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당)
[clearfix]
1. 개요
당나라 제11대 황제. 당나라의 명군을 꼽는다면 백이면 백 당 태종과 당 현종을 꼽는다. 그러나 가끔씩 '당 3대 명군' 을 꼽는다면 당 태종, 당 현종과 함께 열에 아홉은 포함시키는 황제가 있다. 그가 바로 당 헌종. '''원화중흥'''을 통해 당을 다시 부흥시켰고, '''당 왕조 마지막 100년을 버틸 힘을 부여한 황제'''다. 시호는 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줄여서 신황제(神皇帝).[1]
2. 즉위 이전
증조부인 대종 말년(대력 13년, 778년)에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덕종이 즉위한 뒤 그의 아버지인 이송이 황태자로 책봉되고 이순은 자연스럽게 황태손이 되었다.
이순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황제가 될 것임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7세 무렵, 덕종은 손자인 이순과 놀아주다가 장난삼아 '''너는 도대체 누구의 아들이기에 짐의 품 안에 있는가?''' 라고 묻자 '''제삼천자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즉, 할아버지(덕종), 아버지(순종, 이때는 황태자)의 뒤를 잇는 것은 '''당연히 천자의 장손인 자신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이에 덕종은 놀랐다고 전하며, 정원 4년(788년)에 이순을 광릉군왕에 올린다. 이후 그의 아버지 순종이 퇴위 당한 뒤에 즉위하게 된다.
3. 원화 중흥
헌종의 치세를 상징하는 말은 '''원화 중흥'''이다. 15년이 안되는 짧은 치세 동안 헌종은 행정적으로는 번진 난립으로 인해 끊어졌던 중앙과 지방의 행정적 연계를 회복했으며, 군사적으로는 반항적인 번진들을 물리력으로 박살내고 국가를 재통합시켰다. 비록 그 사후 일부 번진들이 다시 반기를 들고, 이를 당나라 조정이 제압하지 못하면서 군사적 업적은 약간 빛이 바랜 감이 있으나, 대종 및 덕종 시절처럼 국토의 절반 이상이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던 상황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나아진 상태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당 왕조의 위기상황 극복을 위한 비상 사태용이라 할 만한 것으로, 민중들에게 가혹한 것이었으며, 이를 위기가 끝난 상황에서 다시 재편하기 전에 사망하면서 결국 당 왕조를 전란 이전처럼 '정상화'시키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 때문에 결국 '''완성되지 못한 명군으로 남았다.'''
3.1. 행정적 개혁
중후기의 당을 일컬어 '재정 국가' 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기존 왕조의 제민 지배적 성격이 크게 후퇴한 대신 소금전매, 양세법의 도입 등으로 인해 국가의 유지가 재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전까지 국가를 지탱하던 백성 개개인에 대한 직접 지배력이 크게 낮아지고 대신 국가가 확보한 재정력이 국가를 운영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헌종은 이러한 변화를 적극 수용했고, 또한 '''영정 혁신'''의 개혁 조치를 따르며 이러한 변화 속에서 초래된 악폐습을 없애나갔다. 그를 옹립한 구문진 등 환관들을 필두로 하는 구세력들은 젊은 나이의 헌종이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헌종은 영정 혁신으로 인해 기용된 신진 인사들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계속 유지하면서 이들 구세력들을 견제했고, 이를 통해 강력한 황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 중후기 시기인 중당, 만당 시기에 헌종처럼 강력하게 정국을 주도할 수 있는 황제는 드물었다.
행정적 측면에서 그를 보좌한 것은 이손과 배도, 배기 같은 재정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양세법 개편 과정에서 일어난 악폐습을 최대한 개선하고 효율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헌종 시기 당의 중앙 정부에 순응하던 번진은 8개 번진 49개 주로, 전체 주(297개)의 20%가 채 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반항적인 번진을 제압할 힘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재정 관리가 필요했고, 헌종이 기용한 재정가들은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2]
특히 이들은 양세법의 관리에 중점을 두었다.
'''양세법'''은 안사의 대란으로 인한 조용조의 붕괴를 극복하기 위한 개혁조치라 할 수 있다. 안사의 난은 당의 통치력에 막대한 손실을 끼처, 안사의 난 직후 당이 파악한 호수는 일시적으로는 약 130만 호까지 감소하기도 했다. 대종, 덕종의 노력으로 헌종 즉위 직후 당이 파악한 호수는 약 300만 호까지 증가(대략 1700만 명)했지만, 현종 중후반기인 천보 연간의 800만여 호에 비하면 1/3을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했다. 원화 2년 이길보에 의해 편찬된 <원화국계부>에 따르면 이시기 당의 세호, 즉 '세금을 매기는 호수'는 천보 연간(현종 중후기)의 '''1/4'''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에 군대의 규모는 '''83만'''으로, 마찬가지로 천보 연간에 비해 군 규모는 대략 1/3 정도 증가하였다. 그만큼 지출은 급증한 것. 그런데 이들 중 대다수는 번진 병사이기 때문에 조정의 통제권 밖에 있었다. 즉, 당 조정은 자기 통제권 밖에 있는 병사들에게도 운영비를 대고 있는 꼴이었던 것. 이는 '''각각의 번진들이 조정으로 조세를 상공하면서 자신들의 운영비를 자의적으로 빼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호수 파악을 통해 부과하는 조용조적 수취 체계만으로는 도저히 국가를 운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은 호세와 지세, 청묘전, 지두전 등의 고세율의 수취 제도와 소금 전매의 유지를 통해 국가를 운용했다. 덕종 시기에 이를 하나로 통합, 일괄화하여 1년 2차례(양세)를 매기는 제도를 실행하는데, 그것이 양세법이다.(중국사/세금 제도를 참조) 이는 새로운 농사법 도입으로 2년 3모작이 보급된 화북 지역의 생산력 증대 등과 맞물려 적은 인적 자원, 좁아진 영토에서도 이전보다 더 많은 재정 확보를 가능하게 했다. 여기에 이를 수취하는 데에 화폐를 사용하게 되자 화폐 가치는 상승했고 물질 가치가 하락하는 효과도 있어 수취당하는 백성들의 부담은 더 커졌다고 한다.
양세법으로 인한 평균적인 세율은 공식적인 세율로는 상당히 고세율인 약 26%,(출처: <중국의 역사-수당오대>), 여기에 양출 세입의 원칙(나가는 세출을 정하고, 거기에 맞춰 세금을 거둔다)을 따랐기에 지속적인 관리가 없다면 필요 세율은 갈수록 증가하고, 또한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인해 정작 필요한 곳에 쓸 돈은 부족해진다.
헌종 시기 재정가들은 지속적인 관리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다. 즉 수취 지역의 현황을 판단하여 지역별 세율을 조정하면서 동시에 필요없는 재정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고 부정부패로 인한 손실 또한 잡아내 국고를 풍족하게 한 것이다.
또한 정치 분야에서도 이강, 이길보 등의 인재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대대적인 관료제 개편을 통해 관리들의 수를 감축하고, 그만큼 세수를 절약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여유가 생긴 국가 재정은 헌종으로 하여금 번진 개혁과 이에 반항하는 번진의 격파가 가능한 군사력을 제공해 주었다.
3.2. 번진 개혁
헌종의 개혁 중 가장 큰 유산이라면 그것은 번진 개혁이라 할 것이다. 그는 번진 제도의 개혁을 통해 끊어졌던 중앙과 지방간 연계를 회복했고, 번진들의 이빨과 발톱을 뽑았다 하겠다. 물론 하북 3진처럼 그 후에도 반항적 태도를 보이는 번진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는 헌종 이전과 비교하면 상당히 적은 숫자였고, 그 세도 약했다.
절도사들이 지배하는 번진의 구조는 '회부(會府)' 와 '지군(支郡)'으로 나누어진다.(이를 사부주(회부)와 순속주(지군)라 부르기도 한다.) 회부는 번진의 처소가 위치한 주로 번진의 핵심 지역, 지군은 그렇지 않은 주로 회부에서 통제하는 주들이라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지군에 속한 주의 숫자가 더 많았다. 원화 2년(807년) 저술된 <원화국계부>[3] 에 따르면 이 무렵의 번진의 개수는 48개, 전체 주의 개수는 295개이니 이 시기 중국 전역에는 48개의 '회부'와 247개의 '지군'이 있는 셈이었다. 헌종은 이에 착안해 '지군' 과 번진의 연계를 끊고, 중앙 정부와 더 깊은 연계를 가지게끔 하는 개혁을 착안한다. 이리하면 당 조정은 250여 개의 주를 다시 총괄하게 될것이며, 1개 주로 유지되는 번진들은 중앙 정부의 힘 앞에 복속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
3.2.1. 1차 번진 개혁(809년)
헌종의 번진 개혁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진다.
첫 번째 개혁이 이루어진 것은 809년이었다. 이는 3년 전인 806년 검남 서천부 절도사 유벽, 하수 절도사 한전의, 진해 절도사 이기의 반란을 무력으로 제압한 데서 나온 자신감의 발로였다.
이 개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첫째, 회부로부터의 상공, 즉 거둔 세금 중 조정으로 올려 보내는 것을 면제한다. 이로써 회부와 조정의 재정적 연계는 사라졌고, 번진들이 상공을 올려보내는 것을 이용해 조정에서 여러 이득을 챙길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번진들에게 득이 되는 것이나, 다른 개혁과 연계되어 오히려 조정에 득이 되는 개혁이 된다.
- 둘째, 대신 지군에서의 송사, 즉 번진 운영비로 바치는 세금은 번진 경비가 부족한 경우에만 특별히 허가하고, 그렇지 않다면 지군에서의 경비를 제외한 모든 세금은 상공으로 규정하여 조정에 올려보내도록 한다. 이는, 비록 예외적 규정은 있으나, 지군의 조세 체계하에서 번진과의 연계를 끊고 중앙 정부와 지군간 재정적 연계를 강화한 것이다. 이는 각각의 번진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는 것이었으나, 첫 번째 개혁을 통해 이득을 보는 대신 가져간 것이기에 번진들도 마냥 이에 반대할 수만은 없었고 헌종은 반항하는 번진들을 무력으로 제압할 실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실현 가능한 개혁이었다.
- 셋째, 상공이나 송사를 표준 가격인 중고에 의해 상정하게 함으로써 번진이 중간 과정에서 농간을 부리며 이득을 챙기는 것을 없앴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는 당 조정의 명령이 먹히는 번진들에 대해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북 3진을 비롯해 당에 반항적인 7개 번진들은 이러한 개혁 조치를 무시했고, 비정기적으로 상공을 바치던 20여 개 번진들도 지역에 따라서 먹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등의 차이가 있었다.
3.2.2. 2차 번진 개혁(819년)
두 번째 번진 개혁은 819년, 당에 반항적이던 7개 번진 중 회서 번진과 평로 치청 번진은 무력으로 토벌했고, 이에 여타 번진들이 당에 복속하면서 번진들의 순지화가 실현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당 중앙 정부의 힘이 중국 전역에 확인되었고, 번진들은 모두 신종한 상태였기에 좀 더 급진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819년 개혁은 다음과 같다.
- 첫째, 각각의 번진들이 보유한 군사력 중 회부의 단련병, 외진군, 아중군만을 허가하고, 지군의 단련병, 외진군은 각각의 주 자사가 통솔하게끔 한다. 즉, 절도사가 가지는 군사상 특권은 자신이 속한 주의 아중군을 별도로 키울 권한밖엔 없어진 것이다. 물론 사병 집단인 아중군을 대규모로 키울 수 있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특권이나 개혁 이전의 절도사들의 군사력에 비하면 그 힘이 많이 약해진 것이라 하겠다.
- 둘째, 회부에서의 상공이 다시 실시되었다. 회부에서 상공이 폐지된 명분은 지군에서의 송사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 군사력을 유지할 재정 확보를 위해서라는 것이었는데, 번진들의 군사력 자체가 축소되면서 군사비 지출도 감소했기 때문에 여유분을 축적하여 힘을 키우는 것을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는 첫 번째 개혁 과정에서 지군이 자체적으로 군을 유지해야만 하기 때문에 상공이 축소되는 것을 보충하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 셋째, 각각의 절도사들이 탁지영전사, 즉 둔전의 관리를 맡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지던 것을 폐지했다. 이는 이 둔전들이 군대뿐만 아니라 농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이를 징수하여 재정의 일부로 돌리던 것을 막아 번진들의 재정 상황을 약화시키기 위함이다.
또한, 이러한 번진 개혁은 절도사의 출신도 변화시켰다. 헌종 이후 변방에서 국경 방어를 전담하는 12개 번진을 제외한 나머지 번진의 절도사로 임명된 자들은 모두 문관 및 직업 관료였으며, 변경 번진의 절도사 직을 맡은 무관들도 모두 중앙에서 선발되었고 그 출신은 중앙군인 신책군 출신이 많았다. 절도사로 임명된 관료들은 대부분 정쟁에서 밀리거나 사임한 재상인 것이 관례화되었고 이는 이전처럼 지배층이라 해도 정쟁에서 밀려날 경우 완전한 관직 박탈이나 가혹한 형벌을 받는 대신 절도사라는 매력적인 지방 관직으로 내려갈 수 있었기에 당쟁의 강도는 완화되었다. 물론 당쟁의 규모는 확대되었지만 그 결과에서 마치 스탈린 시기와 흐루쇼프 시기의 정치 투쟁 결과를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이 되었다.
그리고 헌종은 이들 절도사들을 환관을 통해 감독하였다. 환관은 이미 이전부터 감군사 제도를 통해 군을 관리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절도사 업무까지 감독, 번진의 임시 책임을 맡는 일까지 증가하면서 사실상 절도사보다 우위에 서게 되었다. 이는 군 통제에 있어서 매우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환관의 세가 너무 커지게 되는 경향을 낳았다.
3.3. 군사적 업적 - 원화 삭번
헌종이 태종, 현종 다음가는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절도사들을 제압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당은 다시끔 통일 왕조로써 유지할 수 있었다. 헌종의 절도사 제압이 없었다면, 당은 얼마안가 여러개의 국가로 분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오대십국시대를 90년 정도 뒤로 미룬 정도의 업적'''이다.
3.3.1. 번진 제압의 준비
헌종의 번진 개혁이 성공한 것은 당연히 번진들을 무력으로 제압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에 주목하여 '''원화 삭번'''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헌종 즉위 당시 당의 영토에는 약 300여 개의 주와 48개의 번진들이 존재했다. 이 중 매년 상공을 바치며 당에 충성하던 번진의 숫자는 8개로, 49주 144만여 호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외에 부정기적으로 가끔씩 호구수를 보고하고 상공하던 번진은 약 25개 정도였으며, 호구수를 보고하지도 않고 상공을 바치지도 않는 번진은 15개였다. 그런데 변경 방위를 담당하는 8개 번진은 애초에 호구수 보고와 상공을 면제받고 있는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사실상 당에 반항적인 번진은 7개였다.
그러나 이런 반항적인 번진들은 강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며[4] 당의 중앙군은 크게 약화된 상태였고, 여기에 더해 서쪽에서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위력을 나누어 배치해야 했기에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은 이런 연합한 번진들보다 약했다. 대종과 덕종은 당에 순응하는 번진들을 움직여 이들 반항하는 번진들을 제압하고자 시도했지만 아무리 순지번진이라 하더라도 자기 군사력을 희생시켜가면서 싸워 이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소극적인 작전을 펼첬고, 거기다 당의 편에서 싸우다가도 상황에 따라 반항하는 번진 측에 붙어버리는 번진들이 발생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헌종은 이에 대해서 강력한 중앙 금군의 육성과 금군 주도하의 제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도 덕종 말년에 토번에 대한 대포위가 성공하면서[5] 서쪽에서의 위협이 감소했기에 방위 병력을 돌릴 수 있었으며, 여러 재정가들이 재정적, 행정적으로 이를 뒷받침했기에 헌종은 최종적으로는 15만에 달하는 신책군을 금군으로써 육성할 수 있었다.
다만, 덕종은 이들 금군의 지휘권을 장수가 아닌 자신이 믿던 환관들에게 맡김으로써 후에 환관들의 전횡이 심각해지는 피해를 낳았다. 절도사들이 약해짐에 따라 환관들은 당 왕조 내에서 최강의 군사권을 휘두르게 되었으며, '''감로의 변'''과 같은 '''환관들이 황제를 유폐시키고, 감시하며, 이에 반항하는 여타 세력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사태'''가 벌어지는 단초가 된다.
3.3.2. 1차 번진 제압전 - 중소 번진 토벌(806년~807년)
번진들을 제압하기로 결심한 헌종의 첫 번째 목표가 된 것은 검남 서천부 절도사 유벽이었다. 그는 헌종이 즉위하자마자(806년) 검남 서천 절도사, 검남 동천 절도사, 산남 서도 절도사직을 겸임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고 강요하였다. 이는 사천의 대부분 지역과 형주 서쪽 일부를 장악하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헌종은 이를 거부하고 토벌령을 내렸으며 좌신책행영절도사 고숭문, 신책경서행영병마사 이원혁을 토벌군으로 편성하여 산남서도절도사 엄려와 협조해 유벽을 토벌하게끔 했다.
유벽의 반란 평정은 빨랐다. 유벽은 그리 강한 군사력을 가진 절도사가 아니었기에 아직 군사력 강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금군만으로도 충분이 격파가 가능했을 정도였고, 험지를 기반으로 곳곳에 관문을 쌓고 버티는 유벽의 군대를 연파, 9월에 성도를 함락시키고 유벽을 잡아 물에 빠트려 죽였다. 유벽은 이때에 그나마 있는 군대를 1만 단위로 나누어 쪼개놓았기에 평정이 빨랐다고 한다. 또한 하수 절도사 한전의를 압박해 입조하게 했고, 그의 생질인 양혜림이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독립하려 들자 하동 절도사와 천덕군 절도사를 움직여 이를 토벌한다.(806년) 이 소식을 들은 다수의 번진들은 들어가 조현하기를 요구하면서 당 중앙 정부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진해 절도사 이기 또한 그중 하나로, 807년 여름, 당에 입조하겠다는 청을 하였다. 그러나 이기는 실제로는 입조할 생각이 없었다. 입조를 환영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온 칙사와 유후 판관 왕담의 지속적인 설득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얼마 안가 병을 청하며 연말에 입조하겠다는 연기 청원을 했다. 이에 헌종은 조서를 내려 그의 권한을 박탈하겠다는 협박을 했고, 이에 이기는 반란을 계획한다.
이기는 결국 10월, 왕담을 죽이고 칙사를 협박한 데다 명목상의 이유로 조정에서 임명된 6개 주의 자사를 제거하면서 반기를 들었고, 헌종은 어사대부 이원소를 진해 절도사로, 회남 절도사 왕악을 초토 처치사로 삼아 여러 번진의 병사들을 규합해 토벌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이 토벌전은 시작부터 향촌의 자제들이 이기의 부하들을 습격해 죽이는 등 진해 번진 내부에서부터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1개월이 채 안 되어 이기 자신까지 부하들에게 잡혀 장안에 압송, 아들과 함께 요참형에 처해 죽으면서 마무리된다. 다만 연좌제에 걸린 건 그의 아들뿐이고, 그의 사촌이나 형제들은 모두 이전에 공로를 세운 자들[6] 이었기에 관직을 깎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헌종은 이로써 즉위하자마자 3개 번진의 반항을 차례로 제압했다. 이에 부정기적으로 상공하면서 눈치를 보던 다수의 번진들은 당 조정의 명에 복종하였다. 이후 2차 번진 제압 시도가 이루어지는 809년까지 헌종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금군을 확충했으며, 이는 2차, 3차 번진 토벌 기간에도 꾸준히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15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금군인 신책군을 구축하게 된다.
3.3.3. 2차 번진 제압전 - 성덕 번진 토벌(809년~810년)
809년(원화 4년) 3월, 하북 3진 중 하나인 성덕 번진의 절도사였던 왕사진이 죽고 부대사였던 왕승종이 그 뒤를 이어 유후직에 올라 절도사 업무를 대행하면서 절도사 승계를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다. 여기에 같은 해 7월, 노룡 절도사 유제와 위박 절도사 전계안, 회서 절도사 오소성이 모두 병에 들어 절도사직의 부자 승계를 요구한다. 과거 덕종은 사진의 난과 주차-이회광의 난 이후 이러한 요구를 모두 승낙하면서 현상 유지에만 급급했었기에 이들로써는 자연스러운 요구였다.
그러나 헌종은 조부인 덕종과는 달랐다. 1차 토벌의 성공과 튀르크계 사타족의 귀부(808년), 금군의 증강으로 자신감을 얻은 헌종은 하북 3진(성덕, 노룡, 위박) 및 회서 번진의 절도사들이 중병이 들었다는 것을 기회로 여기고 토벌할 의도를 내비친다. 여러 학사들은 이에 반대했고, 꼭 토벌해야 한다면 하북 3진보다는 그 세가 약한 회서 번진을 제압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헌종은 성덕 번진을 목표로 삼았으며, 왕승종이 두 개 주를 바칠 테니 용납해 달라고까지 청원했으나 헌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9월 7일, 헌종은 왕승종을 성덕 절도사·항·기·심·조주 관찰사로 삼고, 왕승종이 넘기겠다고 한 2개 주를 관할하는 보신군 번진을 새로이 창설해 왕승종의 사위였던 설창조로 하여금 보신군 절도사·덕·체이주 관찰사로 삼았다. 이는 성덕 번진의 영역(6개 주)을 쪼개 새로운 번진을 창설, 성덕 번진을 견제하고 그 세를 약하게 만들고자 함이었다. 이에 왕승종이 설창조를 억류하자 헌종은 설창조를 풀어주라 압박했으며, 이에 따르지 않자 토벌을 결심하고 환관 토돌승최를 좌·우 신책·하중·하양·절서·선흡등도 행영 병마사·초토 처치사로 임명했다. 이는 환관이 최초로 행영병마사, 초토 처치사에 임명된 것이었으며, 행영 절도사가 없기 때문에 이 말은 곧 '''환관이 여러 번진 군을 아우르는 토벌군의 총사령관이 된 것'''이었다. 이에 여러 학사들은 '''환관이 군을 감시하는 감군이 된 적은 있어도 총사령관이 된 적은 없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간관과 어사들 또한 토돌승최에게 지나치게 큰 관직을 내린다며 반발했지만, 헌종은 토돌승최의 병마사 작위를 선위사로 내리는 선에서 무마하려 했고, 실질적으로는 끝까지 총사령관 직위를 맡겼다. 모인 병력은 자치통감에 따르면 최대 2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었고, 들어간 비용은 7백만여 민(통화의 단위)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한다.'''
가장 큰 이유는 이 토벌군이 여러 번진들의 연합군이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소의 절도사 노종사는 조정에 가장 먼저 성덕 번진을 토벌하자고 주청하여 이 토벌군 결성에 크게 기여해 놓고 막상 토벌에 들어가자 성덕 번진과 은밀히 손을 잡고는 식량 보급을 훼방놓으면서 이득을 챙기려 했으며, 4진의 난 과정에서의 반목으로 인해 토벌군에 참여한 노룡 번진(엄연히 하북 3진 중 하나이며, 위박 번진, 회서 번진, 평로 치청 번진과는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니 이는 꽤 뜻 밖의 일이라 하겠다.)도 몇개 성만을 빼앗고는 주저앉았다. 토벌에 동참하라는 명을 받은 위박 번진도 형식상 한 개 주를 점령한 상태로 멈추어 섰다.
거기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토돌승최가 직접 지휘하는 신책군 및 하동·하중·진무·의무 4개 번진 연합군은 성덕 번진 군대를 정면으로 공격했다가 자기 군대만을 아끼려 한 절도사들의 비협조로 인해 연전연패하였고, 1차 토벌전 당시 유벽을 사로잡았던 공적이 있는 좌신책 대장군 여정진까지 전사해 버렸다. 비록 소의 절도사 노종사가 뒤로 손을 잡은 것을 눈치채고 체포하는 데 성공했지만 당으로써는 별로 얻은 것이 없다 할 것이다.
결국 원화 5년(810년) 7월, 1년에 걸친 토벌전은 별 소득도 없이 실패로 끝난다. 왕승종은 형식상 사죄하고 공물과 부세를 바치겠다며 용서를 빌었고, 이사도 등의 번진 세력들이 왕승종을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자 이에 용서한다는 형식을 취하긴 했지만, '''헌종의 번진 제압은 최초의 실패를 맛보았다.''' 토돌승최는 이 책임을 지고 좌천당했다. 그러나 헌종은 계속 토돌승최를 신뢰했기에 얼마 안가 복직시켜줬고, 환관들의 힘은 더욱 강성해졌다.
3.3.4. 위박 번진의 귀순
2차 토벌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헌종은 이길보와 이강을 중용하여 관료제를 개편하고 지속적으로 정치를 정비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지출을 감축하고 그것을 신책군에 모두 쏟아부어 추후를 기도했다.
812년, 위박 번진의 절도사였던 전계안이 급사하고 그의 어린 자식인 전회간이 뒤를 이었다. 이에 헌종은 처음에는 위박 번진 토벌을 생각했지만 이강의 조언을 받아들여 토벌을 포기하고, 대신 절도사로써의 공식 임명장을 내려주는 것을 연기하면서 위박 번진 내의 여러 제장들을 충동질하는 공작을 시도했다.
이러한 정치 공작은 성공하여 위박 번진의 절도사 사병 집단인 아중군이 봉기, 전회간을 죽이고 그의 사촌이자 숙장인 전흥전을 세웠다. 전흥전은 이후 자신의 지위 안정화를 위해 당 조정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표명하여 환대받았다. 당 조정에서는 150만 민을 하사하여 이들을 우대했다고 한다.
하북 3진(위박, 노룡, 성덕 번진)과 회서 번진, 평로 치청 번진은 서로 친밀한 동맹 관계를 맺고 당 조정에 40여 년간 대항해왔다. 그러나 4진의 난 당시의 일로 노룡 번진과 성덕 번진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아지면서 이러한 연계는 위태로워지게 되었다. 그런 두 번진의 연계를 중간에서 잇고 있었던 것이 위박 번진과 평로 치청 번진이었는데 이때의 사건으로 위박 번진이 싸우지도 않고 당에 귀순한 것이니 당 조정으로써는 한숨 돌렸다 하겠다.
3.3.5. 3차 번진 제압전 - 회서, 성덕 번진 토벌(814년~817년)
3차 번진 토벌은 번진 제압을 위한 전쟁 중 가장 기나긴 토벌 작전이었으며, 사실상 번진 제압의 분수령이 된 전쟁이었다.
3차 토벌 작전은 814년 윤 8월, 회서 절도사 오소양이 사망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오소양은 2차 토벌 직전 사망한 오소성의 아들이며, 그가 지배하는 회서 번진은 비록 3개 주만을 보유한 작은 번진이나 최대의 번진 세력인 평로 치청 번진과 긴밀한 동맹을 맺고 순치 관계에 있었다. 때문에 2차 토벌전 때에도 회서 번진을 치는 것이 낫다는 조언을 하는 대신들이 많았다.
오소양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인 오원제였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숨기고 단지 병이 들었다고만 보고하며 스스로 군권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오소양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조정에 들어가 조현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모두 무시하고, 충고한 사람을 잡아 죽이기도 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헌종은 토벌 준비에 들어간다.
9월, 헌종이 마지막으로 오원제를 떠보기 위해 보낸 칙사를 거부한 오원제는 먼저 선공을 걸었다. 그는 무양(하남성 무양현), 섭(하남성 섭현), 노산(하남성 노산현), 양성(하남성 양성현)을 공격했고, '''낙양까지 공격'''하였다. 먼저 한방 맞은 헌종은 오원제의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고 엄무를 신·광·채 초무사에 임명, 총사령관으로 삼고, 이를 감독할 인물로 내상시지성사 환관 최담준을 임명해 토벌령을 내렸다. 또한 신책군과 더불어 충무 절도사 이광안, 하양 절도사 오중윤, 선무 절도사 한공무, 수주 자사 이문통에게 엄수를 따라 회서 번진을 토벌하라 명했으며, 상서좌승 여원응을 동도(낙양) 유수로 임명하였다. 또한 이후에도 근처의 관찰사, 병마사, 절도사들에게 토벌에 동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나의 작은 번진이자 관외군이 채 2 ~ 3만 정도에 불과했던 회서 번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진들의 공격을 상당히 잘 버텼다. 이는 역시나 '''절도사, 병마사, 관찰사들이 자신 관할의 병사들을 아끼느라 몸을 사렸기 때문'''으로, 기껏 이겨 놓고도 방심하다가 야습을 받는다든가, 협조가 잘 되지 않았거나 하는 모습이 많았다. 그나마 충무 절도사 이광안, 신책군을 지휘한 유공작 정도가 적극적인 토벌전을 벌여 성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워낙에 군사력 차이가 많이 났기에 회서 번진은 차츰 주요 거점을 잃어가면서 몰렸고, 오원제는 필사적으로 성덕 번진, 평로 번진에 구원을 요청했다. 815년, 당시의 평로 번진의 절도사였던 이사도(이정기의 손자)는 오원제를 돕기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이 토벌전은 '''회서, 성덕, 평로의 세 번진 연합과 당 조정 사이의 정면 대결'''의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는 4진의 난 이래 거진 40년 만의 일이었다.
이사도는 오원제와 함께 싸우기로 결심했지만, 처음에는 그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성덕 번진의 수장인 왕승종과 함께 표문을 올려 오원제를 옹호하면서 자신이 육성한 자객, 도적들을 동원해 하음원에 쌓여 있던 군량미 3만여 곡을 태우고 화폐 30여만 민을 약탈하도록 했다. 또한 장안까지 자객을 파견, 헌종을 군사적인 면에서 보좌하던 재상 무원형[7] , 재정적 측면에서 보좌하던 재상 배도 암살을 시도해 무원형은 피살되고 배도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8] 여기에 더해 낙양에 이사도 자신이 운영하던 유후원에 병사들을 몰래 숨겨두었다가 낙양을 습격, 궁궐에 불을 지르고 약탈할 계획까지 짰지만 밀고자가 나오면서 실패하고, 이사도가 오원제와 손을 잡고 반기를 들었음이 밝혀졌다.
성덕 번진, 평로 번진이 회서 번진에 합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토벌군도 나누어질 수밖엔 없었다. 때마침 귀순한 위박 번진, 그리고 성덕 번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노룡 번진, 황해 번진, 의무 번진이 성덕 번진 토벌에 동참하겠다고 나섰고, 이쪽으로 파견된 신책군과 함께 성덕 번진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최대 최강의 번진 세력이였던 평로 치청 번진을 상대로는 견제성 병력 약간만을 배분할 수밖엔 없었다.
번진 토벌은 816년을 거처 817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회서 번진을 공격하던 토벌군은 9만 명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절도사들이 자기 병력을 아끼느라 오히려 병력 부족에 시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엄무가 고하우로, 고하우가 다시 원자로 교체되었지만 누구 하나 제대로 이기지 못했고, 결국 당 조정 측은 성덕 번진과 회서 번진을 동시 공략하려던 기존의 계획을 버리고 회서 번진에 집중하기로 결정했으며, 태자첨사였던 이소로 하여금 원자를 대신하게 한다.
전면에 나선 이소는 지지부진한 전황을 한번에 끝낼 기습을 생각했다. 그것은 회서 번진의 처소가 위치한 채주를 기습해 오원제를 포로로 잡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이소는 우선 직속 부대를 적극적으로 운용하여 회서 번진을 압박했고, 오수림, 동창령 등 회서 번진의 여러 장수들의 항복을 받아내는 성과를 보이기 시작하자 오원제는 채주를 지키던 병력까지 전면에 배치했다.
이소의 채주 기습 공격의 준비는 수개월을 끌었다. 포로로 잡힌 장수 중 한명인 이우를 회유해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산남 동도 번진의 정예 병력 3천여 명을 그의 휘하에 배속시켰으며, 결사대 3천여 명을 모집해 '돌장' 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하고 준비시키는 등 철저하게 군을 준비했으며, 준비가 끝났다 판단하자 이소는 낭산을 공격해 회서 번진 병력들을 모두 낭산으로 끌어내고는 때마침 채주 근방을 휩쓸던 홍수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이사도에게 피살될 뻔 했던 배도가 문하시랑·동평장사·겸창의절도사·회서선위초토처치사로 임명되어 전선을 총지휘하는 원수가 되어 군 지휘를 일원화했고, 9월이 되자 홍수도 그첬다.
817년 10월 15일, 이소는 9천여 병력을 편성, 채주를 급습한다. 때가 겨울이었기에 폭풍과 눈이 흩날리는 혹독한 기후였지만 오히려 이것이 채주로 향하는 당군을 가려주었기에 '''하루 만에 150리 이상을 돌파하는 동안 회서 번진군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16일 4고(새벽 3시) 즈음에 성에 도착한 당군은 순식간에 채주성을 장악했고, 오원제를 포로로 잡았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다른 군대들도 모두 항복했다. 거진 3년 이상을 끈 회서 번진의 난은 이것으로 평정되었고, 성덕 번진과 평로 치청 번진 간 연결고리가 끊어져 두 번진은 고립되었으며, 회서 번진과 행동을 같이하던 성덕 번진은 움직임이 완전히 봉쇄되었다. 이후 이 공으로 이소는 양국공에 산남 동도 절도사직을 꿰찼고, 배도는 청의 절도사로써 채주 지역을 안정화시켰으며 오원제는 처형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덕 번진의 왕승종은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내고 덕주, 체주를 헌납하면서 당에 항복한다.
이 토벌전에 동원된 군대는 총 17 ~ 18만에 달했다고 한다.
3.3.6. 4차 번진 제압전 - 평로 치청 번진 토벌(818년~819년)
회서 번진이 평정되고 성덕 번진이 항복하자 헌종은 하북, 산동의 반항적인 번진 중 가장 크고 강력하며 사실상 번진들의 중심축이었던 '''평로 치청 번진'''을 토벌하고자 계획한다.
평로 치청 번진은 안록산이 최초로 절수직을 역임한 이래로 후희일, 이정기에 이정기 사후 4대에 걸처 이어진, 당의 입장에서 본다면 '''골수 반란 세력'''이였다. 거기다 그 세력은 이정기 생전 최대 15주에 달했고 이정기 사후에도 12주에 걸쳐 있었으며, 관외병, 아중군만 처도 10만에 달하는 강력한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원화국계부>에 기록된, 조세도 바치지 않는 7개 번진 중 하북, 산동의 5개 번진(하북 3진, 회서, 평로치청)의 관외병, 아중군의 총합은 30만에 달했는데, 그 중 1/3이 평로 치청 번진이었다.
또한 이정기 이래로 평로 치청 번진은 신라, 발해와의 교역을 독점적으로 담당했다. 그 결과, 신라와의 교역 규모가 한층 활성화되면서 평로 치청 번진은 부유해졌고, 발해와의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다수의 마필을 획득하여 전력을 증강시켰다. 안사의 난 이래로 한동안 하북 일대에는 군마가 씨가 말라서 여러 번진들 중에는 '''기병 대신 노새를 지급'''하기도 하는 가운데서 '''홀로 발해산 마필을 다량으로 유지'''하고, 이를 동맹관계의 여러 번진들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면서 전력을 강화한 평로 치청 번진의 군사력은 번진들 가운데도 손꼽히는 수준이였고 자칫 잘못하면 발해와 신라까지 개입된 국제전이 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물론 평로 치청 번진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
이정기 이래로 평로 치청 번진이 당나라 조정의 명을 듣지 않고 맞서 싸우기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평로 치청 번진이 물론 강대한 번진이었기 때문이지만, 또한 동시에 하북 3진, 회서 번진, 산남 동도 번진 등 여러 번진들과 연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헌종의 3차례에 걸친 번진 토벌로 인해 위박 번진, 회서 번진, 성덕 번진이 귀순 또는 평정되었고, 노룡 번진과 직접적인 연계가 불가능해져 홀로 고립되었다. 평로 치청 번진은 처음으로 단독으로 당의 토벌군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818년, 이사도는 자신에게 닥처드는 위기를 느끼고 기주, 밀주, 해주를 바치며 토벌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사도는 천성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잘 흔들리는 인물이였고, 땅을 바치고 항복한 것을 후회하며 군을 동원했다가 다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절수의 이러한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인해 평로 치청 번진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토벌군을 맞이하게 된다.
818년 5월, 헌종은 회서 번진 토벌에 공을 세운 충무 절도사 이광안을 의성 절도사로 임명했고, 회서 절도사로 충임되었던 마총을 충무 절도사·진·허·은·채주 관찰사로 삼았으며, 7월에는 이소를 무령 절도사로 삼고 배도를 최고 사령관으로 삼아 이사도 토벌령을 발동한다.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번진이 최초 토벌령을 받은 번진이 되었고 신책군 또한 대규모로 종군했다. 장보고가 이 토벌전에 종군한 것으로 보이는데, 무령군 소장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무령 절도사 휘하가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헌종은 이사도 토벌을 위한 국제적인 여건 마련에도 힘썼다. 신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군 약속을 받아내었고[9] 발해를 회유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발해 선왕이 이사도의 구원 요청을 무시했고, 이후 당 측에서 고위 관직을 제수한 데다가 당의 문물을 많이 받아들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밀약이 있었던 듯 싶다.
이사도 토벌은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한때 긴밀한 동맹이었던 위박 번진의 군대가 앞장서서 이사도군을 공격해 나갔고, 11월에는 이미 처소가 있는 운주에 40리 거리까지 전진해 보루를 쌓았다.
이사도군은 우왕좌왕하다가 연전연패하여 도지 병마사를 비롯해 수십 명의 장수들이 사로잡혔다. 무령 절도사 이소 또한 11번의 전투를 모두 승리하면서 이사도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러나 이사도는 처소인 운주의 방위에만 노력하여 여러 주의 구원 요청을 무시해 버렸다.
결국 819년 2월, 이사도의 도지 병마사였던 유오가 이사도에 반기를 들고 휘하의 군을 움직여 이사도와 그 두 아들을 체포, 처형한 후 목을 잘라 바치고 항복했다. 이것으로 '''최대의 번진 세력인 평로 치청 번진은 이정기 이래 4대 55년에 걸친 독립 세력으로써의 역사를 마치고 당에 의해 평정되었다.'''
헌종은 평로 치청 평정 소식을 듣고는 12개 주를 3개의 번진으로 나누었다. 이사도의 친위 세력이었던 고구려 유민들이 거듭 반항하자 나누어진 번진을 임시로 관장하던 기해 연밀도 관찰사 조화는 이들 중 주요 인물 1천 2백여 명을 향연 도중 제거했고, 운주의 주민들을 대거 강제 이주시켜 뒷처리를 마무리한다.
3.4. 말년의 헌종
헌종은 '''원화 중흥'''이라 일컬어진 대대적인 개혁과 이를 통한 힘을 바탕으로 번진들을 무릎꿇리고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했다. 비록 하북 3진은 헌종 사후 다시 통제를 벗어나게 되나 이들 번진들도 당 조정과 일종의 신사협정을 맺고 전체적으로 보면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는 헌종의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료들에게도 상당히 후대하였고, 서로 불화가 존재하는 관료들을 재상으로 동시에 임명하면서도 균형을 유지하고 적절하게 조정을 운용하였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인 결정자로써 그의 권력을 지키는 데에는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실제로 헌종 사후 당의 황제들 중 그보다 더 강력한 황권을 보유한 황제는 없다.
그러나 재위 마지막 해의 헌종은 이러한 균형 감각을 잃은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당파간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고, 기존의 관료층을 사족(문벌귀족), 서족(과거로 임용된 문학자 집단) 할 것 없이 모두 배제하고 대신 황보박으로 대표되는 재정가들을 재상으로 기용한 것. 이로인해 두 세력은 모두 할 것 없이 말년의 헌종에 대해 비판을 쏟아냈고, 이것은 역사 평가로 남아있다(...)
헌종이 변해버린 이유로는 단약 복용을 꼽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편견이 존재할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 헌종을 암살한 것으로 보이는 세력이 최측근인 환관 세력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강력한 황권을 가진 헌종이 뭔가 사람이 변한 듯한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최측근들에게까지 위험하게 보였다는 데에는 딱히 이견이 없는 듯 싶다.[10] 물론 재정가를 재상으로 기용했다는 데에서 헌종이 다음 개혁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재정 확보에 주력했다는 추정을 하기도 하나 결국 그것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헌종은 토돌승최라는 환관을 신임했는데 토돌승최는 또다른 환관 집단의 왕수징 및 양수경과 대립하고 있었다. 그들은 헌종의 장남이었던 황태자 이녕이 요절하자 둘째 이운과 셋째 이항 중에 누구를 황태자로 삼는가에 대해 대립했다. 헌종은 환관들의 압력에 못 이겨 셋째 이항을 황태자로 내세웠는데 사실은 은밀하게 토돌승최와 둘째 이운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820년, 헌종은 급사한다. 아버지처럼 왕수징 일파에 의해 독살되었으며, 토돌승최와 이운은 직후 제거되었다. '''당나라에서 환관에게 독살당한 3번째 황제였다.''' 헌종은 원화 중흥을 이룩하고, 당에 마지막 100여 년을 버틸 힘을 부여했으며, 마지막 해의 변화만 없었다면 그 이상을 할 수도 있었던 황제의 죽음이였다.
제위는 3남 목종 이항이 계승한다. 목종의 세 아들, 즉 헌종의 손자인 경종, 문종, 무종은 차례로 요절한다. 무종의 뒤를 이은 선종 역시 그의 핏줄(13남, 서자)이었다. 선종 역시 훌륭한 왕재를 보였으나 결국 말년은 암군으로 마쳤고, 당은 완전한 멸망 수순에 이르게 된다.
4. 평가
헌종은 충분히 고평가를 받을 수 있는 황제이다. 그의 대 번진 정책은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성공적으로 달성했다고 보아야 하며, 제도 개혁은 당으로 하여금 다시 중흥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들의 대가는 컸다. 10년여에 걸친 전쟁과 이에 필요한 대규모의 병력 동원, 재정 확보를 위해 납세자들에게 매긴 중세는 그 부담을 크게 키웠다.
물론 이러한 정책은 번진들의 난횡으로 인해 나라의 절반 가까이가 통제 밖에 있었다는 비상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는 변명은 가능하다. 그러나 헌종은 이러한 '비상 사태'가 종결된 직후 얼마 안 가 사망하였고, 그로 인해 당나라는 비상 상황에서 다시 정상으로 완전히 되돌아오지 못했다. 헌종의 마지막 1년 동안 보인 그의 행보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만약 국가의 정상화를 생각한 정책 전환을 기도했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올라갈것이고 거기에 성공까지 했다면 헌종은 당당히 태종, 현종과 같은 영역에 설 수 있는 명군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가 마지막에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는 미궁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기에 그가 주도한 '''원화 중흥''' 은 완성되지 못했다. 그의 사후 당 왕조의 황제들은 권력은 있으되 의욕과 능력이 턱없이 떨어지거나 의욕과 능력은 있으되 권력이 약한 황제들만이 제위에 오르게 되고, 그 결과 최종적인 당의 멸망을 가져온 황소의 난(875년~884년)에 이르게 된다. 물론 그의 치세의 결과로 번진들이 반항하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던 것이다. 결국 당은 87년 후 멸망한다.
5. 기타
원화 3년, 사타족이 토번 측을 이탈해 당에 귀순한다. 당은 귀중한 기병 전력을 보유한 사타족의 귀순을 환영했고, 이들을 받아들인 순지 번진 중 하나인 영엄 번진은 사타족의 기마 전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번진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타족은 90년 뒤, 이극용과 이존욱을 배출하고, 후당을 건국하게 된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는데, 당시 조정에서 일하던 당송팔대가의 일원인 창려 한유는 불교를 격렬히 싫어했었다. 원화 14년에 봉상 법문사에서 부처의 사리를 들이려고 했는데, 이때 귀족, 서민을 불문하고 시주하기에 바빠 생업을 폐하고 심지어 파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안 그래도 불교 안티인 한유의 입장에서는 매우 화가 날 일. 그래서 이른바 '논불골표'라는 글을 올려 불교를 성대히 까기에 이른다. 요지는 "'''부처는 중국인도 아니고 옛날에 황제, 제곡, 요, 순 같은 임금들이 100년씩 살 때는 있지도 않았는데 왜 섬기시나요? 한나라 때 들어오고 나서는 황제들도 일찍 죽고 한나라도 망했는데요? 게다가 양무제는 부처한테 세 번이나 몸을 바쳤는데도 나라가 망했는데 부처가 믿을 수나 있는 존재입니까?!"'''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황제의 수명을 걸고 넘어진 부분은 말 그대로 폭언이었다. 헌종도 이것을 걸고 넘어지면서, "내가 부처를 섬기는 게 지나치다고 얘기한다면 이해하겠는데, 불교 믿는 황제가 요절했다는 얘기는 왜 하는 건가? '''이게 신하가 할 말이냐?'''" 당장 죽여버리려고 하다가 배도, 최군 같은 신하들이 간언해서 사형은 물리고 조주자사로 관작을 깎아 버렸다. 물론 나중에 한유는 용서를 빌었고 헌종도 이를 받고는 대충 풀어지면서(...) "그래도 얘가 나를 사랑해서 한 게 아니겠냐" 는 반응을 보이며 원주자사로 옮겼다. 여담으로, 실제로 헌종은 43세의 나이로 요절한 편이다.
가족 관계 중에 중요한 사항이 하나 있는데 그의 17째 딸인 태화공주(太和公主)는 회골로 시집가 화번공주가 된다. 또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주로 회골에는 황제의 친딸이 자주 시집갔는데 그녀와 비슷한 사례로 영국공주(寧國公主), 함안공주(咸安公主) 등이 있다.
6. 둘러보기
[1] 아시카가 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비교당하는 경우도 있다.[2] 다만 호삼성은 이러한 재정가로써 탁지, 염철 전운사로 재정 확보에 주력했던 이손을 덕종 시기에 같은 지위에 있었던 유안과 비교해 '유안은 이로움을 백성들에게 남겨두려 하였고, 이손은 거두는 데 힘쓴 것' 이라 평가하여 비판하였다.[3] 원화 연간의 국가 통계를 기록한 책[4] 대표적으로, 이정기의 평로 치청 번진은 이 시기에 12개 주에 약 10만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의 난 당시에는 이정기가 죽고 난 후 15주에서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여 3개 주를 상실했는데도 이 정도.[5] 이필이라는 인물이 주장한 것이었는데 스케일이 엄청나게 컸다. 무려 아바스 왕조, 위구르, 북인도의 팔라 왕조, 당이 동맹을 맺고 토번을 포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덕에 엉성하게나마 이 동맹이 형성이 되어 790년~810년에 걸치는 기간 동안 토번은 사방에서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일련의 다굴빵에도 아바스 왕조는 한때 카불과 사마르칸트까지 토번에게 빼앗기고, 팔라도 패배했으며, 당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위구르가 토번을 이기고, 이후 전열을 가다듬은 당이 남조와 연계하여 토번을 패퇴시키면서 토번의 국력은 약화되었다.[6] 이기는 엄연한 당 왕조의 '''황족 중 한 명'''으로, 그의 선조는 태종의 숙부인 이신통이었다. 그는 황족일 뿐만 아니라 태종의 목숨도 구한 적이 있었고, 당 건국 시에도 여러모로 공을 세운 개국공신으로 회안정왕의 시호를 받았다. 거기다 안사의 난 도중에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국정의 아들이기도 하다. [7] 이길보가 814년 사망한 이후 헌종을 군사적 부분에서 보좌한 인물[8] 이는 당시에는 성덕 번진의 왕승종이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지만 후에 이사도가 저지른 일임이 확인되었다.[9] 이때 신라는 헌덕왕이었다. 3만여에 달하는 병력을 편성해 파견하겠다 했지만 이사도 토벌이 끝난 후에야 편성이 완료되었다.[10] 단약의 과도 복용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신경 쇠약 증세를 보였으며, 이로 인해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변했다고 한다. 측근들이 황제의 변덕스럽고 히스테릭한 성격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이는 최측근인 환관들이 가장 심하게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