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종(당)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당 제14대 황제'''
'''文宗 獻皇帝 | 문종 헌황제'''
'''묘호'''
'''문종(文宗)'''
'''시호'''
원성소헌효황제(元聖昭獻孝皇帝)
'''연호'''
태화(太和, 827년 2월 ~ 835년)
개성(開成, 836년 ~ 840년)
'''출생'''
809년 11월 20일
'''사망'''
840년 2월 10일 (31세)
'''재위'''
'''당의 황제'''
827년 1월 13일 ~ 840년 2월 10일 (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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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
이(李)
''''''
앙(昂)
'''부모'''
부황 목종, 모후 정헌황후 소씨

1. 소개
2. 생애
4. 제2차 환관시대의 시작
5. 후계자 선정
6. 평가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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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당나라의 제14대 황제. 시호는 원성소헌효황제(元聖昭獻孝皇帝). 줄여서 헌황제(獻皇帝). 목종의 차남으로, 경종의 이복 동생이었다. 본명은 함(涵)이었으나, 나중에 앙(昻)으로 개명했다.

2. 생애


이복형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환관 왕수징(王守澄) 등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당나라에서 환관이 직접 황제를 올린 예는 처음이었다.[1] 처음에는 올바른 정치를 하고자 고심하여 궁녀 3,000명을 출궁시키고 '''오방응견'''(五坊鷹犬)[2]을 파하며, 불필요한 벼슬아치와 부패 관리들 1,200명을 파직시키는 등의 개혁 정책을 폈다. 그러나 실권이 없던 문종은 곧 환관들에게 농락당했으며 환관들은 그를 아들 취급하였고, 가짜 외삼촌을 등장시켜 황제를 우롱하기도 했다. 문종은 모후의 친척이 많지 않아 비밀리에 외가를 수소문했는데 사실은 외척의 힘을 빌려 환관을 제거하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그중 1명이 환관과의 원한 관계 때문에 가짜임이 탄로 났는데 이 후에도 문종의 가짜 외삼촌은 3명이나 등장하였고 이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그 후 외척의 힘을 빌리는 것을 포기하고 호걸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 그는 의술에 능통한 정주(鄭注)와 주역에 정통한 점쟁이 이훈(李訓)을 찾아냈는데 둘은 문종의 심복이 되어 정주는 절도사, 이훈은 재상이 되었다.[3] 834년 문종은 정주와 이훈의 힘을 빌려 왕수징의 병권을 회수하고, 그를 독살했으며, 산남 동도 감군 환관 진홍지도 불러들여 귀경 도중에 죽였다. 연거푸 환관 거물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하자 문종, 정주, 이훈은 아예 환관 세력을 발본색원하기로 마음먹었다.

3. 감로의 변


이에 문종은 835년 왕수징의 장례식 때 환관들이 모이면 모두 제거하기로 했고, 이에 공명심에 불탄 이훈이 일을 서둘렀다. 이훈은 "궁중의 석류나무에 감로(甘露)[4]가 내렸습니다."라고 상주문을 올려 길조를 구경하러 온 환관들을 모두 제거하려고 했다. 구사량(仇士良) 등 환관들이 감로를 보러 모두 모였는데 한약(韓約)이라는 자가 왠지 대경실색하며 을 뻘뻘 흘리고 있자 구사량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장막이 날아가''' 어설프게 매복해 있던 병사들이 들키고 말았다.
이에 놀란 구사량은 환관들과 함께 문종을 양옆에서 잡은 후 금위군을 데리고 궁궐 안으로 도주했다. 이훈은 매복병을 이끌고 추격하여 수십 명의 환관을 죽였다. 하지만 구사량은 문종을 동상각에 들어가도록 하고, 문을 닫은 후 황제를 인질로 잡고 대치했다. 거기다 다른 환관들도 신책군을 이끌고 반격하며 황제파를 모조리 죽였다. 결국 이훈, 정주는 참수되었으며 한약을 포함해 600여 명의 대신들이 억울하게 주살되었다. 이 사건이 '''감로지변'''(甘露之變)으로 구사량이 완전히 실권을 쥐고 온갖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

4. 제2차 환관시대의 시작


환관 친위군인 북군을 제외하면 남군은 유명무실해졌고, 환관이 정사를 모조리 주무르는 위치에 있게 되었다. 이보다 심각한 것은 소인배인 이훈과 정주를 황제의 측근으로 썼기에 황제가 동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종은 이후 4년간 절망 속에서 살았다.
원래 구사량은 감로지변 이전에는 예의상 황제에게 공손한 '''척'''을 했으나, 이때부터는 아예 황제를 자기 아들처럼 대했다. 특히 관료들 앞에서 '''폐하는 오늘 이러저러한 실수를 하셨죠? ㅋㅋㅋ'''라고 대놓고 모욕을 주었다.
하루는 문종이 대신들에게 "은 역사상 어느 황제를 닮았다고 생각하시오?"라고 물으니 중서자 주지가 "신들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천하의 사람들은 같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문종은 "그것은 이상하지 않소. 짐은 주나라 난왕[5]이나 후한 헌제[6]보다 못한 것이 아니오? 난왕은 가신인 제후들의 꼭두각시였고 헌제는 대신조조꼭두각시였지만 '''나는 노예인 환관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니''' 난왕이나 헌제보다 나을 리가 있겠소?"라고 하며 울었다고. 이에 대신들도 엎드려서 울었다. 그날 이후 황제는 다시는 조회에 오르지 못했다.
문종은 840년 병으로 대명궁 태화전에 거처하던 중 사망했는데 아들인 노왕(魯王) 이영(李永)처럼 독살당했다는 의혹이 있다. 노왕 이영은 사서에 대놓고 독살이라고 써 있고, 문종의 경우에도 정황상 거의 확실한 듯하다.

5. 후계자 선정


문종의 두 아들은 모두 환관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러자 문종은 형의 5남인 이성미를 일찍이 태자로 삼았다. 물론 구사량은 친 문종파 세력을 남길 생각이 전혀 없었음으로 이성미는 폐위당한 뒤에 곧 문종의 동생인 안왕[7]과 함께 살해당한다.

6. 평가


신당서에서는 한마디로 문종을 평가했다. "제왕의 도(道)는 있었지만 제왕의 그릇은 아니었다."고.

7. 둘러보기





[1] 물론 아직은 황권이 있던 시절이었다.[2] 응견은 사냥용 매와 사냥개이고, 오방은 응견을 관리하던 기관이다.[3] 둘은 환관인 왕수징의 일파였지만 배신하고 문종에게 붙었다.[4] 상스럽다는 이슬[5] 주나라의 마지막 왕[6] 후한의 마지막 황제[7] 목종의 4남이자 무종의 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