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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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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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시절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전 kt wiz의 투수코치이다. 현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부산공고 시절 고2 때 처음 투수로 전향해 마운드에 올라 193cm의 큰 키에 145km/h의 직구를 뿌리면서 관심을 모았던 선수였고, 롯데가 1998년 고졸우선지명을 한 후, 계약금 1억원을 제시하면서 잡으려고 했던 투수였다.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롯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고민 끝에 이승학은 단국대 진학을 선택했고, 여기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대학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부터 계약금 115만 달러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이너리그 6시즌 동안은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다소 불운했다. 2000년대 초반 필라델피아는 꼴찌를 달리던 약체 팀의 대명사였고, 팜 시스템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이승학 본인의 회고로는 마이너 베테랑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리면서 더블A에서 활약해도 트리플에서 밀리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물론 마이너에서 이승학의 성적을 보면 준수한 편이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기는 했다. 압도적인 삼진율도 아니었고, 핀포인트 제구력도 아니었던 이승학은 결정적으로 허리디스크까지 발생하면서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했다.
2007년에 귀국을 결심한 이승학은 다른 선수라면 군에 있으면서 해외파 복귀 제한 기간인 2년을 충족시킬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허리디스크로 인해 이미 군 면제 판정을 받았던 터라 이대로라면 2년을 그냥 쉬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스포츠2.0과의 인터뷰에서 이것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마침 2007년 4월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가 열리면서 이승학은 극적으로 공백 없이 복귀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복귀 드래프트 대상자 중 전에 고졸우선지명을 했던 선수가 2명 있어서 선택권을 먼저 가졌던 롯데 자이언츠는 이승학과 송승준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당장 실전에서 쓸 수 있지만 허리디스크로 인해 발전 가능성에는 한계가 있던 이승학과, 군 문제가 불투명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더 높았던 송승준 중에서 롯데가 송승준을 택하면서 이승학은 두산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송승준이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받으면서 롯데가 이득을 보게 됐다.
두산에서는 선발과 중간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아주 인상적인 활약이라기엔 애매했지만 2007년에 기록한 7승 1패 2.17의 기록은 당시 조금씩 불안감이 있던 두산 투수진에 상당한 보탬이 되는 선수였음은 분명하며[2] 팀의 한국시리즈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이름을 날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허용투수로서인데, 바로 양준혁의 프로 최초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을 때 이 안타를 허용한 투수가 이승학이었다. 2008년까지 팀 투수진에서 보탬이 되었으나, 2009년 고질병인 허리 부상이 재발하면서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하며 2009년 시즌 후 두산에서 방출당해 프로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한때 kt wiz 입단설도 돌았지만, 결국 프로 복귀는 없었다.
2014년을 끝으로 상무의 투수코치였던 최경훈이 LG 트윈스로 옮기게 되자, 상무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5 시즌 종료 후 kt wiz의 빅또리(잔류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2016년 시즌 종료 후 재계약하지 않게 되면서 kt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모교인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이승학과 송승준 중 누구를 지명할지 고민했던 때, 롯데 자이언츠 이상구 단장이 고민 끝에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는 이승학을 뽑으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수뇌부들의 상의 결과 '점쟁이 말만 듣고 선수 뽑는건 말도 안 된다'며 송승준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 둘의 운명이 이렇게 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필라델피아 필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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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베어스 시절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야구 선수, 전 kt wiz의 투수코치이다. 현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 선수 경력
부산공고 시절 고2 때 처음 투수로 전향해 마운드에 올라 193cm의 큰 키에 145km/h의 직구를 뿌리면서 관심을 모았던 선수였고, 롯데가 1998년 고졸우선지명을 한 후, 계약금 1억원을 제시하면서 잡으려고 했던 투수였다.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롯데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지만 고민 끝에 이승학은 단국대 진학을 선택했고, 여기서 기량이 일취월장하면서 대학 리그 최고 투수 중 한 명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1년 필라델피아 필리스로부터 계약금 115만 달러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이너리그 6시즌 동안은 괜찮은 성적이었지만, 다소 불운했다. 2000년대 초반 필라델피아는 꼴찌를 달리던 약체 팀의 대명사였고, 팜 시스템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이승학 본인의 회고로는 마이너 베테랑들이 자주 들락날락거리면서 더블A에서 활약해도 트리플에서 밀리는 일도 잦았다고 한다. 물론 마이너에서 이승학의 성적을 보면 준수한 편이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없기는 했다. 압도적인 삼진율도 아니었고, 핀포인트 제구력도 아니었던 이승학은 결정적으로 허리디스크까지 발생하면서 메이저리그 승격에 실패했다.
2007년에 귀국을 결심한 이승학은 다른 선수라면 군에 있으면서 해외파 복귀 제한 기간인 2년을 충족시킬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허리디스크로 인해 이미 군 면제 판정을 받았던 터라 이대로라면 2년을 그냥 쉬어야 할 상황이었다. 당시 스포츠2.0과의 인터뷰에서 이것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마침 2007년 4월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가 열리면서 이승학은 극적으로 공백 없이 복귀할 기회를 잡게 되었다. 복귀 드래프트 대상자 중 전에 고졸우선지명을 했던 선수가 2명 있어서 선택권을 먼저 가졌던 롯데 자이언츠는 이승학과 송승준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다. 당장 실전에서 쓸 수 있지만 허리디스크로 인해 발전 가능성에는 한계가 있던 이승학과, 군 문제가 불투명하지만 발전 가능성은 더 높았던 송승준 중에서 롯데가 송승준을 택하면서 이승학은 두산의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송승준이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로 병역 특례를 받으면서 롯데가 이득을 보게 됐다.
두산에서는 선발과 중간을 오가면서 활약했다. 아주 인상적인 활약이라기엔 애매했지만 2007년에 기록한 7승 1패 2.17의 기록은 당시 조금씩 불안감이 있던 두산 투수진에 상당한 보탬이 되는 선수였음은 분명하며[2] 팀의 한국시리즈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가장 이름을 날린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허용투수로서인데, 바로 양준혁의 프로 최초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을 때 이 안타를 허용한 투수가 이승학이었다. 2008년까지 팀 투수진에서 보탬이 되었으나, 2009년 고질병인 허리 부상이 재발하면서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못하며 2009년 시즌 후 두산에서 방출당해 프로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한때 kt wiz 입단설도 돌았지만, 결국 프로 복귀는 없었다.
3. 지도자 경력
2014년을 끝으로 상무의 투수코치였던 최경훈이 LG 트윈스로 옮기게 되자, 상무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2015 시즌 종료 후 kt wiz의 빅또리(잔류군) 투수코치로 이동했다.
2016년 시즌 종료 후 재계약하지 않게 되면서 kt 유니폼을 벗었다. 이후 모교인 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다.
4. 여담
2007년 해외파 특별 드래프트 당시 롯데 자이언츠에서 이승학과 송승준 중 누구를 지명할지 고민했던 때, 롯데 자이언츠 이상구 단장이 고민 끝에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는 이승학을 뽑으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수뇌부들의 상의 결과 '점쟁이 말만 듣고 선수 뽑는건 말도 안 된다'며 송승준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고, 그 둘의 운명이 이렇게 갈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
[1] 입단을 거부하고 단국대학교 진학.[2] 선발진은 외국인 원투펀치 다니엘 리오스-맷 랜들의 원투펀치를 제외하면 불안감이 많았고, 불펜진 역시 클로저 정재훈과 신인왕 금지어 이외에는 그다지 좋지 못해 금지어가 고졸 신인 첫해부터 불펜으로 100이닝을 소화하는 기록적인 혹사를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