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징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능연각훈신
정문정공(鄭文貞公)
魏徵 | 위징
'''

'''시호'''
문정(文貞)
'''작호'''
정국공(鄭國公)
'''이름'''
위징(魏徵)
''''''
현성(玄成)
'''부친'''
위완(魏琬)
'''출생'''
580년 ~ 643년
1. 소개
2. 생애
2.1. 죽음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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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당나라의 정치가. 자는 현성(玄成). 위소(魏釗)의 손자이자, 위완(魏琬)의 아들이다.

2. 생애


거록 사람으로 무양군의 군승 원보장의 전서기로 있다가 원보장에게 투항하는 편지를 써줘서 이밀에게 귀순했으며, 이밀 휘하에서 문한을 관장했고 우문화급과 싸운 후에는 장사 정정에게 왕세충은 먹을 것이 부족하니 뒤쫓아서 공격하면 승리할 것이라 진언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밀이 왕세충에게 패하자 이밀을 따라서 당나라에 투항했고 위징은 비서승에 임명되어 이세적에게 편지를 보내 당나라에 투항시켰다.
619년에 원보장을 설득해 당나라에 투항시켰으며, 두건덕이 여양을 공격하자 붙잡히고 두건덕으로부터 기거사인에 임명되었다가 도망갔으며, 622년에 선마를 지냈고 유흑달의 무리들을 붙잡자 그들을 사면하면 유흑달의 무리들이 흩어질 것이라 진언해 그의 말대로 해서 그 말처럼 되었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항상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했지만 이건성이 626년에 현무문의 변으로 살해되고 이세민이 황제에 즉위하면서 형제 사이를 이간질한 것에 대해 묻자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자신의 말을 쫓았다면 반드시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라 했으며, 위징은 첨사주부에 임명되었다.
이건성, 이원길의 죽음에 관한 일의 수습을 위해 가을 7월 11일에 산동에 파견되어 위로하고 다녔으며, 이건성, 이원길을 장사지내면서 묘소까지 배웅해 호송했다. 위징은 당태종이 다스리는 도에 대해 찾자 잘한 것과 잘못한 것에 대해 이야기했고 봉덕이가 16살의 장정을 살펴보아 군사로 쓰는 것을 상주하면서 당태종이 이를 쫓으려다가 간의대부를 지내던 위징은 반대하면서 칙령에 서명하지 않게 했다.
627년에는 영남의 추장, 담전 등이 조정에 들어오지 않은 일에 대해 군사를 동원하려는 것을 반대했으며, 믿을만한 신하를 파견해 정성을 보여주면 이들을 복종시킬 것이라 했고 우승을 지내던 위징은 비단 500필을 하사받았다. 위징은 여러 차례로 당태종에게 간언해서 그 간언한 내용이 기록으로 많이 남을 정도이며, 이에 대한 일화로는 당태종이 좋은 새 한 마리를 얻어 어깨에 올려놓고 멀리서 위징을 보자 품 속에 감췄다가 위징이 사건을 상주하는 것이 길어져 그치지 않자 새는 끝내 품속에서 죽은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다른 판본에는 위징이 품 속에 새를 감춘 것을 눈치채고 일부러 상주를 길게 했고, 이로 인해 새가 죽자 태종이 화를 낸 것을 장손황후가 조복을 갖추어 절을 하면서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라고 하는 얘기가 전해온다.
628년에 방현령과 함께 신례 138편을 제정해 올렸고 629년에는 상서우승에서 수비서감으로 임명되었으며, 당태종은 위징이 자신을 욕한다고 해서 화내는 일이 많았지만 장손황후가 조복을 갖추어 절을 하면서 군주가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했다. 636년에 눈병이 나서 산관이 되기를 청구했다가 특진에 임명되었고 642년에 위징이 병에 걸리자 위징의 집에 마루가 없는 것을 보고 당태종이 이를 짓게 하면서도 궤안, 지팡이 등을 하사했다.

2.1. 죽음


위징은 태자태사에 임명되었고 병이 조금 나아지자 이를 사양했지만 당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643년 정월 17일에 사망했다. 그가 죽자 당태종이 백관 중에서 9품 이상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게 했고 새의 깃털로 장식한 의장, 의식용 악대 등을 제공하면서 소릉에 배장했는데, 그의 처인 배씨가 위징이 평생 검소하게 산 것을 이야기해 일품의 우보를 갖춘 의식을 치르는 것은 죽은 사람의 뜻이 아니라고 하면서 모두 받지 않고 포를 친 수레에 영주를 싣고 가서 장례를 치렀다.
위징은 평소에 당 태종의 행실 하나하나까지 지적하며 간언하기를 서슴지 않았기에 그로 인한 태종의 스트레스는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굴면 누구라도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가 없기는 하지만... 이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위징의 사후에 있었던 사건이었다. 당 태종은 위징이 죽은 후에 상소문을 미리 사관 저수량에게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태종은 그동안 위징이 역사에 명성을 남기기 위해 자신에게 간언을 하며 자신을 괴롭힌 것이라 생각하고는 큰 배신감을 느끼고 격노하였다.
때문에 당 태종은 위징의 장남인 위숙옥에게 자신의 딸인 형산공주를 시집보내겠다는 약속을 파기했을 뿐 아니라, 위징이 죽은 후에 그를 위해 세운 묘비를 쓰러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 태종은 후에 위징의 충고를 어기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안시성 전투에서 참패를 맛보고 씁쓸히 후퇴할 적에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원정을 말렸을 텐데..."라며 후회하였고, 결국 위징의 묘비를 다시 세워주었다.
이 때문에 위징이 당시 당나라의 부병제와 기미지배 체제의 치명적인 단점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제 아무리 동아시아 세계의 최강국으로 고구려지역강국이라도 중국에 미칠 수 없었다지만, 당이라도 고구려를 상대로는 결코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낼 수 없었으며[1] 이는 곧 '전쟁이 장기화될수록 자영농인 부병들의 경제적 기반이 몰락하게 된다.' 는 부병제의 단점과 연결된다.
또한, 혹시라도 당이 고구려 정벌 과정에서 주춤하게 되거나 혹여 패전이라도 하게 되면 강력한 군사력 과시를 통해 유지되던 기미주들에 대한 영향력이 감소하게 되고, 이는 곧 기미지배 체제의 붕괴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고 이는 고구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당군의 진격이 주춤하게 되고 끝내 안시성 전투에서 패전하게 되면서 현실로 나타났다.
결국 당은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고도 멸망 직전의 고구려를 끝내 온전한 자력만으로는 멸망시키지 못했으며, 연개소문의 아들들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부 분열로 인해 배신자가 등장하게 되고 나서야 고구려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2] 그리고 당나라라고 해도 결코 소요가 없던 것은 아니라 측천무후가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3]
당태종은 위징이 죽었을 때 통곡을 하면서 “나는 내가 가진 세 개의 거울 중 한개를 잃어버렸다, 세 개의 거울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의관을 보는 거울, 둘째는 패망한 역사를 보며 배우는 정치 거울, 셋째는 그릇됨을 비추는 거울 ‘위징’이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3. 기타


일본 쪽 기록에 따르면 신라김유신, 백제성충, 고구려연개소문과 더불어 당대의 준걸로 명성이 높았다고 전해진다. 또 이는 아스카 시대 일본이 중국, 한반도, 만주와 자주 교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날 조선시대신숙주가 이 사람에 비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조가 "한명회는 나의 장량이요, 신숙주는 나의 위징이다"라고 말했으며, 말년의 신숙주가 영의정에서 물러나려 하자 정희왕후가 "세조대왕께서 경을 위징에 비견하셨거늘 어찌 이리 나오시오?"라고 만류했다는 기록이 실록에 있다. 당태종에게 강직한 간언을 서슴지 않았던 위징과 세조에게 예스맨스러운 처신으로 일관한 신숙주는 인물상이 사뭇 다르지만, 위징이 당태종 치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신숙주 역시 세조 치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이렇게 비견된 것.
한편으로는 자기 신하들을 이렇게 띄우면 세조 스스로가 당태종 같은 군주가 된다는 자뻑스러운 목적도 있을 수도 있겠다. 실제로 세조는 자기 신하들을 이렇게 중국의 옛 신하들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당태종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능력은 훨씬 아래고, 패륜성은 몇 술은 더 뜨는 놈이었지만. 당태종은 능력이 좋으면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일지라도 살려줬지만 세조 치하에서 '''세종대왕 때의 브레인'''들은 거의 다 죽어나가서 정인지, 신숙주 등 몇몇만 살아남았다. 자세한것은 세조 항목을 참고하자.
섬기는 군주의 반대 쪽 세력에서 활약했으며 국가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관중과 비슷한 면이 많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고전소설 서유기에서는 전생에 천신이었던지라 하늘의 부름을 받아 천명을 어긴 용왕의 목을 친다. 문제는 당태종은 이미 용왕에게 위징이 목을 치지 하게 않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용왕의 혼은 당태종이 약속을 어겼다고 저승의 시왕에게 고소하고, 당태종은 저승으로 갔다가 다시 살아나 불법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수당시대를 다룬 SBS 사극 연개소문에서 등장하며 극중배우는 맹호림이다. 본래 이건성의 책사였다가 현무문의 변 이후 역사대로 당태종의 재사가 되었고 충신보다는 스스로 어진 신하인 양신이기를 바라며 죽기직전 까지 직언하며 당나라 명재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중에서 이세민의 스승이었다. 이후 75화에서 사망하는데, 당 태종은 그의 안부를 무르면서 장손무기, 방현령등을 데리고 위징의 집으로 향했다. 위징은 당태종이 오기전에 부인에게 장례를 검소하게 치루어 달라는 부탁과 재산을 모두 백성들에게 나눠주라고 말했다. 당태종이 도착한 이후 위징이 당 태종에게 마지막으로 남긴말은 백성들을 두려워 하라며 태자 이승건의 문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가지 말것을 당부했다. 이 2개의 말 중 당 태종은 어느것도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했고 결국 고구려로 가기전에 태자의 모반 사건이 터졌고 고구려로 간 이후에는 연개소문과의 생사를 놓고 벌인 기싸움과 전쟁에 패해 모든것을 잃었다. 그리고 이때 장손무기는 위징이 남긴말을 회상하며 후회했다. 위징은 고구려를 정확히 꿰둟고 있었고 단기적인 전쟁은 수나라의 전처를 밟는 일이었다. 오직 장기적인 대전쟁 만이 고구려를 뚫을수 있었다.
중국 시대극 무미랑전기에서는 이건성이 살해된 후 삶의 추동력을 상실했으나 당태종이 기용한 후 '죽기 위해' 말을 서슴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태종은 그를 죽이기는커녕, 진노할지언정 늘 그의 말을 따랐다고 한다. 그러던 중 태종의 명에 의해 태자의 스승이 된 위징은, 정치적 입지가 갈수록 축소되는 태자를 보고 불현듯 과거의 이건성을 떠올린다. 주군을 지키지 못한 지난날의 후회를 되풀이하지 않고자 그는 태자가 황위에 오를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돕지만, 건강이 점차 악화된다. 태자 역시 궁중암투에 휘말려 태종의 불신을 사게 되고, 절망한 태자는 황제가 될 방법은 역모뿐이라며 사병을 준비한다. 이를 알게 된 위징은 자기가 죽기 직전 폐하의 의중을 떠보겠다며 태종의 뜻이 태자를 황위에 올리는 것이라면 자기 관에 흰 천이, 폐위가 뜻이라면 검은 천이 올라가리라고 태자에게 전한다. 마침내 그는 태종이 태자를 즉위시킬 것임을 죽기 직전 알아내고 숨을 거둔다. 그러나 전달 과정에서 무미랑을 시기해 위왕과 손을 잡았던 서혜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깃발의 색을 반대로 적어 보낸다. 결과적으로 태자는 결국 변조된 편지만을 믿고는 자신의 폐위가 태종의 뜻이라고 판단해 좌절하다가 후군집의 군세를 빌어 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결국 실패하고 유배를 떠나게 된다.

5. 둘러보기




[1] 당나라고구려를 멸망시킬 당시의 전쟁은 신라의 도움으로 겨울을 보내는 등 명백한 장기전이었다.[2] 고구려 부흥운동과 나당전쟁에서 약점을 노출한 당나라는 토번의 지속적인 침략으로 부병제가 붕괴되고 만다.[3] 측천무후 시기에 기미지배마저 붕괴된다. 대표적으로 돌궐 제2제국의 등장과 고구려의 계승국 발해의 독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