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참변

 


[image]
1920년 10월 9일 ~ 1921년 5월
1. 개요
2. 같이보기


1. 개요


간도 참변[1] 또는 경신 참변[2]. 또는 참변이 일어난 장소인 중국 옌볜(延边) 조선족 자치주 훈춘[3][4] 시의 지명을 따서 훈춘 참변[5]이라고도 부른다.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 작전을 실시하려 했다. 그러나 맹부덕의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교섭해 버려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 8월부터 토벌을 피해 지린성으로 떠났다.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뒤 일본군에겐 이미 독립군이 도주해서 토벌에 실패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다 의문의 훈춘 사건이 발생하자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25,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불법으로 간도에 출병시켰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 독립군에 대한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안전지대로 피난한 상태였기에 효과가 없었다. 이런 학살 행위에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6]이 학살당했고 한인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여담으로 청산리 전투는 이 간도 참변이 막 시작한 시기에 벌어졌다. 북로 군정서군은 위의 중국군과의 교섭에 따라 근거지를 이동하여서 청산리에 집결했고, 추격해 온 일본군과 교전을 감행하기로 한 것이 청산리 전투의 시작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본군들의 추적을 피한 독립군들은 밀산부 한흥동에 모여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다.[7]
간도 참변을 취재하기 위해 만주로 향한 동아일보 장덕준 기자는, 취재 도중 실종되어 버렸다. 대체로 당시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일제가 장덕준 기자를 암살하고 암매장해버렸다는 게 유력하다.
1982년 한국 영화 <일송정 푸른 솔>에서도 언급되는데, 직접적으로 보여지지 않으나, 학살당하는 한인들을 작두로 목을 친다든지 마을을 불태운다.
영화 암살에서 짤막하게 언급된다. 영화 설정상 현직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카와구치 마모루가 간도 참변 당시 학살을 주도한 일본군 17사단의 지휘관이었기 때문. 주인공인 안옥윤이 회상 장면에서 간도참변 때 자신의 어머니는 일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언급하는데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당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차라리 총으로 쏴 죽인 행위가 나아 보일 정도로 잔혹했기 때문이다.[8]
간도에서 학살이 발생하기 이전에 연해주에서도 연해주 4월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였다.

2. 같이보기


[1] 間島慘變[2] 庚申慘變[3] 琿春[4] 한자음은 혼춘이지만, 중국식으로 읽으면 훈춘이다.[5] 琿春慘變[6] 박은식, 독립 운동 지혈사[7]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또다른 참변이 기다리고 있었다.[8] 칼로 찔러 죽이고, 불에 태워 죽이고, 생매장 시켜 죽이고, 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다. 약탈, 방화, 구타, 고문, 강간 등 군대가 민간인에게 범할 수 있는 온갖 범죄가 저질러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