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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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구미 (山口組 やまぐちくみ)
1. 개요
2. 역사
2.1. 초대 ~ 3대 타오카 카즈오 시대까지
2.2. 4대 타케나카 마사히사 시대
2.3.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시대
2.4. 6대 시노다 켄이치 시대
3. 주요 인물
4. 일화
5. 대중매체
6. 여담


1. 개요


'''일본 최대 규모의 지정폭력단.''' 일본 3대 야쿠자 조직의 하나. 히로시마현, 오키나와를 제외한 45개의 도도부현에 계열조직을 두고 있다. 본부는 효고현 고베시.
전후 등장한 야쿠자의 교과서격인 조직으로 오늘날 '''야쿠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축해놓았으며 '''규모나 수입이 가장 큰 조직이다.''' 일본 전체의 야쿠자조직을 통틀어봐도 2위와 3위 규모의 조직을 합쳐야 야마구치 구미만큼의 조직원 수가 나올 정도가 된다. 일본 전국 3분의 2가량의 현에 산하조직들이 위치해있는지라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2014년 포춘지에서 야마구치구미가 한해동안 마약판매, 도박 등의 비합법적인 사업으로 66억 달러의 총수익을 올린다고 보도했다. 이는 전세계 범죄 조직 중 2번째 규모에 해당한다.
자금 규모로는 세계 범죄조직 중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 한해 수익 추정 66억 달러(한화 약 7.2조)포춘지 기사. 다만 중남미는 군 특수부대으로 회유해 집어삼키는 경우도 있으므로 실제 전투력은 세계의 손꼽히는 범죄조직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평.[1]
현재 수령은 야마구치구미의 6대. 이름은 츠카사 시노부(司忍). 1942년 생. 본명은 시노다 켄이치(篠田 建市).
2016년 현재. 야쿠자 전반의 인원 부족, 수입 감소로 인한 산하 조직의 상납금 감소, 정부의 압박 등으로 촉발된 갈등이 커져 2015년 8월에 산하 13개 조직이 '코베야마구치구미'로 분열. 조직원수가 1만 4천여명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항쟁[2] 중이다.
2019년경 기준으로 조직원은 약 8,900 명으로 구성원 약 4,100 명, 준 구성원 약 4,800 명으로 과거에 비해 많이 감소하였다.

2. 역사



2.1. 초대 ~ 3대 타오카 카즈오 시대까지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산구조[3])는 1915년 고베[4]의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초대 구미쵸(두목)인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50명의 조직원들을 모아 오오시마구미 산하 조직으로 결성하였다. 이후 인부파견업체로 시작해서 공연 흥행 사업도 하면서 조직의 기틀을 다져갔다.
1925년 2대 두목에 오른 초대의 아들 야마구치 노보루는 1932년 말에 발발한 타이쇼 운수(大正運輸) 쟁의 같은 노사분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서 조직원들이 다투던 노조원들에게 살해당하는 참사까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원만하게 노사쟁의를 해결하여 야마구치구미에 큰 명성을 가저다 주었다.
이후 고베중앙도매시장 개설 당시 이권문제로 상위조직이던 오오시마구미와 대립해 격한 항쟁을 치른 후 독점권을 손에 쥐고 1932년 독립한다. 그러나 얼마안가당시 두목이었던 야마구치 노보루가 요시모토 흥업 사건과 관련된 항쟁에서 칼에 찔려 1942년 사망하고 결국 야마구치구미는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두목 부재라는 상태로 시간을 보내게된다.
사실상 두목 부재로 인해 서서히 말라죽어가던 야마구치구미를 부흥시킨건 3대 구미쵸 다오카 카즈오의 역할이 컸다. 전후 고전적인 바쿠토 체제를 벗어나 본격적인 조직적인 야쿠자 체제를 구축한 야마구치구미는 미군정하의 단 5년사이에 오사카 지역 대부분을 차지할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는데, 이 성장을 이룩해낸것이 바로 1946년 3대 두목에 취임한 야마구치구미의 제3대 구미쵸 다오카 카즈오였다.
다오카 카즈오는 1913년 시코쿠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이후 코베에서 항만 노동자로 일했는데 14살의 나이에 제2대 구미쵸인 야마구치 노보루가 있던 야마구치구미에 입단한 이후 조직의 핵심 전투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커다란 덩치로 싸움에서 상대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끄집어 낼 정도로 잔혹한 모습을 보였다보니 조직에서는 다오카를 곰이라는 별명을 지어 붙여줄정도로 다오카는 야마구치 구미내에서 나름대로 탄탄한 입지를 세워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1936년에 반대파 단원을 찔러 죽인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전쟁기간 중 절반을 옥중에서 보냈는데, 덕분에 징병과 당시 야마구치 구미가 겪던 여러 거친 항쟁들을 피할 수 있었고, 43년 석방된 시점에서는 당시 두목인 야마구치 노보루가 사망한데다가 일본 경찰의 엄격한 단속으로 규모가 크게 줄어있던 야마구치 구미를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에 따라 그 잔인한 명성으로 33명 규모의 작은 조직의 구미쵸가 된 다오카 카즈오는 이전의 야쿠자들과는 다르게 기존사업에 기업체제를 적용해 세력확장을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 말 코베 지역에서 가장 큰 바쿠토계 조직인 혼다카이[5]와 전략동맹을 맺었다가 이를 계기로 한신 지역에 영향력을 넓힌 이래 오사카 미나미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있던 한국계 구렌타이 메이유카이 또한 흡수하는 데에 성공, 사실상 전후 얼마 안 가 오사카지역 전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다오카는 기존의 항만하역, 창고업과 마약판매[6] 경마 경륜 야구도박 도박장개설 등의 바쿠토 사업을 넘어 조직의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흥행업인 홈런 히트 퍼레이드라는 예능단을 조직해 전국 일주를 돌리며 노하우를 쌓아 코베예능사를 발족. 당대 최고 인기의 소속 연예인들을 무기로 메이져 방송국에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7] 또한 노무자 중개업을 바탕으로 화물 회사에 대한 재정적 관여를 통해 60년대 중반에는 코베 부두 하역량 전체의 80%를 지배할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쥐게되는데, 실제로 이 시기 한해 동안 야마구치구미가 화물사업과 관련해서 벌어들인 액수만해도 약 60억엔으로 추정하고 있다.[8]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세력 확장 속도를 가속화하기 시작하는데 소위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정벌이라 불리는 세력 확장을 시도, 이때 메이유카이와의 항쟁 후 2차단체로는 승격됐지만 오사카에서 제대로 된 세력권을 확보하지 못한 재일교포 야쿠자인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에게 타지역 진출을 허용하였고 이에 한록춘의 잇신카이 등이 합세하여 활약해 야마구치구미는 전국구 조직으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이때의 일화들은 워낙 많다보니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젔는데 대표적인 영화가 히로시마 진출을 두고 히로시마 토착 조직인 교세이카이와 싸운 일화를 다룬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의리없는 전쟁, 호쿠리쿠 진출 일화를 그린 호쿠리쿠 대리전쟁 등등이 있다. 이런 야마구치구미의 팽창은 수많은 항쟁을 일으켰고, 규슈로 진출한 하카타 사건때는 조직원 300명을 일시에 동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1965년에는 심지어 히로시마 교세이카이의 주도로 두목 다오카 카즈오의 집에 다이너마이트가 투척된 적도 있었다. 야마구치구미의 이런 전국 진출은 성공적으로 그 지역에 정착한 경우도 있지만 지역 조직의 저항으로 크게 힘을 못쓰거나 적은 영향력만 발휘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대표적으로 큐슈,히로시마,오키나와 등등[9]이 야마구치구미가 제대로 진출 못한 곳이다.[10]
65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산하 424개 구미, 9,450명의 인수를 자랑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야마구치구미의 전성기는 조직의 연간 매상이 100억엔이 넘었으며 도박, 고리대금업, 스포츠 및 흥행업에 이르기까지 약 5,000개 이상의 기업에 영향력을 미치며 이중 5억엔가량을 경찰에 상납하는 등 엄청난 수준을 자랑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힘이 어느정도 감소한 시기의 기록이지만 84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야마구치구미 한 간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야마구치 조직원들의 벌이는 말단 꼬붕들의 평균 연수입이 330만엔정도이고, 클럽지배인급이면 약 1,000만엔, 중간급 두목이면 연간 3,000만엔정도를, 대부급이면 1억엔정도를 챙겼다고 한다.
정재계와 결탁하여 뒷세계에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흑막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야쿠자 역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리즈시절의 야마구치구미를 이끌던 3대 구미쵸 타오카 카즈오는 표면적으로 항만용역추진협회를 통해 현직 교통상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으며 항만노조를 부두에서 잔혹한 폭력으로 몰아냄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특히 야마구치구미가 전성기를 달린 60년대는 안보투쟁의 영향으로 극우조직의 득세가 심각했고, 야마구치구미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 시기의 협력경향의 중심에는 1960년대 초 회원 15만명규모의 극우조직 전애회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다나카 세이겐이 있었다. 타오카 자신은 코다마 요시오와 어느정도 협력은 하고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코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다나카 세이겐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친우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런 야마구치구미가 위기를 맞은건 19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타오카 암살시도 사건으로부터였다. 관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마구치구미였지만 여전히 그에 반하는 조직 또한 존재했는데 75년 3대 야마구치구미 산하의 사사키구미와의 싸움에서 오야붕을 잃은 마츠다구미 산하 대일본정의단 소속 조직원 나루미 키요시는 대범하게도 야마구치구미의 영역 한복판인 교토에서 권총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이 암살시도에서 타오카 카즈오는 목을 스치는 총상을 입으며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 충격으로 몇달간 두문불출하게 되면서 그 카리스마에 대한 조직 내 의심이 짙어진 것이다.
여담으로 암살을 시도한 나루미 기요시는 얼마안가 코베 근교 롯코산에서 검테이프에 둘둘말려 10일 정도 부패된 채 발견된다. 사체는 손, 발톱이 거의 다 뽑혀 있었고 양손 지문이 사라져 있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연일 지속되던 더운 날씨에 얼굴이 백골화 되는 등 부패도 상당히 진행되어 알아보기조차도 힘들었는데 적외선조사로 등짝의 흐릿한 선녀문신을 찾아낸 데 이어 그가 소년원 시절 성기에 박아넣었다는 2개의 진주도 무사해 사체의 주인을 그로 확정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너무 커진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경찰의 수사망이 강화되고 야마구치구미 내부의 장년층과 청년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의 정책에 반대하는 하부 구미의 구미쵸들이 23명이나 경찰에 잡혀가는 등 내외부적으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경찰관 1,100여명이 동원된 80일 전투라고 불리는 전후사상 최대규모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단 2달만에 간부 518명, 조직원 2,000명이 구속되었는데, 심지어 병보석 중이던 타오카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마저 구속된다.
결국 연속으로 발생한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타오카 카즈오는 60명이 넘는 신문기자들을 자신의 호화자택에 불러 그 자리에서 조직이 대중과 경찰에 폐를 끼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굴욕적인 기자회견을 가지게 된다. 이 기자회견 이후 완전히 은거에 들어간 타오카 카즈오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81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타오카 사후 야마구치구미는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 3개월의 준비끝에 커다란 영결식을 거행하게 되고 이를 경고하는 의미로 일본 경찰은 전국적으로 구성권 900여명을 구속하는 대대적인 진압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타오카의 영결식에는 200개 조직 1,300여명의 야쿠자 조직원이 모인다. 이 영결식은 코베의 가장 명성높은 변호사들 사무실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이루어졌으며 코다마 요시오를 위시한 극우 조직의 추종자들과 정치인, 타바타 요시오나 타카쿠라 켄을 포함한 일본 흥행업계의 스타들도 대거 참석했다.
타오카는 죽기 전 잔인한 성격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지는데 앞서의 기자회견 이후 투옥되어 있었던 켄이치는 공식적인 취임이 어려웠고 이에 따라 상주로는 타오카의 아내였던 타오카 후미코가 담당하였다. 이 장면은 남성 일색의 야쿠자 세계에서 상주라는 핵심적 역할을 여성인 후미코가 담당하게 됨에 따라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데, 비록 야마모토 켄이치의 출소하기 전까지의 임시직이었다고는 하나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물론 이 시기까지 여자 구미쵸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2,000여명이 넘는 유례없는 대규모 조직에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다는 건 당시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했다.
이후 82년 야마모토 켄이치가 출소하게 됨에 따라 타오카의 자리는 야마모토에게 넘어가나 얼마 안 가 7개월만에 야마모토는 간경변증으로 사망, 야마구치구미는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야마구치구미는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과는 달리 곳곳의 수많은 조직들을 사카즈키라는 의식으로 마구 엮어나가며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했지만 결속력이 약했기에 타오카 카즈오라는 주도적 인물의 죽음 이후 이는 독이 되어 돌아온다.

2.2. 4대 타케나카 마사히사 시대


타오카 카즈오의 사후 시점을 기준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구성원만 약 13,000여명에 공식 가입조직만 580여개, 일본 전체 1도1도43개 현 중 36개를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타오카와 야마모토 사후 8명의 거대 조직의 두목들이 타오카 후미코와 함께 임시적으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조직에는 타오카의 뒤를 잇는 구미쵸가 필요했고 최종적으로는 2명의 후보가 남게된다.
한 사람은 조직의 2인자였던 야마모토 켄이치의 라이벌이었으며 조직의 큐슈진출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야마모토 히로시였고, 또 한 사람은 타오카 및 야마모토 켄이치와 가까운 위치에서 공격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하면서 직접 현장을 뛰어다니던 타케나카 마사히사였다. 당시 평가로는 야마모토 히로시는 직접 현장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사람들을 지휘하는데에 익숙한 인텔리 야쿠자였으며, 타케나카 마사히사는 직접 공갈, 폭행을 저지르는것도 서슴치않는 전형적인 야쿠자였다고 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타오카의 후임은 104명의 하위조직의 두목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기로 하였으며 57대 19로 후미코의 지지를 받던 타케나카 마사히사로 선출되었다.[11]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발생하는데 결국 경합에서 탈락한 야마모토 히로시가 타케나카의 부하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그를 따르는 고위급 부두목 18명을 데리고 이치와카이를 결성한 것이다. 이때 이치와카이가 데려간 조직원만해도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의 절반인 6,000여명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이치와카이와 야마구치구미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야마구치구미는 썩어도 준치라고 돌아오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사면령과 함께 퇴직수당을 제공하는 파격안을 제시함으로써 이치와카이의 조직원수를 3,000명 수준까지 줄이는데에 성공한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이치와카이는 타케나카를 노리고 총을 쏴 최고위 두목 2명과 타케나카를 죽이는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유혈참극이 벌어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타케나카 사후 이 두 조직간에서만 단 1년만에 약 200회 이상의 무장총격사태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대립에서 야마구치구미는 사람수에서는 압도했으나 정작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는데 이는 이치와카이가 야마구치구미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에서 무기의 대부분을 가지고 나갔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야마구치구미는 이치와카이를 이기기 위해 무기의 보급이 절실했는데 이를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로부터 무기보급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야마구치구미에게 있어서 오히려 항쟁에 소극적이게 되는 계기가 되고만다. 1985년 9월 호놀룰루에서 미연방 마약단속국이 타케나카의 동생이자 조직내 실권자인 타케나카 마사시와 조직의 재정담당자인 오다 히데오미를 체포한 것이다. 적발 당시 이들은 하와이의 마피아로부터 로켓 발사기 3문, 기관총 5정, 권총 100정을 구입하고 외국인 암살자 1명을 고용하려 했으며 이와 동시에 당시 기준 133억엔이나 되는 24kg의 암페타민헤로인 5.5kg을 판매하려 했다고 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이치와카이와 무한정 대립을 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자중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틀게되었고, 직접 밀수를 주도했던 타케나가구미는 조직 내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게된다.
이 당시 사건의 전말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당시 밀수를 주도했던 다케나가 마사시는 본래 프로레슬러 히로 사사키에게 공연료 4억엔의 마이클 잭슨의 일본 공연을 의뢰하면서 보증금으로 5천만엔을 관계 부동산업자에게 건냈는데,[12] 사사키는 하와이에 건너가 마이클 잭슨 공연 기본계약서에 사인을 하고나서 3일 후 당시 이치와회와의 항쟁으로 무기가 절실했던 다케나가에게 호놀룰루에서 마피아에게 미육군 권총과 기관총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건네게된다. 일본으로 돌아온 뒤 다케나가는 항쟁에 쓰일 무기가 필요했던 차라 무기구입 보증금으로 4억엔을 송금하고나서, 조직의 자금책이던 오다와 홍콩 삼합회의 미전성을 대동해 호놀룰루 마피아의 결성 25주년 파티에 참석하고 무기 거래를 완료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날아갔으나 3명 모두 대기하고 있던 미연방 마약단속국에 바로 검거된다. 이 체포작전이 이렇게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었던데에는 사실 '''사사키는 미연방 마약단속국 소속 이었으며 마이클 잭슨 공연과 마피아, 무기 거래는 모두 꾸며낸 가공의 이야기로 미 연방정부의 함정수사였기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야마구치구는 항쟁이 장기화되면서 위와같은 사건들로인해 점점 힘들어지고 있었지만, 이치와카이는 이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받고있었고, 그 결과 이치와카이를 따라 야마구치구미를 적대했던 홋카이도의 세이유카이가 야마구치구미로 돌아서고 산하 조직 구미쵸들이 대거 은퇴하며 조직을 해산 해 버리는 등 조직 약화를 버티지 못하는 일이 계속되자, 이치와카이에서는 이나가와 세이죠와 아이즈코테츠카이의 타카야마 토쿠타로(강외수)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야마모토 히로시는 야마구치구미로 부터 목숨을 보전받는 조건으로 아이즈코테츠카이 타카야마(강외수) 회장을 통해 야마구치구미 본부에 사죄와 항쟁종결의 뜻을 전하였다. 이에따라 이치와카이는 야마구치구미에 보호받게 되었고 이 항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야마켄 구미의 2대 조장 와타나베 요시노리가 5대 야마구치구미의 오야붕으로 추대된다.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마츠다구미와 야마구치구미간에 벌어진 오사카 전쟁에서 활약한 무투파로, 야마이치 항쟁[13]에선 이나가와카이를 움직여 중재를 성사시켜 조직내 영향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 화해 결정에 타케나카구미는 불복하였고 야마구치구미를 탈퇴해 기존 이치와카이에 대한 보복을 지속하였다. 야마모토 히로시와 이치와카이의 보호를 약속한 5대 야마구치구미는 타케나가구미를 향해 일방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야마타케 항쟁에 다시 돌입하게 되는데 야마모토 히로시가 병사하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종결되게 된다.
결국 타오카 사후 야마이치 항쟁과 야마타케 항쟁은 조직 내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투쟁이었을 뿐이지만 이 과정에서 야마구치구미와 이치와카이는 500억엔 정도를 날렸으며 항쟁의 여파로 민간인 희생자가 여럿 발생하는 등 사회안전에 대한 우려가 또 다시 전사회적으로 재기되어 폭대법 제정의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폭력단원들의 경마, 경륜 등의 공공시설 입장금지와 마츠리에 노점 개설을 불가하는 등 이후 야쿠자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하기 시작한다.

2.3.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시대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기존의 타오카 같이 카리스마로 조직을 1인이 정점에서 통괄하는 체제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조직의 쇄신을 도모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블록제를 도입, 야마구치구미가 활동하는 세력범위를 5개 블록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산하조직들의 상위 두목을 지정하고 이들에게 폭넓은 권한을 주었다. 이러한 체제혁신은 후계문제로 고생을 한 야마구치구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이후의 분열사태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이렇게 쇄신을 거듭하던 5대 야마구치구미는 97년 타쿠미 마사루 암살사건을 겪으면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르게된다. 타쿠미 마사루는 5대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이자 조직의 주요 자금책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던 인물이었는데, 신 코베 오리엔탈 호텔(현 ANA 크라운프라자 호텔 코베)에서 산하 2차단체인 나카노카이의 히트맨들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나카노카이와 아이즈코테츠카이가 교토에서 부동산 문제가 발단이 되어 나카노카이의 카이쵸가 총격을 받는 등 과격한 항쟁이 거듭되던중 타쿠미가 나카노카이의 동의없이 아이츠코테츠카이와 일방적으로 화해시켜 이에 앙심을 품은 나카노카이가 타쿠미 포함 키시모토, 노가미 3명의 최고간부를 습격해 타쿠미 마사루가 총에 7발 맞고 사망한 사건. 타쿠미와 동석했던 키시모토와 노가미는 무사하였으나 근처 테이블에 있던 치과의사가 유탄에 중상을 입고 6일 후 사망했다.
이에 따라 야마구치구미는 사건의 당사자인 나카노카이를 절연하고 타쿠미구미를 중심으로 나카노카이의 간부 대부분을 습격해서 죽여버렸고, 그 결과 나카노카이는 주요 간부들을 대부분 잃고 2005년 해산하게 된다.
이 후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2004년 갑작스럽게 집행부에 모든 전권을 위임한채 은거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2005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그 과정에서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타쿠미 사후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던 와카가시라 직책에 츠카사 시노부(본명 시노다 켄이치)[14]를 임명했고 얼마안가 츠카사에게 구미쵸 자리마저 승계한다.
이 갑작스런 은퇴와 승계에 고도카이의 쿠테타 설도 제기되는데 와타나베는 구미쵸로 있는 동안 돈에 유난히 집착해 지방이권사업의 경우 조직산하의 지방조직이 아닌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업자에 수주를 주고, 부인이 운영하던 고급부띠크에 신상품 입점시 부하들에게 전화로 알리는 등 실질적인 강매를 해 조직내 불만이 중첩되고 있었다. 그리고 츠카사가 타쿠미 암살사건 배경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쥐고 있었다고도 알려져있다. 나카노카이는 5대 야마구치구미 직계가 되기 전까지 2대 야마켄구미 2차단체였고 2대 야마켄구미 구미쵸는 와타나베 요시노리였으므로 와타나베가 야마켄구미 샤테이카시라보좌 출신인 나카노 타로(나카노카이 카이쵸)를 이용해 조직운영의 실권을 쥐고있던 타쿠미의 암살을 부추기고 이후 파문 정도로 마무리 할려고 했으나 사건의 전모를 알아챈 고도카이를 비롯한 집행부의 강요로 나카노는 절연 당해 버림 받고 5대 와타나베 두목도 은퇴에 몰렸다는 추정도 거론되었다.

2.4. 6대 시노다 켄이치 시대


6대째에 들어서면서 야마구치 구미의 블록 체제는 더욱 강화되는데, [15] 1차 단체인 야마구치구미 본가를 중심으로 일본 전국을 7개 블록[16]으로 나누고 각 블록의 장은 나고야의 고도카이를 중심으로 한 조직 집행부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 이후 야마구치구미는 다시금 내홍을 겪기 시작했는데, 2008년 고토구미 처분 문제에 연좌되어 7개의 조직의 구미쵸들이 절연 처분을 받는 등 고도카이를 중심으로 한 집행부에 반항하던 조직들이 숙청되었고, 이 사태 이후 고도카이에 눌려 더욱더 세가 약화되가던 칸사이계 조직들이 2015년부터 야마켄구미, 타쿠미구미를 중심으로 뭉쳐 고도카이와의 갈등을 표면화시켰다.
1997년 타쿠미 마사루의 죽음 이후 고도카이는 급격한 경제적 성장[17]을 하며 조직의 규모가 야마켄구미를 압도하기 시작하였는데, 6대 구미쵸로 츠카사 시노부가 취임한 이후 고도카이가 야마구치구미 중핵 조직이 되며 조직 내 중요 요직을 싹쓸이하였고 야마켄구미 산하에서 알짜 수익사업인 연예 흥행사업을 관리하던 쿄쿠신렌고카이를 독립 직계로 승격시키는 등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 사업들이 박살 나버린 관서계 조직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증폭될 수밖에 없었다.

15년 8월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 이러한 갈등은 9월에는 본격적으로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 하는 13개 조직의 이탈로 이어졌고, 이렇게 이탈한 조직들과 이들에 신조직 하나가 합류해 총 14개 조직이 연합해 코베야마구치구미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코베야마구치구미가 공식적으로 세워진 이후 야마구치구미 본가는 곧장 이 사태를 주도한 야마켄구미와 타쿠미구미 및 이에 동조한 세력들을 절연-파문하였다. 현재 코베야마구치구미의 규모는 준구성원을 포함해 조직원수가 6,1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 비슷한 사례였던 야마-이치 항쟁 때 큰 규모의 전쟁과 사상자가 났던 만큼 일본 사회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실제로도 분열 이후 이들이 관계된 사건만 분열 이후 반년 동안 20개 도도부현에서 50건 가까이 발생하였다. 주로 서로의 조직 사무실에 총알이 날아든다던가, 차량으로 적대 사무소 건물을 돌진해 받아버린다던가 하는 폭력사태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코베야마구치구미를 지정폭력단으로 지정하고 야마구치구미와 코베야마구치구미를 대립항쟁중폭력단으로 지정, 경계태세에 들어간 상황이다.
분열 이후 2015년 10월 6대 야마구치구미 3차 단체 카케노구미 구미원이 이적 문제로 사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 달 6대 야마구치구미 산하 쿠라모토구미 카와치 토시유키 구미쵸가 타살 가능성이 보이는 자살을 했다. 그리고 11월에는 6대 야마구치구미 산하 아이오우카이 히시다 타츠유키 구미쵸가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사상자 없이 두 조직 다 암묵적인 휴전체제에 돌입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6대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사업내용이 전통적인 깡패 사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코베야마구치구미는 자금 동원력에서 6대 야마구치구미에 절대적 열세에 있어 항쟁이 장기화에 접어들수록 불리한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성 초기부터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 박정호[18]의 나미카와카이와 결연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으나 [19] 나미카와카이가 이번 분열사태에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일각에선 야마구치구미 내 한국계 야쿠자와 부락민 출신 야쿠자의 대립이 표면화된 것이라는 분석이 대두되나 6대 야마구치구미와 코베야마구치구미 모두 주요 직책에 한국계가 포진해 있으므로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그보단 고도카이를 위시로 한 나고야계 조직들에 주요 사업을 상실한 기존의 파벌들이 돈벌이를 되찾기 위한, 특히 야마켄구미가 쿄쿠신렌고카이로 부터 연예 흥행사업을 타쿠미구미가 오하라구미로부터 금융사업을 되찾기 위해 손잡고 코베야마구치구미를 결성을 주도했다고 보는 추정이 더욱 유력하다.
2016년 5월 하순 6대 야마구치구미 구미쵸 츠카사는 5대 이나가와카이 카이쵸 신병규 자택을 방문해 코베야마구치구미와의 화해 중재를 의뢰했는데 코베야마구치구미는 화해의 대가로 츠카사의 총재 승격, 형무소에 수감 중인 타카야마 키요시 와카가시라의 은퇴, 7대 구미쵸 자리를 공석으로 하는 대신 코베야마구치구미 이노우에 회장이 7대의 와카가시라로 취임하는 것을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경시청의 두 조직에 대한 특별감시기간 동안 두 조직은 화해를 향해 물밑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16년 5월 31일 코베야마구치구미 산하 이케다구미[20]의 와카가시라 타카키 타다시가 6대 야마구치구미 고도카이 산하 타카야마구미의 구미원[21]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코베야마구치구미는 즉각 보복을 금한다는 공문을 산하 조직에 날렸으나 급속히 진행되던 화해 분위기는 없던 일이 되게 생겼다.
16년 7월 27일 밤 중립을 지키던 나미카와카이 산하 무라카미잇가와 6대 야마구치구미 직계 이즈구미[22] 산하 하라타구미의 조직원들끼리 후쿠오카 하카타의 번화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이즈구미는 나미카와카이에 화해의 뜻을 전달했지만 나미카와카이는 화해의 대가로 하라타구미 마츠모토 카츠히로 구미쵸의 한쪽 팔을 요구하며 이즈구미의 모든 제안을 거절. 후쿠오카 하카타서는 화해의 가능성은 없고 항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경계에 들어갔다.
일련의 항쟁은 16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감소했으나, 17년 4월 30일 야마켄구미의 부조장이었단 오다 요시노리[23]를 대표로 코베야마구치구미의 일부 조직원들이 독립하여, 임협 야마구치구미를 결성하였다. [24] 임협 야마구치구미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코베야마구치구미 상층부가 분열 당시의 목적인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개혁정신[25]을 잃었다고 비난하면서 개혁안을 제시하였고, 자기들 조직은 기존의 조직들과는 달리 대표만 존재할뿐 사카즈키 식 관계로 묶이지 않은 평등한 조직을 내세운다고 밝혔다.
이 기자회견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주로 코베야마구치구미 내에서 보수적이고 나이가 많은 상층부와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과격파에 속하는 젊은 층간의 갈등이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부적으로 젊은 층의 조직개혁안이 무시된 채, 일방적으로 상층부가 아래에 요구하는 과도한 회비 압박 등이 불만이 쌓인 주요 요인이라고. [26]
이후 동년 9월 오다 요시노리를 노린 총격사건이 발생했으나 결국 보디가드만 사망하고 요시노리는 살아남았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현재 코베야마구치구미의 중핵 조직인 야마켄구미로 추정되고 있는 중이다. [27]
임협 야마구치구미의 결성으로 결국 2017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야마구치구미, 코베야마구치구미, 임협 야마구치구미라는 총 3개의 단체로 분열되었다.
2017년 6대 야마구치구미는 분열의 원인이 된 상납금을 기존에 조직마다 월 65만 엔씩 걷고 있던 걸 10만 엔으로 줄이고, 새롭게 사무실을 개업하는 조직에게는 지원금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실질적으로 6대 야마구치구미에서 코베야마구치구미로의 탈퇴는 가속화되어 2018년에 와서는 조직 간 균형이 맞춰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28]
2019년 10월 18일 수감중이던 조직의 no.2 다카야마 키요시가 출소하였다. 이로서 야마구치구미가 재정비를 하고 어떤 행보를 보일지 각계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기사
11월에 야마구치구미 조직원이 고베 야마구치구미 간부를 M16 소총으로 30발을 사격해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
2020년 1월에는 임협 야마구치구미가 갑자기 조직명을 키즈나카이라 바꾸고 야마구치란 이름을 버려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일본 현지에서는 임협 야마구치구미가 상대적으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야마구치구미라는 이름을 걸고 독립했지만,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와 달리 이렇다 할 세력을 끌어모으지 못하면서 양 세력 사이에서 생존이 어려워졌다 보니 아예 야마구치 삼국지 구도에서 빠져 독자생존을 모색하려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29]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구미는 모두 '특정 위험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되어 쿠도카이에 이어 두 번째로 지정되는 케이스가 되었다. 이로서 일본 경찰의 감시가 더 심해졌고 6대째나 고베 측이나 모두 손발이 묶여 항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이다. 거기다 코로나 19가 일본에 퍼지자 양측은 사실상 무기한 휴전에 들어갔으나 2020년 5월 30일 고베야마구치구미에 소속된 이케다구미의 오카야마 사무실이 습격당해 간부와 조직원 한 명이 총상을 입었다. 당일 이케다구미에서는 2016년 야마구치구미 쪽 조직원에 습격당해 사망한 간부의 추모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사건 당시 CCTV가 공개됐는데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활극이었다.
잇따른 야마구치구미의 고베야마구치구미 공격에 대해 고베 측은 별다른 보복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으며 조직원들의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다는 전망이 있다. 고베 측의 중핵 조직인 야마켄구미도 위태로운 낌새가 보이고 현재 전쟁은 6대째 야마구치구미의 우세 속에 있다는 것이 전반적인 일본 언론의 평가이다.
2020년 8월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중핵조직인 야마켄구미가 분열하여 탈퇴하자는 조장파와 고베 잔류파로 나뉘어저서 분열해버렸다. 현 조장인 나카타 히로시가 고베 야마구치의 두목인 이노우에 구니오와 결정적으로 사이가 틀어젔으며 고도카이 조직원 습격 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상태에서 탈퇴를 결정했다고 한다. 직계 부하두목(직상) 50명 가운데 20명이 나카타 히로시를 따라 고베를 탈퇴했으나 나머지 30명은 고베 야마구치에 잔류하는등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고 있으며 일본 언론은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해산도 전망하고 있다. 또 5월에 습격 당한 이케다구미도 고베 야마구치를 탈퇴해서 독자조직을 선택했다.
또 키즈나카이도 해산 움직임이 있었으나 부하들이 두목 오다에게 해산반대를 주장해 해산하진 않았다고 한다. 여러모로 6대째 야마구치구미에 유리한 상황이다.

3. 주요 인물


  • 야마구치 하루키치 - 초대 두목
  • 야마구치 노보루 - 2대 두목, 초대의 아들이다.
  • 다오카 카즈오 - 3대 두목 - 조직의 전성기를 열었다.
    • 지미치 유키오 - 다오카 카즈오 시절 와카가시라 (부두목)
    • 야마모토 켄이치 - 다오카 카즈오 시절 오른팔, 야마켄구미 두목
    • 야나가와 지로 - 한국명 양원석, 재일 출신
    • 이시다 쇼로쿠 - 한국명 박태준, 양원석의 부하로 재일 출신
  • 다케나카 마사히사 - 4대 두목 - 암살당한다.
    • 나카야마 카츠마사 - 4대째 두목과 같이 암살당한 와카가시라.
  • 와타나베 요시노리 - 5대 두목 - 최초로 임기 중 사임하고 은퇴.
    • 타쿠미 마사루 - 1997년 암살당한 와카가시라
    • 나카노 타로 - 5대 두목의 심복으로 부두목 타쿠미를 암살하고 절연됐다.
  • 츠카사 시노부(시노다 켄이치) - 6대 두목
    • 타키자와 타카시 - 6대 두목 대행으로 수감 중 사망했다.
    • 다카야마 키요시 - 6대째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
    • 고토 타다마사 - 고토구미 두목으로 5대째 부두목 보좌, 6대째 직참 사제였다. 1992년엔 이타미 주조를 습격하는 사건을 일으키고 2005년엔 신주쿠 빌딩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미국에서 간이식을 위해 FBI에 고도카이에 대한 정보를 넘기고 UCLA 메디컬 센터에 1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다카야마 키요시의 고도카이와 갈등 끝에 2008년 은퇴했다. 은퇴후 불교승려가 돼서 양계장 경영과 사회봉사 활동을 하고 캄보디아로 이민해서 국적을 취득하고 캄보디아 정계와 친분을 다져 백작에 해당하는 작위를 받았다. 일본 항공 최대 주주였고 자서전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 기시모토 사이조 - 공무원 출신 최고 고문. 수염이 멋진 미노년인 걸로 유명하다. 2014년 사망
    • 하시모토 히로후미 - 재일출신으로 한국 이름은 강홍문,야마구치구미의 2차 단체인 극심연합회(쿄쿠신렌코카이)회장이자 총괄위원장으로 6대째의 NO.4 에 해당 하는 인물이었지만 최근 은퇴했다, 시마다 신스케와 친분이 있는걸로 유명하다.
    • 타케우치 테루아키 - 부두목 보좌로 타카야마 키요시를 이어 고도카이 3대 회장직에 올랐으며 야마구치구미 7대째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히고 있다.

4. 일화


타오카 카즈오가 두목이던 시절에 연예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며 토에이에서는 타오카 카즈오와 야마구치구미를 소재로 하여 <야마구치 3대>, <삼대계승>, <제패> 등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야마구치 3대>와 <3대 계승>에서는 타카쿠라 켄이 타오카 카즈오를 연기하였고, <제패>에서는 미후네 토시로가 타오카 카즈오를 연기하였다. 1989년에 제작된 TBS 테레비 드라마 <미소라 히바리 이야기>[30]에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타오카 카즈오를 연기 하였다.
타오카 카즈오는 <삼대계승> 촬영 당시 직접 촬영 현장을 방문하여 타카쿠라 켄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타오카 카즈오와 타카쿠라 켄은 영화가 제작되기 전에도 이미 친분이 있었는데, 타카쿠라 켄의 결혼식에도 타오카 카즈오가 초대되어 참석했을 정도였다. 타카쿠라 켄은 야쿠자 영화로 톱스타가 되기 전에 미소라 히바리의 상대역으로 유명했는데,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이 타오카 카즈오였기 때문에 서로 안면이 있었고, 친분이 있었다.
<야마구치 3대>와 <삼대계승>은 당시 기자들이나 비평가들에게는 야쿠자를 미화[31]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은 작품이지만 의리없는 전쟁에 웃도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상당히 크게 성공했는데, <삼대계승> 이후 더 이상의 속편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야쿠자를 미화한다고 계속 욕을 먹는것에 토에이가 부담을 느꼈고, 또 속편이 계속 진행될수록 타오카 카즈오와 깊이 연관되어 있던 미소라 히바리가 영화에 등장해야 하는데, 남동생 가토 테츠야 덕분에 야쿠자 연루설로 크게 곤욕을 치루고 있던 미소라 히바리가 속편 제작을 허락치 않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연예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고 중 하나가 1953년에 일어난 배우겸 가수 츠루타 코지가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에게 습격, 폭행을 당한 일명 <츠루타 코지 습격 사건>이다. 최무룡김희갑임화수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의 한국판이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는 바람에 외려 광고효과(?)가 되어서 이 때까지만 해도 지방의 듣보잡 조직이던 야마구치구미는 당당한 전국구 스타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건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1953년 1월 6일 저녁 야마구치구미의 야마모토 켄이치 주도하에 4명이 동료 배우들과 식사를 하고 있던[32] 츠루타 코지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스키 병, 벽돌 등으로 후려치고 도주했는데, 츠루타 코지는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머리와 손에 11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사건의 발생 동기는 사건 발생 몇 달 전인 1952년 가을 타오카 카즈오가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에게 미소라 히바리와 츠루타 코지의 조인트 공연을 제안 했는데 거절 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었는데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의 태도와 언행이 불손하고 오만하다 하여 보복과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야마모토 켄이치가 나서서 자신포함 네명의 조직원과 츠루타 코지의 습격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습격한 조직원 4명은 기소되었고, 타오카 카즈오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는 사건 발생 2년 후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나중에 타오카 카즈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의 태도에 빡쳤긴 했지만 나는 습격을 지시하지 않았고 조직원들이 마음대로 저지른 짓이다."라고 적었지만 경찰 반응은 '''"이게 뭔 개소리야."'''
한편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습격을 당한 츠루타 코지는 타오카 카즈오에게 사과와 해명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만나서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결국 화해 했는데, 츠루타 코지가 대인배스럽게 용서를 해줬기 때문에 이후 타오카 카즈오는 츠루타 코지를 함부로 못 건드렸다고 한다.
1992년에는 배우이자 감독이였던 이타미 주조가 <민보의 여자>라는 갈취 피해를 당하는 호텔을 도와 형사+여변호사가 야쿠자에 대항한다는 작품을 찍자 야마구치구미 산하 고토구미 소속 조직원이 이타미 주조를 칼로 습격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폭대법이 시행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나서 크게 사회문제화되고 야쿠자에 대항해서 싸우자는 시민사회의 움직임과 이타미 주조도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라고 선언을 하는 등 반 야쿠자 풍조가 더 강해저 자충수라는 평가가 많았다. 그러나 이후 야쿠자들이 이타미 주조를 끝없이 괴롭히고 결국 석연찮게 이타미가 자살을 해 [33]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공포감이 심해젔다는 평가도 있다. 이후 고토구미는 각종 사건에 휘말리더니 2008년 연예인들과 골프회동을 한게 주간지에 폭로되어 그걸 트집잡아 절연 제명되어 해산되었다. 고토구미와 고도카이간의 내부 권력 다툼이 원인이 돼서 트집 잡아 해산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5. 대중매체



6. 여담


  • 1995년 고베 대지진 당시 앞장서서 시민들에게 구호품을 나눠주고 조직원들을 시켜 구조를 돕기도 하였다.
  • 할로윈 시즌에는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본부 사무실을 개방하며 과자도 나눠준다. 주변에 이사 온 외국인 가족의 어린이들이 야쿠자 사무실인지 모르고 불쑥 쳐들어가서 사탕을 달라고 졸랐는데 흔쾌히 과자를 내어주었고, 이를 계기로 지역주민과의 소통도 중요하다며 연례행사로 정착시켰다. 단, 2015년에는 코베야마구치구미와의 항쟁 때문에 민간인의 안전을 고려하여 해당 이벤트 개최를 중지한다는 사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었다. 물론 그곳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알고 있는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당연히 그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니 그런 행사가 있는지 알 리가 없었고, 해당 뉴스를 통해서 알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8년 동영상.#
2020년에는 효고현 경찰이 이런 야쿠자들의 핼러윈 행사를 지역주민들을 회유하려는 수작으로 보고 이를 막기위해 미성년자에 대한 금품공여 금지 조례안을 제출했다. 아이들을 사무실에 출입시키거나 주민과 연락하는것도 금지대상이다.
  • 유튜브에 6대 조장 시노다 켄이치의 생일 축하연 영상이 올라가 있다. 각 조직들 두목들까지 축하연에 참여하고 있는 등 다들 축하해주는 듯하다. 마치 친구(영화)의 "오늘 아버지 제사란다"라는 대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 #
  • 논픽션작가 데이비드 사우스웰이 2006년 저서에서 지구 상에서 제일가는 범죄조직으로 꼽았다. 수익면에선 느슨한 연합형태인 솔른체프스카야 브라트바에 약간 뒤지지만 야쿠자 조직 특유의 중앙집권적 피라미드 구조라 그런 듯하다. 단, 이들의 비교 대상인 이탈리아계 마피아나 러시아계 레드 마피아, 삼합회 계열의 범죄조직들에 비해서는 본국(일본)을 벗어나면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는 야쿠자 조직의 공통적인 특징으로, 사우스웰도 지적한 사항.
  • 간부시험에 조직 범죄법에 관한 문제를 내고 열공을 시킨다고 한다. #
  • 6대 두목 시노다 켄이치가 송사리 낚시를 하면서 유유자적하게 조직원들과 있는 동영상이 유출되었다.#
[1] 이는 선진국 기준 막장 국가인 중남미에 비해 일본의 국가안정성이 비교가 안 되기에 그럴 '필요'가 없기때문에 더 많은 무력을 확보하지 않는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기본적으로 이윤 창출이 목적인 범죄조직 입장에서는 무분별한 폭력과 정부와의 마찰로 기껏 벌어놓은 돈을 소모하는건 전혀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범죄조직은 어차피 공권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혀봤자 이길수도 없는데다가, 계속 손해만 볼 수 밖에 없기때문에, 야쿠자 같은 범죄 신디케이트는 마약 카르텔형 범죄조직과 다르게 한 국가의 시스템에 기생해 막대한 수익을 얻는데에만 집중하고, 필요 시에만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폭력을 이용할 수 있도록하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애초에 야쿠자들이 원하는 건 일본정복이 아니라 금전적 이득과 권력이라는걸 생각해보면 이게 합리적인 선택이기도하고.[2] 야쿠자 조직끼리 대규모 충돌을 일본사람들은 약간 거창하게 항쟁이라고 한다[3] 야쿠자 조직 명칭에 자주 붙는 '~구미(組)'는 합법적인 회사, 그중에서도 건설회사로 위장하려 붙였던 것이 기원이다. 따라서 한국어로는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번역어가 없으며 간혹 어감상 '~파'로 의역한다.[4] 본거지가 고베인 관계로 과거 코베 대지진 당시 조직원을 동원해 재난 구호 활동을 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5] 한 때 야마구치구미와 함께 칸사이를 양분했던 조직으로 야마구치구미와 마찬가지로 오오시마 구미로부터 독립한 조직이기도하며, 당시만해도 본거지인 코베에서는 야마구치구미보다도 규모가 컸었다. 특히 혼다카이는 오오시마구미에서 1940년 독립한 이래 고베 창고업과 항만하역업 등에서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보니 이 문제로 야마구치구미와 끊임없이 경쟁했고 제2차히로시마항쟁 당시 야마무라구미를 지원하며 대리전쟁을 치르기도했다. 이후 제1차 정상작전당시 전략해산 하였다가 대일본평화회로 재건 이후 폭대법에 의해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되었었으나 1997년 해산을 기점으로 지정해제 되었다.[6] 특히 한국산 히로뽕에 재미를 많이 본 것으로 전해진다.[7] 특히 일본 최고의 엔카가수로 평가받는 미소라 히바리와 인연을 맺게된것도 이런 이력이 있었기때문이다. 당시까지만해도 실력은 좋았지만 예능단 가수에 머물러있던 미소라 히바리는 고베에서의 공연 이후 다오카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다오카가 미소라 히바리의 초기 성공에 여러 직간접적인 도움을 준것으로도 유명하다.[8] 한국과 중국의 항구도시들이 성장하면서 지금은 많이 쇠락했지만 과거 고베는 아시아지역의 핵심 물류창구 역할을 맡고있었기때문에 엄청난 양의 물류량을 다루고있었다. 그런 항구도시의 화물들에 절반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9] 큐슈는 토착 조직들이 워낙 흉폭하고 무투파로 이름 높아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키나와 역시 1978년 진출할려다가 오키나와의 조직들이 한데 모여 쿄큐류카이를 결성해 강한 저항을 반복했다보니 결국 경찰이 양측을 모두 체포,제재하여 진출을 포기하였다.[10] 다만 히로시마의 경우처럼 한때 싸웠지만 나중에 사카즈키고토를 통해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는 있다.[11] 이때문에 당시에는 후미코와 타케나카가 불륜같은 모종의 관계를 맺고있는게 아니냐라는 안좋은 소문까지도 떠돌았었다.[12] 이런 대규모 공연은 예능사를 운영하는 야쿠자조직들이 돈을 빼먹기 매우 좋은 기회다보니, 야쿠자조직들은 이런식으로 유명해외가수를 동원한 공연을 주도하곤했다.[13] 위에서 계속 서술되고있던 1984년~89년까지의 야마구치구미와 이치와카이의 항쟁. 이 항쟁으로인해, 29명이 사망하고 70명은 부상을 당했다 [14] 초대 고도카이 카이쵸 / 본래 고도카이의 전신인 히로타구미는 구미쵸인 히로타 타케시와 야마모토 켄이치가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타오카 사후 4대 구미쵸로 야마모토 켄이치를 지지했지만 야마모토 켄이치의 갑작스런 병사후 구미쵸 승계를 두고 타케나카 마사히사와 야마모토 히로시가 대립했을 당시 야마모토 히로시의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츠카사가 히로타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히로타구미는 이치와카이 진영에도 4대야마구치 진영에도 참가하지 않으며 히로타 타케시는 히로타 구미를 해산시켰다. 츠카사는 해산된 히로타구미를 그대로 수습 계승해 고도카이를 만들어 4대 야마구치구미의 직계로 승격했다.[15] 5대 때 와는 달리 조직의 힘을 고도카이에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다.[16] 칸토-홋카이도, 츄부, 북 오사카, 남오사카, 한신, 츄고쿠-시코쿠, 규슈 / 2016년 현재 칸사이, 칸토, 토우 카이, 츄고쿠-시코쿠, 츄부, 규슈 블록으로 재구성해 6개 블록이 되었다.[17] 금융 관련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특히 한국의 IMF 금융위기 시 나고야계 재일교포 자금이 한국 사채시장에 엄청나게 진출하던 때와 시기상 겹친다.[18] 코베야마구치구미 구미쵸 이노우에 쿠니오와 나미카와카이 카이쵸 나미카와 마사히로(박정호)는 쿄다이 사카즈키를 나눈 의형제 관계.[19] 2016년 3월 29일에 있던 코베 야마구치구미의 관동 회합이 박정호가 소유한 도쿄 타이토쿠 있는 나미카와카이 관동 본부 빌딩에서 열리는 등[20] 이케다구미의 구미쵸 이케다 타카시(김효지)는 코베야마구치구미의 샤테이카시라로 이케다구미는 코베야마구치구미 내에서 발언권이 센 조직이다.[21] 야마모토 히데유키(32)가 경찰에 출두 자수했으나 사용 총기가 다른 점 등 정식 기소하기에 증거가 부족한 상태이다.[22]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하는 조직으로 구미쵸 아오야마 치히로는 6대 야마구치구미 서열 5위의 샤테이카시라를 맡고 있다.[23] 본명 김정기. 젊었을 때는 재일교포 관련 정치조직도 결성했지만 곧바로 야쿠자가 되었다. 현 코베야마구치구미의 두목인 이노우에 구니오와는 감옥에서 만나 거의 친자관계에 가까울 정도로 친밀하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임협 야마구치구미를 결성하면서 사실상 갈라진 관계가 되었다.[24] 본래 임협 단체 야마구치구미라는 명칭이었으나 임협 야마구치구미라는 이름으로 바꿨다.[25] 사실 내부 이권 싸움으로 갈라진 거라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우습지만, 일단 코베야마구치구미는 야마구치구미의 개혁을 내세우면서 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26] 애초에 코베야마구치구미의 등장 자체가 총본부와 나고야계 조직 간 이권 다툼 즉 조직 내 회비와 관련된 문제에 원인이 있었는데, 이게 코베야마구치구미내에서도 똑같이 벌어진 것이다.[27] 애초에 총격사건의 대상자인 오다 요시노리는 야마켄구미의 주요 간부였고, 임협 야마구치구미 결성 당시 직설적으로 야마켄구미를 비난하였다.[28] 분열 사건의 원인이 된 시노다 켄이치의 조직이 있는 츄부 지방은 90%가량의 조직이 야마구치구미에 잔류하였지만, 이에 반발한 관서지역은 절반가량의 조직이 코베야마구치구미로 이적했다.[29] 임협 야마구치구미를 이끌고 있는 오다 요시노리는 야심 차게 고베야마구치구미에서 독립한 것 치고는 이렇다 할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 폭력조직의 수장으로서 불필요하게 매스컴에 노출되는 것만 반복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입협 야마구치구미 소속원은 약 400명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곳에 속한 2차 단체만 해도 30곳은 넘다 보니 실질적으로 각 2차 단체는 많아봐야 20~30명 규모의 소규모 조직들이라 수익구조가 매우 취약한 것도 약점이다. 실질적으로 폭대법 이후 큰돈을 굴릴 자본이 없는 소규모 조직들부터 대부분이 말라죽었다는 걸 고려해보면 임협 야마구치구미의 상황은 상당히 안 좋을 수밖에 없다.[30] 미소라 히바리의 후견인이 타오카 카즈오였고, 거기다가 미소라 히바리의 남동생 가토 테츠야도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소라 히바리의 야쿠자 연관설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31] 타오카 카즈오가 시나리오, 감독 선정 등 영화의 제작에 깊게 관여했다. 영화 상영 이후 토에이의 자체적인 관객 조사 만족도에서는 관객의 92%가 타오카 카즈오의 휴먼 드라마에 감동했다는 충공깽스러운 데이터가 나왔다.[32] 현장에는 약 10여명 정도 되는 인원이 있었다.[33] 당시 이타미 주조는 불륜이라던가 SM 클럽 다닌다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의혹에 대해 부정한데다 신작 계획이 잡혀 있어서 자살할 상태가 아니었다는 얘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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