자 군주 측천무후가 된다. 측천무후를 발탁한 게 태종 본인이었단 점에서 결과적으로 자가디스를 한 셈이다. [43]
- 서예에 대단히 관심이 많았는데, 왕희지의 글씨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때문에 전국에 있는 왕희지의 글씨를 헌납하라고 요구했는데, 왕희지의 글씨 중 걸작이라고 찬양받는 난정서만은 얻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수소문 끝에 왕희지의 7대손이자 승려였던 지영이 입적한 뒤, 그의 제자 변재[44] 가 가지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는 그를 황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래서 난정서를 내놓으라고 신하들까지 동원하여 설득하였으나, 변재는 절대로 이를 팔지 않았고, 아예 존재 자체도 부인했다. 이에 태종이 머리를 써 감찰어사, 즉 감사원급 직원이었던 소익을 선비로 위장시켜 변재 스님에게 제자로 들어가게 한다. 소익이 몇 년 동안 극진히 모시자 마음이 동한 스님이 "자네에게만 보여주는 거야"라며 난정서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제자로 위장한 국정원 직원 소익은 "님, 딱 걸렸음 나 사실 007 요원임 ㅋㅋㅋㅋ 감히 황제에게 거짓말을 해? 좋은 말할 때 내놓지?"이라고 하며, 난정서를 빼앗아 태종에게 바쳤다.[45] 이후 태종은 난정서를 포함한 왕희지의 글씨를 자신의 무덤에 묻어달라고 했고, 결국 태종 사후 왕희지 작품은 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덤으로 변재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나마 당나라 멸망 후 오대십국시대에 군벌 온도(温韬)에 의해 황릉이 도굴되면서 유실되고 말았다.
- 소릉에는 태종이 전쟁에서 탔던 6마리의 준마(駿馬)들을 부조(浮彫)로 표현해 놓았는데, 모두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들을 아꼈던 태종은 자신의 무덤에 육준(六駿)을 조각했는데 각각의 이름은 특륵표(特勒驃), 삽로자(颯露紫), 청추(靑騅), 권모과(拳毛瓜), 십벌적(什伐赤), 백제오(白蹄烏)였다. 그런데 1914년 위안스카이의 차남 위안커원(袁克文) 등이 중국과 미국의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중 삽로자(颯露紫)와 권모과(拳毛瓜) 두 석각을 훔쳐갔다. 이들은 4년 후인 1918년 다시 잠입하여 나머지 네 석각도 훔쳐가려 했으나, 중간에 발각되어 반출을 면할 수 있었다. 현재 남은 네 석각은 조각난 채로 시안 비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미 해외로 반출된 두 석각은 현재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박물관에 있다. 때문에 이 두 석각은 시안 비림 박물관에 레플리카로 전시되어 있다.
- 태종부터 희종 이전까지 당대 황제들은 산을 능으로 삼아 굴을 파고, 여러 통로를 만들어 채색과 수많은 방을 만들며 가짜 통로와 방을 만들고 재궁과 부장품을 두었는데, 그 시초가 태종부터이다. 고조 이연은 진시황릉, 서한 황제들, 수 문제 양견처럼 평지에 묻혔다 그러나 당 말기 온도의 손에 도굴당했다고 하며 고종과 무측천의 건릉만 무사했다. 현재는 정비가 되었고, 국내에 소개가 안돼서 그렇지 산 정상과 가까운 곳에 10평 크기의 굴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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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야사
참언을 신봉한 군주이기도 했는데 정관 22년, 태종이 태사령 이형풍에게 본 왕조가 3대를 넘긴 이후에 "무(武)" 자가 들어가는 여인이 왕이 되어 천하를 대신한다는 예언이 믿을 만한 것이냐고 묻자 이형풍은 이 인물이 지금 장안에 살고 있는데 30년 후에 왕이 되어 천하를 다스릴 것이며 당의 왕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태종은 의심이 가는 인물을 찾아내 죽여 버리면 후환을 막을 수 있지 않겠냐고 물었으나 이형풍은 천명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그를 죽여봤자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반대하였다. 이때부터 태종은 무장들 가운데 성이 무씨인 사람을 특별히 경계하여 주연에서 이군선(李君羨)이 그의 아명이 ‘오랑(五娘 - 다섯째 아가씨)’이며 관적이 위주(魏州) ''무''안("武"安), 관직은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으로 현"무"문(玄"武"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화주(華洲) 자사로 전출시켜 이어 이군선은 사도를 신봉했다는 누명을 쓰고 멸문의 화를 당하고 말았다. 정작 자신의 궁녀 "무"미랑("武"媚娘)이 나중에 여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되었다.
당 태종 측천무후 예언설이라는 야사도 있는데, 야사에서 인용하는 내용들이 죄다 야사이기에 다소 신빙성이 문제가 있다. 야사에 의하면 죽기 직전에 장손무기에게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을 결코 궁궐로 들이지 말라'''와 함께,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이 이 대당을 뺏을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며, 또한 장손무기에게 '그대의 과잉 충성은 언젠가 그대를 죽게 만들 것이오'라고 했다고 하는데, 측천무후가 훗날 벌일 짓을 예견이라도 하신 듯 하다.
그리고 학계에서 "장손무기가 태종에 대한 과잉 충성으로 죽지 않았냐"는 설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이유로는 장손무기가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의 궁궐 출입을 엄격히 통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종이 무조를 궁궐로 들이려고 하자, 자기가 동원 가능한 모든 힘을 총동원해서 사력으로 무조의 입궐을 막을려고 했으며, 무조가 기어이 궁궐 내로 들어오자, 어떻게해서든 쫓아내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손무기 죽음에 관한 떡밥 중 하나가 있는데, 장손무기가 죽기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는 야사 속 기록을 인용
위 내용이 바로 측천무후 예언설 떡밥에 주로 인용하는 야사 기록이다. 허나, 위에도 언급한 신빙성 문제인데, 해당 야사에서는 장손무기가 저 말을 하고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고 하는데, 정작 정사에서는 장손무기는 '''목을 매어 자살'''해서 해당 야사가 후대에 쓰여진 소설이 아니냐는 의견들이 학계에서 팽배하다. 장손무기가 무후를 배척한 것도 문벌귀족의 일원으로써 고종 초기 집권자로 왕씨 황후를 지지했기에 신참세력인 무후를 배척했다는 것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해당 야사 자체가 흥미진진해서 그런지, 당 태종 ~ 측천무후 시기를 다룬 사극들에서 자주 인용한다. 특히 한국에서는 연개소문에서는 저 떡밥을 제작진 입맛에 변형해서 스토리에 집어넣었다.“신 장손무기 삼가 아륍니다. (중략) 신은 폐하[46]
께서 신에게 신신당부하셨던 말씀(무조를 궁궐에서 쫓아내라)을 어찌 해서든지 지키려고 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폐하를 만나뵙게 되면, 어찌 변명을 할 도리가 없습니다. (중략) '''무조 그 년은 분명 천년 묵은 요괴'''가 틀림없습니다. 그토록 어질시고 현명하시던 폐하께서 한 나라의 국모이시던 황후마마를 바로 국문부터 열어 잔혹한 폭력으로 다스리게 만들고, 황실부터 시작해서 궁궐을 피바다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 년은 이제 폐하를 저 궁궐 뒷편으로 몰아내고 자기 혼자서 국정을 독단하며, 이 나라를 무씨의 나라로 만들고 있습니다. 폐하의 예언이 맞았습니다. 폐하께서 예언하신대로 '''무씨 성을 가진 여인이 이 나라를, 이 사직을 뺏을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제 불충한 신은 폐하를 만나러 갑니다.
8. 현대의 평가
당태종은 중국사 최고의 명군이라 평가되었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양립한 인물이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아예 이세민을 수 양제 동급 내지는 이하의 인물로도 평가하며, 심할 경우에는 "수 양제는 실제로는 무난하거나 유능한(!) 황제였는데, 이세민에 의해 왜곡됐다"고까지 하는 경우도 있고, 이세민을 거품만 잔뜩 낀 인물이라고까지 혹평하기도 한다. 또한 골육상잔인 현무문의 변에 있어서도 비슷한 이유를 들어 이건성을 재평가하고 이세민을 부정적으로 본다. 한마디로 "역사는 승리자가 쓰는 것이다. (고로 사서의 군주 찬양 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논리. 인터넷에서 보면 환뽕들이 이세민을 폄훼하고, 중빠면 이세민을 빤다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세민에 대한 평가는 중빠/환빠 문제와 관련없다. 오히려 환빠 같은 국수주의자들 중에서 "이세민은 대단하다. 그러나 그를 막아낸 연개소문은 더 대단하다."라는 논리로 그를 극찬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당 태종의 경우, 골육상잔을 통해 즉위했기 때문에 정통성 및 이미지 메이킹에 큰 신경을 썼으며, 이로 인하여 역사기록에 많은 왜곡이 가해진 것은 사실로 보인다. 당태종의 역사 왜곡은 '집권세력의 은근한 프로파간다' 수준을 넘어 '황제 본인이 직접 주도하는 역사 서술' 이 이루어져서, 여러모로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여겨진다. 케임브리지 중국사나 역사학계도 이 점을 지적한다. 정관정요에 따르면 유교적 윤리관에서 폭군이나 한다는 사초를 실제로 보고 현무문의 변 관련 기록의 수정을 명했다고 하며, 위징이 죽은 후 그가 올렸던 상소가 모두 별도로 기록되었고 사관이 그것을 보았다는 것을 들은 후의 격노한 반응 등을 보면 이를 부정하긴 힘들어 보인다. 이로 인하여 구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당고조의 거병에서의 이세민의 역할, 황태자였던 이건성의 군공 축소 등은 후일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구당서 등 정사 기록에는 당태종 스스로가 봉선에 반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자치통감은 문정공(위징) 전록을 인용해 천하를 통일하고 뛰어난 정치로 천하태평을 이루어 백성을 행복하게 한 성천자는 봉선을 올릴 자격이 있다고 해서 태종도 봉선할 생각이었으나 위징이 반대했으며 마침 하남지방에 수해가 일어나 봉선은 중지되었다고 적었다. 태종이 자신이 겸손한 군주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실록에 그렇게 기록한 것이 구당서에 적힌 것이다.
양촌 권근이 "당 태종이 선덕여왕을 왕으로 임명하여 측천무후가 올랐다"는 말을 했지만, '''정작 당 태종은 초기에 선덕여왕을 인정하지도 않았고 측천무후는 나중에야 제위에 올랐다.''' 권근의 논평이 자못 황당한 감이 없지 않아 있고, 더욱이 정관정요가 조선에서 꽤 많이 욕 먹으며, 당 태종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좋은 평은 아니었으나 정작 대학연의와 더불어서 정관정요라는 책을 동시에 본 것도 조선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경우는 평가를 양분했는데 '''당 태종의 장점을 인정하나 명예를 좋아하는 군주로 자뭇 부끄러운 덕도 많았다.'''였다.
대체로 유학자들의 평은 "치척은 몇개 있으나 유학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했다"고 많이 욕을 먹는 편이다. 유교의 단점 중 하나인 국수주의 문제를 만든 시초가 당 태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장형 군주였고, 수나라 멸망 이후 통일 체제를 굳건히 하기 위해서 유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송 태종 같은 군주와는 자뭇 달랐다.
일본의 거장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경우, 당태종의 정관지치가 대단하다기보단 인구가 많이 줄고 시대가 좋았던 영향이 큰 것에 가깝다고 보았다. 이는 그의 강희제에 대한 평가와 같다.
물론 당태종 본인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것은 이런저런 왜곡을 고려해보더라도 분명하고, 수나라 말기의 대혼란과 더불어 여러모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돌궐 등의 대외 문제를 잘 추스린 점에서도 그런 점을 알 수 있다. 당태종이 수양제 시기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한 국가 상황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남은 여력으로 여러 국난을 잘 헤쳐나간 뛰어난 군주라는 건 분명하다. 다만 명군이긴 했지만 성군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황충떼가 장안을 덮치자 답답한 마음에 산 메뚜기를 산채로 삼켰다고 한다. 탄황의 고사라고 한다. 관련 기사
9. 대중매체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호걸인만큼 등장하는 사극이 정말 많다. 중화권에서는 측천무후와 함께 당나라를 다룬 사극이나 영화의 인기 소재이자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왔고 측천무후가 주인공인 창작물에서는 조연급이지만 그래도 카리스마나 무게감 있는 군주로 종종 그려진다.
한국에서도 고대사 관련해서 등장하는데 고당 전쟁의 장본인이고, 삼국통일전쟁에도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이라 이 시기를 다룬 한국 사극이 많다 보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외국 군주'''가 되었다.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로 눈 한쪽을 잃는 장면은 관련 이야기가 야사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필수적으로 나온다. 그래서 당태종이 한국 사극에 등장하면 대부분 눈 한 쪽을 잃고 간다.(...) 그나마 대왕의 꿈에서는 신라가 주인공이라 그런지 외눈 신세가 되지 않았다. 중국 사극에서는 고구려의 경우 남북한 때문인지 또는 격퇴 당한것 때문인지 소수민족 문제 때문인지 드라마 정관의 치를 제외하면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다. 정관장가의 경우처럼 고구려 백제 신라를 관련한 것은 등장하지도 않고 판빙빙 주연 무미랑 전기에서는 북방의 반란군으로, 설인귀 전기에서는 가상의 국가로 나오는 묘사를 해두었기에 고당전쟁을 중국 영상매체로 보는것은 처음부터 기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여담으로 그 무게감 때문에 중화권은 물론 한국에서는 나이가 있는 중장년 배우들이 태종을 많이 연기하는데, 사실 태종은 만 50세에 죽어서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천자 치고는 의외로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사실 한국 사극에서는 고구려 침공이 태종의 말년에 벌어진 사건이기도 하고(그래도 고구려 침공 때도 40대 후반이었다), 측천무후가 주인공일 경우에도 말년의 모습으로 등장하니 중장년 배우가 연기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겠다. 다만 중화권에서도 태종의 청년기를 다룬 작품도 많아서 이 경우는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편.
9.1. 중화권(중국, 홍콩, 대만) 드라마
- 당태종 이세민 - 임준현
- 수당연의 - 두춘(두순)
- 수당영웅 - 위사오췬(여소군)
- 정관장가 - 탕궈창(당국강)
- 진왕 이세민 - 허룬동(하윤동)
- 천하장안 - 친쥔지에(진준걸)
- 대운하 - 류칭윈(유청운)
- 결전현무문 - 먀오챠오웨이(묘교위)
- 소림사(영화,1982)-왕광권
9.2. 대한민국 드라마 및 영화
9.3. 일본의 대중메체 및 미디어 믹스
일본 코에이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의 삼국지 14 파워업키트에서 고대무장으로 처음 등장했다. 통솔 92, 무력 81, 지력 90, '''정치 100''', 매력 92, 총합 455라는 괴랄한 수치를 배정받았다. 또한 개성은 황금 개성인 임재, 장점 개성인 질주, 영명, 문화, 인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