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수)

 


''' 수 초대 황제
高祖 文皇帝 | 고조 문황제'''
'''묘호'''
'''고조(高祖)'''
'''시호'''
문황제(文皇帝)
'''연호'''
개황(開皇, 581년 2월 ~ 600년)
인수(仁壽, 601년 ~ 604년)
''''''
양(楊)
''''''
견(堅)
'''부황'''
무원제(武元帝)
'''모후'''
원명황후(元明皇后)
'''생몰 기간'''
541년 7월 21일 ~ 604년 8월 13일 (63세)
'''재위 기간'''
581년 3월 4일 ~ 604년 8월 13일 (23년 5개월)
1. 개요
2. 집권 전
3. 중국의 분열기를 종결시키다
4. 통치
4.1. 후대 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 능력
4.3. 고구려와의 전쟁
5. 말년
6. 가족 관계
6.1. 문헌황후와 후계자 선정
6.2. 그 외의 자식들
6.3. 가족 관계
7. 대중 매체에서
8.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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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대제가 이뤄낸 통일 유럽은 그의 사후 다시금 분열되었으나, 수문제가 이뤄낸 통일 중국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1]

-마이클 하트 著, 세계사를 바꾼 사람들: 랭킹 100 中-

수나라의 초대 황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문황제(文皇帝). 휘는 양견(楊堅). 아들과는 달리 명군으로 평가받으며[2], 이때만큼은 수나라도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국토도 넓혔고 제도를 정비했으며 과거 제도의 전신인 선거제를 통해 수나라를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시켰다. 문제 때 연호가 개황(開皇, 581년 ~ 600년)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개황성세(開皇盛世)[3]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자였기에 그의 치세엔 불교가 매우 흥성하였다.

2. 집권 전


양견은 홍농의 화음 출신으로 수국공 양충(楊忠)[4]과 여씨(呂氏)[5]장남으로 태어났다. 홍농 양씨는 주나라 대부터 이어진 한족의 명문가로 양견의 집안은 후한의 태위였던 양진의 후손을 자칭했다.[6]
아버지 양충은 독고신의 부하로 독고신과 양충은 서위의 실권자였던 우문태에게 의지하던 상태였다. 양충은 우문태의 아들인 우문각이 서위를 멸망시키고 북주를 세울 때 여러 차례 공훈을 쌓아서, 북주 정권에서 공훈을 쌓은 관리 가운데 가장 높은 칭호인 주국대장군의 직위에 있었으며 수국공에 봉해졌고 재상의 직책이라고 할 수 있는 대전의를 맡아 군정을 장악할 수 있었다.
양견은 부친 양충을 이은 수국공으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아버지의 공훈 덕분에 다양한 관직에 앉을 수가 있었다. 한번은 우문태가 양견을 보고 "이 아이의 골격과 풍채는 세상 사람과 같지 않다." 며 탄식했다고 한다.
그렇게 양견은 아버지 덕분에 관직이 계속 높아졌고 그런 양견에게 위협을 느낀 북주의 명제 우문육은 관상가 조소에게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는데 그는 양견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일부러 우문육에게 양견은 대장군 감에 불과한 인물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양견에게는 '''"공은 천하의 황제가 될 사람이요, 하지만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천하가 안정될 것이니, 부디 내 말을 기억하시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고제 유방처럼 소위 융준용안의 풍모였던것 같다.
이후 양견의 장래가 유망하다고 생각한 독고신은 양견의 나이 16세 때 자신의 딸 독고가라를 시집보냈다. 선비족의 대귀족인 독고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양견은 확고한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고, 젊어서부터 양씨 가문과 독고씨 가문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573년 무제는 양견의 장녀 양여화를 자신의 아들이자 후일 북주 선제가 되는 태자 우문윤의 비로 삼았으므로 양견의 정치적 기반은 더욱 확고해졌으며 표기대장군과 대흥군공 등의 벼슬도 받아 정치적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다른 사람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기에 그를 시기하고 암살하려고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양견은 그 뒤에도 군대를 이끌며 북제의 군대를 격파하여 주국대장군으로 승진했다.
선제가 황위에 오르자 두각을 드러내던 양견은 실권자로 부상, 선제가 순행을 나갈 때면 언제나 양견에게 도성을 지키게 했다. 선제는 엄격하고 잔혹한 법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양견은 백성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인심을 얻었기에 점차 양견에게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나이가 어리고 무능했으며 방탕한 생활을 하여 주변에 자신을 위하는 인재가 존재하지 않았고 때문에 양견을 제거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선제의 황후들이 서로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 이간질하고 싸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양견의 딸인 양황후의 질투에 분노한 선제가 화가 나서 '''"내가 반드시 너의 가족들을 멸족시킬 것이다"'''라며 화를 냈다. 그리고는 내시에게 명령하여 궁궐에 살수들을 매복시킨 후, 살수들에게 '''"만약 양견이 조금이라도 무례한 모습을 보이면 내가 그를 죽이라고 명령할 테니 그때 양견을 죽여라!"'''라고 명했다. 그 후 양견을 궁궐로 불러서 정사를 논의했는데, 양견은 이미 죽을 고비를 많이 넘겼기 때문에 황제의 뜻을 알아차리고 화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황제가 아무리 자극을 하고 아무리 무례하게 굴어도 표정 변화조차 없어 죽일 기회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북주에서 봉직하며 살던 중 선제가 579년에 사망하고 양건의 외손자'''뻘인''' 어린 정제 우문천이 즉위하였다. 보통 우문천이 양견의 외손자로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지만 친 외손자가 아니다. 물론 양견이 선제의 장인인 것은 사실이나 선제는 황후가 4명이었다. 정제는 선제의 황후 중 하나였던 천대황후 주씨의 아들로서 양견의 딸인 천원대황후 양씨의 소생이 아니다. 후일 황태후 양씨는 양견이 선양을 받고 황제로 등극한 뒤 졸지에 황태후에서 공주로 신분이 변하고 마는데, 이러한 케이스의 또 다른 인물로 왕망의 딸이자 전한 평제의 황후였던 황황실주 왕씨가 있다.
어쨌거나 우문천은 나이가 고작 8살 정도에 불과하여 제대로 국정을 이끌수가 없었고, 결국 많은 신하들의 동의 하에 양견이 조정의 정치를 관장하고 어린 정제를 보좌하며 구석(九錫)을 하사받은 후 수왕(隨王)에 승상,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당시 조정에는 선제의 동생인 우문찬이 상당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양견은 그에게 당신이 앞으로 황제가 되실 분이시니 당분간 나랏일에 신경 쓰실 것이 아니라 집에서 소식을 기다리면 된다고 안심시켰다. 그 다음으로 양견은 지방에 있는 우문씨의 다섯 왕들을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궁궐로 유인하는 데 성공했고, 즉시 그들의 병권과 인신을 빼앗았다. 이에 이들은 우문씨가 세운 나라의 어린 황제가 한족인 양견에게 조종당하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그를 죽이기로 하였다.
이들 중 한 명인 조왕 우문초는 양견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술을 마실 때 죽일 계획을 세웠다. 조왕의 요청에 응한 양견은 양홍, 원주 등의 측근들을 거느리고 그의 저택으로 갔다, 양견은 그가 혹시라도 술에 독을 탈까 봐 마실 술을 직접 들고 갔다. 양견이 저택에 도착하자 조왕은 아들에게 "네가 술안주로 오이를 가지고 들어와라, 내가 칼로 오이를 깎는 척 하면서 양견을 찔러 죽이겠다."라고 은밀히 말했다. 조왕은 양견을 내실로 안내할 때 두 사람만이 허심탄회하게 술을 마시고 싶다는 명분으로 그가 데리고 온 사람들을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다만 양견은 양홍과 원주와 같은 최측근만 내실 문 밖에서 대기하게 했다.
양견과 우문초가 술을 마시며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면서 조왕은 계속 칼로 오이를 깎아서 양견에게 계속 먹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조왕은 오이를 먹이는 틈을 타서 양견을 찔러 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원주가 문을 열고 내실로 뛰어들어와서 "승상부에 급히 처리해야 할 공무가 많아서 지금 빨리 승상부로 가야 합니다."라며 양견을 데리고 가려고 했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에게 화를 내면서 "나와 승상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어느 놈이 감히 나서느냐? 당장 물러가라!"라며 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 그러나 원주는 칼을 쥔 채 조왕을 노려보며 양견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조왕은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원주에게 술을 조금 나눠주고는 거짓으로 구토하는 척을 하면서 후원의 누각으로 갔으나 조왕이 뭔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생각한 원주는 조왕을 따라갔고, 그를 부축하여 내실로 돌아왔다. 그러자 조왕은 원주를 내쫒기 위해 물을 가져오라 했지만 원주는 듣지 않았다.
때마침 등왕 우문유가 조왕 저택에 도착했고, 양견이 그를 맞이하러 내실에서 나왔을 때 원주가 양견에게 귀엣말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갑니다. 만약 저들이 먼저 선수를 친다면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저는 죽어도 괜찮으니 어서 떠나시지요."라며 재촉하여, 양견은 내실에 돌아온 후에 바쁜 일이 있다며 측근 양홍과 함께 떠났다. 그러자 조왕이 양견을 막기 위해서 밖으로 나오려고 했으나 원주가 몸으로 문을 가로막아서 그를 나오지 못하게 했고 그렇게 암살 시도는 끝이 났다. 마치 옛날 초한지홍문연처럼 원주는 기지를 발휘하여 적진 한가운데에서 목숨이 위험했던 양견을 살릴 수가 있었다.
그 뒤에 양견은 조왕과 등왕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고 나머지 우문씨의 세 왕도 차례로 제거해 북주의 황족과 지방의 세력(울지형, 사마소난, 왕겸 등)을 완전히 제압하였다. 사실 양견은 자신의 손자뻘이었던 황제를 폐위시키는 것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자 독고가라가 양견에게 '당신은 이미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처지이니 이제는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다.'는 밀서를 보내서 황제가 되는 것을 결심하게 했고 이에 양견은 마음을 정하여 정제를 압박했다. 결국 이듬해 옥좌를 지킬 힘이 없었던 정제는 황위를 선양한다는 조서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옛날에 임금이 임금에게, 한나라 헌제위나라 원제가 황위를 선양했듯이, 짐도 천하의 안정을 위해 선양하노라."
양견은 많은 찬탈자들이 그랬듯이 정제의 선양을 예의상 세 번 정도 거절하고 난 후 황제의 옥좌에 올랐다. 그는 아버지 양충 때부터 수(隨 지금의 호북성 수현) 지방을 봉토로 받았고 자신이 수왕(隨王)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수(隨)로 정했다. 양견은 '수(隨)'자의 '착받침(辶)'변을 싫어했다. 갑자기 가다가 멈춘다는 불안하고 불길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양견은 책받침 변을 빼고 '수(隋)' 자를 새로 만들어 국호로 정했고 연호를 개황(開皇)이라고 했다.

3. 중국의 분열기를 종결시키다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 이후 장안으로 도읍을 정했다. 원래 문제는 낙양을 수도를 삼으려고 했으나, 서방으로 진출하기 위해서 장안을 수도로 삼았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적인 군벌들과 북주 근왕 세력의 저항을 받았으나 문제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정제를 비롯한 우문씨 황족들을 모두 주살했다. 돌궐이 자주 침입하자 장성을 세운 뒤에 성 수십 곳을 쌓아서 장성 이남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고, 이후에 화친을 맺어 북방을 안정시켰다.
이후 혈연으로 맺어진 귀족들의 저항과 반감을 극복하고자 남벌을 진행하여 개황 7년(587년)에 후량을 공격하여 멸망시켰고 589년에는 을 공격하였다. 당시 진의 황제인 진숙보는 사치와 방종에 빠졌고 간신들의 이야기에만 귀기울여서 나라가 크게 피폐해져 국가 막장 테크를 타고 있었는데 양견은 차남 양광에게 군사를 주어 진을 쳐서 없애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사실 수나라가 워낙 빨리, 그것도 성대하게 멸망했기 때문에 수나라 관련된 모든 인물에 대한 평가가 좋지 못해 수 문제 또한 오랫동안 심하게 폄하당하거나 무시당했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서양 학자들이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일변하게 되는데, 특히 후한황건적의 난 이래로 400년간이나 분열해있던 중국을 재통일시킨 점은 매우 높게 평가받는다. 물론 중간에 서진의 통일도 있었으나 서진이 사실상 통일된 중국을 통치한 기간은 동오를 멸한 삼국 통일 직후인 280년부터 팔왕의 난이 격화되는 300년까지로, 고작 20여 년이다.
재미있게도 중국이나 동아시아권보다는 서구권에서 비교적 더 높이 평가받는 인물인데, 유럽로마 제국의 분열 이후 통일되지 못하고 조각조각 분열한 반면, 중국은 수 문제에 의해 재통합당하면서 현재의 거대 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기에 서양에서는 세계사 중요 인물을 뽑으면 100위 안, 그것도 제왕들 중에서는 10위 안에 꼽힌다. 보통 위대한 중국 황제 "성인가한(聖人可汗)"이라고 불리며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서양 학계에서는 '분열된 유럽'에 대응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점을 피상적으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터무니없이 높게 평가했다는 의견도 있다. 후한 말 분열된 중국을 서진이 통일하기도 했고, 비수대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장 오호십육국시대에도 중국 대륙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없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은 인정할지 몰라도, 서양 학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의 중국'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심어준 인물까지는 아니라는 것. 게다가 비교 대상인 카롤루스 대제서로마 제국의 경우 애당초 봉건제도라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관료제가 정착해 중앙 집권적인 통제가 용이했던 중국과 동일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도 무리이기도 하고...
총평하자면 '''분열된 중국을 재통합'''한 업적 자체는 대단하다 할 수 있겠다. 사마염과 비교하면 훌륭한 반면교사의 사례.

4. 통치


일부 사람들은 최초의 통일과 재통일을 운운하며 진시황과 같이 비교되지만 수문제는 와 같이 거론되는 폭군 진시황과 비교하면 모욕일 정도로 진시황과 완전 차원이 다른 통치를 보인 위대한 황제다.

4.1. 후대 왕조에 길이 영향을 끼친 정치 능력


수문제는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토지를 지닌 소규모 자작농을 대규모로 늘리면서 '삼장제'와 '균전제'를 확립시킨 것은 지대한 업적으로 수문제가 확립한 이런 토지 정책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시기까지 이어진 통일 왕조들의 토지 정책의 기본적인 틀로 작용했다.
또한 사치를 줄이고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감면시켜 주었고, 어떤 해에는 아예 세금을 걷지도 않는 행보도 보였다. 현실 국가에서 이렇게 하려면 석유나 천연 가스 같은 자원들이 왕창 나와야 가능한 일이다. 또한 지방에까지 관리를 파견하고 500가를 향으로, 100가를 리로 조직하여 통치 체계를 한차원 높게 끌어올렸으며[7], 어느 정도 제국의 기틀이 잡히자 관료들에게도 따로 경비를 마련해 주어 관료들과 귀족들이 함부로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게다가 관료들의 부패를 끔찍히 싫어했던 탓에 관료들의 뇌물수수를 엄격히 밝히는 한편 뇌물과 관련이 있는 관료는 모두 참했다. 심지어는 자기가 뇌물을 보내놓고 받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을(...) 정도니 다른건 몰라도 뇌물과 사치에 한정해선 굉장히 엄격했다고 할 수 있다. 덕분에 당시 관리들의 일상복은 귀한 비단으로는 만들 수가 없었고, 허리띠의 장식도 금옥이 아닌 쇠붙이나 뿔로 만들어야 했다.
황권 강화를 위해 임용 제도를 개혁하여 구품중정제를 폐지하고 연고지 복무를 금지했으며, '''과거제의 전신인 선거제를 도입했다.''' 물론 강력한 귀족 세력을 없애지는 못했으나 이후 당대까지 관롱귀족의 견제 세력인 과거 출신자들을 기용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사유화 되어가던 관직의 공공성을 고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마디로 수문제가 선거제(과거제)를 병행하면서 귀족을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선거제를 통해 등용된 관료들은 이들은 완벽하고, 정상적이고, 착실한 친황파가 된다. 이는 당나라 중기부터 귀족을 견제할 사대부 계층의 형성을 이루어 냈고 송나라 시기까지 가면 귀족 대신 사대부가 국정의 중심이 되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구당서, 정관정요에서 당태종이 신하들과 회의하다 수문제의 정치는 어떠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신하들은 '''위사전찬(衛士傳餐)'''이라 하였는데, 자신이 혼자 모든 일을 밤늦도록 처결하느라 식사할 시간도 없어서 시위하는 군사들을 시켜 회의하는 곳으로 식사를 날라오게 했다는 뜻이다.[8] 이렇게 문제는 '''정치와 국가운영을 신하의 도움을 받기보다 자기 혼자서 다 해먹었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선 정관정요에서 당태종이 신하들에게 수문제에 대해 물으니 신하는 '''혼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는 수문제를 뛰어나고 근면하다고 평가'''했는데 당태종은 그 말을 부정하고 그건 그가 '''근면하다기보다는 의심암귀라서 중요한 일은 남에게 맡기지 못하고 자기 혼자서 다 맡은 것일 뿐'''이며 그래서 국가 운영이 늦어진다고 깠다. 다만 여기서 알 것은 '''수 문제가 중요한 국정 운영과 일은 혼자서 다 맡아서 처리했다는 것'''을 신하들과 당태종 모두 동의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근면성실했다는 것. 여담으로 전술한 수문제의 위사전찬이라는 고사를 똑같이 실행한 이가 후대의 당문종. 물론 당문종의 시대는 환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면서 황제도 능가하는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게 아쉬운 점이지만.
수문제 시절 일화 가운데 이런 얘기가 있다. 제주 참군 왕가라는 사람이 70여 명의 죄수를 장안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도중에 죄수들이 너무 힘들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죄수들의 몸에 걸친 칼과 쇠사슬을 풀도록 명령하고, 아울러 압송을 담당한 병사들을 모두 해산시킨 뒤, 언제까지 장안에 도착하라고 이야기했다. 만약 죄수들이 도착하지 않으면 자신이 사형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말이다. 그러나 죄수들은 모두 약속한 날짜에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고 전부 장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러자 수문제는 크게 기뻐하면서 죄수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궁궐로 불러 그들에게 주안상을 하사하고 죄를 사면했다. 물론 왕가에 대해서는 벼슬을 높여주고 상을 내렸다.
한번은 관중 지방에 대기근이 들었을 때 수 문제는 측근을 보내 백성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했다. 어떤 사람이 콩껍질과 쌀겨를 섞어 만든 떡을 수 문제에게 진상하자,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정치를 잘못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자책하고 수라의 반찬을 줄이고 오랫동안 술과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수 문제가 이질을 앓은 적이 있었는데 어의가 궁궐에서 이질약을 조제하는 데 필요한 호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 황제에게 처방할 약조차도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궁궐 안에서 근검 절약했던 것이다. 그는 태자 양용에게 "자고로 사치한 제왕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태자는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라는 훈계도 했다.
조세를 낮추고 하사물을 성대히 내렸음에도 국고가 모두 차 넣어둘 곳이 없어 곁채에 쌓았을 정도였으며, 수문제가 선양을 받은 초기에 집계된 민호가 채 4백만 호를 채우지 못하였으나 말년에는 890만 호로 늘어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후 수나라의 붕괴 과정에서 누락된 수많은 인구들은 측천무후-당현종 시절의 전성기 당나라에 가야 겨우 복구가 된다.[9]
인구 뿐 아니라 경제력 또한 막강해져서 훗날 '''당나라는 수 문제 시기의 경제력을 당현종 천보 초엽이 되어야 따라잡는다'''. 이때 쌓인 국부가 상상을 초월해 그 이전 왕조들은 꿈도 꾸지 못했던 황하-양자강을 연결시키는 대운하 건설을 처음으로 시도했던 것이 수문제 양견이었다. 다만 양견은 대운하 공사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대운하 건설로 백성들이 고통받는다는 말 때문에 곧바로 대운하 건설을 중단한다. 문제는 아들놈이 더한 스케일로 시작했다는 거였다
이처럼 수문제는 스스로 조악한 옷을 입고, 검소한 식단을 유지하며, 모든 일을 하층민의 삶에 따라 시도하려 한 보기 드문 명군이라 할 수 있었고, 이에 '고조가 통일하고 문경치세를 거쳐 한무제 시절에야 이룩한 번영을 양견은 그가 통일하고 그가 이루어냈다.'라는 찬사를 받을 정도의 '''뛰어난 정치능력'''을 선보였다.
물론 이런 수문제도 결점은 있었다. 젊어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지 않았고, 601년에는 군현의 모든 교육 기관들을 폐지하고 중앙에 국자감만을 두어 귀족 자제들만 공부하게 했다. 나이가 들수록 관리들에 대한 의심이 깊어져 법의 함정을 파놓고 관리들이 걸려들면 가차없이 처단했으며,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에게 툭하면 매질(...)을 가하는 일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또한 말년에 감정의 기복이 심해져서 자신의 기분에 따라 신하에게 벌을 주거나 상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들은 있었지만 '''그가 이룩한 정치 제도들은 후에 당나라 율령제의 기초가 되어 이후 중국 통일 왕조 체제의 뼈대로 군림하게 된다.'''

4.2. 관롱집단 문제


그러나 수 문제의 이러한 정책으로 자신들이 무시당한다 여긴 권문세족들은 수많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게 소규모라고 보긴 절대 어려운 것이, 수 문제와 인척 관계로 연결된 관롱집단의 집단적 반발에 더해 반란, 특히 대규모 지주가 경제 정책의 중심이었던 양자강 이남의 옛 남조 지역에서의 반발이 극심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면 대규모 운집만 안 했지, 반란 세력이 들끓었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수 있다. 한 번의 정복 전쟁으로 통일을 달성했음에도, 대규모 지주들을 척결해버리기 위해 2차 통일전쟁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
결국 수나라를 무너트린 것도 대규모 지주 출신인 관롱집단이연이 건국한 이었다. 애초에 수나라의 왕족 양씨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의 이씨 가문이 모조리 한 고을에 모여살던 세력이었다.
이는 양견이 관롱집단이라는 장안 주변 귀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제왕이라는 점에서 발생하는 권력에서의 역학 관계로, 그들 덕에 제왕이 될 수 있었던 탓에 그들의 세력과 의견을 무시하기가 현실적으로 힘들었기에 발생한 문제다. 따라서 문제는 말년에 점차 노골적으로 관롱집단과의 대립하며 숙청과 비리 척결, 외정이라는 강경책을 단행했던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양견이 계속해서 관롱 세력들에게 지속적인 강경책을 썼으면 결국에는 관롱집단의 소멸로 이어졌겠지만 양견이 아들과의 정쟁에 휘말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수 양제가 탈법적인 수단으로 제위에 오르면서 기존 귀족 세력들에게 좋은 명분거리 하나를 던져주게 된 것.
결국 수양제는 최소 귀족들의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대규모로 궁전을 증축하는 한편 대운하를 건설하고 대규모 정벌 사업을 벌이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애당초 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제위에 오른지라 귀족 집단의 지지를 받거나 최소 반발을 막기 위해 귀족들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춰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결국에는 수양제의 자업자득이었다고 볼 수 있는 부분.
지금의 시각으로는 골때리는 짓이지만 그 당시에 권문세족들은 이러한 대운하 공사와 정복 사업에 대해 모두 환영하고 찬성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귀족 집단은 계속 존속했으며 관롱집단, 특히 6진 중에서도 무천진을 중심으로 하는 무천진 군벌은 당나라까지 영향을 끼쳤다. 물론 당태종 치세기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으나, 당고종대에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 다만 측천무후가 날려버린 것은 아니고, 측천무후를 핑계로 당고종이 손을 봤다는 것이 최근의 평가이다.
숙종장희빈을 핑계로 환국정치를 해서 왕권 강화한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고 보면 된다. 자세한 것은 측천무후 항목 참고.

4.3. 고구려와의 전쟁


수문제는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친필을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고구려는 수나라조공을 해 제후국으로 인정받으라는 것과 만약 조공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에 거역할 경우 자신이 군사를 동원하여 황족 중 1명을 고구려 왕으로 옹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당시 고구려를 제외한 다른 여러 나라들은 이미 중원을 통일한 수나라의 위세에 밀려 제후국으로서 조공을 바치고 있는 모양새였기에, 수 문제 입장에선 고구려가 배째라고 나오면서 버틸 경우 다른 제후국들도 같은 태도를 취할까 염려했고, 이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라 압력을 넣고 만약 고구려가 거절할 시 30만의 수륙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구려가 역으로 선빵을 날린다.''' 고구려는 말갈 기병을 동원해 요서에 자리하고 있던 수나라의 거점인 영주 일대를 공격하는 한편 거란을 동원하여 발해 연안에 위치한 수나라군을 공격했다. 이런 예상 밖의 고구려 선제 공격으로 뒤통수를 거하게 맞은 수 문제는 당혹감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고, 얼마 안가 수륙군 30만 명으로 고구려 침공을 전격 단행한다.
1차 전쟁 당시 고구려와 수나라 양국 간에 어떤 전투가 발생했고 전투 양상이 어떠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영양왕이 수 문제에게 사과 사신을 보내면서 표문에 "요동 분토(糞土)[10]에 있는 신(臣) 고원"이라 칭하는 사과문을 바쳐 교전 없이 퇴각했다는 수나라 측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교전에서 대패했다는 정황을 암시하는 듯한 기록들도 존재하기 때문에[11] 수나라 측에서 고의적으로 패전을 축소 은폐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채호는 그의 저서 조선상고사에 현재는 남아있지 않은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 등의 기록을 인용하여 오늘날 진주 강씨의 시조로 전승되는 강이식이 임유관 전투 등에서 승전을 이뤄내어 이 전쟁을 이끈 주역이라는 설을 내놓기도 했다. 자세한 얘기는 강이식 문서 참조.
한편, 요동 분토의 신 운운하는 사과문의 신빙성과 의도를 떠나 고구려내에서는 역대급 대군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사기가 고취됐던 모양이다. 전쟁이 끝난 직후 신집을 편찬하여 역사를 정리하였고, 수나라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은듯하며[12] 고구려 공격을 부추긴 백제신라를 공격하여 응징하는 한편 돌궐과는 합종을 시도하여 수에 대해 선제적인 대응을 계속한다.
결론적으로 자세한 전황이 어찌 되었든 간에 이 전쟁은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대결에서 개고생했고 이후 재차 고구려를 침공하는데 큰 부담을 느낀 계기'''가 된 사건인 것은 분명해 보이며, 이는 문제의 아들 양제 시절에도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5. 말년


문제는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국사를 소홀히 하기 시작했는데, 문헌황후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를 끊임없이 설득하여서 그나마 국가를 그럭저럭 끌고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문헌황후가 602년 8월에 영안궁에서 한질로 사망하자 양견은 큰 충격을 받아서 국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다가 말년에 다시 양용을 태자로 만들고, 양광을 폐위시키려하나, 양광의 심복이자 자신의 근위장 장형에게 암살당했다. 또는 양광의 쿠데타에 충격을 받아 사망했다고도 한다. 양용 역시 양광의 근위장인 우문지급에게 목이 졸려 살해당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604년 7월 수문제가 중병에 걸려 장안의 인수궁 대보전에 누워있었는데 문제가 중병으로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 되자, 태자 양광과 월국공 양소, 병부상서 유술 등이 대보전을 지켰고, 선화부인과 용화부인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문제 옆에서 시중을 들었다. 수문제는 그녀들이 자기를 시중드느라 휴식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얼마간이라도 휴식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선화부인이 문제의 침궁을 떠나 거처로 가는 도중에 태자 양광을 만났다. 양광은 남조의 황녀로 수문제의 후궁이 되었던 진씨의 미모에 반해 대담하게도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다(겁탈했다는 말도 있다). 이에 진씨가 울면서 수 문제에게 "태자가 무례하였습니다" 하고 하소연하자, 수 문제는 그제서야 양광의 진모를 알고 '''"그 짐승만도 못한 놈이 나라를 다스리겠다고? 내가 황후의 말을 들은 것이 큰 실책이었구나!"''' 라고 한탄하며 다시 양용을 복위시키기 위해 유술과 원암을 시켜서 양용을 호출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양광이 선수를 쳐서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여 대리옥에 가두고 자신의 군사와 우문술, 곽연을 시켜 황궁을 포위한다.
그 후 수문제의 처소에서 병 시중을 들던 후궁들이 모두 쫓겨나고 대신 태자궁 신하인 장형이 들어왔는데 그 후 얼마 뒤에 사망하면서 604년 음력 7월 13일(정미일)에 향년 64세에 수문제는 사망했다. 사망 직전의 양광의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살해설이 나돌았고 자치통감에서도 "안밖에서는 자못 다른 이야기가 있었다"며 살해설을 암시하고 있다.(출처 : 사마광, 권중달(역), 자치통감, 수기4 604년)
사후 그는 태릉에 안장되었는데 워낙 검소해서 부장품이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도굴꾼들과 중화민국군벌들 그리고 비적들이 도굴하려고 번번히 시도했으나, 현지 주민들이 별거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했다. 그래도 꿋꿋하게 할 일을 했지만 정말 별거 없어서 그만뒀다고 한다.

6. 가족 관계



6.1. 문헌황후와 후계자 선정


수문제는 젊었을 적에 북주선비족의 권문세가인 주국대장군 독고신의 14살 된 딸 독고가라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녀가 바로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다. 문헌황후는 어질고 근검절약하며 백성들에게 인자하고 존경받는 황후였다고 전한다. 양견이 일을 마친 후에는 다시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금슬이 좋았는지 밤이 깊으면 서로 안고 잠을 청했다고 한다.
또한 새벽에 일어나서 직접 황제의 세수할 물과 의복을 챙겨준 후 함께 가마를 타고 조정으로 갔으며, 정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조정으로 들어갈 때면 그녀도 남편과 함께 대전 밖까지 나란히 걸어 들어갔다. 당시의 법도로는 아무리 황후라고 할지라도 황제와 함께 나란히 걷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편이 조정에서 국사를 논의할 때에 문헌황후는 대전의 아래에서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그녀는 수시로 환관을 보내 황제의 언행을 살폈고 통치 시에도 수문제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무슨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시정하도록 했다. 원로들에게는 예를 갖추어서 대했으며, 딸들에게는 몸가짐을 신경쓰도록 하였고, 공과 사를 구분해서 형제들을 비롯한 친척들을 엄격하게 단속하였다. 한 예로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 죄를 짓자 황후와 가까운 친척이니 살려주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런 일을 사사로운 정으로 처리할 수 없다며 처벌하게 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의욕과 능력은 별개의 문제였던지라 그녀의 개입이 좋은 결과를 부르지 않았지만 수 문제는 이런 아내의 의견을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아마 자신을 받쳐주는 아내가 있다는 점이 지지 세력과도 싸워야 했던 고독한 제왕의 마음에 크나큰 위안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당장 문헌황후는 자신의 출신 성분이 관롱집단임에도 불구하고 양견의 정치에 지지를 표했다. 그래서 궁궐에서는 수나라에는 두 명의 황제가 있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사실 수문제는 공처가이기도 했는데 부인 덕에 황제가 되었고 부인 또한 행실이 바르고 근검 절약했기 때문에 부인에 대한 어떤 트집도 잡을 수가 없었으며, 서로 상대방을 공경하는 부부 관계였다. 황후는 여걸로써 결혼 시 ‘자기 이외에 어떤 여자도 사랑해서는 안 된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했으며, '자신 이외의 여인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는다.'라는 약속을 받아낼 정도였기에 남편의 여자 문제를 철저하게 통제했다. 또한 첩을 총애하는 대신들에게 벌을 내리거나 파직시킬 것을 권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황제가 절세의 미인을 인수궁에서 우연히 보고 한 눈에 반해 총애했는데, 문헌황후가 문제가 조정으로 들어간 틈을 타서 몰래 그녀를 죽였고, 그녀의 잘린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보여주었다는 얘기도 있다. 이에 문제가 분노했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화가 난 나머지 혼자 말을 타고 산 속으로 미친 듯이 내달렸는데 재상 고경과 양소 등을 비롯한 신하들이 급히 뒤를 쫓아가 진정시켰다. 이때 문제가 깊이 한숨을 쉬며 '''“짐은 지존의 천자인데도 자유가 없구려!”'''라며 한탄했다는데 고경이 일개 부인의 일로 천하의 정치를 버려둘 수 있겠냐며 설득하여 하는 수 없이 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사실 이 일화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얘기도 있으므로 일종의 야사로 보아야 할 듯하다.
이때 문헌황후가 자신을 '''일개 부인'''으로 표현한 고경을 처형했다는 일화도 있다. 물론 이것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대표적으로 여러 명의 아내를 둔 점 등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수문제는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문헌황후의 소생이었다. 그녀의 투기가 하늘을 찔렀으니 다른 여자에게서 아들을 얻지 못한 것도 당연했을 것이다. 양용과 양광을 비롯한 다섯 아들 모두가 정실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겉으로만 봐선 큰 문제가 없었고 문제는 신하들에게 '짐의 아들들은 모두 한 어미의 소생이라 자식들 간에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툴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양견의 아들들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서 치열하게 다투었다. 수문제는 국법에 따라 큰아들 양용을 태자로 삼아 후계자로 결정했다가 양광으로 태자를 바꾸었는데 이는 황후의 입김 때문이었다. 솔직하고 자유분방한 양용은 첩실을 둔 것을 숨기지 않았지만 간교한 양광은 첩실을 숨겼다.
게다가 양용은 태자비가 죽었는데도 별로 슬퍼하지도 않자 평소에 양용을 싫어했던 문헌황후는 자신이 추천한 태자비 원씨가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양용이 그녀를 독살하였다고 믿었다는 소문이 있다 카더라. 하지만 '''이 후계자 책봉은 수 제국 자체를 말아먹은 실책이었다.''' 자세한 수양제의 술수는 수 양제 항목을 참고하시라.

6.2. 그 외의 자식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나머지 아들들도 전부 막장 그 자체였다. 수문제의 셋째 아들 진왕(秦王) 양준(楊俊)은 사치를 심하게 하고 여색을 밝혔으며 백성을 착취했다. 그의 바람기가 얼마나 심했던지, 그의 부인이 남편을 독살하기 위해 독약을 넣은 과일을 먹고 양준은 병을 얻어 죽었다. 하지만 양준은 그나마 일찍 죽은 터라 다른 형제들에 비하면 그렇게 비참한 말로는 아니었다.[13]
넷째 아들 촉왕(蜀王) 양수(楊秀)도 생활이 양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양제처럼 욕심이 많아서 감히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욕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양광의 술수에 걸려들어서 거세되었다.
막내 아들 한왕(漢王) 양량(楊諒)은 그나마 수문제의 자식들 중에서는 정상이었지만 외지에서 세력을 키우며 황위를 노렸다. 수문제가 아들에게 죽자 그는 형에게 죽기 싫어서 장례를 치르러 장안으로 오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군사적으로 무능했기에 양광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어버린 뒤 죽었다.
이처럼 수문제의 다섯 아들은 한결같이 재물과 여색을 탐했거나 서로 우애할 줄을 몰랐다. 애초에 자식들이 하나 같이 이 모양이니 비록 가식이였으나 유일하게 능력이 있으면서 근면하고 검소하게 행동하는 양광에게 눈이 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마도 중국 역사상 최악으로 아들 복이 없는 황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양광이 황궁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수궁을 포위했을 때, 수 문제는 “만약 황후가 살아있다면 짐이 이런 처지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6.3. 가족 관계


  • 황후: 문헌황후 독고씨(文獻皇后 獨孤氏)
  • 아들들
  • 딸들
    • 1녀: 낙평공주(樂平公主): 본래 이름은 양려화(楊麗華). 북주 선제 우문윤의 황후였으나 아버지가 황제가 된 뒤에 낙평공주란 칭호를 받았다. 우문윤 사이에서 딸이 1명 있었다.
    • 2녀: 난릉공주(蘭陵公主): 홍콩 TVB의 무협 드라마 대운하에서 여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드라마상에서의 이름은 양아오 인데..... 다섯 번째 자식이라서 이름을 아오라고 지었다고 언급된다.
    • 3녀: 광평공주
    • 4녀: 의성공주
  • 문제의 후궁들
    • 후궁: 선화부인 진씨(宣華夫人 陳氏)
    • 후궁: 용화부인 채씨(容華夫人 蔡氏)
    • 후궁: 자귀빈(姿貴嬪)
    • 후궁: 위지녀(尉支女)

7. 대중 매체에서


[image]
한국의 사극 연개소문에 뜬금없이 등장한 바가 있다. 연개소문이 젊은 시절에 중원에서 놀았다는 설정 때문에 수 황실이 등장하면서 나왔으며, 배우 김성겸이 연기했다. 1990년대생들에게는 '''마수리 할아버지'''로 유명한 이 배우는 태조 왕건에서 아자개역을 맡았던 배우로 작가도 같았던 덕분에 아자개와 겹치는 부분이 많았고, 아내 눈치만 보는 소심한 공처가로 부풀려서 영락없는 개그 캐릭터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문헌황후의 기질도 상당히 과장되었는데, 아무리 그녀가 당대의 여걸이고 성격이 강했다지만 드라마처럼 황제인 남편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찍어누르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그래도 개그 캐릭터로 묘사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개념 있는 모습도 여러 번 보여주었다. 한왕 양양의 삽질로 30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목숨을 잃자 병사들의 목숨은 파리 목숨이냐고 갈구며 자결을 할 것을 명했으며, 한왕이 목숨을 구걸하며 '아바마마' 라고 외치자 공석에서 응석을 부리냐면서 또 갈구었다. 양광의 계략에 넘어갔다지만 황태자 양용의 사치에 대해 크게 한 마디 하기도 했고, 양용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된 양광의 완벽함에 대해 여러 번 의심하기도 했다[14]. 죽기 직전 병상에서 자신에게 양위를 협박하러 들어 온 양소 앞에서 아들 광의 위선적인 모습을 깨달았지만 자신의 병이 이미 늦었고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음을 알고 "천자에게는 천자에 어울리는 죽음이 있으니 독주를 가져오라. 내가 마시고 죽겠다"[15]고 명하지만 양소는 "그럴 시간 없습니다."라며 거절하고, 양소가 데리고 온 장형에게 칼에 찔려 살해당한다.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죽은 수 문제의 시신 앞에서 벌벌 떠는 궁녀들을 향해 "봐라, 황제께서 병으로 돌아가신 것이 맞지? 편안하게 가셨지?"라며 양소가 으르듯이 말하고 겁에 질린 궁녀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그러하다고 대답하는 장면이 압권. 더불어 양광도 가서 아버지 앞에서 애도를 가장한 고인드립을 하기도.
홍콩 TVB의 무협 드라마 대운하 초반에서 잠깐 등장한다. 배역은 홍콩의 원로 배우 포방, 1987년 3월에 방송을 시작한 이 드라마는 수문제 말기부터 당고조 이연이 왕이 되기까지를 주요 배경으로 하는 무협드라마이자 퓨전사극. 홍콩 배우 양조위가 민담 속의 인물인 '규염객'으로 등장하는데 규염객의 정체로 연개소문이 꼽히는 야사가 존재하고, 이것에 신채호의 갓쉰둥전을 더한 것이 한국 드라마 연개소문의 설정상 배경이어서 위 드라마와 같이 보면 한없이 미묘함을 느낄수 있다.
이 드라마에서의 수문제는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양광의 모함과 계략에 넘어가 사사건건 양용을 갈군다. 수해로 인한 피해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을 위해 구휼을 하였다는 이유로 양용을 죽이려고까지 했다. 말년에 양광의 정체를 알아차리게 되고 이를 두려워한 아들에게 끔살 당하는 장면으로 나온다.
중국사에 손꼽을 명군이지만 이상하게도 미디어에선 취급이 별로 좋지 않다.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연개소문에서는 개그 캐릭터로 전락했고, 대운하에선 아예 암군으로 나오니(...).
서정원의 삼국왕조실록에서는 양제가 문제를 죽이면서 '''"아버지가 문제이시니 그 아들인 저는 문제아지요."'''란 패드립을 치기도 했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중국 왕조가 수나라부터 시작하므로 수 문제부터 목록에 있다. 가계도에는 문제와 황후, 수나라 황족들도 구현되었다.
2019년 방영된 독고황후에서는 배우 천샤오가 수문제를 맡았다. 문헌왕후와의 러브스토리, 수나라의 개국과정을 다루고 있다.#

8. 둘러보기(계보)





[1] 물론 후술되어있듯 이는 당시 유럽과 중국 자체의 시대적 상황 차이 때문도 있었다. 그리고 하트의 말대로 수 이후 중국이 끝까지 통일 국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오대십국시대의 대립 시기나 이 대부분을 차지했을 때 남송이 멸망하지 않은 채 버틴 적도 있었기 때문. 심지어 오늘날에서조차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중국은 통일 국가가 아니다. 하트가 이야기 한 것은 중화 제국이라는 관념상의 얘기도 포함해 말하는 것이다.[2] 사실 능력 자체는 고평가받지만, 자식이 그 명성을 헛되게 만들어서 수성을 못한 측면이 있다. 구 황족들을 싸그리 몰살시킨 점도 있고.. 이런 점에서 보자면 진시황과도 비슷한 측면이 있다. [3] 혹은 개황의 치(開皇之治)[4] 태조(太祖) 무원황제(武元皇帝)로 추존.[5] 이름은 여고도(呂苦桃)로 원명황후(元明皇后)로 추존.[6] 다만 선비계 가문이 북위 이래 한족화 되는 과정에서 홍농 양씨의 족보를 위조한걸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7] 현대에도 중화민국(대만)의 행정구역에 향진시구, 리통반으로 남아 있다.[8] 진시황이 하루에 150근의 서류를 저울에 재어놓고 모두 처리하기 전까지는 식사도 하지 않았다는 형석정서(衡石程書)라는 고사성어와 함께 국왕이 모든 국정을 자신이 나서서 도맡아하는 경우를 가리킨다.[9] 수문제가 재위 중이던 606년 수나라 인구가 890만 7천여 호(약 4,600만 명으로 추정), 당현종 재위 당시인 754년경의 당나라 인구가 906만 9천여 호(약 5,288만 명으로 추정). 즉, 이 말은 수문제의 아들인 수양제가 이후 복구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개막장짓을 했다는 거다.[10] 요동의 (糞) 땅(土), 그러니까 자신을 최대한 낮춰서 "쓰레기 같은 땅에 있는"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11] 두건덕은 수문제 때 고구려에 패배했다 발언하고(문황제(수문제) 시절 천하가 강성하여 백만대군을 일으켰음에도 오히려 고려에 패배하였다.(文皇帝時, 天下盛彊, 發百萬衆伐遼東, 猶爲所敗)-구당서 두건덕전), 독고황후와 수양제 역시 전쟁을 복기하며 당시 고경의 지략이 모자라서 고구려에 패배했다고 발언한다. 고당전쟁 때도 마찬가지로 당나라의 피해를 축소한 정황들이 많기 때문에 여러모로 걸러 듣는 것이 필요한 부분.[12] 수양제의 조서를 보면 제후국의 예를 따르지 않았으며, 조서를 직접 받지도 않는다고까지 표현한다.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이 오면 부복하고 조서를 받고 내부에서 황제를 칭한 고려조차도 송나라 사신과 조서에 대한 예는 깍듯했다 기록된 것을 생각하면, 중국 사신에게 절 시키고 오라가라 하는 조공국이 있다는 사실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13] 그의 아들인 양호는 큰아버지 양광이 시해당한 후 그를 시해한 우문화급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나 곧 살해당했다.[14] 극중에서 양광은 황위에 오르기 전까지 철저히 연기를 하면서 본 모습을 숨기고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인물로 행세했는데, 문제는 인간이란 결코 완벽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완벽하게 보인다는 것은 분명히 숨기는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후 병이 깊어지면서 '황태자가 다 알아서 하겠지, 뭐~' 하는 태도를 보였다는 점은 변호 불가.[15] 그전에도 실제 역사처럼 황후의 선택이 수나라를 망쳤다, 황후가 다 망쳤다고 한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