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진두계민가한
Yаmi Qaghan
(? ~ 609)
1. 개요
동돌궐의 제8대 가한. 이름은 아사나염간(阿史那染干)으로 막하가한의 아들. 의리진두계민은 뜻과 지혜가 있는 건장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2. 생애
힐가시다나도람가한과 다투어 593년에 돌리가한이라 칭하면서 북방에 거주했는데, 수나라에 사자를 파견하게 혼인하기를 요청했지만 수나라에서는 대의공주를 죽여야만 허락한다고 해서 힐가시다나도람가한에게 그녀를 헐뜯어서 힐가시다나도람가한이 대의공주를 죽게 하고 수나라의 공주와 혼인하게 되었다.
597년에 수나라에 와서 안의공주를 처로 삼았으며, 수문제로부터 후한 대접을 받았고 도람가한은 자신이 대가한인데도 아사나염간만도 못하다고 화를 내면서 수나라에 조공을 끊었고 계민가한은 동정을 샅샅이 살펴서 번번이 상주문으로 알려 변방의 외진 곳에서느 매번 먼저 대비를 했다.
599년에는 의리진두계민가한으로 임명되었으며, 돌궐족에서 남녀 만여 명이 귀부했고 안의공주가 죽었기 때문에 의성공주와 다시 혼인했다. 도람가한이 공격도구를 만들어 대동성을 공격한다고 장손성에게 알려서 수의 군사가 파견되었지만 그 전에 도람가한과 그와 맹약을 맺은 달두가한의 공격으로 장성 아래에서 크게 패하고 계민가한의 형제, 아들, 조카 등이 살해당했다.
도람가한에게 크게 패한 후에 수 조정으로 들어갔다가 수나라에서 돌궐로 다시 보내면서 공격당할 것을 우려해 수나라에서 조중경의 둔병 2만, 한홍의 보병, 기병 1만 등을 지원했다. 600년에 수나라와 달두가한이 싸울 때 달두가한이 수나라의 군사에게 패하자 조카 아사나사리벌을 파견해 공격하도록 했는데, 수나라가 계민가한을 도와 중요한 길목을 지키게 해 아나사리벌이 물러가면서 감사하는 표문을 올렸다.
수문제가 계민가한을 위해 조중경을 파견해 금하, 정양 등의 두 성을 쌓았으며, 601년에 양소와 함께 달두가한을 공격했다. 돌궐을 격파하자 잡은 사람과 가축은 계민가한이 돌려받았으며, 603년에 달두가한의 부락이 크게 어지러워 철륵, 복골 등 10여 부락이 모두 배반하면서 달두가한의 항복을 받았고 그의 무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605년에 거란이 영주를 공격하자 수나라에서는 돌궐의 군사를 보호해 그들을 토벌하게 했으며, 계민가한은 기병 2만을 징발해 통사알자 위운기의 지휘를 받았다. 607년 정월에 수나라 조정에 들어와서 수양제가 문물을 크게 벌려놓고 과시하자 그 문물을 보고 흠모해 관대를 입어보고자 요청했지만 수양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5월 9일에는 아들 아사나탁을 파견해 수나라 조정에 보냈다.
18일에는 조카 아사나비려가를 수나라 조정으로 파견했고 23일에는 사신을 파견해 스스로 변방에 들어가 여가를 받들어 영접할 수 있도록 요청했지만 수양제가 허락하지 않았으며, 수양제가 6월 11일에 유림군에 머무르면서 동돌궐을 지나 요새로 나가서 군대의 위엄을 뽐내고자 탁군으로 향했다.
수양제가 장손성을 파견하자 계민가한은 해, 습, 실위 등 추장 수십 명을 소환해 모이게 하면서 장손성이 천자를 모실 곳이라고 하면서 청소하게 하자 정원의 잡초들을 베었으며, 수양제가 유림의 북쪽 경계를 떠나서 그들의 아장에 도착했다.[1] 20일에는 의성공주와 함께 행궁으로 조현하러 오면서 의복을 바꾸어 한 가지 정도는 중국과 같에 해달라고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7월 4일에는 옥새가 찍은 문서를 받았고 수양제가 돌궐에게 과시하고자 연회를 베풀면서 계민가한은 비단 2천만 필을 받았으며, 제후가 타는 수레, 타는 말, 군사 지휘용 깃발도 받으면서 황제를 알현할 때 절을 하면서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되었고 지위는 제후왕의 위에 있게 되었다.
8월 6일에는 수양제의 천막을 받들어 거가를 기다렸다가 7월 9일 수양제가 행차하자 술잔을 받들고 장수하기를 기원하면서 공경했으며, 의성공주와 함께 금항아리를 하나씩 하사받았다. 608년 6월 13일에는 계민가한이 조정에서 교화하는 것을 준수하고 받들어 풍속을 고칠 것을 생각했으므로 수양제의 명으로 만수에 있는 수 자리에 성을 만들면서 집을 잣고 수나라로부터 장막, 침상, 이불 이상의 물품 등을 공급받았다.
609년에 수나라 조정에 가서 조현했고 계민가한이 사망하자 수양제가 그를 위해 3일 동안 조회를 폐했다.
[1] 이때 계민가한의 장막에 고구려 사신이 와 있다가 같이 수 양제를 만났고 수 양제가 "짐이 내년에 너희 쪽으로도 한 번 찾아 갈 건데, '''그때 가서 볼까, 아니면 니들이 먼저 올래?'''"라고 영양왕에게 전하게 했다는 일화가 특히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