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강 전투

 

'''백강 전투
白江 戰鬪'''

'''시기'''
663년 음력 9월 8일
'''장소'''

백마강(금강 하류) 또는 동진강 하류 부근
'''원인'''
부여풍의 백제 부흥 운동
'''교전국'''
백제·왜국
당·신라
'''지휘관'''
'''백제 부흥군'''
'''당군'''
<^|1>'''부여풍'''
'''유인궤'''
두상
'''부여융'''
'''왜 지원군'''
'''신라군'''
아즈미노 히라부노무라지
(阿曇 比邏夫連)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
(狹井連 檳榔)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
(朴市秦造 田來津)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1]
(上毛野君 稚子)
하시히토노무라지 오후타
(間人連 大蓋)
코세노카무사키노오미 오사[2]
(巨勢神前臣 譯語)
미와노키미 네마로
(三輪君 根麻呂)
아베노히케타노오미 히라부[3]
(阿倍引田臣 比邏夫)
오야케노오미 카마츠카
(大宅臣 鎌柄)
이오하라노키미 오미
(廬原君 臣)
<^|1>'''김유신'''
김인문
천존
죽지랑
'''병력'''
'''백제 부흥군'''
'''신라군'''
병력 규모 불명
병력 규모 불명
'''왜 지원군'''
'''당군'''
2만 7천 - 4만 2천 명(?)[4]
병선 1천여 척(?)
1만 7천 명(?)
'''피해'''
'''백제 부흥군'''
'''신라군'''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왜 지원군'''
'''당군'''
1만여 명 전사
병선 400척 손실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나당연합군의 승리
'''영향'''
백제부흥운동 괴멸
[image]
1. 개요
2. 명칭
3. 배경
3.2. 상륙한 왜군, 신라를 위협하다
3.3. 모든 것이 주류성으로
4. 양측의 병력
5. 전개
5.1. 신라 정예기병의 기습
5.2. 피비린내로 가득한 백강
6. 결과
7. 평가
8. 창작물에서
8.2. 기타 작품
9. 기타
10. 전투 관련 기록
11.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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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강 전투'''(白江戰鬪)는 서기 663년에 백강[5]에서 신라, 당나라의 연합군과 백제 부흥군, 왜국의 연합군이 맞서 싸운 전투다. 이 전투는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일본의 정규군이 충돌하여 전쟁을 벌인 전투'''이기도 하며 후술되어 있듯이 왜의 중앙집권화가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이 승리하면서, 3년 전 의자왕이 항복한 후 백제부흥운동의 잔존 세력들은 사실상 완전히 소멸되었고 부흥운동은 후백제의 발흥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잠들게 된다. 이 전투에 참전한 왜국 병력은 사이메이 덴노가 백제를 구하기 위해 파병한 병력이었다.

2. 명칭


한국에서는 백강 전투, 백촌강 전투, 백강구 전투가 혼용되고 있다.
일본에서는 고대 일본어 훈을 따라 하쿠스키강 전투(白村江の戦い)[6]라고 하였으나 최근에는 그냥 현대의 발음인 하쿠손강 전투라고도 부른다. 어느 쪽이든 한자는 같다.
중국에서는 백강구 전투(白江口戰鬪)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3. 배경



3.1. 백제부흥운동나당연합군의 소탕작전


660년사비성이 점령 당하고 의자왕부여융이 수모를 당한 뒤 당나라로 끌려가면서 백제가 멸망한다. 그 후, 백제 남부에서 귀실복신, 승려 도침 등의 부흥군이 일어나 왜국에 있었던 왕자 부여풍을 데려와 왕으로 세워 백제 부흥 운동을 진행하게 된다. 또한 일본 정부는 백제부흥군에게 물자를 지원해주며[7] 연합작전을 진행한다.
이때 웅진성이 함락될뻔하고 오히려 1천여명의 당군이 백제부흥군에게 개박살나는 등 백제부흥군의 움직임은 매서웠다. 여기에 신라는 전염병이 돌아 병력 차출에 어려움을 겪었고 당나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주류성 공략에 나섰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가게 된다.
그러자 나당연합군은 백제영토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에 나선다. 신라의 중앙군은 거열성을 점령한 이후, 본대는 안덕으로 일부는 전라남도 남부지방에 위치한 요충지 4곳을 점령해 소각하는 등 지방 곳곳에서 발원한 백제 부흥군을 분쇄하기 시작했다.[8]

(662년)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에 백제가 달솔 금수(金受) 등을 보내 조(調)를 올렸다. '''신라인이 백제 남부의 사주(四州)를 불태우고, 아울러 안덕(安德)[9]

등의 요지를 빼앗았다. 피성(避城)[10]은 적에게 너무 가까워 거기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으므로, 도로 주유로 돌아갔다. 전래진(田來津)이 생각한 바와 같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2년, 백제가 금수를 보내옴 / 피성에서 주유성으로 다시 돌아감'''


(663년) 2월, 흠순천존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11]

을 쳐서 빼앗고, 7백여 명의 목을 베었다. 또 거물성(居勿城)과 사평성(沙平城)을 쳐서 항복시키고, 덕안성(德安城)을 쳐서 1천7십 명의 목을 베었다.

삼국사기 권6 문무왕 본기 백제 거열성을 빼앗다

또한 웅진성과 사비성에 주둔한 당나라군은 백제부흥군을 공격하는데, 유인궤, 유인원(당나라) 등이 진현성을 함락시킨다. 이들은 임존성을 임시 도읍지로 삼았지만 도침, 복신 등의 다툼으로 내분이 벌어졌고 부여풍은 도침을 죽였다. 이 기회를 틈타 유인궤는 신라와 연합해 백제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을 공격했고 백제 부흥군은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용삭 3년(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倭)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인문천존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삼국사기 권42 김유신 열전 2권 ##'''


3.2. 상륙한 왜군, 신라를 위협하다


왜국은 이 상황을 지켜보다 도움을 요청받자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이를 주도한 자는 사이메이 덴노와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로 사이메이 덴노가 후쿠오카에서 준비를 하는 도중 사망하자 나카노오오에 황태자는 즉위식을 미루고 병력부터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다.[12]
663년 3월에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上毛野君 稚子)를 비롯한 장수들과 27,000에 달하는 왜군이 한반도에 상륙하게 된다. 이때 왜군은 전(前), 중(中), 후(後)군으로 나뉘어 출병했는데 한꺼번에 상륙한 것이 아닌 전군이 먼저 상륙해 기반을 닦으면 이후 중군과 후군이 도착하는 방식이었다. 한편, 삼국사기나 중국 사서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일본서기에는 왜가 이누카미노키미(犬上君) 가문의 사람이 고구려에게 출병 사실을 전달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생각해보면 고구려-백제-왜간의 긴밀한 군사적 협의가 있었음을 추측해볼수 있다. 이들은 석성(石城)[13]에서 부여풍으로 추정되는 규해를 만나고 귀실복신(鬼室福信)과의 갈등을 듣게 된다.
그리고 3개월후인 662년 6월에 선발대였던 전군(前軍)에 의한 백제 지원 작전이 시작된다. 첫 시작은 사비(沙鼻)[14],기노강(岐奴江)[15]를 함락시키며 신라의 수도인 경주 근방에 도달하는데 성공[16]한다. 그리고 이 시기 사실상 실권자였던 귀실복신부여풍이 반란죄를 엮어 처형시켜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데 성공한다.
한편, 백제부흥운동 지도부의 갈등이 폭발해 귀실복신이 처형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는 곧바로 백제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침공하려 준비하게 되는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부여풍은 이미 이 소식을 들었으며 오히려 10,000명에 달하는 왜의 중군이 도착한다며 부하들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인다.

3.3. 모든 것이 주류성으로


[image][image]
신라는 중심부가 공격당했음에도 오히려 반격의 기회로 삼아 주류성 공격을 준비하자, 당고종도 직접 40만에 달하는 병력을 파견 준비한다.

663년 5월, 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

'''삼국사기 권27 문무왕 본기 3년'''

다만 이 기록은 호왈 40만일 가능성이 크며 실제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약 2만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신라는 김유신을 위시한 28명 혹은 30명에 달하는 장수들이 참가한, 사실상 신라의 모든 병력을 끌어 모아 출전했으며 8월 17일, 170척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온 당군과 합류해 한발 앞서 백강에 도착하여 유리한 지점을 선점하였다.

무술(17일)에 적장(賊將)이 주유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대당(大唐)의 장군이 전선(戰船) 170척을 이끌고, 백촌강(白村江;하쿠스키노에)에 진을 쳤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주유성이 포위되고 당의 군사들이 백촌강에 진을 침


8월 17일 신당군이 주류성을 포위하였으며 170여척의 당 수군은 백강구에 이르러 육군에 공급할 식량을 하역한 후, 진을 치고 바다로부터 주류성을 구원하려는 적병, 즉 왜병을 대비하고 있었다. 27일 왜 수군이 백강구에 도달하여 주류성에서 온 일부 왜군 및 부흥군과 합세하였다.

'''노태돈. 『삼국통일사연구』 中'''

한편 8월 13일, 부여풍이 기다리던 1,000척에 달하는 왜의 지원군이 도착해 백제부흥군과 합류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주류성 밖에서 포진, 나당연합군의 진격을 막고자 했다.
그리고 8월 17일, 나당연합군의 선봉대였던 신라 기병대가 왜선이 정박한 항구를 수호하던 백제의 정예 기병대를 향해 돌격하며 백강 전투가 시작된다.

4. 양측의 병력


이 전투에 참여한 병력에 대해서는 이상한 오해가 퍼져있는데 이 전투에 당군 13만, 신라군 5만이라는 대병력이 참전하였으며 백제는 겨우 5천, 왜국이 4만 2천 명이라는 비교적 적은 병력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 싸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력이 말이 안되는 것이 660년 사비성을 함락시킬 때 동원한 13만 대군은 의자왕을 붙잡은 뒤 얼마 안 있어 대부분 당으로 돌아갔다. 다시 백제에 대군을 파병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당시 고구려 정벌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던 당나라가 13만이라는 대병력을 또 다시 백제에 파병했으리라 보긴 어렵다.[17] 신라 역시 660년 황산벌 전투에서 5만 명을 동원했지만 663년 백강 전투에도 5만 명을 참가시켰다는 명시적 기록은 없다. 백제부흥군은 풍왕이 복신을 죽여 지도부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던 것이지, 주력 병력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실제 사료에서 확인되는 병력은 다음과 같다.
  • 신라: 불명.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 김인문을 비롯해 28명 혹은 30명에 달하는 신라의 장수들이 참여했다고 나오며, 김인문 열전에는 큰 전선 100여척을 이끌고 참가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감안하면 신라군 주력병력 1만 - 5만 명가량이 투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백제: 불명. 이쪽은 백제부흥군이 목숨을 걸었기에 마찬가지로 총 병력이 집결했을 가능성이 크다.
  • 당군: 소정방이 퇴각하면서 현지에 남긴 유인궤 휘하 육군 1만 명 + 유인궤의 지원요청으로 파견된 손인사 휘하 7천 명[18] & 병선 170척[19]
  • 왜국: 사이노무라지 아지마사와 에치노하타노미야츠코 타쿠츠의 5천 명(661년 9월) + 카미츠케노노키미 와카코의 2만 7천 명(663년 3월) + 이오하라노키미 오미의 수군 1만 명(663년 8월) & 병선 1천 척. 그러나 2만 7천에 달하는 전군(前軍)의 기록은 신라 본토 침공 이후 사라지기에 이들이 합류했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왜군의 숫자에 대해서는 웹상에서 이설이 많은데, 일본서기에 따르면 663년 3월에 와카코의 부대 2만 7천 명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됐고 8월에 다시 오미의 부대 1만 명을 부대를 백제에 파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측과 한국측 사료에 관련된 기록이 보이는 것은 8월 백강 전투뿐이다. 따라서 3월에 기록된 병력 2만 7천 명이 실제로는 8월에 출전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만약 2만 7천 명과 1만 명을 따로 파견했다면 3만 7천 명이고, 여기에 일본서기 661년 9월에 보낸 병력 5천 명을 포함한 것이 바로 최대 추정치 4만 2천 명설이 나온 근거인 듯하다. 해외 사이트에서는 대부분 백강 전투의 왜군을 4만 2천 명이라고 소개한다.
아무튼 실제 전투는 동원된 함선의 숫자로 보았을 때, 그 질이 어땠는가와 별개로 백제-왜국 연합군의 병력 숫자가 나당연합군의 병력 숫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물론 이 정도만 해도 임진왜란 이전까지 천 년 동안 깨지지 않을 최대 규모의 일본 정규군이 참여한 대규모 전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어떻게 보아도 백강 전투가 무려 23만 명이 참가한 대전이었다고 보는 것은 분명 무리가 있는 것이다.
참고로 나당연합군의 병력수를 잘 보자. 어디서 많이 보던 숫자 아닌가?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은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동원한 숫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면 백제군 5천의 비밀도 자연히 풀리는데 바로 계백 장군의 5천 결사대. 즉 660년 나당연합군의 병력규모가 663년 백강전투 병력으로 그대로 Ctrl+C, Ctrl+V 된 것이다.
어째서 이런 오해가 발생했는가 하면 660년 백제가 멸망당하기 직전 벌어진 마지막 전투는 사비성 전투인데, 연구자에 따라 '''사비성 전투를 '백강 전투' '''라고도 불러서이다. 사비성이 백강 근처에 있었기 때문.# 혹은 기벌포 전투라고 칭하는 연구자도 있는데, 이러면 나당전쟁 당시에 있었던 676년 기벌포 전투와 헷갈린다.
당연히 이 660년 백강 전투는 663년 백강 전투와 이름도 같고 시기도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데 인지도는 663년 백강 전투 쪽이 넘사벽이다. 660년 백제 최후의 전투는 사비성 전투로 불리건, 백강 전투로 불리건 간에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계백의 5천 결사대가 뚫리자 백제가 멸망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부지기수. 이런 상황에서 660년 백강 전투 병력표를 663년 백강 전투 병력으로 자연스럽게 오해하여 663년 백강 전투를 20만 명이 넘는 대병력이 한번에 맞부딪힌 화끈한 전투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전투에는 당, 신라, 백제, 왜국의 4개국이 동시 참여했으니 더욱 그렇게 볼 소지가 높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 참가한 병력은 위에서 밝힌대로이다. 백강 전투가 규모에 비해 저평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너무 과장되게 이해하지는 말자.

5. 전개



5.1. 신라 정예기병의 기습


8월 17일, 나당연합군의 선봉대였던 신라의 정예기병은 백강 인근에서 진을 치고 왜 선단을 호위하고 있던 백제의 정예기병을 향해 돌격했다. 이 전투에서 백제는 패배해 물러나게 되었고 상륙을 준비하던 왜 선단 또한 모두 후퇴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백제 부흥군에게는 뼈아픈 패배였는데 주력군으로 활용될수 있던 왜군이 상륙조차 하지 못하고 후퇴했다는 점, 그리고 왜의 합류를 지연시킨 나당연합군이 왜군을 신경쓰지 않고 주류성을 공격할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줬다는 점이다.

5.2. 피비린내로 가득한 백강


8월 27일, 퇴각했던 왜군이 백강 하구에 다시금 출현한다. 왜군의 선발대가 당군을 상대로 도발을 하자, 이에 당군이 왜군을 향해 돌격하게 되고 왜군 선발대는 크게 패배하고 만다.
8월 28일, 일본군과 부여풍은 다시 나당연합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한다. 아마 나당연합군의 포위를 풀기 위해선 어떻게든 왜의 병력이 이들을 유인해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듯 한데 문제는 조급함을 다스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 포위가 길어질수록 주류성은 버티기 힘든 상황에 이르게 될테기에 반드시 해야할 작전이었지만 기상을 염두해두지 않고 어떻게든 공격만을 생각한 것이다.

8월 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왕이 기상을 살피지 않고, “우리가 선수를 친다면 저쪽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대오가 흔들린 일본 중군(中軍)의 병졸을 이끌고 다시 나아가 진열을 굳건히 하고 있는 대당의 군사를 공격하였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거기다 문제는 전, 중, 후군 중 중군만이 나가 싸웠다는 점이다. 전 병력을 동원해도 모자랄 판에 부여풍을 비롯한 지휘부가 중군만을 이끌고 나섰다는 것은 지휘부 간의 갈등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이들은 견고하게 진이 쳐져있는 당군의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이는 전력을 다해도 승리 여부를 점칠 수 없던 전투에서 조급함, 갈등, 악화된 기상 등이 여러 겹치며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장을 스스로 만들어 버린 셈이 되었다.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서 왜 수군 10,000명은 진을 짜고 기다리고 있던 당군을 향해 돌격했다. 당군은 이때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왜 수군의 양측을 포위한 후 그들을 둘러싼 진형을 구축했다. 총 4차례의 전투가 진행된 백강에서의 전투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일방적인 학살극으로 바뀌게 된다. 유인궤의 당수군은 수천 척[20]의 왜 선단을 포위하고 불화살을 쏘며 맹렬하게 공격했고 이에 당황한 왜 선단은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했으나 "뱃머리와 고물을 돌릴 수가 없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볼 수 있듯이 촘촘한 포위망을 푸는 데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왜군은 뜨거운 불길과 당군의 돌격에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만다.

인궤가 왜병을 백강 하구에서 만나 네 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천 척을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적의 무리는 크게 무너졌다.

'''신당서'''

부여풍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하고, 주류성을 버리고 고구려로 도주하고 만다.[21] 그리고 9월 8일[22], 주류성을 지키던 백제 부흥군은 더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항복하고 만다. 이로써 백제의 이름은 (적어도 후백제가 부흥할 때까진) 역사에서 끊기게 되었다.

9월 신해삭 정사(7일)에 백제의 주유성(州柔城)이 마침내 당에 항복하였다. 이때 국인(國人)들이 “주유가 항복하였다. 사태가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어졌다. 이제 조상의 분묘가 있는 곳을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테례성(弖禮城;테레사시)에 가서 일본 장군들과 만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먼저 침복기성(枕服岐城;시무부쿠기사시)에가 있던 처와 아이들에게 나라를 떠나가려 한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권27 덴지 덴노''' ##. 이 기사를 끝으로 백제부흥운동과 관련된 기록은 일본서기에서 사라진다.


6. 결과


이 전투로 인해 부여풍이 이끄는 백제부흥군 세력은 멸망하고 살아남은 부여풍은 고구려로, 그 외 부흥군의 지도자들은 왜국으로 망명했다. 즉, 백제부흥운동의 끝을 알린 전투 중 하나이며, 당시 백제와 왜국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후 두 달 가량 버틴 임존성마저도 함락당하고 지수신 역시 고구려로 도주하면서 독자적인 백제부흥운동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친당계열의 백제부흥운동으로 당의 기미국이라 할 수 있는 웅진도독부가 있었으나 당나라의 제어를 받는 형태라 온전한 부흥운동이라 하기도 어려웠고 이 역시 약 10년 후 나당전쟁으로 광탈했다.
한편, '더 이상 조상무덤을 보러 못 가는구나.' 하고 한탄했다는 문구를 두고 대중역사학계에선 당연히 의문을 품었고 왜인이 백제를 조상이라 여겼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이 대목은 당연히 백제를 떠나 왜국으로 망명하는 백제인들이 말한 것이다. 한탄 직후 바로 다음 문구가 일본의 제장들과 상의해보자는 구절이다.
이 전투 이후로 신라와 왜국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정반대로 일본서기 기록상 신라와 왜국은 서로 사신을 주고받는 횟수가 이전보다 크게 늘어난다. 백강 전투 이후 신라 사신 김동엄이 왜국에 파견된 후 곧 신라와 왜국 사이 국교가 재개되어, 8세기까지 외교교섭의 빈도수는 백제 때만큼 끈끈하지는 않았지만 후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잦고 활발했다. 이는 왜국과 신라의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왜국 측은 백제 저항세력 수뇌부가 백강 전투로 완전히 무너졌으니 더 이상 백제를 도와줘봐야 백제 부흥의 가능성이 없는데다가, 백제 저항세력에 이어 고구려까지 제거한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동맹의 한 축이던 왜국에도 쳐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래서 규슈 지역 해안에 방어성을 쌓는 등, 혹여나 나당연합군이 왜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대비했다. 결국 실행되진 않았지만 답설인귀서에 의하면 당이 왜를 공격한단 명분으로 함선을 수리했던 일도 있어 일본 측의 설레발만도 아니었다.
신라 측 역시 이 전투 전후로 백제 잔여세력과 왜군을 정리한 직후 고구려, 그리고 결국 당나라와도 동맹을 깨고 싸우게 될 것을 차츰 확신할 여러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23] 그 전에 후방의 일본 방면으로부터의 위협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국제사회에선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리고 이런 신라와 일본의 우호관계는 나당전쟁을 거쳐, 8세기에 신라와 당이 다시 화친할 때까지 계속된다.

7. 평가


따지고 보면 삼국시대일본에서 수만의 군세가 대한해협을 건너올 정도로 거대했던 대규모 국제전이였지만, 단판승격으로 허무하게 끝난데다가 당시 흐름이었던 나당 연합의 선전이라는 큰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기에 막상 대중적 인지도는 상당히 안습한 편이다. 국내 교과서에서도 짧게 언급하고 넘어가는 수준이고[24] 일본 교과서는 일본 정규군이 중국 정규군과 처음 격돌한 전쟁이기 때문인지 그나마 조금 더 길게 서술하고 있다.[25]

사실 백촌강 전투는 신라나 당의 입장에서는 수많은 전투 중에 하나에 불과하였으나, 왜의 입장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가장 큰 규모의 병력(2만 7천)을 해외에 동원한 전투였고, 그런 만큼 일본열도 사회에 미친 영향도 크고 깊었다.8) 백촌강에서 왜가 唐에 패배했지만 그 후 중앙집권적 율령국가를 만들었다는 것이 일본학계의 주요 논점이었다.

8) 이근우 「백촌강전투와 대마도」 『동북아문화연구』 , 34, 2013, 47쪽.

'''서영교 교수. 白江戰鬪와 新羅 中'''

그리고 백강 전투의 패배로 인해 백제 부흥군이 몰락하면서, 고구려의 멸망이 가시화된다. 더 이상 남쪽에서 신라를 견제할 세력이 사라져버렸기 때문. 이로 인해 고구려는 남쪽의 신라와 서쪽의 당나라라는 본격적인 양면전선을 강요당하게 되고, 백강 전투 5년 후인 668년 멸망한다.[26]

8. 창작물에서


미디어에서는 삼국통일전쟁을 다루는 매체에서도 고구려부흥운동은 발해 건국이라는 성과를 이뤘기 때문에 꽤 다뤄지는 반면, 백제부흥운동 부분은 결국 실패로 끝났기 때문인지 별로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 아니라서 대충 표현하고 바로 고구려 말기 쪽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안습.

8.1. 대왕의 꿈


드라마 최후반부인 68화에서 등장. 한국 사극 사상 유례없는 고대의 수상전을 묘사하였으며, 이제껏 사극 속 수상전에서 흔치 않았던 충각 전술과 갈고리 전술, 투석기 활용, 수상 화공 등 시청자들의 갈증을 풀어줄 실감나는 수상 전투 장면들과 동시에 병행된 백병전까지 이 드라마에서 가장 볼만한 전투였다는 평까지 나올 정도였다. 반면 배 2척을 세워놓은 것이 티가 날 정도로 빈약하며, CG의 규모도 작아서 1천여 척에 이르는 일본군의 함대 규모를 살리지 못했다는 평도 있다. 사실 한국 사극에서 초반은 그럴듯하다 후반부가 부실해지는 건 워낙 고질적인 병폐라 드라마 막판에 이 정도로 묘사한 것도 이례적이다.
왜 조정에서 백제를 돕기 위해 전선 1천 척, 군사 2만 7천 명을 파견했다고 하며, 당군은 손인사가 이끄는 170척으로 웅진도독부로 향한다. 백제 부흥군에서는 부여풍은 부여충승에게 당군의 배보다 군량미와 병장기를 실은 일본군의 배가 먼저 도착할 것이니 일본군의 배를 맞이하라고 하는데, 충숭은 당군이 덕물도에 당도했고 신라도 사비에 군사를 파견했음을 이야기하며 대비해야 한다고 하지만 부여풍은 이를 가볍게 여긴다.

나당연합군에서는 김유신은 부여풍이 일본군과 합세한 후에 사비성으로 진격할 것이고 그 전에 주류성을 함락해야 한다고 했다. 당의 유인원은 일본군이 어디로 들어올지 모른다면서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해 사비를 비운다면 오히려 허를 찌를 수 없다고 우려를 표한다. 김유신은 기벌포로 들어와 백강 하류에 상륙해 일본군과 합세할 것이며, 저들은 먼 뱃길로 지쳤을 것이니, 상륙하기 전에 수전으로 공격하고 철기병을 앞세워 부여풍의 군사들을 공격하면서 저들을 궤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 와중에 군량미를 실은 일본군의 선발대가 백강 하구로 상륙해 백제 부흥군에게 병장기, 군량미 등을 보급하며, 부여풍은 충숭에게 일본군의 본대와 합류해 그들을 지휘해 백강 하구로 상륙할 것을 지시하면서 부여풍 자신은 일본군의 군사를 맞이했다가 사비를 공격하기로 하면서 군대를 둘로 나눈다. 부여충승은 일본군의 본대와 합류하기 위해 백강을 건너려 했지만 후방에서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의 배가 나타나 화살을 쏘자 부여충승이 이끄는 일본군은 승산이 없다고 여겨 퇴각하기로 하며, 당군은 추격해 화살을 날리지만 일본군의 배의 속도가 매우 빨라 별다른 피해도 주지 못한다.

문무왕이 군율을 세우기 위해 나당연합군의 지휘권을 김유신에게 맡기기로 하고 당군들에게도 김유신을 따라야 한다고 하자 당군도 응했으며, 다음날 김유신은 회의를 소집해 주류성에서 나오는 부여풍이 기벌포로 나온 일본군의 함대와 백강 하류에 합세할 것이니, 문무왕, 손인사 등에게 이들을 격퇴시키라고 한다. 유인원에게는 신라 수군과 합세해 전선들이 상륙하는 것을 막고 강 위에서 괴멸시켜야 한다고 했으며, 유인원은 자신들의 배는 170척뿐이니 적선 1천 척을 저지할 수 있겠냐고 우려한다. 김유신은 병력이나 배가 많지만 물때와 바람이 낯설다는 점을 이용해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며, 김예원, 김양도, 김삼광에는 유인원의 배에 승선하게 하고 유인궤에게는 사비성을 지키게 한다.

유인원이 이끄는 당군의 배는 백강으로 진격하는 부여충승, 나카토미노 가마타리가 이끄는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백강 하구의 육지에서 문무왕과 부여풍이 싸우는 것을 본 김유신이 당군의 배에 진격할 것을 지시하며, 이를 들은 당군의 배가 일본군의 배로 진격하자 서로 화살을 쏘면서 전투를 벌인다. 당군의 배가 일본군의 배를 그대로 들이받는데, 김유신은 일본군의 배는 날렵하고 빠르지만 선체가 작고 목재가 물러 당군의 배가 부딪히면 좌초될 것이라 한다.

또한 일본군의 배 1천 척이 백강으로 들어오면 배를 돌리기가 어려워 당파 전술로 일본군의 배를 공격하면서 육지로 들어가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것이라 했으며, 당파 전술을 통해 일본군의 배를 좌초시키고 일본군의 배로 진입해 난전을 벌인다. 물때와 바람이 바뀌는 시각이 되자 짚더미, 기름항아리를 투척하며, 당군에서 일본군의 배에서 퇴각할 것을 명령하고 일본군의 배에서 모두 물러나자 불화살을 날려 일본군의 배를 모두 태운다.

부여충승은 싸우던 도중에 예원의 화살에 맞아 전사하며, 화공으로 큰 피해를 입는 도중에 육지에서도 부여풍이 패해 물러나자 일본군은 육지에서 신라군이 날린 포차의 공격을 받으며, 일본군은 백 400여 척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8.2. 기타 작품


  • 1988년쯤에 소년중앙에서 연재한 한국만화(작가 한재규)에서는 일본인 악역 빠가사리(...)가 한국으로 와서 백마강을 둘러보며 663년 왜군 2만여 명이 고기밥이 되었다는 걸 회상하며 울부짖으며 선조들은 여기서 물고기로 환생했을지도 모른다고 슬퍼하는 대목이 나왔다.[27]
  • 김산호의 대쥬신제국사에서도 언급이 되는데, 환빠 아니랄까봐 야뫼도(야마토를 이렇게 부른다...) 조정에서 보낸 군사들이 전멸했다는 대목을 넣었다.
  • 일본의 보드 게임 잡지인 게임저널의 제15호에서 부록으로 백강 전투를 소재로 다룬 전략급 백촌강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보드 게임이 있다.
  • 명탐정 코난의 TV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에피소드인 모모타로 의문 해결 투어(TVA 377~378화) 편에서도 언급된다. 현재 오카야마현 일대에 남아있는 7세기경의 산성을 근거로 이 전투가 모모타로 설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학설을 코난의 내레이션으로 초반부에 소개한다. 다만 한국판에서는 왜색 문제 때문에 방영되지 않았다.
  •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 발매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의 야마토 캠페인에서 이 전투가 하쿠수키노에(白村江) 전투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여기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을 채용하여 고대 일본의 야마토가 한반도의 남부를 점령하고 당나라 군의 공격까지 격퇴한 것으로 왜곡되어 표현되었다. 당연히 한국인들은 반발했고,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마이크로소프트사는 이를 인식하고 이 캠페인을 수정하여 전장을 큐슈로 옮겼다.

9. 기타


  • 금강 유역을 공유하는 충청남도 일대 지역에선 종래부터 금강백마강이라 불러 왔다. 일종의 지역 방언. 더불어 전하는 설화는 소정방백제를 공격할 적에 강에 사는 때문에 애를 먹자 백마(白馬)를 미끼로 낚시해 물살을 평온케 했다는데(...) 해당 항목인 백강(백촌강)의 지명이 당대에 이미 실존했던 것으로 비정한다면, 소정방과 관련된 상기의 구전 설화는 훨씬 후대에 백제 외지의 사람들이[28] 백강이라는 이름을 보고 창작, 가미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알쓸신잡 시즌 2때도 백마강 일대를 둘러보던 유시민이 소정방 일화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안내문구를 보고 안타까움을 표한 바 있다.

10. 전투 관련 기록


용삭 3년(서기 663)에 이르러 총관 손인사(孫仁師)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부성을 구원할 때, 신라의 병마도 역시 정벌에 참여하였다. 행군이 주류성 아래에 이르렀을 때 왜국의 수군이 와서 백제를 도우려 하였다. 왜선 일천 척이 백강(白江)에 머물러 있었고, 백제의 정예 기병들이 강가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중국 군대의 선봉이 되어 먼저 강 언덕의 진지를 쳐부수니, 주류성은 대적할 용기를 잃고 곧바로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7 문무왕 본기##'''


용삭 3년(서기 663) 계해에 백제의 여러 성에서 비밀리에 부흥을 도모하였다. 그 두목은 두솔성(豆率城)에 웅거하면서 왜(倭)에게 군사를 요청하여 지원을 삼으려고 하였다. 대왕이 직접 유신ㆍ인문ㆍ천존ㆍ죽지 등 장군들을 거느리고 7월 17일에 토벌 길에 올랐다. 그들은 웅진주(熊津州)에 가서 진수관(鎭守官) 유인원의 군사와 합세하여 8월 13일 두솔성에 이르렀다. 백제인들은 왜인과 함께 나와 진을 쳤는데 우리 군사들이 힘껏 싸워 크게 깨뜨리니 그들이 모두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42 김유신 열전##'''


웅진구(熊津口, 금강 입구)에 이르니 백제군이 강가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싸워 격파하고, 승세를 몰아 백제의 도성에 들어가 멸망시켰다.

'''삼국사기 권44 김인문 열전##'''


인궤가 왜병을 백강 하구에서 만나 네 번 싸워 이기고 그 배 4천 척을 불태웠다.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적의 무리는 크게 무너졌다. 풍장은 겨우 탈출하여 도망갔다. 그 보검(寶劍)을 빼앗았다. 위왕자(僞王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남녀와 왜인, 탐라국 사신을 거느리고 함께 항복하였다. 백제의 모든 성들이 모두 귀순하였다

구당서》 권 제199 열전 제149 동이


8월 무술일: 적의 장수가 주유[29]

에 이르러 그 왕성을 에워쌌다. 당의 장수가 전선 170척을 거느리고 백촌강에 늘어섰다.

8월 무신일: 일본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당의 수군과 만나 싸웠는데, 일본이 불리하여 물러났다. 당은 굳게 진을 치고 지켰다.

8월 기유일: 일본의 장수들이 백제왕(百濟王)과 더불어 날씨를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들이 선두를 다투어 싸운다면 그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라 하였다. 다시 일본의 어지러운 대오(隊伍)와 중군(中軍)의 군졸들을 이끌고 나아가 굳게 진 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쳤다. 당(의 선박들)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에 (일본의) 관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이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 타쿠츠(朴市 田來津)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고 수십 인을 죽이고 전사했다. 이 때 백제왕 풍장이 여러 사람과 배를 타고 고려로 도망했다.

9월 신해 초하루 정사: 백제의 주유성이 비로소 당에 항복했다. 이 때 나라 사람들(백제인들)이 서로 "주유가 항복하였으니, 일이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에 끊어지게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에 어떻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대례성(弖禮城)에 가서 일본군의 장수들과 만나 서로 현 상황에서 필요한 것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라고 침복기성(枕服岐城)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을 알렸다.

일본서기》 권 제27 덴지 덴노(天智 天皇)


11. 관련 항목



[1] 전장군(前將軍)[2] 중장군(中將軍)[3] 후장군(後將軍)[4] 왜군 4만 2천 명설은 661년 백제에 파견된 왜군 5천 명+일본서기 663년 3월 기사의 2만 7천 명+8월 기사의 1만 을 별개 병력으로 본 것이다.[5] 금강으로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으나 근래에는 동진강 설도 상당하다. 한편, 아산만 근처로 비정하는 학자도 있다.[6] 고대 일본어로 '하쿠스키노에(白村江) 전투'라고 표기되어 있다.[7] 일본서기 덴지 덴노 원년##.[8] 노중국 교수는은 이때 신라군의 본대가 현재의 거창군-함양군-남원시를 거쳐 주류성으로 진격한 것으로 추정했다.[9] 현재 위치는 불명이나 백제 5방 중 한곳인 덕안(德安)의 오기로 보고 충청남도 논산시 은진면으로 추정.[10] 전라남도 김제시.[11]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12] 백제가 망하면 나당연합군이 이번엔 왜국으로 쳐들어 올 거라는 소문이 돌았고, 이에 따라 당군을 막기 위해 일본 최초의 성이 건설되기도 하는 등 본토에서도 대비를 했다.[13]부여군 석성면으로 추정하나 홍성군 장곡면으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있다.[14]경상남도 김해시로 추정.[15]경상남도 의령군으로 추정.[16] 왜군이 어째서 백제 주류성으로 합류하지 않고 신라쪽으로 침공했는지는 여러 의견이 나뉜다. 3개월간 단 2개의 성밖에 취하지 못한 것이기에 왜군의 능력이 생각보다 형편없었다는 평이 있는가 하면, 노태돈처럼 오히려 옛 백제지역의 소탕작전에 집중하고 있어 방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했던 신라 중심지를 공격해 시간을 벌 작전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17] 그리고 백제 멸망 이듬해 평양성 근처에서 고구려에게 야전군단 하나가 지휘관까지 포함해서 통채로 전멸해 버리는 바람에 당나라는 대병력을 파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유명한 사수전투.[18] 자치통감.[19] 한편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는 40만의 수군이 웅진부성에 도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詔遣右威衛將軍孫仁師率兵四十萬 至德物島 就熊津府城.(당 황제가 조칙을 내려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에게 병사 40만을 거느리고 출병하게 하였다. 그는 덕물도(德物島)에 이르렀다가 웅진부성으로 진군하였다.)[20] 자치통감에는 총 4,000여 척을 태웠다고 기록되어 있다.[21]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로 도주했다는 카더라가 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에서는 고구려로 도주했다가 고구려 멸망 때 잡혀가 끌려갔다고 나온다. 이로 인해 중국에 남게 된 부여풍의 후손인 여선재가 고려 때 귀국해 의령 여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22] 일본서기에는 9월 7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3] 김문영 참수 소동, 웅진도독부 설치, 웅령 회맹, 취리산 회맹 등.[24] 동아시아사 과목에서는 나름 비중있게 언급된다.[25] 이후 중일은 원나라의 일본 원정, 임진왜란청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등에서 싸움이 이어진다. [26] 다만 고구려는 양면전선보다도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의 당나라 투항이 더 치명적이었다. 물론 연남생이 이렇게 적국에 투항하게 된 데에는 형제 분란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고구려가 처해있던 양면전선도 그 원인 중 하나였을 수는 있다.[27] 훗날 한재규는 환단고기를 접한 후 환빠로 흑화해 관련 만화를 그렸다.[28] 당에 의해 설치된 웅진도독부통일신라 이후.[29] 백제 부흥군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