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가와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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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가와 동지회의 노래[1]
조직을 상징하는 노래도 있다. 1972년에 조직명을 이나가와카이로 확정한 뒤 그 기념으로 지은 곡이다.[2]
稲川會(도천회 いながわかい)
도쿄 롯본기를 거점으로하는 야쿠자 조직. 1949년 이나가와 세이죠(본명:이나가와 카쿠지)가 시즈오카현의 아타미시를 거점으로 결성한 조직으로 한창 때는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현재 총본부의 위치는 도쿄 미나토구 롯본기 7-8-4에있다. 1949년 4월 설립, 구성원 추정치는 2019년 기준 정규조직원 약 2100명, 준구성원 1300명 도합 약 3,400명 수준이다.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와 비교되는 경쟁조직이자 이 중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야쿠자조직이다. 이나가와회는 야마구치구미와 비슷한 조직구조[3] 를 가지지만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더 적은 인원수가 더 철저한 규율 관계를 맺는형태를 보이는 조직으로 현대 야쿠자조직으로서는 특이하게 가문세습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제3대 오야붕은 제1대 오야붕의 친자식이면서 제2대 오야붕 밑에서 수행한 인연이 있고, 제3대 오야붕 사후 제1대 오야붕의 손자가 제4대 오야붕 자리를 노리고 도전했으나, 바로 그 제1대 오야붕이 직접 나서서 손자 쪽의 명분을 꺾음으로써 일을 마무리지은 적도 있다.
이나가와카이는 초기에는 이나가와구미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빠른속도로 주변지역의 세력을 흡수, 성장했다. 미군정시기 아타미를 비롯한 요코하마 인근은 도쿄의 외항으로써 한국 및 중국계 사람들이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자치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이곳에서는 일본인과 이들 민족사이에서 일종의 영역싸움이 잦았는데 이나가와는 당시 해당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츠루오카 마사지로와 협력해서 각성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세력을 확대한다. 이 시기 요코하마 주재 미국 총영사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공갈과 협박을 통한 보호금 갈취부터 외국상선에 승선하는 절도단 지휘까지 이들이 손대지 않는곳은 없다"라고 정부에 보고하기도했다. 특히 당시 이나가와회의 주요 수익원은 카지노도박업으로 이 시기엔 하루만에 6000만엔가량의 수익이 생길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규모를 키워나가던 이나가와회는 결국 63년 당국의 주목이 높아지자 이름을 긴세이카이(錦政会)로 바꾸고 조직을 아예 정당으로 등록, 신청하기까지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나가와는 고다마 요시오와의 유착이 표면화 된다.
평소 정치적 욕심이 강했던 이나가와와 극우세력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고 싶었던 고다마 요시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다는것을 깨닫게되고 적극적인 협력노선을 구축하는데 이에따라 고다마는 이나가와를 지원해 야쿠자연합체 조직을 구성하려한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점은 고다마가 전국적인 규모의 야쿠자조직체를 만들기위한 발표를 하기 직전에 야마구치구미가 연합에서 빠져버렸다는 점에있다. 이후 다오카 가즈오와 고다마간의 교류협력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사실상 다오카 카즈오는 고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에 속하는 다나카 세이겐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다른 야쿠자 조직들과 달리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경향을 많이보인다.
이 결과 탄생한게 바로 관동 7개 주요갱단이 모인 관동회다.
관동회는 이나가와 세이죠 주도로 마츠바카이의 후지타 우이치로를 수반으로 하는 거창한 극우야쿠자단체였으나 사실 내부적으로는 입장이 상당히 갈리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미요시회의 세키가미 요시미츠는 관동회를 단순한 조직간 친목협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정치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한 반면, 마츠바회의 후지타 우이치로는 일본교원노조[4] 를 대놓고 비난하면서 각종 우익세력의 정치적 전당대회에 조직원을 동원해서 참가하곤했다. 다만 당시 경찰관계자들 중에서는 이러한 마츠바회의 깽판은 단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가리기위한 연막행위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고한다.
그러나 결국 관동회는 이런 내부적인 입장차이에 더해서 야마구치구미와의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는데 당시 고다마의 의도와는 별개로 관동회에 참가한 조직들의 상당수는 다오카의 야마구치구미가 도쿄로 진출하는것을 막고자하는 의도로 참가한 부분이 컸기때문이다.
60년대 다오카는 도쿄진출의 야욕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는데 실제로 이 시기 벌어진 사건이 바로 그랜드 펠리스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야마구치 구미가 관동지역으로의 진출 발판을 만들기위해 요코하마로 부하들을 보내 사무실을 만들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로인해 당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한 이나가와회와 야마구치구미가 정면충돌, 무장전투를 벌이면서 발생했다.
결국 항쟁을 중재하기위해 고다마와 이나가와가 나서게되고, 당시 도쿄를 주무대로 동성회를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던 재일교포 오야붕 정건영의 토우세이카이[5] 를 정책상으로 야마구치구미와 쿄다이 사카즈키[6] 를 맺게하고 이를 명목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그 이상 관동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중재안이 제시된다.
이나가와는 비록 제한조건이 있었지만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간접적인 형태로 관동진출을 확대해나가는것을 허용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관동회는 그 의미를 잃고 해산하고만다. 다만 타오카는 이런 제한 조건을 우회하기위해 이런저런 꼼수를 발휘하는데 대표적으로 정치적 동맹관계인 다나카 세이겐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마약유통근절동맹이라는 형식상의 기구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관동지역에 동맹자들을 늘린것이다. 실제로 이때 릿쿄대학의 마츠시다 마사토시 총장 등 사회적 유명인사가 이에 동참하기도했다. 이와는 별개로 결국 야마구치구미의 꼼수는 묘한 형태로 결국 대성공으로 이어지는데, 동성회 회원 키노시타 하루오가 타나카 세이겐과 다오카 카즈오의 이 운동이 야마구치 구미의 입장에서는 이득이되었지만 동성회입장에서는 오히려 조직이 고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다나카 세이겐을 저격하는 사건을 벌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건영은 책임을 지고 동성회가 야마구치구미산하 직계단체가 되는 선택을 내림에따라 야마구치구미는 확고하게 도쿄에 자리잡게된다.
다만 관동회의 해산과는 별개로 이나가와 세이죠는 지속적으로 관동지역 조직들의 친목모임을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결과로 등장한것이 관동회를 승계한 관동이십일회 다. 이 모임은 정기적으로 매년 2월 관동지역의 거대 조직간부들이 모이는 합동식사회로 계속 이어졌으며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야마구치구미에대한 견제 및 세력갈등 조율의 목적이 컸다.
1965년에는 조직명을 이나가와잇가로 바꾸고 1972년에는 이나가와카이로 확정한다. 이를 기념해서 위의 노래인 이나가와 동지회의 노래를 만들었다.
1985년 이나가와 세이죠는 총재로 물러난 뒤 회장 자리는 이시이 스스무에게 물려주었다. 같은해 다케나카 마사히사 야마구치구미 4대째 두목의 후견인으로 취임했다.
이나가와카이와 야마구치구미와의 직접적인 갈등 이후로는 주로 야쿠자세계에서의 정치적 중재자로서의 위치로 활약하는데 이는 이나가와 세이죠가 타오카 카즈오의 뒤를 잇는 야쿠자세계에서의 2인자로서의 영향력을 가지는 결과로 이어지게된다.
실제로 다오카 가즈오 사후 야미구치구미 4대 두목으로 타케나카 마사히사가 결정될 때 타케나가의 후견인이 되주었고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역시 두목 승계 당시 이나가와 세이죠를 후견인으로 모셨다. 특히 와타나베가 이치와카이와 내분중이던 야마구치구미의 5대 두목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와타나베의 항쟁 중재 제안을 이나가와 세이죠가 적극적으로 받아준 결과이기도하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야쿠자세계의 정치적 중재자이자 언론플레이의 달인이었는데 실제로 이나가와 세이쵸는 고다마 요시오의 관동계열 조직들의 핵심인 관동회를 주도 하기도 했으며 관동계조직들이 관서의 핵심인 야마구치구미와 평화협정을 맺는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정도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이나가와카이 자체는 조직원 수 4000여명 규모에 수익수준도 야마구치구미나 스미요시회와 비교했을때 상당히 뒤떨어지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쿠자세계에서는 야마구치구미 바로 다음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나가와카이는 전국에서 세손가락에는 들어갈정도는 되었지만 실제 발휘되는 영향력에 비해 규모가 야미구치구미 절반에도 못미치는 편이었다. 규모면에서 이나가와카이보다 조금 더 큰 스미요시회는 규모에 비해 연합이라는 특성때문인지 오히려 관심을 덜 받는 조직이었다. 이는 세이죠라는 인물의 정치적, 전략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매년 경시청에 대놓고 신년인사를 나가거나 종종 하위조직 두목들을 불러들여 만찬을 열었으며 틈틈이 여행을 하면서 돈을 마구 뿌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도모하는걸 상당히 중시했는데 실제로 세이죠의 인터뷰 자료나 증언들을 보면 세이죠 자체는 상당한 노신사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썩어도 야쿠자라고 이 사람도 엄청난 수라장을 거쳐온 사람이다. 싸움으로 귀 일부도 없었고 가슴 한복판엔 칼자국이 나있는데다가 심지어 뒷통수에 칼을 맞아 뇌 일부가 날아갔다가 간신히 살아남기도했다. 그러고도 90살넘게 산 괴물. 즉 젊었을때는 수라장을 거쳤고 나이들고 나서는 능구렁이가 다 된 노괴다. 2006년 츠노다 요시오의 취임식에 참석하여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주도한 이나가와카이의 분열을 막았다. 2007년경 이나가와 세이죠는 폐렴으로 사망한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전통적인 야쿠자 이미지에 대한 매니아로 실제로 각종 야쿠자 영화촬영에 많은 돈을 지원해댔으며 한편으로는 야쿠자집단내에서는 특이하게 화려해진 문화를 없애려고 노력한 인물이기도하다. 실제로 그는 평소에 야쿠자조직 특유의 단지문화를 꺼려하기도했고 사카즈키의식과 데무카이의식[7] 의 간소화를 추진하기도했다. 실제로 이때문에 이나가와회는 세이죠가 있을때는 데무카이 의식이 없기도했다.
1985년 취임한 2대째 이시이 타카마사(본명:이시이 스스무)는 1924년생의 구 일본군 해군 대위 출신으로 대표적인 경제 야쿠자로 불렸다.1946년에 폭력단에 들어가 1963년에는 요코스카 일가 5 대째를 계승하고 1969년 타츠미 산업을 설립, 기업 경영 지향을 가지고 경제 진출하는 폭력단의 선구자가 된다. 도박 혐의로 몇번 체포되어 복역했으나 이내 풀려나와 이나가와카이를 지휘했고 야마-이치 전쟁을 중재해 야쿠자계의 중재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1989년엔 버블경제의 끝에서 주식투자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 정계와의 연계도 중시하여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에도 암약했다.
1990년 질병으로 은퇴하고 1991년 병사한다. 장례식엔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이나가와회는 현대적인 야쿠자조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대에 초대 두목인 세이죠의 실제 장남인 이나가와 유우코우가 집권하기도 했는데 유우코우는 완전 엘리트 야쿠자로 2대 두목인 이시이 타카마사의 밑에서 조직을 꾸려나간데다가 아예 기반도 조직의 시작점인 아타미시에 두고 있었다. 결국 2005년에 64세의 나이로 병사해버렸지만.
이나가와 유우코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스기우라잇가를 선두로 요코하마파 야마카와잇가를 중심으로 카와사키파 이나가와잇가의 아타미파로 각각의 파벌이 4대 카이쵸 후보를 따로 내세우며 조직이 분열되려는 조짐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어지던 중 3대 카이쵸의 장례가 어느정도 정리된 2006년 7월 19일 카와사키파벌 야마카와잇카의 2대 총장 키요타 지로(신병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츠노다 요시오가 4대 카이쵸를 승계했다. 그리고 같은날 이나가와 세이죠의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독자적으로 아타미에서 직접 5대 카이쵸를 승계하며 이나가와카이는 분열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나가와 세이죠 총재가 손자 히데키가 아닌 츠노다의 승계식에 참석했고 이에 명분이 약해진 히데키는 츠노다와 직접 만나 대화를 해 다시 4대 이나가와에 소속되는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 짓는다. 이후 2007년 히데키는 은퇴한다.
2010년 2월 4대 카이쵸 츠노다는 췌장암으로 병사하고 5대 카이쵸는 야마카와잇카 2대총장이던 키요타 지로(신병규)가 승계한다. 카와사키파벌에서 2번 연속 카이쵸를 배출했어도 내분의 위험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는데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스기우라 마사히로가 건재하던 요코하마파벌이 5대째가 되어서도 조직 집행부에 대거 참여하며 서로를 견제하던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기우라가 2012년 야쿠자를 은퇴하고 그 후로 요코하마파벌들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카와사키파벌을 이끌던 야마카와잇가가 중핵조직이 되며 오랜 내분 위기를 벗어나 이나가와카이가 빠르게 정리, 정비되었다.
5대 회장 키요타 지로(신병규)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면 본래 재일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카나가와현의 카와사키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야쿠자 야마카와잇가의 2대 째 두목으로 본래는 80명규모의 구렌타이를 이끌다가 조직째로 야마카와잇가에 들어가 처음부터 와카가시라로 본격적인 야쿠자 인생을 시작했는데 1대두목인 야마카와 오사미(심경변)밑에서 와카가시라로만 수십년동안 자리를 지키며 조직을 이나가와카이 내 최대세력으로키워냈다.
92년에 야마카와잇가를 계승한 이래 이나가와카이에서 비중있는 직위들을 역임하면서 빠른속도로 출세를 했는데 이는 2대 때 부터 조직내에서 꾸준히 인정 받으며 4대 카이쵸를 지원하는 카와구치 파벌의 수장으로 실력을 행사하였고 조직 외부로는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이자 야마구치구미 내 최대파벌 인 고도카이의 총재 타카야마 키요시와 사카즈키를 맺는 등 조직력과 경제력 인맥으로 이미 4대 이나가와카이 때부터 이나가와카이 내 타조직들을 압도하는 실세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2010년 5대 카이쵸마저 승계한다.
실제 승계 후로는 자신의 후계자로 야마가와잇가의 3대 총재이자 5대 이나가와카이 이사장인 우치보리 카즈야에게 조직운영의 많은 부분을 위임한 채 전면에 등장하는 횟수가 매우 적다고 한다.
여담으로 신병규가 야마카와잇가 2대총재 시절 이나가와카이 산하의 슈우게츠잇카와 (지금은 해산한) 니비키카이의 산하 하치오지잇카와 코가네이치잇카의 연합에 의해 납치되었던 적이 있다. 종이박스에 포장된 채로 극심하게 두들겨 맞았는데 그때 살려달라 빌며 성대가 상해 이상한 목소리를 갖게되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경찰에 스스로 납치사건을 사건을 신고하였고 사건을 책임지기 위해 슈우게츠잇카의 팔대 총재 아라이 켄조는 자살하였다. 이 사건 이후 신병규는 항상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있다.
슈우게츠잇카는 해산 이 후 코우죠잇카로 개칭하여 이나가와카이 2차단체로 남아있었으나 2016년 이나가와카이로 부터 절연 처분을 당해 이나가와카이를 탈퇴하였고 니비키카이의 해산 후 하치오지잇카와 코가네이잇카는 이나가와카이 직계 2차 단체가 되었다.
이나가와카이 6대 계승식 동영상
키요타 지로는 노환으로 총재로 물러난 뒤 회장은 2019년 4월, 6대 우치보리 카즈야가 승계했다. 우치보리 카즈야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의 엘리트로 30대쯤에 술잔을 받고 정식으로 야쿠자가 된 인물이다. 늦게 입문했지만 비상한 수완으로 키요타 지로의 야마카와잇가를 이끌었고 파나마 페이퍼에 관련 기업이 이름을 올리기도 한 경제통으로 알려저 있다.
전직 은행원 출신이라는 말도 있으며 돈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려저 있다. 아내가 재일교포로 우치보리 쿄코(신경자)로 알려저 있다. 2013년경 미국 재무부는 우치보리 카즈야에게 경제 제재 대상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타케우치 테루아키와 5분의 의형제로 알려저 있다. 위의 조직 분열을 주도했던 이나가와 세이죠의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와 악연이 있는데 이나가와 간부들이 담소를 나누던 와중에 이나가와 히데키가 도착하자 그를 본 우치보리 카즈야가 그를 "여~ 와카(부두목)" 정도로 짧게 부르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격분해서 "나는 부두목이 아니야! 본부장이다!"하고 주먹으로 마구 구타했다. 이에 격분한 우치보리 카즈야는 야마구치구미의 부두목 타카야마 키요시에게 의뢰해서 이나가와 히데키를 제거하기 위한 히트맨을 불렀다. 그러나 위험을 감지한 이나가와 히데키쪽에서 경계를 삼엄히 하여 결국 이 일은 흐지부지 되었는데 아무튼 이때의 인연으로 야마구치구미와 교다이 사카즈키를 맺었다는 일화가 있다.
야마구치구미 두목 시노다 켄이치의 생일 파티에 초대돼서 노래부르는 우치보리 카즈야를 보듯이 예전부터 야마구치구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2017년 12월 19일 이나가와카이 소속 야쿠자 2명이 서울 강남 역삼역 한복판에서 대만 폭력조직 죽련방 소속 조직원과 마약거래를 하다가 한국 수사팀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이 거래한 마약은 약 8kg가량의 필로폰으로 시세로는 288억원 가량의 마약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만, 중국, 일본의 폭력조직들이 한국내에 마약을 밀수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들 조직들이 한국에서 서로 거래를 한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이번 거래에서 대만 폭력조직원들이 실제 들고 온 마약은 약 16kg이었고, 이중 야쿠자과 거래한 8kg의 마약만 압수된 상황이라 나머지 8kg의 마약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고한다.
2018년 10월 15일 이나가와카이 간부급 조직원이 참여하여 국내 사상 최대 분량의 필로폰을 밀수하다가 조직원이 노출되었다.
이나가와카이 최고 고문 니시야마 테루(西山輝)는 재일 출신으로 그 동생이 니시야마 미노루(한국명 서순종)인데 한국의 전국구 폭력단 신상사파와 같이 권투사업을 하는등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니시야마 테루는 한국 골프오픈을 후원하고 우승컵에 이나가와카이의 문장을 새겨서 보내주기도 했다.
자민당의 7선 중진의원이었던 하마다 코이치(浜田幸一)는 원래 이나가와카이 계열의 전직 야쿠자 출신이었다. 스스로 이나가와 세이죠를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TV쇼에도 여러번 출연해서 하마코란 애칭으로 유명했으며 2012년 사망했다.사망 기사
전 일본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선거 대책 본부장이었던 타케우치 키요시(竹内清)는 이나가와카이 계열 요코스카카이의 조직원 출신이었다. 이나가와카이 2대 두목인 이시이 타카마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 고이즈미 신지로와 같이 찍은 사진이 발견되는등, 고이즈미 부자와 매우 친했던것으로 알려저 있으며 고이즈미 부자의 지역구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2007년 사망했고 장례식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직접 조문 왔다. 아들인 타케우치 히데아키는 가나가와현 의회 의원이다.
이나가와 동지회의 노래[1]
조직을 상징하는 노래도 있다. 1972년에 조직명을 이나가와카이로 확정한 뒤 그 기념으로 지은 곡이다.[2]
1. 개요
稲川會(도천회 いながわかい)
도쿄 롯본기를 거점으로하는 야쿠자 조직. 1949년 이나가와 세이죠(본명:이나가와 카쿠지)가 시즈오카현의 아타미시를 거점으로 결성한 조직으로 한창 때는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현재 총본부의 위치는 도쿄 미나토구 롯본기 7-8-4에있다. 1949년 4월 설립, 구성원 추정치는 2019년 기준 정규조직원 약 2100명, 준구성원 1300명 도합 약 3,400명 수준이다.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와 비교되는 경쟁조직이자 이 중 가장 전통적인 형태의 야쿠자조직이다. 이나가와회는 야마구치구미와 비슷한 조직구조[3] 를 가지지만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더 적은 인원수가 더 철저한 규율 관계를 맺는형태를 보이는 조직으로 현대 야쿠자조직으로서는 특이하게 가문세습이 이루어지기도 했었다. 제3대 오야붕은 제1대 오야붕의 친자식이면서 제2대 오야붕 밑에서 수행한 인연이 있고, 제3대 오야붕 사후 제1대 오야붕의 손자가 제4대 오야붕 자리를 노리고 도전했으나, 바로 그 제1대 오야붕이 직접 나서서 손자 쪽의 명분을 꺾음으로써 일을 마무리지은 적도 있다.
2. 역사
2.1. 초대 이나가와 세이죠 시대
이나가와카이는 초기에는 이나가와구미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빠른속도로 주변지역의 세력을 흡수, 성장했다. 미군정시기 아타미를 비롯한 요코하마 인근은 도쿄의 외항으로써 한국 및 중국계 사람들이 상당한 수를 차지하고 자치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따라 이곳에서는 일본인과 이들 민족사이에서 일종의 영역싸움이 잦았는데 이나가와는 당시 해당 지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츠루오카 마사지로와 협력해서 각성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세력을 확대한다. 이 시기 요코하마 주재 미국 총영사는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 "공갈과 협박을 통한 보호금 갈취부터 외국상선에 승선하는 절도단 지휘까지 이들이 손대지 않는곳은 없다"라고 정부에 보고하기도했다. 특히 당시 이나가와회의 주요 수익원은 카지노도박업으로 이 시기엔 하루만에 6000만엔가량의 수익이 생길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고 한다.
이렇게 규모를 키워나가던 이나가와회는 결국 63년 당국의 주목이 높아지자 이름을 긴세이카이(錦政会)로 바꾸고 조직을 아예 정당으로 등록, 신청하기까지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이나가와는 고다마 요시오와의 유착이 표면화 된다.
평소 정치적 욕심이 강했던 이나가와와 극우세력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대하고 싶었던 고다마 요시오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다는것을 깨닫게되고 적극적인 협력노선을 구축하는데 이에따라 고다마는 이나가와를 지원해 야쿠자연합체 조직을 구성하려한다. 다만 여기서 흥미로운점은 고다마가 전국적인 규모의 야쿠자조직체를 만들기위한 발표를 하기 직전에 야마구치구미가 연합에서 빠져버렸다는 점에있다. 이후 다오카 가즈오와 고다마간의 교류협력이 없었던건 아니지만 사실상 다오카 카즈오는 고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에 속하는 다나카 세이겐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다른 야쿠자 조직들과 달리 독자적인 노선을 걷는 경향을 많이보인다.
이 결과 탄생한게 바로 관동 7개 주요갱단이 모인 관동회다.
관동회는 이나가와 세이죠 주도로 마츠바카이의 후지타 우이치로를 수반으로 하는 거창한 극우야쿠자단체였으나 사실 내부적으로는 입장이 상당히 갈리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스미요시회의 세키가미 요시미츠는 관동회를 단순한 조직간 친목협회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정치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라고 이야기한 반면, 마츠바회의 후지타 우이치로는 일본교원노조[4] 를 대놓고 비난하면서 각종 우익세력의 정치적 전당대회에 조직원을 동원해서 참가하곤했다. 다만 당시 경찰관계자들 중에서는 이러한 마츠바회의 깽판은 단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가리기위한 연막행위에 가깝다고 보는 이들도 많았다고한다.
그러나 결국 관동회는 이런 내부적인 입장차이에 더해서 야마구치구미와의 갈등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했는데 당시 고다마의 의도와는 별개로 관동회에 참가한 조직들의 상당수는 다오카의 야마구치구미가 도쿄로 진출하는것을 막고자하는 의도로 참가한 부분이 컸기때문이다.
60년대 다오카는 도쿄진출의 야욕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는데 실제로 이 시기 벌어진 사건이 바로 그랜드 펠리스 사건이다. 이 사건은 야마구치 구미가 관동지역으로의 진출 발판을 만들기위해 요코하마로 부하들을 보내 사무실을 만들면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로인해 당시 요코하마를 중심으로한 이나가와회와 야마구치구미가 정면충돌, 무장전투를 벌이면서 발생했다.
결국 항쟁을 중재하기위해 고다마와 이나가와가 나서게되고, 당시 도쿄를 주무대로 동성회를 조직해서 활동하고 있던 재일교포 오야붕 정건영의 토우세이카이[5] 를 정책상으로 야마구치구미와 쿄다이 사카즈키[6] 를 맺게하고 이를 명목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그 이상 관동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중재안이 제시된다.
이나가와는 비록 제한조건이 있었지만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간접적인 형태로 관동진출을 확대해나가는것을 허용하고 말았으며 이에 따라 관동회는 그 의미를 잃고 해산하고만다. 다만 타오카는 이런 제한 조건을 우회하기위해 이런저런 꼼수를 발휘하는데 대표적으로 정치적 동맹관계인 다나카 세이겐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마약유통근절동맹이라는 형식상의 기구를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관동지역에 동맹자들을 늘린것이다. 실제로 이때 릿쿄대학의 마츠시다 마사토시 총장 등 사회적 유명인사가 이에 동참하기도했다. 이와는 별개로 결국 야마구치구미의 꼼수는 묘한 형태로 결국 대성공으로 이어지는데, 동성회 회원 키노시타 하루오가 타나카 세이겐과 다오카 카즈오의 이 운동이 야마구치 구미의 입장에서는 이득이되었지만 동성회입장에서는 오히려 조직이 고립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해 다나카 세이겐을 저격하는 사건을 벌였기 때문이다. 결국 정건영은 책임을 지고 동성회가 야마구치구미산하 직계단체가 되는 선택을 내림에따라 야마구치구미는 확고하게 도쿄에 자리잡게된다.
다만 관동회의 해산과는 별개로 이나가와 세이죠는 지속적으로 관동지역 조직들의 친목모임을 유지하고자 하였는데 그 결과로 등장한것이 관동회를 승계한 관동이십일회 다. 이 모임은 정기적으로 매년 2월 관동지역의 거대 조직간부들이 모이는 합동식사회로 계속 이어졌으며 실질적인 의미에서는 야마구치구미에대한 견제 및 세력갈등 조율의 목적이 컸다.
1965년에는 조직명을 이나가와잇가로 바꾸고 1972년에는 이나가와카이로 확정한다. 이를 기념해서 위의 노래인 이나가와 동지회의 노래를 만들었다.
1985년 이나가와 세이죠는 총재로 물러난 뒤 회장 자리는 이시이 스스무에게 물려주었다. 같은해 다케나카 마사히사 야마구치구미 4대째 두목의 후견인으로 취임했다.
이나가와카이와 야마구치구미와의 직접적인 갈등 이후로는 주로 야쿠자세계에서의 정치적 중재자로서의 위치로 활약하는데 이는 이나가와 세이죠가 타오카 카즈오의 뒤를 잇는 야쿠자세계에서의 2인자로서의 영향력을 가지는 결과로 이어지게된다.
실제로 다오카 가즈오 사후 야미구치구미 4대 두목으로 타케나카 마사히사가 결정될 때 타케나가의 후견인이 되주었고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역시 두목 승계 당시 이나가와 세이죠를 후견인으로 모셨다. 특히 와타나베가 이치와카이와 내분중이던 야마구치구미의 5대 두목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와타나베의 항쟁 중재 제안을 이나가와 세이죠가 적극적으로 받아준 결과이기도하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야쿠자세계의 정치적 중재자이자 언론플레이의 달인이었는데 실제로 이나가와 세이쵸는 고다마 요시오의 관동계열 조직들의 핵심인 관동회를 주도 하기도 했으며 관동계조직들이 관서의 핵심인 야마구치구미와 평화협정을 맺는데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할정도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특히 이나가와카이 자체는 조직원 수 4000여명 규모에 수익수준도 야마구치구미나 스미요시회와 비교했을때 상당히 뒤떨어지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쿠자세계에서는 야마구치구미 바로 다음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이나가와카이는 전국에서 세손가락에는 들어갈정도는 되었지만 실제 발휘되는 영향력에 비해 규모가 야미구치구미 절반에도 못미치는 편이었다. 규모면에서 이나가와카이보다 조금 더 큰 스미요시회는 규모에 비해 연합이라는 특성때문인지 오히려 관심을 덜 받는 조직이었다. 이는 세이죠라는 인물의 정치적, 전략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기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매년 경시청에 대놓고 신년인사를 나가거나 종종 하위조직 두목들을 불러들여 만찬을 열었으며 틈틈이 여행을 하면서 돈을 마구 뿌리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도모하는걸 상당히 중시했는데 실제로 세이죠의 인터뷰 자료나 증언들을 보면 세이죠 자체는 상당한 노신사라는 평가가 많다. 다만 썩어도 야쿠자라고 이 사람도 엄청난 수라장을 거쳐온 사람이다. 싸움으로 귀 일부도 없었고 가슴 한복판엔 칼자국이 나있는데다가 심지어 뒷통수에 칼을 맞아 뇌 일부가 날아갔다가 간신히 살아남기도했다. 그러고도 90살넘게 산 괴물. 즉 젊었을때는 수라장을 거쳤고 나이들고 나서는 능구렁이가 다 된 노괴다. 2006년 츠노다 요시오의 취임식에 참석하여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주도한 이나가와카이의 분열을 막았다. 2007년경 이나가와 세이죠는 폐렴으로 사망한다.
이나가와 세이죠는 전통적인 야쿠자 이미지에 대한 매니아로 실제로 각종 야쿠자 영화촬영에 많은 돈을 지원해댔으며 한편으로는 야쿠자집단내에서는 특이하게 화려해진 문화를 없애려고 노력한 인물이기도하다. 실제로 그는 평소에 야쿠자조직 특유의 단지문화를 꺼려하기도했고 사카즈키의식과 데무카이의식[7] 의 간소화를 추진하기도했다. 실제로 이때문에 이나가와회는 세이죠가 있을때는 데무카이 의식이 없기도했다.
2.2. 2대 이시이 타카마사 시대
1985년 취임한 2대째 이시이 타카마사(본명:이시이 스스무)는 1924년생의 구 일본군 해군 대위 출신으로 대표적인 경제 야쿠자로 불렸다.1946년에 폭력단에 들어가 1963년에는 요코스카 일가 5 대째를 계승하고 1969년 타츠미 산업을 설립, 기업 경영 지향을 가지고 경제 진출하는 폭력단의 선구자가 된다. 도박 혐의로 몇번 체포되어 복역했으나 이내 풀려나와 이나가와카이를 지휘했고 야마-이치 전쟁을 중재해 야쿠자계의 중재자로도 이름을 떨쳤다. 1989년엔 버블경제의 끝에서 주식투자로 막대한 돈을 벌었고 정계와의 연계도 중시하여 도쿄 사가와 규빈 사건에도 암약했다.
1990년 질병으로 은퇴하고 1991년 병사한다. 장례식엔 6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2.3. 3대 이나가와 유우코우 시대
이나가와회는 현대적인 야쿠자조직으로서는 이례적으로 3대에 초대 두목인 세이죠의 실제 장남인 이나가와 유우코우가 집권하기도 했는데 유우코우는 완전 엘리트 야쿠자로 2대 두목인 이시이 타카마사의 밑에서 조직을 꾸려나간데다가 아예 기반도 조직의 시작점인 아타미시에 두고 있었다. 결국 2005년에 64세의 나이로 병사해버렸지만.
이나가와 유우코우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스기우라잇가를 선두로 요코하마파 야마카와잇가를 중심으로 카와사키파 이나가와잇가의 아타미파로 각각의 파벌이 4대 카이쵸 후보를 따로 내세우며 조직이 분열되려는 조짐이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2.4. 4대 츠노다 요시오 시대
아슬아슬한 상황이어지던 중 3대 카이쵸의 장례가 어느정도 정리된 2006년 7월 19일 카와사키파벌 야마카와잇카의 2대 총장 키요타 지로(신병규)의 지원을 등에 업은 츠노다 요시오가 4대 카이쵸를 승계했다. 그리고 같은날 이나가와 세이죠의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독자적으로 아타미에서 직접 5대 카이쵸를 승계하며 이나가와카이는 분열위기를 맞는다. 그러나 이나가와 세이죠 총재가 손자 히데키가 아닌 츠노다의 승계식에 참석했고 이에 명분이 약해진 히데키는 츠노다와 직접 만나 대화를 해 다시 4대 이나가와에 소속되는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 짓는다. 이후 2007년 히데키는 은퇴한다.
2010년 2월 4대 카이쵸 츠노다는 췌장암으로 병사하고 5대 카이쵸는 야마카와잇카 2대총장이던 키요타 지로(신병규)가 승계한다. 카와사키파벌에서 2번 연속 카이쵸를 배출했어도 내분의 위험이 지속적으로 존재했는데 전국적인 영향력을 가진 스기우라 마사히로가 건재하던 요코하마파벌이 5대째가 되어서도 조직 집행부에 대거 참여하며 서로를 견제하던 상태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기우라가 2012년 야쿠자를 은퇴하고 그 후로 요코하마파벌들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카와사키파벌을 이끌던 야마카와잇가가 중핵조직이 되며 오랜 내분 위기를 벗어나 이나가와카이가 빠르게 정리, 정비되었다.
2.5. 5대 키요타 지로 시대
5대 회장 키요타 지로(신병규)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면 본래 재일교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카나가와현의 카와사키시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한국계 야쿠자 야마카와잇가의 2대 째 두목으로 본래는 80명규모의 구렌타이를 이끌다가 조직째로 야마카와잇가에 들어가 처음부터 와카가시라로 본격적인 야쿠자 인생을 시작했는데 1대두목인 야마카와 오사미(심경변)밑에서 와카가시라로만 수십년동안 자리를 지키며 조직을 이나가와카이 내 최대세력으로키워냈다.
92년에 야마카와잇가를 계승한 이래 이나가와카이에서 비중있는 직위들을 역임하면서 빠른속도로 출세를 했는데 이는 2대 때 부터 조직내에서 꾸준히 인정 받으며 4대 카이쵸를 지원하는 카와구치 파벌의 수장으로 실력을 행사하였고 조직 외부로는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이자 야마구치구미 내 최대파벌 인 고도카이의 총재 타카야마 키요시와 사카즈키를 맺는 등 조직력과 경제력 인맥으로 이미 4대 이나가와카이 때부터 이나가와카이 내 타조직들을 압도하는 실세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2010년 5대 카이쵸마저 승계한다.
실제 승계 후로는 자신의 후계자로 야마가와잇가의 3대 총재이자 5대 이나가와카이 이사장인 우치보리 카즈야에게 조직운영의 많은 부분을 위임한 채 전면에 등장하는 횟수가 매우 적다고 한다.
여담으로 신병규가 야마카와잇가 2대총재 시절 이나가와카이 산하의 슈우게츠잇카와 (지금은 해산한) 니비키카이의 산하 하치오지잇카와 코가네이치잇카의 연합에 의해 납치되었던 적이 있다. 종이박스에 포장된 채로 극심하게 두들겨 맞았는데 그때 살려달라 빌며 성대가 상해 이상한 목소리를 갖게되었다.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후 경찰에 스스로 납치사건을 사건을 신고하였고 사건을 책임지기 위해 슈우게츠잇카의 팔대 총재 아라이 켄조는 자살하였다. 이 사건 이후 신병규는 항상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있다.
슈우게츠잇카는 해산 이 후 코우죠잇카로 개칭하여 이나가와카이 2차단체로 남아있었으나 2016년 이나가와카이로 부터 절연 처분을 당해 이나가와카이를 탈퇴하였고 니비키카이의 해산 후 하치오지잇카와 코가네이잇카는 이나가와카이 직계 2차 단체가 되었다.
2.6. 6대 우치보리 카즈야 시대
이나가와카이 6대 계승식 동영상
키요타 지로는 노환으로 총재로 물러난 뒤 회장은 2019년 4월, 6대 우치보리 카즈야가 승계했다. 우치보리 카즈야는 게이오기주쿠대학 출신의 엘리트로 30대쯤에 술잔을 받고 정식으로 야쿠자가 된 인물이다. 늦게 입문했지만 비상한 수완으로 키요타 지로의 야마카와잇가를 이끌었고 파나마 페이퍼에 관련 기업이 이름을 올리기도 한 경제통으로 알려저 있다.
전직 은행원 출신이라는 말도 있으며 돈이 굉장히 많은 것으로 알려저 있다. 아내가 재일교포로 우치보리 쿄코(신경자)로 알려저 있다. 2013년경 미국 재무부는 우치보리 카즈야에게 경제 제재 대상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타케우치 테루아키와 5분의 의형제로 알려저 있다. 위의 조직 분열을 주도했던 이나가와 세이죠의 손자 이나가와 히데키와 악연이 있는데 이나가와 간부들이 담소를 나누던 와중에 이나가와 히데키가 도착하자 그를 본 우치보리 카즈야가 그를 "여~ 와카(부두목)" 정도로 짧게 부르자 이나가와 히데키가 격분해서 "나는 부두목이 아니야! 본부장이다!"하고 주먹으로 마구 구타했다. 이에 격분한 우치보리 카즈야는 야마구치구미의 부두목 타카야마 키요시에게 의뢰해서 이나가와 히데키를 제거하기 위한 히트맨을 불렀다. 그러나 위험을 감지한 이나가와 히데키쪽에서 경계를 삼엄히 하여 결국 이 일은 흐지부지 되었는데 아무튼 이때의 인연으로 야마구치구미와 교다이 사카즈키를 맺었다는 일화가 있다.
야마구치구미 두목 시노다 켄이치의 생일 파티에 초대돼서 노래부르는 우치보리 카즈야를 보듯이 예전부터 야마구치구미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3. 주요 인물
- 초대 이나가와 세이죠(이나가와 카쿠지)
- 2대 이시이 타카마사(이시이 스스무)
- 3대 이나가와 유우코우(이나가와 도이) - 초대의 장남
- 4대 츠노다 요시오
- 5대 키요타 지로(신병규) - 총재
- 6대 우치보리 카즈야 - 현 회장
4. 관련 일화
2017년 12월 19일 이나가와카이 소속 야쿠자 2명이 서울 강남 역삼역 한복판에서 대만 폭력조직 죽련방 소속 조직원과 마약거래를 하다가 한국 수사팀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이 거래한 마약은 약 8kg가량의 필로폰으로 시세로는 288억원 가량의 마약이었다. 일반적으로 대만, 중국, 일본의 폭력조직들이 한국내에 마약을 밀수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이들 조직들이 한국에서 서로 거래를 한건 매우 이례적이라고.
이번 거래에서 대만 폭력조직원들이 실제 들고 온 마약은 약 16kg이었고, 이중 야쿠자과 거래한 8kg의 마약만 압수된 상황이라 나머지 8kg의 마약의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고한다.
2018년 10월 15일 이나가와카이 간부급 조직원이 참여하여 국내 사상 최대 분량의 필로폰을 밀수하다가 조직원이 노출되었다.
이나가와카이 최고 고문 니시야마 테루(西山輝)는 재일 출신으로 그 동생이 니시야마 미노루(한국명 서순종)인데 한국의 전국구 폭력단 신상사파와 같이 권투사업을 하는등 예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심지어 니시야마 테루는 한국 골프오픈을 후원하고 우승컵에 이나가와카이의 문장을 새겨서 보내주기도 했다.
자민당의 7선 중진의원이었던 하마다 코이치(浜田幸一)는 원래 이나가와카이 계열의 전직 야쿠자 출신이었다. 스스로 이나가와 세이죠를 가장 존경했다고 한다. TV쇼에도 여러번 출연해서 하마코란 애칭으로 유명했으며 2012년 사망했다.사망 기사
전 일본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선거 대책 본부장이었던 타케우치 키요시(竹内清)는 이나가와카이 계열 요코스카카이의 조직원 출신이었다. 이나가와카이 2대 두목인 이시이 타카마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고 한다.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아들 고이즈미 신지로와 같이 찍은 사진이 발견되는등, 고이즈미 부자와 매우 친했던것으로 알려저 있으며 고이즈미 부자의 지역구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서 양자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2007년 사망했고 장례식엔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직접 조문 왔다. 아들인 타케우치 히데아키는 가나가와현 의회 의원이다.
[1] 작사가가 그 유명한 월광가면의 원작자이자 주제곡 작사자인 카와우치 코한이다.[2] 그 외에 중요한 노래로 이나가와 세이죠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수라의 무리' 주제가인 가나가와 수호전, 이나가와 세이죠를 기린 노래 남자의 꽃길 등이 있다. 이런 노래가 야쿠자 주제로 들리면 십중팔구 이나가와카이를 상징한다고 보면 된다. 원래 이나가와카이는 이나가와 흥행이라는 연예 회사를 운영하면서 토에이 같은 야쿠자 영화로 크게 재미를 본 영화 회사하고도 친했고 또 연예계를 좌지우지 하면서 영화배우들이나 가수들과 매우 절친했다. 따라서 이런 야쿠자를 미화하는 영화나 가요(인협,임협 가요라고 함)를 만들어서 조직을 홍보하고 음반을 판매해서 수익도 올린 것이다.[3] 정점의 오야붕을 중심으로 피라미드형태로 다른 구미들이 연결된 조직형태.[4] 당시 일본내 우파가 즐겨 공격한 대상이었다. 지금도 일본 좌익세력의 핵심조직으로 일본의 우경화를 막고 역사왜곡에 열렬히 반대하는 방파제역할을 하고 있다.[5] 당시 전국10대광역폭력단으로 지정되었던 도쿄 긴자를 중심으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조직. 덧붙여 코다마 요시오 와 이나가와 세이죠가 파트너 협력 관계에 가까웠다면 정건영은 코다마의 오른팔 격이었다.[6] 타오카가 형 정건영이 동생이 되는 6:4 사카즈키. 정건영의 동성회는 전후 미군정의 비호아래 급격한 성장을 해 관동에서 기존 야쿠자들에게 눈에 가시로 여기지며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기에 야마구치구미라는 거대세력을 배경으로 두고싶은 열망이 있었다.[7] 야쿠자가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오는걸 축하하는 의식으로 조직의 힘을 과시하기위한 목적으로 거대 야쿠자 조직들은 차량과 사람을 대거동원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