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공업고등학교 야구부
1. 연혁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소재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위치한 야구부.
부산 야구의 최약체팀이라고 정의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경력이 다른 부산지역 4개 팀에 비해 현저하게 뒤처진다. 부산고, 경남고는 말할 것도 없고, 부경고나 개성고도 부산공고 야구부에 비하면 경력이 더 좋고, 프로진출 선수도 더 많다.
1924년에 생겼다고는 하는데, 그 뒤의 경력 중에 볼만한 사항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기억할만한 것은 1963년 청룡기 우승으로 훗날 투수 조련사이자 롯데의 감독으로 이름을 알리는 김명성이 에이스 역할을 하고, OB 베어스의 감독이었던 이재우가 유격수를 맡아 메이저 우승에 성공하는데, 이게 2000년대 접어들고서도 유일한 메이저대회 우승이다.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게 우승 다음해인 1964년 말에 전격적으로 팀이 사라졌다.
그 뒤 1981년 7월에 다시 팀이 재건되어 전국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자리를 잡은 4개 팀[3] 의 위세를 넘기에는 역부족이라 부산 지역 예선에서 번번히 탈락하며 봉황대기 참가에만 만족해야 했다.[4] 자연히 우수한 인재들도 모이지 않아 프로 배출 선수도 현저하게 적은 편이다. 부산공고가 야구부 재창단 후 메이저 대회 4강에 든 것은 딱 두 번으로, 2001년 황금사자기에서 좌완투수 이명우[5] 와 이 뛰던 시기 4강에 오른 것2001년 기사과 2007년 좌완투수 박용운(동국대학교 진학)의 분전으로 청룡기 4강에 오른 것이 전부다. 2007년 기사(1), 2007년 기사(2)
지역 예선에서 부산고, 경남고 등 전통의 강자들을 넘지 못하는 바람에 양교는 서울 4대 메이저 대회에 주로 출전한 반면, 부산공고는 무등기에 주로 출전하였다.
2. 출신선수[6]
[1] 4대 메이저 + 협회장기[2]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3] 당시 기준으로 부산고, 경남고, 부산상고, 경남상고.[4] 이 당시 부산에는 동래고등학교에도 야구부가 있었지만, 동래고 역시 메이저 전국 대회는 전국 모든 고교 팀이 참가하는 봉황대기에만 참가했을 정도로 부산공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래고 야구부는 박정태, 문동환, 박지철, 이정훈 정도만을 배출한 채 1998년을 마지막으로 해체됐다.[5] 당시 눈물의 역투와 과도한 혹사로 논란이 되었다. 당시 이명우는 이미 2차례의 수술 경력이 있었고, 이 때문에 1년 유급해야 했다.[6] 나무위키 등록 선수만... 졸업 연도 순.[7] 해태 타이거즈의 지명을 받았으나, 한대화, 허문회 ↔ 김상훈, 이병훈 2:2 트레이드가 이뤄지는 바람에 데뷔는 LG 유니폼을 입었다.[8] 박재근(2013년 삼성 3라운드 지명. 경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1년만에 임의탈퇴 공시.) 이후 7년만의 부산공고 졸업 후 프로 직행자.