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요시카이
1. 개요
일본 3대 야쿠자 조직 중 하나로 2019년 기준 약 4,500여명의 조직원 수를 거느리는 거대 조직이자, 도쿄에서도 알짜배기에 속하는 미나토구 아카사카를 거점으로하는 조직이다. 활동거점이 일본의 수도, 그중에서도 알짜배기 땅이다보니 수입규모에서 일본 전국 40개현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야마구치구미와 비교해도 동급이거나 좀 낮은 수준일정도로 막강한 자금력을 자랑한다.[1] . 이나가와카이가 가장 전통적인 야쿠자 형태라면 스미요시카이는 가장 현대적인 야쿠자 형태로 알려져있다.
2. 역사
스미요시카이(住吉会, 주길회)은 메이지 시기 스미요시쵸의 주인이라고도 불린 이토 마츠고로가 현재 도쿄의 시바우라 일대[2] 에 형성한 스미요시 일가를 전신으로하는 조직이다. 처음엔 스미요시 일가라는 단일 조직으로 시작된 2대째인 1918년 도쿄 한복판으로 거점을 옮기고 이름을 본격적으로 스미요시카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
항만지역에서 유명 폭력조직들이 나타난 경우가 많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저숙련 고강도 고위험 일용직 노동자가 많이 모인 지역이 폭력 조직의 발생과 발달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비교적 고용이 안정적이고 대우가 좋은 고숙련 노동자[3] 들은 굳이 폭력조직과 같은 위험한 일에 가담할 매력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전문 기술을 가진 이상 고용시장에서도 어느 정도 좋은 대우를 받기 때문에 굳이 폭력조직까지 결성하여 자신들의 이권을 지킬 이유도 없다. 고용시장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고 싶다면 굳이 범죄에 손대는 폭력조직보다 조합을 결성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리고 저숙련 노동자 중에서도 저임금 저강도 노동자가 많은 경우 임금 수준도 낮아 폭력조직등을 성장시킬만한 잉여 자본을 축적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일이 힘들고 위험하지만 그만큼 보수도 좋은 일자리가 많은 지역에서는 높은 보수를 기대하고 찾아온 뜨내기 노동자들도 많아지고, 이에 따라 경쟁도 치열해질 뿐 아니라, 힘들고 위험한 일을 하는 노동자들은 그만큼 거칠어지기도 쉽다. 이런 거친 사람들 틈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고용주측은 노동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조직을 결성할 필요성이 커지는 것. 많은 폭력조직들이 이런 집단으로부터 발전해왔다. 이 점에서 항만지역의 경우, 기계화 이전까지 배에 짐을 싣고 내리는 일은 몹시 힘들고 위험하지만 숙련된 기술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기에[4] 이런 조직이 자연스럽게 결성될만한 상황이었던 것.
사실상 이때까지만해도 그저그런 지역군 소조직으로 존재했던 스미요시카이가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하게되는 기반을 닦은건 1958년 스미요시카이의 3대 회장 아베 시게사쿠이다. 이전까지 지역 단일 조직의 오야붕에 그쳤던 아베 시게사쿠는 야마구치구미의 세력 확장에 관심을 가지게되면서 야마구치 구미처럼 관동의 28개 야쿠자조직의 연합을 시도했고 이를 미나토카이라고 이름짓고 그 자리에 나름 명성이 있던 헤이타로 일가의 두목인 아오타 도미타로를 형식상의 회장으로 앉혀놓는다.
이렇게 형식상의 회장자리로 유지되던 미나토카이는 62년 스미요시카이의 4대째 두목인 세키가미 요시미츠에의해 통째로 흡수되고 그 이름을 아예 스미요시카이로 바꾸게된다. 이렇게 급격한 성장을 거듭한 스미요시카이는 64년에는 아예 관동권 조직들의 모임인 관동회의 이사장자리에 세키가미 요시미츠가 취임하면서 정점을 달리게되는데 이 시기 스미요시카이의 영향범위는 비록 야마구치구미에비해 뒤지지만 수도를 거점으로 하는 만큼 수익규모는 더욱 컸다고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렇게 커져버린 조직은 결국 경찰의 대대적인 야쿠자 수사인 정상작전으로 인해 형식상으로 65년에 해산하고 67년에 5대째 회장인 호리 마사오가 해산한 조직을 모아 스미요시 연합을 결성함으로써 다시 시작된다. 이렇게 결성된 스미요시 연합은 상당한 폭력성을 자랑했는데 그러나 결국 이러한 폭력성으로 인해 82년 산하조직인 이케다회가 항쟁도중 경찰관을 사살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케다회를 절연시켜버리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절연된 이케다회는 큐슈의 도진카이에 의탁하게되는데[5] 도진카이는 이를 도쿄진출의 기회로보고 산하 조직원들을 도쿄에 대규모로 파견, 동시다발적인 공격을 개시한다. 결국 이 항쟁은 도진카이와 스미요시카이가 화해를 하는것으로 끝을 맺게되나 이 과정에서 스미요시연합은 도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잃고 관서계 조직들이 도쿄로 진출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후 스미요시연합은 91년 다시 이름을 스미요시카이로 바꾸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1년 6대 회장 니시구치 시게오가 취임하였고 1998년에 7대 회장 후쿠다 하레아키가 취임하였다. 2014년 8대 회장 세키 이사오가 취임하였다.
스미요시카이는 일본 혼슈내에서도 유일하게 가장 최근까지도 야마구치구미와의 연을 거부하고 독자노선을 걸을정도로[6] 야마구치구미와 사이가 안좋았다. 실제로 야마구치 구미와는 엄청난 앙숙관계이며 이나가와회와 함께 야마구치구미의 관동진출의 가장 큰 장벽이었다.
스미요시카이의 가장 큰 특징은 야마구치구미가 느슨한 연합형태지만 한편으로는 야마구치구미의 회장이 정점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인것과 달리 회장은 명목상의 직함에 가깝고 실제 권력은 최상위 조직의 두목들이 나눠서 돌려먹는 구조라는 점에 있다. 실제로 이러한 스미요시카이의 현대적인 조직 특성은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상납금의 규모가 작고 연합에 속하는 각 조직의 자치권이 상당히 폭넓에 보장되는 부분으로 이어지게되며 한편으로는 이케다회의 사건에서 나타난것처럼 파문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부분이 상당히 잦은 편으로 이어지기도하다.
3. 역대 회장
- 초대 이토 마츠고로
- 2대 쿠라모토 나오키치
- 3대 아베 시게사쿠
- 4대 세키카미 요시미츠
- 5대 호리 마사오
- 6대 니시구치 시게오
- 7대 후쿠다 하레아키
- 8대 세키 이사오
4. 기타
- 1990년대 버블 붕괴 전의 초호황기의 일본 신주쿠에서는 돈을 벌기위해 일본에서 일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다. 특히 한국인이 많았는데, 그 중 한 유학생의 말을 빌리자면, ‘술집 오픈 준비 할 즈음, 그러니까 한 5시 쯤이면 보호비 명목으로 돈 뜯어 내려는 스미요시카이 조직원이 온다. 팔에 일수 가방을 낀 빡빡이가 계단에서 종업원한테 내려오라고 휘바람을 분다. 내려가면 왠 장미 한 송이를 준다. 아무것도 없이 돈만 받고 가기는 뭐하니까 그 장미를 돈 주고 사라는 것이다. 그러면 주점이나 식당 주인은 10000엔정도 내고 장미를 사야한다.[7]
- 2001년에 지바현 카시와시에서 스미요시계 하부조직이 한국인 유학생을 라이벌 조직원으로 착각하고 오인해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한국에도 화제가 되었으며 실행범들은 체포되어 사살범은 무기징역, 나머지 조직원들은 징역 10~20년 정도를 받았다. 이후 유족은 스미요시카이에 민사소송을 제소하여 최종적으로 합의가 되어 7천만엔 정도를 배상 받았다고 한다.기사
[1] 실제 과거 스미요시카이의 보스였던 니시구치 시에고의 은닉자산+현금자산+실물자산을 총 합산한 개인 자산이 10억달러는 넘었을 거라는 예측도 있었다. 시노다 켄이치도 못 넘길 금액이다.[2] 도쿄와 요코하마 사이에 있는 항만지역이다. 일본의 3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 스미요시카이, 이나가와카이 모두 항만지역을 기점으로 발전한 조직들인데, 사실 세계적으로봐도 대규모 유명 폭력조직들의 상당수는 무역에의해 수많은 이권이 오가는 항만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해왔다.[3] 예를 들어 공장지대의 숙련공이나 기술자[4] 수십 킬로그램 이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한 사람이 겨우 걸어다닐만한 판자다리를 건너는 일이 대표적.[5] 도진카이는 일본내 야쿠자 조직들 중에서도 가장 폭력적인 항쟁을 많이 일으킨것으로 유명한 무투파 조직이다. 실제로 야마구치 구미의 큐슈진입때도 수많은 총격사건으로 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낸것으로도 유명하다.[6] 2011년에 와서야 정식으로 관계를 재정립했다.[7] 이러한 갈취방식은 오늘날에와서는 더욱 추적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진화하고있는데, 예를들어 최근의 한 조직은 라인스티커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가게주들에게 강매하는 방식으로했다가 걸리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