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강화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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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Peace Conference 1919


1. 개요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전후 국제 질서 및 전쟁 관련 각종 사후 처리를 위해 승전국인 협상국과 패전국인 동맹국 사이에 이루어진 국제 회의.
1차 대전의 종식과 함께 국제 질서를 협의하기 위하여 이루어졌으나, 세계 평화라는 거창한 표의와는 달리 실상은 수많은 이권 다툼만 있었다. 열강을 제외한 식민지와 소국의 권리는 무시되었고, 독일에 대한 지나친 복수가 이루어졌다. 인종차별 문제, 팔레스타인 문제, 우크라이나, 조선, 베트남 등 식민지의 독립 문제 등이 죄다 무시 또는 악화되었으며, 회의에서 다루어진 영토와 민족의 구별은 오히려 다민족국가의 대량 추방 또는 단일민족국가소수민족 학살로 이어졌다. 또한 열강의 이익만을 반영한 회의 결과에 분노한 식민지 국가의 민족주의 인사들은 열강과의 협상을 포기하고 사회주의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이렇게 부풀어 오른 국제 사회의 썩은 고름은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후폭풍을 다시 한 번 여는 계기가 되었고, 그 상처와 어둠은 100여 년이 지난 21세기까지도 남아 있다.

2. 국가별 결과



2.1. 일본 제국


중국 산둥 반도의 일본 점령지[1]와 태평양 제도의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인종 차별 철폐안을 의제로 올려 타 국가들에게 신임을 얻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권 수호가 아닌 일본인에 대한 차별을 금하고, 서방 세력과 동일한 위치에 서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정작 식민지에 대한 법적, 정치적 평등은 무시하였고, 이후 같은 시기에 일어난 3.1 운동을 폭력 진압하여 비난을 받게된다.
이 인종 차별 철폐안은 과반수 이상의 찬성을 얻었으나 다수의 식민지 문제를 안고 있던 대영 제국이 강력하게 반발, 이후 보류로 의견을 옮겼고 미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미국 내 인종 문제와, 영국과의 관계로 인해 만장 일치가 아니면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하여 가결되지 못했으며,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진정한 의미로 보편적 인류의 가치를 주장한 '세계 인권 선언(1948년)'이 이루어졌다.

2.2. 중화민국


중국은 외교 총장 루정샹, 공사 구웨이쥔 등을 파견하여 명색이나마 승전국의 대열에 합류한 것을 기회로 다른 열강, 특히 일본을 상대로 한 불평등한 대우를 개선하고 또한 산동 지역에 대한 회복을 꾀했으나, 일본도 승전국이었던데다 국력의 차이 때문에 별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고 다른 열강들도 이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그래도 1세기 가까이 중국을 좀먹던 서구 열강의 아편 판매를 금지시키는 성과를 얻기도 했다.

2.3. 한국




(라이크역사 특별편) 100년 전, 유럽으로 떠난 조상들
김규식 등의 한국(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단은 문전박대 당했다. 승전국의 식민지란 이유로 서구 열강 중 그 어느 누구도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으며 결국 열강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이 때, 당시 입장을 전달하기 위해 당시 영국 총리였던 로이드 조지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가 외교문서에서 최초로 등장한 것이라고 한다.#

2.4. 베트남


베트남의 호치민 또한 조선의 대표단처럼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의 자유와 권리, 독립을 주장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2.5.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국의 무책임한 위임 결정은 이후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문제의 원흉이 된다.

2.6.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무산되었다.

2.7. 오스만 제국


1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아나톨리아 반도 일부 영토만 남기고 공중 분해될 위기에 처했다. 술탄 정부는 멍청하리만치 연합군에 순응했고, 이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은 샨르우르파와 가지안텝, 마라쉬를 프랑스에 할양하기로, 이즈미르를 그리스의 위임하에 놓는 것을 허용했다. 아르메니아는 윌슨의 민족 자결권에 의거해 동부 아나톨리아 일부 아르메니아인 거주 지방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으며, 오스만 제국 내에 거주하던 그리스, 아르메니아계 주민들 또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가지안텝과 마라쉬의 경우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아르메니아가 아니면 무덤!" (Ya Ermenistan, ya mecaristan!)이라는 구호 아래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 측에 협력하기도 했다. 한편 이 조약 이후 민족의 파수대(Milletler Cemiyeti)라는 조직이 구성되었으며,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이 앞으로 벌어질 터키 독립전쟁의 주도권을 쥐는 발단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적으로는 아직까지 '''튀르크''' 정체성이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며, 당시의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은 '''무슬림'''의 이름으로 단결했다. 때문에 아타튀르크의 급진적인 세속주의 개혁 이전까지 진보파와 서구 개혁파, 권위주의 우파, 종교 세력, 아랍, 쿠르드 등이 전부 하나로 뭉쳐 반제국주의 테제를 마련할 수 있었다.

3. 관련 문서



[1] 원래는 독일이 차지하고 있었던 지역이었으나 독일의 패전을 빌미로 일본이 점령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