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당)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당 제8대 황제'''
'''代宗 睿皇帝 | 대종 예황제'''
'''묘호'''
'''대종(代宗)'''
'''시호'''
예문효무황제(睿文孝武皇帝)
'''연호'''
광덕(廣德, 763년 7월 ~ 764년)
영태(永泰, 765년 ~ 766년 11월)
대력(大歷, 766년 11월 ~ 779년)
'''출생'''
726년 11월 11일
'''사망'''
779년 6월 10일 (54세)
'''재위'''
'''당의 황제'''
762년 5월 18일 ~ 779년 6월 10일 (17년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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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
이(李)
''''''
예(豫)
'''부모'''
부황 숙종, 모후 장경황후
'''황후'''
예진황후,[10] 정의황후[11]

1. 개요
2. 생애
2.1. 황제 이전의 삶
2.2. 이보국을 제거하다
2.3. 정원진의 세도
2.4. 회흘의 성장과 안사난의 진압
2.5. 토번의 장안 함락과 정원진의 실각
2.6. 복고회은의 난과 곽자의의 대활약
2.7. 끝나지 않는 전란
3. 평가
4. 대중매체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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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당나라의 제8대 황제. 당숙종 이형의 장남이며[1], 어머니는 추존된 장경황후 오씨이다. 휘는 예(豫). 초명은 이숙(李俶).
묘호는 대종(代宗). 시호는 예문효무황제(睿文孝武皇帝)로 줄여서 예황제(睿皇帝)[2], 능호는 원릉(元陵)이다.

2. 생애



2.1. 황제 이전의 삶


황태손의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광평왕 이숙(廣平王 李俶)으로 살았다. 안사의 난으로 아버지가 분조를 이끌고 영무에서 즉위할 때 동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천하병마(天下兵馬) 원수로 임명되었고, 757년 9월 장안, 낙양 양경을 함락할 때 초왕(楚王)에 봉해졌다가, 758년 성왕(成王)을 거쳐 그 해 5월 황태자가 되었다. 이때 이름을 이계로 고쳤다. 안록산의 난으로 장안을 공략할 때 회흘(위구르 제국)의 친왕 엽호가 파견되자 그와 의형제를 맺겠다고 말할 정도로 그를 극진히 대접했다. 당 숙종은 원군을 하루빨리 얻어내기 위해 장안을 수복하면 "황금, 비단, 자녀"의 약탈을 허용한다고 했는데, 이때 이숙이 절을 하며

"지금 처음으로 서경(장안)을 얻었는데 만약 갑자기 포로로 잡고 약탈하면 동경(낙양)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역적(=안경서)을 위하여 굳게 지켜서 다시 차지할 수 없게 될 것이니, 바라건데, 동경에 도착하면 마침내 약속대로 하시지요."

라고 엽호를 달래어 맞절을 받고 장안의 약탈을 막아 칭송을 받았다. 후일 낙양을 수복한 후에는 부호들에게서 비단 1만필을 거둔 후, 그걸 줘서 약탈을 막았다. 하지만 사사명의 난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숙종의 말년은 그야말로 혼란 그 자체였다. 의붓 어머니 장 황후는 환관 이보국과 함께 전횡을 일삼았으며, 그 과정에서 군재가 있던 친동생 건녕왕 이담(建寧王 李倓)이 모함으로 죽자 그는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얼마 뒤 장 황후와 그녀의 맏아들 셋째 이계는 이보국과 이예를 함께 죽이려고 하였고, 이들은 이보국에 의해 발각되어 유폐되었으나 숙종이 충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할아버지 당현종과 아버지 숙종이 급서한 상황에서 그는 황제로 올랐다. 762년 5월 23일의 일이었다.[3] 최초로 '''환관에 의해 제위에 오른''' 황제가 된 것이다.

2.2. 이보국을 제거하다


당 대종은 이보국을 처음부터 위험 인물로 적대시하고 있었으나 이보국이 금군(친위대)의 지휘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일단 이보국을 상보(尙父)[4]라 칭하며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모든 업무에 있어 자문을 듣는 등 그를 추켜세우는 모습을 보여 안심시킨다. 또한 이보국이 꿈에 바라마지 않던 삼공의 지위(사공)와 재상직(중서령)까지 주기도 했다(6월 4일) 이보국은 정말 재상이 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 숙종이 죽기 전인 3월에는 전해에 자신이 재상이 되는 것을 반대했던 소화를 파직시켜 버릴 정도였다.
하지만 이보국의 세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7일 만에 정원진이 정변을 일으켜 행군 사마와 병부상서직에서 파직되어 군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대종은 정원진을 대판 원수 행군 사마로 삼음과 동시에 이보국을 황궁에서 내보내 밖에 있는 집에 살게 만들었으며, 13일에는 중서령에서도 파직시켰다. 대종은 그에게 박육왕을 내려 달랬고, 이보국도 자신의 실각을 인정했다. 이보국은 벽지로 유배되었으나, 결국 그해 10월 암살되고 만다. 그는 이상하게도 머리와 오른팔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대종은 그에게 후한 장례를 내려주었다.

2.3. 정원진의 세도


늑대가 가면 호랑이가 오는 법이다. 환관 정원진의 세도 역시 만만치 않았다. 회남의 절도사였던 내진이 숙종의 부름에도 오지 않자 오랜 의심을 사고 있었는데, 결국 당 조정이 그의 권한을 줄이려고 하자 조현하고 용서를 빌었다(762년 8월). 당 대종은 그를 후대했으나, 정원진은 내진이 사조의 측과 짜고 왕중승을 구원하지 않았다고 참소했으며, 결국 다음해 내진은 관직이 깎이고(1월 28일) 파주로 유배가다가 도중에 처형당한다. 이를 통해 당 조정은 절도사들의 원한과 의심을 사게 되었고, 결국 대종이 절도사 직을 뿌려야하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이런 정원진의 세도, 횡포는 토번의 침공으로 그가 실각할 때까지 계속된다.

2.4. 회흘의 성장과 안사난의 진압


한편 이 5년 사이 회흘은 북방의 최강자로 거듭나게 된다. 연황제를 자칭하는 사사명의 아들 사조의와의 대치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사조의는 당의 국력이 쇠약해진것을 틈타 회흘과 손을 잡으려고 하였다. 중사 유청담이 '''"(대종 황제는) 바로 예전의 광평왕이었으며 엽호와 함께 양경을 수복한 분입니다."'''라고 회흘을 설득해도 별로 먹히지 않았던 상황. 그러나 회흘이 사조의를 지원하려 군대를 파견하자, 전중감 약자양을 파견해 회흘 측을 접대하게 하였고, 약자양의 접대를 받은 회흘 측은 선대 비가월 가한(카를륵 카간)의 국구(장인)인 삭방 절도사 복고회은을 만나보기를 요청했다. 복고회은은 손쉽게 회흘을 설득하였고, 재물을 미끼로 회흘의 진군을 얻어내게 된다.
당 대종은 옹왕 이괄(후의 당덕종)을, 숙종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천하 병마 원수로 삼고, 복고회은을 보좌역(실질적 총사령관)으로 돕게 하였다. 그러나 이때 옹왕은 '''숙부인 가한에게 춤을 추라'''라는 모욕을 당했고, 반대하던 당의 신하들이 채찍 100대를 맞다가 죽어나가는 수모를 당했다. 그리고 소각사 전투의 승리로 복고회은에 의해 빼앗겼던 낙양이 재수복되자, 5년전 대종이 말했던 대로 회흘의 대약탈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백당사로 몰려든 백성들에게 불을 질러 1만명이 죽었다. 역적 처형을 빙자한 당 본군의 약탈도 만만치 않았으되, 옹왕(덕종)에게는 이것이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남았다. 여하간 대란은 763년 1월, 사조의가 자결하면서 끝이 났다. 당 대종은 사사명과 같은 사례를 막기 위해 투항한 모든 군웅에게 하북의 모든 지역을 나눠주어 절도사로 봉했다. 멋대로 반란을 일으켜 절도사를 사칭한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것이 '''번진 난립'''의 시작이 되었다. 또 대종은 763년 7월에는 연호를 광덕으로 고첬으며, '보응원성문무효'라는 존호를 받았다. [5]

2.5. 토번의 장안 함락과 정원진의 실각


가르친링 사후 약해졌던 토번은, 안사의 난 사이 당에 열세였던 국력을 회복하고 장안 서쪽 100리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런 상황에서 선제인 당 숙종은 침략을 막기위해 매해 5만필의 비단을 바치고 있었다. 그런데 당 대종이 즉위하면서 이를 그만두었다. 새로 즉위한 13세의 토번적송덕찬(치쏭데찬(赤松德贊))은 격노하였고,이를 빌미로 당의 영토를 넘보기 시작했다. 763년 당시 '''대진관으로 들어와 하서와 농우의 모든 당의 영토를 점령한 것'''은, 당의 서역으로 가는 목구멍을 막은 것으로, 사실상 전역이 상실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토번은 진군을 멈추지 않고, 그해 10월, 다짜뤼공이 무려 '''20만 병력'''을 동원해 검남(쓰촨성 일부)과 관중으로 밀고 들어왔다.
결국 10월 7일 대종은 섬주(陝州)로 피난했고, 10월 9일 토번은 빈 장안에 입성했으며, 허수아비 황족 이승굉을 당 황제로 세우는 만행을 저지른다. 하지만 돌아온 부원수 곽자의의 활약으로 12일(혹은 15일)만에 성을 비웠다. 이 엄청난 활약은 곽자의 항목 참조. 참고로 그가 초기에 움직일 수 있었던 병사는 고작 수십, 수백이었고, 토번군을 원군 소문으로 도망치게 할 때 그가 모은 병사는 고작 수천이었다는걸 상기하자. (토번에 풍토 전염병이 돌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이미 약탈이 끝난 상황이기도 했다.) 한편 토번의 침공이 저지되자 그동안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린 정원진은 11월 2일 삭탈 관직되어 낙향을 명받았는데, 계속 복권의 기회를 노리고 장안을 떠나지 않자 귀양에 보내졌다.
하지만 여전히 전란은 끝나지 않았다(...)

2.6. 복고회은의 난과 곽자의의 대활약


토사구팽을 두려워하던 대녕 군왕/삭방 절도사/중서령 복고회은은 태원의 하동 절도사 신운경과 갈등하다가 조정의 알현을 거절하고 764년 1월, 기어이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곽자의의 명성에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태원와 유차를 공격했으나 실패하니 영무로 들어가 '''토번과 회흘의 12만 대군을 불러버렸다.'''(764년 8월) 이런 상황에서 7월 이광필이 사망하였지만, 곽자의를 다시 파견한 당은 한번의 기습으로 12만 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10월 8일) 하지만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았다. 765년 9월 다시 회흘·토번(10만)·토욕혼·당항족·노랄로 이루어진 5국 연합군(...)을 불러온 것.. 근데 정작 복고회은은 남하중 병사하고, 그저 약탈 집단으로 변신한 5국 연합군이 그나마 맛이 가버린 복고회은 잔당을 무시하고 그대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곽자의는 하중에 있어 봉천을 비웠고, 당 대종도 금군을 거느리고 나서야했다. 선봉의 토번군으로 인해 수천 병사만 남은 장안이 함락 직전에 몰리자 금군을 장악한 환관 어조은 등이 하중으로의 파천을 건의(반 협박반)했으나, 곽자의가 상소로 이를 물리쳤는데, 과연 9월 하순에 큰비가 내려 토번군은 후방으로 물러났다.
다시 토번이 10월 회흘과 연합하여 다시 곽자의가 있는 경양까지 진군해 포위하자(10월 8일), '''곽자의가 단기 필마[6]로 회흘 진영으로 찾아가 설득해 당나라와 손을 잡게 했다.''' 당과 연합한 회흘은 10월 15일 토번군을 격파하고 '''토번의 약탈물을 약탈했으며''', 이에 당 대종은 회흘에게 비단 10만필을 내리고, 약속대로 회흘의 국구 복고회은의 잔당을 관대하게 용서함으로써 난을 진압했다.
이때 곽자의의 나이가 일흔, 대종은 마흔이었다.

2.7. 끝나지 않는 전란


하지만 여전히 내란은 끝나지 않았다. 사천에서는 절도사를 자칭하는 이들의 분란이 끊이지 않았고, 동화주지사 주지광이 767년 난을 일으켰다가 토벌되었다. 2월 6일, 곽자의는 주지광 진압과 뒷처리를 마무리짓고 장안으로 돌아와 조현하였다. 이때 대종은 당대의 권신이었던 원재, 왕진, 환관 어조은 등에게 명령하여 돌아가면서 집에서 술자리를 열게 했는데 한번 모일때마다 소모된 비용이 10만 민(당시 통화 단위)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이렇게 곽자의가 장안에 있을 때에 일어난 유명한 에피소드가 고사성어 '장롱작아(裝聾作啞)'. 대종은 딸 승평공주(昇平公主)를 곽자의의 아들 곽애(郭曖)와 결혼시켰는데, 곽애와 승평 공주가 부부싸움을 하다 화가 난 곽애가 승평 공주에게 "네가 의지하는 건 네 아버지가 천자이기 때문이냐? '''나의 아버지는 천자를 가볍게 보아 천자를 안하는 것이다'''"라고 소리쳤다. 승평이 이를 대종에게 고하니 대종은 '''"그말이 맞잖아. ㅇㅇ"'''[7](..)라며 딸을 타일러 보냈고 곽자의가 후에 사죄하고 곽애에게 곤장을 쳤다. 이때 대종이

'바보가 아니고 귀머거리가 아니면 가장 노릇을 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지 않소(鄙諺有之, 不癡不聾, 不作家翁)'

라며 딸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곽자의를 달랬으니, 귀머거리로 꾸미고 벙어리인 척 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
768년, 토번이 3년 만에 다시 10만을 이끌고 노략을 하러 왔으나, 곽자의가 봉천에서 출진해 또 토번을 연파했다. 이 와중에 곽자의를 참소하던 환관 어조은은 재상 원재와 갈등하다가 살해당했으며(770년 3월), 원재 역시 크게 부패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원재와 그에 빌붙은 왕진은 777년에야 대종에게 숙청당한다.
773년 8월, 토번은 16만 대병으로 또 쳐들어왔는데, 나이 어린 삭방 병마사 혼감이 장수들과의 불화로 1차 저지에 실패했으나 곽자의가 혼감을 다시 믿고 경원 절도사(경주) 마린과 함께 다시 공격하게 하여 물리쳤다. 775년 9월 토번이 또 침공했는데, 봉상 절도사 이포옥과 마린에게 패해 물러갔으며, 776년에도 침공했으나 증병에 성공한 곽자의가 쉽게 이들을 격퇴했다. 하지만 기어이 서역과 당나라를 이어주던 실날같던 난주가 함락당했다. 778년 회흘이 다시 적대적으로 돌아서 당을 약탈했으나, 5년 만에 돌아온 혼감이 이들을 막아냈다.
775년(대력 10년)에는 절도사 진압 문제에 손을 대기 시작했지만, 여기서도 굴욕을 당했다. 당시 하북의 절도사 중 최강의 힘을 자랑하던 것은 천웅군 절도사 전승사였는데, 전승사는 자신의 힘을 믿고 주변 절도사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과시하여 여러 절도사과 갈등을 빚었다. 그 결과 평로(치청) 절도사 이정기와 성덕 절도사 이보신을 축으로 하여 전승사에 대한 토벌령을 내려달라고 조정에 청원하자 당 대종은 이를 절도사 진압의 기회로 여기고 주변 9개 절도사들에게 전승사에 대한 토벌령을 내렸다.
처음에는 잘 되는 듯 했다. 이정기, 이보신은 둘 다 천웅군 번진에 못지 않는 거대 번진의 절도사였고, 따라서 사방에서 공격받은 전승사는 얼마 못가 많은 영토를 상실한다. 그런데, 전승사를 적당히 두들기고 영토도 뺏었다 싶자, 저 둘이 전승사와 사돈 관계를 맺고는 조정에 전승사를 용서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리고, 토벌에 참가했던 다른 절도사들도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의사를 보이면서 전승사와 동맹을 맺고는 '''역으로 조정을 압박, 결국 그 다음해인 776년에 사면령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이는 당 조정의 입장에선 큰 굴욕이었다. 대부분의 군사력이 토번의 침공 저지에 돌려져 있었던 당의 입장에선 절도사들의 반기를 무력으로 진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 대종은 779년 5월 21일(혹은 23일) 사망했다. 향년 54세. 죽기 직전에 곽자의를 섭총재로 삼아 당덕종을 보좌해 줄 것을 명하며 후사를 부탁했으니, 곽자의는 2년 뒤 최고의 자리에서 영화롭게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태자 시절에는 군재를 제법 보였지만, 제위에 오르고나서는 호구같은 면모들을 피할 수 없었던 황제. 가히 곽자의가 아니었으면 사직이 지탱되지 않았다고 할 정도[8]. 나중에는 거의 "곽자의님이 다 해주실거야" 수준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리고 곽자의님은 '''다해주셨다(...)''') 그래도 어려운 처지에서 외적들을 스스로 몰아낸 것,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 권신들을 차례로 숙청한 것 등에서는 아버지 숙종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였다. 곽자의의 등뒤에 칼을 꽂지 않는 등 사직을 말아먹지 않은게 어디냐라는 평도 상당하다.
이런 전란의 와중에 불교에 심취하여, 불교 사찰에 많은 토지와 면세 혜택을 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의 재정이 한층 더 악화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2017년 방영된 중국 드라마 《대당영요》의 주인공으로, 광평왕이었던 시절부터 대종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대당영요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인 크루세이더 킹즈 2의 769년 시나리오에서 등장하는 중국의 황제가 바로 당대종이다. 근데 이 게임의 시스템 상[9], 본인의 대에서 나라가 망하고 대종 본인도 제위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5. 둘러보기


'''''' '''태위'''
이성기

'''이예'''
757~758

이광필



[1] 단 서장자이다. 당나라 중기에는 서장자의 계승이 일반적이었다.[2] 당 대종의 황후가 예진황후이다. 당 대종의 시호는 일반적으로 예가 쓰인다. 효자와 관련된 시호로는 특이케이스.[3] 즉위식 날짜로 추정[4] '상부'라고 읽지 않는다. 태공망, 여불위 등이 왕에게서 받았던 직위이며, 대략 "너님 울 아부지(선왕)랑 동급임ㅇㅇ"정도의 의미. 그런데 동탁은 자칭했다.[5] 이때 아버지가 11월을 정월로 했듯이 4월을 정월로 했다는 말이 있다.[6] 회흘 진영에 가서는 스스로 정말 무장 해제까지 했다![7] "네 남편의 말이 맞다, 저들이 천자가 되고자 한다면 천하는 저들의 것이다."[8] 곽자의는 현종 파천때의 숙종 때처럼 새 황제를 세우자는 권유도 많이 받았었다![9] 중국이 혼란 상태에 빠졌다든가, 플레이어가 자기 가문의 사람을 중국의 황제로 옹립하기 위해 안서도호부를 상대로 건 전쟁에서 승리할 경우, 즉각 왕조가 갈아치워지고 황제가 폐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