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종(당)

 


<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당 제15대 황제'''
'''武宗 肅皇帝 | 무종 숙황제'''
'''묘호'''
'''무종(武宗)'''
'''시호'''
지도소숙효황제(至道昭肅孝皇帝)
'''연호'''
회창(會昌, 841년 ~ 846년)
'''출생'''
814년 7월 1일
'''사망'''
846년 4월 22일 (32세)
'''재위'''
'''당의 황제'''
840년 2월 20일 ~ 846년 4월 22일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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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48252><colcolor=#ece5b6> ''''''
이(李)
''''''
전(瀍) → 염(炎)
'''부모'''
부황 목종, 모후 선의황후
'''황후'''
황후 정씨(鄭氏)[4]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즉위
2.3. 소의 번진의 반란
2.4. 회창의 폐불
2.5. 단약 중독과 사망
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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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당나라의 제15대 황제. 목종의 5남으로 경종, 문종의 이복 동생이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문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환관 구사량 등이 태자 이성미(李成美)[1]를 폐하여 진왕(陳王)으로 강등시키고, 문종의 동생인 이염을 황태제(皇太弟)로 옹립했다.
참고로 이 구사량은 환관들을 다음과 같이 교육시켰다.

'''천자를 심심하게 하면 꼭 책을 읽고 유신(儒臣)을 만나게 된다.''' 그러면 간언을 받아들여 지혜와 생각이 깊어지고 놀고 싶은 마음이 없어져 밖으로 나도는 일이 줄어들게 된다네. 그리 되면 우리가 받을 은혜가 얇아지고 권세도 줄어들 수밖에 없어. 내가 자네들을 위해 한 가지 꾀를 내 주지. 재물을 불리는 데에는 이만한 방법이 없을 것이니 매와 말을 길러 날마다 사냥을 나가고 음악과 여색으로 군주의 마음을 미혹시키게. 사치의 극을 달리게 하여 쉴 틈 없이 즐기도록 만들게. 그러면 반드시 경술(經術)을 배척하고 바깥 일에 어두워져 모든 일이 내 손아귀에 들어오게 될 것이니 은택과 권력이 다 어디로 가겠는가? 사마광 <자치통감>

그러나 이 구사량은 무종 시기 연간에 정치적 권력을 잃게 된다.

이덕유가 황제에게 중용되는 것을 보고는 그를 몰아낼 계획을 세웠지만 무종의 적절한 조치로 무산되었다. 회창 3년, 구사량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직의사를 내비치자 무종은 곧바로 분위기를 몰아 그의 병권을 해제했다. <중략> 퇴직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사량은 사저에서 사망했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또한 이러한 구사량의 실각을 후술할 회창폐불(会昌廢佛)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해석도 있다.

무종은 840년 진왕 성미를 살해하고 황위에 올랐다. 이 거사에는 환관이며 불교신자였던 구사량에게 힘입은 바 컸다. 그러므로 구사량의 영향력은 무종의 대불교정책에도 크게 작용했다. 그것은 무종의 불교탄압이 구사량의 죽음을 계기로 그 양상이 달라진 데서도 쉬 짐작이 간다. 무종의 대불교정책을 회창원년에서, 구사량이 사망할 때까지를 전기로 삼으면, 이 기간은 탄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한과 보호의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구사량이 사망한 뒤인 후기에는 도교라는 이교도의 힘이 작용하여 탄압을 넘어 절멸의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도교신앙의 결과는 학자, 관료 계급들도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전기는 군의 최고사령관인 동시에 불교신자였던 관군용사 구사량을 둘러싼 환관집단과 재상 이덕유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 관료집단의 파벌투쟁의 결과였다. 후기에는 도사 조귀진을 비롯한 책동을 무종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불교와의 종교분쟁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김문경 <당 무종의 도교신앙>


2.2. 즉위


그는 840년 즉위하였고, 이덕유가 정치의 실권을 쥐었으며 회골(위구르) 격퇴에 성공하였다. 이때에 회골과 화친을 위해 시집보낸 당 헌종의 17녀인 태화공주가 당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경인일에, 태화공주가 경사에 이르렀고, 안정대장공주로 바꾸어 봉하였으며, 조를 내려 재상 등이 백관들을 이끌고 장경사 앞에서 배알하도록 하였다. 공주가 광순문에 이르러서, 성장한 옷을 벗고, 비녀와 귀걸이를 벗은 후, 회골이 은혜를 저버린 일과, 화친이 이룬 바가 없는 죄를 사죄하였다. 황제가 중사를 보내 위로하게 하고, 이후에 입궁하게 하였다. 사마광 <자치통감>

힐알사에 책명을 내리기도 했다.

마침 회골이 깨져 약해져 있었고 토번도 어지러운 상태에 빠져 서로 죽이고 물어뜯자 그들이 쇠한 틈을 타 바로 우산기상시 이식을 힐알사에 사신으로 보내 군장을 종영웅무성명가한(宗英雄武誠明可汗)으로 책봉했다. 구양수 <신당서>


2.3. 소의 번진의 반란


또한 무종 시기에는 소의 번진 지역의 반란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무종이 황위에 있는 동안 재상 이덕유를 중용해 하북지역의 택로(澤潞) 절도사 유진(劉鎭)의 반란을 평정한 것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중요 업적으로 자주 칭송되었다. <중략> 이덕유가 번진의 처리 과정에서 무력적 방법을 건의하고, 변방지역에 군대를 파견해 무종의 치국이념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도운 것은 회창 연간의 정치적 업적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

번진에 대한 강경책 역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덕유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번진에 대한 억압책을 강화하였고 중앙의 위신을 회복하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번진들이 항명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면 이를 즉시 토벌하였다. 이덕유의 번진 정책의 골자는 유진과 양변의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당시의 상황을 보면 이덕유만이 유진을 토벌하자는 주장을 하였고, 다른 신하들은 이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하고 있다. 다만 무종이 이러한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서, 이후 당조의 권위가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환관들이 군사에 일일이 참여하였을 때 이를 개혁한 것도 이덕유였던 것으로 미루어 그의 정책 입안이나 수행에 대한 의지를 단순히 당쟁의 한 측면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명희 <李德裕의 政治論 관한 小考>


2.4. 회창의 폐불


또한 무종시기를 규정짓는 가장 핵심적인 정책 중 하나로는 '''회창폐불(会昌廢佛)'''을 들 수 있다. 그에 대한 서술은 아래와 같다.
그는 도교를 깊게 믿어 불교를 크게 탄압했는데,[3] 중국 역사상 삼무일종의 법난(불교 박해) 중 하나인 '''회창(会昌)의 폐불(廢佛)'''(845)을 단행해서 사찰 4,600개소를 헐고 26만여 명의 승려와 여승을 환속시키는 등 불교ㆍ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ㆍ마니교(摩尼敎)ㆍ조로아스터교(拜火敎)를 탄압하였다. 신라장보고가 세웠고 신라 상인들의 구심점이었던 적산 법화원도 이 때 훼철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있는 것은 현대에 복원된 것.

황상은 승니(僧尼)가 천하를 줄이고 좀먹는 것을 싫어하여 그들을 없애려고 하였는데, 도사(道士)인 조귀진(趙歸眞) 등이 그것을 권고하였으며, 마침내 산과 들에 있는 초제(招提)와 난약을 먼저 부수도 상도(上都)와 동도(東道)의 양가(兩街)에는 각기 두 개의 사찰만을 남겨두고 매 사찰마다 승려 30명을 남겨두었고 천하의 절도사와 관찰사의 치소와 동주(同州), 화주(華州), 상주(商州), 여주(汝州)에는 각기 사찰 하나만을 남겨두고 3등급으로 나누어 상등(上等)에는 승려 20명을 남게 하고 중등(中等)에는 10명을 남겨두었으며 하등(下等)에는 5명이었다. <중략> 재화와 전지(田地)는 나란히 관청으로 몰수되었고 사찰의 재료를 가지고서 관청과 역사(驛舍)의 지붕을 이었고 동상(銅像)과 종경(鐘磬)을 가지고서 동전을 주조하였다. 사마광 <자치통감>


2.5. 단약 중독과 사망


846년 무종은 단약(丹藥)을 먹다가 3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이 단약으로 인한 폐해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그 내용을 제시해 주고 있다.

황상은 방사(方士)가 만든 금단(金丹)을 먹어서 성격이 조급해지고 화를 내고 기뻐하는 일이 일정하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황상이 외부의 일을 가지고서 이덕유에게 물으니, 대답하였다. “폐하께서 위엄 있게 결단하시는 것을 예측하지 못하여 외부의 사람들은 자못 놀라고 두려워합니다. 지난번에 도적과 역적이 멋대로 포학하여 진실로 의당 위엄을 가지고서 그들을 다스렸어야 하지만, 지금 천하가 이미 평정되었으니,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너그러움을 가지고서 그들을 다스리시는데, 다만 죄를 얻은 사람으로 하여금 원망이 없도록 하고 선을 행한 사람이 놀라게 하지 않으면 관대한 것입니다.” 사마광 <자치통감>

무종의 원래 이름은 전(瀍)이었지만, 병이 들어 오래 살려는 의지를 담아 염(炎)으로 개명했다. 무종이 믿던 도사들이 주장하기를 전(瀍)에는 물수변(水)이 있어 토덕(土德)으로 건국된 당나라와 맞지 않으니 화기 서린 이름으로 고치도록 했던 것. 그러나 무종은 개명한 지 불과 '''12일 만에 죽었다.'''

삼월 임인일에, 황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제서를 내려 이름을 염으로 바꾸었다. 황제는 방사를 중히 여겨, 자못 수양을 위한 식사를 먹었고, 친히 법록을 받았다. 이제는 약을 먹기에 이르렀는데 희노가 정상적이지 않고 병이 더 심해져서, 열흘 동안 말할 수 없었다. 재상 이덕유가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가되지 못했다. 중외는 편안하거나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없어, 인정이 위태롭고 처량해졌다. 사마광 <자치통감>


3. 둘러보기





[1] 당경종의 5남[2] 당은 도교를 국교로 삼아 건국했지만 불교와 도교의 다툼이 늘 이어졌다.[3] 무종이 폐불정책을 시행한 이유는 도사 조귀진 등이 무종의 신임을 얻은 후 불교와 도교의 공존이 불가하다고 주장한 것이 주된 이유이겠지만,[2] 무종 자신도 불교 승려의 존재가 자신이 수련을 쌓아 신선이 되는 데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