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종(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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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당나라의 제16대 황제. 당헌종의 13남으로 당목종의 이복 동생이다. '''당나라의 마지막 중흥 군주'''로 평가받으며, '''중국판 클라우디우스'''[1] 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2. 초기 생애
당 선종의 어머니 정씨(효명황후로 추숭)는 원래 진해절도사 이기(李錡)의 애첩이었는데 이기가 반란을 꾀하다가 주멸당한 후 헌종이 정씨에 눈독을 들여 동침한 뒤 선종을 낳았다. 천한 첩 소생에 13남이라 황위는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선종은 황숙으로 조카였던 문종이 죽고, 뒤를 이은 또 다른 조카 무종이 단약을 먹다가 중독사하자 환관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했다.
헌종의 13남에 조카들의 뒤를 잇는 역상속[2] 을 감행하면서까지 황제가 된 비결이 뭐냐면.. '''멍청해서'''였다. 그는 어리석어서 삼촌인 그를 조카인 무종이 농담하고 장난치며 노는 상대로 여겼다.[3] 무종이 죽은 뒤 환관들은 어리석은 그가 통제하기 만만하다고 여겨 옹립했으나... 실제로 선종은 환관 세력에 대해 그다지 무력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의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선종의 즉위에는 환관들의 공로가 컸는데, 이 중에도 신책군중위 마원지(馬元贄)의 공훈이 가장 컸다. 선종은 그에 대해 매우 특별하게 대우했고 자신의 옥대(玉帶)를 상으로 하사하기도 했다. 당시에 마원지는 재상 마식(馬植)과 의형제 관계를 맺으며 깊은 교분을 나누었는데 그에게 선종이 하사한 옥대를 선물했다. 어느 날, 궁내 대전에서 재상들과 정무를 논의하던 선종은 마식이 차고 있는 옥대를 알아보고는 마식에게 그 출처를 물었다. 이튿날 마식의 재상 직임을 박탈하는 파직 조서가 내려졌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선종은 주변에 있는 대신들과 환관세력의 지나친 팽창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자주 논의하곤 했는데, 대신들은 혹시라도 태화 연간의 감로지변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까 두려워했다. 심지어 영호도조차 해결방안이라고 건의한 것이 “죄를 지은 환관이 있으면 사면을 해 주지 말고 환관의 관직에 자리가 생겨도 새로운 환관을 임명하지 않는다면 자연히 환관세력은 쇠락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는 수준이었다. 이는 선종시기 관료들이 선종과는 달리 환관의 득세에 무기력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3. 당나라의 마지막 수호자
당 헌종에 이은 당나라의 마지막 중흥 황제로 손꼽히며 당태종에 버금가는 '''작은 태종'''(小太宗)으로 불렸다.
정관정요를 즐겨 읽으며 과거제를 부활시켰다.후대 역사가들은 선종에 대해 세 가지 업적을 성취한 황제라고 평가한다. 첫째는 권력을 갖고 있던 지방 호족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고, 둘째는 간신(奸臣)들에게 법의 무서움을 알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환관들의 세력진작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을 든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를 명군(明君), 영주(英主)로 칭송했다. 선종의 50년 인생을 돌이켜 보면, 선황들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 쉼 없는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당 제국이 쇠락하는 추세를 되돌리지는 못했지만,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는 역할은 할 수 있었다. 제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너지는 고층빌딩을 홀로 바로 세울 수는 없는 법이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이덕유, 설원상 등 이당의 주요 인물들을 파직시켰다.[4] 이에 대한 전조는 <자치통감>의 회창 6년 2월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삼무일종의 폐불 정책을 중단시키며 불교를 재중흥시켰다.갑자일에 황상(무종)이 붕어하였다. 이덕유를 섭총재(攝冢宰)로 하였다. 정묘일(26)일에 선종(宣宗)이 즉위하였다. 선종은 평소에 이덕유가 전횡하는 것을 미워하여서 즉위하는 날에 이덕유가 책(冊)을 받들었는데, 이미 끝나고 나자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바로 나와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은 태위(太尉)가 아닌가? 매번 나를 돌아볼 적마다 나로 하여금 머리카락을 떨고 서늘하게 만들었소.” 사마광 <자치통감>
"불교는 이방의 종교이지만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니 지나치게 훼손할 수 없다."
윤월에 칙서를 내렸다. “응당 회창(會昌) 5년에 철폐된 사찰 가운데 승려가 집을 짓고 지붕을 이을 수 있으면 그곳에 스스로 사는 것을 허용하고 유사가 금지할 수 없도록 하라.” 이때에 군왕과 재상은 회창(會昌) 시절의 정치를 돌이키는데 힘을 썼으니, 그러므로 승려와 비구니의 폐해는 모두 그 예전으로 돌아갔다. 사마광 <자치통감>
4. 30년이 걸렸지만 아버지의 복수를 하다
헌종이 왕수징에게 독살당하였다는 사실은 정설로 보여진다. 즉위 후 문종조차 시도하지 않았던 헌종 독살의 진모를 어느정도 밝혀냈다.[5] 우선 친모인 정씨를 효명태후로 추존하고 의안태후(목종의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자, 의안태후가 자살쇼를 벌였고 "죽게 내버려 두지 왜 죽였냐!"라고 일갈한 뒤에 목숨을 빼앗았다.[6]
그후 선종은 영호서(令狐緖), 두승(杜塍), 백민중 등의 각료진을 완비하고 대중 4년 영호도를 중용함으로써 각료진이 완성된다.
회창 6년(846) 4월, 친정(親政)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종은 재상을 직임을 받고 있던 태위(太尉) 이덕유에게 명예직인 사도(司徒)를 수여하고 강릉윤(江陵尹), 형남절도관찰처치사(荊南節度觀察處置使)에 임명했다. 이는 실제 이덕유를 조정에서 쫓아내는 조치였다. 이 대신 진사 출신이자 백거이의 친척동생인 백민중(白敏中)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영호도(令狐綯)를 중용했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5. 직접적인 정치
당쟁(우이, 牛李)을 해소시키는 작업이 이때 이루어졌다.
40여 년을 이어 온 당쟁은 이덕유의 폄직과 죽음으로 끝나는데 이는 선종 대중 연간의 일에 해당한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또한 토번의 내분을 틈타 토번을 공격하여 하황을 수복했다.회창 6년(846) 4월, 친정(親政)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선종은 재상을 직임을 받고 있던 태위(太尉) 이덕유에게 명예직인 사도(司徒)를 수여하고 강릉윤(江陵尹), 형남절도관찰처치사(荊南節度觀察處置使)에 임명했다. 이는 실제 이덕유를 조정에서 쫓아내는 조치였다. 이 대신 진사 출신이자 백거이의 친척동생인 백민중(白敏中)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영호도(令狐綯)를 중용했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5년(851) 8월 사주자사沙州刺史 장의조張義潮가 과瓜 ․ 사沙 ․ 이伊 ․ 숙肅 등 11주 호구戶口를 들어 내헌來獻하였다. 하롱河隴이 번蕃에게 함몰된 후 100여 년이 지났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고지故地를 모두 얻었다. 이에 사주를 귀의군이라 하고 장의조에게 도사 직임을 제수하였다. 정병준 <『唐會要』·『通典』·『新唐書』의 ‘節度使’ 기사 검토>
이 때 감로지변의 무고자들 600여명을 사면하기도 했는데 감로지변을 말아먹은 이훈과 정주는 제외되었다.무종武宗과 재상 이덕유는 이미 하황을 수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행은 없었다. 선종이 계위한 후 계속 하황정책에 따라 무력 수복을 진행시켰다. 대중 3년(849) 2월 토번의 진, 원, 안락, 삼주에 이르는 석문 등 7개 관문의 인민이 혼란을 틈타 봉기하여 당에 들어왔고 선종은 태복경太仆卿 육담을 선유사宣谕使로 이끌도록 하였으며, 장원, 풍상, 빈녕 절도사가 출병에 응대하여, 6~7월까지 3주의 7관을 회수하였다. 张卫东 <唐宣宗“大中政治”述评>
그러나 이런 중흥 황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페이크가 있었다. 이는 신당서에만 드러나는 것인데, '''비약을 즐겨 복용하며 탐색하고 황음했다는 것.''' 그러면서도 첩들을 때려 죽이기도 했다. # 결국 중흥 황제지만 한편으로는 주색을 탐닉하고 있었던 것. 이 때가 당나라의 마지막 중흥기였으나, 말년에는 강남 번진의 병란까지 일어나면서 동시에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결국 당은 50년 뒤의 사망 플래그를 제대로 세우게 된다.[7]
시호는 원성지명성무헌문예지장인신총의도대효황제(元聖至明成武獻文睿智章仁神聰懿道大孝皇帝). 줄여서 성황제(成皇帝).
사실상 마지막 당나라 명시인 백거이가 이때 죽었다.
6. 후계문제
선종의 장남인 이최(훗날 의종)가 본디 황위 계승 1순위였으나, 선종은 이최를 매우 꺼렸으며, 제일 유능한 4남인 기왕(夔王) 이자(李滋)[8] 에게 황위를 물려주려다가 '''황태자 책봉을 못하게 되었다.'''[9]
이런 황태자 책봉의 추이는 세 기록을 보면 확인 가능하다. 각각 <자치통감>의 선종 대중 4년, 대중 10년의 기록과 张卫东의 논문인 <唐宣宗“大中政治”述评>의 자료에 나타난 기록이다.
무진일(30일)에 호부시랑 위모魏暮를 동평장사로 삼고, 여전히 판호부判戶部로 하였다. 이 당시에 황상의 춘추春秋가 이미 많았으나,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는데 신하들은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위모가 들어가 감사하고 이어서 말하였다. “지금 해내海內가 무사하나, 오직 아직 태자를 세우고 올바른 사람으로 하여금 돕고 인도하도록 하지 않았으니, 신은 가만히 걱정으로 여깁니다.” 또 눈물을 흘렸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중히 여겼다. 사마광 <자치통감>
결국 단약 중독으로 선종이 사망하자, 당연히도 이자가 대통을 잇는다고 선언되었고, 환관들도 대부분 동의하였지만, 좌군중위 왕종실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이자와, 왕귀장, 마공유, 왕거방 등을 모조리 죽이고 이최를 옹립해버렸다.황상이 배휴裴休에게 명령하여 시사時事를 극단적으로 말하도록 하여 배휴가 태자를 속히 세울 것을 청하니, 황상은 말하였다. “만약 태자를 세우면 짐은 끝내 한가한 사람이 된다.” 배휴는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사마광 <자치통감>
이렇게 붉은 태양은 서서히 내려앉았고, '''당나라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걷게 되었다.'''대중 조정은 마지막까지, 환관문제에 처음부터 끝까지 매달려 있었으나 실질적인 돌파는 없었다. 동시에, 선종은 태자를 세우는 때를 놓치게 되었고, 최후에, 환관의 안배를 통해, 혼란을 초래한 의종이 즉위한다. 张卫东 <唐宣宗“大中政治”述评>
7. 기타
왕건의 조부인 작제건이 당숙종의 아들이란 설을 충선왕 앞에서 원나라 한림학사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까자 고려의 신하 민지가 그건 잘못 쓴 것이고 사실 숙종이 아니라 선종의 아들이라며 둘러댄 경우도 있다. 당숙종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