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의사.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진동은 1908년 6월 10일 평안남도 강서군 함종면 안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일병합 후 가족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고, 1920년대 중순에 상하이로 가서 동제대학(同濟大學) 의과 대학에 입학해 의학을 공부했고, 1928년 4월 안병무(安炳武), 김기승(金基升), 구익균 등 10여명과 함께 한인 학우회를 조직했다. 한인학우회는 학문의 연구증진과 과학지식 습득을 목표로 삼았지만,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고무되어 1930년부터 항일 투쟁단체로 전환되었다. 유진동은 이 단체에서 서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요인을 후원했으며, 1931년에는 학우회 대표로 상하이에서 개최된 한인각단체대표회의에 참석해 중국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 관헌의 탄압이 심하자, 유진동은 1932년 임시정부를 따라 난징 등지로 갔다. 그는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흥사단 원동위원부에 소속되어 활동했고, 1933년에는 한국독립당원이 되었으며 1936년에는 민족혁명당원으로 활동했다. 이 무렵, 그는 김구의 주치의로 발탁되었다. 백범일지에는 유진동에 대해 "상해 학생 시절부터 나를 특별히 따르던 동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김구를 따라 충칭으로 이동한 그는 1940년경 김구의 중매를 받으며 경기도 출신의 간호사이자 애국부인회 회원이었던 강영파(姜暎波)와 결혼했다.
1940년대 충칭에 살던 한인들은 폐병으로 고통받았다. 300여 한인들 중 6~7년 사이에 폐병으로 사망한 이만 7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유진동의 아들 유수동씨의 증언에 따르면, 유진동은 환자들의 치료에 매진하다가 과로로 피를 토하거나 치질, 경추염 등의 질환에 시달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에 헌신했고, 1940년부터 광복군사령부의 군의처장(軍醫處長)이 되었으며, 1942·43년경에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으로 활동했다.
8.15 광복 후, 유진동은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1945년 11월에 조국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정세가 각 정파와 당들의 투쟁으로 인해 매우 불안하자, 그는 1년도 안되어 상하이로 돌아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나 1949년 자신을 아꼈던 김구가 암살당했고 얼마 후엔 중국 공산당이 중국 전체를 석권하면서 그의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는 장쑤성 난징홍십자회 내과 주치의가 됐지만 임시정부 활동 전력 때문에 공안에 끌려가 불온분자 취급받다가 끝내 직장을 잃었다.
이후 가산을 닥치는 대로 팔아 생계를 이어가던 유진동은 1957년 한때 만주에서 같이 학교를 다녔던 김일성 주석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 얼마 후 북조선로동당 위원장을 지냈던 김두봉이 찾아와 유진동 가족을 함경북도 '주을 요양소'로 데려갔다. 아들 유수동씨의 증언에 따르면, 유진동은 처음엔 극진한 대접을 받았지만 2년 뒤 지병을 치료하러 평양으로 간 후엔 소식이 끊겼고, 얼마 후엔 무장한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쳐 부친의 물건과 사진을 모조리 가져갔다고 한다.
이후 요양소에서도 쫓겨나고 북한에서 차별대우를 받던 유진동의 가족들은 1962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도주했다. 유진동의 큰아들 유수현은 정신이상자가 되어 평생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가 1991년 사망했고, 둘째 아들 유수연은 우울증에 시달리다 1981년 독을 마시고 자살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셋째 아들 유수동 씨는 현재 충칭에서 독립운동가 이달의 딸 이소심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2003년 3월 부친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국가보훈처는 유진동의 행적이 불분명하다며 서훈을 보류했다. 이후 유수동 씨는 부친의 명예회복을 위해 수년간 노력했고, 결국 2007년 대한민국 정부는 유진동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