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봉

 


<colbgcolor=#024fa2> '''북한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
金枓奉 | Kim Tu-bong
'''
'''출생'''
1889년 3월 17일
경상도 기장현 읍내현 동부동
(現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사망'''
1961년?
'''본관'''
김해 김씨
'''호'''
백연(白淵)
'''직업'''
한글학자, 정치인, 항일운동가
'''소속 정당'''
(제명)
'''최종 국적'''
[image] 북한
'''경력'''
민족혁명당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
조선독립동맹 의장
조선신민당 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위원장
김일성종합대학 언어학 명예박사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 개요
2. 생애
3. 총평
4. 여담


1. 개요


'''사진'''
'''노년의 모습'''
한국의 항일운동가, 중국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공산주의자이다. 또한, 한글학자이자 북한정치인이다.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백연(白淵, 히못) 혹은 백련(帛連)이다.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건너가서 항일운동과 한글 연구를 병행했으며 주시경의 수제자로도 명성이 높았다. 북한에서는 국가 수반으로서 고위직에 있었다. 저서로는 일제강점기 당시 한글 사전인 '조선말본'이 있다. 초대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나 함께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2. 생애


1889년 경상도 기장현 읍내면 동부동(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에서 김돈홍(金敦洪)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문과 한학을 배우고 보성중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의 가르침을 받았다. 1908년 보성중학교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 안교재, 남형우, 신배부, 이경희 등 동료들과 함께 비밀 결사인 대동청년단을 결성해서 활동했다. 그 와중에 계속 한글을 연구하며 조선말본을 집필하여 1916년 완성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검거를 피해 영국 화물선에 숨어서 상하이로 밀항했다.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했고 김두봉은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1942년 조선독립동맹의 결성에 참여하여 1942년 7월 의장이 되었다. 조선독립동맹은 중국공산당의 지휘 하에 중화민국 북방 지역에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결성하였다. 이 시기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훗날 대한민국에서 활동하게 되는 최현배를 포함한 상당수의 어문학자들이 옥고를 겪었는데 김두봉은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하고 있어 체포는 면할 수 있었다.
[image]
[image]
1946년, 북조선 로동당 창당 대회에 참가한 김일성과 김두봉(오른쪽에서 두 번째, 김일성 바로 옆의 인물). 뒤에 걸려 있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초상화가 눈에 띈다.
최좌측에 서있는 인물이 바로 김두봉. 오른쪽부터 김일성, 박헌영, 김원봉, 허헌, 김달현(부총리를 지낸 김달현과 동명이인. 천도교 계열 인사이다.). 한국 전쟁 초기인 1951년에 사망한 허헌이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광복 후 전쟁 전인 1948~1949년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1]
광복이 되자 남한이 아닌 북한으로 귀국하고 조선신민당을 조직하여 위원장을 지냈다. 1946년 8월 소련군의 지원을 받고 있던 김일성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창건되자 위원장이 되었으며 소련 군정하에서 조선어 신철자법 제정에 힘을 쓴 걸로 알려졌다. 김일성종합대학 초대 총장을 지냈으며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언어학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8년 북한 정권 수립 당시 김일성, 박헌영 등의 추대를 받아 북한의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국가 수반)이 되었고 북한의 어문 정책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 수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실권은 수상이자 조선로동당 위원장 직책을 갖고 있던 김일성에게 있었으며[2] 김두봉이 속해 있던 연안파 내에서도 실제 최고 실력자로 통하던건 최창익이었다. 김두봉이 국가 수반 직에 오른건 당시 북한 정계에서 원로에 속했고 항일운동 및 한글학자로서 국내에 명망이 높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1950년 김두봉이 김일성의 한국전쟁 침략 행위에 같이 참여했는지 찬반 논란이 있다. 김일성이 박헌영과 힘을 합쳐 한국전쟁을 일으키려 할 때 김두봉은 김원봉과는 다르게 '서울한반도의 심장이다. 서울만큼은 무조건 장악해야만 한다'며 김일성의 남침을 찬성했다는 의견이 있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과 한국 전쟁 - 김두봉의 활동과 역할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의 17쪽에는 6.25 전쟁 발발 후 상임위원장으로서 북한 법적 체계상 남조선 행정 기구 등을 도입하게 하고 인민군의 사기 진작을 도왔다. 6.25 전쟁 직전 평화 회담을 대한민국에 제안하는 것을 보면 침략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뿐 아니라 김두봉은 연안파 북측 인물들과 끈이 있고 대표성이 있는 인물이다. 소극적 반대를 했다고 보기에는 평화 회담 제의 뒤 6.25 전쟁 2일 전 대한민국 국회를 비방하면서 남측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여 6.25 전쟁 북침 주장의 밑밥을 깐 점, 6.25 전쟁 발발 즉시 북침으로 가정, 7월 4일 남한의 토지 개혁 추진과 남측 행정 기구 조직, 1951년에도 여전히 미제국주의자들에 의한 괴뢰 비방 등을 볼 때 김두봉이 반대 또는 소극적 반대 입장 근거는 부족하다.
아래는 김두봉이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인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예정대로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일제히 38도선을 넘어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같은 시각 김일성은 내각 비상 회의를 개최해 “동지들, '''매국 역적 리승만의 군대는 오늘 이른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무력 침공을 개시하였습니다”라고 둘러대면서 휘하의 고급 당 간부들까지 속였다'''. 그로부터 오늘날까지 북한은 줄곧 “미제와 이승만 도당은 1950년 6월 25일 드디어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 침공을 개시하여 조선 인민을 반대하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조선인민군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무력 침공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고수하기 위한 투쟁에 떨쳐나섬으로써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출처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알아봅시다! 6.25 전쟁사, 110쪽

여기에 의하면 김일성과 군부는 '당 고위 간부들까지 속인 것을 알 수 있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Анатолий Васильевич Торкунов, 1950년 8월 26일 ~ )의 저서, 《한국 전쟁의 진실과 수수께끼(Загадочная война: корейский конфликт 1950-1953 годов, 2001)》라는 저서[3]에서 인용된 문서상에서는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이름은 나오나 김두봉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김두봉보다는 테렌티 시티코프가 더 참여했을 지경.[4]
박명림 교수의 책에 의하면 이런 내용도 확인이 가능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한국 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주도로 이루어졌으며, 김책, 김무정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였다. 리승엽 등 남로당 계열의 인사들도 찬성하였고, 군사 지도자들인 강건, 김웅, 김광협, 방호산, 이권무, 김창덕, 류경수 등은 남쪽과의 일전을 고대하였고 승리를 확신하였다. '''이에 비해 최용건은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김두봉, 홍명희, 장시우 등은 반대 또는 소극적 찬성을 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 나남 출판. 303쪽 ~ 304쪽.
이 내용을 구글 도서 검색에서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최용건을 제외하고도 '''전쟁에 소극적인 인물들이 있었다 . 그 중에는 우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었던 김두봉이 있었다'''

김일성은 침략 당시 북한에 대대적인 조작을 했다. 일본독일은 최소한 침공 주체를 왜곡하지는 않았는데 북한은 침공 주체까지도 조작했다. 물론 군사학에 기본 지식만 있어도 침공 주체가 대한민국이 아닌 북한인 것을 알 수 있다. 김두봉이 침략 계획과 활동에 참여했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물증은 북한 지역에서 문서로 확인이 가능할 듯 하지만 현재로서는 증언과 책으로 전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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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협정문에 서명하는 김일성과 그를 지켜보는 김두봉.
6.25 전쟁 중 중공군의 참전으로 연안파의 리더격이었던 김두봉의 입지 또한 높아져 무려 김일성 대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자격으로 매년 신년사를 발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김일성이 연안파를 배제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려고 계속 시도하자 김두봉은 이에 반발하여 김일성에게 계속적인 비판을 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은 김두봉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1956년 8월 일부 소련파 및 연안파 간부들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고 집단 지도 체제 구성을 시도한 8월 종파사건이 발생하였다. 김두봉은 사건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이를 묵인하였다는 의혹을 받았고 김일성은 사건을 김두봉과 엮어서 김두봉을 실각시켰다. 김두봉을 실각시킨 김일성은 후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최용건을 내세웠으며 최용건을 1960년대 내내 써먹다가 1972년 김일성 본인이 수령이자 국가주석에 올라 본격적인 독재자가 되었다.[5] 1958년 조선로동당에서 출당되었고 농민으로 강등되어 1961년 합작 농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 총평


그나마 평가다운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이라면 광복 이전에 '항일운동' 업적이다. 공산주의 활동 이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창기에는 의정원 의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그가 주도한 조선독립동맹은 태평양 전쟁 말기 한국 광복군이 제대로 된 전투를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군과 직접 태항산 전투 등의 전투를 했다.
하지만 총체적으로 봤을땐 김일성과 함께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공산주의를 신봉하여 중국 공산당의 소속이 되거나 연계하여 북한의 지도자로서 전쟁에 동의하였다. 하필이면 김일성과 손을 잡는 바람에 망했다. 애국심은 있었으나 선택을 잘못해 남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비운의 인물이다. 결국 북한에서는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자들이나 살아남아 한자리 해먹거나 전쟁기간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서든 떼거지로 죽어갔다는 점'과 '항일운동에 있어서도 임정을 폐지하거나 대립한 부분'도 보여서 광복 이전과 이후에도 긍정적 평가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한민국에선 김일성과 함께 남침의 주범으로 남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에게 숙청당해 밀려나 남북한에서 모두 잊혀졌으며 특히 대한민국 입장에선 북한의 국가원수까지 오른 인물이기 때문에 재조명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그나마 그의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은 국어 분야로 김두봉이 북한의 언어 정책을 주도할 때 대한민국의 언어 정책을 주도한 최현배주시경의 제자로서 동문이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북한의 언어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설이 있다.

4. 여담


  • 같은 항일운동가였으며 월북한 인사인 약산 김원봉과 이름과 행보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친척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봉'자로 인해 돌림자로 아는데 김두봉의 '봉'자는 받들 봉(奉)이고 김원봉의 '봉'자는 봉황 봉(鳳)이다. 다만 인척 관계이긴 했다. 정확히 말해서 김두봉은 김원봉의 본처 박차정[6]의 외당숙이었다. 박차정은 김두봉의 5촌 조카인 셈. 생전에 김원봉에게 "내 조카 차정이는 갔지만 약산은 언제까지나 내 조카 사위"라고 말하기도 했다.
  • 한편 김두봉이 어느 공산주의 단체에 가입하거나 이름을 올린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김두봉은 연안으로 가기 전까지는 사회주의와는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와 대립했다고 한다. 상해에 있을 때는 한때 인성학교의 교원으로 활동하다 인성학교 교장에 추천되었는데, 한 번은 공산주의자들이 학교를 집회 장소로 허가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러나 김두봉은 신성한 교육 장소를 정치적인 투쟁장으로 쓰도록 허락할 수 없고, 남의 나라 조계안까지 와서 정치 투쟁을 하는 것은 민족적인 수치라며 이를 거부했었다. 김두봉의 거절에 앙심을 품은 공산주의자들은 집단으로 김두봉과 인성학교를 비난하는 성토를 했다. 이에 격분한 김두봉은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학교를 빌려주는 것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 월북 인사이며 북한 정권 초창기에 숙청당했기 때문에 다른 북한 정치인들에 비해 존재감이 매우 부족한 편. 그나마 그를 자세히 다룬 매체는 MBC 공화국 시리즈의 시작인 제1공화국(드라마)이다. 해당 배역은 중견 배우 박영지가 맡았다. 당시 김일성 역의 국정환과 함께 호연으로 호평을 받았다. 당시에는 시대가 시대인지라 북한 인물에 대한 정보나 자료가 부족했고 있어도 다소 왜곡, 폄하된 것이 대부분이였기에 박영지는 나름 자신만의 해석을 가지고 연기에 임했다고 한다.
  • 그가 나고 자란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현재는 부산광역시로 편입됨)는 김해 김씨 일파의 집성촌으로, 이 지역 출신의 친척 중 항일 운동과 관련된 사람이 많았다. 제1공화국 초대 국회 부의장을 지냈고 한국 전쟁 당시 월북한 김약수는 그의 6촌 동생이다. 김약수는 개명한 것으로서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두(枓)가 돌림자이다.
  • 그가 북한의 한글 정책을 담당할 당시 한글을 알파벳과 같이 풀어쓰기로 적자고 주장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고 그 대신 조선어 신철자법을 제정하면서 2종류의 옛 자모와 4종류의 새 자모를 도입했지만 실생활에서 잘쓰이지 않았고 김두봉이 실각된 후에 김일성이 이를 폐기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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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와도 인연이 있었다. 임시정부에서 함께 일하기도 했고 태평양 전쟁 말기에 연합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김구의 부인 최준례가 사망하였을 때 김두봉이 만들어준 무덤으로 순한글로 써진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인연을 바탕으로 김구는 1948년 남북협상 때 김두봉을 형[7]으로 칭하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문서에도 있지만 친족 관계가 아닌 경우 형이란 호칭이 좀 애매하다. 원래 구어체에서는 남녀 불문하고 손위 사람을 '언니'라고 불렀는데[8], 근대에 형이라는 호칭이 등장했다. 이 호칭은 가벼운 존중이 포함되어 있지만, 이게 동년배간에, 손위가 손아래에게, 손아래가 손위에게 사용된 예가 모두 존재하는 마법의 단어이다. 그래서 나이가 많은 김구가 훨씬 나이 적은 김두봉에게 형이라고 불렀다 해서 숙이고 들어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편지글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족하좌하 같은 서간문 어투가 아니라 평상문의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저렇게 썼을 수도 있다.
  • 1961년, 장면 내각이 남북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홍명희와 함께 김두봉을 남한으로 초청하려 하기도 했다. 이미 숙청되어 협동농장에서 노역하고 있던 시기 또는 사망한 시기이므로 실현되지는 못 했으나 그가 해방된 뒤 약 1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남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을 정도로 명망이 있는 인사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굿바이 마이 러브 NK: 붉은 청춘 에 등장하는 모스크바 8진중 한명이었던 최국인은 조선의용군 산하에 있는 연극단에 들어가 활동했고, 그는 조선의용군 김두봉과 인연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김일성을 상당히 증오하는 발언을 다큐멘터리 내내 한것으로 유명하다.

[1] 출처 : # [2] 공산권 국가들에서 동일하게 찾아볼 수 있는데 수립 시기의 순서에 따라서 최고 권위를 가졌다. 공산당이 가장 우위에 있고 구 체제를 무너뜨리거나 투쟁을 위한 '군사 혹은 무력 조직'이 뒤이어서 조직되며 최후에 '국가 혹은 정부 조직'이 구성되었다. 이에 따라서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모두 당의 1인자로서 최고 지도자에 위치하였다(스탈린은 소련의 건국자 레닌 사망 이후 소련 건국의 최대 공로자 트로츠키와 기타 세력들을 제거하고 공산당 서기장으로써 권력을 잡았고 대장정을 통하여서 농민 중심의 공산당을 만든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음에도 홍위병을 만들어서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사실 둘은 북한의 김일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의 체제에 국가의 수반은 비록 김두봉일지라도 1당 독재 체제에서 당의 지도자보다 하위에 위치한다. 이는 현재 우리와 가까워진 베트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3]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등 공산 세력의 남침을 소련 문서로 엮어서 보여주는 책이다. 아나톨리 토르쿠노프는 정치학 박사이자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학장 및 동양학과 교수이다.[4] 소련이 겨울전쟁 시절 핀란드군의 공격을 조작한 적이 있는데 그 방법이 같은 소련 아군에게 직접 포를 쏴서 위장하는 방법이었다. 이 때 관여한 인물이 테렌티 시티코프였다. 때문에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1938년 1월 13일 ~ ) 도쿄대 명예교수는 6.25 전쟁 당시에도 이 때의 경험이 큰 영향을 준 것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5] 최용건은 국가부주석이 됐다.[6] 부산 출신의 여성 항일운동가. 부산광역시 동래구에 생가와 동상이 있다.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7] 정확히는 仁兄(인형), 즉 어진 형이라고 칭했다.[8] 드라마 추노에서 잘 묘사되어 있으며, '졸업식 노래'의 첫 소절도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인데, 여기서 언니는 남녀 불문한 손윗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