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찬희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유찬희는 1884년 8월 8일 황해도 금천군 합탄면 후매리 대동에서 유헌보(柳憲甫)의 여섯 자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이안라(李安羅)와 결혼하여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장녀는 유신덕(柳信德), 차녀는 유신영(柳信永)이며, 그리고 장자는 유기석이고 차남은 유기문이다.
그는 1900년 서울 정동의 감리회 학교인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근대 학문을 수학했으며, 1909년경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인사들이 중심을 이루는 서북학회의 금천지회에 가입하여 학사시찰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교육을 통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911년부터 1913년까지 강원도 이천에서 잠복하며 포교하면서 교회의 울타리 하에서 청년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에게 근대적 지식과 국제적 식견을 갖게 하고, 이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가 갈수록 심해지자, 그는 1913년 두 아들과 같은 감리회 신자인 권사용(權思容)과 함께 강원도 이천군을 떠나 원산에서 배를 태고 청진에 도착한 후 회령으로 가서 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 연길현 국자가로 망명했다. 그는 국자가에 위치한 태광학교(太光學校)의 교사를 맡았으며, 김약연 등이 주도한 간민회에 참여해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권익을 옹호하고 한인들이 중국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간민회는 1914년 3월 위안스카이가 중국 내 외국인의 자치 조직을 철폐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1915년 3월, 유찬희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그는 3월 27일 밤 권사용 등과 함께 국자가 연길여관에서 회의를 갖고 박동원(朴東轅)과 김옥성(金玉成)을 대표자로 삼아 연길도윤을 직접 만나 시국 상황을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하여 연길도윤으로부터 “중일전쟁을 하지 않고, 국권과 무관한 일본의 요구는 들어주려고 하나, 만일 일본이 출병하여 중국을 공격한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기보다 차라리 결전을 할 것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1915년 8월 29일, 그는 국치일을 기념해 권사용 등 30여 명과 함께 국자가의 기독교회에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한시(漢詩)로써 고국을 잊을 수 없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또한 1916년부터는 무악흥업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1919년 2월 초 대표를 파리 강화 회의로 파견해 한국의 독립운제를 제기하는 일을 놓고 논의한 결과 종교계 대표자 정재면, 교육계 대표자 김약연, 사회계 대표자 이중집을 2월 12일 파리에 파견하기로 결정되자, 그는 500원을 기부했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국내에서 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북간도의 국자가 등지에서 김영학, 마진, 구춘선 등과 함께 회의를 가졌다. 3월 12일에는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다음날인 3월 13일 정오 용정에서 국자가 화룡, 용정 등지에서 모인 1,300명의 군중을 이끌고 태극기와 ‘한국독립(韓國獨立)’과 ‘정의인도(正義人道)’라고 쓴 큰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더 나아가 3월 중순 북간도의 국자가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구춘선, 마진, 김영학, 박동원, 유하천, 이봉우 등과 함께 대한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忠㤠隊)를 조직하였다. 특히 재무부장으로서 대한독립기성총회와 충열대의 활동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기성총회가 연길현 춘양향 하마탕에 본부를 두고 회장 구춘선, 부회장 강구우 등이 이끄는 대한국민회로 발전하자, 이에 참여하여 연길현과 왕청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4월 연해주와 상해, 국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될 무렵, 유찬희는 김영학, 박동원 등과 함께 연해주로 가서 대한국민의회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의 한성정부가 합하여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참여하였다. 또한 우수리스크에서 합자회사인 대동상무회사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1월 18일 블라디보스톡에서 김치보 등과 블라디보스톡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0년 4월 6일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주외재무관서의 아령 부재무관에 선임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6월, 유찬희는 대한국민회의 총기구입의원으로 연해주에서 총기를 구입하였고, 동년 8월에는 연길현에서 대한국민회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년 12월에는 대한국민회 재무부장에 선임되어 독립군에게 자금을 지원하였다. 그러다 일제가 간도 참변을 자행하자, 그는 독립군과 함께 북만주로 피신했고 1921년 1월~6월 경 구춘선, 마진 등 대한국민회의 회원 및 안정근 등과 함께 액목현에 거주하면서 러시아로의 이동을 모색했다.
1921년 12월 경에는 돈화현에서 김하구(金河球)의 권유로 구춘선, 마진 등 대한국민회의 요인들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돈화현 중앙총회를 조직하고 그 참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와 연계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러면서 1923년 12월에는 돈화현에서 수전(水田)을 개발하고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東省老農公司)의 간사(幹事)로 활동하였다.
923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변혁하기 위해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는 개조파와 창조파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최고 기관을 설립하자는 창조파의 입장을 취했다. 또한 베이징에서 창조파가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때 국민위원회의 국민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제1회 국민위원회가 개최되자, 그는 여기에 참석하여 소련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에 대해 협의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일제와 평화조약을 체결한 뒤 지원을 거부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그는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감리교회의 목사로 선교활동을 벌이면서 한인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3.1 운동 8주년 기념 강연회를 개최하고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그러나 위암에 걸린 그는 1930년 귀국했고,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1930년 2월 1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유찬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