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안황후 곽씨

 


1. 개요
2. 생애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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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안황후 곽씨(懿安皇后 郭氏, ?~851년)
헌종황후이며 목종의 모후이다. 그 외의 자녀로는 기양공주(岐陽公主)가 있다.
곽자의의 아들 대국공(代國公) 곽애(郭曖)와 당 대종의 딸인 제국소의공주(齊國昭懿公主)[1]의 딸이다.

2. 생애


정원 9년(793)년에 당시 광릉군왕(廣陵郡王)이었던 헌종의 광릉군왕비(廣陵郡王妃)가 되었다. 당시 태자였던 순종은 곽씨의 어머니가 황실 출신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국가에 큰 공훈이 있다는 이유로 며느리인 그녀를 총애했다. 결혼한 지 2년 만인 정원 11년(795)에 목종이 출생한다.
헌종 재위기에는 헌종의 정실이었으나 황후가 되지는 못했고 최고 수준의 대우인 귀비(貴妃)에 머물렀다.
그 이유는 현종 이래로 후비가 생전에 황후로 봉해진 경우는 숙종의 황후 장씨 뿐만이었는데, 이는 숙종의 즉위 과정에서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대한 보답이었을 뿐이었기에 따라서 그녀의 아들을 태자를 책봉한 뒤 약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올라온 태자 지지파 관료들의 황후 책봉 건의를 헌종은 거절한다.
목종이 황제가 되자 황태후로 존숭되었다. 목종은 환관들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 이후 자주 상을 내리는 등 환관을 우대했고, 곽태후 역시 환관들을 입양하기도 했다. 이것은 명백한 목종 시기 정치국면의 위기였다.
목종 사후, 장경 말년에는 그녀로 하여금 조정의 일을 맡아 처리하도록 부추기는 자도 있었지만, 그녀는 모두 거절했다. 아들 목종이 죽은 이후에도 경종, 문종, 무종 3대가 이어지는 기간 동안 흥경궁(興慶宮)에 거주하며[2] 국가 중대사에 영향을 끼쳤다.
선종 시기에는 그때까지 지극한 예우를 받아 오던 태황태후인 그녀에 대한 대우가 박해졌고 심지어 선종은 그녀가 헌종 살해사건을 공모하지 않았는가 의심했다.[3] 결국 대중 2년에 근정루에서 뛰어내리려는 사태가 발생했고 주변인들이 막아 일이 실제로 터지지는 않았으나 선종은 이에 대해 불쾌해했다.[4] 공교롭게도 곽태후는 그날 밤 갑작스럽게 사망한다.[5] 선종은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곽태후를 헌종의 무덤인 경릉(景陵)의 외원에 묻었고, 실제 신분보다 품위가 떨어지는 등급의 형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당시 그녀와 선종의 관계에 대해 유행하는 말은 다음과 같았다.

'''''헌종이 그녀의 시작을 올바르게 열어 주지 않았고, 끝내 선종도 그녀의 마지막을 정도(正道)에 맞게 해주지 않았네.'''''

이를 통해 선종이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가졌던 의심과 분노를 확인할 수 있다.

3. 참고문헌


임사영, 류준형 옮김, 『황제들의 당제국사』, 푸른역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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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알려진 승평공주(昇平公主)의 다른 이름[2] 그래서 그녀의 별칭이 흥경궁태후이기도 했다.[3] 곽태후는 어머니 격이었지만, 선종의 생모는 효명황후 정씨로 다른 인물이다. 또한 선종은 자기 아버지인 헌종의 죽음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선종 문서의 내용 참고[4] 자신이 곽태후를 박대하고 있다는 것이 정면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불효가 되어 자신의 도덕적 명분에 해가 가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5] 그녀의 사망에 대해 역사서에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다. 이에 따라 그녀의 타살 가능성을 의심할 수 있으며, 선종의 태도에는 그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어 보인다. 이에 대해 이미 궁중에서는 여러 소문이 난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